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3:10-15 / 움직임과 멈춤
움직임과 멈춤
이근호
2022년 1월 18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0-15
(3:10)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3:11)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3:12)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돌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3: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3:14)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3: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주님께서 홀로 맹렬한 전사(戰士)가 되셔서 전쟁을 벌리십니다. 전쟁에는 필히 적이 있어야 하고, 왜 그 적을 공격해야 하는지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홀로 전쟁하셔야 하는 이유는, 주님만이 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있는 움직임은 주님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적들은 그들 나름대로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따로 자기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들이 따로 자신의 삶을 도모하게 된 것은 안정적인 대자연의 운용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정기적인 움직임과 그리고 한계를 지키는 바다와 강의 쉬지 않는 활동 때문입니다. 적들은 대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자연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시면서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해와 달은 그 처소에 머물러야 하고, 바다와 큰 파도는 제멋대로 요동칠 수가 없습니다. 즉 대자연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살고자했던 그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 적들의 조종받는 모습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진정 움직이고 대자연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대자연은 무슨 뜻에서 그동안 움직여 왔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민수기 2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 조치란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물게 한 사건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5-6)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원수가 들어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의기양양했던 그들을 죽음의 사막으로 몰아세우셨습니다. 이는 곧 죽음의 지역으로 몰고 가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자라고 결코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여느 인간들처럼 자신들은 살아나는 것을 인간의 권한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랬더니만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불평과 원망은, 자신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 존재라고 뭐라도 부지런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데서 나왔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살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한 의미가 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체 ‘성취’라는 것을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내신 바로 그 성과를 적용하는 경우에만 성도는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그러나 인간들의 활동 의미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원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고 쟁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들의 활동을 배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속에 들어있는 악으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홀로 이루신 일에 일절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 못하는 무관한 일로 만드십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는 자들이 무슨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민수기 2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십니다. 사방에서 잇그라엘 향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물체가 보입니다. 불뱀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악마의 움직임에 종속에서 그 움직임을 벗어날 수가 없을뿐더러 그 움직임에 지배당하는 움직임을 보일 뿐입니다.
여기에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든 놋뱀입니다. 모세는 놋뱀을 들고 일일이 불뱀에 물러 죽어가는 자들에게 접촉해서 그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보이는 한 가운데 놋뱀을 고정시켜 놓고 “쳐다보는 자는 다 낫더라”라는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활약상이나 활동이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3:14-15에서는 이 놋뱀이 진정 영생에 합당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것은 이 지상에 하늘로 들려야 하는 움직임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움직이는 물체를 고정된 물체가 치료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정된 것이 영생을 줄 수 있는 겁니까? 영생이란 하늘의 언약궤와 관련해서 지상에 주어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부지런히 사방으로 움직여봤자 그저 지상에서 지상으로 움직임일 뿐입니다. 하늘을 향해 움직일 수는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늘로 통하는 지점은 언약궤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어린 사무엘은 언약궤 옆에서 밤새 숙직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3-4)
선지자들의 움직임은 본인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지시에 부응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언약궤가 하늘과 땅 사이를 부지런히 움직인다고 봐야 합니다. 그 언약궤를 이용해서 자기 움직임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몰락해야 될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들은 블레셋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적들에게 빼앗깁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언약궤로 인하여 블레셋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미 죽어 있는 자들이 감히 살아서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것처럼 설쳐대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인자가 이 땅에 오게되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떨어져 움직임을 멈추게 됩니다.(마 24:29-30) 그것은 온전히 주님만 활동하시여 그 결과로 만물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뭘 해고, 뭘 안하고 상관없이 부레처럼 속에 있는 공기처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요소로 인해 이 지옥에 하늘로 떠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멈추면서도 주님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강-하박국 3장 10-15절(움직임과 멈춤)230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3장 10-15절까지입니다.
하박국 3:10-15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전사(戰士), 전쟁하시는 분, 친히 전쟁의 주가 되셔서 이 땅에 쳐들어와서 적들과 싸우는데 이 땅에서 주께서 일하시는 목적은 13절에 나옵니다.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붙잡고 있는 그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는 것, 그러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하시면서 주께서 사람이나 악한 사람만 상대하면 될 텐데 주께서 나타나실 때 땅, 그리고 산, 그리고 바다, 그리고 11절에 해와 달, 그 대자연까지 그들 본연의 활동을 정지당한다든지 주님께 짓밟혀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진정한 적이 누구냐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왔다가 “너 마귀지? 너는 나를 안 믿었지? 가자, 지옥으로!” 이러면 될 텐데 왜 바다, 산, 그리고 해와 달, 그런 대자연에 속한 요소들까지 하나님께서 관여를 하셔서 그들을 주께서 다루시는 그 저의, 이유가 뭐냐? 이걸 꼭 아셔야 돼요.
그 힌트가 여기 11절 끝에 나옵니다. “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멈췄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적은 어떤 것들이 적이냐?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적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주님만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적들을 찾아내는 방법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선교합니다, 전도합니다, 열심히 찬양합니다.” 이런다고 하나님의 적이 아닌 게 아니고 그렇게 전도하고, 선교하고,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하고, 하나님의 활동을 많이 하는 그들의 움직임, 자신들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일과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게 하나님의 적입니다. 주님의 적이에요.
애를 키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밭에 나가 열심히 경작하고, 어부는 고기 잡고, 각자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고, 공직에 있는 사람은 열심히 공직생활 하는 것, 그렇게 자기 활동을 하시라는 말이지요. 하시되 그것하고 하나님의 일하고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우리 주님 편입니다. 나의 움직임은 주님께서 아예 보지도 않아요. 어떤 움직임도, 신체적인 활동도 안볼뿐더러 내 마음가짐이 어떠냐, 도 안 봐요. 보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슬프다 해서 달도 같이 슬퍼하고 눈물 줄줄 흘립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하나님께서 뭔가 제대로 움직인다, 할 때 해와 달과 산과 바다도 같이 영향을 받아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지 우리가 눈물 찔찔 흘린다고 같이 “파도야, 너도 같이 춤을 추어라.” 그런 것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이 인간 자신의 구원에 전혀 보탬도 안되고 도움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점을 알고 있어야 돼요.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적은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의미 두는 것은 전부 다 적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움직임에,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된다든지 또는 반대로 하나님에 방해된다든지 하여튼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데 자기 움직임에 의미를 두는 것, 그것은 왜 그게 적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움직임 발자취를 가리기 때문에, 훼방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생활의 적이 뭐냐? 신앙생활의 적은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노하실까, 노하지 않을까, 그런데 신경 쓰는 게 본인신앙의 적이에요. 예를 들면 성도라 하는 것은 삶과 죽음, 옳고 그름, 성취와 미성취, 실패와 성공, 실수와 정답, 여기에 성도는 아무 해당사항 없습니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옳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 성취해도 그만 미성취해도 그만, 실수해도 그만 정답이라 해도 그만 아무 의미 없고, 실패도 아무 의미 없고, 성공해도 의미 없고,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식은 어떻게 인간들이 성취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은 주님이 홀로 성취한 것을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하느냐?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인간의 방식은, 내가 어떻게 목표와 목적을 달성하느냐? 이게 인간의 방식입니다. 주께서는 홀로 다 이루셨거든요. 홀로 “다 이루었다.”(요 19:30) 했어요.
따라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혼자 이룬 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그게 주의 일이지 “너 나하고 같이 일하자.” 이것은 마귀의 복음입니다. 마귀의 주장이에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제하고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돼요. 철저하게 배제해요.
그렇다면 마태복음 24장 29-30절 본문을 제가 읽어드리고 이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자, 마태복음 24장 29-30절 이 내용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해와 달이 움직였어요. 정기적으로 움직였다, 이 말이지요. 움직였는데 이제 주님이 뜨니까 스톱, 하라는 거예요. 제대로 주님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도록, 주님만 움직인다는 사실, 해와 달과 별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주님만이 제대로 의미 있는 움직임이지 우리 움직임은 이 세상일과 별로 상관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도록, 주님만이 이때껏 움직여 왔다는 것, 주님이 떴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잠잠해야 돼요. 그 앞에서 스톱, 이 되어야 돼요.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인 것은 주님의 움직임의 영향력 때문에 움직인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임에 나설 때는 주님 때문에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거예요.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11절에도 해와 달은 그 처소에서 멈춰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 하나님의 적은 제가 분명히 단정했어요. 초반부터 단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적은 뭐냐? 움직이는 것. 그러면 그 적을 주께서 오셔서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거지요. 그 찾아내는 방법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먼저 시범을 보이셨어요.
민수기 21장에 보면 거기에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민수기 21장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험난한 사막 길 그 속을 통과하는 거예요.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척박하기 짝이 없는 그 삶의 환경, 그 삶의 환경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세운 거예요. 죽음의 환경 속에 밀어붙인 겁니다. 밀어붙였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이제 우리는 팔자 폈다.’고 좋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죽으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것도 사랑해서 택하신 백성을 왜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동안 활동을 부지런히 많이 했어요. 굉장히 활동 많이 했어요. 살아보려고. 이게 뭐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까? 우리가 매일의 삶이 왜 움직입니까? 살려고 움직이잖아요.
살려고 움직이는 게 자기 구원과, 천국 가는 것과, 주의 영광과 무슨 관련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도 자기 생각에 몰두해서 ‘어쨌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아직도 인간들은 주께서 자기를 죽음에 몰아넣는 이유를 몰라요. 죽음에 몰아넣는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을 죽음에 몰아넣어야 그 이스라엘 백성 각각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적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몰아넣으니까 민수기 21장 4,5절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하찮은) 식물을 싫어하노라.” 이렇게 했어요.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원망과 불평을 끄집어내요. 이스라엘백성에서 나오는 원망과 불평은 반드시 죽음으로 세차게 그냥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밀어붙여야 비로소 원망과 불평이 나와요. ‘아, 우리 안에 하나님의 괴물, 하나님의 적이 들어 있었구나. 우리는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몰랐지.’ 그것을, 주님께서는 그 적을 뽑아내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움직인다, 하는데 주님은 살아 있는 걸로 보지 않고 죽은 것으로 봐요.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움직여도 소용없고 안 움직여도 소용없고, 이래 살아도 저래 살아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아무 의미 없는 일들만, 그 짓만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가 정말 지극히 기쁜 소식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뭘 해도, 아니 뭘 안 해도, 내가 성취를 해도 성취를 안 해도, 목적달성 안하고 실패해도 나랑 무슨 상관있는데?’ 이렇게 되어야 기쁜 소식을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왜? 주님은 적용하는 분이지 우리한테 뭘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아담이 요구해서 실패했잖아요. 그러니 우리한테 뭐 요구 안 해요. 뭐 볼 것 있다고 요구합니까?
그렇게 몰아붙이니까 주님께서 비로소 움직임자체가 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움직이는 낯선 짐승을, 낯선 피조물로 그들을 포위하도록 사방에서 불러서 집중해서 공격하게 만듭니다. 그 움직임이 뭐냐? 불뱀의 움직임입니다. 불뱀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그걸 치료하는 놋뱀의 고정함과 대비가 돼요.
불뱀은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불뱀이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둘 다 한 패였어요, 둘 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불뱀이나 한 패였습니다.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움직일 필요 없어요. 딱 고정시킵니다. 놋뱀입니다. 놋뱀 고정시켜 놓고 “움직임을 멈추고 고정된 것을 쳐다보라. 그래야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장 14, 15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죠. 그 영생, 꿈에나 그려봤나? 그 영생, 생각이라도 해봤나? 그 영생, 그 귀한 영생,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 영생 어떻게 얻는가? 네가 움직임을 스톱, 하면 돼요. 내가 움직이는 것은 내속의 괴물이 계속해서 움직여 왔던 겁니다. 움직이게 촉구한 겁니다. ‘네가 빠릿빠릿, 움직여야 밥이라도 먹고 살지.’
밥 먹고 살면 뭐합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그래도 밥 먹어야 살지. 그래, 뭐라도 해야 돼.’ 그게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봐! 해도 움직이잖아. 달도 움직이잖아. 별도 움직이잖아. 바다도 움직이잖아. 다 움직이잖아.” 악마는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딱 뜨니까 주님 뜻은 “어이, 해! 달! 너희 집에서 스톱, 해. 너희 처소에서 움직이지 마. 멈춰.” 하늘의 별도 우르르 다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고, 달도 빛을 잃어버리고, 바다도 스톱, 모든 것은 스톱, 입니다. 왜? 움직여봐야 무의미하기 때문에. 진짜 의미 있는 움직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번수련회에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참석을 했어요. 그 애는 말씀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이런 적도 있어요. 초등 3학년 애가 “형, 같이 놀자.” 하니까 “너는 내가 여기 놀러온 줄 아냐?(난 말씀 들으러 왔거든!)” 이렇게 할 정도로 대단한 발언을 했던 아이인데 그 애가 이번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할머니에게 말하기를 “할머니, 이번 수련회 내가 0퍼센트 이해 했다.” 하나도 이해를 못했다 한 거예요. “할머니는 몇 퍼센트 이해했는데?” 할머니 체면이 있지요. “난 60퍼센트!” ‘……, 60퍼센트라고? 난 못 믿겠어.’ “할머니! 난 0퍼센트”라고 했어요.
왜 이해를 못하는가? 초등학교 6학년이 얼마나 싸댑니까? 얼마나 움직입니까? 뭔가 하나 더 챙기고 알고 얻으려고 하니까, 움직임을 보이니까 하나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멈추면 되는데 움직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왜 자꾸 싸대고 움직이고 얻으려 하느냐? 초등학교 6학년생이 뭘 알겠어요?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80넘어도 안 받아들이는데요. 80넘어도 안 받아들여요. 죽음 직전도 안 받아들여요. 96세 되어도 안 받아들였어요. “전국~ 노래자랑!” 하고 있어요. 안 받아들여요. 자기가 뭘 해도 이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 성공 실패, 죽고 사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언제 알아야 됩니까?
그렇게 싸대고 설치니까 복음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이 딱 떴을 때 해와 달, 별들도 그냥 있어도 죽은 해, 죽은 달, 죽은 별이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만큼은 악마하고 결탁이 되어서 싸대고 설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 속에 불뱀 넣어서 불뱀과 만나게 해줘요. 민수기에서.
불뱀이 징그럽고 불길하잖아요. 불뱀과 만남으로써 그 뱀의 운명에 종속되고, 그 뱀마저 이기지 못하는, 뱀에 굴복하는, 뱀의 공격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 바로 너희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 내가 이 황량한 사막, 죽음의 환경에 집어넣어야 네 속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와요.
모세로 하여금 그 놋뱀을 고정시켰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놋뱀은 고정된 거예요. 놋뱀이 불뱀에 물려 퉁퉁 부어 있는데 앞앞에 찾아가서 놋뱀 가지고 지지직, 레이저 막 쏘면서 “됐고, 그 다음!” 지지직,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놋뱀을 한 장소에 세워버려요. 세우고,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그 놋뱀, 고정된 것을 쳐다보기만 해도 낫습니다.
왜 그 놋뱀의 효과가 위력이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장 14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여기에 고정된 놋뱀이 들렸다 하는 거예요. 들리는데 그 방향이 어느 방향이냐 하면, 땅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향이에요. 땅에 오셨던 주님이 하늘로 올라갈 때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린다.”
들리는데 이 들리는 게 뭐냐 하면, 제대로 의미 있는 움직임이 되는 거예요. 땅에서 땅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그 움직임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상에는 영생이 없다는 거예요.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수평적으로 백날 동서남북 싸대봐야 영생 없어요. 여기 있던 인간이 동쪽으로 가도 죽은 거예요. 서쪽에 집에 있을 때도 죽었고, 군대 가도 죽었고, 그런 거예요. 어디 가도, 이 땅에 있는 인간은 어디 가도 다 죽어요. 뭐 누구 귀인을 만나도 죽고, 귀인을 안 만나도 죽고 그래요.
지금 움직임은 제대로 움직임, 그 제대로 움직임은 뭐냐? 언약궤 있는 쪽으로 움직여야 돼요. 하늘에 있는 언약궤 있는 쪽으로 움직여 줘야 되거든요. 그 움직임을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을 붙잡고 “열심히 하면 산다. 복 받는다. 네가 착하면 하늘나라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구라를 떨고 거짓말을 해 왔던 겁니다.
가만있으면 될 일인데 자꾸 교회 목사가 교인들로 하여금 활동케 하는 거예요. 교인들도 그것도 모르고 무슨 활동을 해야, 교회에 뭘 해야 영생 얻는 줄로 알고 가만있으면 신앙인 아닌 것처럼 착각들 하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 교인들은 느긋합니다. 활동한 게 있어야지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기름 부은 자를 빼내고, 기름 부은 자는 메시아죠, 예수님이지요, 빼내고 나머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 들리는 것을 방해한 자의 머리를 친다 했거든요. 하박국 3장 13절에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머리를 치는 거예요.
이것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후손이 뱀의 머리를 치는 겁니다. 이것은 최초로 등장한 예수님의 활동을 말하는 거예요. 머리를 치는 게 활동이에요. 정타 때려야 돼요. 엉뚱한데 때려서 다시 두 번째 때리고 그런 것 없어요. 정타로 머리를 쳐야 돼요. 정타로 머리를 치기 위해서는 그 머리 부분, 모든 인간의 활동이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아서 악마로부터 흘러들어왔다는 그러한 증거가 포착이 될 때 수색영장 쳐서 머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잡범만 잡아서 될 일이 아니라니까요. 악마를 잡아야 돼요. 악마를 잡아서 쳐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를 잡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의 움직임 안에 모든 움직임을 판결내릴 수 있는 장치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련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3장 3, 4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어린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 사무엘이 어디서 숙식을 했느냐?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에 어린 사무엘이 함께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아까 우리가 전개했던 공식을 적용해 봅시다. 어린 사무엘은 움직이는가, 안 움직이는가? 그것부터 따져봅시다 어린 사무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 사무엘상 3장 3, 4절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는데 언제 어린 사무엘이 움직이느냐 하면, 언약궤 쪽에서부터 어떤 음성이 들려와요.
사무엘상 3장 3-5절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선지자 사무엘이지요. 선지자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쉽게 말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살았는가? 주께서 이끄는 대로 살았어요.
선지자가 태어나서 평생 목석처럼,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는 게 아니고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선지자를 불러냈기 때문에 우리보기에는 선지자도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선지자의 활동이 아니고 주께서 불러내니까 움직이는 거예요. 인간이 안 움직인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움직인다는 그 티를 내는 반응, 주의 그 움직임에 동조해서 움직임, 그것은 사무엘이 움직이는 게 아니지요. 주님께서 움직이는 거지요.
사무엘을 세 번 부릅니다. 세 번 부르는데 사무엘은 엘리 선지자가 부른 것으로 알고 가는데 엘리 선지자가 나중에는 알아요. “이것은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직접 너를 부른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사무엘이 어리니까 가르치는 거예요.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그래서 사무엘이 나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엘리에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 어떤 말씀을 하시더냐?” “제사장 집구석이 망한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하여 버렸답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린 사무엘이지만 그 예언을 선포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그 예언에 대해서 뭘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한 말씀을 하나님 자신이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남긴 말씀을 하나님 자신이 거두어서 하나님 스스로 그것을 완성해놓고, 남아 있는 것은 자기 백성에게 그걸 적용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선지자가 아는 거예요. 내가열심히 했으니까 복 받아서 천당간다는 게 아니고 모든 움직임은 주님만 움직이는 거예요. 주님이 움직였는데 내가 만약에 의미를 두고 움직여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누가 했는가? 망했던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이 그 짓을 한 거예요.
놋뱀처럼 언약궤는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활동하는 게 언약궤에요. 그런데 블레셋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사무엘상 4장 4절에 보니까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여호와 궤가 움직인 게 아니고 여호와 궤를,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망할 제사장 가족, 그 가문에 속한 인간들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자기가 전쟁의 주도자가 되어서 자기전쟁 치른다는 그 움직임이, 하나님 앞에 무슨 영향을 주려고 자기가 움직이는 거예요.
언약궤를 움직였더니 언약궤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소용없을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언약궤에 지시를 내린 쪽이 인간이기 때문에. 홉니와 비느하스 쪽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영생이 있다는 그 언약궤에 함부로 지시하고 명령했던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본인이 죽은 인간인 것을 우리 교인들이 알아야 되는데.
제가 그랬지요. 성도는 삶과 죽음이 아무 해당사항이 없다고요. 죽어도 성도고 살아도 성도되는 경우는 주님이 자기 약속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왕 사는 것 남 보기에 그럴싸하게 복 받았다, 소리 들어가면서 내가 남에게 “야~, 역시 믿음 좋으니까 복 많이 받았네. 은혜 받았네. 신앙 좋다.” 이런 소리 들으려고 본인이 움직이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식으로 간곡하게, 간절하게 통성기도에다, 중보기도에, 골방기도에, 할 수 있는 수법을 다 하니 그게 바로 마귀 짓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그게 마귀 짓인 거예요.
누가 누굴 움직이는데요? 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 있는 인간을 움직입니까? 왜 그걸 이용해요? 그래서 한수 더 뜹니다. 하나님께서 하는 것을 다 보니까 자기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요. 이제는 또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시키는대로 하이소. 하나님은 ……하고, ……해야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고 흠모의 대상이 되어서 앞으로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진득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내 욕망의 대상으로 계속 이어갈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기도한대로만 그냥 해주이소!”
갑자기 나 훈아 멘트가 되어버렸는데요. “한번 해 주이소! 이제부터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내가 섬기겠습니다.” 이게 철야기도 요지에요, 요지. “우리 자식이 아파하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상태인 이유,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으라고 몰아넣은 거예요.
이미 몰아넣기 전에도 죽은 자인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몰아넣어야 그 인간 속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인간이 막다른 그 때 티가 다 나잖아요. 하나님 생각 안하고 자기 멋있게 살 생각만 하고, 자기 행복 추구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적은 누구냐? 바로 움직이는 인간이에요, 움직이는 존재에요. 그저 지상에서 싸대야 한다는 거예요.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사무엘상 4장 17절에 보니까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야~,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것이 과연 성립될까요? 그것은 사무엘상 5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는 그냥 가만있어요. 가만있는데 사무엘상 5장에 보니 가만있는데 언약궤 앞에서 다곤 신상 손모가지 다 날아갔습니다. 4절에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래서 블레셋이 이 언약궤를 재수 없다고 치워버리려 하는데 가는 곳마다 블레섯 다섯 고을에 오지게 전염병이 퍼져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진정 누가 움직이는 쪽이고 누가 움직이지 않는 쪽입니까? 언약궤 앞에서 블레셋이라는 인간들이나 이스라엘 인간들이나 그들은 다 마땅히 이미 죽은 존재였어요. 죽은 존재입니다. 언약궤만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언약궤의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우리 주님이세요.
그래서 주님 떴을 때……, 해와 달과 별이 “어이구, 해야 잘 움직인다. 달도 잘 움직인다.” 그런데 주님 떴을 때는 “스톱! 멈춰! 너 움직임이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거야. 그냥 하늘에서 떨어져.” 우르르 다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에 별이 떨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 몰아넣어서 불뱀에 물려죽게 했을 때 불뱀이라는 그 뱀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그 뱀에게 어떤 인간도 이길 수가 없어요. 움직이는 자는 움직임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그 해결책은 움직이지 않는, 그저 꽂혀 있는 모세의 놋뱀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이 주님의 원칙이 신약에 그대로, 그대로 적용돼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에요.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
내 품에 둥지를 틀어봐
자, 이게 무슨 뜻이냐? 이렇습니다. 성도를 하나님의 부레로 만들었어요, 부레. 하나님께서 일부러 가라앉게 만들어요. 어디까지? 지옥 같은 세상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들어요. 가라앉아 가지고 이 세상과 얼마나 친화력이 있는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세상하고 똑같은지를 가라앉으면서 알게 하시고, 그 속의 부레 안에 있는, 풍선 안에 있는 요소로 떠오르게 만들어버려요.
내 요소는 가라앉고 내 안에 있는 새롭게 들어온 주님의 적용, 주님의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적용만이, 가만있어도 부레가 뜨네요. 독수리처럼 점점 올라가네요. 붕붕 뜨는 거예요. 부레의 주님의 요소가 별로 없을 때는 ‘아이고, 내 아들 군대 가서 지금 얼마나 고생하겠노?’ 이래가지고 새벽제단에 가서 기도하든지, ‘아예 제대할 때까지 나 교회에서 잘끼다.’ 이렇게 하다가 부레가 떠서 죽죽 올라오니까 그거 뭐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별거 아닌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처음에는 그들의 움직임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M16 총 분해하고, 조립하고, 제식훈련이니 사격이니 다 하는데 아이고, 그래봤자 부레속의 주님의 죄 용서함이 뜨면 그렇게 하는 내가 뭐냐? 오늘 본문의 해와 달이에요. “스톱! 멈춰! 내가 다 해줄게.” 우리 안에 부레, 빵빵하게 주님의 적용, 주께서 다 이루심, 십자가의 용서가 다 이뤄서 붕붕 뜨니까 세상에, 이 땅에 어디서 뭘 하면서 어떻게 산 것이 다 같잖은 일이고,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느그 아부지 몇 살 살았노?” “울아부지 백살 살았다.” “울아부지는 40에 가셨다.” 그 차이가 옛날에는 수치스러웠지만 40을 살든 백 살을 살든, 2백 살을 살든 뭐 그게 뭔데, 내가 앞으로 10년을 더 살든 내가 죽든 그게 뭔데, 그게 아무 의미 없을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성도한테는 ‘삶과 죽음’ 의미 없고, ‘네가 옳다, 그르다.’ 아무 의미 없고, ‘나 이거 성취 했어, 아이고, 나 그거 성취 못했어.’ 아무 의미 없고, ‘실패, 성공’ 그거 해당사항 없습니다. ‘실수했다, 이게 정답이다.’ 그 실수가 뭐가 의미 있습니까? 정답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들은, 부레 안에 악마만 들어 있는 인간들은 어떻게 망하느냐? 그것은 본인이 열심히 하는 그 일이 자기의 지옥행을 재촉하는 거예요.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가는 게 아니고 자기가 열심히 몰입하는 것, 열심히 몰입하는 그 일로 인하여지금 쉬지 않고 지옥 쪽으로 가고 있어요. ‘열심히 하자. 더욱 더, 더, 더, 더……’ 더 열심히 해서 나중에 도착해 보면 지옥인데요. 주께서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 세상이 차곡차곡 역사적 전통적으로 쌓여 있는 그러한 하나의 지질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지질층에서 꼼짝 마라, 하고 암석덩어리처럼 꽉 사방에서 조여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태어나는 것도 모든 행동하는 것도 숨도 못 쉬고 꽉 매여 있어요. 내가 미국 대통령 하고 싶다고 하는게 아니잖아요. 한국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겠어요? 꽉 매여 있지요.
그런데 거기서 메탄가스가 올라와요, 메탄가스가. 우리는 자기의 처소 ‘꼼짝 마라.’ 이걸 바꾼다는 것,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도, 고생해도 잘 안 바뀌어요. 성질도 안 바뀌고, 내 사회적위신과 포지션, 부모 잘 만나서 부잣집 막내아들, 나는 부모 잘 못 만나서 가난한 집 장남, 이 조건은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그러나 어떤 조건이 있더라도 거기서 가스가, 영적 가스가 올라옵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가스, “주께서 다 이루었다. 나는 성령으로 너한테 적용시킬 거야.” 그거 올라오는 것, 그 움직임, 그 움직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죄 많은, 지옥 같은 곳에 오셨다가 홀로 움직임, 그 움직임의 그 능력이, 우리 속에서 그게 피어나오는 거예요. 부레 안에 있는 주님의 복음의 요소가 여러분 속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 속에 뭐가 들었을까요? 주의 예언의 말씀이 능력으로 들어 있음을 이제는 알듯이 저희들 속에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들어 있어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의 활동만 드러나고 증거 되고 활발한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