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1:1-4 / 말씀의 영광 / 2022 대구 우리 교회 수요설교
말씀의 영광
이근호
2022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하박국 1:1-4
(1:1)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1: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선지자 하박국이 울분을 품고 하나님에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해이한 상태에서 온갖 악들이 넘쳐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선지자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세상 관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의 안목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케하는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지자는 남들이 다 하고 있는 자기 것 챙기기를 모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자기 자랑할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그리고 두루두루 균형잡힌 삶으로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끼어들기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선지자에게는 오직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영광만 바라보고 삽니다. 율법이 품은 그 거룩한 영광에 매료되어 삽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우습게 여기는 그 시대상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안목으로 선지자는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목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1:10-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 그 시대에 던져진 장차 오실 메시야의 안목을 지닌 자들입니다. 마치 군용 트럭 뒤에 여럿 병사들을 태우고서는 지휘관이 친히 트럭을 몰고서는 길목다 병사들을 하나 둘씩 차례로 떨어뜨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병사들의 역할을 한 줄로 이어보면 그 끝에는 지휘관 자신의 할 몫이 있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는 거룩한 영광이 함께 드리워져 있는데 그 영광성이 최후에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지는 최종 메시야께서 보여줄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율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율법이 집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최초의 일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당도했을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 4:11-13)
거룩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엄위하신 안에서 친히 하나님께서 쓰신 돌판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율법에는 늘 하나님의 엄위하신 영광성이 함께 깔려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그 돌판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언약궤를 제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매개로 자기 백성을 만나고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영광은 언약궤 상자 안에 그 근거성을 들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음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6:10-11)
그런데 이 영광을 언약궤가 나중에 인격적으로 변모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왜 하박국 선지자 시절에 유다는 선지자가 보고 있는 율법의 영광성을 삭제하는 식으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방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신은 대자연을 경배하는 신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대자연은 섬기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게 자연이 작용하기를 빌기 위해 섬기는 신입니다. 인간들은 대자연을 통해서 어떤 질서같은 것을 찾아서 그것으로 자신의 생존에 유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은 그저 대자연의 일부로만 간주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생존이었으니까요. 이러니 율법 자체에 뿜어져 나오는 거룩과 영광성을 대신하여 대자연의 질서와 영광으로 대체한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 하박국이 볼 때에, 그 당시 유다는 온통 율법의 본래의 영광성을 가리는 것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고 하나님에게 율법에 합당한 징벌이 속이 주어지기를 호소하는 겁니다.
하지만 언약궤에서 뿜어지는 율법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친히 불태워버리십니다. 그리고 언야궤는 인격화됩니다. 말씀 완성에서 나오는 영광은 예수님께서 친히 완수하신 거룩한 죽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위험한 방사능 물질을 납 상자 안에 담기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 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9:28-31에 보면, 예수님의 인격과 하시는 일로 인한 말씀의 영광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이렇게 되면 죽음이 두 가지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목숨 끊어졌다고 해서 죽었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아직 덜 죽은 겁니다. 즉 죽지 않고 사는 것이 행운이 아닙니다. 행운 여부는 마지막 죽음을 만나는 그 시점으로 미뤄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더는 세상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직 말씀의 영광에 매료되어 삽니다. 그리고 더불어 세상이 온통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있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이요 소금인 성도의 위상입니다.(마 5:13-16) 구원받은 강도나 세리나 창기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죄사함에 감격하여 주님 앞에서 웁니다.(눅 7:36-38)
바로 이런 모습이 보이는 자가 진정 말씀 완성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나보이는 빛이요 소금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의 마음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강-하박국 1장 1-4절(영광의 말씀)2210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1-4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1-4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이 선지자가 누구한테 하소연하느냐? 하나님을 향하여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의 그 태도는 선지자가 갖고 있던 세상을 보는 안목에서 비롯된 겁니다. 여러 가지 선지자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는 그러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 가지고 따지고 흥분하고 화내는 일반인의 삶, 그 일반인의 삶 레벨과 전혀 차원이 다르지요.
선지자는 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랑거리를 남에게 내놓을 그러한 타인을 찾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뭐 하나 건지면 다 내 것으로 돌려놓으려는 이러한 의도로 세상을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상식 있고 두루두루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에요. 선지자는 오직 뭐만 쳐다보느냐? 하나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을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쳤다고 합니다. 또는 광신도, 미쳤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만이, 선지자가 갖고 있는 이런 안목만이 하나님을 증거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안목을 가졌다고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1절에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선지자가 그 당시 사회와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경고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는 먹힐 리가 없어요.
경고라 한다는 것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봤을 때 경고지 여기 3, 4절에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 세상을 볼 때 이런 안목으로 본다는 그것은 내 것 챙기려는 일반인들의 의식 수준과 전혀 다른 수준이에요. 내가 남들처럼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봐야지, 지금 이런 데 선지자는 정신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벌이시고 하나님의 뜻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 뜻대로 세상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 하나님의 안목을 타서 그런 쪽으로 세상을 봐야 이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선지자에게 오직 있는 것은 자기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율법만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만 있고, 하나님이 묵시와 하나님의 계시만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선지자의 눈에 보기에 그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 그 당시는 이스라엘은 망했으니까 유다, 유다 나라가 뭐냐? 온통 천지가 하나님의 계시를, 요새 말로 하면 복음이지요,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를 방해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여러분하고 같은 생각입니까?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들만 계속해서 이렇게 번지고, 퍼져나가고, 유행되고, 그게 출렁이고, 넘치고 있는가?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신 데 세상은 왜 자기 것만 챙기면 그것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저렇게 고집들을 부리는가?’
하나님의 말씀,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는, 이 세상 분위기, 그런 경향성으로 인해 선지자로 하여금 하소연하게 만들었고요, 점점 외톨이로 만들었고,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게 만들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만 쳐다보고 사는, 레벨이 높은, 수준 있는 안목의 이 선지자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자기 안에 자기 것에 대한 관심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신약 베드로전서 1장 10, 11절에 선지자가 무슨 일을 했던가? 구약의 선지자가 어떤 일을 했던가, 가 요약되어서 나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예수님 오시기 전에 많은 선지자가 뿌려져 있었는데 그 시대마다 뿌려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의 군용트럭이라면 군용트럭은 뒤에 사람을 실을 수가 있지요. 그 군용트럭이라면 그 트럭 중에서 김 일병, 이 일병, 박 일병, 최 일병, 너무 일병들만 있네요, 그러면 김 상병, 최 병장, 타고 있는데 죽 가면서 “어이! 내려.” 하나씩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 시대마다 아브라함 내려, 이삭 내려, 모세 내려, 그다음에 하박국 내려, 지난번에 나훔 내렸지요, 그 내렸던 그 병사들, 하나님의 병사들의 소속이 한 줄로 이어질 수가 있는데요. 먼저 내렸던 병사가 그 시대의 아픔을 겪었다면 그 뒤의 병사는, 선지자라는 이름의 병사는 그 아픔보다 더 아픈 경험을 하게 되고 점점 더 이 세상이 파멸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계속 던집니다.
그리고 그 운전대는 누가 쥐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그 운전대를 쥐고 자신의 마음을, 미리 그 최 일병과 박 상병한테 계속 자기 마음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하박국 선지자의 세상을 보는 그 안목의 레벨이라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갖고 있던 마음,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령에 의해서 그들은 그 시대를 하나님 수준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항상 그 특징은, 이 시대가 오늘부로 끝장나도 이 시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할 말 없음, 그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직까지는 메시아는 아니니까 미련이 있는 거예요. 유대 나라, 이스라엘 나라에 미련이 있고 아직도 그 백성들을 안타까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렇게 호소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이 하나님의 백성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개무시하는 것을 언제까지 지켜보시렵니까? 때려서라도 깨쳐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 선지자니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까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만 그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과 견주어 볼 때 엉망이라는 그 정도는 선지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 같으면 그 정도가 되었든 어쨌든 관계없이 우리는 밥 먹고 사는 게 우리 역할이지 거 뭐 남이 어떻게 사는 거 그거 신경 쓸 필요 없지 않느냐? 신경 쓸 필요 없지요. 선지자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선지자도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은데 선지자 안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성령이 그분들 안에 들어있거든요.
그러니 이것은 선지자가 자기 일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자기 일이 아니고 군용트럭에서 툭 던져진, 그 군용트럭이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일을 그 시대에 하나의 메시아로서 미리 외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선지자가 그런 하소연을 하면서 무엇이 선지자 보기에 ‘이것은 옳지 않아. 이것은 엉터리야.’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내용이 뭐냐?
여기 4절에 보면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곧 “하나님이여, 제가 이스라엘 유다 나라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율법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선지자의 그 근거, 선지자가 율법을 언급하고 공의를 언급했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무엇이 나와줘야 하나님의 율법이 율법답게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간주하느냐?
그것은 바로 율법이라고 했으니까 율법이 처음 주어졌던 곳, 그것도 문자로 주어졌던 그때 그곳이 어디냐? 시내산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처음 출발은 시내산부터에요. 물론 인원수는, 그 숫자는 유월절에 뽑아냈지만 그들 이스라엘이 뭘 해야 되며, 어떤 나라며, 이스라엘의 그 정체성, 자신의 본질, 이스라엘의 이념, 이런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집단적으로 대면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11, 12절에 보면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다음에 13절 말씀,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너무나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실존에 나타났는데 보지를 못했어요. 왜 못 봤는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못 본 거예요. 거룩한 영광이 하나님의 율법과 더불어 주어진 거예요. 그 돌판과 더불어서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감히 인간이라는 이러한 유한자,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그 영광을 직접 대면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무서웠어요. 너무나 겁났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지자가 율법을 이해하는 그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그냥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위에 시내산에 감히 쳐다보지 못한 그 영광스러움에 둘러싸였던 그 율법이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성경이 이게 시커멓지요. 이 시커먼 게 무슨 영광입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주변에, 너무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으로서는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으로 가득 찬 말씀, 그런 말씀으로 하박국 선지자 시대에 하박국이 보는 율법의 그 영광성을 같이 볼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시대 자체가!
하박국은 그 율법만 생각해도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세상을 다 줘도 안 바꿀 그 영광인데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 그거 뭐야, 그거!’ 그렇게 해이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됩니다. 왜 인간들은 특히 이스라엘 하나님을 만났던 그 이스라엘은 그 율법 받을 때의 그 거룩한 영광스러움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영광 다 떨어내 버리고 율법을 그냥 문자 정도로 봐서 잔소리 정도로만 취급하게 된, 도대체 그렇게 달라진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그러면 이방 나라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신을 섬길 때는 이런 영광성 같은 것 없어요. 신과 거래하고, 신과 막 먹고,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자기들이 선택한 신이니까요. 본인이 필요하다고 원해서 신을 선택했기 때문에 신이 자기 뜻대로 안 해주면 갈아치우기를 여사로 하지요.
이러한 영광성이 빠져버린, 거룩함이 빠져버린 그 이방인들은 왜 신을 대할 때 쉽게 대하고 함부로 대하고 이스라엘처럼 시내산에서 직접 영광중에 만났던 그 율법 같은 그러한 거룩성이 왜 빠져 있는가?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기원전 5천 년 경에요, 나일강이 있는 이집트, 세계에서 이집트 문명이 제일 오래됐다고 할 수 있어요. 수메르문명이 제일 오래됐다 할 수 있는데 이집트 문명도 오래 됐어요. 거기 나일강이 지중해로 빠지는 그 동네는 비가 거의 안 와요. 1년에 한 25밀리밖에 안 와요. 사막 지역입니다.
그런데 나일강 상류 쪽 이집트는 물이 아주 풍부해요. 에티오피아나 저 수단에서 내려오는 강줄기가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거든요. 대략 6천 7백 킬로미터, 아주 긴 강이에요. 6월이 되면 이집트 날씨가 감수기(減水期), 비가 감하는 기간, 증수기(增水期), 비가 증가하는 그때로 1년을 두 때로 나누는데 6월이 되면 비가 슬슬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 4개월 뒤 10월이 되면 나일강 수위가 평소보다 올라가서 11-12미터까지 좍 올라옵니다. 그래서 증수기가 시작되는 그 첫 달에 시리우스라는 샛별이 태양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때부터 세계 최초로 1년을 365일로 하는 태양력을 만든 나라가 이집트에요.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에 신이 있어서 신에게 잘 빌기는 빌지만 신의 영광에 매료되고 흠뻑 젖는 게 아니라, 신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고 자연에 신을 부여하고 신에게 제물 드리고 제사 드리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우리가 수로나 관개(灌漑),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의 질서를 뽑아내서 그것을 활용하게 되면 자기 생존과 생계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자연법칙을 뽑아내는데 주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달력이거든요. 세계 최초의 태양력 달력이에요. 1년을 365일로 정해놓고.
그러니 이 말은 한마디로 뭐냐? 인간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기를 위한 자연이에요. 여기에 단어 하나 붙인다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자연에 대해서 질서체계를, 인간들은 지혜를 모아서 그걸 뽑아내는 겁니다. 그러면 신의 법은, 신의 경전은 뭐냐? 신의 법보다 더, 더 하나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게 뭐냐? 대자연이에요. 율법을 대자연의 일부로 본 겁니다. 율법을.
그 불신자들, 이방우상 섬기는 자들에게 신의 경전이 중요하냐, 태풍 오는 게 더 중요하냐? 태풍 오는 게 더 심각하지요. 이건 뭐 쉽게 예를 듭니다. 지금 잠시 하박국 선지자 입장을 생각합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자기 백성이라고 직접 주신 그 영광스러운, 감히 낯을 들고 볼 수 없는 그 영광스러움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놀랍게 마치 주님의 손이 나와서 뭐 하나 건네주는 그 돌판, 돌판 하나 건네주는 그게 율법이거든요.
하나님이 직접 쓰신 그 율법을 받았을 때 그 감격함을 가지고 여러분이 하박국 선지자라 생각하고 그 율법을 누구한테 어떤 집회에서 가르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율법을 가르치고 복음을 가르칠 때 한 참 가르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문 확 열고 들어와서 “여기 우리 집 담벼락에 개 오줌 누인 사람 누구요?” 또 한참 가르치는데 “아저씨! 아래층 편의점에 물이 떨어지는데 좀 고쳐주세요.” 또 한 참 가르치고 있는데 총무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성경공부 하는 데 죄송합니다만 이번 달 관리비 내셨어요?”
자, 한번 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하박국 선지자인데, 율법에 해이해서 그것이 가슴 아파서 하소연하고 있는데 일반인들, 율법을 아주 개무시하는 일반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관리비 냈어요? 2층에서 뭔가 수리 좀 해주세요. 1층 편의점에 물 떨어집니다. 또는 누구야, 개 오줌 누인 사람?’ 어떤 사람이 또 와서 ‘우리 담벼락에 당신 애가 낙서해놨는데 낙서 좀 지워달라.’ 그런 이야기 나오지요.
우리 같으면요,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30분만 더하면 끝납니다.” 이러지요.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그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거예요. 이제 이 정황을 알겠습니까? 이 마음가짐을 알겠습니까? 이 하박국의 세상 보는 그 레벨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넘어가요. 그러나 하박국은 미쳤어요, 미쳤어! 이것은 율법에 미쳤어요. 하나님의 계시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하박국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은 율법이 지니고 있는 그 영광성, 그 영광성을, 사람들은 그걸 삭제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신명기 4장 다시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4장 12절, 13절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돌판을 넘겨주는데 그때 화염 중에서, 불이 붙는 화염 중에서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때 그들은 정신이 없지요. 혼미하지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그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돌판이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돌판, 그게 너무 무섭기 때문에 그걸 상자에 담아야 되는데 그 상자에 담기 위해서 모세가 두 번째 세 번째 산에 계속 올라가서 계시를 받아서 만든 그 상자가 뭐냐? 언약궤라 하는 겁니다.
자, 언약궤가 어느 정도냐 하면, 열왕기상 8장 6절에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솔로몬이 성전 만들 때 이야기에요. 성전 만들 때 그때 성전에 언약궤가 있었어요. 언약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의 효과가 뭐냐? 열왕기상 8장 10, 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보세요. 그때까지라도 언약궤의 영광이 있었다, 없었다? 있었던 겁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언약궤 운반할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그 상자가 뭔데? 그 상자 안에 율법이 들어있는데, 그 율법이 들어있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만들었는데 그 언약궤를 열고 사람들이 이게 뭔가, 하고 본 거예요. 그들은 율법이 누가 줬으며, 줄 때 그 거룩한 영광이 얼마나 엄숙하게 주어졌다는 그 사실을 완전히 빼버리고, 그걸 삭제하고 그냥 일반적인 돌판, 일반적인 글씨, 어떤 사물체, 그걸로 본 겁니다.
블레셋하고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언약궤 빼앗겼잖아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 빼앗았다고 좋~다고 자기 신전에 가져다 놓으니까 그 다곤 신전에 다곤신이 팍 엎어져서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다 깨져 있었어요. 누가 했겠어요? CCTV 달아서 한번 보세요. 누가 깨뜨렸어요. 새벽 2시 46분에 다 깨졌어요. 누가 했는가? 언약궤가 그렇게 자기 영광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언약궤 자체가!
이건 인간이 집어넣은 게 아니고, 인간이 강조한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언약궤 자체가 지닌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를 따라 함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이야기합니다. “그 율법에 해이할 때 하나님의 영광성이 계속 유지된다면 이 백성들, 유다 백성들을 가만 놔두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호소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하박국이 순박합니까? 순진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거예요.
“이 등신아, 아직도 그걸 믿나? 문자야, 문자.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왜 영광스러워?” 이미 시대가, 너무나 자연이 신을 대신했기 때문에 율법도 자연 중의 일부라고 본 겁니다. 율법이든 뭐든 나한테 내 삶에 활용된다면 이용할 가치가 있다, 뭐 그 정도, 그 정도밖에 보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이 원자력 다룰 때, 울진의 원자력 발전소도 있지만요, 방사능 물질을 담을 때 그게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어디에다 하느냐? 납상자에 그 방사능 물질을 담아놔요. 그것도 모자라서 콘크리트로 방사능 물질이 퍼지지 못하게 다 차단하잖아요.
그러니까 돌판이라는 게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디에 담았느냐? 언약궤 안에다 그 영광을 담아줘야 그 율법이 인간과 만날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인간은 율법에 접근 못 합니다. 영광이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인간이 그 영광을 다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언약궤에 담아서 제사장을 통해서, 일반인들은 접근 못 하고 제사장을 통해서 이동시킨다는 것은 그 시내산에서 주어졌던 영광이 지금도 소실되지 않았다는 뜻이거든요. 그게요.
그러니까 하박국이 이런 율법의 영광을 너무나 본인이 적실하게 알기 때문에 세상 부귀영화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 것이. 세상에서 누가 출세했다, 성공했다, 주식값이 올랐다, 대박 났다, 차 뭘 탔다, 이런 것이 들어오지도 않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가 없잖아요.
마태복음 26장 64절,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4, 6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죽여라, 그렇게 된 거예요. 저런 모욕적인, 모독적인 말을 하니 저것은 사형에 해당 된다. 66절에 보면,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영광중에 구름 타고 온다고 하는 이것이 예수님이 잘못되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지금 진실 그대로를 이야기하잖아요. 이 진실 그대로가 오늘날 교회에 먹히느냐 그 말입니다. 이 진실 그대로가! 교인들이 교회 와서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주님의 영광스러움의 그 감, 영광스러운 감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런 식으로 기도합니까?
교회 부흥되게 해달라, 우리 교회 크게 해달라, 그런 것이나 기도하지요. 그것은 다 세상 영광이에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광이에요. 그 영광은 뭐냐 하면, ‘내 것 이 정도니까 나 무시하지 말라.’ 자기 것 챙기는 영광.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선지자 특징은 뭐냐? 자기 것 챙기는 그런데 신경 안 쓴다고요. 뭐든지 내 것 돌려놓는 데 관심 없어요. 자기 자랑 늘어놓는 그런데 신경 안 씁니다. 왜? 딴 데 신경 쓰기 때문에. 말씀의 영광에 관심이 푹 빠져 있기때문에 그런 것은 아주 우습지요.
그런데 여기 방금 제가 열왕기상에 나오는 언약궤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예수님 인자가 구름 타고 오는 영광을 왜 이야기했는가? 그것은 언약궤가 인물로 바뀌어요. 인격자로. 이게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이 지시해서 만든 언약궤가 하나님에 의해서 박살 납니다. 불태워져요. 성전에 있는 언약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공격당해서 성전 자체가 불태워지고 언약궤도 다 불태워져요. 없어요.
그러면 언약궤의 그 영광성, 율법을 가진 그 영광성은 어떻게 변하는가? 그게 선지자의 하소연 속에서 인격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박 상병이에요. 점점 더 예수님 오시는 때까지 예수님에 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 시간적으로 근접한 상태에서 박 상병으로서 그 시대에 유다 나라 곧 망하는 바벨론에게, 곧 망하는 그 시대에 툭 떨궈놓은 그 시대의 메시아로 보면 되지요.
율법에 있는 가치가 무엇으로 표현되느냐 하면 선지자의 아픔으로 그 시대에 표현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갖고 있는 그 영광성이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표현되는 거예요. 죽음으로써. 그게 십자가에요. 이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털어놓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담겼는가? 방사능 물질은 납상자 안에 담겨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이 시대에, 마지막 시대에 어디에 담겨 있는가? 거룩한 주님의, 예수님의 죽음 안에, 십자가 안에 그 말씀의 영광이 담겨 있지요. 그때부터 율법, 문자, 모든 계시의 문자시대는 끝나고 그게 영의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렇게 하시면서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돌에 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맘속에 성령이 있어서 성령이 너희들 맘속에 하나님의 계시, 율법의 완성이 너희 맘 안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듬뿍 안고 거기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그런데 너희들은 해석할 때 그것을 문자로 해석하는데 절대로 문자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3장 7절에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다시 말해서 “그때 너희들은 모세가 돌판 받을 때 육신 가지고 고개 들고 쳐다보면 다 죽었어. 왜? 모세의 영광 자체를 육신이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없어질 문자도 영광이라면 너희 속에 주신 성령의 직분 영광은 얼마나 크겠느냐?”라고 고린도후서 3장 8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언약궤가 인물, 인격화되는 양상이 신약의 성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그 영광성이 실현되는 거예요.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이 된 거지요. 죽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이걸 좀 어렵더라도 설명을 해드릴 필요가 있는데요.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에다 말씀의 완성이 주는 그 무서운 영광성이 예수님 죽음으로 이렇게 표현됨으로써 죽음이 이제는 두 종류가 되었어요. 하나는 육신이 죽는 죽음, 그러니까 인간이 목숨 끊어졌다고 그걸 죽었다고 여기는 것은 아직 덜 죽은 거예요.
아직 죽음이 하나 더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구사일생 살았다고 그걸 행운이라 생각하는데 그 행운 여부는 그다음에 찾아오는 죽음으로 그때까지 평가는 미뤄야 돼요. ‘아, 우리 아버지 코로나 걸려서 죽을 뻔 했는데 살았어.’ 또는 ‘우리 할아버지는 참 행운이 많아.’ 글쎄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거고요, 진짜 본격적인 죽음은 그 뒤에 와요. 목숨 끊어지고 그 뒤에 심판으로 온다고요.
그러면 어느 기준에서 날 봐야 됩니까? 내가 목숨 살까 말까, 내가 한 달에 얼마 있어야 밥 먹고 사느냐, 지금 여기 기준을 레벨로 보면 안 되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때에 나는 거룩한 죽음 안에 주님의 말씀의 완성, 언약궤죠, 언약궤가 인물화 해서 변한 것이 오늘날 성도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그 영광, 하늘나라 영광, 그 영광된 그런 모습으로 심판을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밥 먹고 살다가, 찌질이같이 살다가 그냥, 두 번째 죽음이 있다는 것은 생판 들어본 적도 없고 들어도 짜증 내면서 ‘대자연이 중요하지, 코로나가 중요하지, 그 말씀이, 십자가가 뭐 중요해? 코로나에서 살아남으면 그게 승리지.’ 이런 식으로 살다가 두 번째 아다리, 일본말이 또 나옵니다, 두 번째 그 죽음에 걸려버리면 이것은 그 심판에서 끝장인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8절에 보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항상 이렇게 말씀이 완성되는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게 보이는 겁니다.
그 안목은, 성령을 통해서만 그 안목은 장착이 가능해요. 그래서 성도는 움직이는 언약궤입니다. 우리 안에 너무나, 세상 천하보다 귀한 영광이 들어 있어요. 이것을 사실은 제자들이 이미 경험했었어요. 누가복음 9장 28-3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이렇게 해요.
영광중에 나타났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냥 목수의 아들로, 일반인으로, 그런 모습으로 있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영광스러움인지 아직도 진가민가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미 선지자들, 예수님의 영이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할 때 그 세 사람 다 그 격에 맞는, 말씀 완성이 주는 격에 맞는 영광스러움이 함께 있었어요. 그게 해같이 빛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두 분이 대화하는 내용이 누가복음 9장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야기하는데 그 대화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라고 되어 있어요. 말씀, 모든 성경 말씀, 율법 말씀의 완성이 어디에 담기는가? 예수님의 별세, 십자가 죽음에 담길 때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세가 받았던 하나님의 그 거룩한 모든 거룩과 모든 영광을,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이미 십자가 안에 모세와 엘리야처럼 같이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성령은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 천하보다 귀한 보물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한 너희에게는 영생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신 취지도 맨 그 말씀이에요. 이미 우리 안에 하박국, 여러분을 하박국 선지자라고 칩시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고, 말씀 중심의 세상을 보고, 율법의 영광과 더불어서 함께 산다면 여러분이 이 땅을 바라볼 때 ‘아파트값 내리는데 자기 혼자 올라서 너무 좋겠다, (비타민) 씨!’ 그런 것 가지고 부러워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하소연해야 되지요. ‘하나님, 저 사람은 저렇게 돈에 미쳐 있습니다. 외양간에 소 많다고 미쳐 있고요. 포도나무가 무성하다고 그걸 지금 자랑질하고 있고요.’
하박국 3장에 더 나오지요. 그 유명한 하박국 3장 17, 18절, 무화과나무가 무성하다고 자랑질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다고 자랑질하고, 외양간에 소가 많다고 자랑질하는데 하박국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주식 샀는데 주식이 바닥을 쳤으며, 바닥 밑에 심연, 해저가 있으며, 거기까지 바닥 쳤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그런 것이 없다 할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거 뭐 주일학교 노래도 나와요. 이거 하박국 미친 것 아니에요? 하박국만 미치면 안 됩니다. 하박국, 선지국 이런 것……, 하여간 우리도 하박국하고 같이 미친 자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이 계시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국민의 힘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지금 세상 문제가 코로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모독하고 있다는 것, 어느 구석, 어느 직장, 어느 가정에서도, 어느 교회에서도 십자가 모독하는 것으로 넘쳐나는 이것, 이것 보고 우리 주님한테 고자질 해야 되지 않습니까?
“주여,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니나 잘하세요, 니나! 너도 마찬가지잖아. 자기 주제 파악 못하고 남을 고자질해? 너부터 똑바로 했어? 너 뭐 소 키운다고? 네 외양간 소 하나도 없이 한번 해 봐? 그래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겠어? ‘주여, 소를 다 없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겠어? ‘소가 나의 영광이 아니로소이다.’ 뭐 이런 것,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말할 수 있겠어”요?
끝으로 마태복음 5장 13-14절, 이런 마음, 이런 레벨의 안목을 가지고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산속에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직장생활 해야되고, 세상에 날개를 펴고,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날개를 펴고 세상에 나가야 돼요. 왜? 빛이기 때문에, 소금이기 때문에. 우리로 카톡 하는 그 회사에 취직해야 되고, 우리가 파리바케트 그 회사, 빵 만들다가 하나 죽었지요, 그 회사에 취직하고요. 왜 그런, SK 취직하고 LG에 하고 왜 해야 됩니까? 빛이기 때문에. 왜? 그게 영광이 아니고, 그 영광이 아닌 것을 부러워하는 나는 뭐냐? 과연 소금이냐, 과연 나는 빛이냐?
누가복음 7장에서 막달라 마리아인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죄인인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향수를 뿌리면서 울고 눈물로써 그 발을 적시면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라고 주님에 엎드릴 때 바로 주께서 용서 많이 받은 자가 최고의 사랑을 이런 식으로 보여준다고 하잖아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우리가 완벽합니까? 우리가 세상 영광 안 좋아해요? 그러나 우리가 그런 세상에 하박국처럼 파견되는 이유가, 이 가장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담는 자는 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이에요. 창녀, 강도, 세리, 오늘 밤에 네 구원이 이르리라, 그 모습, 죄인이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십자가의 사랑을, 그 깊이와 높이를 아는 사람, 이게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이고 선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리 생각해도 남 지적질 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직 십자가만 쳐다보면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왜 죄인인가를 더욱더 깊이 알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