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1:1-3 / 진멸
진멸
2023년 2월 8일
이근호
본문: 스바냐 1:1-3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1: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멸을 외치는 선지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것 속에서 억지 의미를 뽑아낸다고 여길 겁니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안정되고 자기 인생을 꾸리고 싶어합니다. 유난하지 않으면서도 여유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여망과 희망은 일괄적인 진멸이 없을 때나 생각할 수 있는 호사입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사람들이 자기 말을 귀담아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본인이 대리해서 세상에 내놓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하늘의 새나 땅의 짐승이나 심지어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 대상에서 면제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멸’을 외치는 선지자는 진멸의 대상에서 제외될까요? 아니됩니다.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대표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진멸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예외가 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마저 진멸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언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진멸에서 면제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전 우주적인 진멸이 이미 결정난 사실이요 확정된 일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조용히 진멸하시면 될터인데 왜 이스라엘에게는 이 진멸의 소식을 알리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속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영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저 예언을 통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던지신 예언을 따라 이스라엘 속으로 아예 들어와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진멸과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것은 신약 히브리서 1:10-11에 나와 있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만드시고는 그 만들어진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필히 멸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주님의 온전함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놓으신 세상은 ‘그 멸망’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의 주님됨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만들어진 대자연이 멸망받지 않고서는 주님의 주님다움이 성사되지 않고 실패한다는 말이 됩니다. 피조세계는 주님다움의 절차와 그 완성을 위해 한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없어질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영원하심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만큼은 멸망대상에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진행하시는 이유는 자연보다 더 포괄적이고 넓은 범주가 곧 진멸의 범주입니다. 피조물의 존재보다 멸망 원칙이 더 선행적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될 이유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또 하나의 힘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주님의 대적자들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벌써 이 악마의 세력의 다스림을 받고 마음 속까지 장악당한 형편에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이 진멸 안으로 들어오셔서 저주의 심판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예언과 말씀은 예수님의 주되시기 위한 절차 위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진멸의 소식을 미리 접하고 알았다고 해서 ‘나만큼은 진멸에서 면제시켜 주세요’라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절차를 가리고 훼방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진멸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뇌에 이상이 있어 뇌수술을 받아야 될 환자는 수술 전에 자신의 머리카락를 말갛게 다 깍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님을 위주로 벌이시는 일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진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숲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원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 110:1-2)
소위 있는 것처럼을 다 철거하는 와중에서 있는 것처럼 다스리는 악마의 정체를 노출시키려 하십니다. 모든 있는 것처럼 모두 없음에서 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연히 ‘있음→없음’ 작업을 시행하십니다. 이 비슷한 경우가 수학에 나옵니다. 수학에서 ‘0’의 의미는 파괴와 차이입니다.
‘0’이란 없음의 표현으로서 ‘있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0을 곱한 모든 ‘있음’은 다 ‘없음’이 됩니다. 5×0=0입니다. 2745×0도 0입니다. 0 앞에서 아무리 대단하고 요란한 것들이 있어도 0을 만나면 0이 됩니다. 모든 있음에 대한 폭파입니다. 0은 또한 차이를 말합니다. ‘x=3’이다는 수식은 이렇게 됩니다. ‘x-3=0’이라고 말입니다.
수학의 방정식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그 수식 뒤에 0을 놓아야 합니다.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 있는 것 모든 것은 다 없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진멸의 끝지점에서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자를 살려내는 권한을 확보한 분이라는 점입니다.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즉 심판도 주님이 하시지만 구원도 주님이 하실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를 위하여 선지자는 파멸을 맛보게 됩니다. 그들 안에 주님의 고난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1:11)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해서 음란한 자식들, 즉 파멸되어야 될 자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그 현장인 니느웨 성에서 이스라엘을 대표자로 참관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철회를 보고서는 스스로 죽을려고 했습니다. (욘 4:1,3) 요나의 오류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멸에서 면제될 자가 없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저주받으심과 그리고 부활하심에 참여되어서 죄사함을 받은 자입니다.
성도가 바로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기에 그들은 날마다 자신의 기대와 희망과 계획과 목표가 하나님에 의해서 진멸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동시에 다 이루신 주님의 은혜를 받는 대상이 됩니다. 항상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고 항상 자기에게 손떼는 것보다 시작이 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살면서 주님이 벌리시는 진멸 작업을 즐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강-스바냐 1장 1-3절(진멸)230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1-3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1-3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바냐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유다나라가 아직까지 망하기 직전입니다. 망하기는 망하는데 그 직전에 내리신 하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 물론 스바냐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해서 여호와께서 그냥 선지자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전달한 내용이 스바냐 예언인데 그 첫 번째 나온 예언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진멸한다는 겁니다. 사람과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모조리 다 진멸 없애버린다, 라는 예언입니다.
보통 우리는 상식적으로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사람을 치지 왜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짐승까지 진멸하는 이유가 뭐냐?’ 그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당사자가 어떤 것을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진멸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나 빼놓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빼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까 선지자 빼놓고 진멸하기를 원한다든지, 이러한 의식에서 나온 게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장식하는 종교단체입니다. 종교단체가 왜 말씀, 성경을 펴놓고 설교하면서도 전혀 성경적이 아니고, 복음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되느냐 하면, ‘나 빼놓고’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한다”라고 하게 되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저도 진멸해 주세요. 저도요, 저도요.” 이렇게 나와야 돼요. ‘하나님이 진멸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저는 봐주세요.’라든지 ‘저는 구원해 주세요.’라는 이런 의식으로 진멸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가로막는 셈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대할 때 인간에게는 선입관이 있어요. 하나님을 대하면서 자기가 먼저 생각해서 하나님을 찾기로 맘먹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내 쪽에서 찾기로 맘먹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가상한 마음만큼은 어떻게 좀 하나님께서 좋게 봐주기를 기대하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형편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기 위해서 아담에게 찾아왔을 때도 아담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어요. 뭐냐?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 먼저 찾아오신 겁니다. 나다나엘에게도 먼저 찾아오신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도 먼저 찾아오시고. 언제 아브라함이 하나님 찾아다녔습니까? 이삭에게도 마찬가지고, 야곱에게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온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는 ‘나는 봐주고요’ 이게 반드시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특별대우 해주옵소서.’ 이런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서면서 스바냐를 보던지, 하박국을 보던지,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자체가 성경을 백번을 봤든 그 자체는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짓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왔을 때 특히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찾아오지요, 마리아가 평소에 하나님 찾아다니던 사람 아니잖아요.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왔을 때 마리아의 그 태도 보세요. ‘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가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한다든지 ‘내가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습니다.’ 이런 태도 아니에요.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과거가 다 무너집니다. 어떻게 감당을 못해요. 너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을 통해서 찾아가면서 비로소 하나님께 찬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예상 못 한 일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찬양해버리면 이것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찾는 이 가상한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적절한 보상을 해주심에 대해서 제가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뜻이다, 그 말이죠. 그것은 벌써 자기가 예상한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진멸한다 할 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는 진멸에서 빼주세요.’라고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알리는 거예요. 그게 진멸이에요. 단 한 사람도 진멸에서 제외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때는 하나님의 진멸이 반드시 들어가야 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는. 진멸이 들어가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보통 약에도, 그 치료제에도 핵심요소가 있잖아요. 햄버거 만들면서 패티 빼는 햄버거 봤습니까? 햄버거는 패티와 두꺼운 빵, 맛의 조화잖아요. 토마토 넣고, 채소 넣고, 그것은 보조고 고기가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햄버거 너무 빨리 먹으려 든다든지, 누구처럼 성질이 급해서 어떻게 하다가 패티를 땅에 떨어뜨렸다. 패티 빠진 햄버거잖아요. 아무도 안 볼 때 얼른 집어서 흙 털어내고 끼워서 먹어야지요. 그래야 햄버거 먹은 것이 되지요.
복음의 패티 같은 게 뭐냐? 햄버거 패티 같은 것이 복음의 요소에서 바로 진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놀랍게 하나님 자신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진멸에, 하나님의 그 심판에, 그것도 저주의 심판에 하나님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물론이고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이 스바냐 선지자가 이스라엘 선지자예요. 이스라엘 보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아” 이렇게 부르면 사람들이 ‘야, 하나님이 복 주려고 부르시는구나.’ “예!” “진멸해.” 이렇다 이 말이지요. “너희는 다 진멸 당할 거야.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너희들뿐만 아니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그러니까 노량진 수산시장의 고기들 있잖아요. 다 진멸대상이에요. 동물원에 있는 그 공중의 새들 다 진멸대상입니다. 이 말씀을 주시면 ‘저는 빼주세요.’라는 것은 일단 접읍시다. 그것은 하나님께 안 통하니까 일단,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진멸할 때,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너 진멸할 거야.” 그렇게 받아들이면 돼요. “나 너 진멸할 거야.”
하나님이 진멸한다는데 진멸 당해야지요. 흔쾌히 받아들여야 돼요. 그런데 왜 그걸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느냐? 진멸하시면 그냥 진멸해버리지 왜 이스라엘에게 언급을 하시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멸하시는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정책에 대해서 그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어야 될 나라에요. 진멸은 당하면서 이유를 알고 진멸 당해야 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진멸을 왜 당하는가? 그것은 자기 눈에 인간을 덮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이 대자연 자연보다 더 포괄적인 범위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매일같이 대하고 있는 해와 달과 그리고 자연, 바람, 공기, 기후, 날씨, 이 지구 상황, 이것보다 더 포괄적인 것 그게 있어요.
그러면 이 지구의 내용이 뭐냐? 공중의 새, ‘아주 높게 나네. 바다 속의 고기, 야~, 깊은 데서 사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공중과 바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자연환경이에요. 삶의 환경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나 여기 존재한다. 나 여기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전부 한꺼번에 더 큰 범주로서 전부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덩달아 공중의 새까지 같이 없어지고, 바다의 고기까지 높은 곳, 깊은 곳, 다 날아가요. 하여튼 있다는 것은 다 날아가요. 있다는 것, 사람은 물론이고 있다는 것은 다 날아가요. ‘베니싱(vanishing)’ 현상인데, 모든 것이 사라지는 현상, ‘vanishing 현상’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자연보다 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활동이 포괄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 눈에 보이는 그것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주께서 따로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따로 활동하고 있는 그 활동의 핵심이 뭐냐? 이건 이스라엘이 알아야 되고 오늘날 성도라면 이것 알아야 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땅, 없애려고 하는, 진멸되어야 하는 이 세상은 없어져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있게 된 세계라는 겁니다. 없어져야 된다는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있게 된 것이 뭐냐? 이 세상입니다.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땅의 기초를 두셨고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은바’지요. 지으신 바라. 이렇게 생각하면 이걸오늘날 ‘나는 진멸에서 빼주세요.’라든지, ‘누구는 몰라도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이 태초에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을 제가 받아들이오니 저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이렇게 나오겠지요. 여러분은 안 그래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제가 알아모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저는 진멸 대상 아니지요? 저는 구원 대상이지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11절에 보세요.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인간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여기서 인간들은 혼미에 빠집니다. 왜 혼미에 빠지느냐 하면, ‘멸망시킬 것을 왜 만들어놨습니까?’ 하는 질문이 약간이라도 진지하게, 진정성 있게 성경을 본 사람 같으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나와야 돼요. ‘멸망시킬 것을 왜 만들어놨습니까?’
그 이유가 그 뒤에 나와요.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다.” 아,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주님의 주되심에 의해서 보조적인 현상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영존만이 있음이 되고 주님 빼놓고 나머지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과정이, 주님이 주님 되는데 꼭 필요한 절차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되는 데 있어서 피조물이, 없어도 되는 피조물이 있다가 없어도 되기 때문에 없애는 과정에 돌입함으로써 그 절차가 있어서 비로소 주님이 주님으로 완성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농락당한 거예요. 저와 여러분은 농락당하신 겁니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항상 예상 못 한 것을 통해서 찬미가 되니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을 통해서 찬미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것은 항상 내가 좋게되는 것을 예상하잖아요. 주께서는 어림없습니다. 우리가 좋게 되고 싶은 그 있음 자체를 없애버려요. 아예 없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없음의 표현입니다. 수학에서 ‘0’이라는 게 있거든요. 제로, 수학에서 0, 제로의 뜻은 뭐냐 하면,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 0이에요.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0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수학에서 0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현재 있는 것, 3, 7, 6, 5, 47, 뭐 있는 것, 1, 그 있는 것, 그 있는 것을 0이 폭파시켜 버립니다. 파괴시켜 버려요. ‘5×0=0’, 폭파시켜 버립니다. ‘7647×0=0’ 0의 뜻은 모든 있는 것을 없음으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은 주께서 없애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뭐 별로 찬미하는 얼굴들이 아니신 것 같은데, 그걸 찬미해야 돼요. ‘아니 멀쩡한 나를 왜 죽입니까?’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주 되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하나의 수학으로 예를 들면 ‘6÷0’, 6 나누기 0은 뭐지요? 그때는 0이 아닙니다. 그때는 뭐냐? 에러, 오류에요. 오류입니다. 나누기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눈다는 것은 나누어주는 거예요. 나누어주는데 ‘6÷2’ 6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6 나누기 2는 3’(6÷2=3)이 되는 거예요. ‘너 3, 그리고 너도 3 가져라.’
그런데 6을 나눠주는 데 있지도 않은 데서 나누니까 이게 6이 파괴되어버리는 거예요. 헉헉거리면서 백날 나눠줘도 있지도 않은데 계속 나눠줘야 돼요. 이게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수학에서 0은 기존의 있음을 파괴시키는 기능이고, 또 영의 기능은 뭐냐?
‘차이 남’입니다, 차이. 차이를 말하는 거예요. ‘3-3=0’ 뺀다는 것은 항상 현재 있는 모든 것들은 무엇, 알 수 없는 것과 차이 나는 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원래 있는 것과 ㅇ,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원래 있는 것과 삐~! 안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0이 있는 거예요. 이게 두 가지 기능입니다.
어차피 수학에 0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없음으로 되돌아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없음으로. 그래서 수학에서 해답을 찾는 것 ‘yx-7x+6=0’ 여기서 해답을 찾을 때는 반드시 수식 뒤에다 ‘=0’를 붙여요. 네가 무슨 수를 하게 되면 마지막에 없음이 되겠느냐? 이게 수학 방정식입니다.
그 해를 뽑아내면 ‘x-1=0’ 이렇게 놓으면 인수분해 해서, 그걸 제로로 놓아서 수식을 푸는데 해답, ‘그 x가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없음으로 돌아가야 된다.’ 이게 수학에서 해답을 뽑아내는 방식입니다. ‘대구시에서 70세 이상은 앞으로 6월 28일부터 버스나 지하철 모든 대중교통 요금 안 받는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왜 안 받나?’ 어차피 죽을 거니까. 요금 안받는 게 ‘당신 빨리 파괴되어서 돌아가세요.’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 주를 안다는 것은 내가 파괴되는 과정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파괴되지 아니하면 주님을 알 수가 없어요. 그걸 성경은 어떻게 나타내는가? 주님께서 진멸이라는 율법, 예언이거든요, 예언을 던져놓고 그 예언에 주님이 뛰어들어요. “너희 아무도 죽기 싫지? 죽기 싫지? 솔직히 말해. 너희 심판당하기 싫지?” “싫습니다.” “내가 당할게.”
심판당하기 싫은 것, 바로 진멸하겠다는 원래 하나님의 계획인데 너는 심판받기 싫고, 즉 ‘나는 지옥 가기 싫고 저주받기 싫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대적하는 바로 하나님의 적의 안목이고 적의 논리고 주장들이에요. 하나님의 적, 누구입니까, 악마지요, 악마의 논리가 인간 속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까지 전부 다 장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멸이라는 것을 특수한 나라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처음 계획을 알려주는 겁니다. 다 제로, 없어져야 된다는 것.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어떤 40대 여성분이 두뇌에 무슨 암이 생겼다, 수술해야 된다. 그러면 의사가 내 수술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숱 많은 머리카락을 홀라당 전부 다 박박 밀어서 깎아야 되겠지요.
진멸입니다. 머리카락 진멸이에요. 다 깎아놔야 그다음에 훤하게 드러난, 전구 알 같이 훤하게 드러나는 거기서 어느 지점을 째서 그 내부로 쑤시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다 진멸해 버려야 원래 하나님의 대적 있잖아요, 악마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대들었나, 그 사실이 들춰지는 겁니다.
악마의 도발과 만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에게 특별한 역할과 기능을 맡겼습니다. 신분을 맡겼어요. 그건 뭐냐 하면, 네가 원수를 네 발아래 완전히 둘 때까지 너는 주가 된다.
여기서 ‘까지’라는 말은 ‘영원토록’의 뜻이에요. 앞으로 영원토록 될 신분과 시간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기능을 지상에서 이야기할 때 ‘……까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이 세상에서 ‘……까지’라 하는 것은 ‘……까지는 뭔가 하고 그다음에 그만두라.’는 뜻이 있잖아요.
성경에서 ‘……까지’는 그런 뜻이 아니고 장차 완료된 일을 지금부터 시작했을 때 완료된 그것과 이어진다는 뜻에서 ‘……까지’예요. ‘여기서 벌인 일은 영원까지 계속 지속된다.’는 뜻으로 ‘……까지’가 되는 겁니다. ‘네가 원수를 지배할 때까지’, ‘원수를 유황불에 집어넣을 때 까지’라는 말은, ‘계속해서 악마는 처음부터 유황불에 들어가야 될 존재’라는 사실을 누가 누굴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기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긴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심판을 맡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1, 22)
그래서 그 심판의 기준이 뭐냐?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하고 예수님이 누구냐를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데? 우리가 예수를 단지 모른다는 그 이유때문에 우리가 지옥불에 간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데?”라고 예수님에게 따진다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리고 거부하는 그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에 내가 뛰어들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아까 히브리서 1장 10, 11절 말씀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주가 주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진 세상이 자기들 행복하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어제 화요일 강남강의 유튜브 설교 두 번째에서 인간들은 자기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 행복조건을 스스로 당기는 데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행복의 복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나를 위해서 핍박받는 자가 행복하다 했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행복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과 더불어 동일한 고난의 체험을 하는 자가 이게 행복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으로서는, 이스라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해내지 못 할거예요. 인간으로서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에게 예언을 던졌다는 말은, 주님이 예언을 따라서, 자기가 던진 예언을 따라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십니다.
이게 바로 스바냐예요. 예언을 던지게 되면 그 이스라엘 속에서 뭐가 일어나느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거기서 일어나는가가 진멸 속에서 나와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부활은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어요. 그것도 저주받아 죽어야 돼요. 그것도 율법대로 저주받아 죽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정말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저주 속에 들어갈 생각 안 하고, 자꾸 말씀 연구할 생각하고, 기도할 생각하고,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할 생각하고, 선교할 생각해요. 자기가 진멸 속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합니다. 다 가짜입니다. 전부 다 가짜에요. 예상 못 할 일을 찬미해야 될 건데 꼭 찬미할 만한 것, 군대 가서 총 잘 쏴서 전화 걸 수 있는 인센티브 얻는 것, 꼭 뭔가 자기한테 유리한 것 그걸 찬미거리로 떡 내놓는 거예요.
지금 선지자의 진멸이라는 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가 하면, 이 정도로 어려워요. 어떤 아무것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처럼 일반 사람들은 선지자의 말을 그렇게 듣습니다. ‘세상 뭐 정상이고 잘 돌아가는데 진멸? 뭐가 진멸?’ 어떤 징후도 없고 징조도 안보여요. 새벽 네 시인가 도적같이 진도 7.8의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도적같이 왔잖아요. 어떤 징조, 징후도 별로 없었어요. 하늘이 번쩍번쩍한다든지, 지진광이 퍼졌다든지, 그런 것은 누가 알겠어요? 밤에 다 자고 있는데요.
자, 이제부터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 진멸을 이스라엘에게 줬다 했잖아요. 원래 세상은 파멸되게 되어 있고, 그 파멸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줬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파멸로 이어져요.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아요. 그다음에 어려운 것이 뭐냐? 이스라엘 파멸과 동시에 그다음에 선지자 파멸이 일어나는 겁니다. 선지자 파멸. 그 뒤에는 메시아 파멸이 일어나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심판에서 면제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이것은 뭐 하나님까지 다 하나님의 그 파멸, 멸망에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선지자의 파멸입니다. 구약에서 예언을 했던 그 선지자, 자기는 빼달라고 구경이나 했던 선지자가 있어요. 그게 누구냐?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서 파멸을 전할 때 요나 선지자는 상상도 못 했어요. “니느웨 사람들은 파멸한다.” 그걸 지금 하나님께 부여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그때는 북쪽 이스라엘이거든요, 그 이스라엘은 파멸이 안 될 줄 알고 멀쩡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파멸되는 그 현장에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누가 가느냐 하면, 요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대변해서 거기에 같이 심판의 자리에 갑니다. 요나는 구경만 하려고 했어요. 니느웨 성은 40일 지나면 멸망해요. 자기는 그냥 저 산 위에서 팔짱 끼고 동영상이나 찍고 ‘꼴 좋~다! 너희 망한다.’ 이러려고 했는데, 분명히 파멸인데 파멸 대신에 뭐가 일어났느냐 하면, 그들이 구원을 받아버렸어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파멸의 끝장에서 비로소 구원이 생기는 것,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히브리서 1장 10, 11절에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끝장에서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와요. 파멸 속에서. 죽은 척해라, 가 아니라 완전히 네가 나와 함께 죽을 때 비로소 너는나와 함께 구원을 얻는 거예요. 죽은 척이 아니고. 죽은 시늉하는 게 아니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요,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언제 죽입니까?”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줄 때는 우리가 언제 죽는 그 정도가 아니고 이미 죽은 채로 나왔다는 것을 율법이 말해줘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이미 율법과 더불어서 율법이 저주 대상자를 형성하기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저주의 형성안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다는 것을, 구원받은 사람은 그걸 파악한다 그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작년에 죄지을 때 그때 저주받은 게 아니고, 태어남 자체가 이미 율법과 동반해서 율법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을 육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 행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육으로 태어났으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것도 한두 번 행하는 것이 아니고 밤이나 낮이나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에 푹 싸여 있다, 저주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런 뜻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여러분,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들판에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거기에 우산 없이 비 안 맞을 재간 있습니까? 넓은 들판인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우산이 없으니까 그냥 노출되지요. 저주라는 방사능에 그냥 노출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인간 사입니다. 우리 세상사에요.
그냥 사는 게 저주에요. 따로 죄지어서 저주 더 받는 게 아니고 목숨 붙어 살아 있는 게 저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께서, 주님께서 이 저주에 동참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진멸한다는 예언의 말씀이 주님과 동반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선지자들은 이 저주체험을, 주님의 저주체험을 미리 당겨서 함께 받으면서 그 안에서 영생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게,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정말 세상적으로 하기 힘든 그런 역경과 고난으로 가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예수님의 영이 계셔요. 예수님의 영이 계셔서 그 선지자들로 하여금 바깥에는 저주체험, 안에는 예수님과 함께 영생체험을, 저주 안에서 그걸 체험하는 거예요.
요나도 마찬가지지만요, 나중에는 그 요나가 배워요. 니느웨 사람한테 배운다고요. ‘아, 그 진멸과 저주가 분명하지만 다시 여호와께 회개한다면 구원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그걸 이방 나라 너희한테 도리어 이스라엘 대표자 요나가 배우는 그 이야기가 요나 책이에요.
그리고 선지자 호세아 같은 경우 보세요. 호세아 가정 엉망진창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호세아로 하여금 이렇게 해요. 호세아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음란한 자식이, 호세아 그 아내가 바깥에서 나오는 혼외자식인지 아니면 호세아 본인의 자식인지 뭐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호세아 자식이라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여자가, 아기 낳는 여자가 음란하기 때문에 아무리 남편이 선지자라 할지라도 내놓는 자식은 족족 음란한, 저주가 합당한 자식이 호세아 선지자 가정에서 계속 출생합니다. 세 명씩이나.
그래놓고 호세아에게 “네 힘으로 해결 안 되지? 내가 해결해줄 게. 그 음란한 여자가 있는 한 네 집안 꼴은 끝장났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호세아야, 그 음란한 여자가 다른 남자 만날 때 네가 값을 치러라.” 여기서 값을 치르는 거예요. 그것을 호세아에서는 사랑이라 합니다. 본인이 해결 안 되는 것을 값을 치름으로써 이게 죄사함이 되는 그 사랑 이야기가 선지자 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선지자는 이미 음란한 가정이에요. 엉망진창이에요. 당연히 진멸 대상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느냐? 예수님이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도 진멸받지만 진멸 받는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진멸 받는 그것마저도 예수님이 완성을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 자신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용서해낼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이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같은 체험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게 복이에요. ‘누구든지 내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으면 복이 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저주체험과 동시에 영생체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옛날 선지자의 그 삶이 오늘날 성도의 여러분의 일상이에요. 여러분의 일상입니다.
자, 그 일상을 주께서 가동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항상 처음부터 다시! 항상 처음부터 다시! 네 계획에서 손 떼고 다시! 네 계획과 기대에서 손 떼고 다시 뭐든지 다시! 우리는 내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멸을 무시하고 내 계획과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그 계획과 목표를 무산시키지요.
왜? 진멸이 가동되니까요. 진멸이 가동되니까 나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내가 손을 뗄 수밖에 없는데 그 손 떼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 다시 은혜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증인 안 되려야 안될 수가 없지요.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까 호세아의 경우를 들었지만 디모데전서 3장 2-4절에 보 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감독 직분을 맡기려면 감독은 이런 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이것은 언제든지 감독 된 사람이……, 그 당시 이방인들은 감독이라 했고 유대인들은 장로라고 한 거예요. 요새 같으면 목사쯤 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개인적으로서 자기의 신앙이나 자질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다음에 나오는 것, 4절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 찌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개인적으로 자기가 정결하고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행세 똑바로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식구라 하지만 남이잖아요. 내 자식이라도 아내라도 남 아닙니까? 그런데 감독 된 자가 뭘 해야 된다? 남까지, 자식이라는 남, 아내라는 남까지 잘 다스려야 감독다운 감독이 된다, 교회의 말씀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무슨 수로 그렇게 하겠어요? 방금 오늘 들었던 말씀에 입각하면 방법이 있습니다. 뭐냐? 자식들에게 진멸해버리는 겁니다. 진멸로 다스리는 거예요. 물론 감독 자기도 포함시켜야지요. 그래서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멸로 내 계획과 내 기대, 내 소원 작살 나고 다시 그 진멸 가운데, 하나님의 진멸 가운데서 주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주와 함께 하기 때문에, 주님의 체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 가운데서 말씀의 온전함, 주님의 온전함으로 그것이 은혜로써, 죄사함으로 값을 치르는 값 치름의 은혜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같이 동행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 나 이번에 총 잘 쐈어.” “에이, 진멸 받아라. 인간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거기에 현혹되면 안 돼. 우린 마땅히 죽어야 될 사람이야.” 그게 바로 다스림이에요. 어떤 우리의 자랑거리나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는 것, 이런 것을 주께서는 지금도 묵사발 내시고 그 가운데서 내가 다 이루었다, 값을 다 치렀다, 그것만 증거하는 것이 주와 함께 동행하는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것도 아님을 말로는 알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은근히 나름대로의 희망과 기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와 달라는 소리나 하지 예수님의 아픔과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못하는 저희들, 주께서 날마다 진멸해서 이제는 주님의 그 영생에 참여하고 주님의 아픔에도 참여하면서 이 진멸 당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진멸을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