스바냐 2:4-7 / 칼과 잔
칼과 잔
이근호
2023년 3월 22일
본문 : 스바냐 2:4-7
(2:4)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2:5)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2:6)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2:7)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창세기 15:18-20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13:1-2에서, 여호수아의 아직 살아생전에 블레셋 땅은 마저 다 차지하고 못하고 남아 있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온 지방과 그술 사람의 전경”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남아 있던 블레셋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 역사 내내 몹시 시달리고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 블레셋 땅 전부가 이스라엘에게 다 복속된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블레셋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다른 주변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전부가 영구히 이스라엘에게 예속되지 못하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은 자신의 나라에게 ‘남은 있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만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최종 천국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종족 중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다 정복되지 않고 남겨진 이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합니다.
그런 조짐이 이스라엘 역사 내내 있어왔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진심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라는 겁니다. 겉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섬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심 이방민족에게 부러운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종족이 군사력이나 국력에 있어 이스라엘보다 더 세다는 겁니다.
이방민족이 믿는 우상만 이스라엘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신을 섬긴다’는 것은 모든 집단의 문화와 취향과 삶의 방식이 자신들이 믿는 신의 내용으로 집대성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들 삶이 부럽고 흠모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민족의 삶을 지탱해주는 삶의 방식은 어떤 식입니까?
그것은 ‘칼’을 의지하며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실은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내린 증거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40) ‘칼을 믿는다’는 말은 그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과 행동과 자세가 ‘결코 나는 나를 잃을 마음이 없다’를 반영하는 모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런 이방민족들을 닮아가면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지탱하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칼을 의지하면서 자기나라를 지탱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곧 하나님의 저주의 증거라는 점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부터 먼저 망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B.C 586년에 망하는데, 곧장 블레셋 나라도 망합니다. 이렇게 되면 약속의 땅 전체는 마치 불탄 지역같습니다.
다 황량해졌습니다. 블레셋 나라와 이스라엘이 다같이 망해도 차이는 있습니다. 블레셋 나라에서는 더는 ‘남은 블레셋’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 민족은 ‘남은 유대 민족’이 바벨론 내부에 발생됩니다. 마치 삼킨 자 내부에 삼킴은 당한 자가 들어가서 삼킨 자를 종국에는 도로 삼켜버리는 현상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안 망하게 하시는 것으로 천국백성을 만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점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이 나타나있습니다. 마태복음 10:5에서,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여기서 구원받는 자의 특징이 규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잃어버릴 재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타인들에게 자신을 잃어버리게는 할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이 자신으로부터는 잃어버릴 방법이 없습니다. 몸아 아픈 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생존에 대한 집착은 더욱 더 강렬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약 때, 우상을 섬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하는 삶이 훨씬 자연스럽고 친근하고 부담이 적게 느껴지는 겁니다. 잘 살고 보자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칼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11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시절이 ‘칼의 시대’였다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추진하는 새세대는 ‘잔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잔’은 쓴 잔입니다. 즉 아버지로부터 자진해서 버림받아 잃어버린 일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잃어버리는 자만이 온전하게 구원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온전한 백성이 되기 위해, 예수님 자신이 마신 그 ‘쓴 잔’을 그들도 마시게 하십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예수님께서 십자가 홀로 죽었을 때, 베드로 및 제자들은 전에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고기잡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전의 생활로 돌아간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이 땅 그 어디에서도 ‘잃어버린 자’가 되고 주님께서 또한 그들을 그렇게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것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원리 터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노아 홍수를 통해서 인류가 처음 시작이 되는데 그 인류의 시작은 노아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일방적인 복과 저주의 자리로 구별되어서 시작이 됩니다. 함, 즉 블레셋의 조상은 ‘저주받은 자리’에서 살아서 영원히 저주받는 자가 됩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복받을 자리에 거주하게 됩니다.
자리가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그 자리는 ‘예수 안’입니다. 여가 나오는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쓴 잔을 마셔 버림받은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가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한 자라야 “겉사람은 비록 후패하지만 속은 날라 새롭다”의 혜택을 입는 사람입니다.(고후 4:16)
이 사실을 요약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에도 ‘예수 밖’에는 서로가 서로의 피를 먹는 ‘좀비들의 아쿠아리움’인 것을 목격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7강-스바냐 2장 4-7절(칼과 잔)2303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2장 4-7절까지입니다.
스바냐 2:4-7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찐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찌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여기 4절에 나오는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그리고 에글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 동쪽, 이스라엘의 동쪽으로 계속 가게 되면 바다에 닿게 되는데 그 바다는 지중해고요, 이스라엘이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게 되면 만나는 그 지역 그곳이 바로 블레셋 지역입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가자(Gaza)지역이라고 불리웁니다.
가자, 그게 가사입니다. 그 지역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이스라엘의 밑에서부터 위로 지중해를 따라서 순서대로 이야기하면 그다음에는 에글론인데, 이것은 블레셋 민족이 약간의 도성을 이루면서 그 당시 도시지요, 성을 이루면서 그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스바냐 선지자 이 책에 블레셋 지역이 왜 나오느냐? 7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비록 블레셋이 거기 살고 있더라도 7절에 보면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찌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 족속도 아니고 유다 족속의 ‘남은 자’ 영어로 ‘remnant’라 하는데 남은 자에게 그것이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유다 족속 전부가 아니고 유다 족속 ‘남은 자’에게 현재 블레셋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벌이시는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원래 여러분의 상식에서 현재 이스라엘 땅 그곳을 가나안땅이라 하는데 가나안 땅은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이 누구 땅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전부 다 이스라엘 땅이 되어야 했어요, 전부다.
그런데 여호수아 13장 3절에 보게 되면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 남방 아위 사람의 땅”이라고 되어 있고, 여호수아 13장 1절에 보면, 그 땅을 차지해야 되는데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서 살아생전에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고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그렇게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2절에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온 지방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단은 현재 있는 가나안땅 전부를 이스라엘에게 줘야 되는데 이게 빵 먹다가 남은 것처럼요, 한쪽은 뜯어먹었는데 한쪽은 남은 구석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여호수아 생전에 분명히 그 땅을 다 차지한다고 되어 있는데 왜 차지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땅이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블레셋의 남은 자가 마저 정복되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되지 못하고 남은 자만 구원된다는 것을 블레셋 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설명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룰루랄라 했지요. 약속의 땅이 준비되어 있고 그 약속의 땅은 전부 너희의 땅이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전부 우리의 땅, 이스라엘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칭해줬던 그 이스라엘은 전부 하나님께 구원받는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이 곡해를 한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원리가 있는데 반드시 잃어버렸다가 되찾아오는 식으로 그렇게 구원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잃어버렸다가 되찾으려면 우선 이스라엘도 일단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되찾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 능력도 방법도 그들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릴 방법도 모르고, 잃어버릴 능력도 모르고, 잃어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나 지옥 갈래.’ 이런 인간 아무도 없어요. 그게 바로 인간과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나 하나님께 버림받을래.’ 그런 생각 가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겁니다. 버림받은 예수님. 구원받고 버림 안 받겠다는 인간들은 몽땅 버림받습니다. 마치 누구와도 같이? 블레셋 사람과도 같이.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겠다고 나설 때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구원받겠다, 하는 말은 쉬운 말로 ‘나는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가 되겠다’는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몸이 굉장히 아프고 진짜 숨도 쉬기 어려울 때 교인들이 와서 “아이고, 힘내세요. 기도해 줄 테니 힘내시고 다시 원기회복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아픈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아이고, 그냥 죽어서 주님 만나는 게 낫지 건강해져서 교회 나가면 뭐합니까?” 그렇게 헛소리를 하고 있지요. 누구한테도 먹히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좀 믿음이 좋아보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아프면 아플수록 목숨에 대한 집착도 같이 비례해서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왜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죽어가면 갈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강렬하냐? 블레셋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은 블레셋이고 블레셋을 유대 나라 옆에 붙여 놓은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본모습을 몰라요.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 옆에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감추어 놓은 진짜 자기의 마음가짐이 블레셋 평소의 마음가짐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이스라엘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반기 역사 가운데 내내 블레셋을 물리치지 못하고 늘 시달려요.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 찾고 ‘하나님, 살려달라.’ 해도 누가 세냐? 블레셋이 더 셉니다. 더 강해요.
그 이유가, “하나님, 도와주세요. 우리는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백날 주장해봤자 이스라엘이 모르고 있는 이스라엘 본성이 이스라엘보다, 소위 신앙 티를 내는 이스라엘의 종교성보다더 셉니다. 하나님 믿는 그것이 사실은 진짜 자기의 본심을 그걸 커버하고 있고 가리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만 왜 저 블레셋이 세냐, 그 말이지요. 왜 번성하느냐 그 말입니다. 사울 왕 때 이스라엘은 내내 블레셋한테 시달리고 결국은 사울 왕 일가가 블레셋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 뒤에 다윗시대가 되어도 예외가 아니에요. 항상 블레셋과 블레셋 같은 류의 나라들, 모압, 아람나라, 암몬, 이런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 옆에서 떠나지 않고 틈만 나면 그들의 강한 기세로서 이스라엘을 못살게 하고 힘들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변나라한테 이렇게 시달리는지, 안 후달릴 때가 없어요. 잠시 휴식했다가 또 후달리고요. 사사기에 보세요. 계속 왜 이렇게 후달립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묻기 위해서 선지자에게 묻고 그렇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린 평가, 정답은 굉장히 간단했어요. “네가 모압이잖아. 네가 암몬이잖아. 네가 아람이잖아. 네가 블레셋이고 네가 아말렉이잖아. 네가 뭐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 믿는다고? 우상을 섬기는데! 그들의 신을 너희들이 선망하고 좋아했다.” 그 말이지요.
옛날 그 당시에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과 그들의 문화가 같이 붙어 있어요. 그들이 믿는 그 신의 내용은 그들의 문화의 집결입니다. 그들 문화의 모든 취향, 삶의 성향이 집결된 것이 그들이 믿는 신으로 구현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바알을 은근히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이스라엘 마음이 거기에 다 혹했고 다 빼앗겼다는 거예요.
자, 방금 이렇게 제가 길게 설명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간단하게 설명하셨어요. 마태복음 26장 52절, 블레셋과 이스라엘 관계, 이스라엘의 그 왜곡되고 거짓된 믿음, 우상섬기는 그것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겁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모든 나라들의 특징, 우상을 섬기는 특징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전부 다 칼을 의지하면서 버티는 민족이었어요. 칼을 의지하고 힘을 의지하고 무력과 군사력을 의지하는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며 그 똑같은 본성이 소위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라고 우기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마음 내부에 잠복되어 있던,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던 잠복되어 있던 근원적인 본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칼을 믿고 의지하고……, 칼과 말과 병거, 그거지요, 군사력, 힘이지요, 힘을 믿으면서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고 자기의 가족과 식구와 종족을 지키려는 이 본성에서 이스라엘은 대동소이 똑같습니다. 껍데기만 그냥 하나님이지요, 여호와지요.
아니 몸에 파스 붙인다고 우리 위 속까지 파스가 들어오지는 않잖아요. 그냥 파스는 외부에 붙이는 거잖아요. 교회 와서 파스 붙이고 문 열고 나가서 파스 떼면 그만이잖아요. ‘왜 우리가정은 돈이 없습니까?’ 이 파스 떼면 똑같아요. 교회 올 때는 파스 붙이고 와서 ‘주여, 믿습니다. 우리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돈보다도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붙어 있는 파스 냄새만 풍풍 풍기고 나가면 네가 돈 많이 버나, 내가 돈 많이 버나,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칼로 서는 자 칼로 망한다, 검으로 서는 자 검으로 망한다.’면 그러면 검, 칼 말고, 힘 말고 우리보고 뭐 어쩌란 말인가? 사람이 힘세고 재력 있고 그러면 잘났다, 이것은 뻔한 건데 그러면 그 뻔한 것 말고 또 뭐가 있느냐?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즉 “베드로야, 칼 꽂아라. 너희들은 칼로 살아서는 안 돼.” 그러면 뭐냐 “잔으로 살아야 돼.” 잔이 뭐냐? 쓴잔이에요, 쓴잔.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칼을 부러워하고 칼을 든 이방민족에 마음이 혹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 은근히 부러워하는 그 칼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혹독하게 지배받게 하는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 칼에 지배받는 역사. 왜? 그 칼을 부러워하니까. 다른 말로 하면 그 바알이라는 우상이 그렇게 좋아보였던 거예요.
그래서 칼을 섬기는 그 민족의 종교와 문화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린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서 그 칼에 의해서 유다민족이, 이스라엘 역사가 소멸되고 소실되도록 만든 역사가 이스라엘 구약 역사입니다. “이거 해봤지? 세상나라 어떻게 사는가, 너희들이 혹독하게 체험했지? 거 봐. 이방나라 망하기를 기도할게 아니라 너부터 망하잖아. 네가 먼저 스타트 끊어.”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타트, 시작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대안이 없는데요? 칼, 재력, 이런 것 말고는 인간이 자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이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칼 믿고 사는 사람에게서 칼 빼앗아버리면 그러면 뭘 로 삽니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는 칼의 시대는 끝났다. 잔의 시대로 가야지. 쓴 잔 마시는 시대로 가야지.” 쓴잔을 마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칼을 의지하는 그 인간이 자신의 열성과, 자신의 종교심과, 자신의 순수함과, 자신의 노력으로 그 칼을 포기하는데 인간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는데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런 실험은 많이 해 왔었어요, 교회의 실험들.
수녀원, 수도원, 요즘은 복음학교, 자기가 자기를 비우는 것, 수도원, 수녀원, 그런 것이 뭐예요? 옛날에는 딱 두 가지였어요. 노동하고 기도하는 것, 딱 그거였어요. 중간에 조금 추가됩니다. “노동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라” 요즘은? ‘노동하고, 묵상하고, 음악, 노래 부르기.’ 4대종교 모여서 합창단 만들어서 음악으로서 마음을 정화시키자.
그러면 자기가 잃어버려 집니까? 자기를 낮추면 자기가 잃어버려져요? 인간은 어떤 수단, 정말 자기를 아무리 학대해도 학대하는 자아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파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전파괴가 되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 없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그걸 더 줄여서 이야기하면 인간에게는 구원은 없다. 인간자체가구원이 없는 존재에요. 구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인간자체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뭐냐? 이스라엘 구원하려고 오셨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10장 5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아예 사람취급 하지 않았어요.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구약을 거쳤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 거기 하나 더 추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립니다. 이스라엘 버리고, 이방인 버리고, 사마리아 버립니다. 사마리아는 옛날 북 이스라엘지역을 사마리아라 합니다. 그것 다 버리면 인간 다 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제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릴 수가 없어요. 자기가치와 자기의미와 자기 의, 인간은 자살해도 그걸 쥐고 자살해요.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인간 본인이 있기 전에 그 전에 처음 자리, 인간이 없던 처음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로막혔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 새로 시작합시다. 어떻게 시작하느냐? 블레셋은 어디서 나왔느냐 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블레셋이란 민족은 어디서 나왔는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외형입니다. 바깥 모습이에요. 블레셋의 남은 자와 이스라엘의 남은 자, 둘 다 동일하게 남은 자가 발생되어야 되고요, 블레셋의 남은 자는 결국 마지막에 소실되지만 오늘 본문에 스바냐에 의하면 유다민족도 소실돼요.
몽땅 소실되는데 스바냐2장 7절에 의하면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찌라.” 유다족속에게는 ‘남은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허용이 되고 생산되지만 블레셋 땅은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남은 자 자체가 없어요. 블레셋이 가자지역에 살았는데 BC586년 이후에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서 블레셋 이 지역을 전부 다 밀어버려요. 그리고 BC586년에 유다족속도 다 밀어버립니다.
왜? 둘 다 마찬가지기 때문에, 둘 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와서 유다 나라도 치고, 현재 이스라엘 동쪽 지중해에 면해 있는 그 블레셋 나라도 다 쳐버리는 거예요. 그것을 유식한 말로 ‘불 탄지역’이라 합니다. 산불이 지나간 지역, 황량하지요. 시커멓지요. 유다나라, 이스라엘이 있던 지역도 시커멓고 블레셋 나라도 시커머니까 블레셋 나라가 없습니다. 영구 없다, 하는 것처럼 아예 없어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없습니다. 까맣게 불타버렸으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블레셋 나라는 없는 것이 블레셋 나라의 마감이에요. 끝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다민족이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 그 유다민족을 새까맣게 태운 바벨론 제국 안에 유다민족이 거기에 침투되어 있어요. 삼키는 자에게 삼킴을 당한 것 같지만 삼켰던 자를 삼킴을 당한 자가 도리어 삼켜버리는 그 현상, 이것은 삼손이 받았던 수수께끼의 내용과 동일하지요.
분명히 사자가 삼손한테 이긴 것 같은데 삼손이 사자를 이겼지요. 사자는 시체 되었습니다. 끝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 부웅~, 하고 벌이 일면서 맛있는 꿀이 나왔습니다. 삼손의 승리의 요소가 삼손이 쳐 죽인 사자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게 어찌 사람의 능력입니까? 교회 나오는 우리의 능력입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도 닦아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신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어요.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 될 수가 없어요. 구원에 미쳤으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고 천국 가고자 하는 이 욕망은 심지어 늙어죽을 때까지도 집착도가 대단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고생고생 했지만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넣어주겠지.’ 이게 무슨 집착입니까? “왜 죽을 때까지 왜 장로님과 권사님은 자기구원을 못 버리십니까?” 물론 돌아가시려고 헉헉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람한테 그렇게 책망하고 닦달 내는 그것도 몹쓸 일이지요. 그래도 눈치는 줘야지요. ‘왜 끝까지 자기부인이 안 됩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제가 요양병원에서 헉헉댈 때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하는데 저는 그런 식으로 안합니다. 오늘 두 시간 뒤에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나 여러분이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합니다. 왜 끝까지 자기구원에 집착을 못 버립니까? 그것마저 소멸해야지요.
‘겉 사람’이라 했어요. 겉 사람이라는 말은 껍데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의 전부가 우리의 겉 사람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내가 아닌 분이 들어온 것을 속사람이라 해요. 이게 신약에 일어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몽땅 다 소멸해야 돼요.
자, 아까 그 이야기 계속 이어가 봅시다. 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함께 멸망되어야 되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내가 있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나한테 막혀서 못 돌아가요. 나한테 막혀서. 그래서 과학에서 말하는 그 진화론 있잖아요. 우주가 137억년 되었다는 것, 그게 그 사람이에요.
자기가 우주를 관찰해서 얻은 그 생각 바깥으로 못 빠져나가요. 내가 보고, 본 것을 합리화시키고, 이성적으로 수학적으로 합리화시켜서 체계를 만든 그 체계가 마치 ‘트루먼 쇼’같아요. 하나의 거대한 내가 만든 세트장 같아요. 인간은 자기가 만든 세트장 바깥으로 못나갑니다.
종교, 수도원, 수녀원, 소용없어요. 노래하는 여자승려,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나와 있어요. 제금 지금 하는 이야기는 블레셋이 어디서부터 생겼느냐 하는 거예요. 창세기 9장 25, 26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고 세 아들은 방주에 동승해서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방주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오니까 주께서 준비한 물이 걷힌 땅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그들만이 유일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가운데 함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자, 블레셋이란 게 뭐냐? 창세기 10장 14절에 보면, 그 블레셋이 함의 자손이에요. 함의 아들이 가나안이었고요, 블레셋은 가나안땅 현재 이스라엘 그 땅의 거주민이었습니다.
함이 거주한다는 것은 그냥 거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렸던 저주의 땅에 거주한 거예요. 저주의 땅에 거주하면 그 끝은 뭐냐? 땅이 없어질 때 같이 소멸되고 없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없어지는 거예요. 스스로는 잃어버릴 수 없는데 ‘그 사람이 어떠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땅에 거주하느냐’에요. ‘영원한 복락의 땅에 거주하느냐, 아니면 그 사람이 저주받을 땅에 거주하느냐?’ 그 사람의 성품, 인격, 아무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무슨 짓을 했는가, 일체 묻지 않습니다.
‘쉿! 입 다물어.’ 태어나기도 전에 네가 저주의 땅에 살거냐, 아니면 하나님이 축복을 준 복된 땅에 살거냐, 자리, 포지션, 포지션이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신약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네가 구원받는데 포지션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네가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네가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
‘예수 안’이라는 ‘성령 안’이라는 난데없는 포지션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 포지션 안에 쑥 들어갑니다. 포지션 안에 들어가 있으면 뭐가 보이느냐?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예수 밖이 보여요. 그러면 예수 밖에는 뭐가 있는가?
좀비들이 서로의 피를 뜯어먹는다고 난리도 아닌 세계지요. “우리 친구 아이가!” 하면서 빨대 꽂고 있는 거예요. 아버님, 아버님, 내 아들, 내 자식, 이 모든 육적인 혈통적인 가족관계, 친구관계, 교우관계, 전부 다 좀비들입니다. 자기의 생존에 목말라 하는, 상대방의 피에 목말라 하는 좀비들이에요.
그게 뭐냐? 아쿠아리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수족관, 거대한 수족관. 예수 안에서 보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거기에서 모든 행동이 다 나와요. 어떻게 나다움이 유지되면서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옛 모습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거예요. 잃어버리면 되거든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해내지 못한 나의 잃어버림을 주께서는 해주시는 겁니다. 네가 내가 마시는 쓴잔을 같이 마시면 돼요.
같이 마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좀비의 아쿠아리움, 수족관에서 빠져나갈 때 주께서 뭘 마셨는가? 칼을 의지했습니까? “칼을 집어넣어라. 내 쓴잔을 마셔라, 내 쓴잔을.” 마태복음 20장 23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네가 내 잔을 마셔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제자였잖아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베드로가 자기 자리 찾아간다고 고기 잡으러 갔었어요. 예수님 돌아가셨으니까 제자들 한 대 여섯 명 데리고 고기 잡으러 갔다고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베드로가 본래의 자기 업으로 갔다고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본래의 자리를 이미 잃어버린 상태에요. 자기 자리는 없습니다. 어부, 고기 잡는 게 옛날 자기 자리였지 언젠가는 떠나야 될 자리, 상실의 자리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가지고 뭐냐? ‘남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남은 자’
블레셋은 그 ‘남은 자’가 없습니다. 좀비의 아쿠아리움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세계는 더는 없습니다. 인간은 무슨 수를 써도 자기를 잃어버릴 수 없어요. 그러면 잃어버리는 방법은 뭐냐? 내가 있기 전에 뭐가 있었는가? 인간이 있기 전에 토대가 있었지요. 원형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저주는 일방적이에요. 노아가 하나님의 계시매체거든요. 중간에서 계시전달자에요. 그래서 노아가 저주하고 노아가 축복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준비된 축복과 준비된 저주가 그것을……, 노아가 무슨 앞일을 알겠어요? 하나님은 아시지요. 노아는 몰라도 인류역사가 노아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노아의 행위 하나 가지고 그걸 구실삼아서 이 땅에 영원히 셈의 족속은 축복, 그리고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저주라고 주께서 일방적인 선언을 하는 그 매듭부분에 노아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노아로 하여금 어떻게 했느냐 하면, 노아로 하여금 술 먹고 벌거벗게 했지요. 술 먹고 벌거벗으니까 거기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인간의 본색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거예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나고 그 다음이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나보다 상대적으로 의롭지 못하고 칠칠맞은 행동을 할 때 그 대비를 통해서 자기가 우쭐댈 수밖에 없는, 좀 어떤 우위에 섰다는 것, 모든 가치에서 더 낫다는 것을 본인이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그걸 쥐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아버지가 술 먹고 자기조절 못해서 하체를 벗고 있는 것을 보고 “올레리꼴레리!” 한 거예요. 그런데 샘과 야벳은 어떻게 했는가? 뭘 이해하느냐 하면, 노아홍수를 이해해요. 노아 홍수라 하는 것은 방주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던 거예요. 노아가 자기 집에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노아집도 마찬가지로 물에 잠겨요.
뭔가 인간은 잃어버려야 돼요. 떠나야 돼요. 베드로가 구원받으려면 베드로 자신이 살았던 그 어부에서 떠나야 돼요. 내가 알던 나에서부터 떠나버려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은 떠나는 방법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객기고 죽어 봐도 떠나지를 못해요.
떠나는 방법은 주님이 알고 있어요. 인간이 못 떠난다는 것, 노아는 생판 방주 속이 자기자리가 되었고 그 방주의 뜻은 뭐냐?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방주 안에 동승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모든 인간은 더럽더라도 정결한 짐승이 있어요. 일곱 쌍의 정결한 짐승, 일곱이라 하는 것은 창조할 때 하나님이 원했던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었던 그 때의 그 바탕을 하나님은 계속 유지하고 끌어가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 일곱 쌍의 희생제물을 잡아서, 물론 한꺼번에 다 잡은 것은 아니고(창 8:20), 그렇게 잡습니다. 우리가 방주의 의미를 알았다는 거예요. ‘아, 우리는 죄인인데 나대신 누가 죽으심으로써 그때부터 이미 은혜를 받았구나.’ 그러면 그 은혜가 뭐냐? 덮어주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이지만 덮어주는 것.
그래서 샘과 야벳이 아버지가 수치를 보이고 있을 때 뒷걸음쳤어요. 그때 뭐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돼요. 자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뒷걸음쳐서 담요를 가지고. 또 이 때 아버지 질식할라, 다 덮지는 말고. ‘정말 인간의 본성은 끝까지 자기를 못 놓는 수치스러운 존재에 불과하구나.’ 내가 보는 그 수치스러움을 하나님도 같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수치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덮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인간은 덮어주는 그 하나님의 덮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잃어버리고 덮어주는 새로운 남은 자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1장 25, 26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이것을 제가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즉 ‘이 죽은 자야. 살려고 하지 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죽음 안에 우리 자신의 존재를 거기다 두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살겠고”를 지키지 마시고 “죽어도 살겠고”가 여러분 내부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87)영화의 장면처럼 우리 안에 호루라기 들어 있으면 시도 때도 없고 큭! 큭! 하면서 호루라기 소리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죽어도 살겠고” 뭘 해도, 뭘 해도, 소고기불고기 하면서도 “죽어도 살겠고” 사이다 마시면서도 “죽어도 살겠고” 누굴 만나도 “죽어도 살겠고”
왜? 죽을 수 없는 내가 주님에 의해서 죽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말씀에 의해서, 주와 함께 말씀대로 주와 함께 죽었다는 이 사실이 내가 할 수 없는 놀라운 횡재를 한 거예요. 놀라운 복을 받은 거예요. 내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게 나의 안에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확정지었다는 이것, 시도 때도 없이 큭! 큭! 대통령 앞에서도 큭! 김정은 앞에서도 큭! “죽어도 살겠고” 툭 쑤시면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잃어버릴 수 없는 나, 주께서 쓴잔을 받게 하셔서 잃어버린 자가 없으면 절대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본래원칙이, 노아약속뿐만 아니고 그 약속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날 이방민족인 블레셋, 정통 블레셋, 힘만 믿고 칼을 믿고 돈만 믿는 우리, 잃어버릴 수 없는 나, 정통 블레셋 우리에게 찾아옴으로써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바로 오늘날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이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더 이상 우리 자신이, 내가 나를 지키려는 그런 이방민족 같은, 그런 우상숭배 같은 행위를 멈추게 하시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말씀이, 주님이 살아 있는 그러한 새 생명으로 사는 새로운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