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21 / 인간관계 / 230321
녹취:홍민희
강남-누가복음 15장 21절 (인간 관계) 2303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5장 11절 32절까지, 흔히 탕자 비유라고 알려진 그 대목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첫 번째 비유는 99마리 양 그리고 잃어버린 양은 두 마리가 아니고 단 하나.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동전은 두 개가 아니고 동전 단 하나 잃어버렸지요. 열 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에요. 둘이 아니고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 양의 특징은 소극적이에요. 본인이 잃어버린 줄도 몰라요. 그 잃어버린 동전도 본인이 잃어버린 동전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첫 번째 양도 양 목자가 산 넘고 물 건너서 찾아온 거에요. 동전도 주인이 여자 주인이 일방적으로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잃어버린 세 가지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두 번째는 하나에요. 하나.
하나인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11절은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둘이기 때문에 둘 중에 누가 잃어버렸는가?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점은 인간이 할 것 같은데 인간이 못 해내는 것은 잃어버린 양도 마찬가지고 동전도 마찬가지고 동전 잃어버렸다는 인식을 못하고 양도 잃어버린 인식 못하듯이 잃어버린 동전이나 양은 찾았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잃어버렸다 얻었다는 것을 알잖아요.
세 번째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에서 탕자 비유, 두 아들이 있는데 여기 잃어버린 자는 누구냐. 바로 아버지. 아버지를 잃어버린 거에요. 아버지를. 탕자 비유에서 탕자 비유가 어려운 것은 관점이 위치가 바뀌어진다는 거에요. 처음 탕자 비유할 때 처음 관점은 뭐냐 하면은 아버지, 장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을 저한테 주소서 이렇게 했지요.
그럼 둘째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유산을 챙길 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까? 죽은 걸로 여깁니까? 아버지 없어요. 아버지 없는 거에요. 아버지를 없애버렸어요. 아버지 없앤 대가에 주어진 것이 아버지 유산이거든요. 이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챙겼으면 아버지 있으나마나. 그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초장부터 아버지가 잃어버렸어요. 누구한테? 인간 입장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린 거에요. 동전은 주인이 찾을 수 있고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찾을 수 있지만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아들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먹이던 자식이 아버지 유산 챙겨서 아버지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사는 것, 인간으로서 할 것 같은데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인간에서는 못해내지요.
아예 처음부터 못했으면 쉬울건데 인간이 충분히 할 것 같았은데 잃어버린 아버지를 살려내지를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해내지를 못해요. 아버지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이 할 것 같으면 아버지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다시 아버지 잘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버린 아버지를 내가 찾아왔다가 이렇게 스무스하게 연결이 되거든요.
그런데 이 탕자비유에서는 내가 회개하니까 아버지 날 용서해달라는 대목이 없습니다. 측은히 여긴 것은 누구냐? 아버지가 측은히 여겼지요. 오히려 아들은 뭐냐? 나는 아들 되기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영원히 아버지를 잃어버림으로서 둘째 아들이 보여주는 바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잃어버린 거에요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도 없어요. 이게 어려운거에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쫓겨났다. 아이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대.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잘못되었습니다. 돌아와서 회개하면 다시 아버지 받아준다. 이게 인간들이 할 것 같아요. 1번에 의하면. 그런데 탕자 비유는 그걸 못하게 만들어요. 인간 쪽에서 다시는 이런 짓 안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다시 낙원을 회복해달라 인간이 회복해달라 요청하는 것은 이거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종교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종교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내가 이 땅에 있다가 나만 손해보겠다. 다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해보자. 이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화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 회개하고 구원받자. 잘못했습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당사자는 누구? 내가 회개의 당사자고.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고 언제든지 돌아오면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 하나님 없어요. 그런 하나님은 인간들이 조작한 엉터리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이 탕자 비유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 같은데 막혀버렸어요. 인간은 아버지를 죽였잖아요. 그걸로 끝이에요.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면 돌아온 탕자가 다시 아들의 자리를 얻는 것, 다시 자리를 얻지 않아요. 새로운 아들이 되지요. 어떻게? 둘째가 맏이를 꿰차버립니다. 그것 때문에 둘을 한 거에요. 꼭 그거 같애. 야곱과 에서 언약 같아요.
에서가 맏이죠. 언젠가 그런 설교했는데 왜 맏이냐? 에서가 왜 맏이냐?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맏이입니다. 왜 먼저 태어났는가? 맏이 되라고 먼저 태어났습니다. 맏이 되라고 먼저 태어났습니다. 이런 설명은 먼저 태어난 자는 맏이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게 육신의 한계예요. 먼저 태어났으니까 맏이라는 거에요.
그럼 성경에서 맏이는 뭐냐? 탕자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어려워요. 두 번 죽어야 해요. 한번 죽으면 안돼요. 두 번 죽어야 맏이가 돼요. 두 번 죽어야. 탕자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마구간에 태어날 때 죄 없는 분이 죄를 가질 때 죄를 가진다는 자체가 이미 죽었다는 거에요. 왜?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질 때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십자가 죽을 때 이미 죽었어요. 두 번 죽어요. 한번 죽어서는 맏아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 누구죠? 여기서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옹립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어요. 누구를? 예수님. 예수님이 누구신데? 두 번 죽으신 분. 두 번 죽으신 분을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의 모든 맏이는 모가지 다 날라갔습니다. 유월절 날.
유월절 그 날 밤에 맏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질이 착하고 온순하고 필요 없어요. 단지 맏이라는 이유 때문에.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노래 나오면 안돼요. 맏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가지 다 날라가는 거에요. 육신의 맏이 없으면 무엇이 연결 안 되느냐 하면은 혈통이 대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혈통은 뭐냐? 맏이 혈통이 아니었었다. 단절된 혈통이었다를 그 다음 혈통부터는 애굽의 모조리 다 애굽 시대 이후는 둘째 출신들이었다. 정통적인 맏이 출신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작살났다. 작살난 거에요.
그럼 왜 인간의 육신의 맏이인데 왜 죽어야 되느냐? 주께서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에요. 어린양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애꿎은 인간들의 맏이가 모가지 다 날라가야 돼요. 다 죽어야 돼요.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이유는요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해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누가 주님의 옹립이 되느냐? 천국과 지옥을 누가 결정내리고 누가 그걸 관리하고 확실하게 굳히게 하셨는가. 그분의 결정, 주님이 주로서의 결정을 옹립하기 위해서 피조세계,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과 이렇게 되어있으니까 마귀까지 천사까지 예수님을 주로 옹립하게 위해서 하나님이 설계한 거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로 되기 위해서 설계한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바로 탕자비유에요. 피로 쓰지 않은 글은 무효입니다. 실효성이 없어요. 피로 적지 아니한 글은. 성경의 모든 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약이든 구약이든 전부 다 거기 다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신학 강의하면서 피가 마지막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죽어 마땅함으로 논리적으로 연결시켜줘야 해요. 안 그러면 도중에 지식으로 빠져버려요. 지식으로 빠져버리면 지식을 아는 자는 모가지 안날라가야 될 대상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돼요. 나 신학에 대해서 이 정도 아는데 설마 나를 버릴까? 그 모가지 가져와야 돼요. 피로 쓰지 않은 글은 무효입니다. 하나님 안 받아줍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양은 안 죽었어요. 동전은 잃어버리기만 했지 동전이 부서지고 깨지고 없습니다. 여기 탕자 비유는 사람이 등장해요.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금부터는 아주 어렵습니다. 지금부터.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은 같은 편입니다.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같은 쪽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여기 등장인물을 보겠습니다. 이 본문을 미리 읽어보라고 했지요. 5분 동안. 첫째, 첫째 아들. 모가지 날라 간 첫째 아들. 두 번째, 마치 주인공처럼 보이는 둘째 아들. 이름도 탕자 비유. 세 번째, 축산업자. 돼지 키우는 사람. 이 사람 말고 한 사람 더 등장합니다. 큰 아들 입에서 나온 거에요. 네 번째, 창녀입니다. 창녀. 모두 같은 편에 있어요.
이 같은 편에 있는 것을 쉬운 말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인간관계라고 합니다. 인간관계. 이 인간관계와 동떨어진 인간관계와 맞은편에 계신 분은 딱 한 분 밖에 없어요. 누구냐 하면은 ‘아버지’. 아버지 빼놓고 전부 다 반대쪽에 가 있습니다. 아버지 반대편에 가 있어요. 탕자 비유는 인간관계에서 4명의 인간관계를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기서는 그들의 인간관계에서 의미를 획득할려면 이쪽의 아버지를 죽여놓고 의미를 획득해야 돼요.
아까 했지요. 아버지의 돈을 가져갔다는 것은 지금 이 인간관계의 대표자가 누굽니까? 제일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카메라가 어딜 쫓아가고 있어요? 둘째 아들이죠. 축산업자는 조연입니다. 창녀도 조연이고요. 아버지, 둘째 아들 하면서 폐쇄적으로 자기들끼리 인간관계를 형성하잖아요. 인간관계가 의미를 추구할려면 반드시 누구를 죽여야 돼요.
아버지를 죽여야 아버지의 상속분을 갖고 있으니까 이미 아버지는 죽은 아버지에요. 이쪽 인간관계에서는. 아버지는 죽었으니까 활동 하나 안 하나 죽었으니까 인간들 앞에서 뭐냐? 아버지의 존재는 무의미해요. 하나님이 있든 없든 의미가 없다니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쓸데없는 철학가나 신학자들의 할 일 없는 질문이고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거기에 몰입되어있어요.
가게 오는데 혹시 하나님 아십니까? 이렇게 묻지 않잖아요. 그거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일하는데 하나님이 왜 끼어요. 일하실 때 하나님 이야기합니까? 안 하잖아요. 하나님이 거기 왜 끼어요. 하나님은 일단은 죽어야 되는데. 우리는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돼요. 나한테 의미 있는 곳에는 절대로 하나님 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주일날만 만나는 거에요. 돌아가셔야 돼요. 무의미한 거에요. 일주일 내내 주일날 빼놓고는 무의미한 거에요. 목사한테도 의미 없는데 뭐. 교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이 인간관계. 이 탕자 비유가 어렵다 어렵다 말씀드린 것은 이 인간관계를 재구성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탕자 비유를 모릅니다. 자꾸 아버지 편 들고 둘째 아들 편 들 생각마세요. 아버지 재끼고 인간과 인간관계가 어떻게 됐느냐를 알아야 우리는 지금 어떤 인간관계에서 의미를 찾고 어떤 나만의 가치를 획득할라고 어떤 식으로 남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걸 우리가 분명히 구성을 해야 되고 구축을 해야 돼요. 적극적이니까. 잃어버린 양은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동전은 사물인데 테이블 밑에 있는데 무슨 적극적이겠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것은 탕자는 인간은 적극적 자기 의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도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내 거의 말씀 안하시고 끝에 말씀하시고 내내 조용했던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아버지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하나님 죽여야 자기 의미가 획득되니까.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를 알겠지요.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없어요. 둘째 아들이 노골적이고 첫째 아들은 더 못됐어. 같이 있었는데 같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아버지 생각하고 첫째 아들 생각하고 달라도 너무 달라요.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큰 아들이 지적받습니다. 너 큰아들 맞냐? 이 말이에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인간관계,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죽어주시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없어야 속이 편해. 아버지 죽여놨으니까. 아버지를 죽일 때 나는 뭐가 되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죽일 때 또는 이 탕자 비유에서는 적극적으로 죽이지만 왜냐하면 아버지 죽었다 치고 돈 달라고 했으니까. 죽었다 치고 돈 주세요 이렇게 했으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죽었다 치고. 우리는 차마 내손으로 죽였다 하면 이건 너무 오바니까 이 정도. 하나님 없다고 치고 죽었다 치고 그렇게 할 때 인간관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몇 가지 문장을 통해서 우리가 한번 파악해봅시다. 인간관계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해볼께요. 하나님을 죽일 때 나는 비로소 순수 ‘나’가 돼요. 선악과 따먹을 때 순수 ‘나’. 우린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잖아요. 육신이. 탕자도 마찬가지고. 우리 육신이 따먹고 난 뒤잖아요. 그런 나를 내가 만나고 싶은 거에요. 그럼 우리는 또다시 내가 벌리는 내 사업체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선악과 따먹는 행동을 또다시 하면 되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 없다고 치고,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 먹지 마라는 말 그런 말 아예 안 들었다 치고 살아가는 거에요.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정말 나다운 나, 나답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버린 그 모습의 나다운 나를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거에요. 이게 뭐냐? 자아 정립이죠. 순수한 나. 그런데 순수한 나인데 저는 이것을 뭐냐. 저는 ‘순수한 나들’이라고 하겠어요. 보통에서는 ‘나들’이라는 말은 없어요. ‘우리’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라고 하면 순수한 나 플러스 나 같은 수 만명의 75억 명의 나 같은 나들. 시진핑도 있고 푸틴도 있어요. 김정은도 있고 있어요. 그걸 묘사하기 위해서 우리보다도 ‘나들’이라고 제가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꼭 나같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와 ‘나들’의 부딪힘과 만남. 만남과 이별들. 그게 무슨 관계? 인간관계. 아주 말 참 좋지요. 인간관계. 인간관계 굉장히 친근하잖아요. 그런데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몇 가지 문장을 통해서 인간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문장은 “뒤탈 없이 확실히 처치하라.” 살벌합니다. 살벌. 꼭 칼 들고 설치는 게 아닙니다. 은행에서 통장개설하든지 뭐든지 간에 이런 게 있어요.
두 번째 “나는 절대 너랑 못 헤어져.” 살벌합니다. 세 번째, “네가 누렸던 행복 내가 갈기갈기 다 찢어주마.” 네 번째, “너 나빠. 왜 내가 싫은데?” 여기 너, 나에다가 여러분 자녀 집어넣고 다 해보세요. 아내, 남편 다 집어넣어 보세요. 부모 집어넣고. 다섯 번째, “왜 나만 혼자인가.” 여섯 번째, “나도 피해자야. 나도 억울해.” 이 정도로 할게요.
한번 보세요. 인간관계가 어떤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거는 꼭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내부에 잠복되어있는 거에요. 이 문장들이. “뒤탈 없도록 확실히 처치하라.” 살벌하지요. “나는 절대로 너와 못 헤어져.” “네가 누렸던 행복 내가 갈기갈기 다 찢어주마.” “너 나빠. 왜 내가 싫은데?”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좋아하면 네가 같이 호응을 해주는 것이 우리가 가족이고 우리가 한 식구지. 식구라고 하는 것은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식구지.
아버지가 좋다는데 너는 왜 싫어. 아버지가 좋아서 같이 놀이동산 가지고 하는데 너는 왜 빠지나? 그런 이야기겠죠. 왜 나는 혼자인가? 저팔계.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 이런 거죠. 여섯 번째, “나도 피해자야 나도 억울해.” 자, 이런 대사를 어디서 뽑아왔느냐 하면은 ‘조작된 낙원’이라는 그 드라마가 있어요. 거기서 나온 대사를 빨리 적었던 거에요. 거기 나온 대사를.
이게 인간관계에요. 이게. 인간관계니까 오늘 탕자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등장하는 인물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이쪽 같은 편에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축산업자, 세 번째는 창녀죠. 둘째 아들이 창녀하고 돈을 다 날렸으니까 창녀 나오지요. 그러면 입장을 둘째 아들하지 말고 여러분들의 시선은 어디로 가느냐? 본인을 창녀로 보고 축산업자로 보는 거에요. 자, 내가 만약에 축산업자라고 하면 이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뭐 반대편에 있어요?
이쪽 편에 누가 홀로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몇 번 죽느냐? 두 번 죽지요. 그것은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돈이 뭐냐 하면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나 나올 돈을 탕자가 가졌다는 말은 뭐냐? 나한테는 누가 이미 고인이다? 아버지가 이미 고인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순수한 나. 진짜 ‘나’는 ‘아버지하고 살 마음이 없는 나’가 진짜 나에요. 아버지가 자꾸 같이 있으니까 순수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본능을 절제할 수 없다? 아버지를 죽이는 그 욕구를 우리는 절제할 수 없어요.
어떤 핑계든 아버지를 죽여야 본래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그 모습이 악마가 뒤집어씌운 나에게 가장 친근한 정말 나 다운 모습이에요. 아버지 없는 모습이. 그게 탕자 비유에 초반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순수한 나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럼 그 순수한 나가 어딜 가느냐? 내가 아버지와 살던 그 세계가 지긋지긋해. 그럼 먼 나라 가지요. 먼 나라. 여기 나오지요. 먼 나라. 먼 나라는 누가 없다? 먼 나라는 누가 없고 누가 있습니까?
먼 나라에 가면 아버지는 없는데 아버지를 버린 나 같은 나들. 나의 복수요. 우리라는 표현을 안 하겠어요. 나 같은 나들만 거기에 다 몰려있지요. 그럼 나 같은 나니까 우리는 자꾸 탕자 둘째 아들을 나로 보지 말고 둘째 아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 중에서 여기 탕자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이 네 명인데 그 먼 나라에 간 사람은 누굽니까? 둘째 아들 갔고 그 다음에 축산업자 갔고 창녀 있지요.
그러면 여러분 축산업자라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자신이 축산업자다. 그 축산업자는 목적이 뭐냐? 하나님은 빠이빠이 했어요. 이쪽 하나님 없는 반대편이니까 빠이빠이 했고 축산업자의 목적은 뭡니까? 돼지 키워서 이윤을 남기는 거잖아요. 이게 나쁩니까?이게 나빠요? 헤어질 결심에 나온 대사같애. “내가 그렇게 나빠요?” 돼지 키우는 업자가 돼지 키우는게 나빠요? 축산업자가 순수한 나잖아요. 지금 둘째 아들을 주인공 삼지 말라니까. 그래가지고는 이 탕자 비유가 해결이 안돼요.
축산업자가 돼지 키우는 게 그게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순수한 축산업자 순수한 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아요. 이거 해가지고 애들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자기 밥 먹고 살고 노후 대책하는데 이게 뭐가 나쁩니까? 그런데 어느 편에 있어요? 하나님을 죽이고 맞은편에서 한 통 속이라는 점에서 나쁘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나쁜 줄을 모르는데 그 나쁜 줄을 모르는 사람 중에 누가 포함되어있다? 둘째 아들 포함되어있고 첫째 아들 포함되어있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와 생각이 달라요. 아버지 생각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중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첫째 아들이에요. 왜? 상대적 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재산 그렇게 탐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었잖아. 그게 바리새인의 의에요. 지금 주님께서 바리새인까지 고려하는 거에요. 왜? 바리새인을 고려해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여야 될 집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대로 예수님은 죽어야 되거든요. 바리새인이 바리새인다워야 예수님이 죽을 수 있어요.
두 번 죽는다는 말은 이 땅에 죄 없는 분이 육신을 가질 때 이미 죽었고. 왜? 육신 자체가 죄를 품어있으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죽었고 십자가에 죽을 때 죽었고. 마구간 태어날 때 이미 죽었고 그 죽은 육체 가지고 인간의 평범한 죽음 말고 특수한 죽음. 말씀을 다 이룬 죽음을 죽기 위해서 두 개의 죽음. 이 두 개의 죽음을 주님께서는 탕자의 비유 안에 있기 때문에 탕자 비유의 거기에 나오는 서사, 이야기 진행 구조는 예수님의 가신 코스를 그 안에 담아놓은 거에요. 이 탕자 비유가. 두 번 죽었기에 나는 주가 된다는 뜻이에요.
지, 계속 축산업자 합시다. 축산업자는 자기 하는 일을 매진하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착실하다 하지요. 착실한데. 원래 돼지 키우면 새벽에 돼지 사료를 주기 때문에 가족들과 같이 놀러를 못가요. 돼지 키우면. 돼지가 발목 잡는 거에요. 어떤 사람은 개 키워도 놀러 못갑니다만. 호텔에 맡기고 가야돼. 돼지 키우면 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다른 집 애들은 아빠하고 놀이동산 가는데 왜 아빠는 왜 나하고 안 놀아주는데?! 그러면 아까 나왔던 문장요. “너 나빠. 내가 왜 싫은데?” 인간관계 문장 여섯 가지 있잖아요. 여섯 가지를 번갈아가면서 계속 섞어서 계속 인간들은 잠복되어 있다가 그걸 툭툭 드디어 참을 수 없을 때는 그게 나오는 겁니다.
또 어떤 여자가 돼지 키우는 집안의 어른 아들과 결혼을 했다. 결혼해서 와가지고 자기 신혼의 단꿈은 어떻고 해가지고 남편하고 유럽여행가자 했는데 유럽여행은 무슨 너도 와서 장화 신어라! 이래 가지고 돼지 키울 때에 그러면 이제 애 안고 몰래 야밤도주하죠. 지금 1,2년은 버틸 수 있어도 평생 이렇게는 못 산다. 나는 당신의 아들하고 연애할 때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때 나오는 준비된 문장이 뭐냐 하면은 “네가 누렸던 행복 내가 갈기갈기 다 찢어주마” 이거 아닙니까. 딱딱 맞다니까.
그런데 가면서 그 며느리가 도망가면서 자기 이름으로 보험금 탈 때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뒤탈 없도록 확실히 처리해라.” 그러면 “시아버지 너무 합니다!” 이러면 “나도 피해자야. 나도 억울해.” 이게 입에 달았어. 우리 일상생활이에요. 이게 무슨 관계라고요? 이게 인간관계에요. 왜? 모두 다 ‘순수한 자기밖에 모르는 나’니까. 하나님 죽인 자가 인간을 배제하는 건 하나님도 죽여버렸는데 뭐. 순수한 나와 가장 친근한 나를 내가 보존하기 위해서는 형제 가족 이런 것은 돌아서게 되어있어요. 이게 축산업자입니다.
축산업자한테 어떤 허망한 총각이 와가지고 취직할려고 하니까 축산업자는 뭐만 계산합니까? 안 그래도 촌에 사람 없는데 잘됐다 해서 취직시켜주고 하는데 “요새 돼지 값 내린 거 알지? 밥은 네가 알아서 나는 숙식제공 못한다. 너 아니어도 많아 싫으면 미얀마 사람도 많고 파키스탄 사람도 많으니까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으니까 싫으면 가든지.” 둘째 아들이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거에요. 그러면 보세요. 순수한 나, 하나님마저 차버리고 진짜 나 다운 나에 대해서 어딜 가느냐? 먼 나라에 갔지요.
그 다음에 그런 ‘나’가 돼지 먹는 걸 뺏어먹어요. 이거 걸리면 안돼. 왜냐하면 네가 살 빠지는 건 괜찮은데 돼지가 살 빠지는 것은 이건 상품 가치가 떨어져 안돼요. 축협에서 안 받아줘요. 납품이 안 된다고요. 상품성이 떨어져요. 그러니까 몰래 먹는 거에요. 이 짓을 못하는 거에요. 돼지보다 더 클라스가 더 낮아요. 그럼 뭡니까? 아버지를 죽인 ‘순수한 나’가 인간들만 어울린 인간관계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내가 죽지 않고서는 내가 살 수 없는 세계가 무슨 세계다? ‘인간관계’.
내가 죽는다는 말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이상은 전부 다 내가 포기하게 되면 돼지보다 더 낮은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되죠. 그리고 거기서 회복 안 됩니다. 왜 회복 안 되는가? 이미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본인으로서 몸부림 맘부림 치고 모든 노력을 다해봤자 기껏 취직한 막다른 취직이 돼지 치는 데잖아요. 돼지 치는 데 맞지요? 그러니까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그걸 세 자로 딜레마라고 해요. ‘딜레마’. 우리말로 번역하면 ‘곤궁’. 쉬운 말로 곤경에 처했다. ‘곤경에 처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데 문제는 이게 영화고 드라마 특정 주인공이 그런 게 아니고 누가? 관찰하는 어떤 자가 아니라 관찰하고 있는 내가 바로 딜레마에 곤경에 빠진 거에요. 아무도 해결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들겠어요. 어떤 대학교수가 있는데 멀쩡해요. 그 대학교수가 어떤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어요. 세 식구입니다. 교수 남편, 아내, 아들 하나. 곧 고등학교 졸업한 아들 하나 있는데.
이 대학교수가 미용사하는 여자하고 눈이 맞아서 바람이 났습니다. 미용사 여자가 자기가 만나는 남자가 대학교수니까 오는 손님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 남편 교수라고 자랑한 거에요. 내연녀면서 내 남편 교수라고 자랑한 거에요. 교수라고 자랑했어요. 이걸 본처가 알았어요. 동네사람은 대학교수가 미용사 남편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남편이 간경화에 걸려서 암인지 하여튼 이거 이식하지 않으면 죽게 돼요.
죽게 되니까 본처가 남편 이름으로 사망보험을 들어가지고 남편이 죽기를 바래요. 사별하기를 바래요. 죽기를 바랍니다. 이 미용사는 본처한테 가가지고 이혼해줘라. 내가 살려줄게. 본처는 그동안 피해보상 “네가 누렸던 행복 갈기갈기 다 찢어주마” 이거에요. 인간관계는 그래요. 죽어서 보험 타야 되서 죽을 때까지 이혼을 안 해줘요. 그럼 그 돈 받으면 뭐하냐. 돈 받아서 아들 유학 보낼라고.
그런데 아들은 때려죽여도 미국 유학가기 싫데요. 유학 안가는 방법은 뭐냐? 아버지한테 간 이식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걸 세 자로 딜레마에요. 그 다섯 명 중에서 똑바로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거기에 조승우 들어가서 변호사 하는 거에요. ‘신성한 이혼’. 5회, 6회. 이게 딜레마가 없을 거 같으면요 자기 선에서 적당히 해결해요. 변호사가 왜 있느냐? 이게 서로 얽혀 있어요. 인간관계가.
그래서 인간관계를 한 자로 뭐냐? 인간관계란 ‘짐’입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 어떤 인간도 똑바른 인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다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죽이고 뭐만 목적입니까? 제발 순수한 나로 살게 해주세요. ‘순수한 나’. 하나님도 필요 없고.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인간도 필요 없고. 내 야망대로 그냥 얽히고설킨 거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버리고 하나님 아버지 죽인 유산 가지고 내 원대로 마음껏 내 행복을 위해서 내 편한 대로 그 내편한 대로 하는 그걸 가지고 그 냇가를 속편한 냇가라고 합니다.
그냥 내 편한 대로 살고 싶어하는데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관계는 나 그 다음에 나들. 다 마찬가지고 본처도 미용사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제발 제발 뒤탈 없도록 확실히 처리해주세요.” “나 절대 당신과 못 헤어져.” “너 나빠” 이런 거. 전부 다 나보고 나쁘데. 다 나쁜데. 이게 얽히고설킨 거에요. 저거 끊으면 나도 죽어요. 그러니까 끊지도 못해요. 끊으면 나도 죽으니까.
미용사 내연녀가 부탁합니다. “제발 이혼해주세요. 남편 살릴 테니 이혼해주세요.” “이혼 죽어도 못한다. 너희들 좋은 일 내가 왜 시키느냐.” 이 남편은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는데 그만 미련 끊고 남편 새 생활하도록 우리끼리 멀리 갈 테니 해달라. “너희들 좋은 일 왜 시키냐! 내가 너희들 좋은 일하는 희생물이냐!” 이렇게 나오죠. 맞잖아요. 나 버리고 너희끼리 잘 사는 꼴을 내가 죽어도 못 본다. “네가 누렸던 행복 갈기갈기 다 찢어주마.” 물론 이 드라마는 아닌데. 신성한 이혼 드라마는 아닌데. 어떡하면 좋아요 이 문제.
그 중에 하나 미용사에 창녀를 집어넣은 거에요. 전부 다 인간관계에요. 그 둘째 어느 집 아들인지 관계없어요. 뭐가 있어요? 돈이 있다니까 돈. 왜? 아버지 죽이고 받은 유산이 어떤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갖고 있는 돈을 수단껏 빼먹어서 그 돈을 누구 돈으로 만든다? 이 남자, 둘째 아들 돈으로 만들지 않고 누구 돈으로 만든다? 창녀 내 돈으로 만드는 거에요. 내 돈으로.
그러면 축산업자는 둘째 아들 팔아서 누구 돈 챙긴다? 자기 돼지 잘 키우면 되잖아요. 왜 잘 키워야 되느냐? 내가 나한테 순수하니까. 내가 나한테 정직한 거에요. 남이 욕을 하든 뭐하든 간에 나는 나한테 정직해요. 그리고 내가 나한테는 아무 죄가 없어요. 내가 나한테는. 내가 만약에 죄가 있다면 내가 이 땅에 더 살고자 하는 죄, 그 죄 말고는 없다는 거에요. 엄마는 어떻게 둘째 아들 그렇게 돈 버리는 걸 다 줍니까 하고 이야기하면 내가 이 어미가 나쁜 것은 없다. 나쁘다면 너희 형제간에 그냥 싸우지 않고 잘 사는 것 내가 그 소원 잘 사는 것 보고 내가 눈감고 싶다. 내가 나쁘다면 그것이 나쁘다. 그게 인간관계 아닙니까. 우리는 돈 있어 보세요. 우리 애들이 돈 갖고 싸워보세요.
바로 이 세계에 누가 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거에요. 내가 살고 있으면서 뭐를 건방지게 뭘 보고 있어요? 탕자비유를 보고 있어요. 우리 언제 하나님 관심 있었어요. 없어요. 남의 이야기예요. 해석 안 됩니다. 순수한 나답게 살겠다는 그 의지와 욕망이 있는 한은 해석불가입니다. 해석할 자격도 안 되고요.
아까 했지요. 피로 쓴 글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피로 쓴 책이에요.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이 글은 해석불가입니다. 인간은 곤궁과 곤경 속에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왜 나 같은 인간이 왜 그리 천지삐까리. 천지삐까리. 중구난방. 천지삐까리에요. 세상에 겁이 나서 못나가요. 회사를 가든 시장을 가든 전부 다 나의 욕심을 똑같이 가진 자들이 똑같이 축산업자, 창녀 똑같은 자들이 집구석에는 큰 아들 있고 나에게 바라는 건 내 돈을 빼먹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돈도 지켜야 되지 나의 의도 지켜야 되지 어떻게 살아요.
10분 쉬고 합시다.
강남-누가복음 15장 21절 (인간 관계) 230321b-이근호 목사
17세기 초 인도제국을 무굴 제국이라고 해요. 무굴이라는 뜻은 몽골의 후손이기 때문에 몽골이라는 말이 무굴이에요. 무굴 제국에 아우랑제브라는 왕이 있는데 왕이 50년간 무굴 제국을 지배하면서 서기로 1600년 초입니다. 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대체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죽으면 어떤 형벌이 나를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게 몇 가지죠? 세 가지죠.
하나의 제국이에요. 인도 얼마나 넓습니까. 무굴 제국을 다스린 왕이 세 가지 모르겠다. 첫째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순수한 나를 느끼면 되지. 그걸 꼭 규정할 필요 없잖아요. 그걸 본능대로 살면 되는 거에요. 성깔대로라고 하지요. 젊은 애들 까불잖아요. 촐랑대잖아요. 나대고. 왜 그러느냐 묻지 말아야 돼요.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사는데 무엇을 하기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고 또 뭘 모르느냐 하면은 죽은 후에 시간의식이죠. 과거, 현재, 미래. 죽은 후에 어떤 형벌이,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안에 갇혀있지요. 어떤 형벌이 나를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이걸 교회 간다고 압니까? 나 자체를 모르는데. 나 자체에다가 덕지덕지 교리, 성경공부 이거 파스 붙이듯이 붙이면 내가 달라집니까?
나는 반드시 알려면 타인이 있어야 돼요. ‘타인’이. 나를 죽음에 넘긴 타인이 나타나야 줘야 돼요. 지금 여기 두 편을 나눴지요. 첫째는 첫째 아들, 그 다음에 둘째 아들, 세 번째 축산업자, 네 번째가 창녀지요. 이게 전부 다 같은 동네에 있어요. 그걸 누가복음에서는 뭐냐? 먼 나라에요. 먼 나라.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둘째 아들이 가는 그 나라가 똑같은 입장에 있는 그들끼리 모여서 먼 나라 사정을 심화시켰다. 더욱 더 분명히 했다. 구체적으로 했다.
이 말은 인간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내가 살던 이 동네 모르겠고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덜 죽었다. 아직은 안 죽었다를 아는 거에요. 그냥 하나님을 죽여놓고 아직 나는 살아있다는 말 자체는 이 인간관계 세계 속에 있는 유언비어입니다. 가짜뉴스에요.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하지요. 관계 끊어진걸.
이미 하나님 없는 자체가 죽은 거에요. 숨 쉬고 사니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면서도 그냥 성질대로 살고 술 먹고 담배피고 놀러가고 할 것 다 하고 있어요. 벚꽃 피었다! 벚꽃 핀 거 보면 삽니까? 벚꽃하고 자기하고 무슨 관계 있다고요. 아무 관계 없어요. 벚꽃은 관찰할 줄 알면서 왜 너 자신은 무굴 제국을 다스린 본인은 왜 관찰할 줄 모르느냐 말이죠. 그것은 새로운 똑같이 닮은 똑같은 모양의 타인은 소용없어요. 그가 나고 내가 나고 그래요.
나, 너가 아닌 우리가 죽였던 하나님이 나의 타인으로 해야 돼요. 내가 몰랐던 남이 찾아와야 돼요. 그분이 해결해요. 이 말은 둘째 아들은 여기 이 먼 나라에서 뿌리 채 뽑혔습니다. 뿌리 채 뽑혔습니다. ‘나’라는 그 자체가 뿌리 채 뽑혔습니다. 나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뭐로 전락했어요? 돼지도 아니에요. 돼지보다 더 낮은 자리에 전락했습니다. 남이 나를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순수한 내가 순수한 나를 지킬려고 애쓰다 보니까 돼지보다 못한 존재가 된 거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하나님의 말씀을 개, 돼지에게 전하지 말란 말이죠. 그들은 그 가치를 모른다. 전도를 어떻게 합니까? 개, 돼지인지 일단 확인해보고 하면 되요. 개, 돼지인지. 가치도 모르는데 더 이상 진도 나갈 이유 없어요. 뿌리 채 뽑혔으니까 결국은 둘째 아들은 의기양양하게 돈 있으니까 잘난 체하다가 창녀한테 걸려가지고 창녀한테 다 뺏겨버리고 차여버렸죠.
영화에는 창녀가 돈 바라지 않고 사랑을 구걸하다가 창녀가 차여요. ‘영자의 전성시대’. 그런 영화. 그리고 신성일 나오는 거 있잖아요. ‘별들의 고향’. 아주 약자 편에 서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순수한 나밖에 없어요. 약자는 없습니다. 약사는 있어도 약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외부적 적개심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자기 자신에 적개심으로 가요. 내부적 적개심.
적개심으로 간다는 말이지 적개심으로 가게 되면 회복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저쨌든 간에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딜레마입니다. 곤경에 빠졌어요. 곤경에 빠졌으면 그럼 하나님께서 살려주겠네. 아니에요. 곤경에 빠졌으면 곤경에 빠진 거에요. 그걸로 끝이지요. 그걸로 끝이에요. 구원받은 둘째 아들은 없습니다. 왜?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을 살린 게 아니에요. 새로운 아들의 자리에 종으로 온 사람을 올렸지요.
둘째 아들이 아들이 아니라는 그 정도로 적개심이 내려간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십자가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면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버림받았어요. 버림받고 난 뒤에는 그 모든 처분권이 아버지한테 가있어요. 아버지께서 그때는 예수님의 영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이였어요. 아버지의 영으로 죽은 예수님을 히브리서에 보면 다시 살려냈다 했어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있지요.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죽은 너희를 예수님처럼 다시 살릴 것이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까지 내용 보면 쭉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뭡니까? 본인이 본인을 교회 다니면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없다? 없어요. 교회 다녀서 아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외부적 적개심. 모든 것은 남 때문에 생겼지 나는 잘못 없다. 이러다가 내가 나쁜 놈이다. 내가 죄인 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죄인 되면 구원받지 않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죄인 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부활의 주님이 찾아와야지요. 찾아오고 안 찾아오고는 얼마나 우리가 자기 자신을 흉한 모습으로 낮은 모습으로 연기를 하느냐 그거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 대목은 성경에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잊었을까 싶어서 찾아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9장 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천국가고 싶어요. 뭐 이렇게 구원해주세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은 아닙니다. 구원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해도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아요. 복음학교가 조져놨어. 안돼요. 수도원 수녀는 안 됩니다.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것보다 더 결정타를 날리는 대목이 나와요.
고린도전서 2장 저 이 대목 보고 놀랐어요. 이 대목 보고. 아 이런 구절 있었구나. 종교 끝났네. 이 한 대목 보고. 2장 9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이거는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귀로도 듣지 못하고” 이거는 우리가 알 수 있지요. 눈에 보이는 것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게 뭐냐? ‘십자가’.
십자가를 생각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미 생각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생각한 십자가가 거짓이라고 쳐들어오는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죠. 하나님이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가 율법으로 죄 많은 것을 우리 힘으로 의롭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건지신다. 그 대상 우리가 생각한 그런 십자가 생각한다면 그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입니다.
뿌리째 뽑혀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뿌리째 뽑을 수 없어요. 뿌리 밑에 뿌리가 있고 뿌리 밑에 뿌리가 있어요. 순수한 나는 절대로 내가 순수한 나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내부적 적대감, 탄식만 할뿐이죠. 그게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 집이 훨씬 낫다. 이게 무슨 꼴이야. 이게 무슨 꼴이야. 아까 인간관계에서 돈 있으니까 인간 대 인간관계 형성되잖아요.
그런데 돼지 수준까지 내려가니까 인간관계가 자동적으로 다 끊어져버렸어요. 돈 없으니까 다 끊어진 거에요. 연세 많은 부모든 돈 끊어지니까 자식들 찾아오던가요? 찾아올 수가 없지요. 찾아오면 용돈 들고 가는 그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자기 부인한테 눈치 보이니까. 또 안가면 이런다고요. 너 우리 집 안 온지 벌써 2년 된 거 아니? 10년 전에 보일러 한번 갈아주고 끝났잖아요. 왜 안 와. 어머니가 그랬잖아요. 자식 다 소용 없다고. 나 어머니 시킨 대로 해서 효자입니다. 자식 다 소용없습니다.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나?!! 엄마가 가르친 게 뭐가 있어. 학교 선생님이 다 가르쳤지. 뭘 가르쳤어. 너도 너 자식 키워봐라 엄마 마음에 못 박아서 되겠느냐. 내 자식이 더 애 먹입니다. 내 자식이 더 애 먹여요 지금. 엄마까지 애 먹이지 마세요. 엄마까지 감당 못하겠습니다. 아까 6개 중에 골라 잡으세요. 자식이 왜 원수냐? 자식이 원수가 아니고 자식이 내 편이라고 여겼던 그 마음가짐이 그 마음이 나한테 원수였던 거에요. 자식을 믿은 게 내가 잘못이에요. 자식을 믿은 게.
어린애가 특징이 뭐냐? 어린애는 작은 게임만 생각해요. 크면 어른 되면 어른게임만 생각해요. 자기 게임 밖으로 못 벗어나요. 애들은 구슬치기 가지고 막 싸우죠. 그 학교 왕따 폭력 보면 싸움 같지도 않은 걸로 싸움해요. 눈꼴 시리다 하지요. 그런데 어른 되면 일본에 갔느냐 안 갔느냐 그걸로 싸워요. 그것도 어린애와 똑같은 거에요. 전부다 하나님 죽이고 예수님 죽이고 벌린 자기 게임이라니까요. 자기의 순수함을 포기 못하는 게임들.
아까 로마서 8장 29절 벌써 맏이는 결정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맏이를 이 맏이는 사람에게 살해당한 맏이에요. 모든 인간이 싫어버린 바 된 맏이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추방된 맏이에요. 이 세상에 탕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버려진 아들을 아버지가 십자가에 자기 아들 버려놓고 그 버려진 아들을 아버지가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냄으로서 그 어떤 누구도 아버지를 안다 하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맏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담 가운데서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자기의 절차, 이 땅에 와서 아버지께 가는 그 절차를 말해주는 거죠. 그 절차 가면서 이 인간세계에 완전 다 들쑤셔놓고 가요. 아버지 없는 그 인간세계, 인간관계 세계에 그 면면을 더 심화시켜 깊이 있게 파내서 다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 비유에 가장 극단의 악마의 자식은 바로 맏이입니다. 왜냐 하면은 맨날 그들은 자기가 아버지와 함께 있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대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 얻은 아들을 맞아줄 때 맏이는 그 잔치에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잔치에. 아버지가 만족하고 기뻐하는 그 잔치에 삐져가지고 쉽게 말해서 아버지 너도 똑같애 이런 거에요. 어떻게 저런 망나니를 아들로 받아 줍니까. 평소에 맏이는 자기가 아버지께 이렇게 삐질 줄 몰랐지요. 맏이 눈에 아버지가 귀히 아끼고 그 가락지, 후계자 아닙니까. 아끼고 아끼는 그 모든 귀한 것.
바리새인들은 원래 자기가 유일한 상속자로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상속자 되지도 못할 자가 상속자를 죽이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나와요. 포도원 비유에 보면 나와요. 자기가 포도원 주인도 아니면서 농부 주제에 “야 아들 왔다. 아들 죽이면 포도원 내 것이다” 라는 비유를 예수님이 왜 하셨습니까? 포도원 비유 21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우리가 뽑을 수 없는 뿌리는 주께서 뽑아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온 겁니다. 나 있잖아요. 어떤 나? 아버지 없이 그것이 가장 나 다운 나. 나한테 가장 끌리는 나. 정말 이게 나야? 하고 우리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그 나. 그게 아까 무슨 나? 순수한 나. 그게 뿌리 채 뽑기 위해서 다른 타인을 보내준 거에요. 나 말고 다른 분.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이 인간세계의 형편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실상을 주께서 보여줍니다. 너 그렇게 살다가는 너 이 땅에서 너는 돼지보다 더 못한 존재가 돼. 이게 주님께서 탕자 비유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에요. 아버지한테 죄를 지었다 해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죄 지은 것은 죄 지은 거고 용서의 몫은 아버지의 일방적 선택이지 죄 지었다고 다 용서하는 그런 자비는 인간이 만든 엉터리 우상인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 실제 하나님은 그런 거 없습니다.
진짜 다 용서한다면 그 하나님은 여호와 증인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증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하나님 너무 사랑이 많아서 지옥을 없애버렸데. 도대체 누구 좋으라는 이야기 인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성경에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증인은 성경을 고쳐가지고 그 예수는 아들이 아니고 천사래요. 천사 중에 대빵이 예수래.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지 아들은 없답니다. 자기 본색이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22절. 나 전두환한테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불교신자니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걸 외쳐야 뭐가 된다? 목사잖아요. 이번 주 인간극장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여자 중인데 목사도 만나고 수녀하고 친구가 되어 있고 목사하고 같이 좋다고 차 몰고 가고.
목사가 뭐라고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한다고?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데 그 여자 중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집에 가는 길은 여러 가지인데 이래가나 저래가나 가긴 마찬가지니까 가면 될 거 아니냐. 왜 그래요? 왜 그런 짓 합니까? ‘순수한 나’가 뿌리 채 뽑히기를 싫은 거에요. 그러면서도 무굴 제국의 왕처럼 아우랑제브. ‘도대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뭐 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죽어서 어떤 형벌 받을지 나는 모르겠다.’ 본인이 인간이 갖고 있는 선악체계를 인간이 자기 뿌리는 뽑아도 선악체계는 못 뽑아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존재가 처음이 아니다. 이걸 어떻게 압니까. 내 존재가 처음이 아닌데. 내가 있음이 나에게서 처음이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느냐? 자기 적개심을 갖고 있는 자는 아버지를 내가 멀쩡하게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못 찾아갑니다. 왜? 아들마저 뿌리 채 뽑혔기 때문에. 순수한 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장애물이 돼요. ‘순수한 나’가 뽑혀야 돼요. 우리는 순수한데 하나님은 그걸 순수하게 안 보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안 봅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죽은 자만 순수해요. 누굽니까? 하나님 여호와 믿는 자들이 죽인 자가 누구에요?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만이 맏아들이 돼요. 맏이 자리에 앉는다고요. 완전히 사형당한 분을 이 세상에 사형당한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사형수들 가운데서 딱 한분에게 성령을 보내가지고 그 분을 만유의 주로 만들어버리니까 그동안 인간세계에서 ‘나’들, 배후에는 악마가 있지만 그 ‘나’들, 각자 내가 최고라고 하는 ‘나’들이 얼마나 그 하나님의 처신에 대해서 인간 자기 순수한 나가 남아있다면 얼마나 욕들을 해대겠습니까. 불공평하다고.
그 불공평함은 월요일 날 대구 강의에서 언급했어요. 교재에 나와요. 인간들이 똑같아요.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살린 하나님은 공평치 못하다. 그 말이 맞지요. 성경을 보세요. 공평할 수 없잖아요. 하나는 좋은 그릇, 하나는 나쁜 그릇 공평 못해요. 인간에게 균등한 기회를 준 적이 없어요.
열심히 해라. 1등은 내가 살려줄게. 이런 거 준 적이 없어요. 열심히 해봤자 그건 뭡니까? 스스로 보기에 순수한 나. 내가 아끼는 나. 아무리 봐도 내가 나한테 잘못한건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살고자 했을 뿐인데 살고자 하는 게 그게 나빠? 나빠? 내가 사는 그게 왜 나빠? 그게 왜 나쁜데? 살아 있어서 더 살겠다는 게 그게 왜 나쁜데? 그게 왜 죄냐 이 말이죠. 이거 묻는 사람 많아요.
이게 자기 적개심 수준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이게 참 그렇게 되기도 힘든데요. 어릴 때 거저 주던 그때 그 시절을 지금 그걸 인정하는 마음이 어른 되서 필요해요. 아 이거 어렵지요. 그때 어릴 때 철없을 때 부모가 그냥 밥 먹여줄 때 이건 내가 밥 얻어먹을 권리가 마치 나한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커왔잖아요.
그런데 그 엄마가 해주는 밥 하나라고 김밥 한 줄이라도 그야말로 거저 주는 것은 그때는 왜 고마운 마음이 없었을까라는 나에 대한 나의 적개심.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못 돌아갑니다.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아버지가 사라짐으로서 나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그런 엮임의 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저주의 대상, 지옥 갈 대상으로 같이 동반해서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립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은 혼자 안 죽어요. 뒤끝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였어? 그렇다면 지옥에나 가라. 자기가 죽음으로서 혼자 안 죽고 몽땅 지옥으로 보내면서 죽잖아요. 지옥 갈 사람한테 천국 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그 선택을 누구한테 맡겼는가? 예수님한테 선택을 맡겨버려요. 그 예수님은 우리의 타자입니다. 이거는 월요일날 했던 거에요. 예수님의 타자지요. 내 선택은 소용없습니다. 예수 잘 믿고 예수 피 믿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타자의 선택이 나를 구원합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예수 안에서 우리가 창세전에 예정되었다’
나의 결정은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결정에 의해서 내가 영원히 천국가게 된 겁니다. 이걸 성령 받은 사람만이 고백합니다. 똑같은 원리로서 아버지의 결정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결정을 기대하면 안돼요. 왜? 아들은 이미 탈락했으니까. 뿌리 채 뽑혔으니까. 아들은 다 뽑혔어요. 이거는 아들도 아니에요. 그냥 돼지보다 못한 그냥 일개 죽어가는 자입니다. 창녀만 좋은 일 생겼어요. 축산업자만 좋은 일 생겼어요.
지금 큰 아들은 둘째 아들 돌아올까 봐 지금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가 죽어라 이 동생아. 뻔뻔스럽게 네가 낯짝이 있어 없어! 선악체계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몰라요. 네가 낯짝이 있으면 우리 집에 안 들어올거야. 이 말은 뭐냐 자기는 낯짝이 있다 없다? 있다는 거에요. 무슨 낯짝? 선악체계 낯짝이 있다는 거에요. 나 봐. 아버지 안 버렸잖아. 나 여호와 찾잖아.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극상의 극단의 악마의 모습이에요. 이게. 왜냐? 악마는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아요. 바로 밑의 대화 상대입니다.
자,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이 아들도 아닌 자를 아들로 맏이 자리를 마련해가지고 아들을 후계자 맏아들이니까 아버지의 반지를 끼우는 후계자가 될 수 있느냐. 그게 율법대로 되어있어요. 구약성경대로 되거든요. 그게 뭐냐? 이겁니다. 룻입니다. 외부인사. 외부인사 등록차원이에요. 등록취지입니다.
이번에 주일학교 룻 했어요. 했는데 룻의 의미가 뭐냐 하면은 외부인사에요. 모압 여인입니다. 일단은 룻기 4장 21절 2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는 누구냐 하면은 보아스가 되고 보아스와 결혼한 룻은 증조할머니가 돼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족보에 의하면 룻이 빠져버리면 누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왕이 없습니다. 다윗 왕이 없어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은 왕이 없어야 될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울 왕을 인간들이 원해서 인간들이 원한 자리에다가 인간 대표 중에서 사울을 거기에 집어넣은 거에요. 먼저 인간들이 왕을 원했어요. 왕 되기 싫어해서 이스라엘의 왕 자리는 뭐냐? 어떤 자리냐?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왕이 됨이 싫다는 대중들의 의견이 합치되서 생긴 자리가 사울 왕이에요.
그러면 사울 왕이 망했다는 말은 뭐냐. 이스라엘 대중들의 뜻이 망했다는 뜻이에요. 사울 왕이 망하는데 거기 같이 환경은 블레셋의 강성입니다. 블레셋 나라의 강성. 강함. 블레셋 나라는 누굴 함몰시킵니까? 이스라엘을 함몰시킵니다. 그러면 소년 때 블레셋을 이겼던 사람이 있었어요. 소년 때. 어른이 아니고 소년 때.
자, 소년 때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자생력은 없었다. 그럼 배후에 누가 있었다? 하나님 있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요. 그럼 뭐냐 하면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스라엘 살리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버렸다 이런 원칙이 나오는 거에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버리고 인간들이 버린 자리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어간다는 뜻에서 누가 나온다? 다윗이 왕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룻기에 보면 다윗은 이것은 누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이방인, 외부인이 없으면 이스라엘 바깥의 인물이 없으면 이거는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없어요. 빈자리는 누가 채우는 거에요? 룻에게서 이방인이 채우는 거에요. ‘이방인’. 이방인이 채우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래쪽에 오셔가지고 보이지 않는 왕으로 오셔가지고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본받아가지고 우리도 이방민족처럼 왕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에 맛 갔구나 맛이 갔어. 맛이 갔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맛이 간 이스라엘이 있어줘야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등장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됩니다. 자리가 마련돼요.
룻 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 1이 아니고 2가 나오는데요. 8절에 보면 며느리가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아까 첫째 강의 우리가 응용해봅시다. 인간들의 모임은 무슨 관계? 인간관계. 인간관계는 순수한 자아들의 모임이죠. 집단이죠. 자기 사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에요. 왜? 난 순수하니까. 다른 사람은 나를 해롭게 하는 죄가 있어도 살고자 하는 나는 일체 죄가 없다는 것을 기본 수학의 공식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이 의지는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인정돼야 되고 인정받아야 되고 존대받아야 되고. 이건 인간 존엄성에 관한 문제이다. 민주주의 원칙 아닙니까. 인권 문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주일학교 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바깥으로 이방민족 가운데서 엘리멜렉 가족이 이사 간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가뭄 들었으니까 나갔다. 왜 나갔느냐? 살기 위해서. 어떤 경우도 살고자하는 자는 죄 있다 할 수 없다. 이런 인간끼리 통하는 공식같은 게 있어요. 인간끼리.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살고자 왔는데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여버렸어요. 여자 세 명 남았습니다. 여자 세 명 남았어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은 옛날에 모든 유산은 남자한테 오지 여자한테는 하나도 안 줍니다. 특별한 경우 빼놓고는 여자한테는 안줘요. 얻을려면 너를 대신할 남자 하나 얻어놓고 그 남자 이름으로 주지요. 약속의 맏이 맏이 맏이로 하나님의 기업의 유산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오미가 그런 이야기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쳤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쳤는데 네가 만약에 나한테 붙어있으면 하나님이 날 친 것에 대해서 아무 죄도 없는 너희들이 이방 여인까지 이방여인이 재수 없는 이 나한테 붙어있으면 두고두고 하나님이 날 쳤으니까 남자 다 죽었으니까 계속 아들 낳아도 아들 죽일 거 뻔하기 때문에 그냥 각자 네 살 길 가시지요 이렇게 된 거에요. 날 쳤다는 것이 1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아주 결정적인 거에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봤는가. 하나님이 친 걸로 봐요.
그러니까 오르바라 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알겠습니다 하고 다시 자기 고향으로 갔지요.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쳤다는데 있어요. 쳤으면 그럼 살아계신 하나님 맞네.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에 쳤으면 그야말로 율법대로 실제로 우리 인간이 행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철저히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면 그럼 그 율법 있잖아요.
내가 만약에 시어머니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은 율법 살리겠다는 활성을 시키겠다는 그 취지에 이방여인이라도 율법에 의하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요. 그 기회를 그 찬스를 찬스도 아냐 챈스. 챈스를 룻이 왜 마다합니까. 때린다는 말은 살아있으니까 때렸을 것이고 그 때리는 기준은 뭐다? 율법이고.
그럼 율법이 살아있을 것이고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그네나 이방인들을 여호와를 믿는다면 주께서 율법대로 선대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그 조항이 있을 거니까 그거는 쭉 배웠으니까 그 율법의 흐름에 자기가 타겠다는 거에요. 결국은 룻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이미 인기 떨어진 사람들에게 천대 받은 율법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마련된 거에요. 계기가 마련되어 가지고 그 유명한 3장 9절 당신의 옷자락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옷자락 이야기가. “나를 덮으소서. 그래서 우리 기업을 당신이 우리집안을 대표하는 남자가 되어 주세요” 이런 거에요. 절차 따라 할게. 내가 0순위가 아니고 그 다음 순위거든. 그래서 그 보아스가 룻하고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단지 율법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아스가 룻을 이뻐할 마음까지 허락해주셨어요. 이뻐야 돼. 이쁘다는 말은 인물이 이쁘다 이런 말이 아니라 끌리는 마음을 준거에요. 끌리는 마음조차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에요. 그 여자가 뭐가 이뻐? 내 눈에는 이쁘다 왜. 이게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렇게 끌림으로서 이제는 왕의 자리가 율법을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자리로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체계를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 다윗의 자리에서 누가 나오느냐? 다윗의 후손이 나오지요. 그분이 복음입니다. 그분이 바로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죠. 결국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인간 쪽에서 위대한 영웅, 뛰어난 율법 학자, 뛰어나게 율법 지킨 자가 아니라 외부인이 오는 거에요. 외부인이.
외부인이란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에게 왔는데 추방했으니까 외부인이죠. 야 외부인이다 환영하자 이게 아니라 네가 무슨 외부인이야 하고 인간 쪽에서는 이미 마음이 확 정리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전부 다 손에 손잡고 전부 다 일치 된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어느 누구한테도 외부인이 누구다? 예수님이죠. 그리고 성령 받아서 예수 믿게 된 사람도 전에는 뭐였습니까? 마귀가 예수님께 하는 말과 똑같죠.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아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나의 살고자 하는 나를 인정해주고 그걸 의롭다 해주고 그 가치를 의미를 제공하는 자만이 그런 사람만 잡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본성상 내치게 되어있어요. 뿌리 채 뽑아놓고 빈자리죠. 외부인이 율법을 따라서 외부인이 와서 뿌리 채 뽑힌 그 자리에 율법대로 하는데 율법을 누가복음 15장 다시 봅시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그 다음에 뭡니까?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측은히 여겼다는 것을 불쌍히 여겼죠. 불쌍히 여겨서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은 자신의 불쌍히 여기는 대상이라는 말은 자기 속에 있던 사랑이 확산 되가지고 저쪽에 도달하는 거에요.
그러면 둘째 아들 입장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적대감 있잖아요. 적대감이 뭐로 덮혀버렸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던 그 사랑이 나에 대한 적대감을 옴팡 덮어버렸지요. 그러면 그 사랑 안에 덮혔으니까 나는 이제 아들 될 자격 있다고 봅니까? 없다고 봅니까? 없다고 보는 거에요. 사랑이 이끄는 거에요. 사랑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고 요한 1서에 나오는. “우리는 사랑한 적이 없고” 라는 말을 하면서 계속 사랑을 느끼는 거에요.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이 계속 사랑으로 구원받는 거에요. 이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이 사랑만 사랑이라는 것을 양쪽을 다 알면서 주님의 사랑만 증거하면서 이끌려가는 겁니다. 성도가. 그 사랑이 인간세계에서 드디어 탕자를 통해서 힘을 발휘하죠. 탕자는 자기가 뭘 한다는 게 아니고 어떤 결과를 낳는가?
첫째 아들을 화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바리새인이고 그 화가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었어요. 그냥 맨발로 왔다고 보면 되요. 완전히 거지도 상거지 꼴이 된 거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번 봅시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라고 했습니까? 철없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 게임만 안다고 했지요. 자기가 승자가 되는 이겼다~! 딱지치기 이겼다. 승자가 되는 그거. 그런데 자기 게임이 있기 때문에 뭐가 가로막혀요? 야야 그만 놀아라 이제 저녁 먹을 때 됐다는 엄마의 이 저녁 만들어 주는 희생이 어디 갇혀있습니까? 자기가 구슬 따기에서 이긴 그 승리감에 도취됐어요. 불룩하게 남자애들 옛날에 구슬 따기 하면 주머니가 불룩하게 올라와야 그날은 보람찬 하루가 돼요. 이 보람찬 하루에 저녁하게 되면 마치 이 저녁은 내가 내 친구의 구슬을 뺏은 어떤 보상이라도 되는 듯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정말 진정으로 뿌리 채 뽑힌 어른이 뭘 알아야 돼요? 왜 어릴 때 내 게임에 빠진 이 철딱서니 없는 내 것에만 빠진 내가 왜 어머니의 저녁상의 은혜에 대해서는 내가 왜 몰랐는가.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라고 소 잡아주고 가락지 끼워주고 하는 이것. 이거는 단지 아들이 철딱서니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들로 대우해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예수님의 자신의 모습인 거에요. 너희들 철나면 내가 너희들 구원할게 가 아닙니다. 여전히 철딱서니 없어요. 다만 성령은 누구 영이냐 하면은 우리 마음이 아니고 예수님 마음에 오게 되면 네가 하는 네 모습 봐. 철딱서니 없지. 하지만 내가 사랑으로 덮어줄게 라는 그 사랑으로 입혀줍니다. 그러면 율법의 완성이 되잖아요. 이방인에게. 외부인에게도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하라는 신명기에 보면 그걸 허락했듯이 율법의 완성은 뭐냐 하면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말로 사랑이 아니라 피로 썼어요. 피를 흘린 사랑입니다. 나를 죽였던 너희들을 죽었던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겨서 살린다. 그래서 스데반도 자기를 죽인 자에게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요. 스데반 집사는 자기가 주가 아니니까. 그런 기도한다고 구원과 관계없어요.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니까. 스데반이 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구원받아요.
하나님의 피는 단독이에요. 어떤 인간도 그 피에 자기 피를 섞으면 안돼요. 우리 피는 빠져야 돼요. 기도하러 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피 흘리는 거 그런 거 안 넣어줍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에요. 그래서 피 밖에 없어요. 이게 사랑의 결정체고 그것이 오므라이스처럼 계란막처럼 우리의 모든 철딱서니 없음을 너무나 어리고 아는 게 없고 배워봤자 얼마나 배우고 성경 공부 해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철딱서니 없으면 없는 대로 두고 거기에다가 온전한 사랑으로 아버지 사랑, 대신 죽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주는 것.
그래서 32절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안 좋아합니다. 큰 아들 안 좋아합니다. 짤렸어요. 이제는 우리는 뭐냐?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하나님이 벌렸던 게임이죠. 그 결과가 둘째 아들 아들 됐어요. 이제 제대로 아들 되었습니다. ‘순수한 나’가 아니라.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된 거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하신 일이 비유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철이 없어서 밥 먹고 사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예수님 재끼고 같은 인간들만 만나고 인간들에게 아부하고 인간들 이용하고 빼먹는 온통 정신을 거기에 몰두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우리에게 십자가 피로 오늘도 다시 적셔주시옵소서. 덮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