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강, 413강) 문화와 양심, 분노 221122
녹취:이하림
412강-YouTube강의(문화와 양심 고린도전서 2:9)20221122-이 근호 목사
제412강, ‘문화와 양심’.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영원한 고정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이 양심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한시도 동일하지가 않습니다, 그 내용이.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것이 자기 의를 만드는 바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양심이 착하질 않아요. 양심이 작용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나 이렇게 정당합니다, 나 이렇게 잘났습니다, 하고 양심의 이름으로 남들에게 하소연하고 호소하죠. 이렇게 되면 양심은 진짜 제 모습을 가리고 감추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양심, 참 착해 보이잖아요. 선하고 순결해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순결한 것이 은밀하게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쓰여지는 게 양심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 양심대로 했다.” 양심대로 했겠죠. 했는데 그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을 네가 나서서 커버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은 자기 양심을 뚫을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이 일종의 가면 같은 거죠. 그 가면을 그 마스크를 뚫어야 되는데 뚫지 못하고 마스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말은 더 쉽게 하면 마음이란 뜻이에요, 인간의 마음. 성경에 보면 인간의 마음은 시편 51편에 보면 마음이 순수하지 않죠.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다윗이 고백하는 그 대목을 보게 되면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출생 자체가 죄에서 만들어졌다 이 말입니다. 그럼 죄에서 만들어졌으면 그 양심이라는 마음도 어디서 나왔겠어요? 죄에서 나오죠.
다윗은 이 사실을 왜 그제야 고백하는가? 그 전엔 왜 몰랐는가? 자기 양심이 그것도 순결하고 순수하다는 양심이 자기의 마지막 최종 모습인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양심을 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는 것 있죠, 윤 동주의 시처럼, 양심상 나는 지금까지 남 앞에 욕 얻어먹을 짓은 안했다, 라고 양심을 최종 방패로 사용했던 겁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동안 인간들은 사람들 눈에만 안 들키면 자기 괜찮은 양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셔가지고 그 양심을, 최후의 보루 최후의 스크린이라 여겼던 그 막을 찢어버립니다.
원래 북에 막이 있어야 소리가 나잖아요, 때리면. 그 울림으로. 그런데 어떤 사람이 칼로 그 북을 쫙 찢어버리면 드럼을 찢어버리면, 소리가 안 나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죠. 그 말은 뭐냐 하면 풀썩풀썩 바람만 나겠죠, 두드리면. 찢어진 것이 더 찢어지겠죠. 10cm 찢어졌다가 때려버리면 20cm 더 갈라지겠죠. 죄인이 무슨 말을 하리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이 양심마저도 주님이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쫙 찢어졌다는 겁니다. 찢어지니까 그 안에 내가 남한테 할 자랑거리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어요? 일체 없었던 거예요, 자랑거리가. 내가 뚫을 수 없는 내 마음을 주께서 뚫어주니까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자기 마음을, 양심을 최종 보루로 생각한다면 거기다가 신학 입히죠, 철학 입히죠, 여러 가지 학식에다가 교양 같은 거 다 동원시켜서 입히죠. 그리고 교회에서 활동한 걸 기억으로 삼아서 그 기억을 전부다 양심이란 막 위에 누적을 시키는 거예요. 적금 붙듯이 누적시키는 거예요.
그런 게 차곡차곡 쌓이면 뭡니까? 내가 얼마나 신앙생활 잘 하고 있고 내가 보기에도 하자없이 하고 있다는 자랑거리로 이게 점점 키워지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그걸 ‘교회문화’라고 하는 겁니다, 문화.
성경에서 문화는 가인의 후손들이 다른 것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창세기 4장에 가인들은 음악 발견하고 철기문화 발견하고 도시 건설하고 이걸 그들의 막다른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후손들은 자랑거리 할 것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 뜻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
자기 자랑하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그 아벨. 아벨의 자랑거리는 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내 제물을 받았다는 거예요. 내 죽음을 받아줬다는 것. 나는 죽지만 주께서 받으시는 죽음이게 해주셨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여자의 후손 노선입니다.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가 예수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마23:35). 같은 계열이라는 뜻이에요, 계열. 거기에 들어간다는 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어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가지고 자랑하겠습니까? 어떤 걸 자랑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나를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러니까 바울이 아니고 사울이었던 시절에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랑했던 것과 지금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했던 이야기와 한번 이렇게 비교를 해보세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먼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와 있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 너희 속에 사도 바울 본인도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마음, 양심이라 해도 되고 마음, 이 마음은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어떤 자기의 문화 활동 때문에 세상적인 자기 업적 때문에 나오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1절, 12절에 나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남이 모르는 자기만이 아는 내밀한 것, 은밀한 것이 있다는 거죠. 그게 마음이에요. 양심이라는 것이고.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 이야기하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내가 얼마나 순수한 양심으로 행동하는지 너희들이 감히 그 감을 잡을까? 모르지. 너희들은 몰라. 나만 알아.” 이런 뜻이에요. 그 나만 아는 게 양심 또는 마음이란 말이죠.
사람에게도 본인만 아는 은밀한 것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하나님만의 은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11절, 12절에서 성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
그러면 그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이 말은 사도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알았던 마음이겠어요, 아니면 성령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발생된 변화입니까? 발생된 변화겠죠.
그러면 이 마음은 누구 마음인가? 성령이니까 성령은 깊숙한 예수님의 속마음이죠. 속마음이 왔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은 뭐다? 나는 너희들이 예수님과 그 분이 십자가 죽은 것 외에는, except,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성령을 받았다면 최종적으로 나오는 것은 무슨 이야기만 나와야 한다?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말 말고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말은, 나는 죄인이고 주께서는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 죽었다는 그 이야기. 나의 양심, 나의 마음? 사실은 그게 죄라는 사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성령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성령만 오는 게 아니고 ‘~가 아니고’ 라는 말을 먼저 전제로 해놓고 성령 이야기해요. 세상에 오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그럼 이 세상에 공통적으로 모든 인간이 공히 갖고 있는 영은 하나님의 영에 비해서 그것은 불순하고 더럽다는 이야기를 사도는 십자가를 겸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 양심? 네 마음? 더러움 맞잖아. 심지어 신자라 할지라도 더러운 영이 있어요. 그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새로움이 들어왔지, 내 마음? 내 순수함? 아니에요. 세상의 영의 일부에 속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그게 예수님의 새로운 마음이 들어왔을 때나 성립되고 가능한 일이에요.
세상이라는 것은 문화인데 문화는 수상하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문화를 깨고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문화가 보기에 어리석은 십자가만 증거하는 것. 이제 문화라는 것에서 여러분이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영이 되시기 바랍니다.
ouTube강의(분노 신명기 29:20)20221122-이 근호 목사
제413강, ‘분노’. 분노를 낼 자격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범죄한 죄인이 분노한다, 이게 지금 성립이 됩니까? 뭘 잘했다고 분노해요? 그런데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분노가 시작됩니다. 하루 종일 분노하는 거예요. 사실은 억지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분노합니다.
그 분노하는 이유는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는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 거예요.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주께서는 간단하죠. 네가 뭔데?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분노하는 것도 분노지만 그 안 되는 것 때문에 짜증내는 게 더욱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내용이 되죠.
분노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밖에 없는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신명기 29장 20절에 나와요.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성질내시는 그걸로 끝내시는 게 아니고 아예 하나님의 세계에서 추방시키고 쫓아내죠. 이게 분류인데요. 분류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중심으로 잡을 때 너는 나 있는 곳에 못 있게 하는 게 그게 최후의 저주입니다.
“나는 너하고 같이 안 있어. 네가 아무리 나를 초청해도 나는 네 초청을 거절해. 너 있는 곳에 나 없을 거야. 나 있는 곳에 너 없을 거고.”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대환영받아도 주님한테 버림받으면 끝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그런 말씀 있죠.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16:15). 그만큼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대척된다, 반대다 하는 그걸 염두에 두시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나는 세상사는 보람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잖아요. 그 본성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죠.
이 분노의 결과에 대해서 한 구절 더 보신다면 신명기 32장 22절에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이 분노가 지상에 뿐만 아니고 우리가 죽으면 죽음까지 따라가요. 우리가 죽은 그 동네 있잖아요. 죽은 자들이 모이는 음부, 죽은 자들의 집합소, 거기까지 뭐가 따라온다? 주님의 저주와 분노가 따라옵니다. 끝까지 옵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충 알면서 하나님 안다고 가볍게 여기면 안돼요. 흔히 이런 말 있잖아요. 끝까지 한 놈만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끝까지 잡습니다. 따라가다가 아휴, 나 놓쳤다. 이런 거 없습니다. 끝까지 추적해서 하자 없이 실수 없이 오류 없이 끝까지 저주로 공격해요.
자, 그러면 이 저주를 받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왜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는가? 열왕기하 19장 28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잘났다’ 이것도 교만이지만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교만과 오만의 이유가 ‘나 혼자 살래요. 나 자립적으로 살래.’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나 홀로 신이 되고 싶다 하겠죠. ‘나 혼자 있을래. 나는 최종적으로 나만 남길래.’ 이걸 교만, 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열왕기하 이야기는 랍사게라는 사람이 히스기야 왕을 얕잡아보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잖아요. 포위해서 온갖 모독을 다 했죠.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이름 불러봐라. 내 힘에서 빼낼 수 있는가.” 라고 건방을 떨었던 겁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다 들었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히스기야와 유다 나라한테 그런 오만한 말을 쏟아내게 하는가?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대꾸하지 말고 가만 있어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세상이 복음 아는 사람에게 공격할 때 대꾸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언급할 때 저주도 버림받음도 같이 짝을 맞춰서 그 현장에 드러내십니다.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심판하는 양 우리가 화내고 이러면 돼요, 안돼요? 우리가 구세주이고 심판주입니까? 아니죠.
그렇게 오만을 떨 때 하나님께서 그 원수 같은 교만한 자한테 묻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가 우리의 태도를 주시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네가 내 이름과 내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거든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분노하라 했습니까, 도리어 기뻐하라 했습니까? 네가 복음으로 핍박받을 때 어떻게 하라 했어요? 슬퍼하라 했어요, 기뻐하라 했습니까? 기뻐하라 했잖아요. 선지자들의 상에 네가 지금 합류하고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난 받아서 그들을 복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5:10-12). 이게 팔복이잖아요. 복이잖아요, 복.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아는지, 안 아는지 우리를 측정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주변에 복음에 대해서 모독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놀리는 자들, 오만한 자들이죠, 오만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발생시켜서 그들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오만한 게 뭐냐? 교만한 게 뭐냐? 나의 미래를 내가 처리하고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만 중의 교만이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는 거죠.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 안하고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낮아진 내 마음, 겸손한 내 마음, 한없이 순수한 내 마음을 내세울 때 그건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작품을 만드는 거예요. 내 인생을 복음을 이용해서 내가 그럴싸한 괜찮은 신앙으로 내가 조립해내고 생산해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들이 했던 겁니다. 금식하고요. 금식을 왜 합니까? 금식하고 또 금식할 때 얼굴 찡그리고 왜 그렇게 해요? 본인의 금식을 본인이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시편 2편 1절에 보게 되면 복음을 아는 주위에 교만한 자가 같이 등장해서 들끓게 되어있어요. 시편 2편에 보게 되면 세상의 권력자들도 같이 교만을 떱니다. 분노를 유발하죠. 2편 1절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귀신같이 세상이 알아요. 세상이 알기 때문에 그들은 가까이 와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끊고자 하죠. 로마서 8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준 사랑을 끊을 수 없느니라 (8:35).
끊을 수 없는 것을 우리 마음을 흔들어서 끊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예수 믿고 그동안 챙긴 거 뭐가 있나? 예수 믿고 네 집안 잘된 게 뭐가 있느냐?” 자꾸 이런 식으로 회유와 협박과 공갈을 일삼습니다.
“너 예수 믿고 난 뒤에 여전히 죄 짓잖아. 그러니까 너 구원 못 받지.” 이런 것처럼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내 행동, 이걸 자꾸 지적하면서 정죄하면서 달려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세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주께 선물이 들어왔다는 표시일 수가 있어요.
어쨌든 복음을 아는 순간 세상의 분노는 벌떼같이 달려든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같이 다루려고 하지 말고 대적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