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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강, 399강) 해석, 무덤 / 220705

정인순 2022. 7. 6. 00:38

398강                    음성                동영상

399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98강-YouTube강의(해석 에베소서 6:12)20220705-이 근호 목사


제398강, ‘해석’. 설명해야 될 문장과 언어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어계시, 글자로 된 하나님의 계시를 사도들에게 맡겨서 그들이 글을 썼고 그 글은 사도들 자신에 의해서 해석이 되었고 해석된 그 자체도 하나님의 계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주셨지만 그 해석은 인간들의 이성과 지혜에 맡겼느냐?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사도들을 사용하사 예수님의 말씀과 전하신 것을 언어로 기록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약성경도 그렇고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보통 ‘감동으로’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하나님의 주도하에 우리에게 나타난 겁니다.

사도들이 썼다고 하지만 사도들이 썼다는 것은 별 의미 없죠. 그건 제켜버려도 됩니다. 누가 썼던 간에 그건 큰 문제 아니고요. 주님의 주도하에 그러한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남겨졌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경을 더 넘어가는 자도 용납하지 않고 빼는 자도 용납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복음을 듣고 읽고 믿게 된 자는 복이 있고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들이 복이 있는 상태로서 구원받는 방법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음과 같이 걱정을 해요. “다 지켜야 됩니까?”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 성경에 인간이 지킬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지킬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믿음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닌 내용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걸 보면서 이게 지킬 것이 아니고 이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 이유가 성경은 성령으로 되어있고 성령으로 된 말씀이 실현되는 것도 성령의 몫이고 성령께서 하실 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인간이 건방지게 자기가 나도 좀 했습니다, 할 수 없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 제시되어서 그들로 인하여 복음 전파를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사라 이야기해요. 은사는 성령이 주신 성령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혜를 은사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여기 참여하고 있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는지 그 해석원리를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죠. 물론 조건은 우리도 같이 동일하게 성령을 받아야 이것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도들이 예수님 말씀과 구약성경,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해석했던가? 그것은 바로 영적 전쟁을 위함입니다. 영적 전쟁이에요.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하고 붙들고 네가 옳다, 그르다 하고 논쟁할 필요가 없고 논쟁할 이유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진 사도나 성령 받은 성도는 적이 있는데 그 적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앞에 정사와 권세라는 것은 세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권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치적 권력자들이 하는 일이 영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 편에 서지 않고 악한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게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반복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관여했던 그 당시에 정치적 권력자인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측 인사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도록 적극 말렸습니까? 그렇지 않죠. 결국은 협조했죠, 예수님 죽이는 데에. 가담자가 된 거예요. 공범자가 되고. 또는 뭐 방관자라 하지만 그냥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고 뒤에서 후원자 노릇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권력이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와 결부시켜 볼 때 그 성질이 어두운 악한 영들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 이미 탄로 났어요. 따라서 성경해석을 할 때 세상 권력이나 악한 영들을 전제로 해서 성경이 해석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당신 똑바로 하세요.” 이래가지고는 이게 성경해석이 아니다 이 말이죠.

“영과 악마와 당신은 이런 식으로 결탁되어 있습니다.”를 까발릴 수 있는 해석, 이것이 성경해석의 방향이고 모양이고 하나의 형태로서 갖춰져야 되는 겁니다. 그럼 성경해석의 내용은 뭐냐? 고린도전서 2장 4절-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설교나 성경해석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자, 여기서 보게 되면 만약에 사도에게 성령이 그 순간 나타나지 않고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사도는 설교하거나 전도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을 같은 말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오게 되면 전도를 하기 싫어도 전도를 해야만 한다, 같은 뜻이죠.

그럼 왜 이렇게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아야 되는가? 5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사도가 전하는 그 말씀, 그 계시를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고백을 하게 되는데 5절입니다. “너희 믿음이” 우리 입장에서 나의 믿음이죠, 나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로 이것이 모든 성경해석에 다 적용되어야 돼요.

첫 번째로 제가 성경해석 적용되는 방법은 성경해석은 악한 영들을 노리면서 바라보면서 성경해석 해야 된다. 인간이 뭐 열심히 하고 이런 성경해석이 들어가면 안 되죠. 배후에 악한 영들이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는가, 이 세상 권력자들이 어떻게 했는가. 두 번째는 인간이 받아들일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믿음이 나의 의도와 기대하는 바와 나의 지혜와 나의 마음준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믿도록 되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성경해석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모조리 전부다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택한 자만 믿어라. 그 외에는 아예 믿지 마! 믿지 말고 그냥 지옥 가세요. 하나님의 택한 자만 믿는데 누구를 택했느냐? 사도가 뭐 아는 사람, 자기 친구? 특혜? 안 됩니다. 택했다, 안 택했다는 성령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게 되면 이쪽에 전하는 사람도 성령, 듣는 사람도 성령.

따라서 믿음은 내 행위로 내가 노력해서 얻은 믿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여기서 사나 죽으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해석에 그게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 이게 모든 해석의 일목요연함, 동일한 내용입니다.


399강-YouTube강의(무덤 마태복음 27:53)20220705-이 근호 목사


제399강, ‘무덤’. 무덤은 인간이 긴긴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도착지점이고 인생을 끝내는 장소가 무덤입니다. 무덤에 들어가게 되면 더는 나의 일은 없어집니다. 나의 일이 없어진다는 것, 이걸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생각하기 싫어해요.

죽어서 나의 일이 없어지더라도 살아있을 동안에는 ‘나의 일이 있잖아.’ 이러고 싶은 거예요. 죽기 한 시간 전에 ‘나의 일은 있잖아.’, 죽기 4분 23초 전에도 ‘나의 일은 있잖아.’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럼 죽을 때 그 인간과 지금 살아있는 인간이 같은 인간 아닙니까? 같은 인간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서 하는 일도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는 일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위해서 나의 일이라고 오해할만한 일을 지금 벌이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끝에 가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 연필이 여기 있다면 새 연필을 살 때는 연필심이 안 보여요. 깎다보면 연필심이 드러나잖아요. 우리 안에 죽음이라는 심이 들어있는데 살다보면 죽음의 모습들이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연필심 주변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를 깎는다는 것은 심을 드러내는 작업이에요. 우리 속에 심겨진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구십이면 구십, 팔십이면 팔십 인생을 살아온 겁니다.

살아오면서 하는 일이 그게 뭐 공직이든 교사든 농사를 지었든 장사를 하든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그게 목적이 아니고 그건 그냥 깎여나가기 위한 작업에 불과해요. 나는 평생 의사로 산다. 의사로 깎여나가라. 깎여나가는데 다른 사람과 달리 의사로 깎여나가고 판사로 깎여나가는 거예요. 드러나는 것은 죽음이라는 심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배우로도 깎여나가고 가수로도 깎여나가고 가정주부로도 깎여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이라는 확고하게 확정된, 심겨져있는 꽂혀있는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죠. 내 인생은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죽는가를, 내가 좀 더 살아야겠다는 그런 심리, 마음에서 묻지 말고 성경적 입장에서 “그럼 우리는 왜 죽죠?” 라는 것을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어요.

죽는 이유를 성경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해답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인간 속에 예수님이 일하시는 절차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는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나 아니고 예수님. 나 아니고.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몸이 나를 위한 몸이 아니고 나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쓰여지기 위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도 발생되어야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일에 있어서 창세기 2장부터 나오는 주의 일이 뭐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럼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됐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악을 아는 지혜는 인간이 영원토록 몰라야 되는 조건하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걸 드러내는 거죠. 그리고 선악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야 된다는 그 원칙을 세우신 분이 따로 계실 것이고 그 따로 계신 분이 자기 원칙을 원칙대로 생생하게 살려내기 위해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만하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인간들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죽는 이유는 “내가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했잖아!”라는 그 원칙을 원칙대로 변함없이 지금도 굳건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그 원칙을 세우신 분이 누구냐? 그다음에 그게 중요해지겠죠. 에스겔 37장 12-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여기 무덤이란 말 나오죠.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자, 여호와를 아는 방법은 나옵니다. “너희들은 그냥 살다 죽어. 무덤에 가. 하지만 무덤을 열게 하고 내가 나오게 하게 되면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여호와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마르다, 마리아라는 자매에게 오빠가 있었는데 오빠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나사로가 살아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계시죠. 예수님이 살아있는데 어디까지 살아있느냐? 자기 백성을 무덤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면서 살아계시죠.

그래서 마리아의 오빠는 예수님의 살아있음이 어떤 식으로 살아있느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오빠는 시들시들 앓다가 예수님 오시기 나흘 전에 죽어야 했었어요. 그 기능, 그 역할을 하게 된 거예요. 역할치고는 좀 안 좋은 역할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안 좋은 역할, 좋은 역할을 가릴 입장이 못 됩니다. 죽는 역할 주면 죽는 역할 해야 되고 다른 역할 주면 다른 역할 해야 되는데 어째든 간에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를 드러낸다면 그건 예수님의 백성 맞습니다. 관점을 나한테 무엇이 이익이냐는 관점으로 하지 마시고요. 예수님이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이야기하시면 돼요.

그래서 에스겔 37장 이 말씀, 이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고 또 하나는 여호와임을 드러내고. 그러니까 백성이 무엇이냐를 나타내는 그 순간에는 여호와 자신이 내가 바로 백성 되게 하는 당사자라 하는 사실도 같이 동반해서 그 현장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에 의해서 부활되었다. 신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살아났다는 그거 하나는 성급하게 막 자랑질하고 싶지만 그 현장에 누가 등장해야 돼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가가 날라가면 안 되겠죠? 그럼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나타난다는 말은 그 현장에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미 살았다’라는 사실도 동반해서 같이 등장되는 현장입니다.

이미 살지 아니하면 주께서 살려내는 일을 하신다는 그 고백이 무의미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에스겔 37장 14절,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신약으로 말하면 성령이죠.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우리는 그냥 죽은 자였다. 죽은 자였는데 살고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신 그 모든 일은 내가 한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에스겔에 이렇게 나왔는데 실제로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그 일은 예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마태복음 27장 52-53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52-5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 달릴 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고 난 뒤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난 뒤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다음 52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절,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은 뭐 돌아가셔서 조용해요. 조용한데 예루살렘 성에 얼마 전에 죽었다고 이미 확정난 사람들이 살아 돌아다니는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그들이 살아서 예루살렘 성에서 사람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동일하게, 그 사람이 몇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사람이 됐든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된 죽음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는 “다 이루었다” 그 말이 맞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가! 거봐. 우리가 살아났잖아.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성령을 통해서 거봐.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잖아. 뭐 이것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있어야 됩니다. 왜? 사실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효과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지금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