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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강, 411강) 선택과 윤리, 만족 221108

정인순 2022. 11. 9. 09:31

410강                      음성                       동영상

41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10강-YouTube강의(선택과 윤리 로마서 11:7)20221108-이 근호 목사


제410강, ‘선택’. 선택은 선택하는 자가 있고 선택받는 자가 있죠. 그럼 선택받는 자는 선택하는 자를 향하여 선택해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인간은 구원해달라고 요청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 것이지, 인간의 본인의 결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인간들이 내세우고 싶은 게, 평소에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착함과 선함과 윤리와 도덕이죠.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나의 윤리와 도덕과 나의 선행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 그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구원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겁니다. 선택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다음에 나온 질문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착함과 선함과 거룩함과 올바르게 사는 것과 윤리 도덕적인 생활이 하나님의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나의 착함과 윤리와 도덕이 하나님의 선택을 이끌어내지 못하죠. 선택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구원과 무관한 겁니다. 구원과 무관한데 우리는 왜 바르게 살려고 그렇게 애를 쓰죠? 여기에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냐, 안 하냐에 관계없이 내가 기어이 선하디 선한 나라, 그 천국의 나라에 들어가고야 말리라 하는 그러한 본인의 본인 선택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너를 선택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자기에게 선택만 하는 게 아닙니다. 결정을 해요. 결단을 내려요. 매사가 결정과 결단의 연속이 우리의 행동이고 삶입니다.

그 결정과 결단을 할 때 무엇을 노리고 무엇을 고대하느냐 하면 나의 결정이 나의 구원에 보탬이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행동에 나섭니다. 이런 나쁜 짓하면 천국에 잘릴 수 있다, 혹은 반대로 이렇게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가산점을 줄 경우가 생기지 않겠는가 은근히 기대하게 되죠.

그러한 생각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확정되고 결정된다는 사항이 빠져버렸어요.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에 대해서 우리하고 협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아요.

이렇게 될 때에 성경이라는 것은 결국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본다는 것이 우리 구원에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고 성경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성경공부도 마찬가지고 예배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것이 주께서 선택하지 않으면 꽝이 되는 거예요.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을 듣고 성경을 보라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 이전에 내 운명과 결정을 내가 선택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택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좋게 선택하는 의도가 이미 우리 마음속에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함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 운명은 내 하기 나름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그 의식이 우리 안에 있었던 겁니다. 내가 바르게 살면 바른 길로 갈 것이고 나쁘게 살면 나쁜 길로 빠진다는 그 생각이 우리 안에 꽉 들어차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생각을 피합니다. 의도적으로 외면해버려요.

그게 로마서 11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하는 일을 은혜라 하고 인간이 하는 일을 행함이라 했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일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만나고 싶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기피해버립니다.

그 이유가 6절과 7절에 나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결정한 그 은혜가 온전한 은혜로서 흠집나지 않는 여기에 하나님께서 온 신경을 쓰고 있어요. 누구야? 내 은혜에 흠집 내는 자가? 누구야? 내 은혜에 끼어드는 자가? 이것에 신경 쓰는 거예요.

그 뒤에 이제 오늘의 주제와 관련된 말이 나오죠.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고 되어있어요. 여기에 선택해놓고는 그다음에 ‘얻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선택은 선택하는 자가 일방적으로 선택받을 자를 지정하고 거기다가 은혜를 담아버립니다.

은혜를 담아버리면 그 선택받은 자의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물론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은혜로 하게 하시지만 해야 될 일이 뭐냐? 자기에게서 자기의 결정과 결단과 자기의 자기 선택, 행함 이런 것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추방되어야 됩니다. 쫓겨나야 돼요. 이게 선택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이성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는 많은 질문 가운데 하나가 “목사님 저 선택받았어요? 목사님 보시기에 저 선택받은 자입니까, 아니면 지옥 가도록 버림받은 자입니까? 목사님이 결정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뭐 이렇게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할 일은 부채도사가 하는 것처럼 “보자. 보자 보자. 인상을 보니 구원받았네.” 이럴 수는 없고요.

성경대로 해요. “매일 당신의 삶 속에서 무엇이 빠져나가십니까?”를 되물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의 일상 가운데 무엇이 빠져나갑니까. 나의 선택과 나의 판단과 나의 결정과. 나의 선택과 판단과 결정은 항상 자기 자신을 좋게 보는 경향을 갖고 있어요. 이게 윤리 도덕이에요.

‘나는 오늘도 이렇게 착한 일을 하다니. 내가 대견스러워. 어떻게 이런 훌륭한 일을 하지. 아, 미치겠어. 내가 왜 갑자기 이렇게 훌륭하게 됐지’, 이런 거. ‘내가 왜 바르게 살지.’ 일단은 그걸 느끼세요. 그리고 그것을 자기에게서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느끼고 이단은 쫓아내는데, 일단 느끼라고 한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다룰 때 일단 우리의 본성을 먼저 드러내요. 성경 말씀 공부를 백날해도 우리는, 내 인생은 내가 정하고 싶어요. 그래서 평소에 사람들이 잔소리 듣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잔소리를. 십년 동안 좋은 관계있더라도 그다음 날 잔소리하면 그날은 망치는 겁니다. 분노의 대상이 되죠.

하나님께서 은혜가 제대로 활동하고 은혜가 내 안에 진짜 주의 은혜가 은혜답게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선택만을 고집하시고 그걸 남기겠다면 그 선택에게 하나님의 은혜에게 우리 자리를 양보하세요. 오이? 피부에 양보하세요. 오이 배고프다고 막 먹고 그러지 말고 오이를 피부에 양보해서 피부를 좋아지게 하듯이 우리의 인생을 주님의 일방적 선택에 양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약속을 이루신 분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주님만 약속을 이루어서 그 약속을 근거로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11강-YouTube강의(만족 시편 131:2)20221108-이 근호 목사


제411강, ‘만족’. 만족에 세상 사람들도 만족하고 성도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둘다 나와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만족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모든 것이 자기의 권력 속에 권한 속에 놓여 있을 때 만족합니다. 이것은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면서 제안했던 제안 내용이고 너도 신처럼 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는 순간 인간은 마치 자기가 신인 양 행세하고 신으로서의 어떤 만족감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했던 그 점이 불신자를 통해서 당연히 인간세계에 드러나야 되죠. 이 불신자들, 성경 구약으로 하면 이방민족들, 신앙 없는 자들의 만족이 어떠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쪽의 태도를 보면 파악이 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이스라엘을 누가 공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원수, 적들이 갖고 있는 성질, 본성을 보여주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왜 있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적이 누구인가를 이스라엘을 사용해서 보여주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가 내 행복과 내 기쁨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요. 주께서 쓰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적이 누구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사적인 행복이나 사적인 만족 같은 것 가지고 너무 그런 쪽으로 고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다 헛수고에요. 주께서 주의 원수, 주의 적, 마귀에 속한 사람을 들추어내는 하나의 테스트기로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불신자 같은 경우에 그들의 만족은 에스더 5장 1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기 하만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휘두르면서 굉장히 기세등등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만이라는 사람이 누구의 최측근 신하냐 하면 아하수에로 왕, 그러니까 바사 나라의 왕이죠, 아하수에로 왕의 모든 권세를 가장 많이 가진 신하가 하만이에요.

그 왕이 어느 날 밤에 하만을 특별히 불러가지고, “내가 칭찬하고 싶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해주면 내 기분이 흡족하겠는가?” 그렇게 하만에게 물으니까 하만이 마치 왕께 총애 받는 자기에게 왕이 특별한 혜택을 주는 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 정말 위하고 싶은 사람에게 왕의 옷을 입혀서 사람들에게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널리 광고하시면 됩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그걸로써 왕이 하사하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그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만이 왕에게 건의했죠. 왜냐하면 그게 자기한테 해당될 줄 알고.

그런데 하만이 이제 기분 들떠가지고 오는데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만족하지 아니했다. 전체 다를 쥐어야 되는데 하나가 빠져있을 때는 그 빠진 것 때문에 온전한 만족이 되지 못해서 마음이 불쾌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완전한 만족,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도 항상 일이 터지게 되어 있어요. 100% 만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분명히 계획대로 되면 100% 만족해야 되는데 예상 못할 일이 터져가지고 마음 한 구석이 어둡게 될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그럼 신자는? 방금 한 건 불신자에요. 불신자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자기 휘하에 두어야 돼요. 그래야 만족스러운데 하나가 자기 뜻대로 안되게 되면 기분 나빠요. 그런데 사실은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게 당연하죠. 안되는 게 당연한데 뭔가 내 뜻대로 안되면 안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기분은 별로 안 좋아요.

“하나님 저한테 왜 이래요?” 이런 식으로. 그럼 하나님은 “뭐?”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네가 뭔데? 네가 뭐야? 줬던 거 도로 다 뺏아가? 줬던 거 한번 뺐아가봐?” 항상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만스러운 투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에 만족하는 상태가 나와 있어요. 시편 131편 보겠습니다. 시편 131편, 이거는 정말 액자 걸어놔도 괜찮아요. 길지도 않아요. 짧아요. 이게 길면 그중에 131편 2절만 해도 괜찮습니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갖게 하였나니”

성도가 어디에 만족하느냐? 엄마하고 같이 있을 때 만족해요. 보호자의 보호를 느낄 때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되어있죠. 이걸 요즘 말로 하면, 여호와는 나의 보호자시요.

그러니까 보호자가 보호하는 그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을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는 보호받을 때 하나님도 만족하고 우리도 만족하는 거예요. 이거는 혼자 살지 말라는 뜻이에요. 젖 뗀 아이가 혼자 삽니까? 젖 뗀 아이가 젖 먹고 난 뒤에 동사무소 가가지고 투표하고 민원 넣고 이래요? 안하죠. 젖 뗀 아이의 자기 분수가 뭐냐 하면 엄마로 하여금 엄마 되게 하는 데에 있어요.

엄마는 젖 주는 기쁨이고 젖 뗀 아이는 젖 먹는 기쁨이에요. 이게 목자와 양의 사이입니다. 양이 자기 젖 가지고 목자 먹이려고 그렇게 애쓰지 마세요. 그것은 오지랖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이거 드릴까요 저거 드릴까요, 하지 마세요.

받은 거나 감사해라, 받은 거나! 내가 준 거나 감사하면 돼요, 준 것. 햇빛, 공기, 목숨, 생명, 심장 뛰기. 주께서 주신 것. 물론 가끔가다 간질이나 암, 위암 말기 이런 것도 받지만......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죠.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면 안돼요. 우리의 신분은 젖 뗀 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분은 우리의 보호자입니다. 우리는 보호받음으로써 보호자의 위신과 명예와 영광을 드높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가 만족하면 그게 우리의 만족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만족은 일차적인 나의 만족이 아니라 이차적인 만족이에요. 하나님 만족하신 것을 같이 그 안에서 공유하는 것, 그런 상태를 예수 안이라 합니다. 십자가 안. 하나님은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럼 십자가로 만족하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매치가 되고 하나가 되고 같은 생각으로 같은 공간에 놓여 살게 되는 겁니다.

특히 131편 1절에 보면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독자적으로 나대지 마시고 주께서 그때그때 하는 일에...... 주께서 시킨 일은, 네가 이거하면 너 잘했다 해줄게, 그게 아니에요.

그 일을 통해서 나는 젖 뗀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늘 각인시키고 확인시키는 그 일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