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강, 421강) 경쟁 게임, 사람의 한계 230221
녹취:이하림
420강-YouTube강의(경쟁게임 사사기 9:23)20230221-이 근호 목사
제420강, ‘경쟁게임’. 인간은 제한된 삶의 환경 때문에도 경쟁하지만,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가 최고가 되기 위한 악마의 본성 때문에 쉬지 않고 경쟁합니다.
자기가 이겼다 싶으면 이제 그 상대는 시시하고 경쟁에 도전할만한 상대를 또 골라요. 또 찾아요. 서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추가해서 추가적으로 자신의 상대를 고르고 있죠.
그럴 때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하느냐? 이긴 자를 하나님이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승리자를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경쟁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 언약 같은 경우에는 심지어 노아 언약의 혜택을 입은 노아 가족까지 그 어떤 경쟁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경쟁의식이 타고났고 주님의 구원은 인간의 경쟁의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실력과 능력을 써먹을 데가 없어요. 써먹을 데 없다고 인간의 경쟁의식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세상에서 같은 인간들끼리는 안 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하나님한테는 그건 통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결국 언약을 통해서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본인이 갖고 있던 본성, 그 본성이 자신의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지고는 못 산다. 내가 지옥 가면 지옥 가지, 너한테 지기는 싫다.’ 이런 게 있죠.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뜻입니다. 상대를 고르기를 잘못 골랐다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고른 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노아 언약 때에, 노아 홍수가 오기 전에 사람들은 왜 노아를 경쟁자로 안 삼았을까요? 그들은 어떤 재주나 힘을 내놓을 때, 노아가 내놓은 것은 오직 언약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경쟁을 하고 시합을 하고 상대를 하려면 질(質)이 똑같은 질을 내놓아야 되는데 노아의 관심사는 ‘너나 많이 해라. 나는 그거 관심 없다.’ 이렇게 되니까 노아가 경쟁 상대자로서 모든 자로부터 탈락이 된 거죠.
창세기 6장에 보면 그걸 가지고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는 이 창세기 6장 말씀을 좀 더 심도 있게 보면 이렇습니다. 노아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포기했더라.
자신의 본성대로 하나님과 연관될 수 없고 관련될 수 없다는 것을 노아는 인정한 거예요, 자기 본성대로는. 하나님의 방식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상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없고 본인의 능력과 재주와 지혜를 거기다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노아가 안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거예요. 자신의 능력과 재주와 지혜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자기 구원에 있어서 아무데도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노아가 인정한 겁니다. 이게 성경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동행이 되려면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똑같은 것을 생각해야 이게 안 싸우고 동행이 돼요. 하나님과 노아는 경쟁대상이었다, 아니다? 경쟁대상이 아닌 것을 노아가 알아요. 이 말은 철저하게 노아는 하나님 앞에 종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노아가 은혜 받았다, 동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자의 예를 제가 하나 들겠습니다. 이게 사사기 9장 23절에 나오는데 사사기 9장 2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지배했었어요. 지배했으니까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세겜 사람들은 완전히 내 밥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하고 마음을 편히 했는데 그렇게 되면 일종에 정다운 동행이 되겠죠. 그런데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악한 신을 보냈어요. 마귀를 보낸 거죠. 악한 신을 보내니까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했다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결국은 인간 세계를 마귀가 지배하는 이상은 인간과의 좋은 관계는 찢어지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은 뭐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라고 아무리 장담을 해도 그 사람이 언약을 제공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내 본성에 대해서 일체 그것은 거론할 수도 없고 허락도 안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와 성도끼리, 사도 바울에게 많은 성도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과 성도는 어떻게 지냈는가? 그냥 그 본성대로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십자가 앞에 나타나니까 내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성질, 성깔, 나의 이런 것들은 전혀 하나님의 언약에 삽입되지 못한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니까 동행이 되는 거예요, 서로가 인정하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신 없이 은혜 없이 그냥 동행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그걸 가족이라 해요. 가족은 출신 자체가 한 덩어리로 출생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내 가족은 못 버린다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그런 마음 있잖아요.
그런데 그 가족들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됩니까? 가족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복음 언급할 수 있습니까? 언약 언급할 수 있습니까? 자식은 부모보고 무조건 예예 하고 부모는 자식보고 너 키워준 은혜를 네가 잊지 말라 이렇게 하고. 둘 다 어떤 경쟁요소가 있어요. 고집이 있어요, 둘 다 고집이. 난 아버지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난 너 때문에 속 많이 썩었다 하고. 둘 다 할 말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자기주장을 할 수가 없죠. 자기주장 같은 것은 남하고 경쟁할 때나 써먹어라. 남한테 이길 때나 써먹으란 말이죠. 하나님은 경쟁대상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겁니다.
경쟁대상이 안되는데 내 실력을 발휘해서 뭐 할 거예요? 소용없죠. 힘 다 빼야죠. 하나님 제 솜씨 발휘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제 능력 발휘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일방적으로 언약과의 동행이에요.
그래서 사사기 9장에 이 말씀을 좀 더 말씀드리면 아비멜렉은 깡패거든요. 깡패가 철딱서니 없는 세겜 사람을 완전히 힘으로 장악했는데 여기 26절에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아비멜렉 대신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서 그걸 듣고 28절에 “에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지금 나를 섬겨라, 이렇게 나오니까 이 소리를 듣고 아비멜렉이 화가 나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완전히 거의 전멸시켜놨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이겼어요. 45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소금을 뿌려버렸다. 그러니까 아예 저주를 한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이 정말 승리했는가? 아닙니다. 53절에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두골이 깨졌어요. 다 이겼어요. 다 이겨가지고 마지막에 이제 망대에 이르러 그걸 불사르기 직전에, 위에서 아줌마가, 그것도 장대한 군사나 군인이 아니고 아줌마가 연약한 여인이 아비멜렉 대장군의 머리에 맷돌을 던져서 작살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56절에,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양쪽 다 치는 방법으로…….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지만 형제를 다 죽여버렸어요. 한방에 칠십 명을 다 죽인 그 죄, 그리고 그 아비멜렉을 지도자라고 모셨던 그 세겜. 하나님께서는 악한 신을 보내서 양쪽 다 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신 겁니다.
인간과 인간이 경쟁하면 둘 다 다 망한다는 이야기에요.
421강-YouTube강의(사람의 한계 전도서 11:9)20230221-이 근호 목사
제421강, ‘사람의 한계’. 하나님은 사람의 한계를 둘로 나눴습니다. 기고만장할 때와 그리고 그 기고만장한 허세가 사그라들 때, 이렇게 둘로 나눴어요.
진짜 인간이 자기 본색을 드러낼 때는 기고만장할 때에요. 사그라들 때는 인간이 자기주장을 못합니다. 그게 전도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전도서 11장 9절과 10절에 보면, “청년이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청년은 아주 자신만만할 때에요. 내가 생각한 것은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키우던 그 때가 청년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마음대로 행하라. 네가 마음에 품었던 것을 젊은 육체를 통해서 마음껏 펼쳐라. 펼치게 되면 뭐가 나오는가? 여기서 악이 나와요. 이 청년의 때를 경유해서 악이 나오고 그 악이 나와야 나중에 청년의 때가 끝나요.
끝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뭐 아무것도 안 해보고 허무를 느끼는 경우는 없고요. 이것저것 다 해봐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다 해보는데, 이게 사다리 타기에요. 사다리 타기에 꽝, 꽝도 있지만 행운도 주어지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사다리 타기는 어떤 라인을 선택해도 끝에는 똑같이 허무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 되도 허무하고 가난해도 허무하고. 심지어 공부를 많이 해도 허무해요. 전도서 12장 12절에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청년이 공부도 안 하고 책도 안 보고 가만 있으면 이 말씀을 모르겠죠. “청년아, 네 그 힘과 정력을 네가 책 만드는 일에, 공부하는 일에 매진해봐라. 결국 남는 것은 몸이 피곤하다는 허무만 남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청년을 철저하게…… 인간은 허무하다는 이 진리 있잖아요. 이 진리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거기다 다 집어넣어버립니다. 허무하다. 동서남북 다 허무해요. 어떤 일도 허무해요.
자, 어느 정도로 허무하냐 하면 전도서 12장 2절에 보면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신체 하나를 사회로 만들었어요. 신체 하나를 개인의 신체로 보는 게 아니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들에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일어나는 일,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너에게도 똑같이 한통속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이 청년들아 네가 미리 알아라, 이 말이죠.
청년들아, 네 근처에 노인들 있지. 할아버지 할머니들 있잖아. 그들에게도 다 너 같은 청년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집단 하나를 하나의 인체화 시킨다면, 단일한 하나의 몸이라 한다면,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이 말은, 나는 청년인데 멀쩡한데. 어? 여기 보니까, 같은 인체에 속했으니까, 우리 척추를 구성하고 뼈들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몸을 하나의 집이라 보면 그들이 집을 지켜야 되는데 이거 뭐 지진 2.2에도 버들버들 흔들흔들 집을 못 지켜요. 안정되지 못해요. 늘 비틀거리고 길을 갈 때도 넘어질 것 같아. 계단 올라갈 때도 헉헉거리며 계단도 거의 못 올라가고.
주께서 이게 남의 일이냐는 겁니다. 같은 너희 집의 일이잖아. 그럴 때,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집을 지켜야지, 왜 저렇게 허약하지. 참 이상하네. 집을 지키는 자들이 옛날에는 힘이 있었는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척추가 구부러지는 거예요.
이번에는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이빨담당 사람들이 담당하는 그 구성원들이 맷돌질을 못하고 “그칠 것이며”, 눈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제대로 봐야 되는데 어두운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서 12장은 뭐냐 하면 로봇이에요, 거대한 로봇. 인간들로 만들어놓은 거대한 하나의 단일체 구조, 하나의 인체로서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같이 들어가서 하나의 인간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각자 역할을 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이 말은, “청년들아, 너는 그렇고 그런 인간들 밖으로 못 벗어난다. 네가 보기에 어설퍼 보이고 네가 보기엔 허약해 보이는데 너도 같은 동네 사람이야. 같은 집안사람이야. 같이 있어, 같이.” 그들이 어두워지는 것은 네가 어둡다는 뜻이고 그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네가 구부러지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같은 원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또 5절에 보면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라는 말은 피부가 얼룩덜룩하게 되고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중에 또 죽는 사람도 있네요. 죽으니까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준 원리 원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달라진 게 없다는 겁니다. 그게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everything, 모든 것이 헛되다. 다시 말해서, “너는 헛되게 태어났고 네가 헛된 세상에 살면서 헛된 청년의 때를 지나면서 헛된 곳으로 지금 네가 질주하고 있다. 쏜살같이 지금 네가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듣고 청년들이 뭐라고 합니까? “뭐 어쩌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태어나서 죽는 거 나 다 알고 사람이 나이 들고 힘없으면 늙어 죽는다는 거 다 아는데 그러면 지금 있는 힘을 뭐 어쩌라고?” 주의 뜻은, “해 봐.”
그 남아도는 힘, 정력 썩히지 말고 해보란 말이죠. 해볼 때 그럼 청년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 해봤습니다. 뭐? 해보면 뭐가 기다리는데요?” 해보면 네가 이미 확정난 원리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게 된다.
자, 그러면 그 청년이 이야기하기를 “헛되지 않은 게 뭡니까?” 이렇게 할 거죠. 그것이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헛되지 않은 것이 전도서 제일 마지막에 나와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헛되지 않은 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걸 줄이면 하나님의 심판은 대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하나님의 심판은 “이 헛된 것들 이리와. 내가 심판해줄게.” 그겁니다.
이 심판은 뭐냐? 어떤 짓을 해도 헛될 수밖에 없는 자에게 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그 심판의 증거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신은 하나님께 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그 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 또 심판하시고.
육체가 흙이 된다는 것은 심판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미리 챙겨라. 나는 헛되다는 것을 챙기고, 하나님이 그 헛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버리지 않고 반드시 심판, 선악간에 심판한다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챙겨라.
이 하나님의 명령을 미리 챙기는 것, 그것을 13절에 보면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의 심판은 옳았다. 정당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항상 심판은 옳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지키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전도서라는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에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헛되지 않는 분밖에 없죠. 바로 그분이 신약의 예수님이십니다.
죽었지만 아버지께로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 살아난 이유가 모든 말씀을 다 지켰기 때문에. 심판해보니까 합격이에요. 죄가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거룩한 하나님의 그 의로움.
그 의로움을 우리 하나님은 신약 성도에게는 미리 준비해주셔서 “헛된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계명, 헛되지 않은 하나님의 의를 준비한 것을 이 청년들아, 미리 챙겨라.”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주신 본분이고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