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 1:3-7 / 거짓 교훈(저주의 자율성)

정인순 2022. 7. 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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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3-7  거짓 교훈

 

이근호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귀한 존재로 탈바꾸기 위해 필요한 교훈과 진리를 찾아해매게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해 들어야 될 좋은 가르침을 흔쾌히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건강 비법과 과학적 성과 같은 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이끌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여전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되지를 못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 출생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생이 된 이후에 알게 되는 것들은 이미 출생해버린 본인들의 욕망이 관여하여서 왜곡된 판단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 하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인간들의 여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철저히 일관성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게 된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는 소용없습니다. 다 자기 변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에 아부하고 협조하려는 지식들만 잔뜩 끌어담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식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안목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봐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부인케하는 하는 교훈입니다. 반면에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지혜에 근거해서 아이디어를 내어놓기에 거기에는 역사가 펼쳐져 있고 그 역사를 신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 발전의 역사’, ‘인간 사회에 관한 통치방식의 역사’, ‘신학의 역사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지혜들은 창세 전의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내막을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내막은 모든 인간보다 먼저 계신 하늘에서 오신 분의 활동으로만 알려집니다. ( 3:31-32)


저주의 자율성 


2022년 7월 24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1:3-7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1: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에베소에 와 있는 디모데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보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아닌 다른 명령이 교회 내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진위는 사도의 편지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는 ‘사랑’을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붙잡고자 하는 신화와 족보는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의미는 교회라는 삶의 환경 속에서는 언제든지 드러납니다. 망가지고 문제성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들추어내면서 사랑의 의미는 보다 뚜렷해집니다. 왜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에 매달릴까요 ? 그것은 자기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나를 천국으로 제대로 밀어넣고 싶어서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허무한 존재이고 싶지 않는 겁니다. 족보(역사)는 이 허무성을 커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를 구성합니다. 특히 족보라는 것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혈육적 관계가 기본 바탕이 됩니다. 확실성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라고 여깁니다.

사람들이 풍경화를 볼 때는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공중에 한가로운 새들을 보면서 자신도 늘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새들과 라이벌 의식을 갖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물화를 대하게 되면 왠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부담감을 갖습니다. 어떤 흠이라도 굳이 찾아내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망가진 어떤 무리를 제시합니다. 복음에 대비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망가진 자들이 하는 행세를 지금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바입니다. 왜 족보에 대한 탐닉이 문제되는 걸까요? 그것은 족보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족보들은 구원받은 인간들의 자신의 행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이 얼마나 인간들의 생각과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인간들의 정신 발달은 곧 자율성의 발달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과 손절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감한 자율성 발휘’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왜 가룟유다가 자살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27:5에서,“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곧 ‘스스로’가 자율성입니다. 하지만 가룟유다가 자살하기 이전부터 어릴적부터 그는 그의 자율성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자율성 발휘로 인하여 그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요? 사도행전 1:18-20에 보면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가룟유다가 아무리 자율성을 발휘해도 그의 자리는 말씀 안, 예언 안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말씀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 안에서 인간의 자율적으로 조성된 족보는 결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혼돈스러운 자연 속에 살면서 나름대로 질서를 찾아내어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생물 분류체계’입니다. 일종의 보편적 족보의 내용인 셈입니다. 생물계가 진화하면서 뿜어내는 그 다양함을 체계 잡은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이지요? 자신을 위해서이지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내용이 나옵니까? 결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개체(Individual)→종(Species)→속(Genus)→과(Family)→목(Order)→강(Class)→문(Division)→계(Kingdom)→역(Domain) 순서로 정리되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현 모습(형상)을 확실하게 정립해서 보다 안정적인 진리를 확보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 목숨이 자기 손에 달려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 분류체계 속에서 집어넣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게 되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말씀의 세계는 죽음보다 심판 취지가 더 기본이고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족보를 준비해두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을 개입시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의 족보가 그러합니다. 이 거룩한 계보에 들지 않는 경우도 함께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예가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롯의 가족이 나옵니다. 나름대로 족보를 만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엉뚱하게 만들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집니다. 복스럽던 도성이 온통 저주로 가득했습니다.

단순히 성 문제 때문에 이 도성이 하늘의 불심판 받는 게 아닙니다. 롯의 처가 제대로 알려줍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한 죄’입니다. 즉 자신의 지난 과거를 버리지 못한 죄가 하늘의 저주를 받는 죄가 되는 겁니다. 롯의 처는 뒤돌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7:32에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가진 시간은 전체 시간의 기능과 위치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은 아침과 저녁이 되면 거대한 둥근 태양이 됩니다. 즉 시작과 끝에 태양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이 시작과 끝을 둥글게 말아서 이어보세요. 그러면 그 공간이 생깁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공간이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는,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족보에서 ‘여자의 후손’의 노선으로 빼내기 위해 여성을 개입시킨 족보입니다. 즉 남성의 갈빗대로 만들어져 남성의 일부였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죄에서 벗어나듯이 갈빗대가 탈구되어 독자적인 족보가 되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 형상이 만든 공간이 사랑의 공간입니다. 죄사함의 공간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나 결정권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저 무중력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정리된 종말 이후의 사랑의 내용만이 성도의 대화에 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강-디모데전서 1장 3-7절(저주의 자율성)2207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3-7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3-7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것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냐? 에베소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 되었는가? 그것은 사도가 전하는 명령, 예수님의 명령과 다른 명령들이 그 교회에 유포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은 사도의 말은 이상스럽게 와 닿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유통되는 이야기가 자기 마음에 와 닿아서 그걸로 인하여 교회가 가야 될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천국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던 그 증거가 뭐냐? 그게 바로 신화와 족보에 대해서 지대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화와 족보, 이게 뭐냐 하면 이걸 오늘날 말로 바꾸면 역사라는 겁니다.

전통과 역사, 신화라는 것은 인간 자신이 행한 업적을 영웅시 해서 추상적으로 온갖 초월적인 것을 다 붓는 것이 신화고요, 그 신화를 굳히기에 들어가는 거요, 그게 족보입니다. 그러면 왜 역사도 중요한데 왜 사람이 족보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쓰는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 역사 그것조차도 나하고 일치되는 관련성이 없기때문에 이걸 족보화시키는 겁니다. 족보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부모가 있을 때 자식이 있고, 그 부모는 또 부모가 있고, 그 부모는 또 부모가 있었다는 그것, 그게 일률적으로 서열 정하는 그게 족보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굳히기, 역사를 족보로 이렇게 구체화 시켜 놓게 되면 나라는 것은 처음에 신화적인 것,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과 지금의 나와 구체적으로 연결점을 갖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에 소속됨으로써, 어떤 조직에 속함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바로 족보에요. 그걸 족보라 하지만 요즘 말로 하면 그게 역사입니다. 교회의 역사, 교단의 역사, 한국의 역사, 우리 조직이나 회사의 역사, 우리 가정의 역사, 가정의 역사도 족보지요, 뭐 그 역사를 그 안에 붙잡고 있음으로써 내가 남한테 내세울 게 있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이 무엇과 대치가 되느냐 하면, 어떤 조직이나 기관의 역사와 또 가정의 족보와 대치되는 그 내용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걸 사랑이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이라는 것은 반대쪽에 복음이 아닌 것을 이렇게 들춰내는 기능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역사 또는 신화 또는 족보라는 겁니다. 국가에 대해서 애착을 갖는 것, 그것은 바로 족보에 대해서 애착을 갖고 역사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애착을 갖는 것과 똑같은 말이에요.

왜 우리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애착을 갖느냐? 그것은 거기에 소속되는 것이 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내 불안 심리를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느 단체, 어느 기관에 속함으로써 나는 누가 뭐래도 천국 갈 걸, 라는 그런 노림수가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렇다면 그 족보가 문제가 되고, 역사가 문제가 되고, 신화가 문제 된다면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왜 족보가 나와 있고, 역대상에, 그리고 창세기 10장 11장에 족보가 죽 나열되어 있고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되어 있는데 그것은 복음 아니냐? 그것도 인간적인 자기가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너무나 나 위주로, 내 구원 위주로 성경을 보니까 그런 오류가 발생 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 족보 같은 것, 그리고 창세기 이야기는 거기서 뭐냐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나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렇게 했어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모든 성경은 아버지와 예수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유일한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나다, 그 이야기 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인간들의 족보와 신화를 아주 발로 차 버리지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 그것은 주님의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서 재해석 되어야 하고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이라고 하고 언약이라고 해요. 그 언약에 의해서 언약을 증거 하는 족보하고, ‘나 잘났다. 나는 여기 정당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 증명하려고 하는 가정의 또는 조직의 그런 교회 족보, 역사 어떻게 그것과 견줍니까? 그것은 잘못된 거지요.

그래서 친절하게도요,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주장하는 그 혈육적인 서열, 족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족보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탈락을, 그들은 족보에서 어떤 탈락을 맞이했는가를 친절하게도 보여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사실은 상당히, 하나님 입장에서 굉장히 친절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나와요. 어떤 사람들. 3절에,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어떤 사람들이 에베소교회에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집착을 하는데 이것은 4절에 의하면,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이어짐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친절하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경륜이 뭐며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 뜻에 반대하는 인간의 신화와 족보가 무엇이며 이 둘 다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줘 오셨다는 겁니다. 지금껏.

성경을 우리가 보면서 ‘성경은 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지.’ 자꾸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시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래요. 성경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성경을, 성경을 봐야 알아요, 성경을 봐야.

왜 우리는 성경을 안 보려 합니까? 지적받는 것을 싫어해서 그래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비천하게 이 땅에, 그야말로 거지꼴이지요, 비천하게 오신 이유가 뭐냐? 인간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자처해서 듣고 싶은 거예요. “꼴에 우리보고 어디서 지적질이고, 충고질이고, 조언이야?”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듣기 위해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지만 모든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점잖은 척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자율적이냐, 이 말입니다, 얼마나 자율적이냐.

여러분이 그림을 볼 때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풍경화, 여러분이 풍경화 보세요. 풍경화 보게 되면 어떤 거부감이 나타납니까? 안 나타나요. 풍경화, 어떤 문제점 없습니다. 새들이 하늘을 날고, 녹색 우거짐이 있고, 바다에 갈매기 있고, 심지어 이발소에 있는 이발소 그림도요 사람을 서늘하게 기쁘게 해요. 풍경화, 우리에게 아무 부담을 안 줍니다.

그런데 인물화, 아, 인물화는 우리한테 시비 거는 것 같아요. ‘꼬라지는 왜 저렇게 생겼어? 저 모델은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야?’ 우리한테 신경을 많이 쓰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풍경화를 준 게 아니에요. 새들처럼 마음껏 창공을 나르는 모습으로 기분 좋게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망가진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망가진 인물 예수님,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 보기에 망가진 모습으로 오셨거든요. “니나 잘하세요!” 하는 그 사람들의 평을 자처해서 들었습니다. “자기는 꼴에 맥없이 힘없이 죽어가면서, 심지어 제자들에게 배신당하면서 뭐 그리 잘났다고 아직도 진리를 논하느냐?”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부담을 잔뜩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한 거예요. 어떤 인물, 망가진 인물을 줌으로써 진리라 하는 것은 망가지지 아니하면 진리 쪽이 막히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망가지고 다치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와 통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선글라스를 낀다면 선글라스 낀 사람은 자신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꼈지만 보는 사람은 그 눈 부위가 더 신경 쓰여요. 저게 나를 꼴아보는지, 싫어하는지, 좋다는 표시인지, 안 그러면 날 보는 척하면서 다른 옆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신경을 더 세배 네 배 쓰게 만들어요.

눈 부위 거기에 손실이 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실 간 주님을,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손실이 간 멀쩡하지 않으신 분을 보내신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진리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요. 단절된 상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멀쩡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멀쩡한 것, 나는 문제 없기를 바라거든요. 그런데 그 문제 없는 것이 그게 문제에요. 사람이 족보를 집착하는 것은 자기의 허무함을 커버하기 위해서, 보다 확실한 것을 붙잡기 위해서 족보를 만들고 그 족보에다 자기 이름을 실어버립니다.

이것은 고독하지 않으려고 하는 몸부림이에요. 내가 홀로 외롭게 살고 싶지 않은 겁니다. 더불어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족보거든요. 그래서 제가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운 하나님이 직접 만든 이 창조는 그렇게 어수선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이성을 동원해서 질시를 잡아요. 거기서 물리적 법칙, 생물적 법칙을 뽑아냅니다. 일종의 신화 같은 모호한 것들을, 추상적인 것들을 체계를 잡아서 그 체계 안에 머물면 나의 삶은 어떤 안정적인 안정권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노력들이.

원래 자연은 혼돈인데 혼돈이 아니고 안정적인 질서를 인간은 원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 이게 바로 문제 있는 거예요. 그게 문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 땅에 주님, 하나님과 연관 되어 있는 하나님의 패밀리, 가족이 이 땅에 왔을 때에 나의 안정성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 결국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귀가 있어도 못 알아듣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거예요.

주님은 망가져도 인생이 너무 망가졌어요. 내가 가장 되기 싫은 인생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막 거부하고 싶은 겁니다. ‘나는 때려죽여도 저 길 안 갈 거야.’ 막 밀어 내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네 쪽이 바로 종말이라는 거에요. 그게 바로 종말이고 심판이라는 겁니다. 이러니 성경을 봐도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생물학에 보면 인간들이 과학적으로 이미 인간 전체를 보편적으로 족보를 만들어놨어요. 이게 생물분류체계입니다. 종, 속, 과, 목, 강, 문, 계,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기억납니까? 고등학교 졸업한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지요. 생물을 종(種)으로 분류를 한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지요, 인간을.

개가 만든 줄 압니까? 송아지가 만들었어요?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이게 바퀴벌레가 만들었습니까? 인간이 자기 안정성을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서 분류를 한 거예요. 혼돈스러운 자연을 인간 자기를 위해서 자기 쪽으로 향하도록, 나는 여기 있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분류체계를 만든 겁니다.

종(種)이라는 것은 Species, 생식 가능한 무리를 말합니다. 종이라는 것은 생식 가능한 무리. 벌써 이것부터 수상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수상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종이라는 것의 결정을 누가 하는가? 개체가 했어요. individual, 이 개체가 Species, 종을 만들었어요.

종을 만들고 그래도 혼란스럽고 안정되지 못하고 마음에 안 드니까 Genus, 속(屬)을 만들었어요. 유전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모으는 것, 속. 그다음에 그래도 뭔가 드문드문 마음에 안 드니까 그다음에 과(科)를 만들었습니다. 종, 속, 과, Family, 패밀리 만들고 그다음에 목(目), Order, 영장목, Order, 그다음에 Class, 그러니까 종, 속, 과, 목, Class까지를 보통 같은 유(類)로 이렇게 취급해요.

그다음에 강(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식적으로 비슷한 것들을 분류하는 강, 그다음에 문(門)이라고 하는 Division, 척추동물, 연체동물, 절지동물,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이걸 Division이라 해요. Division보다 더 큰 단계를 Kingdom, 계(界), ‘동물이냐, 식물이냐?’

자연을 가지고 ‘동물이냐, 식물이냐?’를, 인간 네가 무슨 권리로 나눕니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이 자율성, 내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나누는 겁니다. 그 계, Kingdom보다 더 큰 걸 가지고 Domain이라 하는데 이건 뭐냐 하면, ‘원핵생물이냐, 진핵생물이냐?’ 나눌 때 이걸 Domain이라 하는데 이걸 우리말로는 역(域)이라 해요.

개체부터 시작해서 개체 종, 속, 과, 목, 강, 문, 계, 그다음에 역, 이렇게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분류 왜 이렇게 한 겁니까?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으로 뭔가 뭉칠 때 비로소 인간은 이 땅에 안정적으로 사는 게 보장받을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머리는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의 머리가 그렇게 돌아갈 때 그들은 빠트린 것이 있어요. 뭘 빠트렸느냐? 이 자연을 누가 주셨느냐를 빠트린 거예요. 여기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중에서 하나님은 어느 종에 속하지요? 속하지 않지요. 인간들은 아무 근거 자체가 없어요. 아무런 근거 없이 하나님과 손절하고요, 그 손절한 과감한 자율성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과 상종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자율성이에요.

따로 세상에 질서를 구축하고 질서 속에 자기를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 거기에 족보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부모와 자식 간에, 그 부모와 또 부모,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어떤 족보를 만들고 그 족보가 보장된다면 나의 삶은 정당하게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우기고 그것 주장하려고 만든 거예요.

족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냥 역사를 만든 거예요. 그 역사의 끝은 뭐냐? 국가입니다. 국가는 모든 사람을, 인간 전체를 다 소유화시키고 그걸 시민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국가가. 그 국가에 속한 당, party라고 하지요, 그 당이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국가를 왜 만듭니까? 국가를 만들고 국가의 역사를 왜 만듭니까? 국가의 족보를 왜 만들어요? 그 속에 작용하는 우리의 자율성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그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도 그렇게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족보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안 나와요. 그냥 유사성이에요, 유사성. 유사성을 집합해놓고 그 유사성을 집합해봐야 거기는 형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재현만 나와요. 인간들의 자기 목소리만 나오는 겁니다.

그 하나의 예로 자식들 한 번 보세요. 여러분이 자식들 키우면서 자식들의 정신세계가 어떤 쪽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발전하는지를 한 번 보세요. 그들은 점점 더 자율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발전해요, 자율성이. 처음에는 부모 의존적이었다가 나중에는 간섭하지 말라, “엄마! 모르면 가만있어요. 엄마도 모르면서 어딜 지적질을 합니까?” 이런 식으로 자율성을 키워나가요.

그러면 그 자식들에게 부모가 할 것은 뭐냐 하면, 네가 그렇게 살아오면서 해준 햇빛, 공기, 장맛비, 이거 누가 줬는데? 그거 받을 것은 다 받아 챙겨놓고 주신 분과의 관계를 끊는 쪽으로 자율성이 구체화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을 끊어버리고 자꾸 유사성을 통해서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끼리 만나 가지고 저희끼리 한패 먹고 술 담배 같은 못된 것만 배우고 여름밤에 잠도 못 자게 오토바이 타고 밤중에 왔다 갔다 빠라빠라~ 돌아다니고.

왜 그렇게 못된 것만 자꾸 하느냐? 그 못된 것이 나쁘다, 나쁘다, 하지만 그 나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내 자율성을 보장하라, 예요. 내 자율성을 보장하라. ‘아버지는 아버지 자율성을 발휘하면서 왜 나는 간섭합니까?’ 이거라니까요. 하나님하고 관계 끊으면서도, 교회도 안 나오고 관계 끊으면서도……, 부모는 하나님 입장에 서야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다 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하고 손절하고, 하나님하고 관계 끊어버렸다? 그러면 분개를 해야됩니까, 아니면 옹호를 해야돼요? 분개를 못 할망정 옹호를 하고 있다고요. “철이 없어 그런데, 성령을 안받아서 그런데 우얍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변호하고 있어요? 누가 누구를 왜 옹호합니까? 내 족보거든요. 구체적인 나의 모습이거든요. 내 자식이거든요.

그만큼 우리는 이 족보, 역사 밖으로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교회 온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냥 기웃거리는 거지요. 여러분이 놀이동산이나 전시공간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 한계가 있어요. 놀이동산에 귀신의 집이 있고 여러 가지 재미나는 볼거리, 구경거리 있잖아요. 아쿠아리움에는 신비로운 심해의 고기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 전시관을 비싼 돈 내고 죽 한번 둘러본다고요. 죽 둘러보면요, 결국 그것은 돌아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천국 구경하려고 교회 왔는데 교회 백날 정기적으로 50년 다녀도 결국은 뭐냐 하면, 교회는 전시공간입니다. 그냥 놀이동산이에요. 그냥 둘러보고 나와요. 둘러 보고 둘러 보고 맨 그 자리에 와요. 자기 자리에.

그런데 그 자리가, 내가 있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나왔는데 죽 둘러보고 나서도 신앙생활 50년 했다, 죽 둘러보고 돌아왔는데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처음에 왔던 그 자리에요. 한 발자국도 나에 대해서 알고 빠져나간 적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놀이동산 재미나게 놀았는데 “야, 놀이동산 무섭더라.” 이렇게 “지옥, 저렇게 무섭다.” 백날 지옥이 무서워도 돌아오면 자기는 멀쩡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온 거예요. ‘구경 한번 잘했네.’ 뭐 이런 식이다, 그 말이지요.

성경에는 친절하게도 그 자리까지 이야기를 다 해줬어요. 사도행전 1장 18-20절에 보면,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게 가룟유다가 자살하고 난 뒤에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거거든요. 사도행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가룟 유다가 평생 세상을 놀이동산처럼 살고 어디서 죽었습니까? 가룟 유다가 죽은 자리가 어디에요? 그것은 바로 말씀 속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기 딴에 자율성을 발휘했어요. 그 자율성을 발휘했다는 그 대목이 마태복음 27장에 가룟 유다가 자살한 그 대목에서 나오거든요. 5절에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뭐냐 하면,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타율적이 아니고 자율적이었어요.

가룟 유다가 어릴 때부터 살아왔던, 어른이 될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왔던 그 정신의 집대성은 죽는 것도 스스로 죽는 거예요. 어떻게 죽든 간에, 늙어 죽든 어떻게 죽든, 자살하든 자살 안 하든 간에 자살하기 이전에도, 꼭 자살 아니라도 그전부터 인간은 모두 자율성, 스스로, 스스로 죽기를 재촉하는 식으로 모든 인간은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스스로가 어디 안에서 스스로냐? 말씀의 예언 안에서 스스로였습니다.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나요. 모든 말씀은, 인간은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준다 했어요. 인간이 자살하고 죽는 것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인간은 자살해야되는 거예요. 그렇게 죽었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너의 자율성이 너를 죽인다고, 너를 지옥 보낸다고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 가는 방향이 지금 지옥 쪽이라고요. 너의 자율성이 남아 있는 한. 그런데 그 반대가 오늘 본문에서 뭐냐?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사랑은 나의 결정권, 나의 자율성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무중력 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데로 살아온 게 아님을 알려주는 게 사랑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사랑의 세계는요, 나의 자율성이 먹히지 않는 공간이 사랑의 공간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아, 이것은 나쁜 짓이구나.’ 그런 평가가 사랑을 무효화시키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중얼거림이에요.

인간의 세계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바깥으로 여겼던, 아까 놀이동산의 예를 들었지만 놀이동산에서 구경삼아 인생을 살 듯이 다시 본 자리로 돌아오는데 결국 인간이 어떤 몸부림을 쳐도 그 자리는 말씀에 예언된 자리에요. 멸망하기로 된 그 예언된 자리입니다.

예언된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업적을 세우고 성과를 세워도, 우리가 외부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 그 움직임, 그 모든 변화는 ‘이것은 네가 낸 소리’라고 우리한테 되돌려줘요. “네 들을 귀는 지금 네가 한 것만 듣는 그런 한정된 귀만 달려있고 한정된 눈만 달려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벽에 부딪혀서, 주님이 벽이거든요, 벽으로 가서 다시 말씀 속으로 집어 넣어요. “너는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나. 들어가!” 네 자리로, 네 자율성의 자리로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멸망하기로 되어 있고, 죽기로 되어 있고, 지옥 가기로 되어 있고, 심판받기로 되어 있는 인간이 뭐 자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조몰락대고 꼼지락대냐 그 말이지요.

너는 네 자리로 돌아가라, 그 말입니다. “네가 기도한 그 응답, 그거 네가 응답한 거야. 내가 응답한 게 아니고 기도도 네가 한 것이고 응답도 네가 조작해 지어낸 거”예요. 응답이라는 게. 기도도 자율성이거든요.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잖아요.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을 맸지만 이건 스스로가 아니었고 그것은 스가랴 말씀의 예언대로,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그는 필히 그렇게 망해야 되었던 겁니다. 그게 남보다 좀 더 또렷하게 등장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직접 관련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갈 길을 가룟 유다가 대변해서 보여준 겁니다.

“자율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결말은 이 가룟 유다와 동일하다. 그 외에는 찾지 말라. 이 말씀 속에 갇힌 인간들아.” 우리 운명의 미래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말씀 속에 갇힌 인간 말고, 같은 인간이지만 이번에는 다른 유의 인간을 만들었지요.

다른 유의 인간, 이것은 인간이 만든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족보,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어서 이어지는 족보가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게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족보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창세기 11장과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데라하고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아버지 하나에 아들 세 명, 그렇게 등장하면서 그 가족이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다가 지금의 튀르키예,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는데 터키 지방으로 가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한테 지시를 했고 그래서 가나안땅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가라 했는데 가지를 않습니다. 왜? 가나안땅은 질서가 하나도 없어요. 그 당시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소금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저주받기 전이에요. 극도의 무질서한 동네가 소돔과 고모라뿐만 아니고 가나안 지역 전체가 다 그래요. 특히 이방인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의사가 아브라함 가족들한테는 없어요. 그만큼 이 목숨에 대해서는 누구한테도 양도나 양보 못 하겠다는 이것이 자율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됩니까?”(요 3:4)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구원받고 싶어서, 하늘나라 보고 싶어서 그런 발언 한다는 것은 지독하게 자기 목숨만큼은 포기 못 하겠다는 자기 솔직한 심정을 다 드러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뭐 하늘나라고 구원이라는 이것은 없지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지요.

인간은 자기 목숨이 자기한테 볼모가 되고 있어요. 내가 나의 볼모인데요. 그 볼모의 족쇄를 무슨 힘으로 그걸 깨트립니까? 교회 오는 것도 놀이동산 구경삼아 오는데. 결국 구원 삼아 온다는 말은 정작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내 자율성으로 만들었던 내 성과와 내가 긁어모은 나의 업적은 천하보다 소중하거든요.

사람이 누가 나보고 뭐라고 욕할까 싶어서 인간들마다 자기 뒤에 창고를 만들어놨어요. 창고에 가서 자기가 평생 살면서 괜찮게 한 것들, 역사, 족보, 신화에서 괜찮은 것들은 자기창고에 딱 넣어놓았다가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하면 후딱 창고에 저축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내가 이정도야.” 하고 늘 내놓을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천하기 싫어요. 우리는 비참하게 살기도 싫어요. 우리는 예수님이 가는 길 도 싫어요. 내가 신화적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영웅적 존재. 이것들의 전쟁터가 그 당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그 가나안 사람과는 달리 다른 요소가 있었어요.

죽은 사람은요, 외부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 죽은 자는 살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외부적인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안갑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죽지요. 그 아들 하란은 이미 갈대아우르에서 먼저 죽었고요.

그래서 아버지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야, 이게 떠나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해서 드디어 위험한 나그네 길을 드디어 갑니다. 갈 때 그 아버지가 죽어서 불쌍하게 된 조카 롯이 있었는데 그 롯이 불쌍해서 자기가 거두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목축하는 게 업이었으니까 가축들도 끌고 가나안 땅으로 서서히 조심스럽게 내려옵니다. 내려오는데 여기에 롯이 딱 걸려들었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살기 좋아 보이는 거예요. 목축지가 너무 좋아서. 그때는 심판받기 전의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자기 눈에만 보기 좋은 게 아니라 그 당시 많은 민족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살기를 열망했고요, 거기서 전부 다 서로 권세 다툼으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나안땅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 제일 살기 좋고 목 좋은, 제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거기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자율성이었어요, 자율성.

이 자율성이 극단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를 부인해서는 안 돼요. 자기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객기를 부리고 허풍을 떨더라도, 허세를 떨더라도 자기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그 좋은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거기에 무려 아홉 족속이 우글거리면서 모여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보면서 롯이 반해 버렸어요. “너 어디 갈래? 너 좌하면 나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 할게.” “나 저쪽요.” “어디?” “소돔과 고모라쪽이요.” “그래, 너 거기 가라. 내가 거기 안 갈게.”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고 난 뒤에 갖고 있던 목축업 다 팔아버렸어요. 그런 것은 돈도 안 되는 거거든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얼추 잘 사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천사가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전형적인 것, 하나님께서 샘플을 원했던 거에요. 인간은 왜 어떤 죄로 망하는가? 그 샘플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인 죄 때문에,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 성적인 죄가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멸망 당한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거예요, 자기를. 자기가 살아온 족보와 자기가 살아온 역사를 부정하지 못한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거기서 롯의 가정은 족보가 이탈됩니다. 자식이 없어요.

롯도 천사가 성 밖으로 나가라, 하는데 나가지도 않습니다. 롯이 그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간 것도요, 천사 둘이 강제로 끌어내서 나간 거예요. 강제로. 인간은 이미 자율성이 있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기대를 하고 있는 이상은 이게 타율적이지 않습니다. 강제로 천사가 끌어내 가지고 구차 없이 거기서 나왔던 겁니다. 그래도 거기서 핑계 대기를, 멀리는 못가니까 작은 성으로 가게 해달라, 나중에 그 지명이 소알, 소알까지 갔어요.

그런데 그 가계, 그 족보, 남편 롯, 롯의 처, 두 딸, 하나의 가정이 여기서 줄줄 샙니다. 흘러내려요. 하나님께서 롯의 처를 죽이는 것은 성적인 문제, 동성애 문제로 죽인 게 아니에요. 죄보다 더 상위 되는 죄, 성적인 죄보다 더 높은 죄, 그것은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지 못한 죄, 자기의 족보를 버리지 못한 죄, 자율성을 스스로 부정하지 못한 죄, 그걸 하나님께서는 불심판의 근거로 최종적으로 마지막 때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게 뭐냐? “뒤돌아보지 말라. 너의 과거를 돌아 보지 말라.” 이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은 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롯의 처를 신약에서 언급할 때 하는 거예요. “롯의 아내처럼 네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 그것은 천국 가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성과를 냈고 얼마나 업적을 냈는지, 그것 하지 말라.” 그 족보 내가 삐걱거리게 만들고 틀어지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 틀어진 족보 말고 새로운 족보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에요. 거기에는 여성이 개입됩니다. 여성의 공간성이 개입돼요. 여성으로 말미암아 족보의 직선의 시간선을 이렇게 앞뒤를 휘어지게 만들어요. 그러면 이게 공간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늘에 높이 뜬 태양을 보면 쪼그맣게 보이는 태양이 아침저녁으로는 거대하고 둥근 태양으로 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시작과 끝에 태양의 진면목이 보이잖아요.

시간을 둥글게 감아버리면 그 안에 공간이 생기고요, 그 공간은 ‘예수 안’과 ‘예수 밖’이라는 공간으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롯의 처의 족보는, 롯의 처가 뒤돌아보면서 롯의 가정은 더 이상 자식이 없습니다.

자식이 없는데 나중에 롯의 자식이 생겨요.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식이 생기는데 그 자식은 어떻게 생기는가? 딸이 엄마 역할을 해버려요. 딸이 동시에 롯의 아내 역할을, 생식적인 기능을 해버립니다. 아버지를 술 먹여서 잠재워놓고 두 딸이 번갈아 가면서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지요. 그 모압과 암몬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보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율성에서 비롯되는 족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족보가 하나님의 약속의 천국에 이어지지 못하는 족보, 그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족보에요. 육의 족보입니다. 우리 가정의 자율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족보를 만들잖아요. 인간은 조직화 될 때 안정감을 느끼거든요.

죄가 무엇이냐? 죄는 조직화예요. 국민의 힘, 민주당, 조직화입니다. 국가, 교회, 당회, 제직회, 전부 다 조직화예요. 그게 인간의 자율성의 구체화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안 나옵니다. 거기서는 사랑이 안 나와요. 사랑 안에서는 어떤 자율성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바로 롯의 처가 완전히 다 보여줬지요.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어요.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 38)

처나 자녀나 가족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이런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안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너무나 안일해요. 사랑의 대화라는 것은 딴 게 아니에요. 이미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이 종말, 종말 그 이후에, 종말 그 이후에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이란 죄 용서를 말합니다, 주님의 일방적 죄 사하심,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그 이야기가 섞여서 나올 때 그게 사랑의 대화에요.

정치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밥 먹고 정치 이야기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요, 정치 이야기를 하든 국민의 힘 이야기를 하든 간에 거기서 이런 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 이게 다 인간들의 자율성의 집합체라는 것, 이게 안타깝게,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 성과밖에 모른다는 것, 그것을 이미 남의 일로 여기면서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있지요. 마치 자기 과거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세상 모든 역사는 국가역사입니다. 여러분이 한국사 배웠지요. 거기 나오는 모든 역사는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책이 있어요. 그게 어른들이 보는 동화라는 책인데 토끼 쫓다가 낯선 굴로 빠져들어 가요. 어떤 소녀가, 엘리스라는 소녀가.

거기서부터 현재 기존의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배치되는 이야기들이, 기존 자연 세계에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서 막 벌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고양이가 웃어요. 고양이가 막 웃습니다. 고양이가 웃는 것도 희한하지만 웃던 고양이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 고양이 웃음소리가 하하하……, ㅎㅎㅎ……, 계속 남아 있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신기한 나라, 엘리스의 나라, 그 나라가 성경에서는 사랑의 나라에요. 이게 영생의 나라입니다. 이미 시작된, 시작된 하나님의 Family(과)에요. 하나님의 Class(강)고 하나님이 Kingdom(계)이고 하나님의 Division(문)이에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모든 족보는 남성의 세계거든요. 남자의 후손만 족보에 올라가요. 남자의 후손만. 여자라도 남성이 대표합니다. 여자라도 아들 위주로 족보가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교회 처음 나와서 성경을 보면서 목사님이 부탁하기를 “이제 교회 처음 나오고 학습 받았으니까 세례받기 전에 성경 마태복음 1장부터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가 시키는 대로 마태복음 1장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해놓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죽죽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해놓고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게 웬 족보? 아니 내 족보, 경주 이씨 족보 따로 있는데, 그 족보도 내가 모르는데 남의 족보까지 신경 써야 천당 가는지, 갑자기 왜 성경에 족보가 나오는지?’

그 족보에서 뭘 보느냐 하면, “에게서”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남자만 나와야 될 여기에 여자 이름이 나와요. “다말에게서” 그 “에게서”가 나오면서 남성 위주의 세계, 이 세상 남성 위주의 족보체계, 이 세상 논리에 의하면 남성이 대표가 되는 세계에서 뭔가 탈구되는, 뼈가 빠지듯이 빠져나오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잖아요. 그 갈빗대가 남자의 몸을 떠나서 따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이 모든 시간의 시작점을 여성이 보여주는 거예요. 여성이, 여자의 후손이 보여주는 겁니다. 끝도 여성의 세계에요. 남자의 자식을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남자에서 난 목숨을 나는 그걸 받아주지 않겠다.”

이유가 뭐냐? 예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어요. 남편 없이 처녀가 아들 낳으니 그 이름이 예수에요. 그것은 바로 독자적이에요. 남성의 형상과 다른, 죄가 흐르는 남성의 형상과 다른, 독자적으로 따로 하나님의 의의 형상을 따로 독립했습니다.

그래서 남성의 자율성을 갖고 있던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지요.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고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다말에게서” 그다음에 5절에 나오는 “라합에게서” 그리고 “룻에게서” 그다음에 6절에 나오는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그리고 16절에 “마리아에게서” 여기 “에게서”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남성의 세계로부터 남성의 자율성 속에 일체 포함되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성이 갖고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자유의지, 자율성을 고발하는데 그 이유가, 그 자율성으로 피해 입은 자들이거든요.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당하는 그 상처, 상처를 앞서 지니고 있었던 그 여성, 그 여성이 지옥 가는 우리의 족보를 방향 틀어서 천국으로 바꾸어준 거예요. 마리아에게서 나온 그 주님이. 따라서 엘리사의 그 이상한 나라의 특징이 뭐냐? 계속해서 남성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잘못을 우리의 육신이 남아 있는 한 계속 뽑아내는 거예요.

티슈 뽑아내듯이 매일매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뽑아주고 허물을 뽑아주는 그 즐거움이 바로 사랑 속에 있는 구원받은 자의 즐거움입니다. 우리의 자율성을 아주 개떡같이 여기면서 “네가 기도를 해? 헌금을 해? 기도를 해? 전도를 해? 선교를 해?” 뭘 해봤자 너는 네 안에 그게 너의 족보가 되었고 너의 업적이 되어버렸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주님의 주신 은혜를 덮어버리는 그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죄거든요. 우리의 자율성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자기 부인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랑이란 뭐냐? ‘주님, 원래 우리가 적이었군요. 우리가 원수였군요.’ 제가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사랑이란 원수지간이 되지 아니하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고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 우리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룟 유다처럼 너 백날 해야 말씀 안에 갇혀 있는 너를, 이 원수를, 웬수를,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써 그 남성의 족보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서 사랑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끝으로 골로새서 1장 말씀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3-15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껏, 즐겁게 뿜뿜!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안 지었다고 우기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우기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우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우리를 지옥 가게 만드는 동기였음을 이제는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한윤범

대전-주일설교 보충 20220725


어제 낮 설교에 설명이 필요한 것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어떻게 공간화 되는가? 그 문제를 후딱 넘어가버렸어요.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직선으로 생각하게 되면 어떤 점이, 어떤 오류가 있느냐 하면 지나간 것은 그냥 날아간다고 생각하고 그냥 앞에 있는 것만 계속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이럴 경우에는 인간 자신이 자기 생각이 자길 압도하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대단한 건 없다. 그런데 제가 태양을 예로 들어봤습니다. 태양이 아침에 뜰 때 엄청난 크기로 다가오고, 또 해질 때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다면 비록 그 태양이 낮에 중천에 작게 보이더라도 그건 실상이 아니고 진짜는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그러한 대상으로서의 삼킬 듯이 지구를 돌고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경우는 뭐냐? 시작과 끝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상대적으로 무엇이 우월하냐 하면 내 생각이 우월한 것처럼 돼버려요. 과거는 희미하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는 중요하다,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시간과 끝을 우리가 미리 안다면 우리는 그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이 시간과 끝의 제대로 된 모습, 태양의 진짜 모습으로 됐다면 시작과 끝을 들어서 오므려보는 거예요. 오므리면 이게 하나로 만나겠지요. 그럼 직선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둥글게 되는 겁니다. 둥글게 되면 그 둥근 장소에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지요. 시간으로 만든 공간, 제가 이것까지 이야기하고 여기서 논리를 확 뛰었습니다. 어떻게 뛰었느냐? 신약에는 이걸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기서 비약을 해버렸지요. 이걸 다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할 수가 없어요.

왜 후다닥 비약을 했는가? 인간은 가룟 유다가 자율성을 발휘해서 스스로 죽었다고 했는데, 스가랴 11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자살하는 그것을 아주 상세하게 예수님 오기 전 오백 년이란 시간의 텀을 벗어나서 가룟 유다가 어떻게 죽는지 알 수 있어요. 어떻게 지정된 장소에, 그걸 피밭이라 합니다. 피밭에 딱 죽는다는 것이 예언돼 있단 말이죠.

그러면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냐? 지나간 것이 아니고 오므라들면 똑같은 동일한 같은 공간에서 가룟 유다는 벗어난 적이 없어요. 가룟 유다가 보통 자살했다 하잖아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게 아니고 애초부터 가룟 유다는 죽은 자였지요. 그러면 그동안 자기가 자살하기 전에 스스로 살려고 애를 썼을 거예요. 스스로 살려고 애를 쓴 것이 스스로 죽는 것과 단절되지 않고 똑같은 취지 상 행위가 되는 겁니다.

결국은 자살할 걸, 결국은 스스로 죽을 걸 그동안 스스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쓴 겁니다. 특히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졌고 자신의 희망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걸 다 얻겠다고 나섰던 가룟 유다의 행동 속에서 그 본인의 자율성이 본인으로 하여금 자살로 이끈다는 사실을 꿈에서 생각 못했어요.

인간이 자기 죽을 때 어떻게 죽을지 미리 알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동그랗게 오므라든 그 말씀의 공간에서는 이미 그게 다 정해져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가룟 유다에게 너무 잔인했어요. 스가랴 11장 보겠습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스가랴 11장을 인용한 느낌도 들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기억이 안 나십니까? 토기장이 이야기에요.

11장 12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토기장이의 밭이 무슨 밭이냐? 피밭이에요. 그런데 설교의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제가 다 언급을 못했습니다만 원래 피밭의 원조가 또 따로 있어요. 나봇의 포도원이란 게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의 소유주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에요. 여호와인데 아합 왕이 그걸 탐해서 아합 왕은 소유주가 나봇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적절하게 나한테 팔라고 나왔을 때 나봇은 소유주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 판다. 그러니까 아합이 부인 이세벨과 합세해서 죽이라 이렇게 된 거예요.

나봇을 죽였을 때 피가 나올 게 아닙니까. 그것이 나봇의 피밭이 돼요. 세상이 하나님의 것에 달려들 때 달려드는 기표, 또는 사인, 기호, 인간이 하나님에 달려듦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기표가 등장해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세상에 증거를 남기게 돼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나님은 원래 안 보여요. 숨어있고.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모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노골적으로 대들 때 하나님의 증거, 기표가 등장하는 데 그게 피에요. 그 피밭에서 그 당시 인간들은 아합 왕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봇을 우리 일에 방해해서 죽였다. 그런데 그 피밭이 누구 피밭이냐? 나중에 이세벨의 피가 거기에 합류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피를 낼 정도로 대들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한테 대들었다는 것을 그걸 규격화해서 그걸 그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잖아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모든 말씀이 역량을 다 부어넣는 거예요. 그 부어넣는 공간이 말씀의 공간이고, 말씀의 시작과 끝을 돌돌 말아버리면 생기는 공간이죠. 그게 십자가 안이고. 그걸 제가 이런 논리 다 생략하고 말한 그게 뭐냐?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낸 증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은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인간이 진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증명하는 기표, 영어로 하면 그냥 sign, signature, 싸인이 피에요, 피.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말은 네가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진짜 용서하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 현장에 오란 말이죠. 그 현장에 오면 용서해줄게. 아아, 우리가 구원 받으려는 이것 때문에 연속성으로 내가 더 잘되려고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군요. 그걸 동의하게 되면 그 동의한 자체가 사인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이게 죄 사함이 되는 겁니다. 구원 받고자 하는 게 죄라는 걸 인식하면 그게 바로 죄 사함에 우리가 기표가 되는 거예요.

허무를 알고 그걸 즐기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된다. 전도서에 나오죠. 헛되고, 헛되고. 허무를 알고 그걸 즐기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이미 다 꿰뚫어본 사람이 돼요. 문제는 불교신자가 이걸 즐기지 못한다는 것. 이게 고민거리가 되는 거예요. 허무한 데 허무 안 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 자신이, 제가 주일학교 설교 때 했는가, 우리가 예수님과 쌍둥이라고 했지요. 왜? 동일한 아버지니까. 예수님을 참 아들이고 우리는 양자인데 쌍둥이가 되는 거예요. 쌍둥이가 되면 우리 육신은 우리의 그림자가 돼요. 그림자는 허무에 속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로 이미 빼돌렸어요. 선발대가 아니고 우리의 본대가 벌써 하늘나라에 가서 골로새서 3장 4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어요.

있는데 우리 그림자가 너무 길어서 꼬리가 아직 대전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허무를 만끽하고 즐길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대가 없는, 예수님의 나라에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불교신자, 중들 이런 사람들은, 여기 천주교신자, 목사들도 해당되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기 머리 부분이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구원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 되는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전력을 다하여.

돈을 잃으면 일부를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돈보다 중요한 게 친구라는 이런 노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여러분 돈 떨어지면 친구 다 떨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허무에 안 빠뜨리기 위해서 온갖 것으로 자기를 포장을 해요. 골프도 쳤다고 동양화도 했다고 탁구도 쳐봤다고 요가도 해보고.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그래봤자 마귀에 속아 넘어갈 일 없잖아요.

그림자는 밟아도 안 아파요. 그림자라고 생각 안 하고 내 모습 전부가 여기 다 들어있다고 여기는 이상은 그 사람에게는 불안하고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생기고 알 수 없는 공포가 찾아오지요. 이런 현상이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바깥에서 자기의 자율성을 그래도 꽉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자녀문제 언급했잖아요. 자식들의 정신적인 발달은 곧 자율성의 발달입니다. 자율성의 특징은 남한테 간섭받지 않으려 하고 훈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거에요. 그런데 자율성의 한계는 항상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세상을 살 때 둘러보다가 자아라는 제자리로 도달되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가 되겠어요.

둘러보는 인생, 특히 젊은 사람들이 잘하지요. 직장 때려치우고 돈 한 이천만 원 끌어 모아서 삼 년 동안 해외여행 다닌다. 둘러보는 거잖아요. 세상이 어디 놀이동산입니까? 이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인생 경험이다. 인생 경험하면 뭐합니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요. 놀이동산이라고 제가 언급한 이유가 놀이동산이 아무리 면적이 넓고 볼 게 많더라도 해질 때 되면 입구로 나와서 자기 집 아파트로 다 도로 돌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놀이동산은 벽으로 둘러쳐서 막히게 돼 있어요. 막혀있는 곳 둘러봤다 희망이 없잖아요. 그래서 놀이동산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가 어제 설교에서 언급한 세상이 있지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여기는 막힘이 없고 늘 새로워요. 놀이동산은 막혀있어요. 실컷 비싼 돈 내고 구경하고는 집에 가 저녁에 라면이나 끓여먹어야 되지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내가 예측 못한 일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내가 돌아갈 나의 자리를 용납 받지 못한다.

이게 무슨 세계다? 족보가 아니고 사랑의 나라에요. 사랑의 나라에서는 나의 결정권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무중력 상태라 했지요. 우주선 안에 무중력 상태에서 그냥 맡기면 편한데 거기서 정신 차리고 자세 잡으려하면 그게 되레 힘들어요. 내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가치 있기 위해서 애쓴 만큼 점점 사랑의 나라에서는 더 괴롭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찾아와서 네가 하는 일이 너만 괴로운 일을 하고 있다. 네가 가시 채를 맨발로 차는 것처럼 아프기는 너 혼자 아프다. 왜 쓸데없이 그런 행동하느냐고 나무라면서 찾아왔습니다. “네가 그렇게 몸부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는데 그게 다 네 고통으로 돌아갈 거야. 다 헛짓이야.” “누구십니까?‘ ”누구긴 네가 핍박하는 예수지, 누구겠어.“

그때부터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가 자신의 한계에 부딪칠 때에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했느냐? 나의 하나님이라 했어요. 이게 단절이잖아요. 하나님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나를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나를 잊어도 괜찮은 다른 영토, 다른 영역에 들어섰을 때에 거기서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 것 챙기면서 하나님 믿는 것?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그건 헛수고에요. 나로 하여금 내 뒷모습이 보이게 만드는 것, 세상 사람들처럼 헛되고 헛된 것들을 부지런히 찾으면서 그게 자아라고 우기고 거기에 승부 거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볼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봤던 그 안목이 이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강아지야, 네가 눈이 어둡구나.” 이렇게 측은하게 보는 것. 소경이 더욱더 소경되는 이런 것. 우리는 소경이 되어 어두운 밤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해도 내 집으로 되돌아오는 세상구경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하고 미국 가서 박사학위 따고 백날해도 그건 다 놀이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나의 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의 세계에 우리가 갇혀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존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시작과 끝, 시간을 가지고 오므려버리느냐?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직선으로 해서 미래의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미래는 잘 될 거야, 라고 희망을 갖기 때문에 희망 같은 건 없는 거예요. 미래로 앞으로, 앞으로 하면 나중에 동그라미 되니까. 동그라미, 수레바퀴처럼 되니까 앞으로, 앞으로 해봐야 갇힌 공간 안에, 말씀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모든 것, 악마에 목숨을 볼모잡혔지요.

우리가 마지막 남아있는 판돈은 뭐냐 하면 우리의 제일 귀한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바로 이 목숨을 내놓으라 하지요. 우리는 확실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목숨을 누가 가져가느냐? 주님께서 이 목숨을 기표라 했지요. 네 목숨은 내 피를 낳게 한 것뿐이다. 이게 피라는 기표에 같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희생하신 분이 되어서 이게 목숨의 용도인데, 우리의 목숨은 우리가 버리지도 못할 목숨을 주께서 가져가셔서 훌륭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증거로서 용도로서 잘 쓰시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을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잘 쓰시고 계신 겁니다. 허무한 것을 허무하다고 일러주면서. 그럼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지금까지 어제 설교시간에 미진한 것 보충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