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8-10 /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2022년 9월 7일
본문 말씀: 나훔 2:8-10
(2: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2: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2: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는 그 당시 최고의 제국입니다. 앗수르라는 이름의 제국입니다. 하나의 대단한 제국이 등장하게 되면 그 유일되는 막강한 에너지로 인하여 백년이고 천년이고 영원한 제국으로 이어질 것 같기에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더는 더 멋진 제국이 나타날 필요가 없다고 장담할 만한 합니다. 워낙 강력한 결집력과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국에 대해서 선지자 나훔의 최후의 미리 내다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몰락하고 허약해져서 무릎이 후들후들 떨 정도도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공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허’란 ‘아무 것도 없다’입니다. 혹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공허함입니다. 마치 오늘날 재개발되는 현장을 가보는 것과 같습니다. 오밀조밀하게 정겹게 살던 달 동네가 보상금 받고 다 떠난 자리에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만 자리잡고 있습니다. 쓰레기 소각장에서는 온갖 쓰레기가 다 몰려옵니다.
그 쓰레기 하나하나에 애틋한 사연이 깃들여 있습니다. 하지만 소각장 인부들의 눈에는 그냥 곧장 불 속으로 집어넣어야 될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물건의 최후의 심판이란 곧 공허한 쓰레기로 전락되는 바입니다. 왜 버젓이 장대함을 빛내고 있는 대제국이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의 현장이 되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곁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훔 1:14에 보면,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곧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는 것인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곧 “너희들은 이웃 나라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왜 다른 신을 섬기느냐? 따라서 너희들은 최후를 맞이하도록 내가 심판해줄게”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맞이하는 앗수르 제국은 나름대로 최후의 심판을 당한 겁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이 이 제국만이 아닙니다. 이 앗수르 이후에 교체해서 등장하는 바벨론 제국도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고, 그 뒤에 나타나는 메대, 바사 나라도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그 뒤에 나타나는 헬라 마케도니아 나라도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이 뒤에 나타나는 로마 나라도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근처에서 계속 일어나는 제국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단락지어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결국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는 순간이 옴을 그들 제국의 최후의 관련짓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받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2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 인간들이 연이어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개인적으로 최후의 심판같은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귀히 여기는 우리 자신이 제거되고 소멸하는 겁니다. 공허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 인간들은 서로 결집하고 단결하여 ‘우리’라는 것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상황이 모든 인간의 삶의 처지를 열악하게 만들어 그 가운데서 인간은 비열하게 비겁하게 처신하게 만듭니다. 즉 우리 자신의 바닥을 다 드러냅니다. 그 바닥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공허한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점이 폭로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미 오시고 난 뒤에 오늘날 우리들의 인생사는 하루하루가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마지막 시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활동으로 인하여 미리 맛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제국과 제국의 단락 속에서 인간이 그동안 집어넣은 모든 재물들은 실은 전혀 제국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바가 심판의 취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6:52)
이는 곧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공허성을 메우는 방식이 타인의 힘을 끌어모으는 것 외에는 없음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관행이나 관성처럼 줄곧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이런 힘의 집결을 용납하지 않고 깨어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 ‘집단성’이 허상에 불과하고 모두 개별성으로 뿔불히 헤어집니다.
각자 하나하나 우성덩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본인이 자아 연속적을 갖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빈다. 제국은 단락지어졌지만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끊어짐’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심판 이후에 영원한 천국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단락’ 즉 ‘끊어짐’을 성사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연속성을 고대하는 자는 천국에 탈락이 됩니다. 구원이란 심판을 경유하는 자에게는 주어질 뿐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나흘만이 되살아난 것은 본인의 되살아남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곧 부활이요 생명입니다.(요 11: 25)
이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으로 인해 자기 구원을 가져가려는 자는 모조리 우상숭배자가 되고 이단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가지 개념들을 펼쳐놓고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자기에게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으로 본인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락. 즉 ‘끊어짐’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먼저 예수님의 끊어짐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끊어짐에 참여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을 자가 있게 되고(롬 8:30) 그들만 구원받게 됩니다. 즉 스스로 자기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이어지게 될 뿐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의 ‘우리’ 곧 집단이 따로 천국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히 12:22-23) 이 새로운 곳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해서 말씀으로 새로 살게 된 자들의 집합, 곧 영원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주도권을 갖고 그 말씀에 의해서 생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7강-나훔 2장 8-10절(최후의 심판)2209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2장 8-10절까지입니다.
나훔 2:8-10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 거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라는 그 앗수르 대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의 정경, 그 풍경을 나훔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미리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훔선지자 입장에서 그 당시 앗수르가 있었거든요, 그 앗수르 제국이 그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과 사치함을 자랑질해도 나훔선지자는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끝을 알기 때문에. 그 끝이 한마디로 뭐라고 되어 있느냐? 10절에 보면 공허하다. 텅텅 비어있다. ‘없네. 아무것도 없네.’ 이게 공허함이지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공허함을 실제로 목격하는 현장 같은 게 있습니다. 재개발지역. 불도우저만 왔다갔다 하는 그 지역, 시골에서 올라와서 없는 사람들이 운집해서 조밀하게 살았던 그 옛날 동네.
그게 재개발이 되어서 불도우저, 중장비 움직일 때 그 근처를 거닐어 보면 애들 초등학교 만화책도 있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내부가 완전히 다 드러난 안방 내부의 찢긴 벽지, 애들 자랄 때 키만큼 그어놓은 것도 있고, 낙서도 있고, 심지어 돌아가신 모친 제삿날도 적혀 있고, 절에서 받은 달력도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쓰레기장이 되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공허함입니다. 아무 쓸데 없는 거예요. 선지자 나훔이 앗수르제국, 번영하는 앗수르제국, 막강하고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까지 이 제국이 이어질 것이라고 누구도 그렇게 단정했던, 너무나 굳건하고 강력한 토대가 갖춰져 있던 앗수르, 그 앗수르 이후의 제국은 아예 말도 꺼내지 말고 이 제국으로 줄곧 세상에 영원히 몇천 년 갈 거라고 누구나 다짐했던 그 앗수르제국을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미리 본 겁니다.
미리 봤을 때 그 앗수르 제국이 그렇게 허무할 만한 모든 이방 민족, 심지어 이스라엘까지 허무할 만한 민족이지만 나훔의 눈에는 뭐냐 하면, 쓰레기 소각장이었습니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일해본다고 가상을 해 보면 수시로 쉬지 않고 쓰레기가 들어오겠지요. 소각할 때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보면, 그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병이나 종이들, 옷가지라든지 우산이라든지 어떤 것 하나 다 애틋하고요, 사연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하나 집어보면 전부 다 거기에 사연들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그들이 처음 물건 살 때 그들의 가정이나 그들의 모임에서 이런 쓰레기가 아니고 얼마나 좋은 물건 샀다고 자랑질을 했겠습니까? 그게 쓰레기장에 곧장 갈 거라는 것, 처음 물건 살 때 절대로 그런 생각을 안 갖고 있지요. 하물며 옆에 있는 사람이 “곧 쓰레기 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싸움 날 거예요.
나훔 선지자가, 그 당시 대단한 앗수르, 유일한 제국이에요, 둘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독보적인 제국을 보면서 쓰레기장으로 그렇게 간주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선지자의 그 표현이나 그 언어가 사람의 부아를 충분하게 건드릴만 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최후의 심판을 미리 맛본다.’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은 언제 오는가? 지금! 영어로 now! 최후의 심판은 시간의 끝 지점이 아니라 지금 선지자의 예언 안에서는, 말씀 안에서는 지금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 입장에서 앗수르제국이 쓰레기장이 되고, 공허하게 되고, 망해야 되는 그 이유를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은 앗수르제국 옆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앗수르제국 옆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유다라는 나라,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앗수르 제국은 인류 최후의 심판을 견본으로, 샘플로써 먼저 보여줘야 될 여러 가지 제국 중 하나의 제국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이 있는 이상은 그 앗수르라는 제국도 멸망해야 되고, 앗수르 제국을 멸망하라고 등장한 바벨론제국도 망해야 되고요, 바벨론 제국도 망하게 하는 메데-파사 나라도 망해야 되고, 메대- 파사나라 같은 시대, 그 시대를 또 망하게 하기 위해서 헬라-마케도니아라는 제국이 등장해야 되고요. 그 헬라-마케도니아라는 제국을 로마라는 제국이 무너뜨리게 되면 더는, 로마제국이 무너질 최후의 그때가 되면 더는 최후의 심판을 보여줄 제국은 이 세상에 없다. 이게 바로 선지자가 보는 세계관입니다.
왜 없어야 되는가?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로마에 이를 때까지 계속 까딱까딱, 멸망하는 것 같지만 멸망 안 하고 계속해서 남은 자들이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어렵습니까? 그러면 쉽게 가겠습니다. 왜 세상 이방 나라들이 망하는가? 이스라엘이 붙어 있어서 그래요. 붙어 있는데 왜 망하는가? “너희는 옆에 붙어 있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왜 안 믿었어? 맞아봐라.” 이래서 멸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나훔도 마찬가지고, 이 선지자들의 그 예언 안에 뭐가 필히 들어가느냐 하면, “이스라엘 망한다”도 들어가지만 “이스라엘 망하면 이방 나라도 같이 덩달아 망한다.” 이게 같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망할 때 이스라엘만 망할 줄 알았지? 아니야.” 같이 망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중심이 되고 그 중심되는 이스라엘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약속의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앗수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앗수르라는 신을 믿었지요.
그걸, 나훔 1장 14절에서는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초라해짐이라, 그런 뜻이거든요.
앗수르가 멸망하는 이유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게 우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옆의 나라 곁눈질해 봐” “옆의 나라 누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있잖아.” “이스라엘이 무슨 신을 믿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왜 망하는데?” “그 옆 나라,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앗수르는 망해야 된다.” 이런 논리로 지금 나훔 선지자가 들이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모든 인간들은 왜 죽는가? 옆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왜 죽는가? 왜 심판받고 멸망하는가?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데 내가 왜 아프고 죽어야 되느냐? 우리가 예수님의 아버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참된 하나님인데 예수님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필히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내가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죄가 없었는데 내가 옴으로 비로소 죄가 생겼다는 겁니다. 22절에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너희들 곁에 너희들만 있으면 너희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너희들 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우리가 믿던 여호와는 가짜였다,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도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없으면요, 사람들이 예수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성령 이야기한 것, 전부 다 같은 단어니까 그 성령이 성령이고, 그 성령이라는 단어 안에 성령 들었고, 예수라는 단어 안에 예수 들었고, 하나님 안에 하나님 들었다고 생각했지요. 누가 오기 전에는.
사도 바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들었던 풍월 가지고 우리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수고, 우리가 듣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고, 우리가 받았던 성령이 진짜 성령이라 했는데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네가 아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요, 네가 받은 것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이요, 네가 아는 예수는 예수님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버린 거예요.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러니까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 저항하고 반항하지요. 사도 바울에게 “너는 사도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반항하고 저항한 겁니다. 그 반항과 저항을 구약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전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저항하는 거예요. 반항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하게 되면 점잖은 사람들이 뭐가 되느냐? 비루하고, 비열하고, 거북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전환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열악한 환경을 조성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전쟁은 이뤄지거든요. 그러면 전쟁을 통해서 인간의 그 바닥을 드러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8절에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 저수지가 큰 저수지였어요. 그래서 니느웨라는 성은 한때 거주민이 12만 명까지 되었어요. 옛날에 12만 명이면 보통 큰 도시가 아닙니다. 거대도시지요. 그런데 바벨론이 쳐들어오니까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일어나니까 그 전쟁하는 군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2장 3절에 나오지요.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절에, “그 병거는” 그 병거(兵車), 마차, 요새 같으면 장갑차지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뭐냐 하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급작스럽게 앗수르가 짧은 한순간에 갑자기 와장창 다 무너져야 하도록 뒤에 등장하는 바벨론 제국이 거침없이 앗수르제국을 허물어버리는 거예요. 전쟁이.
그렇게 되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단결과 결집을 했던 그들이 도망을 합니다. 2장 8절에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앗수르 당국자가 “서라! 서라!” 해도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전에는요, 은도 많았고 금도 많았지만 9절에,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했거든요. 그런데 10절에 보면 적들이 와서 다 가져가 버렸어요. 노략질당하고 강탈당해서 다 빼앗겼어요. 그러니까 앗수르 제국이라는 것이 대단한 나라 맞아요. 대단한 나라 맞는데 그들이 대단한 나라가 되려면, 몸집을 키우려면 외부에서 에너지가 계속해서 유입되어야 돼요.
어느 조직이든요, 외부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계속 유입되지 아니하면 그 조직은 자체적으로 노후화되어서 붕괴해버립니다. 시큰둥 해져버려요. 교회도 새로운 교인 와야 활기가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지 그 얼굴, 또 그 얼굴 계속 보면 ‘아~, 참 재미없다. 왜 교회가 재미가 없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정도 마찬가지고요. 뭐 명절에 모여봐야 그 얼굴, 그런데 그 얼굴 가운데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그것은 누구 애 하나 낳았을 때 그 애 중심으로 다 돌아갑니다. “아이고 예뻐라. 용돈 줄 게.” 막 하지요. 막상 그 나라를 가득 채웠던 그 내용이 사실은 앗수르가 그동안 다른 나라에서 빼앗아 온 것들이에요.
빼앗아 온 것들로 채웠을 때 그 빼앗아온 것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에너지 다하면 내부적으로 그동안 모아놓은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게 마태복음 26장 52절에 나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칼을 휘두르는 자는 그 칼로 망한다. 쓰레기를 모아놓은 거예요, 그동안!
이왕 한 것 어렵게 가겠습니다. 충분히 어려웠지만 더 어렵게 하겠어요. 이스라엘은 까딱까딱, 하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버텨야 돼요. 왜냐하면 메시아는 자기 백성한테 죽어야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대표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대제국보다 끈질기게 예수님 오실 때까지 있어요.
그런데 그동안에 몸집이 큰, 너무나 강한 힘들이 집결한 그 제국들, 앗수르 제국이, 영원할 것 같은 그 제국이 단락을 이뤄요, 단락(段落). 카스테라 칼로 잘라놓으면 조각 나잖아요. 빵 조각나듯이 단락을 이뤄요, 단락. 또 앗수르와 바벨론 사이에 단락, 끊어짐, 바벨론과 메대-파사(페르사) 사이에 단락, 끊어짐, 그리고 그다음에 페르사와 알렉산더대왕, 헬라-마케도니아 나라 사이에 단락, 그리고 그 헬라나라와 로마 사이에 또 단락.
단락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의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제국 최후의 날입니다. 곧 심판의 날이에요. 왜 그렇게 심판이 있는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또 이야기하겠어요. 그것은 옆에 이스라엘이 붙어 있어서 그래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흠뻑 담아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보여줄 마지막 사명은 ‘나 이스라엘 망한다.’ 요 사명이에요. ‘이스라엘은 여기서 끝장났다.’ 이 사명이거든요.
이 사명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드렸던 주변의 제국들은, 이스라엘은 길게 보여줬다면 그들은 단락, 단락, 하면서 한 제국의 최후의 심판의 날을 여호와 하나님한테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선생님이 계신데 자기 아들이 자기 반에 있다고 한다면 자기 아들이 말썽 피우니까 매를 들고, 요새는 학생들에게 매도 못 들지만, “어이, 아들! 네가 왜 말을 안 들어.” 괜히 아들보고 꾸짖는다면서 옆에 있는 애를 보지도 않고 한방 쳐버리는 거예요. 한 대 맞고 엉엉 울면 “자리 바꿔, 자리 바꿔!” 또 그런 식으로 “너 똑바로 하란 말이야.” 하고 자리 바뀐 그 애를 또 쳐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얻어맞는 학생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날입니다. 종말의 날이에요. 연속성, 순하게 이어지지 않고 완전히 폭삭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다음 제국으로 교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가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사적으로 단락이 있어 줘야됩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각하는 아들의 나라 천국은, 예수님 자체가 단락을 지어버렸어요.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는 단락을 보여줬어요. 예수님 자체적으로 불연속적으로 보이지요. 우리는 나, 자아가 아무 일 없이 천국 가기를 바라지요. 이게 바로 잘못된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옆에 붙은 취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죄인이면 지옥 가야지 어딜 천국을 넘봐요? 말도 안 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천국 갔는데?” 그 사람은 단락지어 졌거든요.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거에요, 죽었기 때문에.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난 뒤에 누굴 믿었느냐? ‘내가 죽었었는데 살아났네?’ 살아난 자기 몸을 믿는게 아니에요. 그 나사로가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지요. 예수님이 나를 살려준걸 믿는 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을 믿은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고 부활 된다는 예수님 자체도 단락지어지고, 그 단락이 부활에 의해서 새롭게 이어진다는 그 사실을 앞당겨서 나사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먼저 그 일이 발생된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부활시켜주는 분, 그게 아니라 “나는 부활”이고, 나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내가 생명”이고 내가 너희에게 뭘 줄 게, 가 아니라 “내가 나한테” 한다는 말이에요, 내가 나한테. 그리고 나사로는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사로에게 기이한 괴이한 현상이 벌어진 거예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그러면 그 제국들이, 이렇게 큰 제국들이 무너졌으면 그러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어떤 양상으로 되는가? 많은 사람이 숫자로 모였더라도 결국은 개개인으로 전부 다 환원되게 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집단이 무용지물이 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끼리 열심히 단결하자. 그게 막상 최후의 날이 오게 되면 각자 자기 살기 바빠서 개인플레이로 다 뿔뿔이 헤어지는 것이 주님이 심판을 하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왜냐하면 그 개개인이 자기한테 우상이 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추석이라고 가족들이 모이게 되면 그 가족들이 명절에 모임으로써 대외적으로 또는 스스로 자부하기를 ‘역시 우리 집안은 집안 식구끼리 같이 있는 게 행복이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이제 결국은 우리 일상생활이, 우리의 하루하루 인간사가요, 주님의 최후의 심판의 반복이에요.
왜?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겪고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결국은 개인이다, 그 말이지요. ‘우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고 집단 속에서 개인 위주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 속에서 매일 그것을, 아주 집요하게 그걸 체득하게 만들어요. 겉으로는 우리, 우리, 하지만 결국은 나만 살자, 이게 주께서 건드려줬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으로 건드려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나 좋으라고 믿는 게 우상이거든요. 왜 나 좋으라고 믿는게 우상이냐? 진짜 하나님에 의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제일 하기 힘든 게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를 부정 못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부정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를 믿든, 삼위일체를 믿든, 성령을 믿든, 복음을 믿든, 뭘 믿든 그것은 다 우상입니다. 우상적인 복음이고, 우상적인 성령이고, 우상적인 예수예요.
교회가 그런 데잖아요, 교회가! “복음 듣고 싶어요.”라고 왔을 때 목사가 물어 봐야 돼요. “왜 복음을 원하십니까?” “나 천당 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 자체가 우상이기 때문에 당신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됩니까?” 단락 지어야 되지요. 죽어야 되지요. 내가 부정이 안 되니까 주께서 최후의 심판에 참여시켜서, 십자가에 참여시켜서 우리를 아예 없애버리고 잊혀지게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앗수르제국이 우리끼리, 우리끼리, 단결을 잘했잖아요. 엄청난 결집력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오니까 개인플레이로 다 가버렸어요. 오라, 해도 오지를 않습니다. 자기 살기 바빠서. 진즉에, 인간의 본성은 진즉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절에 가족들 간에 자의 반 타의 반 모였을때에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야야, 큰아들 경비 많이 드는데 오지 말라고 해라.” 경비 많이 드니 오지 말라고 해라.
그런데 큰형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배하고 사과 상자만 보내는 겁니다. 계산해 보는 거예요. ‘차비 하고 갔다 오는 경비보다 미리 사과 상자나 보내주는 이것이 결국 남는 것이다.’ 그 시간에 속초나 이런데 놀러가는 게 낫겠지요. 결국 개인플레이로 끝나요. 이게 인생사입니다.
그걸 어르신들은 알아요. 네가 억지로 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어르신이 전화 하지요. “네가 그렇게 차 밀리는 데 오지 말아라” ‘그냥 계좌번호 알잖아. 경비 계산해서 보태서 제사 드리는데 필요한 돈 보내면 나도 좋고 너도 좋다.’ 이게 개인플레이입니다. 왜? 내가 나한테 우상이니까. 왜? 자기 부인이 안 돼요. 마지막은 나한테 어느 것이 이익이냐, 그것이 바로 앗수르제국이 무너지면서 적나라하게 그걸 다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차례에요. 대제국 망하면서 이스라엘도 망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는 곁에 누가 오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곁에 있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우리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끼리 바르게 하면 착실해요.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딱 듣게 되면 인간 속에 갑자기 반항과 저항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가 단락지어지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야 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지막이라도 나는 내가 결정한 일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가 결정한 일은, 내가 선택한 일은 끝까지 내가 책임지고 싶다. 인간은 그런 오기 없으면 시체지요. “하나님, 하나님이 ‘나’라는 것이 천국 갈 수 있는 어떤 기준을 제시하게 되면 하나님의 천국 가는 기준을 내가 믿기로, 내가 결심하고 선택함으로써 천국 갈 때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그 자부심을 내가 지니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요. 그게 바로 이단입니다. 그게 이단이에요.
내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성경적 재료를 달라는 거예요. 구속사 주시고, 십자가, 언약, 피 흘림, 온갖 것 다 주면 그런 것을 요리하든지 그런 것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내가 이거 믿고, 이거 믿고, 이건 내년에 믿고, 이렇게 믿었던 내 결정에 의해서 내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예수 믿는 보람을 내 속에서 찾는 거예요. 교회 와서 이런 이단 행세, 이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앗수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벨론이고. 우리 태생 자체가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꾸 여운을 남겨요, 여운을.
아까도 10절에서 이야기했지만 니느웨는 공허했다고 했지요. 이 공허한 것을 나의 괜찮은 선택으로 채워서 공허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싶은 거예요.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상 자체가 공허함이라는 뜻이에요, 우상 자체가, 네가 공허하기 때문에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이걸 발각시키겠다는 게 하나님 뜻이거든요. 공허하지 않은 신은 옆에 있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나 보통 인간들은 그냥 공허해요. 공허하니까 공허 안 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고, 무기를 모으고, 여러 가지 금과 은과 재산과 명품 이런 것을 끌어모아서 공허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하는 그 버릇이 심지어 교회 와서, 교회 와서 그대로 그것을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보면 심판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이 하나님의 집부터 시작됩니다.
교회 대신 복음이에요. 교회는 인간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눈에 보이는 여러 명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집결하면 이게 성사되지만 복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복음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내가 선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부름을 받아야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복음의 부름을 받는다는 말은, 나는 공허하다는 뜻이에요. 내가 아무리 주님을 불러 봤자 공허한 자의 목소리는 주께서 듣지를 않아요. 우상 숭배자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이야기 있잖아요. 이런 이야기, 부름을 받지 아니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 나오거든요.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로마서 8장이 이야기가 이미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음매 신나지요. 그런데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분노를 주체를 못 합니다. 격분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세요. 상대방을 격분시켜야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인간세계에서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일상생활을? 제가 세 개의 영화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크로아티아 영화인데요. 남녀가 서로 좋은 사이에요. 웃으면서 연애하는 사이라서 서로 좋아서 깔깔깔깔, 까불어요.
식당에서 장난도 치고 큰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나 잡아 봐~라” “잡히면 죽는~다.” 그런 씬(scene), 장면이 나옵니다. 웃음소리가 하하하하~, 호호호호~, 계속 납니다. 카메라가 그 장면을 계속 잡다가 테이블 아래로 앵글을 옮기니까 두 사람은 사라지면서 남자의 손만 테이블 위에 비칩니다. 웃음소리는 계속되고요.
그리고 남자의 손 너머 뭐가 보이는가 하니까, 여자가 처참한 몰골로 시체가 되어 있어요. 남자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그런데 그 현장에 웃음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기이하고 괴기스런 현상이지요. 영화니까 그게 가능하지요. 남자는 웃고 있어요. 아까 웃고 있었던 그 웃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게 단락이 아니고 불연속성이 아니고 인간은 연속성이에요. 인간은 하던 행세가 계속 나옵니다. 집에서 하던 우상 행세를 교회 와도 계속해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진다. 하하하하하하~, 지옥 가도 하하하~. 이게 첫 번째 영화입니다.
인간은 멈추지 못해요. 자기 관행과 관성을 멈추지 못해요. 살던 행세,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해야 마땅해, 라는 이 관성을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든, 70, 80이 되든, 시건 안 납니다. 나이 80 넘어서 시건나는 사람 봤습니까? 관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관성. 결국은 나만 챙기는 거예요.
우리 서로 이용할만해서 ‘우리’라 했지요. 나중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인생사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미 최후의 심판에 돌입해 있어요. 주께서 계속, 계속해서 우리를 개인으로 흩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야 쓰레기가 되거든요. 쓰레기가 쓰레기끼리 만나서 서로 연애하는 것 봤어요?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예요. 쓰레기, 단독적인 쓰레기로 다 끝나요. 쓰레기로 파쇄된 쓰레기. 이게 마지막 심판 속에 있는 인간 군상들입니다. “안녕하세요” 해놓고는 전부 다 개인플레이입니다. 그게 앗수르가 보여주고, 바벨론이 보여주고, 헬라-마케도니아가 보여주고, 로마가 보여주고, 오늘날 우리가 보여주는 겁니다.
두 번째 영화가 뭐냐? 그러니까 우리가 깨졌잖아요. 우리가 깨지니까 나만 믿으려고 하니 뭔가 허전하니까 뭔가 우리라는 것을 어떤 집단 속에서 자기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싶어하는 거예요. 분명히 나는 내 중심이지만 그래도 어떤 우리라는 집단 속에 있을 때 마음이 좀 평온하다 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 영화가 뭐냐 하면 <포스트 모템>(Post Mortem)이라는 영화인데요. 이것은 뭐냐하면, 죽고 난 뒤에,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야 되요, 죽고 난 뒤에 자기 일가친척의 시신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의자에 앉혀놓고 화장을 제일 예쁘게 해서 살아 있는 것처럼 해놓고 죽고 난 뒤에 찍는 영정사진을 ‘포스트 모템’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없지만 서양의 시골에는 그게 있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고인과 애틋한 정을 나눴던 그 지난 시절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죽고 난 뒤에 찍는 영정사진의 전문사진관이 있어요.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 사진사인데 그 장면 보게 되면 죽고 난 뒤에, 주로 전염병 걸려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미 죽었지요, 죽었는데 눈 크게 띄워서 화장 진하게 하고 옆에 선 사람들 물론 살아 있지요, 가운데 죽은 사람 앉혀놓고 “치~즈, 하나, 둘, 셋!” 사진 찍고 난 뒤에 다른 사람들이 “사진 잘 찍었어요” 하고 있는데 중간에 앉혀놓은 병들어 죽은 소녀는 목이 휘딱거리면서 힘없이 내려앉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줄 메시아, 이런 것에 대해서 사진으로 찍어서 기억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 십자가를 기억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한테 최면을 걸어보는 겁니다. 주님은 없지 뭐 우리끼리 있는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기억하게 되면 혹시 나를 주님이 구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세 번째 영화가 뭐냐? <블랙폰>(The Black Phone)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어떤 연쇄 살인자가 애들을 유괴해서 계속 죽여요. 그 살인자가 초등학생 애를 또 유괴했어요. 영화는 그때부터 시작해요. 그 유괴한 애를 지하실에 가두어두는데 거기에 전화기가 있어요.
지하 밀실에 애가 쭈그려 앉아 있는데 전화선은 끊어져 있거든요. 외부에 연락하게 놔 둘리 없으니까. 그런데 그 끊어진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죽은 자들이 똑같이 네가 갇힌 그 지하 밀실에서 탈출했던 경험을 갖고 있는, 그 애보다 먼저 죽었던 애들이 자기 경험담, 비밀번호를 그 전화를 통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전화선은 끊어져 있는데 죽은 자들이 소식을 전하는 거예요.
그 집단을 히브리서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총회’라고 하는 거예요 하늘의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22, 23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왜? 그들은 먼저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들이 전화 소리를 듣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지는데 그게 왜 전화선이 끊어져 있는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들려오기는 뭐가 어디서 들려오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 살아 있는 주님의 음성을 산채로는 들을 수가 없어요.
그게 뭐냐? 심판 이후에요. 단락 이후의 이 세상,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마지막 영원한 하늘나라, 그 영원한 하늘나라,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참여된 자끼리만 서로 통하고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오직 성령 안에서 모든 성도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겁니다. <블랙폰> 정말 스릴러, 살 떨리는 영화 아닙니까? 지금 성령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들, 이스라엘, 그들 이스라엘 만이 그 속에 누가 있느냐? 나훔 선지자가 들어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끝을 나훔 선지자도 알고, 오늘날 십자가 성령을 받은 우리도 이 세상을 압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합니다. 생명 나무 없는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을 끌어모은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런 자유를 만끽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우리 인간이 해내지 못함을 감사합니다. 내가 해내는 일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 것을 두고두고 계속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