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후서 3:16-18 / 사도의 끝인사(뒤늦은 감사)

정인순 2022. 7. 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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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16-18 사도의 끝인사

 

이근호

 

베드로후서 3:15-16에 보면,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 대해서 영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나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본성으로 사도의 편지를 대하면 아니된다는 겁니다. 분명 인간의 육에 의해서 먹물로로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대할 때는 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의 편지는 필히 두 가지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하나는 지옥행, 다른 하나는 천국행입니다. 즉 사람이 죽어봐야 지옥갈 것인지 천구갈 것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도출되지 아니하는 자는 곧 지옥갈 자입니다.

 

이 말은 곧 사도의 편지 속에서 주님이 살아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 속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즉 성경 말씀 자체가 인간의 손과 실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움직이는 식으로 주님께서 친히 적용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사도의 편지 안에는 주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대로 일하시는 그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하나님의 편지가 되는 겁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편지를 끝을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살후 3:18)


뒤늦은 감사 

2022년 7월 10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3:16-18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3: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참으로 위험한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도저히 알 수도 없는 내용으로 잔뜩 적어놓고서는 이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즉 은혜란 인간들의 분노와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능력으로 사도의 편지를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15-16에 보면,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의 편지는 멸망을 유발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그 어떤 행동을 선뜻 나서서 할 때는 자진해서 멸망받을 자 되기 위해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감안해 볼 때, 사도의 편지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알 길이 없게 됩니다. 또한 멸망을 감수할 수 있는 자만이 사도의 편지 내용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부터 멸망받아야 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 인간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눈 감긴 채로 평생을 살면 되잖아”라고 버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경됨이라는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하시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인간이 소경인 것도 문제이지만, 인간은 평소에 자신의 인식과 의식으로서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 심판 기준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과 인식과 그것으로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있는 지혜는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텨내기 위한 용도로 활용해 왔습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운명을 의식합니다. 이 ‘의식’하는 의식 자체도 ‘인간의 의식’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세상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지혜이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식으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시도일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세상을 살아보고자 합니다. 실수를 줄이면 말썽의 소지가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마음이 평화롭고 평강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평강’은 우리 인간들이 기대한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지내시면서 벌어졌던 그 많은 일들이 다 예수님의 평강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요란스럽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사적인 마음의 평정과 아무런 상관없이 없는 평강입니다.

인간들은 늘 자기 인생이 평화롭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분란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분란을 줄이는 방안 중의 하나가 알 수 없는 신에게 양심껏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즉 자기에게 조금만 실수가 감지되어도 신속히 반성하는 회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인간들의 의식은 이러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란은 다 나의 죄와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 인간들 수준에서 옳다 그리다고 해설할 권한이 없다”가 됩니다.

이방민족들 사이에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은 인간의 모든 운명을 한 줌에 쥐고 있다고 여기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들에 마주하는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그 운명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도리어 영웅시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자신이 최종 책임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신과 자연과 운명을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 우상숭배적입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인식 자체가 이미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예상을 하고 대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원하는 바는 신 앞에서도 떳떳해지고 싶은 겁니다.

참회하고 반성은 하지만 그 참회하고 반성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떳떳한 태도라는 좋게 받아들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속이는 자’에 불과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헌금하고 난 뒤에 그런 이유로 죽습니다.

인간에게 이미 의식과 인식이 있기에 아무리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해도 그것은 속임수요 가짜요 소경의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앞에서 어느 인간도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소경이 되는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됩니다.

뭐 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사울을 찾아오시고 이방사도를 맡겨주신 예수님의 뜻이 달라지지 않고 일관되었다면 사울은 아무 것도 달라진 바가 없이 처음과 끝이 동일합니다. 인간의 의식과 인식의 한계를 들추어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이러합니다.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그 언약 완성이라는 죽음의 먼저 가셔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영으로 찾아오시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평강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더는 자기 인식과 의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식과 인식에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심판과 구원의 기준을 접하게 됩니다.

인간은 다시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줄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에게 고향은 없습니다. 꼭 아브라함과 같습니다.(히 11:16) 아브라함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곳은 막벨라 굴입니다.(창 25:10)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장지입니다. 신약의 십자가가 바로 그곳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브라함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일찍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서 마중 나올 때, 성도는 비로소 자신의 인식말고 주님의 인식으로 구원됨을 압니다. 여기서 성도는 ‘뒤늦은 감사’를 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당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나의 소기의 목적들이 매일 무너지는 작업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16-18절(뒤늦은 감사)22071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18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사도는 편지에다 인간들이 알아먹지도 못하는 이야기 한껏 써 가지고 보내놓고 뒤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라는 이게 편지거든요. 이 편지에서 이 내용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내용은 여기에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일단 편지를 받으실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실려서 전달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어줍잖게 우리가 이 성경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럴수록 이 평강이 깨집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평강의 주도권은 주님한테 있다는 이 말은 ‘네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을 포기할 때 비로소 주님의 평강 속에 놓여 있음을 네가 알게 된다.’ 그런 뜻이에요.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어떤 평강같은 것을 얻고자 기대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나에게 평강을 주는 게 아니고 나 빼놓고 남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내 속에 평강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평강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평강을 주시는 거예요. 주님의 평강이 오시기 때문에 내 평강은 주님께서 시답지 않게 여깁니다. 네가 인생을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네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평강은 어떤 평강인가? 아주 요란스러웠어요. 이 땅에 대단히 요란스러웠습니다. 하루도 평안할 일이 없는데 그게 주님의 평강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발견을 해야 될텐데 예수님을 발견하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여기에 초점을 두고 성경도 보고 교회도 나오고 이렇게 해요. 주님의 평강은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 하면, 평소에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평화로운 인생, 평화로운 여생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이 상태라도 내가 평안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잘못했을 때 분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하루하루를 실수를 줄이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만큼 평안은 내 몫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여러분은 지금껏 살아오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방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인생 이만큼 사는 것도 얼추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어서 그 대가로 지금 평강을 누린다.’ 그렇게 자부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안 봐서 그래요. 성경 요한복음 9장 39절 보게 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스스로 내 인생이 무탈하면, 탈이 없으면 이만하면 인생 잘 사는 거잖아, 라고 자부해서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말썽이 일어나지 않는 쪽으로 자꾸 자기 행동을 조심하려고 하는데 그게 소경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소경은 요한복음 9장 39절에 의하면 소경은 심판하기 위해서 소경임을 들춰내시는 겁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심판의 기준이 뭐냐? “너 소경이잖아.” 그게 저주받을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요. 지금 인간세계에 참 희한한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교회 가면 분명히 누가 봐도 신자인데 사도 앞에서는 신자가 아니에요. 예수님 앞에서는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신자도 아니고 사도 앞에서 불신자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교회 오면 사람들을 전부 다 신자로 만들어 버려요. 그 이유가, 교회가 유지되는 기준 하고 사도가 전하는, 사도 또는 예수님의 성령을 통해서 전하는 기준이 너무나 차이 나서 그래요.

그 한 가지 예가 사도행전 5장 3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헌금을 하게 되면 이것은 신자의 본문이다, 이렇게 해서 긍정적 행위로 쳐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 이 부부가 헌금을 하니까 사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헌금을 하는데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사도의 기능이에요. 사도 베드로가 하는 말이, 4절에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게 일반 교인들한테는 안 들키는데 사도 앞에서는 이게 다 들통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이 교회에 헌금하면 주님이 좋아할 줄 알았지? 내 귀한 돈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흔쾌히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닌 것을 네가 왜 모르느냐?”

그것은 네가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너 전체가 어둡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왜 교회 나오면서 사도한테 욕 얻어먹을, 저주받을 그러한 마음가짐을 그대로 지속시키는가? 그것은 자기 인생이라는 것을, 자기가 과거로부터 살아왔던 그 습관을 그대로 지속하면서 교회에 쑥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쑥, 들어왔어요. ssug, 쑥! 아무도 안 웃네요. 쑥, 그냥 세상 살던 대로 교회에 쑥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 기준이 내가 내 평강을 위해서, 오늘 평강 이야기니까, 내가 평화로운 인생, 말썽 없는 인생, 조용한 인생, 남한테 비난받지 않는 인생, 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애썼던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그렇게 교회 와서도 최선을 다하면, 바르게 살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러한 태도가 소경인 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과거에 살던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수시로 반성해요. 끝없이 반성합니다. 조금만 일이 있으면 반성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것은 비극이 자기 인생에 초래하지 않기위해서 애쓰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운명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인생이 힘든 것은 내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 성경을 백 독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인생 힘든 것은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이거 마귀가 인간을 속인 거예요. 인간을 소경으로 만들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 힘들게 사는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가 반성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일어난 적이 없어요.

소포클래스(Sophocles, 497-406 BC)라는 BC 5세기경 지금의 그리스에 유명한 문학가의 그 희곡에 의하면 테베라는 어떤 도시에 전염병이 퍼졌어요. 전염병이 퍼지니까 그 백성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전염병이 갑자기 퍼진 것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걸 단정하고 “신탁을 받아보자. 신의 계시를 받아보자.” 한 거예요.

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 이스라엘 하나님은 다른 이방의 신과 달라요. 차이 나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이방 민족들이 신을 언급할 때 그들은 어떤 식으로 신을 섬기고 모셨는가, 아셔야 되고요. 그것과 전혀 일치성이 없는 식으로 일하신 게 여호와거든요.

이방 신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보면 돼요, 그냥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하나님 믿자, 하나님 섬기자, 하나님 믿으면 천국 간다, 그런 이야기, 그 하나님이 교회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이 우상이다, 그 말이지요.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인 줄로 알고 있어요. 어쨌든 그 하나님께서는 절대자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운명을 주권적으로 다 쥐고 있다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칼빈의 ‘주권 사상’이라고 이야기해요. 모든 되어지는 일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 하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신학자들이 지어낸 거예요. 따라서 신은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자가 없는데 이 테베라는 도시에 갑자기 전염병이 퍼졌으니까 ‘이것은 우리가 신에게 대드는 어떤 요소, 어떤 사람이 그 짓을 해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저지른 자를 색출해서 처벌하게 되면 그 재앙과 저주가 풀리면서 옛날의 평강과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런 신탁을 그들이 생각했고 예상대로 그런 신탁을 받은 겁니다.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이 테베의 왕이었어요. “누구야? 그 죄지은 사람?” 찾아냅니다. 테이레시아스라는 선지자를 불러내요. 이게 그리스의 종교지만 성경 구약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왕들이 했던 태도와 똑같아요. 그 선지자는 소경입니다. 소경을 불러내서 “당신은 선지자니까 당신이 이야기해봐. 이 도시가 이렇게 전염병으로 힘들게 하는 저주케 하는 그 악인이 누구입니까?” 테이레시아스라는 선지자가 말합니다. “그게 당신입니다. 왕 당신입니다.”

왕이 분노하지요. “저 인간 추방시켜라.” 그렇게 돼요. 구약 선지자에 보면 선지자가 왕에 대해서 죄를 지적할 때 왕의 태도는 회개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선지자를 추방시킵니다. 그 왕이요, 평소에 반성할 줄 모르고, 참회할 줄 모르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이 반성한다, 참회한다는 것은 천하의 신이라도 나를 안 건드릴 그런 한계까지만 반성을 해요. 궁극적으로 나의 가치를 건드려 버리면 인간은 반성하는 것이 아니고 반발하고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신이든, 누구든, 예수든 뭐든 눈에 가리는 것이 없이 반발합니다.

이게 인간이 괴물이거든요. 울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사울왕이 왕의 지위를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왕의 지위는 하나님이 쥐고 있지 인간에게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주님이 쥐고 있지 어떤 인간이 성도라는 것을 하나의 인간에게 주께서 제공한 적이 없어요. “성도 네가 해라.”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와서 ‘구원받겠지’ 하는 것은 본인들의 욕심이에요.

그런 욕심을 하나님께서 들어준 적이 없어요. 인간이 구원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인간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교회가 장사하려고 그런 거짓말, 구라를 친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그 구라, 그 거짓말에 사람들이 혹해서 거기에 깜빡 넘어간 거예요. 돈 바치고 시간 바치고 다 넘어간 거예요.

왜? 본인이 바로 절대자기 때문에. “신이 나에게 지적하는 것은 좋지만 근원적인 것, 내 최종적인 판단은 내가 한다는 나의 신적 기능을 건드릴 자격은 하나님 당신에게도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이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은 그 선지자를 추방시키면서 자기의 과거를 알게 됩니다.

자기는 엄마와 결혼하게 될 것이고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그 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거거에 대해서 자기는 도피하는 식으로 자기 운명을 평강스럽게 지키기 위해서 해결책을 낸 거예요. 쉽게 말하면 교회 와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주 받는다고 하니까 그 때부터 사람들은 자기 저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온갖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요.

성경을 백 독 읽고 천 독 읽고, 유명한 목사한테 가서 설교 듣고, 교회 가서 충성 봉사하고, 교회를 섬기라 해서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지 교회 섬기는지 구분도 못 하면서 그냥 섬기라 하니까 목사 말 듣고 시키는대로 다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짓 합니까? 왜, 왜 그런 짓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평강을 내가 확보하기 위해서 그런 짓 하는 거예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아담은 실수했지만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운명에 맞선다는 생각, 하나님의 운명에 맞서는 아주 교만한 행동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지요.

교회는 좋~지요. 따박따박 돈 내고, 봉사하고, 교회 키우고, 전도하니까 교회 부흥되니까 입 다시고 ‘꼬드길 사람 한둘이 아니구나. 이거 뭐 보이스피싱보다 더 쉽네.’ 좋지만 목사 본인도 구원받은 적 없고요, 이것은 교인도 마찬가지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엉망진창인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십자가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지 않게 하는 거예요. 내 평강, 내 구원 그것 작살 내버립니다. 예수님이 기준이에요. 그 앞에서 내 기준 따로 설정하면 안 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이 편지, 다시 말씀 드립니다, 데살로니가후서 이 편지 쓰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이 편지 내용 전체가 인간이 알아먹지도 못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내용이 너무나 무서운 내용이니까, 뭐 지나갔으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1장 8, 9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 무서운 이야기가 담긴 편지의 마지막 대목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다 했어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 그러니까 이 무서운 이야기에서 자기는 발을 빼고 싶어가지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벌써 질문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해요.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냥 심판하세요.” 이러면 될 것인데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습니까?”

평소에 자기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인 것을 몰래 감추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그냥 질문으로 티를 다 내버린 거예요. 이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평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 16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평을 했어요.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즉 “사도 바울의 편지가 그냥 연애편지로 보이느냐, 인간들아! 이것이 멸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제공된 편지인 것을 너희가 알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멸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멸망에 이르는 것을 멸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조치를 취할 생각하지 마시라 그 말이에요. 그냥 사도의 편지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겁니다.

이게 논리가 전혀 어렵지 않아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논리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은 나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살아야 되겠다는 내 기준을 따로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전혀 반갑지가 않은 거예요. 인간은 자꾸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참회하고 또는 반성하는 이유가 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본인이 당당해지고 본인이 떳떳해지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남한테 지기 싫은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 원하는 것은 감사입니다. 모든 일어난 일에 감사하는 것이 주의 뜻인데 인간은 자기한테 감사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의 적절한 조치에 대해서 자기의 대견함에 대해서 자기한테 감사하고 싶은 거예요. “나같이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러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참회는 어디서 하는가? 참회는 지옥에서나 하라고 해요, 지옥에서! 지옥에서 하는 게 후회입니다. 그거 하라고 지옥 만들어놓은 거예요. 인간은 참회도 없이, 구원받는 자는 참회도 없이, 반성도 없이, 회개도 없이 구원받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과속카메라하고 똑같은 거예요. 과속카메라가 쉬운 예가 될 겁니다.

이 앞 큰길에서 동화사 쪽으로 죽 가게 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속카메라가 하나도 없었어요. 없었는데 터널 앞에 가면 시속 60킬로 넘으면 잡는다고 과속카메라를 최근에 설치해 놨어요. 그런데 늘 이길을 다녔던 사람은 카메라 없다고 마음 놓고 시속 100으로 달렸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40킬로 과속해서 벌점 20점에다 벌금 15만 원 나왔을 때 그 사람은 무엇을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아, 그곳에 카메라가 있었구나.’ 여기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돼요. 15만 원 나오고 벌점 나왔다는 것에 짜증내지 마시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인식하고 그걸 의식하는 순간 이미 소급해서 구원되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하는 방식이 주님의 기준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수시로 자기 행동을 자기가 스스로 평가하기 위해서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이 우리의 사는 습관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디까지 왔나, 내가 지금 지옥에서 멀어져서 천국 어디까지 왔나, 맨날 자기 점검해요. 이것은 현재 일어난 일은 자기가 과거로부터 경험상 지금 이런 현재는 과거와 관련되어서 차분하게, 차분하게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과거에 대해서 대처를 제대로 한 사람 같으면 ‘지금에 주어진 일도 과거의 내가 대책 잘했던 제대로 된 원칙을 가지고 지금 일어날 일도 대처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괜찮은 인생 성공한 인생이 된다. 그러면 나에게 평강이 되고 미래의 아름다운 소망이 나를 기다린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 자기가 감시카메라를 다 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뭐냐? 과거에서 들어오는 거예요. 과거에서 지속되는 겁니다. 구원은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미래에서 찾아오는 겁니다, 미래에서. 그 미래는 인간이 아무리 살아도 도달될 수 없는 미래, ‘인간은, 모든 인간은 저주로 죽어야 돼.’라고 단정 짓고 난 그 이후에 생긴 사태, 그게 바로 언약의 완성, 구원의 완성으로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이에요.

인간은 내가 아는 시간 의식에서 주님의 세계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건너갈 수 없어요. 주님이 건너와야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교회 와서 노력하고 목사 말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해도 구원되지 않습니다. 구원 되지 않는데 자꾸 구원 구원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것은 사기에 빠진 거예요. 교회라는 이름의 목회술에 여러분이 보이스피싱에 빠진 겁니다. 그거 목사 잘못 아니에요. 여러분 잘못이에요.

그리스 문학에 유럽 최초 문학에 호머의 <오디세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그 문학에 보면 오디세이, 로마말로 ‘율리시즈’라는 그 사람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온갖 고생 다 해요. 온갖 방랑 다 하고 모험적 인생을 삽니다. 어떤 때는 선원들 죽이기 위해서예쁜 요정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도 모르고 가다가 암초에 걸려서 몽땅 파선하는 위험한 가운데서도 선원들은 파라핀으로 귀를 막고 자기는 눈 멀쩡히 뜨고 귀도 안 막고 돛대에 밧줄로 몸을 묶은 채로 그 세상 유혹을 이기면서까지 기어이 이타카라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오디세이라는 사람 고향이 이타카에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인간의 인생을 하나의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모험의 반복이라 여기고, 하지만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다시 나의 고향 나의 나 됨, 나의 동일자, 동일자 된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진정한 나로 되돌아온다는 그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의 그리스사람들, 그 다음에 그 이방 나라 신이 주었던 절대적 운명과, 그걸 마주하고 있는 인간이 그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세 가지가 고대문학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상과 인간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를 알아야 여호와가 얼마나 독특하고 얼마나 차이 나는 하나님인 것을 안다고요. 인간은 그 절대적인 신, 신의 주권,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 그 신 앞에서 인간은 마주하며 신을 섬기면서도 나의 나 됨은 끝까지 그걸 놓지를 못해요. 인간은.

신과 인간이 좋게 화해 해가지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그냥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은 쪽으로 종교라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해줄 것 다 해 줄 테니까 제가 원하는 것도 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거래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자기 시간의 일부를 바칩니다. 일주일 중에서도 좀 쉬어야 되는데 일요일에 힘들게 차까지 타고 오면서 그렇게 오는 이유가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협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고향이 이 땅에 없습니다.(히 11:16) 고향이 없어요. 내가 나의 나 됨을 확인해줄 그러한 고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아브라함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돌아가는 곳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지요. 아브라함이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서 죽어야 돼요. 죽는 자에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죽는 자의 고향은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이유는 그 아브라함의 죽음의 장소가 막벨라굴(창 25:9,10)이라는 사실이에요. 죽을 때 구원받는 자의 죽음은, 뭐 믿는 자나 불신자나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죽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따로 마련했다는 이 점이, 이 점이 성도한테는 복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그게 복이 아니고 내 죽을 자리를 주님 쪽에서 마련해 주신 거예요. 주께서 살라고 복을 주신게 아니고 “너는 빨리 죽을수록 좋아.” 라는 식으로 죽을 자리를 마련해 준 거예요. 그게 막벨라 굴인데 그 막벨라 굴이 신약의 십자가입니다. 언약에 든 사람만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아브라함 들어갔지요, 이삭 들어갔지요, 야곱 들어갔지요, 요셉은, 막벨라 굴의 취지를 갖고 막벨라 굴의 그 원형이 되는 가나안땅까지 요셉의 해골은 이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보면 막벨라 굴이 신약의 그 십자가 장소가 되기 위해서 요셉의 뼈, 해골로서 원형을 찾아가는 절차를 보여주는 용도로 요셉의 해골은 쓰여집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때 일 많이 했지요? 요셉은 죽어서도 일 많이 했어요. 그 해골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가 한곳에 모이는 자리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그 곳에서 그 성도들은 부활됩니다.

12절에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성도의 몸무게가 가벼워서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죽는 자리가 부활을 결정합니다. 죽는 자리가! 너 어떻게 살았느냐, 를 묻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디서 죽었느냐, 를 묻는 겁니다. “누가 너를 죽이더냐? 어디서 죽었느냐?”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죽이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왜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게 아니냐 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할 때 그 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우리가 의식하는 그 죄 아니에요. 예수님만 알고 있는 그 죄에 의해서 우리는 사망하는 겁니다.

성경을 볼 때 단어 하나 개념 하나를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을 해야 돼요. 뭐 ‘성경에 나오니까 이건 우리가 아는 이야기네. 우리가 죄지어서 사망했다.’ “당신 죄지은 것 있지?” “나 기억 안 나는데?” “그래도 있을 거야. 그 죄 때문에 죽는 거야.” 그 죄 아니에요.

우리는 성경의 어느 단어 하나도 몰라요. 모르면서 아는 체한 거예요. 알기 때문에 “시켜만 주이소.”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목사님,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대로 해서 천당 갈래. 천당 가고 싶습니다.” 그 자체가 이단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요. 그 증거를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기세등등해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는 데 도중에 걸렸지요. 예수님이 찾아왔지요. 쉽게 말하면 “사울아, 너 지금 어디 가느냐? 지금 무슨 일을 하느냐? 내가 너 하는 일 다 안다.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이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한다지만 그것은 오히려 너를 더 파멸케 하는 일이다.”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십니까?” 하고 자기에게 타자(他者)지요, 그 순간 남이거든요, “누구십니까?” 물었어요. 물으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님을 그 전에 만난 적이 없어요. 그 전에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핍박을 해도 사람을 핍박했지 주님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건드리니까 이게 예수님 핍박한 것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소경이 되어서 눈을 뜨지를 못했습니다. 10-12절에 보면,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그런 지시를 받고 17-19절에,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자, 여기서 사울이 달라진 게 있습니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사울 자체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달라진 게 없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이 달라진 게 없이 일관성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일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일에 적용받는 그 성도 자체도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는 내가 새사람 되었다고, 달라졌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인생 살아간다고, 자기의식과 자기 인식에 중무장되어서 그래요. 참, 이거, 이거 고질병입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모든 인간은 장애자라고요.

경제공동체에서, 이 세상 경제공동체에서 일해서 돈 번다는 게 그게 이 경제공동체에서는 당연한 거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소경이에요. 소경은 장애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바보 등신이에요. 자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아침부터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다, 먹고 살자, 끝. 뭐, 그게 뭔데? 그게 뭡니까?

그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아니잖아요. 바쁜데 그래도 일요일은 하루 쉬어서 교회 나가 줘야지요. 그거 나와서 뭐하는데요? 세상에서 월화수목금토, 정신적 장애자가 일요일에 교회 왔다고 그게 멀쩡한 인간이에요?

교회는, 진짜 복음 있는 교회는 과속카메라 달렸습니다. 한번 보세요. 생각지 못한 내 인생을 폐쇄적 구조로 만들어가지고 이미 내 인생이 끝난 그 안목, 유일하게 소경이 아닌 안목, 유일하게 전부를 아시는 그 안목에서 “네가 교회를 나오든 뭘 하든 너는 죽어 마땅해.”라고 알려주는 카메라 달린 곳이에요. 카메라 달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은 그때부터 평강이 온 거예요. 기복이 없어요, 기복이. 마음에 기복이 없는 거예요. 왜? 내 인생, 내 의식 자체가 주께서 애당초 개무시 해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판단하고 내가 나를 판단하고 잘했나 못했나, 판단하는 이 판단 자체, 결정 자체, ‘내 인생 성공이야, 실패야? 내 인생 선방한 거야, 망친 거야?’ 내가 스스로 자기 판단하는 그 판단 기준 자체를 개무시 해주시는 그러한 기쁨이 생긴 거예요.

이것은 내 인생에 내가 침 바르고 손댈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걱정 안 해도 될 것을 내가 쓰잘데기 없이 걱정한 거예요. 장애자니까, 정신적 장애자니까, 정신적 장애자를 쉽게 말하면 정신병자지요, 정신병자가 되었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그 과속카메라가 있는 순간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살든, 몇십 년을 더 살든 이 정신병 질환은 계속 간다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 미리 알게 된 기쁨이 대단한 기쁨이에요. 주님이 오셔서 인간이 건너갈 수 없는, 주님만 건너가는 그 최종점, 모든 세상이 끝장나고 그다음에 전개되는 그러한 세계의 힘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마중을 나와서, 미리 찾아와서 와버리면 우리는 소위 이안물결(離岸流), 이안파, 해운대에 그게 많답니다.

파도가 물결치는데 심하면 해변가에 있던 사람들을 물결이 왔던 쪽과 반대쪽으로, 바다 쪽으로 사람들을 끌어내서 익사할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이안물결이라 하는데 하여튼 간에 주께서 이렇게 와가지고 마지막 자락, 끝자락에 성도 된 자를 거기에 실어버려요.

실어버리면 7월 9일 물결은 어제, 오늘 7월 10일 물결이고, 내일 되면 7월 11일 물결이고, 주께서 마지막으로, 또 마지막으로 미래로 잡아당기는데 그 물결에 같이 실려서 요동치면서 같이 실려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평강입니다. 올라가면 올라가면 되고, 내려오면 내려오면 되고요.

돈 주고 놀이동산도 가는데 롤러코스터 못 탈 것 뭐가 있어요? 망하라면 망하면 되고, 살라고 숨 쉬라면 숨 쉬면 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주께서 잡아당겨요. 그래서 성도의 감사는 늘 어떤 감사냐? 뒤늦은 감사에요, 뒤늦은 감사. ‘아이고, 몰랐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하신 일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다 챙겨줄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까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성령을 받지를 못했어요. 성령은 마지막 때를 정리하고 마감한 그분의 영을 성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찾아온 사람은 이 세상이라는 이 저주, 그 저주에서 그 사람을 출소시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출소했다는 뜻이에요.

출소해놓고 아직 남아 있는 게 우리 육신이 남아 있으니까 그 남아 있는 기간 교도소 구경하라는 겁니다. 305호 한번 들어가 보고, 307호도 한번 들어가 보고, ‘아, 쟤는 저렇게 하면서 자기의식과 자기 인식 가운데 노닥거리고 자기 선방했다고 우기면서 살고 있구나.’ 그것 구경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경하다가 그쪽에서 “당신은 뭘 자꾸 기웃거립니까?” “아, 세상 끝났다는 이야기하려고.” 그것 알아들으면 이야기하면 되고 못 알아들으면 그러면 ‘그냥 지옥 가세요.’ 하면 되는 거예요. 남이 한참 저주받고 있거든요. 이 교도소 내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저주에요.

다시 이야기해 드릴까요? 그들이 잘못한 게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저주의 능력이, 심판하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성령이 안 찾아온 것뿐이에요. 예수님이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저주받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소경, 눈이 감겼다는 사실, 그것뿐이에요.

남이 한참 저주받고 있는 삶을 뭐 그리 성도가 되어서 그걸 부럽다고 그걸 따라 하고 그걸 꿈을 꿉니까? 차 뒷자리에 골프채 있는 게 그게 그렇게 부러워요? 골프 치다가 지옥가는 데, 지옥가는 게 아니라 지옥에서 골프치지요, 지옥에서! 지옥에서 고급 차 타고 돌아다닌다고요! 아우디 타고 가서 완도에서 일가족 다 빠져 죽고 그런 일이 벌어지잖아요. 왜 그걸 부러워해요?

여러분, 쓰레기와 시래기의 차이점 아시지요. 쓰레기는 못 먹습니다. 시래기는 된장 풀어서 끓이면 맛있어요. 우리는 쓰레기인 것 같지만 as if, 쓰레기인 것 같지만 시래기입니다. 그 모습은 맨 쓰레기에요. 쓰레기인데 주께서 우려내는 그 뒷맛이 맛이 있어요. 어떤 맛? 죽는 자리를 주께서 마련해주신 그 기쁨이 있어요.

아, 그래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소망이 뭐냐 하면, 빨리 그 막벨라 굴에 머리 디밀고 들어가는 게 그게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소원인데 그 사도 바울의 소박한 기쁨을 누가 발목 잡는가? 교회 교인들이 발목 잡는 거예요. 좀 가르쳐 주세요, 복음이 무엇입니까, 편지 좀 써 주시지요, 제가 이런 문제 있는데 어떻게 해결합니까…….

참 마음 같으면 발길로 차버리고 싶고 참 힘들지만 주께서 “지금은 네가 떠나면 안 돼. 더 도와줘야 돼.”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뭐냐? “내가 하는 것은 부득불 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싶어서 이런 짓 한다고 오해하지 마. 나는 지금 가고 싶지만 너희들이 발목 잡아서, 주께서 발목 잡게 해서 그래서 나는 떠나고 싶지만 못 떠나고 너희를 도와줘야 돼. 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인간들아!”(고전 9:16) 뭐 이런 식이지요.

불신자는 자기를 위해서 일해요. 그러나 신자는 주님이 오직 주님을 위해서 활용되도록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특징이 그래요. 불신자의 특징은 항상 내 자리, 내 것을 생각해서 어떤 일을 해도 후딱 퇴근하잖아요. 다시 내 자리, 사는 어떤 보람 같은 것, 사는 기쁨 같은 것을 얻고자 하는데 성도는 되돌아올 자기 자리가 없어요. 되돌아갈 자리가 없어요.

자기 자리라 생각하고 오려고 하니까 벌써 주님이 떡 앉아 있어요. “너 뭐 찾냐?” “제 자리요.” “네 자리 없잖아.” 우리의 것, 우리의 자리, 이것은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의 자리는 애초부터 있은 적이 없습니다. 다 주님의 자리였습니다.

이걸 뒤늦게 감사하는 거지요. 왜, 과속측정기가 왜 거기 설치되어 있는지. 아, 내 의식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 내가 예상못한 것,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자꾸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우리의 소기의 목적이요, 날마다 주에 의해서 파괴된다는 거예요. 나의 조그만 소박한 나의 목적이 항상 깨어지면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주님에 의해서 깨어지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 요것만 이루어주시면 제가 주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꾸 요것만 이루어주시면, 저것만 이루어주시면, 이렇게 하는데 성도는 그 조그마한 소망마저도 주께서는 그걸 냉철하게 부숴버립니다. 부숴버리면 우리는 욕심을 또 만들고, 만들면 또 부숴버리고, 그러면 또 만들고, 만들면 또 부숴버리고,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점점 자아가 소실되지요.

우리는 소기의 목적을 왜 그렇게 자꾸 만들어내는 버릇이 있는가? 그것은 어떤 내 예상한 목표가 되게 되면 ‘아, 나는 정말 살맛 난다.’ 내가 나 보기에 살맛 나는 그 재미가 인생 사는 재미로 내가 확보하고 싶어서 그래요. ‘인생 살면서 그만큼 고생하면서 그 정도 기쁨은 안 됩니가? 허락 안 됩니까?’ 이러고 싶은 거예요.

부모가 자식 키울 때 그런 것 있잖아요. “하나님, 저는 아무 욕심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살 만큼 살았는데 무슨 욕심 있겠습니까? 단지 애 넷인데 둘은 의사 되고 둘은 판사 되고, 뭐 조그마한 일 그 외에는 아무 소망 없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자식만 잘되게 해주신다면 내가 교회에 재산 다 바치겠습니다. 내 소기의 목적, 그 소기의 목적만 봐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소기고 대기고 간에 너 자신이 없어요, 너 자신 자체가. “너 자신 자체가 목적을 이루면 안 돼, 인간아!” 네가 목적을 이루면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인생의 짐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성경 말씀 아는 것, 이게 우리한테 짐이 된다는 생각 못 했어요?

성경 말씀 알려고 공부 많이 하시는데 그게 여러분 해보니까 그게 짐 아니었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어디까지,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더! 더! 더! 책 몇 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더! 더! 더! 어디까지, 얼마나 따라잡아야……? 뭘 따라잡아요? 따라잡을 필요없습니다.

주님한테 십자가에 낚이면 되고, 그 무덤 주님이 들어가셨고, 그 합류된 자만 천국에, 영생에 있는 그 무덤에, 자리에 마련하심에 낚이시기 바랍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내가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존재의 가벼움, 세상의 골프채에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예수님,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예수님 때문이라는 그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걸 누구한테 양도했느냐 하면, 마지막 아담에게 양도를 했어요. 마지막 아담에게 양도할 때 그 양도할 만한, 주가 될만한 권한을 보여주기 위해서 양도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아담을 만든 겁니다.

첫 번째 아담을 만들고 그 아담과 악마가 결국은 결탁하게 만들어놓고, 그 악마하고 인간하고 모조리 심판하는 권한을 예수님에게 부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체가 인간과 악마한테 심판받는 선행적 일을 벌이도록 주께서 그렇게 성령께서 이끄셨습니다.

이거 뭐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인간은 그냥 피조물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심판할 때 악마를 심판하는 거예요. 악마는 이왕 당하는 심판 자기만 당할 수 없다 해서 인간을 끌어당깁니다. 끌어당기면서 인간을 앞에 세워서 예수님을 비난하게 만들었어요.

어떤 비난이냐? “갓난아이가 난지 두 시간 되어서 죽어버리면 갓난아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였습니까?” 이런 식으로. 인간의 그 근원적인 존엄성, 인간의 근원적인 그 착함, 양심, 당신이 뭔데 그걸 소경이라고 일괄되게 지적하면서 인간의 선함을 모독하면 되느냐고, 그런 식으로 악마가 배후에서 예수님께 대들게 만들었어요.

악마는 하나님께 대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들어요. 인간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대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점에 대해서 대들지요. 모든 세상은 모든 죄 속에 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버렸거든요. 어떤 인간도 저주 안 받을 인간이 없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서 증명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 존재를 인정해요. 예수님 존재도 인정하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한다고 가스펠송 얼마나 부릅니까? “주님 사랑합니다~” 하잖아요. 그러나 제발 십자가 다음에 부활을 이야기해야 되지 십자가로 그치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입 다물라고 합니다. “십자자가 끝이라고 이야기하지 말아달라. 부탁이다.”

왜? 인간의 자기의, 모든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노력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내가 모독받기 때문에, 내가 모독받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하나님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운명에 맞섰던 이방민족들이 신을 대하는 태도가 이 태도입니다.

신은 운명지어졌지만 인간은 그 신의 운명과 협상하면서 신에게 순종할 때는 순종하면서 결국은 내 것, 내 것 찾고자 하는 그 본성, 우상적인 본성, 그게 오늘날 교회에 가득 찼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도 모르면서 복음을 연구하고, 십자가 모르면서, 십자가 영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십자가 연구해서 ‘나 이렇게 하면 천국 가겠나’ 혼자 스스로 예상하고 계산하는 것, 이게 마귀 짓인 것을, 이게 우리에게 평강이 아니라 짐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