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나훔

나훔 1:2-5 / 아들만 사랑

정인순 2022. 8. 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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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만 사랑 

 

이근호
2022년 8월 3일                  

 

본문 말씀: 나훔 1:2-5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1: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잘 되라고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비쳐서 제대로 너 자신을 알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나만 챙기면 만사 O.K”라는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에게 잘보이면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이셨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왜 제자들은 그렇게 오래 예수님과 붙어다니다시피 하며 보냈건만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태생이 곧 저주의 대상인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삶을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상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소원을 이루고 자기 만족을 달성하고 싶어합니다. 즉 자신의 삶의 형편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원래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랑받는 자리는 에덴동산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조건부로 살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인간은 살아았습니다. 만약 이 조건을 파기한다면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생명나무가 있는 그 에덴동산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운명이요 팔자요 확정지어진 겁니다. 일체의 양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를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국한됩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다른 이는 일체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는 곧 예수님 이외에는, 예수님을 향한 바로 그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사정없이 질투의 분노와 진노를 퍼붓습니다. 저주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저주가 강렬한 이유는 사랑을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다 주셨습니다.

남아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른 신(神)을 생각합니다. 이미 자기 안에 담겨 있는 선악과 지식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이미 하나님의 지시와 무관하게 출발하는 태도입니다. 원래 선악과 나무는 생명나무와 같이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합니다. 훼손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모습으로 신과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쪽에서 이런 분노의 하나님상을 거절합니다. 이는 마치 주변의 사람들 중, 자신이 보기에 분노할 만한 이웃은 재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드리는 일과 같은 겁니다.

참된 하나님의 일은 우리 자신을 공격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은 나를 지켜주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평생에 걸쳐 영문도 모르는 채 악마로부터 농락당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마치 사람을 15년 동안 가두어두고 군만두만 15동안 먹이던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냐 너!”하면서 분노해야 마땅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인생을 나이별로 살아오면서 “너 자신만 잘 챙기면 만사 잘 된거야!”라고 거짓말로 현혹해 온 그 악마의 거짓말을 발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잊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거지사는 다 잊었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다음의 말씀을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6-29)

즉 이 땅에서 태어났다면 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습니다. 왜냐하면 ‘잉태치 못한 데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새로이 잉태된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안에서만 태어난 자들 뿐입니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눈에 관찰이 되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성격으로 뭉쳐진 보편적 죽음으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죽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죽음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그대로 다 받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이 참으로 합당함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을 정리해서 하나님마저 다루고 싶어했습니다.

즉 부족하게 못된 죄인을 질적으로 거룩이 더 짙어지는 그런 사람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지양(止揚)이란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 무엇무엇을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본심, 즉 모든 태어난 자는 다 저주하시는 그 본심에 이르기 위해 저주받고자 노력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나 니느웨는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갑니다. 즉 약속의 땅에서 살 자격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그동안 약속의 땅에서 살아온 겁니다. 마땅히 저주는 인간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천국은 아들만 들어갑니다. 즉 아들의 영을 받아 아들이 된 자만 갑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저주받아 죄인된 자는 하나의 그릇으로 그 안에 ‘예수님의 영’으로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의 바탕 위에서만 사랑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하림

2강-나훔 1장 2-5절(아들만 사랑)2208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1장 2-5절까지입니다.

나훔 1:2-5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질내심을 그대로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투기하며 보복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투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보복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3절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죄인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을 독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야 참,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죄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럼 사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가. 굉장히 궁금하실 거예요.

그 사랑의 대상은 이미 창세 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만 사랑하고 아들이 아닌 자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만 사랑하는가. 그 아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 본성을 최종적으로 다 드러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그걸로 끝이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보여주세요.’ 하지 마라.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을 너희들이 보아라.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께 집중되었는데 인간은 나한테 집중해달라고 무리수를 띄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건 용납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이유가 굉장히 공정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하셨거든요. 사랑 안할 수가 없죠.

그런데 인간은, 아담은? 아담이 아담다운 지정된 모습, 지정된 위치를 하나님께서 정해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거기에 두셨는데 조건부로 두셨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부추겼죠. “네가 그 조건에 매여 있는 한 너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없다. 너도 하나님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그 조건을 철회시켜라. 무효화시켜라.” 악마가 자꾸 부추기죠.

그 무효화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신이 되는 것은 선악의 지식을 확보한 그 존재만 신이 될 수 있기에’ 이건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선악을 아는 자가 곧 신이 되기에’ 이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도 선악지식을 알아요. 그런데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속인 거예요. 악마는 거짓말하는 영인데 그 거짓말의 방향이 뭐냐 하면 ‘네가 신이 될 수 있다’를 미끼로 그러한 목표를 제시하면서 속여버려요. 네가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부로 사랑하신 거예요. 선악지식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너는 내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 말씀은 뭐냐 하면, 만약에 선악의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기 조건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차 없는 저주와 심판을 인간에게 퍼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고 결과죠. 여기 뭐 아무 문제될 게 없어요.

악마는 인간보고 너 자신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인간보고 선악지식을 따먹지 말라는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고.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요.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 나무를 일종에 훔친 셈이죠. 따먹지 말라 했는데 그걸 따먹었고 그걸 따먹고 난 뒤부터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조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는 그 시선이 있고 관심이 있거든요, 그런데 선악과를 인간이 탈취해서 자기가 따먹었으니까 이제는 인간이 에덴동산 안에 있는 선악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선악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선악과의 위치가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알아야 되고 다른 존재는 몰라야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 추방된 인간이 원래 있어야 될 선악지식의 자리를 찾아주지 못하고 자기한테 선악체계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안에 선악체계가 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거짓된 하나님.

하나님의,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취지로부터 오는 진노와 사망, 죽음 이걸 자기가 자체적으로 가진 선악지식으로 방비하고 반발하고 그걸 수비하고 변명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으면 내가 죽는다 했지?”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분노는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양(止揚)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지양이라 하는 것은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무엇을 하지 않는 것, 무엇무엇을 절제해서 그만 두는 것, 이걸 지양이라 합니다.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걸 지양이라 하거든요. 사람들이 뭔가 지양할 때는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서 먹고싶은 것도 참고 하고싶은 것도 참아서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야겠지, 이게 뭐냐 하면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지양이에요, 지양.

그런데 하나님의 분노를 지양하는 사람 봤습니까? 하나님께 저주받는 그 높은 단계를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자, 하는 사람 봤어요? 없죠. 그러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어요. 왜? 이미 선악과를 탈취했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께서 진노와 징벌을 내리면 도망치기 바빠요.

선악과 지식을 갖고 그것 가지고 ‘나도 하나님이 아는 지식을 얻었으니 이젠 그 지식으로 내가 하나님을 한번 찾아가봐야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내가 발견해야지.’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신(神)이 되기 위해서 지양하죠.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해서 하지, 내가 하나님께 지독한 벌을 받기 위해서 ‘좀더 내가 노력하면 저주받을 수 있어. 조금만 더 참아야 해. 조금만 노력하면 내가 저주받아.’ 이런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담아서 이 땅에 보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담아서. 다시 말씀드려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어나는 일을 모르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은 바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지양점입니다.

아버지의 본뜻을 그대로 담아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것.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 버림받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거예요.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고 어느 인간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렇게 저주받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오직 예수님만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나 부처도 알라, 마호메트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은 그 선악지식을 가지고 자기를 치료하려고 나섭니다. 인간이 원래 선악과를 제자리에 갖다놔야 돼요, 에덴동산 안으로. 그런데 지금 에덴동산은 들어가려고 해도 못 들어가요. 두루 도는 화염검이 차단해서 못 들어갑니다. “에덴동산 밖에서 그냥 저주받아 죽어!”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죄인을 용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분노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보복과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내는 세월이에요. 그게 인생이에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저주받고 살다가 지옥가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의 입장에서는 맞아요, 그게. 우리 입장 자꾸 고려해 달라 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투기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거든요.

이것이 출애굽기에 십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20장 5절에 보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인간은 모르고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시고. 하나님이 분노할 이유를 현재 인간이 품고 있는 거예요, 분노할 만한 이유를.

그런데 인간은 당최 본인을 몰라요. 내가 왜 인생을 힘들게 살아야 되는지, 내가 왜 고생해야 되는지. 심지어 중고등학생들도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요. 늘 때 되면 시험치고. 시험칠 때 얼마나 고생합니까. 어떤 애는 너무 고생해서 코피 막 터지고 그래요. 코피 팍 터지고. 그런데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해요. 생각의 출발점을 자기부터 갖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기가 분노할 만한 이웃이라 하면 거절해버리고 자기가 마음에 든다 싶으면 이웃으로 받아들여요. 그래놓고 자기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온갖 선악적인 아이디어를 다 동원시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참 근사해보이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는 모르고, ‘잘하면 되잖아요.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요.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타협안을 쉬지 않고 계속 내놓습니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은 개과천선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나를 공격하면 그게 주의 일이고요. 나를 지켜주면 그게 바로 사람의 일, 마귀의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은 아닙니다, 구약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차원에서 투기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인지를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역사 속에서 가르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을 주께서 허락하시고 그 허락된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스스로 무너지게 하시는지를 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성전. 이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같이 교제하는 장소거든요. 교제하는 장소. 그럼 사람들이 보고 ‘아, 선악과 따먹은 그 진노를 거두시고 이제는 ‘그래, 선악과 따먹을 수도 있지. 내가 봐줄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한테는 많은 배려와 용서를 해주어서 이 성전이 있다. 다른 민족은 저주받지만 성전이 있는 우리 이스라엘은 이제 사랑의 대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가. 성전이 있는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선악체제, 자기 안에 있지 말아야 될 선악과 지식이,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될 선악지식이 자기 안에 있다는 이 자체가 화근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너무나도 몰랐던 거예요. 모르고, 그냥 대충 땜질하듯이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 질끈 감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이건 하나님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다가왔다고 솔로몬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한 거예요. 그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네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내가 용서해줄게. 전쟁에 지거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이기게 해줄게. 네가 병들었거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병 낫게 해줄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확정지어졌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은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들이 성전을 지을 때 성전의 관점에서 자기를 본다는 생각을 못하고 우리에게 성전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 거예요. 마치 신약시대에 저주받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를 바라본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못하고, 내가 십자가 가졌으니 이제 용서받고 천국갈 일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그 오해와 똑같은 오해입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은 갖고 손해되는 것은 버리겠다, 이것이 나부터 출발하는 인식의 모든 스타트점이에요. 생각의 시작점이에요, 이게.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할만한 요소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인간들은 하질 못해요.

“선악을 알았으니까 잘해볼게요.” 이렇게 하지, “선악을 아는 자체가 너는 이미 글렀어. 너는 이미 저주야.”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악과 따먹은 걸로 뒤끝 있을 줄은 몰랐죠. 하나님은 한결같거든요. 한결같아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냥 쉬쉬 넘어가는 줄 알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줘놓고 이 성전이 스스로 불타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성전을 부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부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직도 이스라엘은 자기가 여호와 제대로 섬기고 시키는 대로 제사 드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던 거예요. 마치 오늘날 교회가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별 이상이 없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강물 없으면 죽죠, 가뭄 들면. 바산, 비옥한 목장이 있는 곳이에요. 시리아 근처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데 아주 비옥한 목장지대입니다. 그다음에 갈멜은 지중해 근처 갈멜산. 거기에는 아주 알이 굵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레바논, 지금의 레바논이죠. 거기에는 백향목, 질이 좋은 목재감들이 많이 나와서 수출을 많이 하는 곳.

다시 말해서 이 바산과 갈멜, 레바논은 약속의 땅에 있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살만한 땅을 주셨다.’ 이렇게 생각했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근원적으로 네가 저주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살게 해놓고 추방시키는 그런 전략으로 임시적으로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신 겁니다.

약속의 땅에 살 위인은 원래 인간 중에 단 한명도 없다. 조건 맞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다. 이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확인시켜주고 그 본대를 보여주는 거예요. 진짜, 진짜 내 마음은 너희들이 살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건방지게 이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잠시나마 살았다. 이제는 내 뜻의 그 본심과 너희들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날 때가 올 것이다. 그게 바로 은혜다. 그게 너희들이 알아야 될 은혜다. 그게 은혜에요.

쫓겨나는 게 은혜이고 아, 내가 시건방지게 ‘이 동네에서 살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모르고 오해해서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던가. 내 이익만 생각했던가. 그 교만과 건방짐, 그것이 내 분수를 모르는 짓이었습니다.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전을 불타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성전, 다시 성전을 고대하고 있어요. 성전만 온다면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는데. 성전이 불타버렸으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이 있어야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어떤 전쟁이나 가뭄이 있더라도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풍년이 되니까, 문제는 그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즐겁게 교제하겠다고 주신 성전만 있으면 되니까,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께 잘 보여가지고 성전을 지을까. 성전을 다시 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그 성전 다시 지어주세요. 그 성전의 때가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에스라, 느헤미야 있습니다, 성경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성전을 중건하고 증축하고 수립, 보선(補繕)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요. 그들은, 성전이 있을 그때가 좋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주실 수만 있다면 포로된 데에서 다시 70년 만에 돌아갈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성전부터 지어드려서 증축하겠습니다. 그들은 그걸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을 증축하고 약속의 땅에 다시 어설프게 초라하게 지을 때에 그 모습이 옛날 솔로몬의 영광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어놓고도 울었어요. 하도 어설퍼서. 이거 아닌데. 이 성전 아닌데......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성전을 바사 나라에 고레스 2년과 3년, 그리고 다리오 왕 6년 때 이방민족의 군주들이 협찬한 그 재료들, 그들이 도와줬던 자금, 그런 것들이 동원된 성전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지어준 성전이 아니에요.

그럼 뭐 그 성전, 하나님이 지었든 이방민족이 지었든 어쨌든 하나님께서 짓게 하시면 되는 게 아니냐. 하나님께서 어설픈 성전을 짓게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너희들 성전이 무너진 것이 하나님 탓이 아니고 너희들이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잘못 생각한 그것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내주면서 성전 짓는 것과 더불어서 그들에게 율법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우리가 이방나라하고 다른 특별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내서 율법을 다시 가르치고 그걸 지키게 했는데 결말은 실패였습니다. 그 성전 또 불타버렸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은 같은 인간, 같은 아담의 자손들이 어떠한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스가랴에서는 사람 손으로 지어진 성전은 사람 손이 들어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네가 지은 성전에 내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전이든 불태워버리고 진노하고 분노를 그대로 옴팍 다 받아내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에스라, 느헤미야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이 짓는 게 아니에요. 인간들이 성전을 고대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인간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성전은 없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위인도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선악과가 원래 있어야 될 에덴동산에 있지 않고 에덴동산 바깥에 선악과가 있는 이상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그것 때문에 오직 저주의 분노의 불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이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지켜보려고 갖가지 노력을 하고 종교든 뭐든 이렇게 해보는데 그 인간들이 하는 시도, 그것은 그냥 있는 동물이나 짐승이나 식물보다 더 못해요. 책상과 나무는 그 자체로 무엇을 향하지 않습니다.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향성(指向性)이 없다고 하는데 책상과 돌멩이는 있는 그대로에요.

그런데 인간만큼은 유난히 말이 많아요. 뭔가 자꾸 지향하고 있어요. 그것은 그 안에 괴물이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인간 속에 모조리 저주받을 괴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괴물, 악마죠. 악마의 뜻이 들어서 항상 악마는 인간에게 뭐라고 농락했느냐 하면 “너 자신만 챙기면 만사 O.K.다.” 그런 거짓말을 계속 하게 만들어서 인간들이 거기에 설득당해서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요. 그래, 나만 챙기면 돼. 우크라이나 전쟁이고 뭐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챙기면 돼.

그러나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 선악과 누가 가져갔느냐?” 이 문제에요. “내 에덴동산에 있어야 될 선악과를 왜 훼손했느냐” 이 문제를 주께서는 따집니다. 인간은 악마한테 사주 받아서 “나만 행복하면 되지.” 이거죠. 사고가 맞을 리가 없습니다. 의견이 통일될 리가 없어요. 나만 챙기면 되겠다고 교회 와서 중보기도하고 백날 기도해봤자 그건 아니죠.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뜻, 그 진노하심의 차원을 제가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그 높은 차원까지 이끌어주시옵소서. 제대로 진노 받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려고 교회 나온 사람 봤습니까? 없죠.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안에 있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종교 특히 기독교라는 걸, 특히 교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어떤 식으로 만드냐. 로마네스크 시대가 있어요. 건축구조로 시대를 나눈다면 로마네스크, 그다음에 궁륭(Vault) 천정, 그다음 시절인 13세기, 14세기쯤 들어가면 고딕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중간에 있는 궁륭 천정이 뭐냐 하면 인간 생활 자체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천정이 늑골처럼 위에 허공을 많이 둔 건물을 지었어요. 허공을 많이 둔 건물. 대구의 성당들 있잖아요. 계산성당, 가보셨어요? 계산성당이라든지 명동성당. 궁륭 천정에서 발달된 고딕체 건물입니다. 그 빈 공간을 두는 거예요. 난방이나 모든 면에서 비능률적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허공에서 하나님과 조우, 신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친히 마련해서 하나님을 자기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 관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성스러움을 관리하려는 겁니다. 신을 다루려고 하는 거예요. 예술도 그렇고요. 그 궁륭 천정, 비어있는 공간을 제일 먼저 채운 것이 음악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채운 것이 회화, 그림이었어요. 모자이크. 성스러움으로 공간을 채운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이 정도로 사랑하고 우리가 성의를 보인다는 것을 같은 괴물끼리 감동받게 하는 거예요. 악마와 악마끼리 감동을 받아서 신이 주는 카타르시스, 성스러운 희열, 피에타 그것을 만끽하는, 그걸 제조해내는 공장 같은 것을 성당으로 만드는 겁니다. 뭐 깜빡 속은 거죠.

어떤 영화에 보면 남자가 이유도 없이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사람이 나와요. <올드보이>라는 영화에. “누구냐, 너!” 누구야, 너. 뭔데 나한테 군만두만 먹이느냐. 정말 우리가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지 않고 저주만 내리시고 심판만 내리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마귀를 보고 따져야 돼요. 평생 나만 행복하고 건강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만사 오케이라는 그 거짓말로 나를 농락한, 여러분 년수대로 70이면 70, 40이면 40, 여기는 30대잖아요, 30년 동안 나를 농락한 너. 누구냐, 너! 선악과 제쳐버리고 나를 가짜로 위로해주는 너, 누구야?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예수 믿는 걸 위로가 되도록 배후에서 조치한 너, 악마지?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렇게 조치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모든 잉태된 자에게 분노한다.” 이게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모든 잉태된 자에게 분노한다. 그럼 천국은 누가 갑니까? 잉태치 못한 자가 가게 되어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거든요. 뭐 그런 말씀이 다 있냐고 하지 마시고요. 4장 27절에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달리 이야기하면, 육으로 잉태된 그 육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게 된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내 육체를 만드신 분이 나를 저주해서 육신으로 태어난 자를 무효로, 저주로 돌리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라 이 말입니다. 이왕 잉태된 것 어쩌란 말입니까. 죽어야죠.

이번에 가야산 수련회 에스겔하면서 제가 이야기했는데 참석한 사람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너 죽음, 나 죽음 골라 골라가지고 보편적 죽음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심판받아 죽는 것만이 죽음이에요.

운이 다해서 죽는 것, 몸이 아파 죽는 것, 세월이 흘러서 늙어 허약해서 죽는 것, 그게 아니라 심판 받아 죽는 게 진짜 죽음인데 그 심판이 뭐냐.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된 자만이 제대로 죽음을 알아요. 이렇게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라는 그 죽음에 참여된 자가 그게 바로 잉태된 육신에서 나오는 나의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고, 잉태되지 않은 그러한 데서 오는 하나님의 새로운 노선 계약, 언약.

그렇게 해서 두 개의 계약이 있는 겁니다. 하나는 육신으로 온 것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어있고, 율법과 상관없이 오는 라인, 언약은 그 자체가 생명이다. 그렇게 돼요. 이걸 방금 제가 설명했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다시 얘기하면 모든 잉태된 자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거예요. 잉태된 것에 대해서. 잉태된 자가 육신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선악과를 원래 있는 위치에 두지 않고 그것이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잉태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 등장하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십자가에 보면 잉태된 육신을 가진 자는 예수님이라도 예외 없이 죽는다. 그것도 버림받아 죽는다. 그것도 저주받아 죽는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잉태된 것은 죽이고 육적으로 잉태되지 않는 새로운 백성이 거기서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개시가 되는 겁니다. 개시가 된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분의 활동성이 바로 성령이고요.

그래서 지난 주일 낮 설교에 제가 언급한 것이 고린도후서 4장 7절인데, 저는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 말씀을 주일날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마음에 새기고 있는 줄 알았어요. 벌써 운 떼는 게 수상하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러니까 우리는 빈 그릇이고 예수님의 마음 또는 예수님 자신을 그냥 담으면 되잖아요. 우리는 빈 그릇이니까 보배만 담기면 돼요.

그런데 십자가마을 3년 만에 만났다고 만나서 막 반갑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하는 주제가 누구 씹는 거예요. 그만 본색이 드러나버렸어요. 누구 씹고 누구 힐난하는 그것, 그게 터져나와버린 거예요.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끼리고 뭐고 우리끼리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그냥 빈 그릇으로 있고 이 저주스러운 빈 그릇에 주님의 십자가라는 그 보배, 진주, 다이아몬드, 그 남보석, 그 귀한 보석이 담겼다면 그것만 나와야죠. 적어도 수련회 왔다면... 돈 들여서 왔다면... 물론 물가가 비싸져서 제 값들은 아니지만 어째든 간에 기름값 들여왔다면 보배 이야기해야죠, 보배. 왜냐하면 저쪽 그릇과 내 그릇이 둘다 저주의 대상이에요. 뭘 비교합니까? 비교할 게 뭐가 있어요. 둘다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인데 뭘 내세울 게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얼마나 함축적입니까. 하나님께서 “너 누구고?” “인간입니다.” “죽어라.” 이게 얼마나 함축적이에요. “너 언제 잉태됐나?” “천구백오십 몇 년도에 잉태됐습니다.” “죽어라. 너 저주받아 죽어라.” 잉태된 것은 다 저주의 대상이에요. 하나님이 일관성 있잖아요. 하나님의 성질이에요. 깔끔합니다. 봐주는 것 없습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의기투합한다? 그건 말도 안 되죠.

사람과 사람이 비교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제가 아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82살 먹은 할아버지가 버스에 타서 딱 앉아있으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와가지고 막 나무라는 거예요.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 어른 있는데 앉아 있느냐. 그래서 82세 된 그분이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보니까 막 호통 친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요. 그런데 82세 노인네는 피부가 매끈했어요. 우리 장인어른 이야기입니다. 장인어른이 그 일을 겪고 집에 와서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세상에 82살 먹어도 아직도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이 나보고 젊다고 하니까 기분 좋은 거예요. 호통을 당해도 그렇게 기분 좋은 호통이 없었던 거예요, 지금껏.

“너, 저주받았어!” 이게 얼마나 기분 좋은 호통입니까. 기분 좋은 저주에요. 내 안에 내 것을 담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내 것을. 그러면 남하고 시합하고 경쟁하고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지 몰라요. 그저 주님의 십자가, 우리대신 버림받은 십자가가 나를 그릇으로 사용해서 우리는 잉태됐다는 이유 때문에 버림받았는데 안에 계신 새로운 언약, 주님의 생명이 담겼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아들에게만 주어지지, 아들 외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오는데 모든 사람, 민족들을 모으되 양은 양대로 모으고 염소는 염소대로 구분한다, 이게 얼마나 저주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뭐 나만 잘되면 오케이지. 아니에요! 그거 생각하지 말고 저주받은 상황에서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공부를 못했습니까, 인물이 나빴습니까. 기준은 뭐냐?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용서받지 못할 너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예수님 자체가 보석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됐잖아요. 아까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수명이 계속 지연되는 것은 예수님 증거하라고 그런 거예요. 우리 인생 나만 잘 되면 오케이지. 그렇게 나 즐기기 위해서 인생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만 사랑하시고 그 외에는 냉철하게 내치시는 우리 주님. 그 주님의 양보 없는 조치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젠 내 생각 말고 주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영적 안목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