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4 / 야곱의 거짓말
야곱의 거짓말
이근호
2022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하박국 2:4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묻기를, 어떻게 의인이 악과 더불어 심판받을 수 있느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악인과 의인을 따로 구분하신다고 합니다. 문제는 과연 의인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의인이냐 아니냐 여부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적용했던 그 하나님의 원칙이 여전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15:6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의를 드러내시려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결코 이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된 겁니다.
심지어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의 태도를 보인다 할지라도 그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규정에서 아브람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의로움’에 부응하는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추가적이고 지속적인 약속 행위 속에서 그 내막이 보다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분리시키는 겁니다. 아브람은 죽어 마땅한 자이어야 하고 아브라함은 살아 마땅한 자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추진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실행에 의해서 실시됩니다. 즉 아브람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식으로 그 내용을 펼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과 결과가 아브람으로 하여금 아브라함되게 하십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분리 그 중간에서 새로운 언약 사람으로 살도록 내용을 채워주는 바가 있는 그 내용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죽음’입니다. 곧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만 성사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에 참여하므로서 의인이 되고 그 의인의 조건으로 ‘믿는 자’라고 규정받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본인이 한 것은 없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이로서 ‘믿음’이란 인간과 무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흘러나온 겁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롬 4:16) 즉 자꾸만 뭘 행하는 인간의 행함과 분리하기 위해 행함의 주체자를 죽이고 그 안에 하나님 자신의 살아계심으로 채우는데 이것은 은혜요 이것이 약속의 실현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그 원리의 충실된 전수를 위해 그 내용이 확대되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되게 일어납니다. 야곱은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샴 쌍둥이처럼 형과 같이 태어났습니다. 각자 독자적 신체로 따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연관성을 가진 채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뜻은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분리될 수 없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없고 형에게는 있는 것을 탐냅니다. 그것은 장자권입니다. 형이 사냥하고 와서 허기 질 때, 야곱은 형에게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맞바꾸자고 말합니다. 야곱은 아직도 형 따로 자기 따로인줄 압니다.
아버지 이삭은 늙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두 아들 중에 맏이인 에서에게 축복을 내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그 축복을 자기가 받게 조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에서에게 저주가 주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몸과 형 에서의 몸이 동일한 한 몸으로 묶어져 있어 자신의 속임수로 형에게 저주가 돌아갔다는 말은 야곱이 자기 수작에 의해서 저주가 동일한 자기 몸에 주어지게 된 결과가 된 겁니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다는 말은 전적으로 자신이 저주받기에 합당한 죄인의 처지에 있음을 인정못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죄인은 죄인다워야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죄인이 되어서면 저주는 당연한 겁니다. 인간의 운명은 그것뿐입니다. 다른 경우를 생각할 권한이 아예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 주제요 복을 생각하고 구원에 탐을 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몸은 다른 사람의 몸과 달리 특별히 복받은 자격과 권한이 있다고 우기는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거짓말과 죄에는 다른 것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자기 결정과 자기 판단과 자기 선택으로 인해 저주 아닌 다른 결말을 고대하는데 그것조차 죄인이기에 필연적으로 나오는 죄일 뿐입니다.
자기 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모든 죄인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며 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 이 두 사람을 쌍둥이로 만드신 분이 어느날 밤, 얍복강가 나타나서 야곱을 상대합니다. 야곱과 에서,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 이렇게 해서 세 존재로 구성되는 것이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둘 다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 분이 언약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서로가 싸워서 보다 많은 축복을 따내면 그것으로 축복에 충실한 상태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죽여서 아브라함되게 하시듯이 야곱을 만나서는 야곱을 죽입니다.
야곱은 자기 내부에 하나님이 계실 곳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내용이 이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야곱은 그 이스라엘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야곱의 믿음과 야곱의 열심과 야곱의 봉사와 희생과 헌신은 아무 것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과 그 육에서 나오는 행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언약을 친히 완수하신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주의 이름이십니다. 야곱이라는 육신 속에는 이스라엘이 들어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분은 유일한 의인이라는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제대로 믿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믿음이 담겨서 작용하는 자만이 의인입니다.
사람의 행함과 결심과 각오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 나오지 않는 믿음,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오는’ 그 믿음으로 인해 의인은 삽니다. 야곱을 비롯한 모든 성도는 자기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일하심을 드러내는 부분이요 모형들입니다.(히 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말게 하옵소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나오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하박국 2장 4절(야곱의 거짓말)2211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4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정직하지 않은 자들, 속이는 자들, 그런 자들 속에서 의인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정직하고 싶어도 인간 자체가 정직 안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속성을 조상들로부터 모든 인간은 물려받았습니다. 인간이 의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죄 속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 되었기에 가장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지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 상태를 유지를 해줘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다워야 하는데 자기가 죄인다워 버리면 여기서 저주가 마땅히 주어지거든요.
그래서 그게 싫어서 죄인 주제에 당연히 죄인으로서 당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순결이니 순수 같은 그런 것을 시도하는 것, 그게 바로 거짓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 거짓이지요. 그래서 인간이 죄인인 것도 죄지만 그 죄인인 것을 가리기 위해서 순결한 척하고 순수한 척, 순수를 추구하는 그 자체도 죄의 여파입니다. 죄에서 발견된 거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위선적인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의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데 의인 자체가 이 땅에 없어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날마다 자기를 속이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재주밖에 없기 때문에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이 없기 때문에 뭐도 없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영생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믿음이 있어야 사는데 죄인들밖에 없기 때문에 ‘믿는 자’라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이 자기가 죄인 것을 자기가 속이기 때문에 그 죄인들이 어떠한 정직하지 못한 속임수를 쓰느냐 하면, 이렇게 속임수를 쓰는 거예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내 행함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라는 식으로 또 내 죄를 더해버려요.
죄인이 죄인다워야 되거든요. 죄인답다는 말은 당연히 저주받아야 되는데 죄인 주제에 저주를 안 받겠다고 몸부림치고 버티는 그 자체가 극렬하게 죄인답습니다. 정말 저주받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분이 임직을 새로 받아서 사이트에 어떤 기관의 책임자로서 그 포부를 글로 써 놨어요. “나는 새롭게 부임해서 책임자가 되었는데 저의 각오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겁니다.” 처음 마음을 잃지 않는 겁니다.
초심이 뭡니까? 인간에게 초심은 구라만 떠는 것이 초심이고, ‘이기주의 + 거짓말’ 하는 그게 초심이에요. 다른 초심은 없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하면 ‘이제부터 나는 거짓말만 하고 당신들 속이겠습니다. 이게 나의 초심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속을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풀이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의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도 인간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말씀이 나온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들이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벌써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죄짓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죄짓는 것 가지고 “하나님, 영광 받으옵소서. 나의 이 순수함, 순결함을 받으시옵소서. 나의 정직함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있어서의 일은 인간하고 거래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약속을 앞장세워요. 인간한테는 기대할 게 없고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을 찾아가지요.
그런데 그 언약을 인간에게 줄 때 그 언약과 동반해서 누가 가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언약과 더불어서 인간세계에 찾아오게 됩니다. 주의 이름. 구약 때부터 언약이 있는 곳은 다 주의 이름이 있어요. 구약에서는 온 인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택한 민족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찾아가지요. 뭘 들고 가느냐? 언약을 들고 갑니다. 그 언약을 들고 가서 언약 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죄인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행함도 주께서는 거절합니다. 받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의인을 생산해야 되고요, 그 의인을 생산할 때 법칙, 언약적 법칙이 뭐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그 법칙이 의인과 더불어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면서 마지막 생산해내는 것이 “역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았다.”라는 사실을 언약과 동반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주의 능력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것을 언약이 주어지는 현장에서 실시하는 겁니다.
언약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일했다는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3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은 뭐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느냐? 안 믿었어요. 왜 안 믿었느냐 ‘아브람’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요.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일했는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일을 하시고 언약을 적용시키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돼요.
‘아브람’은 믿지 않았지만, 믿음이 없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을 믿는 자가 새롭게 없는 데서 생산된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방법은 없고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될 때는 거기에 주의 이름, 언약의 주인공이 거기에 개입했기 때문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가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로움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아무것도 한 게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 그걸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받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작용에 의해서 의인이 되어버린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을 로마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함이 없이 라고 합니다. 행함이 없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인간의 어떤 행함도 없이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행함이 없다는 말을 로마서 4장에서 다른 말로 하는 것은, ‘행함이 없다’를 ‘믿음으로’라고 이야기하고 행함에 대해서는 아브람이라는 인간에서 비롯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4장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선물이라 보시면 되겠지요. 로마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은혜가 은혜답게 되기 위해서는 일체 믿음이 아닌 것, 다시 말해서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될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했지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살 수 없어 죽은 자지만 하나님이 보내준 이삭을 통해서 대신 바치면 ‘아브라함’ 네가 죽은 자가 너로 교체된 약속에 의해서, 그때 이삭이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가 된다는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 + 이삭의 죽음 =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아브라함’ 속에는 죽은 ‘아브람’과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이 같이 결합 될 때 그것이 바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되는 모습이에요. 그게 바로 약속이 구현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 있었잖아요. 강도는 왜 사느냐? 강도를 분해해보면 강도는 죽었고, 강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강도는 오늘 밤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간다,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강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예수님 스스로 죽는 그 죽음의 행위가 강도의 운명을 확정 지었고 결정해버렸습니다. 강도는 없는 믿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 발생 된 거지요. 강도가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강도의 마음이 아닌 겁니다.
강도는 죄인이에요. 죄인은 죄인다워야 돼요. 죄인은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 께서 받으시는 게 안 나와요. 그것은 딴 데서 나와야 되는데 딴 데서가 뭐냐? 강도를 위해서 대신 죽었던 예수님의 믿음이 강도의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 제공해서 강도가 주와 함께 살게 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그 일이 언약의 자손인 이삭과 그다음에 나오는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계속해서 똑같은 법칙이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똑같은 법칙을 위해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다가 리브가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가 뭐냐? 샴쌍둥이예요. 머리는 둘인데 몸체는 하나가 돼요. 그런 쌍둥이를 낳아버려요.
그래서 그 둘은 떨어지지 않는다. 분리되지를 않아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그 분리를 통해서 죄인이었던 자가 어떻게 언약의 개입으로 의인 되는가를 그 분리됨을 통해서 이미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믿는 자의 모델이 등장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분리되기 이전에 인간 자체가 스스로의 하나님의 언약이 없이는, 하나님 스스로의 힘이 없이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세밀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그걸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학교 때 배운 것, 흔히 다 아는 이야기를 잠시 해 보겠습니다. 3차 방정식에 관한 거예요. 근(根)이 하나 있는 것은 1차 방정식, 근이 두 개 있는 것은 2차 방정식, 근이 세 개 있는 것은 3차 방정식입니다.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그리면 곡선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거든요. 그때 거기 중간에 변곡점이 있어요. 갑자기 곡선이 바뀌는 것을 변곡점이라 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거니까요. 그 변곡점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그래프의 x좌표의 비율이 동일한 비율로, 변곡점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이 똑같은 비율로 x좌표를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게 있어요.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변곡점을 거쳐서 접선지점이 ‘y=0’의 그 지점을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의 3차 방정식이 곡선으로 대립이 되어 있다. 이것은 근(根) 세 개를 이야기하면서 두 개는 서로 똑같은 비율로 어떤 중심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전환하면서 그것을 후손을 통해서 상세하게 알려줄 때에 세 명으로 짜인 두 명이 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요.
세 명으로 짜인 두 명이라는 것은 뭐냐? 한쪽은 야곱, 한쪽은에서, 그리고 그 중앙에는 하나님이 개입됩니다. 하나님이! 물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준 것은 아버지 이삭이지만 야곱과에서, 3차 방정식 같으면 이게 서로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싸우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뭐냐? 붙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요.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인데 이게 떨어져야 할 때 제대로 안 떨어지고 한 몸뚱이처럼 그렇게, 외부에서 보면 따로따로인데 이게 따로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는 같은 한 덩어리의 몸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곱과 에서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붙듦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거짓말로 인하여 형인 에서가 저주를 받아요. 그런데 야곱은 내 몸 따로 형 따로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아니라 야곱 본인이 거짓말, 아버지를 속이는 거짓말로 인하여 같은 몸이 되는 그 형의 몸이 저주를 받으니까 내가 나를 저주하는 그 기능을 야곱이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저주하는 거예요. 나의 속임으로써 내가 저주받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그것 밖에 못 해요.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준다니까 야곱은, 그 복은 반드시 먼저 태어난 자가 복을 받는다는 그런 상식에 입각해서 장자가 되어서 복을 받고자 야곱은 노렸던 거예요. 야곱은 형에게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복 받을 장자권이 늘 형한테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사냥 나갔다가 헐떡거리면서 배고파서 돌아왔을 때 일부러 야곱이 팥죽냄새를 피워요. 그러면 형이 환장하지요. “야, 배고프다. 팥죽 주면 너 원하는 것 다 해줄 게.” 그럴 때 동생이 뭘 노리느냐 하면, “형의 그 장자 나에게 줄 수 있나?” “아이고, 그거 가져가라, 가져가! 팥죽이 중요하지 장자 그게 중요하냐?” 하고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인수인계 해버렸지요.
그건 뭐냐? 지금 야곱이 뭘 모르냐 하면, 형이 갖고 있는 장자권이 나에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야곱은 뭘 모르느냐? 같은 몸인데? 같은 몸이에요. 형 몸 따로 있고 자기 몸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는 없고 너한테는 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한테 없는 것, 형에게만 있는 것을 빼앗기 위해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속임으로 인하여 형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곧 야곱 본인이 형과 같은 몸이 되기 때문에 본인이 저주받은 셈이 되어버린 겁니다. 3차 방정식에서 변곡점 사이에 둘 다 서로 비율이 같아요. x의 좌표의 평균비율이 동일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저쪽에 똑같이 같은 비율로 일어납니다.
여기서 야곱이 축복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축복을 가진 것이 뭐냐? 형의 자리에 가게 되면 그게 곧 저주였어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인간은 축복을 원하면 원할수록 자기는 저주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축복을 원하면 원할수록.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기가 예수를 믿음으로 복 받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거짓말이에요.
그게 왜 거짓말이 되느냐? 자기가 지옥 가는 사람과 한 몸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 그걸 몰라서 그래요. 3차 방정식은 한 덩어리에요. 저쪽 편에 하나의 변곡점, 저쪽 편에 있는 운명이나 이쪽 편에 있는 운명이나 똑같이 그것은 죄인의 운명입니다. 인간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저주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해서 태어날 때 야곱 따로 그리고 에서 따로가 아니라 서로 붙들고 태어난 이유가, 축복받았다는 그 축복이 오히려 상대를 저주케 했고, 그 저주받은 그 사람의 저주에서 복 받았다고 하는 이 야곱의 축복이 무효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그냥 죄인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가? 복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수완을 다 부리는 식으로 인간은 저주받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말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영생 얻기 위해서 어떤 짓도 다 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던 저주의 본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너는 저주받아라. 나는 구원 받겠다.’라는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인간세계에 그런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까 한 것과 연관시켜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람’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줌으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데요, 그 사이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넘어오면서 ‘아브람’은 죽어야 됩니다. 심판받아야 돼요.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 저주를 누가 받는가? 수풀에 있는 하나님의 숨겨놓은 어린양이 대신 저주받지요. “이삭을 잡아라.” 이삭을 너의 대속물로 잡아라, 해놓고는 막상 이삭을 잡으니까 이삭 자리에 또 수풀의 양을 대신 잡아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의 희생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것을 따로 준비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아브라함’을 딱 쪼개보면 거기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이 그 ‘아브라함’ 속에 있어요. 그러면 ‘아브람’은 뭘 믿었느냐? ‘아브람’은 아무것도 안 믿었어요. ‘아브람’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믿어서 살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대신 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대신 죽으심의 그분만이 의인이 되는 거예요. ‘아브람’은 죽어야 되고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아브람’은 죽어야 되고 ‘아브라함’은 죽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왜? 의인이기 때문에.
따라서 죽어야 될 자와 죽지 않아야 될 자에게 죽지 말아야 될 분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전된 ‘아브라함’은 그 안에 계신 죽지 않아야 될 분, 의인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의인 되고 그 의인에 있어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그런 현상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서 조금도 상세하게 이야기 해야 될 필요가 뭐냐? 그렇다면 인간은 그냥 죄인이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죄인행세를 하고 죄인이 죄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노력 같은 것이 있거든요. 그 노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그 후손계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그게 뭐냐? 야곱이에요. 아버지가 상속한다는 그 소리 듣고 자기가 장자 되기 위해서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이는, 바로 거짓말하는 그 일을 야곱이 해요. 왜 하느냐? 자기가 하늘의 복을 따내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온 사람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거짓말의 최종적인 것은 예수 믿는 거예요. 믿는다는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왜 거짓말이냐 하면, 자기가 구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본인이 선택하는 거예요. 축복이냐 저주냐, 저주냐 축복이냐, 자기가 둘 중 하나를 내가 고를 수 있고 내 결정과 선택으로서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제가 어릴 때, 소싯적에 국민학교 1, 2학년때 아이스케이크 장사가 와서 팔면서 물에 물방게를 넣어두고 “자, 돈 내고 뽑기를 하는데 물방게가 알아서 찾아간다. 운 좋으면 두 개에 걸리면 두 개 주고 열 개에 걸리면 열 개 줄게.” 물방게가 가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 기억이 나요. 신기한 게 물방게가 막 헤엄치던 것. 대부분 꽝이었지만. 그게 오늘날 와서는 지난 4년 전 ‘월드컵 문어’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월드컵 낙타’가 등장했어요. 두 팀 중 누가 이길 것인가? 인간은 이처럼 문어를 앞장세우든 낙타를 앞장세우든 본인이 결정하고 각오하고 결심한 그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거예요. 자신의 미래로 확정 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우상 믿을래, 예수 믿을래?” 할 때 우리는 자기가 월드컵 문어예요. ‘가만있어 보자. 내가 부처를 믿는 게 유리할까? 나 대신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는 게 나한테 유리하겠지?’ 왜? 성경 로마서에 보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니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야곱이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야곱이 놓친 것은 뭐냐 하면, 에서의 저주가 자기의 속임수로 인하여 저주받았을 때 그게 에서의 저주지 자신의 저주로 이해를 못 한 거예요. 같이 묶였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고 자기는 음매, 신나고 ‘형은 약오르지?’ 이러고 있다고요.
본인의 선택이 본인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역주행,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그 사실, 계속해서 그 뒤에 나오는 것도 아브라함의 그 원칙, 언약적 원칙,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그 원칙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은 이삭 상황, 야곱은 야곱 상황을 하나님께서 뒤에 언약을 통해서 허락하신 거예요.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왜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믿음을 해도 그것이 저주냐? 그걸 알려주는 거예요. 인간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게 오히려 진짜 저주를 받아야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강조하는 그러한 결정만 내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왜 그런가? 중간에 3차 방정식의 변곡점처럼 빠진 게 있어요. ‘y=0’가 되는 그 지점, 인간이 자기의 행위와 자기 결정과 자기 결단에 정신 팔릴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그분, 그분이 얍복강가에 나타났습니다. 그분, 바로 하나님이 나타난 거예요.
에서와 상대하던 야곱이 창세기 32장의 얍복강가에서는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는 거예요. 야곱은 맞은편에 에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중간에 뭘 빠트렸어요. 하나님을 가운데 두고 야곱과 에서 둘 다 있었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존재를 빼버리고 그냥 하나님이 “복 받을래, 저주받을래?” “까짓거 복 받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런데 복은 아버지가 장자한테 준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버지가 완전히 몰아붙이는 거예요. 사냥한 고기, 정육점에서 파는 고기 팔고 사냥한 고기로 별미 해 올려야 복 준다고 하니까 이것은 노골적으로, 그렇게 빙빙 돌려서 할 게 아니라 “형인 에서야! 너한테 다 줄게.” 이거 하고 똑같은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야곱이 오해하는 것은, 형에게는 축복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형에게 축복이 없어야 되는 것은 야곱 나에게 축복이 없어야 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저쪽 복 없으면 나도 복 없어요. 저쪽 저주받으면 나도 저주받는 거예요. 인간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의인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할 때 의인이 없기 때문에 믿음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믿어도 그것은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고, 야곱이 하나님을 속이는, 아버지를 속이는 속임수라고 하나님은 단정해 버립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순결, 순수, 거룩, 모조리 다 속임수입니다. 믿음, 선교, 찬양, 기도, 예배, 전부 다 속임수입니다. 인간이 뭘 해도, 뭘 해도 속임수입니다.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행동과 태도, 말은 없어요. 전부 다 속임수입니다. 어떻게 속 편하지 않습니까? 속임수 아닌 게 없으니까. 오히려 그게 속 편한 거예요.
인간은 왜 그 사실을 모르는가? 지옥 가는 저 인간들, 지옥 가는 자들과 천국 가려고 애쓰는 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있어요. 형의 저주를 자신의 저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야곱이 바로 형을 보면 안 돼요. 너는 형이고 나는 동생인데 나는 형의 것을 빼앗겠다, 하면 안 되고 중간에 뭘 거쳐야 돼요. 그런데 뭘 거쳐야 되는지 야곱은 형한테 이기기에 급급해서 그걸 전혀 생각 못 한 겁니다.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에 야곱을 찾아왔어요. 언약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가지고 찾아와서 그 약속을 통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완전히, ‘아브람’과 분리된 ‘아브라함’으로 완전히 달라지듯이 야곱은 야곱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돼요.
야곱과 분리된다는 말은, 그동안에 야곱은 저주받은 에서와 분리되려고 애썼어요. 절대로 에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야곱 이름 자체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분리될 수가 없어요. 둘 다 육이에요. 분리 안 됩니다. 분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야 돼요. 찾아오셔서 야곱을 죽여야 됩니다. 야곱은 에서를, 형을 상대하려고 하다가 그날 얍복강의 밤에는 누굴 상대하는가? 언약의 하나님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싸웁니다. 씨름합니다. 거기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 맞은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 명, 야곱과에서, 그리고 하나님, 원래 삼각형으로 구성된 이 구조, 인간이 서로를 속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인간을 속이는 속임이 가능한 구조의 인물로써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이 인간을 속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밤에 나타난 하나님마저 이 야곱은 속인 셈이 되어버린 거예요.
나한테 축복을 주시는 분을 야곱이 속인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주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은 따로 있고 내가 기대하는 축복은 따로 있어서 내게 필요한 축복 달라고 하나님을 속인 셈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야곱에서 나올 것은 거짓말과 엉터리와 저주스러움만 나온다는 사실을 야곱이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드디어 축복을 줍니다. 방법은 뭐냐? 야곱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야곱을 죽이는 거예요. 그것은 ‘아브람’을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죽이는 겁니다. 야곱을 죽임으로써 야곱이, 그 야곱이라는 육이 다른 육으로 변하지 않도록 육을 차단시켜 버리는 거예요. 육과 그리고 영의 세계에서 육이 영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도록 육을 차단시키는 것이 바로 야곱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에 갈 때는 야곱이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언약으로 채워진 사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의 세계로, 천국 세계로 천국 백성이 되는겁니다. 그 언약이 야곱의 새로운 이름 안에 옴팍 다 담겨 있어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이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언약이듯이,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 언약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는 누구냐? 야곱이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로 오신 주님이 야곱에게는 장자가 되어서, 주님이 야곱에게 야곱이 되어서 야곱에 의해서, 예수님이라는 그 야곱에 의해서 육의 야곱은 저주받아 마땅한 겁니다. 본래의 초심대로 저주받아 마땅한 거예요.
그러면 끝으로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람 야곱에게 복을 주면 될 것을, 귀찮게 하지 말고 “야곱, 이리 와! 복 줄게. 바이바이, 천국으로 오너라.” 이러면 될 것을 왜 야곱과 에서 둘로 구분하느냐? 야곱에게는 결국 복이 돌아가고, 에서는 미워해서 결국 저주가 돌아가는 이 구조가 예수님 내부의 구조에요.
예수님이 작업을 하시고 예수님이 수행하는 업무가 인간의 요소에 야곱과 에서라는 언약의 요소대로 주께서는 일을 추진을 해요. 나 예수님 본인이 저주도 받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를 극복해서 하나님의 부활의 세계, 영생의 나라, 영생의 천국을 만들 수 있는 권한도 예수님에게 있는 거예요.
지옥을 만들 권한도 예수님에게 있고, 천국 만들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언약의 사람인 야곱과 에서의 가정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기능적으로. 그게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부분과 모양이에요. 그냥 주께서 일하시는데 마지막에는 뭐냐? 아들로 일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이 하시는 기능을 우리는 우리 시대에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저주하시는 것도 주님, 복 주시는 것도 주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들이 살아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기능들의 일부를 맡아서 하라고 천구백몇 년도에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야곱처럼. 언약의 사람이지요.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내가 예수 믿어서 의인 되고 구원되는 경우는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그 말씀, 믿음에서 나온 믿음이 우리를 의인 되게 하십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믿음의 원천이 누구냐?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주신, 우리 안에 들어와서 발생 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 예수님의 일로 인하여 저희들이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생길 수 없는 믿음이 생겨서 이로 인하여 우리가 이미 의인 되었음을 주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