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나훔

나훔 3:1-7 / 들켜버린 시선

정인순 2022. 9. 2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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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버린 시선 

 

이근호
2022년 9월 21일                  

 

본문 말씀: 나훔 3:1-7

(3:1)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3:2)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4)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3:5)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3: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계시를 남기기 위함입니다. 이 계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수행되고 성취될 내용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계시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은 계시 위주의 삶이 아니라 자기 위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이방민족과의 차별성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외에 민족들이 믿는 신들은 모조리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는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중차대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큰 힘이 지닌 이방제국의 강성에 현혹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나라를 모방하고 흉내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 이방나라의 말로가 어떠한 지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업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 만들기’에 이스라엘이 충실되도록 조치하십니다. 이 과정에서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는지도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시나라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십니다. 그 방식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의 사고방식이나 현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똑같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우상이란 인간들이라면 모두 ‘똑같은’ 의식으로 통합이 가능한 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미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에 똑같이 우상을 섬기는 앗수르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침범토록 합니다. 이 작업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압박을 가하는 왕과 장군은 앗수르의 산헤립 왕과 랍사게 장군입니다. 랍사게 장군이 예루살렘 성 전체 주민을 상대로 유대말로 직접 설교한 것이 열왕기하 18장에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유다나라가 믿는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 자신이 유다나라를 멸망하러 왔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길도 열어주러 왔다는 겁니다.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 18:25)

만약에 유다나라가 항복만 한다면 다음과 같은 혜택을 베풀겠다는 겁니다.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왕하 18:31-32)

만약에 유다나라가 항복을 거부한다면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왕하 18:27)

여기서 유다백성들은, 그들이 평소에 무엇을 안 믿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들이 저 이방민족의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나 해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한 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자체는 구원의 대상이 못되는 이유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민족인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것과 동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왕하 19:3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얻고자 하시고 찾으시고 성취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곧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유다나라를 처들어온 앗수르 사람들의 의식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은 큰소리 칩니다. 그 어느 민족의 신도 자신들의 행진을 가로막아 선 신은 없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앗수르 왕과 장군은 하나님의 계시인 다윗 언약을 건드려버린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지만 앗수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이미 죽은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군대, 185,000명은 하룻 밤에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길한 징조에 불과합니다.

그날 이후 앗수르 제국은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에 의해서 처절하게 황폐화됩니다. 요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전장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은 결국 칼과 창들과 병거들을 보이지만 그 와중에 모든 이들은 시체로 변모되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발에 걸치는 것들은 모두 시체입니다.(나 3:3)

앗수르 장군이 여호와라 하는 신이 어떻게 자기들에게 나올 것인가를 주시하고 관찰하지만 이는 곧 그들의 시선이 주님의 시선 앞에 먼저 들키고 있었습니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왕하 19:25)

하나님께서 줄곧 이 세상을 지켜보고 계셨고 운영해 오셨던 겁니다. 인간은 모두 송장이기에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고군분투 노력해도 자신의 의미와 인생의 해답은 알 길이 없습니다. 즉 인간은 자꾸만 자신이 살아 있다고 우기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지만 이는 본인이 뭘 믿지 않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할 일은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행적에 참여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셨던 그 현장에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체험에 동참시켜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전체가 똑같이 우상의 세계이며 이 지옥같은 세계에서 구원해 달라고 울부짓는 그 팽이버섯같은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내 것이 사라지는 그 최후에서 들리는 소리가 곧 주님께서 친히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중임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결국 시간에 소모하는 바로 그 모습이 송장의 모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9강-나훔 3장 1-7절(들켜버린 시선)2209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3장 1-7절까지입니다.

나훔 3:1-7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뭐 있어보이고 대단해 보이는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게 앗수르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 평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앗수르의 대적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앗수르의 대적이 되어서 사태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니까 앗수르, 대단해 보이고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 강하고 잘난 그 대제국이 별볼일 없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가득 차 있었다는 최종적인 본질을 들춰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앗수르를 다룰 때 나타남과 같이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게 헛방인 것, 아무것도 거기에 의미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춰내시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니느웨, 앗수르 제국은 사람들 보기에 굉장히 용맹하고 가장 남성 다운 국가라고 인식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앗수르를 대적하여 다루고 나니까 용맹한 남성 같았던 앗수르가 하나의 연약한 여성에 불과했다는 결말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앗수르가 그동안 왜 주변 모든 국가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저 4절에 나오는 것처럼 아리따운 기생이 겉모습만 모고 뭇 남성들을 현혹했던, 미혹했던 그러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관계에 해당된다, 라고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3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거기에 사실적으로 전쟁터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의 상황은 3절에도 나와 있지만 분명히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지만 결국 남는 것은 걸려 넘어지는 시체들뿐입니다.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시체들만 그냥 그 자리에 널부러져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전쟁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인간은 결코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시체에 불과했다는 것을 주님이 스스로 인간세계에 증명해 내시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들과 살아 있는 것들이 부딪힐 때 남아 있는 것은 시체, 원래 너희는 그렇게 시체가 되어야 된다, 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 하나님한테 당해가지고 시체 무더기로 바뀌는 것은 이스라엘이 원래 해야 될 일을 이스라엘이 못했으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할 지경이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일은 해야 되겠고, 앞장세울 이스라엘은 없고, 주님이 직접 나서서 하나님 본래의 업무를 추진하니까 결국 등장하는 것은 인류의 최후가 등장합니다.

인류의 최후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이런 겁니다. 1절부터 죽 나오는데 2절에, “휙휙 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전쟁터의 요란함을 소리로써, 분주함,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태, 이런 것들을 효과음으로 계속 적어놓은 것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잘게 잘게 부수신다는 겁니다. 결합 되어 있던 것을 하나하나 다 부숴 버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크기도 없고 면적도 없고 질량도 없는 하나의 점과 같은 존재, 그걸로 다 잘게 잘게 씹어버리고 그리고 씹어버리면 거기서 피가 나오겠지요.

그래서 3장 1절에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즉 “내가 모든 것을 파괴시키면 네 몸 안에 액체가 있을 것이고 그 액체가 피가 되는데 그 피만 가득한, 처음부터 피만 가득한 그 세계가 앗수르 제국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그 앗수르제국,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한테 걸려들면 그들은 그냥 피로 가득한 성에 해당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핵심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이스라엘이 여기 왜 있어야 되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이 세상에 출현시켰는가? 그 이유를 아시면 오늘 내용, 모든 것의 해답을, 본질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뭘 믿는다고 이야기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믿는데 실패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일이 망쳐지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마지막 절정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돼요. 이스라엘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일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무엇을 안 믿었는지 그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 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안 믿고 있는지를 인간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파악케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뜻으로 하는 지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이 앗수르 나라와 이스라엘을 이렇게 붙여줄 때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앗수르 제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게 열왕기하 18장 19장, 길게 나와 있어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왜 자기들이 망해야 되는지를 본인이 그 이유를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 제국을 대동해서 이스라엘, 그 당시 이스라엘은 유다입니다, 유다 나라를 치게 만들어요. 예루살렘을 치게 만듭니다.

치게 만들면서 거기에 왔던 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라는 장군이 왔는데 예루살렘 앞에서 설교를 해요. 설교 내용이 굉장히 긴데 그걸 그대로 열왕기하 18, 19장에 다 실어놨어요. 랍사게 장군이 설교한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예루살렘에 찾아온 이유는, 여러분이 여호와 믿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게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여러분이 여호와를 믿는 것은 누가 봐도 믿음 아니다. 엉터리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직도 본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우리가 당신 나라 수도 예루살렘을 이렇게 포위했는데 내기하자. 여러분 중에서 하나라도 우리의 말을 탈 사람, 그렇게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말 2천 필 주겠다. 그런데 당신들은 여호와를 안 믿기 때문에 결코 우리 앗수르 대군을 이길 수가 없다.”

유다나라가 믿는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 자신이 유다나라를 멸망하러 왔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길도 열어주러 왔다는 겁니다.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 18:25)

한마디로 말해서 랍사게 장군이 히스기야 왕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우리 솔직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믿음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솔직하게 항복하면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도록 내가 배려해 드릴게요.”

만약에 유다 나라가 항복만 한다면 다음과 같은 혜택을 베풀겠다는 겁니다.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왕하 18:31-32)

곧 “믿음 없는 것을 다 아는데 이 판에 와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 랍사게 장군, 또 우리 산헤립왕이 여러분에게 정말 실망스럽고 한심스럽습니다. 왜? 솔직하지 못합니까. 믿음도 없으면서 자꾸 믿는 척하지 마세요. 우리가 왜 왔는가?” 랍사게가 계속 이야기 합니다. “당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라고 우리보고 시켜서 우리가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 진짜 당신들이 믿음이 있다면 넙죽 절하고 항복하고 성문 열어놓고 ‘다 가져가세요’ 이것이 여러분 믿음에 합한 행동입니다.”라고 랍사게가 이야기하지요.

“간곡히 이야기하노니 지금 기회를 드립니다. 항복하면 당신들에게 충분히 옛날의 삶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푸틴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한테 하는 똑같은 이야기에요. “지금이라도 협상장에 나오면 충분히 여러분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평화를 보장하겠습니다.” 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왕에게, 그리고 그 신하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믿지도 않는 여호와를 계속 거론하는데 히스기야 왕이여, 생각해 보세요. 이 앗수르 우리 제국이 당신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앗수르 제국에 대든 어떤 다른 민족의 신들이 있었습니까? 없잖아요. 어느 신이 우리 전쟁 의지를 막았습니까? 없어요. 우리를 막아선 신이 있었어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여호와께서는 우리보고 당신들에게 항복을 권하고 접수하라고 우리를 보냈는데 당신들은 여호와를 안 믿기 때문에 지금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항복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한테 굴복하시면 당신들을 편안하게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해주겠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히스기야 왕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세요.”

만약에 유다나라가 항복을 거부한다면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왕하 18:27)

이게 바로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히브리 말로 유대 백성들이 다 알아듣는 말로 그렇게 설교한 거예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서울에 와서 서울말로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하들이 “그러지 말고 러시아 말로 해주세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야. 당신들 신하들만 들으면 안 돼. 히스기야 왕이나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다 들어야 돼요. 다 듣고 협의해서 곧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라고 통보한 거예요.

왜 그러냐?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은 계속 되어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히스기야 왕이 누구한테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내용을 전부 다 알려줬어요. 선지자 이사야보고 좀 해결해 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가 놀라운 정말 인간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외부에서 어떤 내가 있는 이 자리, 이 나라에 외부에서 침략을 하고 공격을 할 때 인간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구원해달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해 달라.’

이게 바로 그동안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구원해 달라는 것이 바로 불신의 증표였던 거예요. 신앙이 없던 표상이었던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잘되기를 믿고 있어요.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깨트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어요.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는 분이고, 나를 구원하는 분이고, 나를 보호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그 인간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 인간은 멸망당해야 돼요.

인간이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만 갖고 있는 그런 하나님 이용하기가 아니라 여호와를 모르는 앗수르같은 그런 모든 인간들의 똑같은 생각이에요. 그 똑같은 생각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두 자로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상. 우상의 본질은 ‘똑같다.’ 너나 나나 신이나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게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생각을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자기가 살고 보고, 일단 자기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지켜준 것에 대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그 신에게 뭔가 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의 정신에 우상이 분산되어 있고 퍼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지요. 앗수르도 예외가 아니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망하는 입장에서 앗수르도 망해야 돼요. 앗수르가 망하는 방법은 앗수르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앗수르 장군을 통해서 설교를 해서 깨닫게 만들어서 비로소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어떤 점에서 문제 있는지를 그 점을 깨닫는 것, 내가 지금껏 안일하게 하나님이 지켜주겠다는 생각 자체가 왜 그게 신앙이 아니고 이게 왜 불신인가, 이게 왜 우상인가, 하나님은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이 왜 우상적 사고방식인가, 그걸 깨달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그걸 깨달음으로써, 제가 아까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은 내가 무엇을 안 믿고 있는지를 지금 모르고 있어요. 무엇을 안 믿고 있는지를 몰라요. 인간은 뭔가 자기 도움 되는 것은 다 성급하게 믿고자 하기 때문에 자꾸 믿고자, 믿습니다, 의지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무엇이 자꾸 가리워지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안 믿고 있는가’가 누락이 돼요. 빠져버려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제시한 것이 무엇이냐를 그걸 알기 전에 우리 자신들, 우리 이방 민족에 속한 우리 자신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신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있다’는 이유와 해답을 인간은 몰라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몰라요. 내가 아직까지 여기 목숨 부지하고 사는 이유를 모르고요, 내가 태어난 이유도 모르고요, 나중에 늙어 죽을 텐데 죽을 때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평생을 이유 모르고, 평생을 해답도 모르고 그냥 세월만 계속 소모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인류공영에 도움 되라고 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대꾸할 수 있어요. “인류가 뭔데? 그들이 뭔데?” 어떤 학교에서는 “네가 여기 있는 것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라고 이 땅에 국민으로 태어났다.” 그러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어요. “국가가 뭔데? 그들이 뭔데? 내가 죽고 난 뒤에 저희들 좋으라고 하는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근원적으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왜 있는지, 도대체 내가 있는 이유가 뭔지, 도통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 태풍 두 개 지나갔습니다. 태풍 두 개 지나가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압니까? 내가 사는 해답이 돼요, 그게? 어떤 남자가 스토킹해서 어떤 여자 죽였다. 그 남자 나쁘지요. 체포되었지만. 그 남자 나쁘지요. 자, 그 남자보고 나쁘다고 규명한다고 해서 내가 사는 이유를 압니까? “저기 예쁜 소나무가 보이지? 저 소나무 예쁘지 않아?” 보니까 소나무가 예뻐요. 그런데 소나무가 예쁜 것하고 내가 여기 사는 이유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우리 손녀 영재반에 들어갔다.” 우리 손녀 영재반에 들어간 것하고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 사는 해답하고 무슨 관계 있어요?

이순신 장군이 고군분투한 것은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은 내가 대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거예요.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 바친 것, 심청이가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심청이가 아버지 눈 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받고, 공양미도 줬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도 중국 상인들 질이 나쁘니까, 하여튼 인당수 바다에 빠졌다. 바다에 빠져서 아버지 눈 뜨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심청이가 아버지 눈 뜨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심청이는 근원적으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해답을 모르는 거예요. 물에 빠져도 몰라요. 물에 빠져도 모른다고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닫혀 있고 몰라요. 왜 사는지 해답을 몰라요.

이게 자꾸, 진짜 문제는 내가 왜 있는지, 내가 사는 해답은 뭔지, 그것은 자꾸 감추고 있고 겉돌아요, 겉돌아. 교회 와서 주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지금 내 문제는요, 내가 왜 있는가, 해답이 뭔가, 그것인데 자꾸 모든 게 겉돈다고요. 가정을 위해서 가장답게 살고……, 가장답게 살면 내가 누군지 압니까? 몰라요.

이게 심각한 아버지 앞에 다섯 살 먹은 딸이 있다가 “아빠! 이 조약돌 봐. 조약돌 너무너무 예쁜 것 같애.” 아빠가 “퇘퇘, 그냥 놔. 그 조약돌이 네 존재의 의미가 될 수 없어.” 뭐 이렇게 ……, 네가 갖고 노는 그 조약돌, 그게 네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네 사는 해답이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조약돌 갖고 놀 때 아버지는 골프 치고 돌아다녔지요. 골프 치고 돌아다닌다고 그게 존재의 의미입니까? 해답입니까? 이 이야기가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나오면 교회는 무슨 소리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하신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지금 그게 바로 불신의 세계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에 지금 막혀 있고, 뭘 모르고 있고, 무엇을 안 믿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안 믿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구원받는다 하니까 “예, 예수 믿습니다.” “구원받습니다.” “예,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니에요. 그것은 네 뜻이지 해답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는 것이 천국 간다는 어떤 혜택이 좋아 보이는 식으로 들리니까, 지금 이유도 모르고 존재 해답도 모르는데 덜렁 그걸 ‘이거 내 거 하면 되겠다’ 싶어서 덜렁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뭐냐? 구원을 가져온 그 구원과 내 존재의미의 그 나와 이걸 떼놓는 거예요. 강제로 누굴 통해서? 앗수르 제국을 통해서 떼놓는 거예요. 랍사게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열왕기하 18장 27절에 보면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여기서 말하는 ‘주’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랍사게가 인용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너희들에게 나를 보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는 거예요.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랍사게가 협박 공갈을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어요.

이 협박 공갈, 군사력 약한 그 유다 나라를 향하여 대국, 강력한 대국 앗수르가 많은 군대를 몰고 와서 몇 날 며칠 포위해서 협박 공갈을 하면서 “항복하면 당신들 구원받을 수 있고 항복하면 당신들 예전처럼 살 수 있다.”라는 발언을 쏟아낼 때 발언하는 그 입장 그 처지나 그 발언을 듣는 이스라엘 처지나 둘 다 망할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이사야가 보기에는.

좀 가졌다고 협박 공갈하는 이 랍사게, 앗수르 제국이나 그것에 바들바들 떨고 어쩌나, 어쩌나, 하고 있는 이 유다 나라나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내가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인간이 사는 해답이 뭔지 둘 다 모르고 있어요. 둘 다, 양쪽 다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 양쪽 다 모르면 어떠냐? 그렇게 몰랐을 때 내 해답 내 존재의미를 모를 때 그러면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결말은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나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그렇게 큰소리하던 랍사게 군대 18만 5천 한 번에 다 죽었어요.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이게 이사야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지금 제가 직접적으로 해답을 제시를 안 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해답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립되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자기 존재의미와 해답을 알 길이 없게 되어 있어요. 주의 말씀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리 연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왜 있는지 왜 사는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인간은 이 앗수르의 18만 5천과 똑같이 이미 송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송장이라서 이미 죽은 자입니다. 자, 죽은 자의 특징은 뭐냐? 죽은 자의 특징은 자기 존재의미와 해답을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상태, 그게 죽은 겁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그 사실, 그것을 이스라엘은 그동안 못 믿었던 겁니다. 안 믿었던 겁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송장 되었다는 사실을 그걸 믿어야 되는데 그걸 못 믿었던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내 사는 이유를 모르니까 ‘하나님이여, 이유가 뭡니까? 뜻이 뭡니까?’ 자꾸 자기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자꾸 나를 지켜주고 나를 구원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 구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과 자기 의미를 하나님은 완전히 떼어놓는 거예요. 멸망당해야 될 송장이 된 자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예요. 그것은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죽어야 할 대상인데 무슨 구원의 대상이에요? 구원은 반대말인데요. “아이고, 쓸모 있구나. 건져줄 게.” 이것하고 “너는 죽어야 마땅해.” 이것은 반대거든요.

이스라엘은 그동안 내가 뭘 안 믿고 있었던가? 그것은 본인에 관한 문제였어요. 본인에 관한 문제를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을 보내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 있던 불신앙을 랍사게라는 앗수르, 멸망해야 될 앗수르 제국의 장군의 입을 통해서 그걸 다 완전히 까발리는 거예요. 너나 나나 똑같이 우상숭배자라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뭐다? 똑같다는 것, 다를 것 없다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이 앗수르 제국은 남성인 줄 알았더니만, 제가 아까 했지요, 기생이고 여성이었다. 여성의 특징은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뭐 있는 것처럼 유혹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되는데 여성 혼자 있어버리면 그것은 연약한 여성, 여성의 특징은 성경에서 연약하게 봅니다, 스스로 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앗수르 정도 되면 ‘이것은 남성이다.’ 누구든지 그렇게 봤거든요. 오늘 본문에 본문에 보면 “아니야. 앗수르는 여성이었어. 별볼일 없는 그냥 여성이었어.” 나중에 앗수르 망하고 난 뒤에 다 떠나지요. 심지어 울어줄 사람도 없이, 위로할 사람도 없이 다 떠난다고 7절에 나와 있잖아요.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이게 냉철하고 냉혹한 세상 원칙입니다. 더 챙길 것 없으면 다 떠납니다. 뭐 돈보다 친구가 더 좋다고? 어디서 그런 사기를! 돈 떨어지면 친구들 다 떨어지지요. 가족들도 다 떨어집니다. 돈 떨어지면. ‘죽을 때까지 돈을 꽉 쥐고 있어야 된다.’ 문제는 죽을 때까지 돈 쥐고 있어도 내가 왜 사는지 해답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모르는 채 그냥 돈만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송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18만 5천 명이 건들지 말아야 할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 예루살렘을 포위해가지고 18만 5천 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거든요. 일괄 죽었어요. 일괄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앗수르한테는 최후의 불길한 징조였어요. 예루살렘한테 당하고 난 뒤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망해버려요.

그들은 망하는데 어떻게 망하는가? 오늘 본문 3장 1절에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3절에 보면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시체), 무수한 시체여”

이런 조합들, 이런 단어들의 조합들에서 발견하는 주제는 뭐냐? 그곳에 칼이 있었고 소리는 들리고 말들은 설쳐대지만 실제로는 산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나중에 시체들이 발에 걸린다는 말이 나오지요.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사람이 시체에 걸려 넘어진다. 다 죽여버렸어요. 다 죽였어요.

차라리 하루아침에 18만 5천 명 죽인 것은 그것은 자비로운 죽음이에요. 이것은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메대와 바벨론제국이 와서 앗수르 제국을 칼 가지고 도륙해요. 학살이라 하지요, 학살. 그냥 조각조각 내버려요. 그 나라 자체를, 사람 자체를 잘근잘근 씹는다는 말이 있어요. 속 안 좋을 때는 오래 씹어야 소화가 잘된다 하잖아요. 이렇게 한꺼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 과정을, 학살의 과정을 세밀하게 세밀하게 자근자근 밟아가면서 죽여버리는 거예요.

이게 의미 모르고 인생의 해답 모르는 누구나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최후의 모습을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 앞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신의 세계의 그 종말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바로 그 최후가 나의 최후인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나의 최후인 것을.

이것은 인간에게는 구원의 문제, 구원해달라, 문제는 구원을 못 받아서 문제라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하나님에게 안 통합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왜 내가 여기에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해답을 모르는지, 그것은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몰라야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몰라야 되는 그것이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이었어요. 그걸 믿어야 되었어요. 나는 의미 없이 무의미하게, 무의미하게 존재한다는 그걸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인간 세상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인간끼리 서로 얽혀 있어요. 그래서 앗수르 제국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습니다. 둘 다 우상적 성향으로 가득 넘쳐 있어요. 우상에 대한 정신으로서. 그렇다면 여기서 앗수르제국의 경우를 통해서 해답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사야가 한 것은 그거예요.

이사야란 뭐냐? 앗수르 제국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도록 왔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제 해답을 말씀드릴게요. 이런 겁니다. 앗수르제국은 예루살렘을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봐가지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왔어요. 앗수르제국의 산헤립왕의 지시에 의해서 랍사게 장군이 왔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관찰자고 누가 관찰당하느냐 하면, 앗수르, 인간이 예루살렘을 관찰하고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공격할 때 유다 나라가 믿는 여호와는 어떻게 거기에 대처하는가’를 찾아보고 싶은 거예요. 왜 앗수르 이 인간들은, 앗수르나 다른 인간이나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사는 이유가 뭔지, 그것은 계속 분투 노력하면서 그걸 발굴해 나가거든요. 계속 노력해 나가는 거예요.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누군지 발굴하는 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에요. 계속 부딪히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아주 적절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를 계속 측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관음증 환자입니다. 훔쳐보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는지 훔쳐보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경상도 말로, 이건 표준말로 번역하기 힘든데 ‘데뎅키다’ 들켰다, 걸렸다, 하는 뜻이에요. 경상도 말로 데뎅키다. 내가 저쪽을 관찰하고 훔쳐보는데 훔쳐보다가 훔쳐보는 그 시선이 걸려드는 거예요. 훔쳐보다가. 주님이 앗수르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당해버린 겁니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왕하 19:25) 즉 “네가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내가 너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너의 최후의 모습은 일단은 내가 18만 5천부터 조지고 갈게.” 그래서 천사 보내서 조지고 그러고 나서 돌아와서는 나라가 다 멸망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주님을 관찰하고 주님이 어떤 분인 것을 내가 파악하려고 합니다. 내쪽에서 찾아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주여, 말씀을 20 독, 아니 백 독했습니다.” 백 독하니 뭐합니까? 자기가 관음증 환자인데. 하나님 뜻을 이렇게 담 넘어 보고 있는 건데요.

바깥에서 주께서 보시는 거예요. 바깥에서 보시고 있음을 안쪽에서 그 시선을 마주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믿지 않았는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시작과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주시했다는, 주시한 그 사실을 내가 안 믿은 거예요. 그냥 내 쪽에서 보는 것만 급급했지 내가 파악하고, 파악한 것을 내가 또 추슬러 가지고 스스로 내가 살아보려고 애썼지 주님께서 끝까지 나를 지켜봤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주님은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신의 행적에 있던 그 체험을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같이 예수님 체험에 참여시킵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주께서 다녀가셨던 행적, 주께서 관찰하셨던 그 관찰에 동참시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열두제자입니다. 열두제자, 그게 신약의 성도고 교회입니다.

주님이 당했던 그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체험을 같이 그 길을 가게 하셔요. 가게 하시면 세상 사람들이, 의미 없고 해답도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구원을 목말라 하면서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지요. 이것은 마치 여러분, 버섯 가운데 팽이버섯 있지요, 끝이 동글동글한 데 줄기로 되어 있는 버섯, 그게 팽이버섯이지요.

지옥에서 울부짖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살려주세요!!” 교회 와서 금요 철야 하면서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 모습을 성도는 같이 보게 하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존재의미 모르고, 사는 해답도 모르면서 그저 모르니까 몰라도 그저 구원은 해 달라고, 자기가 누군지는 모르고 아무 의미 없는데 살아 있으니까 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지옥의 모습을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느긋한 마음에 여러분 쪽에서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존재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때 주님의 존재의미가 곧 우리의 존재의미인 것을, 주님의 활동하는 기능이 우리 삶의 기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된 것을 저희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