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4-8 / 천국은 주의 일

정인순 2022. 7. 1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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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주의 일 

 

이근호
2022년 7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4-8

(2: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2: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2: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2: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사람은 살고 있으면서 삶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이점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 끌어들였습니다. 졸지에 그들은 애굽의 생활 자체가 애초부터 죽어 있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 광야 생활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고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살아 있다’를 하나님 관점에서 생각할 줄 몰랐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추궁하므로서 원천적인 문제점을 파악해 들어갑니다. 다같은 사람들이지만 신약 때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것과 구약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차이납니다.

이 질문 차이로 인해 구약의 이스라엘은 망하고 신약의 이스라엘은 망할래야 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말씀)을 주셨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벌(저주)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그들은 이 말씀이 취지가 인간 자체가 이미 죽음을 드러내는 용도인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살아 있는 나를 율법이 와서 더 안정적으로 풍부하면서 복되게 살게 해준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더 진행되면 될수록 지킬 율법이 늘어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쉬운 예로, 수학시험을 치면서 문제가 다섯 문제가 나왔을 때에, 학생들은 다섯 문제만 풀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다섯 문제를 다 풀었다고 여길 때, 선생님께서 그제사 다섯 문제가 더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계속 덧 보태어집니다. 왜 수학시험을 이렇게 치르도록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일단 수학시험에 임하므로서 그들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수학 능력을 더 깊숙이 측정할 필요성을 계속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의 하나님께서 율법 완수시키실 한 인물을 따로 준비해두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율법 지켜라’는 명령이 이스라엘의 다수를 거쳐 예수님이라는 한 분으로 집결되고 만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다수의 집합이라는 이미지의 이스라엘상은 날아가버리고 예수님 한 분이 곧 이스라엘이 됩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시작점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이 퍼지는데 그 동력이 곧 ‘완성된 율법 완성’입니다. 율법 완성이 확장해 가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신약의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저를 살려내신 겁니까?” 바로 이와같은 질문이 성립되려면, 구약에서 멸망해버린 이스라엘이 한 질문과는 확연히 달라야 합니다. 즉 “하나님, 우리가 곤궁에 빠져셨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세요”라는 질문 말입니다.

구약 때는, 인간이 일단 숨쉬고 살고 있고, 이 살아있는 나를 더 살려내는 것에 하나님께서 관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입각한 모든 태도는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과 천국과 동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식으로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단 내가 살아남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살면서 절실하게 미리 알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 삶은 죽은 삶이었습니다. 전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들어와서 애굽식으로 살았던 방식이 한계에 직면하자 그들은 하나님에게 원망했습니다. 멀쩡이 잘 살아 있던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죽이는 쪽으로 이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멀쩡하게 죽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진짜 제대로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아야 하는 곳은 애굽이 아니라 광야입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일체 소용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포기하는 바로 그 방식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더는 자기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이 되면서 그곳이 ‘생명이 나타나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더는 내가 나에게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집에서 곱게 사료를 먹어가며 커나가던 개가, 어느날 개주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개가 스스로 앞치마 두려면서 “이제부터 제가 주인님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드리겠다”라고 나온다면 앞으로 그 개와 계속 살아야 할까요? 그게 바로 괴물이 된 개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행태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밤을 통해서 모든 인간 중에 산 인간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면,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 정리가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제대로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양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함과 연관시킬 줄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고 이 살아 있는 상황을 더욱 확고히 끌고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 효과가 자기 것으로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여하시어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어주셨습니다. 질문 잘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입니다.

“살려 주세요”가 아니라 “왜 살려주십니까?”로 질의가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신약에 나타난 성령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천국(구원)은 너희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예수님의 일이다.”로 말입니다. 율법을 완수한 자만이 누리는 권한이 작렬하는 영역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더는 자기에게 시선이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왔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이 온 자들은 자기를 쳐다보는 눈을 소경이 되었고 그저 주님만 쳐다보는 안목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궁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예레미야 2:6) 즉 ‘사망으로 갔기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고 말하는 자가 왜 너희 중에 없느냐는 겁니다.

여호와는 목자이십니다. 목자가 먼저 가신 바로 그 길(시 23:4)이 바로 사망의 음침한 길입니다. 그쪽에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제대로 된 삶의 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에도 영향력 없는 그 천국을 허락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7강-예레미야 2장 4~8절(천국은 주의 일)2207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4~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1페이지입니다.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누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언어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선지자는 자꾸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면 백성들은 다 죽어요. 말이 말답게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 당장 죽일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났으면 상대는 죽고 지금 당장 죽일 뜻은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선지자의 말이 너와 같은 이웃 아저씨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이 여기 계셔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들어달라는 겁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죠.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이 이르기를 너희가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데 진실로 그게 맞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냥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 그 속에서, 그 사람 속에 말씀이 들어가서 말씀이 주도적으로 너를 신앙인이 되게 그렇게 했다는 이것이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바입니다.

구약에서는 “나의 말이 너희 속에 들어가게 하라”이고 신약에서는 “이미 들어왔다”이니 이게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구약에서는 “내 말의 너의 속에 집어넣어라”라고 하면 말은 쉽죠. 쉬운데 그거는 이상하게 그게 안 돼요. 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성신이 임했으니까 되는 거고, 성신이 임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규명해야 할 것은 들어올 수 없는 말씀이 어떻게 신약시대에 우리 속까지 들어왔는지 이것을 밝혀내야 합니다. 만약에 이걸 안 밝혀내고 “그냥 듣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실천에 옮기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구약과 똑같아요. 구약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처럼 교회도 똑같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으면 망하려고 해도 안 망해요.

망할 수가 없어요. 안에 들어온 말씀 때문에. 그런데 그 말씀을 지키려는 자는 100% 다 망해버립니다. 얼마나 말씀이 안 들어왔으면 지키려고 노력하겠습니까. 지금은 신약 때고 시대가 다른데 구약 보면서 구약 흉내 내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뭐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신약에는 들어와 버리는가. 도대체 구약 사람들은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는가.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먼저 이걸 아셔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려고 하는 순간 이미 과제가 늘어났다는 사실이에요.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쳤는데 열 문제를 냈어요. 열 문제 다 풀고 자리 일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두 문제 추가요’라고 되는 거죠. 두 문제 더 풀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다섯 문제 추가요’라고 하니까 일어설 수가 없어요. ‘선생님, 수학 시험은 도대체 언제 끝납니까?’

신약 때 끝나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문제가 끝나요. 이 수학 시험은 우리에게 풀라는 것이 아니고 풀 사람은 따로 지정해두었다는 겁니다. 그 지정해둔 한 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스라엘은 보통 집단개념이죠. 여럿이 이스라엘이 되죠.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단 한 분을 이스라엘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되신 그 한 분의 본질, 그 본질이 쭉쭉 늘려서 확대시켜 버리면 그게 다수의 이스라엘이 됩니다. 최종적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을 하나님이 채택한 이유는 구약 때 이스라엘이 집단이거든요. 이 집단이 개인이 아니고 집단일 때 아주 위험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시험 칠 때 오늘은 맘 잡고 커피 마시면서 밤샘 시험공부 한다고 작정하는데 ‘영식아~놀자~’라고 다른 친구들이 찾아와서 놀자고 해요.

시험준비 해야 한다고 하면 ‘시험준비는 그 전에 다 했어야지. 지금 너 나랑 안 놀면 친구 관계 끝이다. 끝’ 이러면 ‘에라. 모르겠다. 내일 시험 칠 때 치더라도 오늘은 놀자’라고 신나게 놀죠. 여러 명이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의지나 용기가 먹히지 않는 그러한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8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라고 나와요.

여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관리자나 법 잡은 자들이 뭐라 하든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서 맘먹는다고 주위 환경이 그렇게 방치하지 않아요. 옆에서 흔들어버려요. 흔들어서 죽어도 같이 죽게 만드는 그런 일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몇 가지 중요하면서도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기 6절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나올 때 뭐가 어려우냐면 광야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광야에 대해서 어떻게 어려우냐면 사람은 본인이 이렇게 존재하고 살아있으면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다는 그런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게 되어있어요.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겠느냐”라고 하시며 환경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네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네가 드러낼 수 있느냐를 우선 물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주님 뜻대로 부응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서 광야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최적화되어있는 땅이 광야입니다. 왜냐 하면 사망의 땅이거든요. 사망의 음침한 땅. 사망의 음침한 땅이 왜 좋으냐면 내가 생각하는 생명은 사망인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기를 ‘그동안 이 세상에서 몇 년 살았습니까?’라고 하면 저는 ‘70년 살았습니다’라고 하겠죠. ‘생일 축하~ 합니다~’라고 한바탕 해프닝도 했지요. 나는 머쓱했고. 그런데 70년 살았다는 것이 틀렸어요. 우리는 산 것이 아니에요. 죽음을 운반하는데 70년 걸린 겁니다. 태어나면서 70년 동안 죽음을 운반했고 지금도 죽음을 운반하는 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거든요. 애굽에서 살 때 그들은 사는 게 사는 거고, 사는 것이 곧 생명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더 좋은 세상에서도 이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연속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과 저세상에 동일한 질로 연결되어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땅에 사는 것과 저 땅, 천국에 사는 것이 완전히 판이하다면 어떤 식으로 달라야 할지 이 땅에 살면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그들을 광야에 집어넣었어요. 광야에 집어넣고 “자, 이게 바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집어넣어요. 광야에서 보면 사람들이 ‘이게 왜 사는 거지’라고 의아하죠. 네 힘으로 전혀 살지 못하도록 전부 다 손을 다 놓게 만들어요. 이게 사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못살게 하는 거.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집에서 강아지 키울 때 주인이 사료 주면 개가 그것을 받아먹고 같이 살잖아요.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그 개가 발람의 나귀처럼 말을 하는데 “주인님,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너무 공짜로 얻어먹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설거지를 다 해놨으니 노동의 대가로 월급주는 식으로 주시면 제가 장 봐서 먹고 싶은 것을 알아서 먹겠습니다”라고 인간의 말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내가 지금 귀신이랑 사는 건지, 괴물이랑 사는 건지, 계속 같이 살아야 할지 말지, 죽여버려야 할지 걱정이 들겠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 개가 그렇게 돌변하면 걱정되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죽여버릴까? 얘가 왜 이러지?’ 분명히 유월절에 다 죽이고 그들로 하여금 피를 발라서 그들로 하여금 홍해까지 건너오면서 도대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살려서 왔잖아요. 그렇게 광야에 들어왔으면 애굽에서 사는 방식은 나를 죽이는 방식이지 나를 살리는 방식이 아니고 애굽에서 살았으면 다 같이 저주받았다는 것을 유월절 그 밤을 통해서 뭔가 깨우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애굽에 사는 방식과 우리 이스라엘 사는 방식이 이거는 근원부터 완전히 다르구나. 토대부터 다르구나’라고 눈치 채야 하는데 그들은 광야에 와서 물 없다고 양식 없다고 원망을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아는 식의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허락을 안 하느냐고 대들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조치를 생각해 보세요. 아까 이야기한 거 잊어버렸으면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저히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신약시대에 들어왔느냐는 그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에 대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이 말씀이 우리 허락도 없이 쑥하고 들어왔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질문을 하나님께서 바꿔서 하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절차를 바꾸는 겁니다.

일단 그 인간들은 죽었다 치고 너희들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해. “하나님, 왜 제가 여기 광야에서도 살아있습니까?”라고 질문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았고 사는데 힘드니까 살려달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질문하는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비록 구약이지만 신약 성도들이 하는 질문을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걸 요구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응하지를 못한 겁니다. 질문을 한번 봅시다. 질문이 6절에 나옵니다. 그 질문을 제게 예레미야를 대신해서 대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지금 질문을 질문답게 하는 자가 너희 가운데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질문이냐.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통과하지 않는 땅을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왜 통과하게 하셨습니까?’라고 그렇게 질문을 해야 그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통과를 못 해야 하는데 왜 통과를 하였는지 어떻게 통과를 할 수 있었는지 하나님에게 그 질문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나만 답답한가.

‘저는 구원이 안 되어야 합니다. 구원되지 말아야 해요. 천국 가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왜 천국을 보내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시라는 겁니다. 순서를 바꿔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아, 이렇게 하면 천국 가는구나’라는 이런 순서 말고. 시편 23편을 보면 제가 마음이 편해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라서. 거기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양인데 양이 목자의 목자다움을 위해서는 내 편한 위주가 아니라 목자로 목자답게 드러내는 환경을 목자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펼쳐주었다는 말이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나 살라고 주는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길로 가셨다는 것을 펼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 그 환경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일찍 다녀가신 길이에요. 이 환경이.

‘아, 주께서 이런 고생을 하셨고, 주께서 이런 시련 받으셨고, 이런 욕을 얻어먹으셨구나’라는 길을 지나가야 하는 거예요. 자기에게는 철저하게 소경이 되고 주님에게는 철저하게 눈이 뜬 사람이 되어야 해요. 만약에 어떤 소경 앞에서 어떤 불량한 아이가 연필심이나 송곳으로 장난친다고 눈을 찌르는 것처럼 위협하면 소경 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뭐가 왔다 갔나? 바람이 부네’라고 이런 식으로 나오죠.

이거는 육신의 소경뿐만 아니고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죠. 누군가 우리 마음에 ‘그러면 죽는다. 그러면 저주받는다. 인생 망친다’라고 협박 조로 이야기하게 되면 ‘개가 짖나? 무슨 왕왕 짖는 소리 나는데’라는 식으로 나에 대해서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산다는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협박과 공갈이 먹히질 않죠. 왜? 절차와 순서상 목자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목자 중심의 환경이지 내가 살기 위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착하다고 자연이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이 대 자연은 나의 착함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해도 자연은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천국이나 지옥을 결정하는데 내가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못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하는 행함이 천국이나 지옥 가는데 아무런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거예요. 보태지도 못하고요.

지옥 가는 사람도 아무 노력 못 해보고 지옥 가는 거예요. 혼자 웃었는데 이게 웃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천국이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지옥 가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어요? 지옥 가면 안 된다는 그것을 왜 나의 일로 여깁니까? 천국 가는 것을 왜 나의 일로 여깁니까?

그러니까 이 구약 성도들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구약 성도들이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했어요. 율법을 막 지키려고 했어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율법은 늘어난다고요. 왜 늘어나느냐. 음악의 음표에서 의미는 음표 사이에서 나와요. 음표 자체가 아니라 그 빈공간에서 나온다고요. 왜냐 하면 그 음을 칠 때 음과 그다음 음 사이에 빈공간에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쳤던 음의 파동이 퍼지게 되어있어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내가 뭘 했다. 어려운 사람 있어서 전화해서 돈을 좀 보탰다’가 되어버리면 내가 한 행동에 내가 꽂혀버리면 나는 한 음표가 되어서 그 빈공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모든 햇빛과 공기와 목숨 유지 시키는 주님의 사랑과 같은 이런 것은 그거는 다 놓치고 모든 것은 고집스럽게 내 행한 것에 그것을 꽉 쥐게 되어요. 율법을 지킬 테니 복이나 주세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을 증가시켜버리죠. 네가 율법과 율법 사이에 주신 은혜를 다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상대가 그러면 지킬 테니 복 달라고 하면 “아니야, 율법과 율법 사이에 있는 율법의 숨겨진 의미까지 다 포함해야 네가 복을 받는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현실은 내 사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하고 이해하는 현실은 나 살기 위한 일방적 현실을 구성해버려요. 일방적으로.

어떤 아이가 놀이터에서 ‘자, 커피 파는 카페입니다. 커피 드세요’라고 할 때 지금 아이한테 커피를 주면 되느냐고 놀라서 유튜브, 서라운딩(surrounding)을 보니까 외손녀 외손자가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 커피가 아니고 모래예요. 아이들은 그때부터 이미 현실을 조작해요. 자기 놀기 편한 대로 자기가 임의로 언표를 정해버려요. 거기에 의미를 고정시킨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자기가 원하는 의미를 고정시켜서 그걸 구성하고 그 구성만으로 자기가 원하는 현실상이라고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게 다 수정되고 바뀌어요. 바뀌는데 어디까지 바뀌는지 몰라요. 죽을 때까지 현실을 자기중심의 왜곡된 엉터리 현실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그 의미가 우리가 찾지 못한 빈공간에 예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 중심이 현실인 거예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실로 이미 우리가 신약에는 구원이 된 겁니다. 그러면 끝으로 우리 내부는 주님께서 자기 현실로 일방적으로 간주해서 쑥 들어왔어요. 그냥 쑥 들어왔어요.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점령했어요. 점령군처럼. 접수를 해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신약 성도는요,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안 움직이는지 의아하죠. 주님이 “그래서 싫으냐?”라고 물으시면 “도리어 감사합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천국은 주님의 일이지 천국은 내가 달성할 나의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눈이 열리죠. 나를 쳐다보는 눈이 서서히 감기게 되고 주님의 눈은 서서히 열리면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군요’라고 고백하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산시켜서 똑같은 본질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거, 이게 예레미야가 외쳤던 하나님의 질문 바꾸기입니다.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늘 이런 질문으로 매일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소위 안다는 자, 성경에 대해 박사라는 자들, 그들은 자기 밥벌이와 명예와 체면을 위해서 이용했음을 구약 이스라엘 통해서 보았습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 중심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주님 중심으로 바뀔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