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강( 미래의 종족) / 220627
녹취:한윤범
대전-주일 낮 설교요약 20220627
어제 낮 설교한 것, 핵심 되는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체적인 연결을 그림으로 시간될 때까지 제가 이야기해볼게요.
제일 먼저 언급한 게 뭐냐 하면 누가복음 15장 탕자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을 얻은 거예요. 얻었지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얻었다, 그것만 좋아하는 데 중요한 것은 아들은 뭘 잃어버렸느냐 하면 집 나가기 전의 자기를 잃어버렸어요. 이게 어려운 건데 자기를 잃어버린 거예요. 아버지는 얻었잖아요. 아들은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목숨 다할 때까지 자기를 잃어버릴 방법도 없고요 잃어버릴 줄도 모르고요, 그리고 잃어버린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어요. 요즘 사는 이유는 나는 나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리는 그 경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돈 떨어질 때 자아가 같아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돈이 있음으로서 계속 자아가 있는 겁니다. 돈이 자기 욕망을 목적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돈 떨어지게 되면 자기 야망이 욕망이 없어지잖아요. 야망이 없어지면 야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곧 이미 선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은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걸 언급하면서 성경의 대원칙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느냐 하면 없다는 것에 대해선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내가 왜 없느냐? 광주강의 때 인간에게 불가능한 게 뭐라 했습니까?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없는 데서 시작한다고요.
그렇다면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아니어야 해요. 내가 아는 나, 그건 맞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하는 대상으로 나는 어쨌든 나는 delete 삭제하든지 제거하든지 수를 써야 돼요.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에서 이게 지금 이해할 수 없어요. 부지런히 교회 다니는데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는 거죠. 천국 갈 만한 자로 개선되기 위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은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다음에 같은 뜻입니다만 뭐라 했습니까? 죽은 데서 살리는 게 주의 일이에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걸 한꺼번에 나와 있는 대목이 바로 로마서 4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 원칙을 딱 제공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구원이란 것은 안 되지요.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좋은 걸 제시해도 본인 자체가 구원이 왜 안 되느냐? 멀쩡하게 있는 살아 있는 내가 없앨 수가 없고 살아 있는 내가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살아 있다고 하는 그게 오해야, 잘못 생각한 거야, 그건 네 입장이야, 네가 땅에서 네 레벨에 네 수준에서 살아 있는 거야. 내 레벨은 죽어 있는 거야,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면 되겠지요. 그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었어요.
유월절 사건에서 살아서 펄펄 뛰는 쪽은 하나님이 보내준 죽음의 천사만 사무라이 뒤에 칼 들고 덤벼들 듯이 활동 주체자가 죽음의 사자에요. 그리고 그날 밤이거든요. 지진도 밤에 일어나면 피해가 심해요. 밤은 무엇이 없다? 의식이 잠시 중지되는 겁니다. 꿈꾸는 건 있지만 그건 무의식에 속하니까. 밤에는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는 것을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교통사고 나잖아요. 온 장기는 작동하는 데 두뇌 쪽을 다쳐서 내가 여기 병원 침대에 왜 누워있지, 이러면 그걸 깨닫는 기간은 뭐냐?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죽어 있는 겁니다. 어떠냐? 자아가 사라진 순간이지요. 몸은 있어도 자아가 없으면 없는 순간, 몸은 살아 있어도 내 자아가 죽어버리면 죽는 순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작 원칙을 스타팅 포인트를 없는 데에, 죽은 데에 이걸로 시작합니다. 불가능이죠. 교회 목회가 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세운다고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있는 자들만 와서 뭐가 되겠어요. 펄펄 살아 있는 자들로 교회해서 뭐 할 겁니까? 아무 소용없지요. 주의 일도 아닙니다. 주의 일은 애초부터 인간이 종교로도 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게 하는 이게 유월절이죠. 여러분들은 유월절은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담방 연결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러면 신약에서 어린양을 보라, 예수님을 보라 했다면 첫 번째 유월절은 그들은 무엇을 보라고 했을까요?
첫 번째 모세를 통해서 히브리인들에게 보아라, 하는 것은 무엇을 보라 했겠어요? 자기가 집에서 잡은 어린양의 피가 볼 수 있는 자리까지 안에서 잡았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바깥으로 전면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어요. 바깥에 페인트 칠 뭐로 합니까? 노루표 페인트로 칠합니까? 그게 어린양의 피로 했지요.
그러면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일과 맞닥뜨리는 유일한 하나님이 가르친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보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와 상대 안 한다. 그리스도를 네 앞에 앞장세워서 너는 뒤로 빠져버리라 이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거예요.
제가 어제 오후기도 기억나십니까? 내용이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건데 인간들은 누구를 헛되지 않으려 교회 오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헛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자기 인생을 헛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믿어버려요. 그게 십자가를 욕하는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경에서 좋은 구절해도 내가 펄펄 살아 있는 한 이거는 모독하는 코드가 돼버려요. 참 이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어요. 성령 자체가. 그거는 대충 성경 읽어서 흉내 내면 주의 영광 되는 줄 아는데 그건 아니죠.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 있잖아요. 그 피 남기고 다 죽여요. 이 죽음의 사자가. 그래서 어린양의 피 남기도 다 죽여 버리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그 안에 뭐가 살아 있는가? 매일의 제사를 통해서 어린양의 피만 매일같이 살아 있는 걸로 간주되고 나머지는 그 살아 있는 어린양의 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거기에 졸졸 뒤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숨어있어야 돼요.
마치 닭이 가면 뒤에 병아리가 닭보다 앞장서면 안 되고 닭 뒤에 졸졸 따라가서 낮 12시 그늘도 없는데 병아리들은 엄마 덩치가 만들어내는 그 그림자 안에만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엄마가 자기 대행체기 때문에. 내 운명은 어디 걸렸다? 병아리한테 엄마의 운명이 내 운명이죠. 예수님의 운명이 내 운명이다. 유월절 피만 살아 있고 우리는 그 피가 살아 있으면 그 조건 하에 살아 있고 만약에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피 없는 이방나라처럼 되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장소가 시내 산이에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돌 판과 짝을 이루는 것이 피 있는 제사법이 율법과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란 것이 오늘날 우리 성경책 전체를 말하는 거예요. 성경을 봐선 안 되지요. 무엇과 짝을 이뤄야 돼요? 성경책 자체의 완성은 이걸 지키는 나로 완성이 되는 게 아니고, 지금 이게 두꺼워서 못 짜지만 이걸 짜보면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지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이 말씀은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다 이루었다. 그게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에요. 그래서 제가 오후 기도할 때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은 주님의 관점, 중점은 바로 이 성경말씀을 다 이루는 데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됩니까, 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게 어린양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란 말을 붙일 수 없어요. 우리는 뭐냐? 없는 존재고, 그다음에 뭡니까?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주일 낮 설교보다 더 길게 하겠다.
유월절을 통해서 모든 이스라엘은 이미 죽었지요. 이게 뭐냐?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주의 일입니다. 그 설교에서 초반에 제가 이렇게 강조한 것은 무엇을 구분시키느냐 하면 자기 일과 주의 일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제가 유월절을 먼저 언급했어요. 그러면 주의 일을 언급했기 때문에 원칙을 언급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건 뭡니까? 내 일이 뭔지가 남아있겠지요.
주의 일을 하는 그 현장에서 주의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뭐를 끌어당기느냐 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일하는 데 너희들은 이렇게 일한다고 짝을 맞추어야 돼요. 양말 하나 빵구 나면 어떻게 합니까? 옛날 같으면 깁는다 하지만 요새는 나머지 멀쩡한 것도 갖다버리지요. 언젠가 이야기했지요.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자 하면 뭐가 날아간다 했어요? 우리 죄가 같이 날아가요.
죄와 의가 같이 있어줘야 이게 주의 일이 되는데 사람들은 자기 챙기는 데 너무나 급해서 빨리 착한 사람 되고 싶어서 이제 죄 용서됐으니까 남아있는 사도 바울의 명령과 교훈들 있잖아요. 이걸 빨리 습득해서 내가 의롭고, 의롭고 점점 더 의로운 존재로 발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은 기본이고 상급도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아이디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 주의 말씀을 짜면 뭐 나온다 했어요? 피 나오지요. 이 말은 주의 말씀 안에 주님이 피가 나올 수밖에 없게 했다는 말은, 이 성경말씀은 그다음에 주의 일에 입각해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는 죄만 나와. 주님에게는 피가 나오는 이유가 너는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 피 없이는 너를 속죄할 수 없었단다. 그 내용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성경말씀 읽을 때 그렇게 평소에 여러분 마음이 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지요. 아하, 이게 죄 지으라고 성경말씀 줬구나. 죄 아닌 게 없다는 느긋한 입장에서.
자, 그러면 나의 일은 뭐냐? 나의 일은 어제 선악체계 잠간 언급했어요. 이게 나의 일인지 주의 일인지 아는 방법은 어떤 일을 해놓고 내가 잘했다, 못했다고 나오면 백 퍼센트 이건 선악체제에 의한 나의 일입니다. 주의 일을 모독하는 나의 일이에요. “내가 잘했지, 잘했지. 내가 실수했구나. 다음엔 그런 실수 안 해야지.” 이거는 나의 일이에요. 선악체제에 의해서 계속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악체제에서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제 논리에 의하면 인간에게 일단 자기 일이 안 되면 난처한 일이 벌어져요. 난처한 일이 벌어지면 수습에 들어갑니다. 집안에 사업이, 이게 아니고 자기의 가치가 손상 나는 난처한 일, 우사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빨리 화들짝 수습에 나서서 실수는 했지만 그 뒤에 반성하더라, 더 착하게 살려고 마음 야무지게 잡더라 하는 그 선행이 또는 이제부터 더욱더 주님을 잘 섬길게요, 하는 그 선행이 나의 과오를 이렇게 덮게 되면 수습이 잘된 거예요.
그러면 그 수습이 잘된 결과가 나라는 자아의 작품이잖아요. 그 작품에 대해서 자기가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인간의 일이에요. 인간의 일은 뭘 느낀다? 자신의 가치와 자부심을 계속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백 퍼센트 자기 일입니다. 모조리. 자기 일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뭐냐? 원룸에 혼자 살래. 다 귀찮아. 혼자 제대로 바르게 살면 되잖아, 주님이여.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 9절에 뭐가 나오느냐? 사도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옛날 찬송가 336장에 보면 주와 함께 동행 한다.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옛날 찬송가 좋네요.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왜? 자기는 죽은 존재니까. 동거할 경우에만 동거자가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자리 제공만 했을 뿐이에요. 껍데기만 제공했는데 안의 주인공은 동거인이 지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유월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어제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다. 왜냐? 생명의 운반체가 되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가 내 속에서 작동하게 되면 왜 나는 나의 선악체제에서 나오는 의로움과 양심이 왜 안 되는가?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게 죄만 나온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칠순을 하고 넘겨보면서 더욱더 그걸 많이 느끼게 되지요. 살아온 것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래서 자기 일을 길게 이야기했어요. 자기 일의 특징은 홀로 사는 건데 이것이 어떻게 하느냐? 자기 노동력을 일이니까 노동력을 기존의 자연환경에 적용하게 되면, ‘노동력+자연환경=문화’가 나와요.
문화가 조직적으로 힘을 모으게 되면 이게 문명이 돼요. 문명 중에서 가장 끝 모습이 국가문명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와요. 점점 더 문화가 문명으로 조직화 돼 가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폭력이에요. 가정의 폭력, 직장의 폭력, 교회의 폭력, 국가와 사회의 폭력. 이게 대표적인 것이 바벨탑, 바벨탑 특징이 모두가 생각이 하나같았다는 거예요. 한 패에요, 한 통속이에요.
한 통속이 되면 여기서 등질성, 질이 균등하다. 개나 소나 맞추어야 돼요. 왜 맞추느냐? 그것은 바로 오늘날 경영학에서 제일 최우선의 가치로 치는 것이 뭐냐? 능률주의입니다. 교회 경영에서 제일 우선 되는 게 능률이에요. 능률은 뭐냐?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능률입니다. 비용은 최소화하고 결과는 최대로. 이게 경영합리화에요.
문명이 힘을 모으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힘이 될 수 없는 쪽은 구박을 받아야 되고 거기에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다른 힘을 내 힘으로 강제로 빼앗아야 되거든요. 뺏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내 쪽에는 이익이지만 상대에게는 강력한 피해를 입히는 아이디어를 각 부서별로 모집해야 돼요. 이게 회사에요.
우리 조직만 남고, 그러니까 치킨 집 열군데 있으면 그냥 닭 튀겨서 파는 게 아니고 우리 집만 살아남고 1년 내에 아홉 집 다 문 닫는 아이디어를 끌어내지 않으면 아르바이트 학생 잘려야 돼요. 이 동네가 교회가 열군데 있다. 내 교회만 잘되고 아홉 군데 문을 닫는 아이디어를 당회장 목사는 부목사한테 그걸 강요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유치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이처럼 패거리가 한 패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홀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 보게 되면 원래 능력 없는 장들이 말이 많아요. 말이 많은 이유가 뭐냐? 말이 많다는 것은 내가 남과 싸워야 나라는 게 정립이 되는데 싸우려하니까 지가 봐도 신뢰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싸울 무기 없으면 뭘 해야 되는가? 속여야 돼요.
속이는 방법이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속이는 방법이에요. 그러려고 그랬어, 뭐 어떻게 했네. 헤어지는 마당에 나는 너한테 잘해주려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혼했으면 끝나는 거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어쨌든 우리 잘해보려고 했잖아, 과거 이야기 끄집어내고 이렇게 하는 것.
그래서 자기 일을 이런 식으로 해서 전부 다 무엇이 선이냐 하면 내가 잘되는 게 선이에요. 내가 못 되는 건 무조건 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죽을 등 살 등 악착같이 가치 있으니까 죽으면 돼요, 안 돼요? 살아야 되잖아요.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일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악마로부터 교신이 가능한 장치를, 수신기를 이미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었어요.
뭐라고 자꾸 세뇌하느냐 하면 네가 없으면 모든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일단 네가 있고 난 뒤에 네가 천국 가야 하나님도 의미 있다. 네 자신부터 챙기라는 그러한 암시를 악마로부터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그런 욕망이 있으니까 그걸 빼려고 한다면 공포가 찾아와요. 빼지를 못해요. 수신 장치를 무서워서. 그게 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소실되면 이딴 게 소용없지. 내가 있어야 나중에 잘했다, 못했다가 있는데 내가 없으면 이딴 게 무슨 소용 있나.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그런 쪽으로 악마가 그동안 꾸준히 인간들을 농락해온 겁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해서 교회 한다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고 내가 세운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가 일해야 된다. 그러면 결국 답은 나왔지요. 주님의 뜻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건데 악마는 기어이 이걸 피하게 만들어요. 무조건 있어야 되고 무조건 네가 안 죽어야 되고.
이런 관점에서 세상이 이미 거기에 한 통속이 돼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로부터 복음이란 걸 듣게 되었거든요. 복음을 들으니까 자기가 살고자하는 요령꾼들이, “야, 이것 괜찮네. 일 안 해도 내가 살겠네. 일 안 해도 천국 가겠네.” 이런 요령꾼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이스라엘이 말하는 유월절 체험 없이 지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한다니까 팡팡 놀면서 재림 기다리면 믿음 좋은 사람으로 주위의 평을 듣지 않겠는가. “너 믿음 좋으니까 일도 안 하는구나.” “그래 난 일 안 하고 이렇게 살다가 예수님 만날 거야.” 이래 나온다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제가 함축해서 한 말, “그럼 네 싼 똥은 누가 치우는데?” 좀 속된 말이지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는 누구의 희생 때문에 나오는데 지 혼자 천당 간다는 것 해서 자기한테 에너지를 준 희생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밥값은 해야 돼요. 밥값은 해야 되는데 밥값을 왜 안 하느냐? 이게 뭐냐 하면 어제 참 충격적인 용어 나왔지요. 가난한, 그다음에 뭡니까? ‘척’ 가난한 척.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프리카 중산층이 추리닝 입어요. 지금 아프리카 1억 명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입니다. 인간의 품위, 그딴 것 없어요, 그 동네는. 빵도 못 먹는데 무슨 품위가 있어요.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일으킨 세상이거든요. 세상에 나가서 나의 가치, 품위, 명예 다 무슨 소리냐? 배부른 소리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 복음 안다고? 나도 복음 아는데 나 어떻게 사는 줄 알아? 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다 말입니까? 아니지요. 생명은 귀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사도는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가난한 사람이 됐어요. 가뭄이라든지 지진,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라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남의 희생을 빨아먹고 사는 인생, 기생충 같은 모기, 파리. 모기, 파리도 나름대로 애쓴다. 얍삽하기 짝이 없는 것, 정치에 관심 있는 백수 이런 것들, 지 밥벌이도 안 하는…….
똥은 왜 싸느냐? 에너지 들어가니까 싼 똥이거든요. 그 에너지는 남이 고생한 에너지잖아요. 지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일하기 싫어든 먹지도 말라.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하느냐? 아니에요. 이게 육의 일이거든요. 주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주님 도와주세요.” “왜 도와주는데?” “양식이 필요합니다.”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목적이고 자기 인생의 끝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양식이 있어야 돼요. 그 양식은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만나의 떡이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애굽에 살던 양식을 달라 했을 때에 주님은 뭘 뭤습니까? 네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애굽의 양식이 죽은 너희를 살릴 수 없다. 돈이 있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생판 모르는 뭐지, 뭐야? 이게 이름 자체가 내용이 됐어요. 이게 만나에요. 이게 뭐냐. 그래서 성도는 뭐냐? 만나의 기능성 존재다. 생판 모르는 내가 생각도 못한 다 이루었다는 양식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기능은 문화가 아니고 문명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기능이니까.
그래서 여러분 듣지도 못한 리정, 로제, 에이미, 리아킴 이들이 스트리트 댄서들이에요. 그들은 댄스를 어떻게 하느냐? 싸움을 해요. 음악 틀어놓고, 에이 한 번 붙어볼까, 나와서 춤 한 번 추고. 그게 춤이라고 그건 춤도 아니지, 하고 지가 나와서 춤추고. 이 사람들이 현재 한국의 여자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어요. 거리의 춤꾼들이. 뉴욕에 가서 찍고 했어요. 아이들이 학원 다니고 그것 해요. 어릴 때부터 춤, 힙합 춤 이런 것. 뉴욕에 가서 흑인들과 한바탕 붙고. 맨날 배틀 붙어요. 리아킴 같은 사람은 세계 춤 대회에서 일 등한 사람이에요. 광고도 많이 나오고 해요. 그 기능성, 양식을 보여주는 기능성.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 있어서 제가 어제 준비는 했지만 시간 관계 상 못한 게 고린도전서 9장 16, 17절에 내가 하는 것은 부득불한 것이고 이건 내게 주신 사명이고 내가 이걸 해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이것 자체가 상이다. 왜? 나는 이미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양식의 기능이 사도 바울 자기를 장악하죠. 그래서 뭘 했느냐 하면 내가 복음에 빚진 자라 했잖아요.
그리고 어제 설교에 끝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천국은 포도원 비유에서 이 세상의 인간의 자기 일은 노동의 대가를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 노동했으니까. 노동의 대가 하려면 본인이 있고 본인이 안 죽어야 노동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노동의 대가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없다고 여길 때에 우리의 노동의 삯을 받는 게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죽고 없는 나에게 천국을 일방적으로 줘서 이제부터 너는 준 천국의 양식의 기능이 되라고 거리의 춤꾼 되라고 한 거예요.
그 삯은 우리 노동의 삯이 아니라 주님의 수고의 삯이 우리 안에 잠복돼 있는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내가 늘 봐도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서 내 가치 유지한다는 세상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천국을 소개하면서 반발하는 사람을 의식해서 주께서는 내 것으로 내 마음대로 사용했는데 네가 왜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느냐?
그럴 때는 그냥 하지 말고 손가락을 들고 이마나 가슴팍에 대고 내 것인데 네가 왜? 내가 의롭다 하는데 네가 뭐라고 네 몸이 네 것도 아닌데 네가 왜 스스로 죄인이라 하느냐? 내가 의롭게 했는데. 계속해서 쑤셔서 멍들었다 했잖아요. 다들 멍들 있지요. 왜 자꾸 선악체계를 작동시켜서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인생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에 기도가 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주님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했는데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내 인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관심사가 여전히 예수 믿고 얼마나 잘될까 그런 것만 신경 쓰고 있다고요.
주님께서 십자가는 양보가 없습니다. 나를 죽은 자로, 없는 자로 만들어서라도 십자가 네 안에 작열하거든 너는 천국 갔다고 고마운 줄 알아라. 두 번 다시 이스라엘처럼 되는 유월절 양을 전면에 내세우고 항상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런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지 맙시다. 여기서는 요약한 거니까 강의 아니니까 먼저 선행 강의니까 끄겠습니다.
대전-신명기(3강) 신2:34(미래의 종족) 20220627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2장하겠습니다. 신명기 2장에 보면 세일이라는 명칭이 여러 번 나오거든요. 세일 산이라는 것은 에돔 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돔이 어디냐 하면, 시내 산이 있고 여기에 사해가 있고 요단 강 있으면 이쪽이 에돔이고 이게 모압이고 모압 다음에 저 위에 아람 나라가 있고, 이쪽이 모압, 암몬이 있는데 나중에 암몬 이 자리가 갓과 르우벤 지파 자리로 접수가 돼요. 이게 지중해고요.
에돔은 누구의 형님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형님이에요, 야곱의 형이에요. 모압과 암몬은 관계있어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두 딸과 관계해서 나온 후손들. 이걸 보게 되면 하나님의 정통성, 하나님의 언약의 정통성을 위해서 언약의 정통성에 삐져나간, 정통성에 끼어들 수 없다, 라고 규정된 민족들 가까운 위치에 종족들이 정착해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과 언약에서 추방된 자들을 다루는 방식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통해서 언약을 설명하고자하는 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약속의 땅은 모형 판입니다. 약속의 땅은 누구 땅이냐 하면 하나님 땅이에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끼어있다는 이 말, 그럼 하나님이 살림 살겠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무슨 개념이 날아가느냐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하늘에 있는 멋진 신세계, 천국이죠. 천국 개념이 날아가 버려요.
우리가 천국 개념, 천사들 있고 하는 그거는 원래 사실적이 아니고 우리 상상의 효과구나, 우리가 착각했구나. 지상 말고 하늘의 멋진 곳, 그런 식으로 우리가 그게 옳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하나님 일하기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는 거예요. 인간이 상상하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훼손하는 데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겁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원칙을 생각하면 돼요.
[인간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한도다.] 인간이 상대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에요. 하나님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 신은 뭐냐? 인간을 상대하고 난 뒤에 미처 여분의 것을 신의 활동영역으로 삼자. 이게 인간에게는 우상이 되는 겁니다. 오류가 돼요. 인간들이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한도잖아요. 그 바깥으로 못 나가거든요. 인간들은 바깥으로 못 나가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이 상대하는 그 인간으로 와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신이라는 게 신이 곧 뭐다? 신이 곧 우상이라는 사실, 모든 신의 개념은 사기고 엉터리라는.
사도 바울이 만난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 본인이 소개했어요. 내가 나사렛 예수다. 나사렛 청년 예수다. 나사렛 청년으로 오셨어요. 나사렛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야 핍박이 성립되기 때문에, “네가 나를 핍박했잖아.” 핍박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 만난 그 땅이 누구 땅입니까? 방금 설명해드린 대로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 땅에 하나님이 오신 거예요. 자기 백성들 속에. 왜? 내 땅이니까, 하나님 자기 땅이니까.
창조된 피조세계 속에 하나님이 자기 자리를 마련해버렸습니다. 안 해도 될 일인지 하나님이, 인간 속에 내 나라 만들어볼까, 심심해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체의 정의의 규정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생각해봐야 돼요. 필수적 요소에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겁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사람이 되지 않은 하나님은 모조리 다 우상에서 나온 하나님이에요.
단군의 하나님? 전부 다 우상이에요. 단군을 믿던 하늘나라 상제, 전부 다 동양철학에 나오는 신은 다 우상입니다. 이거는 그리스에 나오는 제우스도 우상인 것처럼, 이집트의 신도 우상인 것처럼. 이 땅의 신은 오직 사도 바울이 만났던 나사렛 예수만이 신이에요. 다른 것은 신이 아니에요. 아버지를 찾으려고 자꾸 예수님 뒤를 엿보려하지 마세요. 우리고 고것까지입니다.
사람과 마주치는 하나님이 전부에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사람이 되신 분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것 이게 바로 천국의 문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그 피를 흘린 그 피로 생성된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그것조차 죄란 말입니까, 하고 그게 죄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실제로 들어가요.
들어가 보니까 진짜 죄였어요. 그 이유는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죄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시커먼 숯 덩어리였어요. 화로다 나는 숯이구나. 망해야 될 숯이다, 망해야 될 자다. 어느 정도로? 철판구이에 재료 얹어놓고 맹렬한 숯불로 위에 있는 제물이 한줌의 재가 될 정도로 우리는 검은 존재에요. 아무것도 아닌 먼지 같은 존재,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2장에서, 카메라 앞에 보여줘야 돼 5초간, 이젠 아시겠지. 이 시내 산을 올라갈 때에 시커먼 아스팔트로 포장을 해버려요. 그러니까 도로가 있으면 흙이 있잖아요. 인간의 흙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무슨 공사를 하느냐?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해버린 겁니다. 포장 공사하는 덮는 아스팔트가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시커먼 이스라엘을 지나가게 만들어요. 그 땅을 덮게 만들어요.
어디까지? 하나님의 땅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땅에는 오직 누구만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만 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주지가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이유 때문에 아까 말한 에돔, 모압, 암몬, 그다음에 아람 나라, 이방나라를 배치해서 이방나라 쪽은 무엇에 탈락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서 탈락된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 그런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명기 2장에서 세일 산으로 에돔 지역으로 가고 있는 것은 지금 활발하게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덮자. 아스팔트 빛으로 덮어가는 거예요. 그냥 발라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로 발라버리는 겁니다. 발라버릴 때 2장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아무나 먹지 마라. 언약을 들춰내기 위해서 너를 이동시키니까 같은 형제 에돔 땅은 그냥 봐줘라. 암몬도 봐주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빠져있는 이방민족은 아주 용납을 하면 안 돼요.
여기 2장 19절에 보면,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그다음에 24절에 보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그다음에 뭡니까,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붙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아닌 땅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거는 그들이 유월절 애굽에서 경험했잖아요. 애굽 나라를 어떻게 했습니까? 장자들 다 죽여 버렸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약의 기능 가운데 저주 기능이 있어요. 저주 기능을 마음껏 발휘해야 되지요. 거룩함이 가는데 속된 것이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그렇게 저주해버리면 남는 건 뭐냐? 여기 누가 다녀갔다? 하나님의 아스팔트, 하나님의 포장공사가 다녀갔다.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이 지역에 있는 이방나라를 통해서 언약이 살아 있네,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재가 되더라도 주의 뜻은 우리 몸이 재가 되고 늙어죽어도 신경 안 써요. 뭐냐? 말씀만 그 재가 있는 자리에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나는 것, 이게 주의 뜻입니다. 아주 잔인하지요.
나는 네가 아프고 어떻게 되던 모르겠고 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생하게 하나의 루비처럼 또는 진주처럼 캄캄함 속에서 빛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주님께선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빛이 되어라, 그다음에 소금이 되어라. 누굴 위함이 아니에요. 언약 자체를 위한 소금이요, 언약 자체의 발광체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발광체고 예수님이 소금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 네가 내 빛을 받아서 나와 함께 소금과 빛의 기능을 하라, 이렇게 돼요.
여기서 말이 나왔으니까 하라, 하지 마라의 기능이 어떻게 되느냐? 이렇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결과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황으로 내가 너를 몰아세울게, 이 뜻이에요. 하라, 하지 마라. 인간은 하라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하면 하고, 이게 인간이잖아요. 그 말씀 못 지키는 그런 인간으로 어떻게 하라는 하라가 되고 하지 말라는 하지 말라가 되는 그러한 것이 현실로 드러나는지 주님의 솜씨, 일하심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시키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기필코 그걸 해내시는 겁니다. 구약 때는 누가 하느냐?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내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가 아까 아스팔트로 사용했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특징은 언약이 그들과 함께 앞장세워서 이끈다는 거예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걸 그 성경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도 상상해보세요.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을 앞장세운다면 그까짓 것 우리가 따라갈 만하지 않습니까? 앞에 낮에 구름기둥, 밤에는 조명으로 해서 불기둥으로 이끈다면 사막이지만 누군가 앞장서서 선도하고 있다면 갈만 하지요. 우리 생각에는. 그런데 이스라엘은 원망을 했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우리보다 성질이 더 악한 사람들일까요, 그래서 원망했을까요? 분명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데 인도하면 인도하는 데로 가면 되잖아요. 모세가 정말 제대로 알고 인도하잖아요. 모세만 따라가면 되잖아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1년 동안 있었다했잖아요. 1년 동안 있으면서 계속 여행을 하는 거예요. 가이드잖아요.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가이드 믿어야지 그러면 누굴 믿어야 되겠어요? 그런데 왜 원망을 했느냐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원망을 했느냐 하면 아까 분명히 하나님이 사는 땅이잖아요. 모든 초점은 하나님이 어떤 사느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데 내가 사는 땅으로 생각한 거예요. 이 점에서 여러분들은 막 분노를 느껴야 돼요. 그런데 분노를 느낄 수 없는 이유가 천국은 누가 사는 땅이에요? 주님이 주님답게 사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천국 이야기하면서 누가 사는 걸 먼저 생각합니까? 내가, 본인이. 본인이 고생 많이 했으니까 호강하자,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고 성당 다니면서 시키는 대로 할게요, 다 낼게요, 십일조. 자꾸 그런 식으로 그렇게 봉사, 충성하는 이유가 어쨌든 간에 희망을 잡았다 이거거든요. 내가 잘 되는 쪽을 이젠 잡았으니까 누가 한 유명한 말, 정말 목숨 걸고, 정말 목숨 거는 이유가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내 이익 보려고 목숨 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이거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자발적인 거예요.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걸 선택할래? 다음 중 어느 것에 목숨 걸겠습니까? ①자식, ②예수님, 하나, 둘, 셋 어느 쪽이에요? 이걸 하나님이 아셨어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냐, 하나님이냐를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 안 해요. 자식보다 더 귀한 건 없어요. 아브라함이 사랑한 건 누구냐? 자식이었거든요. 하나님께서 안 되는 걸 하게 하는 방법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고 하나, 둘, 셋 하나님 섬길래, 하나님 섬길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서 하나 더 추가하면 네 자식을 죽이는 하나님 섬길래, 네 자식을 살리는 하나님 섬길래? 이 질문은 아까 질문으로 되돌아간 거예요. 자식이냐, 하나님이냐? 그러면 이 문항을 다시 바꾸면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과 하나님, 어느 쪽을 섬길래? 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아요. 나를 살리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믿을래, 아니면 나를 버리는 하나님을 믿을래? 하나, 둘, 셋 하면 우리가 미쳤나, 날 버리는 하나님을 믿게요. 안 믿지요.
그래서 주님이 먼저 죽었어요. 떠밀지도 않았는데 혼자 죽었어요. 탁 치니 억 하고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한 것도 없는데. 사울이란 사람 한 것도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 좀 잡고. 아까 했잖아요. 인간이 인간을 다룰 수 있는 한도가 뭐다? 같은 사람이에요. 예수님 너 나와, 멱살 쥐고 안 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 사람이에요. 사람을 건드렸는데 주님께서 해석을 과도하게 했어요. 그 사람을 건드린 것은 나를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살겠어요?
그러니 이 세상이 하나의 무대라면 이 무대는 매일같이 우리는 주님을 건드리면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시비 안 걸고 넘어간 적이 없어요. 그래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짜인지 들통 나요. 네가 예수 믿어라. 하라잖아요. 하라, 하지 말라. 예수 믿으면 그다음에 뭐 준다? 너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했잖아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뭐냐? 구원이 탐이 나면 뭘 해야 돼요? 하라가 예수 믿는 행위가 나와야 돼요. 이 행위가 인간들이 본인에게 못 나오는데 나에게서 나왔다고 박박 우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 사랑하는 백성을 결코 너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너한테는 애초부터 아예 이거는 완전히 바짝 말랐어요. 나오지 않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어주십니다.
나는 내가 상상한 세계만 사랑했다. 그게 천국인지 지옥인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간에 그 내용을 상상한 거예요. 이게 독자성의 오류입니다. 홀로 모든 시작점을 나부터 시작한 것의 잘못이에요. 거기에 비해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 할 때 가라는 명령을 누가 내립니까? 백부장의 상사가 있지요. 군대에서 자기 상사가 명령을 내리고 자기는 명령에 가시적인 어떤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어떤 누가 병이 나은 것은 주께서 병 나으라는 지시가 먼저 있었고 거기에 따라서 당신 병 나으라 한 것은 주님이 시킨 대로 할 뿐이지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 힘으로 기적을 베푼 게 아니고 베드로, 요한이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각자 주님이 뒤에서 쑤시는 거예요. “빨리 내 이름으로 걸으라고 해.” 자꾸 쑤시니까 “왜 자꾸 쑤십니까?” “안 해?” “예 하겠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됐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베-드-로, 요-한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경상도 말로, “와 이카노?” 왜 이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니까 사도 바울에게 절하고 사도 바울이 같이 절했어요. 맞절했어요. 제가 절 받을 게 아닙니다. 하라, 하지 말라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주께서 시키다가 그다음에 안 시키게 되면 그 사람은 안 하면 돼요. 시키다가 안 시키니까 지가 짜장면 시키고 있어. 교회는 있지 이미 자기 성령은 바닥났지, 전에 성령 받은 적도 없었지, 사실은. 주님에 대한 충성심 있잖아요. 내가 목숨 바쳐서 주의 길로 가겠습니다. 그거는 주님 앞에 잘 보이는 게 아니고 자기가 신학교 왔으니까 목사다움은 이래야 된다는 오죽 잔소리 많이 들었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들어서 일을 시켜요. 반항기가 먼저 일어나요. 아닙니다, 싫소이다. 요나가 자기 계획이 있으니까 도망쳤고 주께선 드론 띄워서 기어이 “여기는, 여기는 드론. 꼼짝 마라. 요나.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알아서 바다에 몸을 던져라.” 요나는 죽었지요. 죽었는데 깨보니까 물고기 뱃속이었어요.
“여기가 어딥니까까까가?” 울리니까 “여기가 죽음의 세계다다다다.” 죽음의 세계를 먼저 와버렸어요. 딱 사흘 동안 비린내 고생하고 사흘 만에 토해내니까 나왔잖아요. 도대체 물고기 시속이 몇 킬로 돼야 니느웨 가까운 동네에, 이거는 과학적으로 따지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처럼 주님도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그다음 차례는 저와 여러분 차례입니다.
이 고래 뱃속 같은 이 세상에서 여기가 어딥니까까까까? 여기가 죽음의 세계다. 돈이나 벌어라, 인간아. 니나 망가져라, 하는 그것을 완전히 여기서 살아 있을 동안 경험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빨리 육신을 버리고 좀 이렇게 해방,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자유가 뭐냐? 자유란 자발적 종속이 된 것을 자유라 해요. 그래서 자발적이니까 자유가 기쁨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을 소유하지 않겠습니다. 뭔가 굉장히 자비가 넘치고 인격이 훌륭한 것처럼 되지요. 아니에요. 이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뭐냐? 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소유가 되겠습니다. 이것을 자기로부터 벗어난 이걸 자유라 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개그콘서트>에 나온 것 아닙니까. 될 턱이 있나, 그 코너거든요. 젊은 사람들 모르겠다. 알아요? 요샌 이런 것 많이 보니까.
예수 믿어줄게, 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는 당신에 예속되겠습니다, 노예가 되겠습니다, 나는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그걸 자유라 해요. 얼마나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게 악마의 노예가 되었다는 이걸 이제는 절실하게 느껴야 돼요. 내가 자유를 부르짖는 자체가 악마의 노예였다는 것. 내가 내 자유를 외치는 것에 여러분 지긋지긋해야 돼요. 이제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야 돼요. 이게 뭐야, 이게 인생이야? 피조물다운 인생이 아니지, 라고 환멸을 느껴야 돼요.
참 그 정도 되었으면 성령 받은 사람 맞아요. 복음을 알아서 보험들 듯이 장래의 대비책은 확실히 해야지. 이게 무슨 자윱니까? 복음 이용하는 거죠. 복음을 공부하는 건 좋은 데요 그 복음이 악마한테 내가 지시를 받고 내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 이러한 지독한 죄 된 것을 알아야 복음 아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내가 되겠다는 이것이 곧 악의 족쇄다. 이게 바로 악마의 시험이라는 이걸 아셔야 돼요. 복음을 아는 내가 이것이 오히려 악마가 친 덫에 빠진 거예요. 내가 빠져야 되는데 안 빠졌잖아요.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 먹겠다는 거잖아요. 복음 없는 설교보다 복음 있는 설교가 더 좋다는 거예요. 마구 영끌, 막 끌어 모아. 복음 폐인. 막 끌어 모아서 많이 쌓았어. 이제는 어지간히 재림해도 많이 모아놔서 3차 대전 나도 천당 가겠지, 이런 꼼수는 쓰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복음을 아는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영광 돌리려하는데 그런 식으론 영광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바친 걸 안 받습니다. 그럼 뭘 받느냐? 배현진, 그 짝을 이루는 이준석의 경우를 봅시다. 둘 다 국민의 힘의 당직자 되는데 배현진이 손을 내밀었어요. 이것 해보면 좋겠는데 집사님, 잠깐만 나와 볼래요.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니까. 악수를 하는데 제쳐버리죠. 이준석이 제치고 들어갑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제치고 더,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해요, 드린 것을 제치고, 배현진, 이준석 아니면 설명 못할 뻔했다.
제치고 더, 내가 너한테 쳐들어가는 거예요. 네가 아부 식으로 뇌물주고 봉사하는 게 아니고 제쳐버리는 거예요. 주님, 좋은 관계? 좋은 관계 치워라. 제치고 일방적으로 침투해버려요. 이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납득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왜? 자기가 아는 상상의 신은 인간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오해를 한 거예요. 주님은 인간과 좋은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좋은 관계의 인간을 일부러 없는 인간을 따로 만들어요.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게 좋은 관계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생긴 그 주님과 좋은 관계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주님과 관계에요. 그분이 하는 관계가 흘러넘치면서 없는 데서 생긴 단체가 진짜 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받은 세례가 성령세례에요. 요단강에서. 이상하지요. 분명히 누가 봐도 그게 무슨 세례입니까? 물세례잖아요. 물세례인데 유독 예수님한테는 물세례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알맹이는 뭐냐 하면 성령세례에요. 그러면 성도가 갈 길은 물세례부터 스타트 출발해서 어디까지? 성령세례까지 이어지는 그 없는 코스를 주님 이 땅에 와서 그 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만든 코스의 길이 뭐냐?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마찬가지지만 그 코스가 뭐냐 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선이 돼요. 인간이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이 뭐냐? 억울한 일을 인간은 참기 어렵고 아무리 성격이 태평 같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인간에게는 뭐냐 하면 분노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사람이 아내나 남편이 분노가 일으키거든 분명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보시면 돼요. 막 길길이 뛰고. 개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개는 아프면 길길이 뛰겠지요.
개는 인간의 이성이 없기 때문에 안 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잠도 자지 못하고 분노로 인하여 감정요소, 이성으로 해야 될 판단이 파충류의 뇌, 시상하부까지 해서 여기에 두뇌 뒤에 연수라 하는 데 있어요. 이게 파충류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되는, 구분되겠지요. 완전히 짐승처럼 길길이 뜁니다. 분노의 충동이 작동하지요. 억울하다는 거예요. 말도 못할 정도로 억울하지요. 왜? 말하면 대뇌피질에서 나중에 구성이 돼야 되는데 너무 화가 나서 말을 못하지요.
그래서 주님 가신 길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좁은 길이란 것은 웃으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생각하게 되면 분노해서 이 길 같으면 천국 때려치운다는 일이 벌어질 때 주께서 지금 여기부터 좁은 길입니다, 광고합니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광고합니다. 여기서부터 좁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억울하지요. 화나지요. 자기 주체파악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미리 당겨서 광야생활로 보여주는 거예요.
언약이란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차원에서 일하는 것을 미리 내 챙기는 것은 알 수 있는 거예요. 알 수 있는 차원에선 해독이 안 돼요. 그게 설명이 안 되거든요. 자기 딴에 성의를 다해서 주님 우리가 이렇게 섬겼습니다, 하니까 치우고 악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건성의 악수 필요 없다, 치워버리고 그것을 그들로 하여금 죄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걸 첫째 시간 제목으로 하고 싶은 데요. 이게 뭐냐 하면 제목이 너무 기나? [기름 속에서 생고기가 튀김가루를 입는다.] 하여튼 이렇습니다. 생고기인데 빵가루 같은 튀김가루를 입혀요. 그러면 이게 뚝뚝 떨어지잖아요. 인간이 죄인이 안 된다고요. 그럼 어디 가느냐? 나와 똑같이 생활하는 이방민족을 통과하게 만들어요. 그거는 그 튀김가루가 묻어있는 생닭을 기름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비로소 그때에 그 기름이 나의 몸과 일체가 되면서 스며들어서 달라붙게 돼 있어요. 거기다가 맥주 하나 하면 치맥이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안 먹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게 인간을 이스라엘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기계로 만듭니다. 기계의 특징은 이겁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이걸 네 자로 하면 ‘기쁜 소식’이고, 두 자로 하면 ‘복음’입니다. 내 인생 왜 이렇습니까? 네가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럼 저는 뭡니까? 죄인 되는 거예요. 저는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닭이지. 그러니까 생닭인 거예요.
주님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와요. 그러니까 죄인을 불러서 주님의 의가 달라붙어야 이게 의인이 되는데 의가 달라붙으려면 주님께서 잔소리해서 의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피를 흘려야 되거든요. 피를 흘리려면 충분히 저 상대가 죄가 있어야 돼요. 어느 정도냐? 요만큼의 의가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야 돼요. 뭘 해도 죄가 되는 수준이 돼야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죄로 코팅된 것 한 번 더 코팅 붙이지요.
사실은 인간은 자기가 아주 착하고 훌륭한 피부도 하얀 생닭인 것은 자체적인 오해입니다. 인간이 아는 건 오해밖에 없어요. 나 같이 착하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맨날 자기를 피부도 하얀 그런 생닭으로 여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생활하다가도 집에 와서 다시 천사로 돌변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의 제일 소원이 뭐냐? 돈 많은 백수 되는 걸 소원해요. 직장에서 내가 억지로 해야 될 죄악들을 참여 안 해도 되잖아요. 돈 번다고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한 통속이 되고 그들의 비위를 맞췄는데 더러워서 못 하지요. 하나님 저에게 복음만 듣고 사는 백수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더불어 한 달 수입이 이천오백 내지 삼천만 원은 따박따박 통장에 들어오게 해주옵소서, 뭐 그런 것. 그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핀잔만 들을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장차 주님 가신 길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야 됩니다. 가면서 그들에게 나온 것들은 찬양이었습니까, 원망이었습니까? 원망이었어요. 찬양은 잠시였습니다. 무슨 바다를 건널 때? 홍해를 건널 때 잠시였어요. 그다음부턴 원망이었어요. 원망하면서 무엇을 거쳐 지나가느냐 하면 아까 한 걸 다시 2장 33, 34절에,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 우리가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모든 백성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그다음에 뭡니까? 유아. 흑인, 백인, 황인종 막론하고 어린애치고 안 예쁜 어린애 어디 있습니까. 그 야들야들한 아기, 천지난만한 아기를 어떻게 하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불가능한 거죠. 사람이 양심이 있잖아요. 양심이 있고 선을 아주 모르면 되는데 어린아이를 진멸하라는 이 말은 결국 뭐냐? 너희는 기계가 되어라.
마치 천사가 무감정으로 어린양의 피가 발리지 않은 애굽 나라의 전체 애를 다 죽여요. 심지어 갓난아기도 다 죽여 버려요. 인간은 그러지 못해요. 왜? 인간은 기계가 아니니까. 이미 선악체계가 있잖아요. 죽여선 않아야 될 사람은 죽여선 안 된다는 게 있잖아요. 인간은 천사처럼 잔인할 수 없는 거예요. 공자 논리에 보면 나오잖아요. 측은지심, 이런 것 있잖아요. 우물에 빠졌는데 어찌 구하지 않겠느냐. 공자가 하는 말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네가 남에게 대접하라. 공자의 말이 막 나와요.
자, 여기서 왜 못하느냐를 생각해보세요. 왜 우리가 남녀와 유아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을 못하느냐? 못하는 이유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존재가 못 되기 때문에. 우리는 참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이 대목에서는 꼭 들으셔야 됩니다. 오늘 첫째 시간의 핵심이니까 핵심을 끝부분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진멸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과거의 존재에요. 애굽에서 살 때는 그렇게 사람 막 함부로 죽이고 냉혹한 킬러처럼 죽이고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애굽 사람한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이웃사람들이 국가의 정책이고 법이 뭐고 관계없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하게 된 게 생물학적으로 맞아요.
괜히 싸우다가 얼굴 안 보고, 얼굴 안 보는 것도 힘들어요. 어지간한 것은 양보해야 돼요. 왜? 옆에 산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야 택배라고 맡아주지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이 강도가 오면 신고라도 하고, 사람 살리라 하면 도와줄 수도 있고 불나면 봐주잖아요. 이웃사촌이 그런 거잖아요.
인간은 과거의 산물로서 진멸 같은 것은 과거에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잔인하고 싶어도 쉽게 잔인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그냥 인간들은 품성상 착하고 어질고 너그럽고 인격적이고 인간의 품위를 상당히 고려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래서 이들이 이런 마음이 진멸당해요.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이유가 뭐냐? 바로 이스라엘은 미래의 종족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의 종족이 아니고 미래의 종족이에요. 미래는 모든 언약이 없는 민족은 진멸 대상이에요. 이게 확실한 미래는 우리가 부인하던 부인하지 않던 다가오는 미래의 모습입니다. 제가 어제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노아언약 설교했어요. 노아가 비가 부슬부슬 올 때 급하게 배 만들었습니까? 말짱해요. 비가 없는데 배를 만든다. 이 논리를 논문으로 제출하라고 하면 제출할 수 있겠는지 물었어요.
서울대학 학생들처럼 열군데 베끼는 것 말고, 비가 오지 않는데 지금 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 비올 때 필요한 게 아니고 비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물에 뜨는 배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논리를 제시해봐라. 노아가 뭐라고 제시합니까, 노아 입장에서는? 노아가 배 만들어서 과거를 대비했습니까? 아니면 이미 배를 만든다는 것이 노아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생각이에요? 언약 생각이에요.
언약이 옴팡 그냥 덮쳐버린 거예요. 상이 있으면 상보가 더 크잖아요. 상보가 덮어버리면 상에 뭐가 있는지 안 보이는 것처럼 그냥 노아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혜로 덮어버려요. 은혜가 상보에요. 상보가 덮어버려요. 덮어버리면 노아의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현재 필요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그때가 먼저 여기에 시작이 된 거예요.
요새 은행 몇 시에 열지요? 아홉 시에 열지요. 아홉 시에 여는데 이미 은행직원들은 뒷문으로 여덟 시 반이나 혹은 여덟 시에 업무 보고 있는 거예요. 오늘 할 일 업무 보고 있다고요. 아홉 시에 문 여니까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거예요. 노아는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안에 들어왔어요. 십자가만 현실이고 자랑해요. 지 행한 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시간 자체로부터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시간을 뛰어넘는 영적 공간, 묵시의 공간 안에 성도가 주께서 하라, 하라 말라를 여기서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미래의 민족이에요. 미래의 민족이 과거만 알고 있는 그 민족을 사그리 진멸합니다.
왜? 과거의 진멸 없이는 미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금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앞당겨서 하나님의 땅 가는 도중에 그걸 적용시키고 있어요. 그걸 지금 주입시키고 있는 겁니다. 목표는 뭡니까? 하나님의 땅에서 살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행위를 지금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에 진멸할 대상 중에서 지 친구나 아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아, 안 돼. 이러고 있잖아요. 인정사정.
그러나 과거는 철저하게 미래와 단절돼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진멸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 그 어른들, 갓난아기들 그들이 뭐가 죄가 있느냐? 뭐가 죄냐 따지는 것은 과거의 어린아이가 했던 행색과 징벌을 자꾸 연관시키는 데 과거에 행한 것 말고 미래와 단절돼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전체 어떤 걸 하던 과거의 시간 속에 있다는 그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신명기 2장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