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1-3 / 시간의 장벽
시간의 장벽
이근호
2022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3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선지자는 자신을 현 이스라엘의 대표로 간주해서 하나님께 단독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왜 하필이면 갈대아라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치려하십니까? 둘째,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 폭력에 아무 죄도 없는 의인들까지 참혹하게 무너져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셋째로, 도도대체 이런 수치스러운 수모를 언제까지 당하야 합니까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명확하게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너는 이 바닥에서 빠져라. 이 일에 끼어들지 말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결코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관여할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이 세대가 아니라 오는 세대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이해하는 시간 의식과 이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도리어 끊어져 있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붙들어 유지할 것인가에 매진하는 인간들에게는 도저히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세대를 도리어 공격하는 세대가 찾아듭니다.
그 세대의 입장에서 볼 때, 하박국이 제시한 질문의 답변을 하나님 관점에서 따지면 하나하나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왜 갈대아라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내부에 인위적인 요소가 꼴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왜 의인들까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을 악인들과 같이 받아야 되느냐는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대에는 정의가 불의를 이길 수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몽땅 침몰함이 마땅합니다. 이 세대에는 정의가 없고, 정의쪽에서 ‘불의’라고 평가할 만한 불의도 없습니다. 전체 다가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서 ‘다 빼앗겼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 줘버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치 빚잔치하듯이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 땅의 많은 민족 가운데 유일한 ‘맞는 역할’, ‘희생해야 하는 역할’은 맡은 민족입니다. 셋째 질문, 즉 ‘이 고통의 기간이 언제 끝납니까?’에 대한 답변은 이러합니다. ‘나는 사라지고 말씀이 그 현장에 드러날 때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그 말씀의 세계를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일하시므로서 1타쌍피의 효과를 낳습니다. 첫째, 있는 것은 없어지고, 둘째, 없는 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나’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지금 내가 생각해 둔 그런 ‘나’가 아니라 다른 ‘나’를 천국에 세우십니다.
이 세대가 망한다는 것은 실은 나의 멸망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세상을 볼 때에 나와 무관하지 않는 식으로 이해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대에서 오는 위력이 받으면, 이 세상을 마치 다 버리는 것처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무서움과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이 세대 중에 그래도 미련갖고 마음두고 있는 게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행나가시는 일에 대해서 나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를 죽이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속한 이 세대의 한계를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즉 이 세대 안에 속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대는 묵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35-36에 보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시간의 장벽을 형성시켜 그 어떤 인간도 묵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 없게 하셨습니다.
그 끊어진 증거가 바로 인자(人子)되시는 주님께서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 가운데 박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저 이 세대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이 죽음에 합류할 자는 없기에 묵시의 세계, 오는 세대에 대해서 아는 이는 없습니다. 교회나 성당이나 모든 종교가 천국과 끊어진 상태인 이유는 그들이 이 세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생각해둔 그 세상에 들어간다고 자부하는 것은 오는 세대의 특이성이 결여된 생각입니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과 이질적이라는 것은 감안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생각은 오는 세대의 생각이기에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이 압니다. 마치 마리아 오빠가 죽었을 때, 예수님 빼놓고 그 누구도 나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는 세대는 이 세대가 기다리면 되는 세대가 아니라 이 세대의 멸망과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대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오는 세대, 곧 묵시의 시대에서 성령을 참된 이스라엘에게 보내면, 마치 테이저건으로 범인을 쏘듯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선이 인간에게 도달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입장, 혹은 말씀 입장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제거되어야 마땅함을 압니다. 시편 136:9에 보면,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찾는 시간을 가져봅니까? 온종일 자기 생각에 몰두하지요. 스스로 자신이 이 세대에서 진즉에 망해도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인간의 신체를 이용하여 인체 속속들이 돌아다니다가 빠져나오는 공기의 통로로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눈이 빛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이 빛되게 하기 위해 눈을 만든 겁니다. 새로운 묵시의 세대는 쩍쩍 갈라진 가뭄 때의 논바닥같은 우리의 심령도 풍성한 단비가 그 빈칸들을 다 메워주듯이 인자하심을 덮어주시는 세대입니다. 굳이 나의 것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모조리 다 주님의 말씀이 친히 만들어 나가신 인생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책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도 세상이 이 책의 내용을 모르고 안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이 멸망하는 세대에 맞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령을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 어떤 잃는다 할지라도 나의 것이 잃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보다 귀한 세대에 속했으니 이 땅에 무시당하는 것도 복이라여 여기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강-하박국 2장 1-3절(시간의 장벽)2211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1-3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1-3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질문한 것, 그것을 선지자 본인이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유다나라지요, 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대변자로,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대표로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과 상대하면서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답변해주시는지 내가 기어이 기다리겠다, 라고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내게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질문을 했느냐 하면, 세 가지를 질문했거든요. 첫째는, 왜 이스라엘을 치는데 하필이면 갈대아사람 이방민족을 동원해서 우리를 왜 치는지 거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답변을 해주셔야 되고 두 번째는, 그들이 굉장히 잔인한 민족이고 참혹하게 전쟁을 벌이는 자들인데 그들의 참혹함의 제물로 이스라엘에 있는 의인들까지 피해를 보면서 망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답변해주셔야 됩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상대로 청문회하고 있는 거예요.
세 번째는, 언제까지 이렇게 우리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당해야 됩니까, 라고 세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답변을 하셨습니다. “너 빠져라.” 이게 답변이에요. “너 빠져. 이번 일에서 너 빠져!”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지요.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이스라엘 네가 끼지 말라. 끼어들지 말라.”
지금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을 이스라엘 본인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내용이 자기 일이잖아요. 자기 일로 간주해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은, 우리가 기대하고 조목조목 이야기했으니까 조목조목 하나하나 서면 답변하든지 어떻게든 답변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주의 일은 이거예요.
“이것은 너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내가 벌이는 일이다. 네가 거기서 한 다리 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 7절에도 나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몰라도 된다.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오히려 어리둥절하지요. 내 인생 내 것인데 내가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 하루하루 내일 어떻게 살고, 모레는 어떻게 살고, 이런 계획을 잡아야 되는데요, 김장은 언제 하고, 우리교회 김장은 다음 주에 하는데, 그렇게 김장은 언제하고, 어떻게 계획을 잡아야 되는데 너 빠져라, 하면 안 되잖아요. 이것이 우리네 상식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답변을 하지 않는가?
1번 질문, 왜 하필이면 갈대아 이방민족이 우리를 치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위적인 요소가 꼴 보기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갈대아 사람은 버리는 민족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버릴 패다 그 말입니다. 지옥 갈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그 지옥 갈 민족의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있기 때문에 지옥 갈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같은 한통속으로 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그들의 전쟁의 잔인함의 제물로 의인까지 망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네가 얻어맞는 역할을 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얻어맞는 역할. 그러니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속에서 네가 맞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줘버렸다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주먹질을 해서 내 얼굴을 탁 친다면 ‘네가 나를 감히 쳐?’ 이렇게 하지 말고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때린다고 얼마나 노고가 많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라는 말이지요. 빚잔치 하는 거지요.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 줬다고 생각해 버려라. 어차피 인생 털고 가는 거잖아요.
세 번째,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망해야 됩니까? 말씀이 드러나고 네가 사라질 때까지. 내 인생, 내 인생, 하는데 애초부터 내 인생이 없었어요. 주님의 인생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꾸어 나온 인생뿐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나라고 하는 이것은 내 인생이야. 내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어. 내가 내 인생 이끌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고,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데?’ 그거 사라질 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취급하는 겁니다. 왜?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시는 그것이 원래 이스라엘을 만든 취지와 부합이 돼요. 그 취급이. 그건 뭐냐? 오늘 본문에 묵시라는 게 나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묵시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시간의 흐름과 끊어지고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것이 묵시세계입니다.
어제, 오늘……, 이렇게 착착 진행되는 이 세상 말고, 이 세상과 연결이 되지 않고 달리 그냥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대, 그걸 묵시세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묵시세대를 주께서 이렇게 보내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에 대한 취지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네가 모르는 너를 내가 준비해뒀다는 겁니다. 지금의 내가 모르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미리 이런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해둔 그 나는 없고요, 내가 생각해 두지 않은 나가 새로운 세대 속에 섞여서 이 세상을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나, 내가 꿈꾸지 않은 나, 그 새로운 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내 인생 살려고 하는, 열심히 행함으로 살려는 나, 그것은 개한테 줘버려라. 어떤 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여기 바로 하박국 2장 4절에 나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신약에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을 설명할 때 잘 나와 있어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인간이 믿는 믿음 말고 인간이 믿지 않은 다른 세대의 복음 안에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올 경우에 너는 산다, 라는 말을 비로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대, 다 완성된 세대에서 주신 믿음, 선물로 온, 새로운 택배로 온 믿음 아니면 너는 이 세대와 함께 같이 죽는다는 말이에요.
마치 갈대아 사람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듯이 하나님께서는 현재 이스라엘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같은 한통속으로 갈대아 민족이나 이스라엘이나 다 같이 똑같이 취급하여 다 멸망시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나름대로 그럴싸한 직업가지고 돈벌이 하고, 그럴싸한 단란한 가정, 화목한 가정, 스위트 홈 같은 그런 것,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즐거운 곳은 오직 내 집 뿐이네~” 뭐 이런 것, 그것 아무 소용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는 나고 예상하는 내 가정이기 때문에 그런 가정 그런 것으로 남하고 비교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래는 지금 현재에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고, 미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가 아니고 전혀 예상 못한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미래가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 미래가 새로 만들어져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 그것은 바로 “이 묵시를 기록하라” 되어 있거든요. 하박국 2장 2절에. 인간은 말씀이 말씀대로 스스로 해버리면 인간은 배제됩니다. 사람이 끼어들어서 협력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말씀이 스스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말씀의 결과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이 옛 세대, 우리가 속한 이 세대를 버리고 새 세대를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이걸 고급스러운 용어로 해서 ‘1타쌍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를 때리면 두 개가 벌떡 일어나는 거지요. 하나는 뭐냐? 있는 것은 없어지고 두 번째, 없는 것은 나타나고. 1타쌍피. 그렇게 없는 게 나타나는 게 새로운 묵시의 세계입니다.
그 묵시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예상하고 살던 이 세대가 사라지는 심판, 그 심판은 옳았습니다, 라는 공통된 고백을 나타냅니다. “잘 없앴습니다.” 만약에 이 세대에 유하면서 선지자 하박국처럼 막 닦달내고 하나님께 따지면서 “의인들도 이렇게 죄인 취급받아서 멸망하는 이게 과연 정의가 살아 있는 겁니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대에 굳어 있는 사고방식이에요.
새 세대가 되면 ‘이 세대에서는 정의가 불의를 이기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왜? 멸망대상이기 때문에. 불의를 이긴들 무슨 소용 있어요? 정권 바뀐들 무슨 소용 있어요? 세상의 정의는 절대로 불의를 못 이깁니다. 불의가 승리해야 돼요. 불의가 승리해야 그 승리한 이 세대가 하나님에 의해서 한꺼번에 다 침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멸망시키지 말라는 아브라함의 요청에 대해서 그 요청에 부합시키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잖아요. 유황불로. 멸망하면서 의인을 새롭게 만드는 거예요. 나는 의인이니까 이 멸망하는데서 따로 빼내달라는 그것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망하는 그것은 참으로 옳은 하나님의 판단이었고 그리고 조치였습니다, 라고 믿는 그 믿음이 심판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의인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은 오직 말씀이 실행하는 그 말씀 실행의 일부로서 의인이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의인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상황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내가 거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기존의 나는 뭐냐? ‘나는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살면 복 받아서 천당 가겠지 내가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지.’ 이게 이 세대의 내가 생각하는 나 위주의 정의에요, 믿음이고.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주께서 이야기하지요. “깐족대지 말라. 죄인주제에 의인행세하지 말라.” 선지자는 이 묵시의 말씀, 달리면서도 볼 수 있도록 묵시가 말씀으로 체화된 것, 완전히 굳어진 그것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이 선지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니고 전생에 나라를 버린 겁니다. 그게 바로 의인이에요.
이 말씀에 대해서 다니엘 5장 5절이 너무나 제대로 말씀해주고 있어요. 그 예시가 아주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벨사살 왕이 깐족대는 거예요. 까부는 겁니다. 깐족대면서 “여호와라는 옛날 신이 있는데 그 신에게 제사지내는 기구들 전부 꺼내서 술 마시자!” 그런 식으로 모독하자, 그렇게 나올 때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그러니까 이걸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사람이 손가락이 나타난 거예요. 팔목이 나타난 게 아니고 손가락만 나타나서 글씨 쓰는데 필요한 인체의 일부가 나타나서 글씨를 씁니다.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절에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딱, 딱, 딱, 딱……! 벌벌 떨어요. 완전히 동영상 공개된 것 같아요. 무릎이 서로 부딪힐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얼굴이 하얗게 되고. 왜? 달랑 손가락만 나타났으니까요. 손가락만 나타났어요. 어떤 사람이 나타난 게 아니고 손가락만 나타나서 글씨 쓰는데 열중하고 있으니까요. 글씨를 보라는 말이지요, 글씨를!
지금 이 파티 장소에 손가락만 오라고 초청장 보낸 적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거예요. 이 세대에 오는 세대가, 말씀이, 그 묵시세계의 그 내용이 기록된 글자로써 벨사살 왕의 파티에 등장한 겁니다. 9절에 “그러므로 벨사살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그리고 묻습니다. 급했던 모양이지요. 사정이 굉장히 다급했어요. 7절에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이것은 신들의 영이나 할 수 있지 누가 하겠느냐, 그래서 다니엘을 불러 오라고 했어요. 월드컵 할 때 손 흥민 불러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팀에 기여도가 70퍼센트나 차지하는데 이 경우는 백퍼센트에요. 백퍼센트 다니엘을 찾아 왔어요. “그 글자를 해석하라.”
해석한 것이 25절부터 28절까지 나옵니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라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메네’라는 것은 그 나라지요. “임금님이 나라는 끝났습니다. 이 나라 망했습니다.” ‘우 바르신’ “페르사라는 나라에게 인수인계 될 것입니다.” 이게 해석이에요. 멸망에 관한 거예요. 묵시세계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우리가 지금 ‘과거-현재-미래’라고 예상되는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파괴, 시간파괴입니다.
이 세대의 모든 시간흐름에 대한 파괴, 역사에 대한 파괴가 말씀, 이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의 업무가 인간의 세상을 멸망시키는, 심판하는 겁니다. 시간을 파괴하는 거지요. 이 세상 파괴라 하는 것은 ‘세상이 파괴 된다.’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파괴되는 것, 곧 나의 멸망을 말하는 겁니다, 나의 멸망. ‘이 세상 파괴될 때 우리는 살아남겠지.’ 아닙니다. 우리도, 내가 알던 나는 마땅히 이 세대의 산물이고 열매기 때문에 같이 망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마르다 마리아 그 가정을 사랑하시고 그 가정의 오빠를 죽입니다. 그게 주님이 주신 복이에요. 오빠를 죽여 놓고 그 다음에 나흘 만에 오빠를 살립니다. 이렇게 해서 그 오빠 나사로가 세상을 보는데 1타쌍피, 두 개로 봐야 된다는 것을 새롭게 아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가 속한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복 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느냐?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갈아타기 할 수 있는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시간을 왜 파괴해야 되느냐? 그 시간이 언제냐, 하는 것을 알려주면 우리가 준비할 텐데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이 세대에서 구원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이 세대와 함께 같이 멸망해야 돼요. 우리는 같이 무너지라고 우리가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 모든 교회나 성당, 모든 종교단체가 왜 천국에서 끊어져 있는 상태입니까? 그것은 교회 성당이나 모든 종교단체가 이 세대를 대변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이성이 없어요. 교회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교회 안의 사고방식이나 특이성이 없어요. 특별한 점이 없어요.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 끝나면 좋은 세상 오겠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 끝나면 좋은 세상 오겠지. 그 좋은 세상에 내가 들어가겠지.’ 똑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네가 좋은 세상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알고 있는 그 세상은 이 세대의 멸망과 함께 섞여서 같이 사라져야 돼요.
네가 모르는 네가 있어요. “네가 모르는 너, 네가 모르는 ‘너’가 새 세대와 함께 찾아올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에 대해서 언제 세상이 끝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몰라야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35, 36절에 보면 35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묵시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아요.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들도 몰라요. 아들 예수님도 몰라요. 왜? 이 말씀 하실 때 예수님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아들도 모른다’는 이 말은 예수님도 이 땅에서 안 죽고 그냥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이 세대 속에서 예수님마저 장렬하게 돌아가셔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걸 아주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이 세대의 대표자로서 이 세대가 멸망할 때 오는 세대와 관계가 끊어져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파괴될 이스라엘입니다. 그 파괴될 이스라엘에 주님도 함께 참여해서 파괴되는데 단 주님과의 차이점은 뭐냐? 주님에게는 그 파괴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파괴된다는 사실입니다. 희생 제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여요. 죽여 놓고 나흘 만에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나사로에게 미리 이야기한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나사로에게 이야기했다면,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들에게는 예수님께 이미 이루어진 일,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된 그 일을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제발 죽어 줘. 제발! 제발 죽어줘. 내가 살려줄게.” 우리는 이 생각하지요. ‘참 좋은 제안을 하셨는데 그걸 무슨 수로 믿습니까?’ 주께 이야기를 하면 답변은 “너는 빠져. 내가 할게. 내가, 말씀이 할 게. 말씀이 말씀대로 할 게. 너는 거기서 실눈이나 뜨고 ‘오는 가?’ 그거 하지 마!”
“그 때와 그 시는 네가 모른다.”는 말은 네가 완전히 배제된다는 뜻이에요. “언제쯤 오십니까?” 1992년 10월 28일에 옵니까? 흰옷 준비할까요? 흰옷 준비하고 떡 준비해서 이 장림처럼 준비할까요? 그 때 한복 많이 팔렸어요. 카운트다운 들어가고요. 우주선 쏴 올리는 게 아닙니다. “TEN!, NINE!, EIGHT!, …… ZERO!” 했는데 똑같아요. 날짜 계산 다 했는데요.
이 세대에 속한 어떤 인간도 새 세대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끊어져 있습니다. 끊어진 증거가 뭐냐? 증거가 바로 ‘인자의 오심’입니다. 인자의 오심. 인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경유해야 만 새 세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이 세대사람들과 함께 돌아가셨다는 말은 그 경유해야 될 통과문도 이 세대와 함께 무너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그 때와 그 시에 대해서 알 길이 없지요. 주께서 이 세대에서 죽으시고 저 세대에서 다시 부활하시고 나타나셔서 일단 건너가고 난 뒤에 건너왔다는 신호, 시그널, 성령이라는 시그널을 보내주게 되면 그 시그널, 그 신호에 의해서 우리는 그 때와 그 시를 몰라도 된다는 사실, 몰라도 이미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겁니다.
요새 경찰들이 반항하는 범인들에게 총을 쏘는 게 아니고 ‘테이저 건’이라는 총이 있지요. 그 총은 특징이 뭐냐? 총에서 나온 줄이 저쪽 범인에 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총 맞고 지지지직, 감전되어서 쓰러지지요. 이처럼 성령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하늘에 있다는 말이 옳은 말이지만 하늘에 있다고 말하기 이전에 먼저 “이 땅에는 나의 존재의 기반은 철거되었다, 없어졌다. 나는 죽고 내 생명은 하늘에 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신약이기 때문에 아는데 오늘 본문 구약의 이 묵시세계에 대해서는, 구약 하박국에 대해서는 그걸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박국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립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질문하는 세 가지 질문, 더는 그러한 질문이 나올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첫째, “왜 하필이면 갈대아 사람에게 망합니까?” “나는, 새로운 세대에서는 인위적 요소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의인들이 같이 망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죄인을 치는 것은 합당한데 왜 의인까지 꼭 쳐야 됩니까?” “그것은, 이 땅 이 세대 자체 안에서는 정의가 없고, 불의라고 평가하는 불의도 없고 전체가 다 모조리 불의다.” 전부 다가 불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생각이 좀 어렵게 들리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사람들이 공기를 들이마신다 하잖아요. 숨 쉴 때 공기 들이마신다 하지요. 그런데 그건 사람 입장이고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공기입장에서는 공기가 들어와서 빠져나가는 통로를 인간의 육체가 제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뭐냐 하면, 시편 136편에 이런 말씀 나와요. 9절에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가 달을 보면서 거기서 달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달을 보거나 별을 보면서 별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아요.
별을 보면서 “별 하나 너 하나, 별둘 너 둘……” 벤치에 앉아서 이렇게 서로 연애하는 것, 달이나 별 보고 그렇게 이야기 하지 별이나 달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아요. 공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 공기에게는 인간이 자기 놀이터지요. 코로 들어갔다가 코로 다시 나오는, 인간의 코로 들어가서 폐를 통해서 심장 거쳐서 피 속에까지 들어갔다 나오면서 “구경 한번 잘했네!” 이렇게 쑥 빠져 나온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인간의 눈이 빛을 만드는 게 아니고 빛이 눈을 만들어요. 빛의 빛 됨에 의해서 우리 신체가 거기에 조정되어서 눈이 생기거든요. 지금까지 과학이라는 것, 우리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은 전부 다 내 중심으로 생각한 거예요. 이걸 바꿔야 되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따라서 이 세대에서는 결국 뭐냐? ‘나는 괜찮잖아.’ 하지만 나 하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세대 어디서 일어났는지, 민감한 초기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버터플라이 효과라(butterfly effect), 나비효과라 하는 거예요. 아주 민감한, 상하이에서 나비한마리가 펄럭이면 저 뉴욕 맨해튼에서 바람이 부는 효과로 나타난다는 그걸 나비효과라 하는데 세상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있지 않은 게 없어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 감자 값, 채소 값이 올라가는 것, 제주도 할머니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림이나 그리지 어떻게 알겠어요? 인간은 안다, 안다, 해도 다 몰라요. 이 세상 서로의 연결되고, 연결되고, 연결되고,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기고,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기는 그것을 다 몰라요. 그래서 다 모르는 주제에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돼. 나는 무조건 돈 벌어야 돼.’ 이게 얼마나 자기위주의 일방적인 생각입니까?
외국의 어떤 노래 가사가 있는데 1964년도에 나온 노래입니다.
뉴올리언스에 집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고 불러요
많은 불쌍한 아이들이 망가져 왔어요
신이시여, 나도 그중 한 아이입니다
재봉사 어머니가 내게 새 청바지를 만들어줬어요
하지만 노름꾼인 아버지는 뉴올리언스에서 망가지셨어요
지금 노름꾼인 아버지가 오직 필요한 것은 옷가방, 짐 가방 뿐이고
그의 만족한 유일한 시간은 술에 곯아떨어진 그 때 뿐이에요
어머니는 자시들에게 말하지요
너희들은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자기와 같이해서는 안 된다
죄짓고 비참하게 살지 말아라
해 뜨는 집에 가지 말아라
나는 지금 한쪽 발은 플랫폼에 두고
다른 한쪽 발은 기차에 오른채 뉴올리언스로 되돌아가고 있어요
족쇄를, 수갑을 차기위해서 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가사는 아까 나온 가사와 같아요.
뉴올리언스에 집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고 불러요
많은 불쌍한 아이들이 망가져서 그곳에 가는데
신이시여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노래입니다. “The house of rising sun” 애니멀즈(The animals) 그룹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 당시 젊을 때 산 사람들은 이 노래 다 압니다. 너무나 유명한 노래에요. 기타 치는 사람은 A-, C, D, F, A-, C, E ……, 계속 반복되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딱 들어보면 ‘아, 기타반주가 코드대로 이렇게 움직이면서 하는 그 노래!’
가사 내용이 뭐냐? 스스로 셀프 디스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그런 노래라는 말이지요. 내가 이 땅에서 망가져도 마땅하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사내용이 참 처참하고 비참하지요. 불우한 환경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어느 가정치고 불우하지 않은 가정은 없습니다.
다들 본인들은 자기를 고생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고 다들 자부하고 있어요. ‘나처럼 고생한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이러고 있어요. 전부 다 관절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잠도 못자고, ‘나처럼 이렇게 아픈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전부 이래요. 계단도 못 올라가서 헉헉거리고.
그것은 성경에서 전부 다 그 때와 그 시를 모르는 세대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에 입각해서 망해야 될 세대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말씀에 입각해서! 그래서 이 세대에서 우리가 남한테 무시당하는 것도 복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시당할 때 그 때 새로운 세대의 능력이 찾아오게 되면 이 세상일에 대해서 하나도 고민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않습니다. 화끈하게 이 세상에 그냥 돌려줘버리세요. 그냥 던져서. 이 세상을 던질 수 있다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이 세상과 같이 나를 떠나보낸다는 뜻이에요. 나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데 지금 이 세대의 처참함, 비참함, 이 세대, 이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이 세대였다면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새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새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는 뭐냐? 오늘 본문에 있어서, 하박국 본문에 있어서 새 세대를 기록을 하라고 했잖아요. 달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방향, 오는 세대까지, 다 이룰 때까지, 거기 가 닿을 때까지 기록된 말씀 자체가 달려갈 거예요. 달려갈 때 이 기록된 말씀에 대해서, 이 세대에 속한 어떤 사람들도 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 세대의 이야기 말고 오는 세대 이야기를 해버리면 사람들이 시간의 장벽 때문에 이걸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걸 우리가 감안을 해줘야 돼요. 새 세대에 속한 사람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달을 보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 바쁜데 뭐 달 볼 시간 있던가요? 달은 위에 있고 우리는 눈앞에, 코앞에 있기 때문에 위에 있는 달이 잘 안 보인다니까요! 못사는 동네 옥탑 방에나 올라가야 달이 좀 보이고 보통 아파트에서는 달이 잘 안보이고 별도 잘 안보여요. 매연가스 때문에 달이나 별도 잘 안보여요.
그런데 성경에서 시편 136편에서 ‘달을 생각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할 때 갑자기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나 위주로 하루 종일 오늘 온종일 나만 했던 그 모든 생각들이 일거에 다 무의미한 것으로 삭제되는 그러한 가벼움이 주어집니다.
“달을 보라. 너는 왜 달처럼 못사느냐?” 그 말이에요. “왜 그리 바빠? 왜 걱정이 많아? 왜 그렇게 걱정이 많아? 달을 한번 봐라!” 그 넓적한 얼굴로 달이 근심하던가요? 뭐 달이 무슨 걱정합니까? 우주선 날아올까, 그거 걱정합니까? 달이 걱정 안하지요. 그냥 인자하심을 뿜, 뿜, 뿜, 주님의 인자하심을 그냥 뿜어낼 뿐이지요. 달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라든지 무서움, 그런 게 없잖아요.
그걸 또 아주 고상한 고급용어로 ‘이판사판’이라 하는 겁니다. 이판사판은 열왕기하 7장 4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거기 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는다는 말, 이판사판이라는 말이지요.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죽게 되면 그냥 죽지 뭐, 그런 식이에요.
에스더 4장 16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느 책 제목, 경건스러운 책 제목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으면 죽지 뭐요. 죽어봤자 달되지요. 별 되잖아요. 달이 떨어지고 별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달과 별은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달이나 별이 막 가슴 치면서 ‘아, 이건 나한테 손해야. 이건 억울해.’ 이러지 않지요.
달이 떨어지고, 이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달이 떨어지고, 별 떨어지고, 해가 떨어져도 원통하고 분통하다, 그런 것은 없지요. 떨어질 때 주님의 인자하심을 뿜어내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해처럼 달처럼 살지 못하는지.
현재를 사는 자들은 왜 하나님의 기록된 묵시의 말씀을 모르느냐? 현재를 사는 인간들은 미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이 시간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과거의 기억에 쫓겨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지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새 세대의 특징은 뭐냐? 내 입장 챙기는 것이 더는 없다는 거예요. 그냥 말씀의 입장에서 말씀대로 그래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열두 살 때 노름하고, 스무 살 때 교도소 가고, 40대에 사람 죽이고, 70에 사형 당했는데도 주께서 그렇게 되는 것이 말씀대로 되기에 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뒤편에 주의 인자하심이 뿜, 뿜,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받는 순간부터 주의 인생이 아니고 소급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전부터 소급해서 전부 다 그게 주님의 인자하심의 열매가 되고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새로운 세대 특징이 뭐냐? 오랫동안 가뭄 들고 비가 와서 저수지 바닥이 쩍쩍 갈라지지요. 땅이 바짝 마르고 날카롭게 땅이 갈라진 모양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세대, 여기에 단비가 오게 되면, 한꺼번에 많은 비가 오게 되면 그 날카롭게 비죽비죽 갈라진 틈 사이가 그 단비로 수면이 올라와서 다 메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쩍쩍 갈라진 그러한 심령, 그걸 교회용어로, 기도원 용어로 ‘컬컬한 심령’이라 해요. 나는, 컬컬한 것은 막걸리 이야기할 때인지만 알았는데 교회 와서 보니까 컬컬한 심령이 있었어요. 이 컬컬한 심령, 날카로운 심령이 성령의 심령, 성령의 자비하심으로 이게 언제 그랬냐, 하는 식으로 다 덮어버려요.
문제는 이러한 새 세대에 대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도리어 복이지요. 복이고 감사하고. ‘왜 저에게 이런 하늘나라의 계획을, 내가 모르는, 주님만이 알아야 될 계획을 저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까!’ 감사할 뿐이에요.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하다가 어디서 여자 소리가 들려서 ‘어디서 여자 소리가 들려오나?’ 싶었어요. 아침 6시, 아무도 없는데 여자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딱 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지껄이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바로 묵시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복음이에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주의 말씀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는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 미리 알려줘도 이 세대 속에 사는 많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핍박하고 미워하는 그러한 현실을 당하면서 도리어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