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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강, 419강) 속임수(2), 복된 말씀 230207

정인순 2023. 2. 8. 09:12

418강                 음성                   동영상

419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18강-YouTube강의(속임수 시편 119:118)20230207-이 근호 목사


제418강, ‘속임수’. 진리로 세상을 만들어놨는데 그 진리가 진리답기 위해서는 필히 거기서 속임수가 발생되어야 됩니다. 속임수를 통해서 진리를 파악해야 돼요. 그 방식을 드러내는 과정이 구약과 신약입니다.

일단 구약에서 속임수가 세상을 덮어줘야 돼요, 속임수가.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속임수에 의해서 피해보는 사람이 발생되어야 돼요, 속임수에 의해서. 제가 이렇게 하면 결국 진리는 언제 나타나느냐? 속임수부리는 자리에서 피해를 보는 그 분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그때 나타나요.

그럼 우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가만히 있고 누가 진리를 솔솔 가르쳐주게 되면 우리는 꿀떡 꿀떡 그 진리를 받아서 내 안에 진리가 차곡차곡 쌓여 내가 진리의 사람이고자 하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방금 제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뭐가 빠집니까? 피해를 봤다는 요소가 없죠.

그냥 주는 대로 꿀떡 꿀떡 받기만 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진리를 내 안의 진리로 받아들이면서 피해보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게 바로 속임수입니다. ‘피해보지 않고 진리에 접근합니다.’ 이게 바로 속임수에요.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우리는 성경 바깥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안에다가 성경을 바라보는 우리 말고 성경 안에 어떤 분을 세웠어요. 그리고 모든 성경말씀은 누구한테 집중되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성경 안에 계시는 그분을 향하여 모든 말씀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성경에서 빼먹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배제합니다. 배제하고 성경말씀은 성경 자체 안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어요. 이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옵니다. 내가 말씀을 위해서 한 사람을 세웠다. 택한 자를 세웠는데 모든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고 그분에게 몰려갑니다. 그분에게 다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분 혼자 홀로 성경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말씀임과 동시에 성경 구약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할 수 있는 어떤 등장인물과 겸해서 봐야 됩니다. ‘어? 말씀 있네. 말씀 지켜야지.’ 이래가지고는 안 되고요. 그래서는 안 되거든요. 안 되고. 그건 바리새인들이나 하는 짓이고.

‘성경말씀, 이 말씀 있는데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또 누구 하나 등장했지?’ 이렇게 두 개를 같이 연결시켜서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따박따박 성경말씀은 옳은 말씀이니까 진리니까 나는 진리 되고 싶고 성경말씀은 진리니까 진리 되고 싶은 내가 성경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게 진리가 아닌가?’ 안일하게 그렇게 생각이 되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빠져버렸어요? 성경 자체에서 내세우는 인물이 빠져버리죠. ‘성경말씀은 내가 진리 알아서 진리 안 사람으로서 구원받으면 되지.’라는 이 안일한 생각 속에서 누가 배제됩니까? 예수님이 배제되죠.

그럼 우리 생각에는 ‘아,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잘 지켰단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모델삼아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경말씀 잘 지키면 되네. 지키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경우에도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께서 성경말씀 지키기 위해서 희생당했다. 어려움을 당했다.’ 그것도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빠뜨리지 말아야 될 것은, 성경말씀 자체가 어떤 인물을 내세우고 그리고 그다음에 그 인물이 성경말씀 지키는데 엄청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희생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착하고 착한, 말씀대로 사실 분을 누가 그렇게 힘들게 했는가? 이런 생각 들겠죠. 누가 힘들게 했는가? 바로 속임수를 부리는 자들이 힘들게 하죠. 속임수의 반대말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반대는 속임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누구한테만 다 몰아세웠다? 예수님께만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어느 편이냐? 진리 편일까요, 속임수 편일까요? 속임수 편에 속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내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가를 들추어내는 말씀으로 봐야 돼요. 이 말씀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은 꿀같이 달다고 하죠. 꿀같이 달면 뭐 초콜릿이나 벌꿀 먹으면 되겠죠. 그러나 꿀같이 달다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내가 몰랐던 나의 속임수가 속 시원하게 뽑혀져나갈 때 그때 꿀같이 달아요. 아!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때 꿀같이 단 말씀이 되는 겁니다.

시편 119편 118절에 보면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저희 궤사는 허무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 119편 119절에 보면, 외우기도 쉬워요, 119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 시편의 ‘나’는 누구를 의미하느냐 하면 껍질은 다윗이에요. 그러나 그 다윗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을 선지자로 미리 예수님보다 먼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윗 태어났을 때 다윗은 구원받는 인간의 대표라 할 수 있어요. 그 시대, 다윗 시대에 구원받는 대표는 다윗입니다. 이 말은 뭐냐? 그 시대의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받을 사람의 대표자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 그 대표자를 누가 세웠는가? 예수님이 다윗 안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것을 다윗 언약이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에게 오면 이삭의 하나님, 야곱에게 오게 되면 야곱의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이름이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 다윗의 일대기를 보게 되면 다윗은 우리 보통사람하고 똑같아요. 율법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안 다윗이 율법대로 못 살게 되는 경우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 율법을 어긴 게 아니고, 율법을 아는 다윗이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경우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워두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갈하고 관계해서 이스마엘 낳은 게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이 약속한 자식이 아닌데. 야곱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누구를 뽑아줄 때는 네가 진리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거예요. 그걸 흔히 말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말도 맞는데 구원받기 위한 절차가 있어야 돼요, 그 안에 절차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능력과 본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취지로 우리를 건지시는 거예요. 내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구원시킨 겁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악인이 되어야 되는데 다윗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너는 우리 편. 너는 나한테 죽어야 될 사람.’ 이렇게 단정 지으니까 다윗이야말로 율법도 모르면서 속임수를 쓰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율법 주고 다윗이 율법대로 못 살게 함으로써 다윗은 ‘나는 하나님을 속이는 자’로 들통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죠. 예상 밖에 달죠. 예상 밖에 단 거예요.

‘아, 하나님 믿으니까 이렇게 좋다.’ 그걸 능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비로소 이것은 내 안의 주께서 하신 일이지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419강-YouTube강의(복된 말씀 마태복음 5:11)20230207-이 근호 목사


제419강, ‘폭력’. 폭력은 가한 사람이 있고 맞는 사람이 있죠. 하지만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나쁘다는 것이 인간 세계의 상식입니다. 이 폭력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평화에요. 좋은 게 좋다는 뜻이에요. 좋은 게 좋다. 어지간하면 눈 좀 감자. 그냥 넘어가자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폭력의 반대말, 평화에는 어떤 걸 사람들이 고대하고 있느냐? ‘심판 없음’을 고대합니다. 아, 이거는 많이 나간 거죠. 하나님께서 자비만 베풀어주시고 심판은 그만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교리에 그런 게 나오죠. 지옥이 없다. 하나님은 어질어도 너무 어질어서 그 어진 하나님이 잔인하게 자기가 만든 존재인 사람을 그렇게 처참하게 영원히 불구덩이 속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할 때 하나님의 여린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래서 뭐 겁주는 식으로 ‘너 지옥 간다’ 이런 말은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지옥은 없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자기 사는 걸 평화롭게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져가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한테 누구한테든 물어보세요. 누구한테 물어봐도 ‘인생 굴곡지게 살래, 요란스럽게 살래? 안 그러면 조용하게 살래?’ 이건 묻는 사람 잘못이죠. 사람은 여유만만하고 아무 탈 없이 무탈하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방금 사람들이 원하는 여기에 은연중에 무슨 요소를 지금 자꾸 이렇게 거부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심판하지 않기. 하나님이 됐든 누구든지 나를 심판하지 말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복’이라고 이야기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아무 탈 없고 건강하고 여유만만하고 또 실제로 여유 있고 풍족해서 모자람이 없이. 다 나왔죠. 건강, 그리고 아무 탈 없고 돈 많고 거기다 뭐 만사형통하고. 사람들이 이걸 행복의 요소라고 이렇게 만들어내는, 그걸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만들어내는 그 의도는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어떤 식으로라도 나를 심판하지 말라는 의도가 강렬합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딱 마귀죠. 바로 마귀가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마귀는 창세 전부터 이미 심판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마귀는 지금도 이 세계에서도 오직 하나, 예수님 존재, 예수님 하신 일을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다 하고 있고 그 노력이 사람마다 다 심어져있어요. ‘우리끼리 다른 이야기는 다 하되 예수 이야기만은 하지 말라.’ 이게 은연중에 다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자, 복의 구성요소에서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거기에다가, 너희에게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아예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복이 없으면 복은 외부에서 들어와야 돼요. 들어오는데 복이 그냥 평화롭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구성하는 복이 우리 속에 합류가 되어버려요. 합류가 되는 순간 뭐가 복이냐 하면, 멀쩡한 내 인생 놔두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우리가 점철되는 것. 점철되는 것, 예수님에 의해서 덮쳐지는 것 이걸 예수님께서는 우리 말 딱 한 자로 ‘복’이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너 네 인생 있나?” “없습니다.” “왜 없지?” “예수님의 인생이 나를 덮쳤잖아요.” “그게 복이야.” 이런 뜻이에요. 그게 복이야. 내(예수님) 인생이 덮치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덮치게 되면 예수님께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모욕이 함께 느껴지는 자가 복이 있는 자에요.

우리는 옆집에 살아도 옆집의 아픔을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왜? 그 사람 신체 따로 있고 내 신체 따로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옆집에 사는 사람이 “내가 어릴 때 동급생이 나를 고데기로 지져가지고 지금도 여기 흉터 있다. 아프겠지?” 하면 우리는 “아이고, 많이 아팠겠다.” 많이 아팠겠다는 위로의 말은 건넬 수 있지만 위로의 말 내용이 아주 허접해요. 뭐 내용이 없어요. 그냥 말뿐이에요. 자기가 고데기로 자기 살갗을 지지지 않는 한 얼마나 아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몰라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몰라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탄산가스밖에 안 나와서 이산화탄소가 모자란다고 해도 제가 알겠어요? 비닐봉지가지고 치료한다는 걸 제가 알겠습니까? 모르죠.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얼마나 고난이 심했겠는가. 내가 고난에 동참해야지.’ 이거 불가능합니다. 이거 실패에요. 이거는 인간으로서 신앙적 허세 떠는 겁니다. 안됩니다. 자기 옆집 사정도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사정에 우리가 합류됩니까? 안되죠.

그러니까 뭐냐? 복을 받아야 돼요. 복을 옴팍 받아야 돼요. 복을 옴팍 받아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한 그 상처와 아픔, 일종의 폭력이죠, 폭력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제 말이 맞다면, 그게 복이라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니까 그 말이 맞죠. 복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투입됨으로써 시작되는 거죠. 우리가 복을 얻으러가는 게 아니고 누가 덮치는 거죠.

그럼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여기 뭐 욕먹고 핍박받는다는데 내가 복 받지도 않았으면서 복 받은 시늉한다고 의도적으로 내가 막 ‘으윽, 순교다. 나는 지금 주님을 위해서 나흘 동안 굶었습니다.’ 이런다고 그게 복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쇼하는 거죠. 그건 연기하는 거 아닙니까, 연기. 그것도 대사 있는 연기하는 것. 그건 흉내 내는 거죠. 모방하는 것이고.

그럼 어떤 경우에 진짜 예수님과 함께 복이라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이걸 못하는데 주님께서 복이라 해놓고 주께서 주신 복과 관련되어 있는 말씀들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줘요. 그 내력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고난 받고 폭력을 당하는 그 이유가, 제목을 ‘주님이 당한 폭력’이라 합시다, 폭력을 당한 이유가 예수님이 그 말씀만 포기하면 그런 밉상을 안 받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께 성령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호강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목적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아버지가 주신 말씀을 다 이루는 목적이 있어요. 그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게 하죠.

그래서 어떤 자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복을 받은 사람이냐? 누가 싫든 좋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에요.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 그런데 그 말씀은 ‘내가 지켜야지’해서 이끌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켰느냐’에 대해서 끌리는 사람. 내가 그 말씀을 새삼스럽게 ‘지켜야지’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못 지키는 말씀을 어떻게 이 말씀을 다 이루었지?’라는 식으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유도합니다.

어떤 상황이 되게 되면,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어떤 회사에서 이야기하는데 자기 말이 안 먹힌다. 그럴 때 자기 말이 뭐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 말 따르고 나만 딱 떨어질 때, 남아 있을 때 그때 딱 떨어지면서 생각드는 것이 뭐냐? 좁은 길로 가는 게 영생이다. 뭐 그거하고 이상하게 관련도 없으면서 갑자기 뭐가 탁 튀어나옵니까? 마태복음 7장에 영생으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이 찾지 않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이 딱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영생으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그 말씀이 유난스럽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외로워야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그 말씀을 주께서 다 일으켜서 주님이 나에게 네가 외로워도 슬퍼하지 말라는 식으로 주께서 주신 것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 다이아몬드처럼 그때그때 반짝이는 거예요. 말씀이 반짝이는 거예요.

이렇게 다 이루어진, 주께서 이루신 말씀이 늘 반짝일 때 목욕탕에 가든 어디 놀러 가든 크루즈 여행을 가든 어딜 가도 말씀이 반짝반짝 반딧불처럼 떠오를 때 그게 바로 복된 사람입니다. 지켜라, 가 아니라 이미 지킨 말씀이기 때문에 그냥 주께서 내가 이 말씀을 내가 지켰다는 말씀을 떠오르게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