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강, 395강) 예수님의 피부조직, 기회 220607
394강 음성
395강 음성
녹취:이하림
394강-YouTube강의(예수님의 피부조직 히브리서 1:1)20220607-이 근호 목사
제394강, ‘부분과 전체’.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전체가 됩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을 다 모르고 있기 때문에 겸손하게 ‘내가 세상 다 아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을 낮춰보지만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세상의 전체를 몰라도 상관없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있으면 족하다.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더 강렬해요. 어느 세월에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겠으며 얼마나 책을 읽어야 세상 전부의 지식을 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부분과 전체라는 것은 ‘내가 지식에 대해서 조금밖에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전혀 기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로는 내가 세상을 다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큰 소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뭐 어쩌란 말인가?’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나타내죠. ‘더는 못한다. 나름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나는 정당하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관심사가 진리가 무엇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내가 하는 결정, 내가 하는 일은 옳다는 것을 자기가 뽐내고 싶고 그걸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그 마음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못 배워도 큰소리 칠 것은 다 쳐요. 아무리 돈이 없어 가난해도 누가 자기를 얕보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는 이미 전체가 되고 말았어요. '나는 전체다. 나는 절대자다.' 거기에 푹 빠져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전부이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는 세상을 향하여 짜증과 불평을 늘어놓죠. ‘나에게는 내가 전부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이것이 나의 최종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만약에 이것이 방해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시비 거는 쪽으로 세상에 대해서 틈만 나면 시비를 걸며 살아가고 있죠.
이게 인간에게는 불행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는 전체라고 여기는 그 자세.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마치 절대자인 것처럼 설쳐대는 그 태도. 그 본성. 이거 어떻게 고칠까요? 못 고치죠. 고칠 수가 없습니다.
‘네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마이 웨이, 내 하는 식으로 그냥 살아간다. 관여하지 마라.’ 그러한 자기 절대주의로 살아가는 그 모습, 누가 봐도 그건 자기가 전체가 아닌데도 전체로 행사하는 괴리이죠. 현실과 너무나 차이나는 나의 고집, 이건 주님이 가만 두지 않겠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성신을 입었던 선지자들도 과연 그렇게 살았는가? 역시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됩니다.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게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딱 되어 있어요. 여기 ‘부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예로 여기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히브리서 3장 2절에,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이 모세가 뭐냐 하면 종이다. 여기 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사환으로.
어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일했다, 이런 뜻이거든요. 자기가 주인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 가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직원이 질 필요가 없죠. 모세가 그렇다는 말은 성도는 그 자체로서 전체라고 그게 전부라고 개인적으로 그걸 우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전체는 예수님이 전체이고 나는 그 예수님의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부분인 거예요. 히브리서 1장 1절을 다시 읽으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전체가 드러나는데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이 말이에요. (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니까 성도란 단독적으로 전부나 전체가 아니고 누구누구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누구누구의 하나의 조각 또는 일부 또는 그분에게 붙어있는 타일 한 조각. 예수님이 전체라면 예수님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비늘, 그렇게 되죠.
그럼 예수님이 움직이면 우리는 하나의 비늘조각으로 피부조직의 일부로서 같이 따라가죠. 피부조직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손 정도가 아니고 손에 있는 피부세포정도로 같이 합류해서 가는 거예요.
피부세포를 따로 핀셋으로 끄집어내서 나 혼자 고민하고 나 혼자 걱정하고 나 혼자 염려하고 나 혼자 무서움 떨고...... 이런 독자적인 걱정 근심을 할 자격조차 성도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어요.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의 어떤 면을 보이기 위해서 저에게 요런 아르바이트 일을 시키십니까?’ 그렇게 되어야 되죠.
이건 뭐 주님한테 물어보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통해서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일을 일으켰다.’라는 한결같이 같은 정답이 새로운 사태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롭게 다가오도록 자기 성도들을 예수님 자신의 피부조직으로 그렇게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다.
내가 책임질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일을 유발하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요. 나의 실수, 나의 잘못 아니에요. 내가 유발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든 환경은 주님의 주 되심, 주께서 자기 백성을 죄 사함으로 건져내는 그 일의 일환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지금껏 주께서 친히 돌봐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너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 나의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계속해서 또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지만 또 새로운 일을 주께서는 추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백할 것은 히브리서 1장 1절이죠. “우리는 부분이고 전체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395강-YouTube강의(기회 시편 32:6)20220607-이 근호 목사
제395강, ‘기회’. 기회라는 것은 모든 시간을 기회로 보지 않습니다. 그 시간 안에서 주님께서 성도와 관련해서 특별한 의미를 제시하는 그 때, 그게 기회가 되겠죠. 세상 사람이 말하는 기회는 자기가 호시탐탐 성공과 출세를 할 수 있는 그 때를 이야기하는 거죠.
어째든 간에 이 기회라는 것은 기회 전, 기회 후와는 다른 시간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때, 그걸 기회라 하는데 성경에서 이 기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편 32편 6절에 보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성도는 경건한 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위험한 세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그냥 무심코 살아가는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성도는 어떤 기회를 가져야 되느냐 하면 ‘아하, 이래서 이 세상은 위험한 세계이고 이 세상은 모조리 지옥으로 쓸려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파악하는 그런 순간순간을 맞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기회에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본인이 살면서 자기가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수시로 기회를 가지고 하나님께 고자질하는 사람. 아까 제가 그걸 연락을 취한다 했잖아요. 고자질하는 사람. 그리고 파견근무 하니까 본사와 계속 연락을 해야 돼요.
하늘나라에서 연락주기를 “여기는 하늘나라. 자, 성도야. 네 일에 무슨 일 있나?” 하면 성도는 “여기는 하늘나라 김기자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생중계하듯이 보고를 하는 거예요. 보고하는 게 성도의 일이니까요. 보고하는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과연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딱 그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저는 찬양하면서 보고드립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시편 32편 6절에 나오는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기도하는 게 보고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을 겪었는가?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의 홍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노아 때 홍수가 왔을 때, 이 세상이 홍수 받아도 마땅함을 보고하는 기자, 리포터를 누가 했습니까? 노아가 했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경건한 노아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노아의 역할이 그거라면 오늘날 성도의 역할도 그거에요. 노아가 언약을 받았듯이 오늘날 성도도 십자가 언약의 담당자입니다.
노아만 언약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만 언약 있는 게 아니에요. 성도도 오늘날 최종 언약, 십자가 언약자에요.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논다는 게 성립 안 됩니다. 어느 공간이나 어느 시간대든지 십자가를 증거하는 언약적 활동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아주 예쁘기로 소문난 미국의 여자 배우 오드리 헵번이라는 사람이 말년에 아프리카 가서 가난한 애들 도와주는 봉사를 했죠. 그럼 그 사람이 아프리카 놀러갔습니까? 구경하러 갔습니까? 아니죠. 봉사활동이라는 자기 일이 있잖아요. 오늘날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십자가 영이 임한 사람들은 이 지옥의 오드리 헵번입니다. 오드리 헵번처럼 잘 생기라는 말이 아니고 못 생기든 잘 생기든 그건 상관없어요. 그 역할은 자기를 구원하는 그 언약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 이야기를 물론 세례 요한만 했겠지만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이 집단적으로 그걸 애굽 세계에 알렸던 언약의 나라였던 겁니다. 그 언약의 나라가 이스라엘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돼서 ‘뭐 할꼬?’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기회를 타세요. 수시로 본사에 연락해가지고 현재 지옥을 앞두고 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그 꼴을 상세하게 탐사 보고해야죠. 보도해야죠, 기자니까. 보도해야 되고 리포터이니까 알려주고. 누구한테? 주님한테 알려주고.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은 그렇게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 로마서 7장에 보면 거기에 또 죄가 일을 할 때 그냥 일하지 않고 기회를 타서 일을 한다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7장 8절과 11절에 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가만있는 내 마음을 탐심으로 버블, 거품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은 법입니다.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그러니까 이것은 이 세상에 인간들만 사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죄, 악마도 함께 부지런히 지금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정리될 수 있죠. 성도는 성령이 임하고 난 뒤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세상을 예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목을 가지고 보니까 이 세상 자체가 지옥으로 지금 흘러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죠. 화산 터지면 누가 빗자루 쓸어서 마그마가 흘러갑니까? 가만있어도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그 맹렬한 마그마를. 어떤 마그마는 시속 60km로 내려온답니다. 차를 타고 도망가도 차 뒤에 막 따라와요.
지옥의 저주가, 죄가 우리 마음속에 전 세계에 지금 저주를 퍼붓고 마그마처럼 쫓아오고 있는 거예요. 달려오고 있다 이 말이죠. 그 광경을 보고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마그마 속에 있든지 죄 속에 있든지 성도의 파견된 자리, 주께서 지정하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걸 그대로 다 증거하면 됩니다.
기회를 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정말 죄의 마그마, 죄가 범람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좋다고 못 빠져나오는 아비규환의 그 광경을 아주 실감나게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보고해야 되는 막중한 그리고 특수하고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세상에, 천사도 부러워하는 이 직분. 우리가 이 세상 어디 가든지 간에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우리 할 일을 다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