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3:1-2 / 진노와 긍휼
진노와 긍휼
이근호
2023년 1월 4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2
(3:1)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기쁜 가운데 받게 됩니다. 하나님로부터 응답을 받은 겁니다. 그 내용을 반긴다는 것은 더는 궁금한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실 일을 미리 알게 된 겁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망하는 처지에서 비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결말을 알게 된 겁니다.
그 내용이 바로 ‘진노 가운데 긍휼’입니다. 하박국 1장과 2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납득되지 않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을 저주받을 민족을 통해서 치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최종성에 대해서 궁금했던 겁니다.
저주받아 망해야지만 비로소 원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줄 대상을 ‘이스라엘이다’고 꼭 찝어주시는 않는 이유도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등장하시는 메시야가 긍휼의 처음 수혜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이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자들이 받아야 될 징벌과 저주를 받으신 겁니다. 그 이유는 ‘저주 속에만 긍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하나님을 거론하고 언급하면서 본인은 기필코 망하지 않아야 하고 저주받아서는 안 된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신앙적인 요령과 꼼수만 발달한 겁니다.
저주에 들어서지 않는 자는 결코 긍휼을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는 자는 사랑도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취지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그 전에 미리 하나님의 사랑을 낚아챌려고 합니다. 요령껏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저주가 겪고 난 뒤, 두 번 다시 저주를 안 받는 완전한 자아가 되고자 합니다.
이는 곧 어어떻게 하든 자신이 ‘실패자’이고 싶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이나 성공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의미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마감될 때나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최종적인 의미에 도달하지도 않고 그 내용도 모르면서, “내 인생은 성공했, 혹은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말 할 수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이해하는 수준의 성공과 실패를 정립하지 못하게 하시고 항상 인간이 예상 못하게 일하십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성공이다고 자부될 때도, “하나님께서는 예상 못하는 식으로 일하신다”고 해야 하고 본인 보기에 자기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겨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상 못하는 식으로 일하신다”고 해야 합니다.
이래나 저래나 인간 손에 놀아나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전부 다 인간 손에 맡기거나 판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곧 이방민족이든 이스라엘이든 일단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지 아니하면 긍휼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는 자들에게는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하냐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예언이 활발하게 움직이냐 여부에 있습니다.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부흥’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다시금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이는 곧 진노와 긍휼의 반복을 뜻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9:4-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의로움인지 아니면 악한지에 민감함을 갖고 산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맹세하신 바, 곧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위하여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자신이 선하면 마땅히 복받을 것이라고 여기고 악하면 저주 대신 용서를 구하는 식으로 자기에게 찾아드는 저주를 아예 원천 봉쇄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라는 한 덩어리 자체가 방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신 8:19-20)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진노의 상시(常時)화와 긍휼의 상시(常時)를 시도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내부에 작동하시면서 진노와 긍휼과 반복시키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자기’라는 덩치를 지키려는 모든 노력을 무산시키십니다.
한 사람의 야곱에게 12명의 다수의 자녀가 발생된 것은, 어떻게 12명의 각자 다른 개체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까를 통해서 인간이 못해내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이 달성함을 보입니다. 즉 언약 작용을 통해서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예상 못할 일을 통해서, 더는 인간 자기 자신을 사는 것이 주님이 허락하지 않음을 알게 하십니다.
즉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성공적인 자기 생활을 시도’를 좌절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끝내 자기 사랑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나의 사랑이 끝난 지점에 상대방의 사랑이 시작되고, 상대방의 사랑의 끝나야 나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모두 이기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과 공간을 통해 인간들은 자기에게 그 느낌을 맞아해 드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과 공간은 저주의 공간과 시간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서 비로소, 사람이 할 수 없었던 예수님만이 해낸 것만 발견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의 일이 선지자 하박국이 발견한 최종적 진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해내는 종교적 열심과 성령의 일을 분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하박국 3장 1-2절(진노와 긍휼)230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3장 1-2절까지입니다.
하박국 3:1-2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시기오놋’이라 하는 것은 비트 또는 리듬에 대한 이름인데 어떤 리듬이냐? 활발하고 빠른 템포를 갖고 있는 리듬입니다. 이 리듬에 맞춰서 하박국이 기도를 한다는데 이것은 이렇게 활발하고 빠른 템포, 강렬한 음악성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을 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마음 상태가 콩닥콩닥 뛰고, 약간은 흥분되고, 약간 붕 떴다는 그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내용, 실내용, 실제로 이루어지는 내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확실한 계시를 받게 되면 마음이 떨리면서 세상에 어떤 것도, 어떤 것도 탐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도 하나님의 계시 앞에 장애 요소로 또는 방해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마음, 그 정도로 기쁘고 흥분되고 감격적이지요.
왜? 확실한 내 목숨보다 더 확실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크고 확실하고, 그에 비해서 나의 목숨, 생명은 하찮게 여겨지게 됩니다. 자신의 목숨과 생명이 하찮게 여겨지게 되면 근심 걱정 같은 것은 일순간에 다 날아가는 거예요. 모든 근심 걱정이.
어떻게 하면 내가 살고, 이왕 사는 것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느냐, 그것과 관련해서 걱정 근심이 주어지잖아요. 그런데 내가 평소에 내 것 챙긴다고 고민했던 그것이 한방에, 더 확실한 것이 와버리면 내 목숨, 내 남은 인생은 ‘그까짓 것’이 됩니다.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요.
이런 상태가 자유상태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는 상태, 더는 나의 명분에 매이지 않는, 내 가치에 매이지 않는 그런 상태, 이게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요 8:32)는 그 상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상태가 참 오래 갔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주께 대한 소문, 2절에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이에요, 이렇게 흥분되게 가락에 맞춰서 거침없이 예언을 쏟아놓는 이유는, 주께 대한 소문입니다, 내게 대한 소문이 아니고 주님이 어떻게 하실 것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는 불확실하지만 주께서 이렇게 하겠다는 그러한 주님의 계획이 나를 덮친 거예요.
그러면 큰 홍수 앞에서 우리가 멈추지 못하고 그 물결을 타고, 그 물결에 거침없이 같이 휩쓸려서 가는 것처럼 내 인생도 주께 하신 일에 휩쓸려 간다면 그 인생은 참 상당히 가볍지요. 주께서 확실한 일을 나에게 했다. 예를 들어 “군대에 가라.” 이렇게 확실하게 줬다는 그것, 물결 타듯이, 그냥 뗏목 타듯이 가면 되니까요. 나 까짓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나를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그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이 2절 끝에 나옵니다.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살아계신 일이 다시금 새롭게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런 뜻을 갖고 있어요. 부흥이라는 뜻 안에 repeat, 다시 한다, 또는 again, 역시 다시 한다, repeat, again, 이런 것도 되지만 over and over, 다시 하면서도 뭔가 새로움을 추가하면서 주의 일이 늘 나타나는 것, 내게 부흥되는 것 말고 ‘주의 일이, 주의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반복해서 드러나게 하옵소서.’ 요거 부흥입니다.
기독교 출판사에 보면 ‘부흥출판사’라는 것이 있어요. 그 이름을 붙일 때 아, 상당히 좀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의 말씀이 부흥되면 참 좋겠는데 내가 벌이는 사업이, 출판사업이 잘된다든지 교회 일이 잘되고 부흥한다든지, 이것은 주의 일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주의 말씀이 부흥될 때는 다시 되풀이되는 현상의 증거는 뭐냐? 그 뒤에 나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진노 중에서 긍휼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진노 받고 또 불쌍히 여김 받고, 진노 받고 또 불쌍히 여김받고, 이것이 되풀이되는 게 주의 말씀이 부흥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주의 말씀이 부흥되는 것인데 만약에 내가 벌이는 게 부흥된다면 우리는 쥐게 돼요. 뭐냐 하면 ‘내 일이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안 망하게 해주옵소서.’ 다시는 안 망하게 해 줘버리면 이것은 뭐냐? repeat가 안 돼요. again이 안된다고요.
“부자 되게, 부흥케 하옵소서.” 예를 들어서 쉽게 설명해서 ‘내가 부자 되는데 부흥되는 방식으로 부자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부흥과 연관시킨다면 1월-6월까지 부자 되고, 7월부터 12월까지는 꼴아박아야 돼요. 그리고 1월-6월까지 또 부자 되고, 7월-12월까지 또 완전히 빚으로 다 날아가야 돼요. 이게 부자 되기의 반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복시키느냐 하면, 이게 주의 일이거든요. 주의 일이 되어야 될 게 어느새 이게 나한테 이익이 되는 나의 일로 되는 것을 주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인간에 대한 진노하심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노하시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최종적인 것에 대해서 인간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거예요. 모든 의미는 최종에 가서 밝혀집니다. 확립돼요. 그런데 인간이 최종 것을 모르잖아요. 최종이 어떤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항시적으로 인간은 자기 것 챙기는 데 급급하니까 최종적 입장에서 볼 때 그게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미를 실현하는데 거기에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된다 그 말이에요. 인간존재 자체가 곧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물이에요. 쉽게 말해서 최종적인 것에 합류할 수 없는 일은 거짓된 일이다. 이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는 취지입니다. 벌주시는 취지에요.
그런데 전에는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택하여 사랑했다.” 이렇게 돼요. 초창기에. 그러면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은?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저주받게 했다.” 처음에 하나님의 계시는, 저주받는 저주의 대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 외부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저주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급을 했거든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다 지켜서 복 받는다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 외 다른 나라는 저주받는다.” 그렇게 했어요.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7, 8장 계속 나오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만약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했을 시에는 이방인과 같이 속히 내가 망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렇게 하시는 근거가 신명기 9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너희들 생각하기에 다른 민족보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른 민족을 치는 것은 결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선하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의로워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그대로 구현되기 위해서 언약이, 인간 세상보다 언약이 하나님에게는 우선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 있는 나라 이스라엘과 언약이 없는 나라 이방 민족과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저쪽을 저주한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언약 위주인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명기 9장 5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4절부터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악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악한 이방 민족을 쫓아낸 거예요. 그러면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쫓겨 나갔을 때 이스라엘은 뭘 캐치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앞에 쫓겨나간 저 이방 민족이 결코 우리보다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본인이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는 저들보다 더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전쟁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좀 더 간추려 이야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믿음을 준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들만큼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라는 것을 너희들만큼은 제대로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구원을 시켜준 이유는, 구원받은 자만 “구원은 우리에게 해당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고백을, 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 말은 “우리는 저주받아 쌉니다.”라는 말을 해야 되고 그걸 보편적으로 편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하나님이 지독하게 망치고, 우리 가정을 망치고 벌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 잘한 조치이십니다.”라고 찬양해야 될 자들이 성도라는 거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고, 이삭 때문이 아니고, 야곱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맹세 때문에, 주의 일, 주께서 친히 하시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여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그들 소수를 통해서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이라는 것은 repeat, 반복하는 것인데 반복이라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이방 민족을 진노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하나님의 택한 우리 이스라엘에 진노하십니까?’ 하박국 1, 2장에서 그게 의문점이었던 거예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하십니까.
그런데 3장에 와서 이제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방 민족에도 진노를 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도 진노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이 진노 중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된 원칙이라는 사실을, 하박국 선지자가 이걸 발견하고 아주 빠른 템포로, 아주 흥분된 상태에서 ‘아! 이거였어. 이거구나. 진노가 없이는, 하나님의 분노가 없이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하지 못하는구나.’ 하나님의 진노를 제키고 진노 바깥에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걸 알고 하박국은 진리 전체를 다 알아버린 거예요. 이 정답, 저와 여러분이 거기에 합세했으면 좋겠습니다.
표정이 전혀 합세 못 하겠다는 표정인데요. 그게 2절 끝에 나와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불쌍히 여기는 것이 “너도 맞아라” 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불쌍히 여길 자 따로 나오고 “왜 때립니까?” 반항할 자 따로 나오고, 이렇게 다 같이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택한 백성이든 택하지 않은 백성이든 전부 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이뤄지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진노 가운데 긍휼을 누가 이루느냐 하면, 바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그대로 십자가에 서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 달릴 때,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세 번 기도하셨잖아요. “나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기 벌 받을 일이 없습니다. 이 진노의 잔을 내가 왜 받아야 됩니까?” 라는 식으로 세 번 기도했어요.
세 번 기도하시면서 내린 결론은 뭐냐?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무서운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아버지께서 바로 이 언약을 원하시기 때문에 언약 속에 예수님 자신이 거기에 먼저 앞서서 들어가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때 오시는 분이거든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모든 의미는 최종성에서 다 드러나고, 그 최종적인 의미에 합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거짓된 자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뭐 내놓을 것이 있어야 되지요. 성도라면 내놓을 것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만, 봄철에 대심방 이런 것이 없습니다, 소심방도 없는데 무슨 대심방이 있겠어요? 그런데 그럴 때 뭐 대접한다고 여러 가지 내놓지요. 그러나 복음과 관련된 목사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뭘 대접한다고 내놓는 것들, 박카스, 비타500,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가정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놓을 때 목사도 같이 기뻐할 수밖에 없어요. 목사 교인 관계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관계에요. 서로 뭐 아는 사이지요. 아는 사이인데 그 아는 사이가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목사 교인 사이에서 목사 입에서 복음이 나오고, 성도 입에서 복음이 나올 때 그것은 영원히 같이 가는 사이입니다. 영원히. 부부도 복음 없이는 그냥 동거인이에요. 동거인이고 같이 사는 이유는 못 헤어져서, 헤어지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귀찮고요. 애들 보기에 민망하기도 하고.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나 부부 사이에 복음이 나온다면 그 관계는 본인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것, 하나님의 최종성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 자기 살 궁리만 내놓잖아요. 자기 잘났다, 나 잘났다, 이것만 내놓는데 거기서 복음이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집어넣어 주신 거예요.
아내 입에서 복음이 나오면 ‘어떻게 그런 일이?’ 남편 입에서 복음이 나온다면 ‘이거 뭐 최종적 의미가 왜 당신 입에서 나와?’ 최종성에 가야,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나올 수 있는 것이 고백 되어 나온다면 그 서로의 배우자 둘, 한 부부는 솔직~하게 말해서 미친 겁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못살아요. 남 따라가다가는 숨이 막혀서 못 살아갑니다. 남 따라가다가는, 남 하는 것 다 따라가게 되면 본인도 지치고 주일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탈진해요, 탈진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2학년 진도 다 따라가야 되고, 3학년이면 3학년 진도 따라가야 되고, 나중에 애가 탈진해 버려요.
선행학습이라 해서 4학년 때 고등학교 수학책 펴고요. 이거 언제 따라갑니까? 삼각함수, 미분방정식이 그게 최종적인 겁니까? 그게 최종의미에요? 복음입니까? 진리에요? 아니지요. 인간을 자유케 하지 못하는 겁니다.
누가, 우리 애는 뭐 성공했다, 실패했다, 하는데 주께서 최종적인 의미를 주시는 것은, 아무도 실패했다, 성공했다, 하는 말을 못 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항상 예상 없는 일을 한 거예요. ‘나 성공했다’ 하지 말고요, ‘하나님께서 내가 예상 못 한 일을 벌였네.’ 이렇게 해야 되고 ‘저 실패했습니다.’ 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하지 않은 예상 밖의 일을 벌이신 거예요, 예상 밖의 일을!
왜 예상 밖의 일이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내 뜻대로 안 되게 주께서 하는 거예요, 내 뜻대로. 하박국 선지자 1장, 2장 보게 되면요, 하박국 선지자도 인간인지라 “우리나라 이스라엘 좀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이런 식으로 나갔어요. 그래서 약간은 분노하면서 기도 막 한 거예요. 1장, 2장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방 민족이 우리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나라를 이렇게 함부로 침공해도 왜 하나님 가만히 계십니까? 왜 하나님 침묵하십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3장에 넘어와서 지금 박수치면서 하는 거예요.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놓친 게 있다는 거예요. 뭐냐? 망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불쌍히 여겨주는 거요. 그것은 안 망하고는, 내가 망하지 않고서는 자꾸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이 내가 하나님의 일에 훼방자고 방해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안 망해버리면 내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지 않고, 내가, 버젓이 내 것이 있어 버리면 소위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전부 다 내 것으로 전환시켜 버려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이러면 그것은 이단이지요. 최종적인 것도 모르는 인간이 뭘 자기가 안다고 하겠어요?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최종적인 것을,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3장 1절, 2절까지를 그 당시 시대 상황과 다시 맞춰보면, 바벨론 나라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거의 망하기 직전이에요. 하박국은 1차 바벨론에게 망할 때 나오는 그런 계시거든요. 이미 바벨론이 1차로 쳤고 곧 다 함락해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곧 없어집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없앤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어요. 없애놓고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repeat에요. 이게 again입니다. 우리 자신은 그렇게 못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잖아요. 이 십자가 부활이 어떤 관계냐 하면, 죽여놓고 살리거든요. 만약에 예수님이 믿음이 없었으면 안 죽었어요. 예수님이 만약에 믿음이 없다면, 겟세마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없이 기도가 끝난다면 ‘하나님이 나를 죽여놓고 아버지가 나를 안 살리면 나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아가 있는 이상은 자아가 믿음을 방해해요.
“믿어라.” “좋습니다. 믿습니다. 믿으면 살려줄 거요?” 이 말 자체가, 믿으면 살려줄 거요, 이 말 자체가 이게 ‘나는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확률만 내다 볼 뿐입니다. 어떤 가능성만 내다봅니다. 이게 나의 꼼수요, 나의 삶의 지금까지 살아온 요령 부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말밖에 안 돼요.
인간이 꼼수와 요령을, 아예 그것조차도 뿌리채 잘라버려야 돼요. 그래서 그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 인간들이 아담에 속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은 성령이 주신 믿음이에요. 그 성령이 성도한테 온 믿음과,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열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의 차이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입니다.
열심을 내서 믿는 사람은 지옥 가고요, 성령은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지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뭐 죽어도 살리는 것 그것 뻔한 이야기 아니야? 새삼스럽게 그거 뭐 그리 심각해? 전혀 안 심각해. 당연한 건데. 예수님 봐. 죽었다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죽음에서 다시 산다. 이것 당연한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편 30편 3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음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끌어내는 거예요.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시편 30편 3절에요. 다니엘에도 죽은 자의 부활이 나오고, 에스겔 37절에도 죽은 자가 살아나온다고 이야기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아, 여기 괜찮은 보험 하나 있네. 이거 하나 믿어 놓으면 내 장래가 잘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은 거기다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굳게 믿씁니다!” 하고 쌍시옷이 들어가요. “굳게 믿나이다, 믿씁니다!” 이렇게 갑자기 힘을 주는 이유는, 내가 힘줘야, 힘을 빡세게 줘야 마치 구원을 보다 확실하게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뭐 변비 걸렸습니까? 내가 쓰레기고, 나는 죽으면 흙이 되고, 나오는데 최종성을 모르니까 일시적인 내 이익만 계산하기 때문에 나는 죄다, 가짜다, 이게 뭐 그리 심각합니까? 당연한 거지요 이게 당연한 거예요. 내가 인생 살아봐야 의미 없다. 그거 당연한 것 아니에요? 성공해봐야 그거 뭔데? 실패? 인간 자체가 주의 일을 방해하는 허물인데 뭐 성공적인 허물, 실패적인 허물, 그딴 형용사가 뭐 필요합니까?
성공, 실패, 그냥 허물이에요. 인간은 그냥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에요. 이걸 편하게 받아들이세요, 편하게. 편하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하고 또 ‘편하게’ 거기에 힘을 줘버리면 아이고……, 참, 더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스라엘을 다룰 때 이게 뭐가 문제냐 하면, 이 덩치가 문제였던 거예요, 덩치가. 그래서 주님께서, 왜 하나님께서 야곱은 한 사람이지만 자식이 12명이잖아요, 1과 12, 왜 갑자기 다수로 분산시켜 놓았는가? 하나에서 12가 나왔다는 것을 인간들은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열두 조각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힘이 아니면 절대로 12는 1이 될 수 없어요. 열둘은 열둘이 되지, 12가 되지 하나가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2가 1이 안되는 것을 1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라는 이것을 식빵을 슬라이스로 자르듯이 잘라버려요.
맛있는 빵 보면 하얗게 설탕으로 코팅되어 있잖아요. 그걸 얇게 썬다고요. 겉이 하얗게 눈 온 것처럼 되어 있으니까 그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얇게 썰어내니까 그 안에 치즈인지 뭐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잘라봐야 알 수 있거든요. 이렇게 주께서 친히 자를 때에 우리는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자꾸 나는 나 위주로 나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이러한 시도가 자르는 하나님의 시도와 대치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나를 거울에 비추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나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라고 늘 자기 위주로 계속해서 구성은 하지만 이게 동일한 이미지가 아니에요, 인간은. 인간은 자아를 느끼지만 내 모습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확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냥 일시적인 조형물이에요. 내가 나를 만든 일시적인 이미지가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임의로, 자기 멋대로 나를 위한 공간, 나를 위한 시간으로 조성하면서 거기서 자기 자신을 재조립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늑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방이 크다.” 자, 이 말, 공간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냥 공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아늑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방이 크다.’ 그 공간에 대해서 나름의 인상, 생각을 그 공간에 던지면서 그렇게 표현해요.
또 시간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너와 즐겁게 노는 동안 해지는 줄 몰랐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독자적인 자기를 위한 시간, 자기를 위한 공간이라고 본능적으로 그걸 회수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렇다’고 자기를 하나의 통합적인 덩어리로 만들어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인간을 슬라이스로 잘라내는 작업을 해요. 그러면 인간은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당황스러우면서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면서 ‘나는 누구지?’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 공간과 시간에 안 맞아떨어지거든요. 맞아떨어지지를 않아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쟁이지요. 인간은 전쟁에 휩쓸려봐야 내가 인간이 아니고 동물이고 짐승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그때 전쟁하는 시간과 전쟁하는 공간을 통해서 알아요. 인간은 진짜 자기가 귀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쟁하면서 알아요. 전우애,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나 하나만 살면 돼요, 나 하나만.
사람이 여유 있을 때는 선하지요. 그러나 돈이 궁하고 다급하고 생계비조차 없을 때는 짐승 되지 말래도 알아서 다 짐승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아상을 갖고 있는, 1세부터 20세까지 형성된, 자기 집안에서 다 귀염받는 아들들을 총알받이, 전쟁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걸 다 무산시켜야 돼요.
그래서 논산 훈련소 갈 때 머리부터 깎게 하는 겁니다. 네가 알던 너를 잊어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줘요. 그것은 뭐냐?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 내 맘대로 못해요. 뭐 반찬이 없다, 반찬 투정 못합니다. ‘옷이 이게 뭐야? 소매가 왜 이렇게 길어?’ 안 됩니다. 그리고 쉴 때 쉬고, 놀 때 놀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총 쏘고, 박박 기고, 화생방 교육하면서 화학물질 마시고, 이것은 지금까지 스무 살까지 살면서 자기 취미 아니에요. ‘나도 뭐 독가스 좀 마시고 싶다.’ 이런 것 없어요. 그동안 재미있게 살면서 재미있는 나로 구성했던 그것과 정반대되는, 내가 역겨워하고 기피하는 그것만 다 줘버려요.
그렇게 줘서 그 나 자체를 무산시킵니다.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서. 왜? 훈련소는 일종의 이미 시작된 전쟁터기 때문에. 전쟁터에요. 명분은 뭐냐? 오직 조국을 위해서. 요새 1세부터 20세까지 살면서 무슨 조국이 있어요? 자기 몸뚱이만 알지요. 무슨 조국이 있습니까? 조국은 몇 년 전에 유명했던 그 사람 조국, 그 사람이지요. 문 정권 때 그 조국이 유명하지, 조국 몰라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조국을 위해서 총알받이하고, 조국을 위해서 총대 메고 “돌격! 할 때는 무조건 돌격해야 돼. 따지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묻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너는 기계야. 총 들고 가는 기계야. 쏘라 하면 쏘고, 죽으라 하면 죽는 거야.” 이 훈련을 하는 거예요. 야~, 군대 가기도 전에 벌써 겁을 이렇게 주네.
하박국은 지금 바벨론으로부터 전쟁에 휩쓸리게 됩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전쟁통에 밀어 넣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믿는 개체가 있는데.” 하나님 뜻은 그거예요. 그 개체마저, 개체마저 너를 위한 신앙이기 때문에 박살 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메시아가 아니다, 그 말입니다. 네가 메시아인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 믿음으로 네가 구원받는 척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그게 최종적인 의미에요. 그것도 모르고 교회에서 믿어라, 믿어라,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건 구라고 사기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껏 모아봐야 자기 자신을 포기 못 하는 아주 끈질긴 악마의 모습만 그냥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 것으로 대표적인 멘트가 뭐냐 하면, “복음 알고 바르게 살자. 이게 하나님 뜻이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 마귀가 가르치는 거예요. “복음 알고 예수님 신앙인답게 살아야지.” 이게 마귀가 가르쳐준 거예요. 마귀가, 계속 자기가 살아 있는 거예요, 자기가! 언약이 살아야 되고 말씀이 살아야 되는데 자기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슬라이스로 열두 토막을 내고 주님의 말씀이 와서, 최종적인 의미가 와서 그걸 다시 하나로 통합해요. 쪼가리 질 때는 내가 없어요. 그런데 다시 뭉치게 되면 그 쪼가리 사이에 식빵을 슬라이스로 쪼개고 거기에 잼을 바릅니다.
잼을 바르면 이쪽 쪼가리 난 쪽과 다른 쪽이 붙어 있지요. 그걸 잼이라 하지 말고 그 잼을 예수님의 피라고 봅시다. 복음으로 봅시다. 찢고 예수님의 복음 발라서 다시 통합할 때 말씀으로 하나가 돼요. 나는, 이 나라는 이 자아는 말씀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말씀으로 주께서 친히 주의 일로 통합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 이스라엘은 망했어요. 주께서 이스라엘을 진노 가운데 넣어서 이스라엘을 쪼가리 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게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그 잼 있잖아요, 잼, j, a, m, 잼을 바르면 주님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주님으로 다시 하나가 되어서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연장된 몸이 되는 거예요. 확장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계속 말씀의 repeat가 되는 거예요.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있다면 한번 구원받고 난 뒤에는 다시는 영원히 갔으면 좋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구원받아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타나는 게 아니고 나 구원받았다, 이게 튀어나온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의 말씀의 상시(常時)성 상시(常時)화라고 합시다. 상시화.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을 상시적으로 그 안에서 운동하게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남의 불행을 보면 인간이 웃지요. 남의 불행을 보면 웃어요. 웃을 일이 없거든 남 못 되는 것 보면 웃음이 나요.
그러다가 자기가 불행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이제 구원받은 것을 알면,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웃습니다. 웃고, 나는 구원받았는데 저쪽이 구원 못 받았잖아요. 그러면 또 웃어요. 그러다가 그 웃게 된 그 내 모습이 어느새 내가 주인공 된 것을 깨달았을 때,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졌고 이게 바로 하나님 일을,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또 울어요.
이게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왜? 우리 안에서 말씀만, 사인곡선, 파동이 계속 일어나면 되니까. 그래야 진노 가운데 긍휼, 진노 가운데 긍휼, 그것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진노 가운데 긍휼, 진노 가운데 긍휼, ‘나는 복음 알아서 도사다.’ 이런 인간은 가짜입니다. 늘 구원받았다고 기뻐하다가 까불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또 긍휼 받은것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또 교만하고, 교만하고 또 깨지고, 깨진 것 그 자체가 주의 은혜인 줄, 긍휼인 줄 알고 감사하다가 좀 가다가 감사하니까 ‘나 구원받은 것 맞잖아.’ 하다가 또 깨지고.
신약에 가게 되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주의 말씀, 이것은 “긍휼 너 해라.” 그게 아니라 “긍휼 자체가 네 안에 들어 있어. 하나님께서 진노를 통해서 네 안에 있는 긍휼을 바깥으로 증거하고 싶다.” 이게 신명기 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언약이 튀어나오도록 해서 너를 살린다는 거예요.
또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내 사랑이 끝나면 당신 사랑이 시작되고, 이렇게 모든 관계가 그래요, 당신 사랑이 시작되면 내 사랑은 끝납니다. 그래서 내 사랑이 끝나면 그때부터 당신 사랑이 시작되고, 당신 사랑이 끝나면 내 사랑이 시작되고, 둘이 동시에 사랑하는 법은 인간관계에는 없습니다.
왜? 내가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상대방이 내 사랑을 알아주나 안 알아주나 감시하게 되기 때문에. 내 사랑이 시작되면 상대방은, 저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날 감시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사랑을 멈춰요. 사랑을 멈추는 것을 보고 ‘나도 내 사랑을 안 하겠다.’ 하는 순간 그쪽에서 또 사랑을 시작합니다. ‘아이고, 저 불쌍한 것 사랑해줘야지.’ 내 사랑이 멈출 때 저쪽 사랑이 시작돼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거든요. 내 사랑이 끝나면 당신 사랑이 시작되고 당신 사랑이 시작되면 내 사랑이 끝나고. 결국은 다 같이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못 돼요. 왜냐하면 나가 있기 때문에. ‘내가 100을 사용했는데 너는 왜 50만 반응하느냐?’ 저쪽에서는 ‘나는 50이 아니고 200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50밖에 이해를 못 하니까 나는 당신이 싫어.’ 갑자기 사랑해놓고도 사랑이 투자가 되어서 결국 ‘싫어’가 되어버려요. ‘좋아’가 되지 않고.
“마침내 웃었다.” 송 서래가 ‘마침내……’, 그 영화 여주인공이 송 서래에요, 마침내 웃었다, 하다가 마침내 울었다. 도대체 울고 웃고, 전도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그게 그렇게 하면서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확정된 최종적인 예언이고, 말씀의 성취고,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안에서 십자가만이 나타나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언약의 완성만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가 그걸 날마다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서 모든 것을 주께, 내 것 챙길 것이 아니라 주께 드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