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심판 230115
노아심판 230115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아름다운 성경 이야기, 이게 지금 아름다운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참 귀한 마음이죠. 성경이 아름답습니까? 슬픈 이야기죠. 슬픈 이야기에요. 근데 그 슬픈 이야기를 통과해야 기쁨이 돼요. 슬픔을 통과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슬퍼하는 동시에 내 인생이 이것밖에 안 되는 기쁨이 나 이제 알았지, 하는 기쁨으로 다가와야 돼요. 그래서 이 성경은 우리 자신을 전부 다 해체하는 겁니다.
이게 노아 방주 그림이잖아요. 노아 방주 때 이게 바닷물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이 인간이 기대했던 인간의 이상형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땅에서 밭 갈고 논 갈고 먹고 마시고 애 낳고 시집가고 장가고 사고팔고 이게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이었죠.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는 그 행위 속에서 하나님이 극히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빼먹은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이거 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왜 싫어해? 납득이 되지 않는 거예요. 납득이 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홍수를 보내서 이제 납득 되냐, 홍수 온다고 납득될 수 있겠어요? 그들은 그냥 빠져 죽었어요. 먹고 마시고 시가고 장고 사고팔고. 그들의 그 일상에 뭐가 있냐 하면 우리는 멸망 받아야 되는 요소가 빠져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죽어야 되는 게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 죽이고 한 가정만 살렸어요. 그 한 가정을 통해서 인간의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동안 걸치고 있던 나 이만큼 잘 살았다를 다 벌겨 벗겨 버린 거예요. 이게 내일 되면 이제 여기 한준이가 논산훈련소 들어갑니다. 논산 훈련소 갈 때 처음에 머리 확 깎아버려요. 드디어 자체 파괴가 일어나고 붕괴가 일어나죠. 머리 깎고 와가지고 스케줄 하루 스케줄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모든 활동하는 시간 전부 다 자기 시간 다 차단됩니다. 국방부에서 내려준 스케줄대로 해야 되고. 나 홀로 있고 싶어요. 홀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같이 움직여야 되고 그냥 팔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좋아하네. 팔을 90도 올려야 돼. 이 모든 것이 나를 부셔버리는 거예요. 나. 이십 년 동안 살았던 이십 년 살았어요? 살았던 나를 부셔버리고 해체시키고 다른 나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나로. 건희는 좀 몇 년 더 있다 가세요.
완전히 국가가 니가 뭔데 지금까지 깨끗하게 살아온 나를 뭐가 문제가 돼서 이걸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느냐? 쓰레기가 되지 아니하면 전쟁하는 기계가 안 됩니다. 총알받이가 안돼요. 나라는 거, 나라는 것을 군인은 나 자체를 군대에서는 용납하지 않아요. 내 휴대폰은 없어요. 그냥 없어요. 그냥 내 건 없어요. 그래서 남자는 군대를 가봐야 된다는 거예요. 물론 군대를 가봐야 되는데 그걸 제대 육 개월 전까지는 군인이에요. 육 개월 되면 또 헤벨레 하고 똑같이 돼버리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방식의 삶을 준비했는데 그 다른 방식의 삶이 우리가 믿는다고 우기는 예수님의 삶이에요. 믿는다고 우기는. 참 주님께서 고생하셨구나, 이 정도로 참 주님 참 대단한 분이다. 이 정도로 알고 있는 거 이것은 그렇게 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은 예상 밖이에요. 예수님은 나에게 분노를 유발하시는 분입니다. 그냥 나 아니고 다른 인생? 아닙니다. 나를 건드리면서 오시는 분이에요. 나를 화나게 만들어내시는 분이 주님이에요.
지금 노아가 짐승들 냄새나 짐승들하고 같이 이렇게 배 타고 이게 사는 겁니까? 이게 인생 사는 게, 여러분 이리 살고 싶어요? 실제로 미국에서 미국의 어느 주에서 방주 거의 똑같은 방주를 만들었어요. 무려 수천억 들여서 만들었어요. 방주 재료부터 해가지고 똑같이 방주 크기와 똑같이 만들어서 엄청나게 만들었는데 아무리 크니 뭐 합니까? 그게 갑갑한데, 답답한데요. 그냥 구경삼아 도는 건 괜찮은데 거기 살아라 그것도 1년 동안 살아라. 빼도 박도 못하지. 바깥에 비 오는데 나갈 수가 있어야죠. 나가면 빠져줄 거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지정해 놓은
새로운 예수님의 환경에 노아 식구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묶여서 살았던 겁니다. 노아가. 그래서 노아가 구원받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삶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주께서 가신 길을 거기다가 우리를 강제로 집어넣어요. 예상 밖이죠. 내가 하고 싶다고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렇게 물로 다 심판했잖아요. 나중에는 밖에 방주 1년 뒤에 나와가지고 무지개 확 폈습니다. 무지개가 왜 피어났는가? 잊지 말라는 거예요. 뭘 잊지 말라는가? 무지개는 어떤 경우에 무지개가 뜹니까? 습기가 찰 때. 다시 말해서 전에 크게 비 온 적이 있다는 티를 낼 때 무지가 뜹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비 같으면 쌍무지개가 뜨지요. 무지개가 하늘에 뜬다는 말은 너희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겁니다. 죽었는데 내가 이 무지개의 아름다운 색깔처럼 아름다운 은혜로 너를 지금 널 살려주니까 네가 사는 거야, 라는 그걸 유지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지개 땅에서는 뭐냐? 비참함. 그게 뭐냐 하면은 짐승의 피를 내야 그래야 용서받는 그 비참하게 죽는 짐승의 비참한 희생의 그 사건의 반복. 하늘에는 무지개 땅에서는 피 흘림, 이것이 하나의 짝을 이루어서 이 언약 구조로 노아 이후에 이 지구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만 생각하느냐? 비만 온 것만 생각해요. 비만 온 것만 생각해가지고 앞으로 비 올 때 대처 방법을 생각한다고 기껏 생각한 게 뭐냐? 높은 탑을 쌓는 거예요. 이게 인간으로서는 할 수밖에 없지요. 탑을 어디까지 높아 하느냐? 백 미터? 아니. 이백 미터? 아니. 몇 미터 되겠어요? 탑의 높이는 하늘에 닿기까지. 하늘이 어디냐? 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자. 신이 있는 까지 우리 쪽에서 기어 올라가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한 걸음 한 걸음 기어 올라가면 천당 간다는 겁니다.
문제는 뭐냐? 지금 노아 홍수 하고 이 바벨탑하고 그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어요. 노아 홍수에서는 노아는 뭐냐? 우리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노아가 이렇게 술 먹고 벌거벗고 있을 때에 그 자식 함과 손자가 얼레리 꼴레리 했다고요. 그러니까 노아가 화가 나가지고 니 저주 받으라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저주받게 된 거예요.
노아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어떤 정당성을 챙길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 노아 생각이에요. 왜? 바로 홍수 사건이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게 노아 사건이었잖아요. 그걸 겪었어도 내 잘 났다, 우리 아버지 내보다 더 못 났어. 우리 아버지 술만 먹으면 저 꼴이야. 나는 점잖은데. 계속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저주의 여파가 뭐냐? 바벨탑을 쌓는 겁니다. 바벨이라는 지역에다가 탑을 쌓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 동네는 바벨에다가 탑을 쌓았느냐? 그 동네는 옹기종기 한 곳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류의 시작은 에덴동산이에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닙니다. 그거는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기꺼이 인간 닮은 짐승이라고 우겨가지고 인간의 조상으로 만든 거예요. 전에 했죠. 처음에 구부려 걷다가 이래 이래 펴진다는 거예요. 펴져서 인간이 됐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펴줬어요. 아기도 아닙니다. 어른으로 만들었어요. 어른으로. 어른으로 만들었다고요. 아기도 아니고 어른으로. 그걸 어떻게 당신은 단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죄지어서 모르는 것을 정답은 주님이 알고 있거든요. 주님께서 처음에 어떻게 왔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된 인간의 시작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니에요. 여러분 이 고릴라 모습이 아닙니다. 아기에요. 아기. 그걸 보고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시작이 우리가 몰랐던 점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이 바벨탑 정신인지, 우리 힘으로 진리를 캐내겠다고 기어 올라가는 이 바벨탑. 그때 바벨탑이 그렇게 협조가 됐다는 것은 언어가 통했다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려운데. 언어가 통했다는 것은 서로 알고 있는 사고방식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로 생각이 일치된 생각이다. 일치된 생각이 되는 것은 하나의 조상 아담에게 나왔기 때문에 일치된 생각이에요. 조상이 달리 되어 있으면 일치된 생각을 안 갖습니다. 일치된 생각이기 때문에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생각은 어느 환경에서나 똑같은 생각이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전쟁은 있을지언정 그들은 이야기하면 통하게 돼 있어요. 전쟁을 한다고 안 통한 게 아니고 전쟁을 하는 것은 서로 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어떤 인간 치고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에서 나온 게 아니고 인간 외부의 분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 그것이 우리 인간의 우리 이름이 아니라 그걸 가지고 예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해주시고 더불어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길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