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6:6-8 / 하나님의 거부감
하나님의 거부감
이근호
2022년 6월 1일
본문 말씀: 미가 6:6-8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율법대로 제사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했다고 자부하면서 그들에게 숨겨진 죄악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이방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정해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본인들이 엄연히 ‘여기 있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지부동입니다. 이미 최종적 진실의 바탕은 확보된 셈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
따라서 그 어떤 지식이나 그 어떤 진실도 “내가 여기 있음”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가 우선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 있잖아”가 우선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나를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시선은 모조리 나에게서 출발하게 됩니다. 즉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나 외에 모든 것들을 내 주변으로 끌어당깁니다.
그 끌어당기는 내용 중에는 율법도 하나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천국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나를 봉사하고 나를 위하고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율법 밖으로 주어지는 민족이 아니라 ‘율법 안’에 들어있는 민족으로 감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떻게 많이 율법을 지키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이 이스라엘을 이용해서 그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엄중하심이 어떤 식으로 나타내느냐로 연관됩니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대로 제사지내도록 유도해서 그들을 가차없이 심판해버립니다.
심판만이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적절한 조치에 합당한 처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5:21-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는 말씀은 이 세상을 율법을 의해서 가차없이 모조리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조리 저주하시므로서 원래 율법을 주신 취지를 완성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다는 모든 제사와 예배와 제물을 거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거부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는 시선과 하나님께서 우리는 모든 시선이 일치되지 않는것이군요”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여기 있음’을 가장 우선되는 사실을 간직하고 있기에 거기서 출발하는 시선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순환해서 결국 자기 이익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그들은 이런 자신의 본성이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시는 순결한 본성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시므로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시선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쪽에서 보는 시선이 없으니 자연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평하는 시선만 쉬지 않고 작동하지요.
요한복음 1:18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외에 아무도 하나님을 안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33-34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없다면 과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식으로 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우리 모든 인간을 비교하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7,19)
예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인간들은 늙어 죽어가는 것은 지당한 일이기 되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도 모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바는 저주요 죽음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당연히 망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 속에서 인간들은 매일매일 망합니다. 생존하기가 너무나도 힘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살겠다는 의지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진정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망하고 세상에서도 서로 망하게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인간들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다음과 같이 인생을 끝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즉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가신 길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길입니다.
문제는 누구든지 이 망하는 길에 합류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서 갈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삼스럽게 인간이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에게 겨냥한 그 최후의 완성적인 상태에 참여되는 자만 주님과 함께 아버지에게 갈 수 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율법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상한 심령이 되어야 됨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시선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시선이 아니라 이미 주님 자신 길에 동행하는 자들만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주님의 시선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자리는 곧 죽음의 자리이어야 합니다. 이런 형편임을 직시하는 자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시선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이 하신 일이 주님의 기쁨이 됨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