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5:1-4 / 가장 위험한 곳

정인순 2022. 4. 2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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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곳 

 

이근호
2022년 4월 27일                

 

본문 말씀: 미가 5:1-4

(5: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3)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인간은 일합니다. 하나님도 일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벌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겨도 근본은 자기 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뒤를 이어 유대나라를 조성한 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자신들이 행한 일에 보응하듯이 오신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그들은 망합니다. 필히 망해야만 합니다. 그게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망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메시야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미천한 고을인 베들레헴에 오십니다. 그것은 어느 인간도 이 작은 고을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이미 선악체계에 의해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인간들 끼리 통용되는 언어와 개념들은 모두 선악체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훌륭함과 위대함과 잘남과 우수함은 선(善)에 해당된다고 여기고 상대적으로 비천하고 천박하고 더러운 것은 악(惡)으로 분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크고 많고 높고 넓은 것들은 좋은 것으로 인식되어 사람들의 선호 대상이 됩니다. 인간들은 그들이 메시야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그들이 대단하게 여긴 예루살렘을 긍정하고 후원하고 호응하는 일에 같이 동조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결코 예루살렘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의 모든 좋고 의롭고 성스러운 것들은 전부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메시야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한떼의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이끈 별이 예루살렘에 와서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동방박사는 유대인의 왕의 출생을 예루살렘의 권력자인 헤롯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롯은 성경 전문가를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성경학자들은 미가 예언서에 근거해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들레헴이 지역적 위치만 알았지만 어떤 새로운 인격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메시야가 출생한다고 여겼습니다. 즉 베들레헴이 먼저 있고 그곳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태어나고 난 뒤에 기존의 베들레헴의 의미가 아니라 고통당하는 베들레헴의 의의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세상이 전혀 하나님과 메시야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음을 폭로시키는 기능을 이 베들레헴이 일어남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곳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아무리 미리 짐작한 박사들은 없어서 꿈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로 고국에 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 어디에도 미리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시대는 다름아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되는 자들을 말합니다. 동방박사가 메시야를 만다고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 자기에게 보고할 줄 알았지만 벌써 다른 길에 샜다는 사실을 안 헤롯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근방의 아이들 중에서 넉넉하게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들이 성전이 있어 성스러운 권력의 상징으로 여기는 예루살렘의 숨겨진 실상입니다. 크게 대단하고 모든 이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도시는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하여 가장 위험한 집단의 아지트가 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은 예수님에 대한 살해의지를 나타내는 그 기준에 준해서 기존 권세으로부터 무참하고 망가져버린 그들입니다.

베들레헴은 집단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되었고 자식을 잃은 어미들은 통곡을 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 베들레헴에서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린 자들은 이 일이 아기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있는 것으로 참사를 당한 겁니다.

이는 전혀 기존의 선악적으로 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들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 통곡하는 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망해버린 자들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존의 세계에서 안 망하고 승승장구하려고 합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늘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그들도 세상 권세의 횡포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스승,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었다는 점을 확신했기에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동료의 말을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수긍하려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자기 이해를 스스로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히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손을 끌어당겨 예수님의 못자국에 창에 찔려 생긴 창자국에 손을 집어넣게 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사도행전 9:5에서 사울은 세상적으로 거룩한 층에 있다고 자부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너는 나를 핍박했다”는 평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세상사람의 핍박으로 생긴 구멍이 있듯이 그 구멍이 생겨야 합니다.

즉 자신의 중심부에 죽음과 저주와 망함과 공백이 발생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기에 마땅한 겁니다. 이 세상 의미의 연결망에서 날아다니는 대단함과 잘남과 훌륭함과 칭찬받음과 존경받음의 어휘들을 낚아챌 것이 아니라 성도는 충실하게 “왜 나는 매순간 죽어도 당연한 죄인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9)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의를 위해 결사적으로 하나님에게 항전한 바로 그 죄인이 우리임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강-미가 5장 1-4절(가장 위험한 곳)22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5장 1-4절까지입니다.

미가 5:1-4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일단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망해야 돼요. 망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근원이 하늘에, 공간적으로는 하늘에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태초에 계신 분이 지도자로 오시게 됩니다. 기존의 지도자는 망합니다. 그리고 오시는데 그분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하시면서 자기의 양 떼를 친히 먹여서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아무 걱정 염려 없도록 그렇게 지켜주시는 그 작업을 하십니다.

어디서 하는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그 일을 해내신다는 거지요. 그래서 첫째는, 이스라엘이 망해야 됩니다. 스스로 망할 사람은 없으니까, 미가 5장 1절에,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라고 해서 여기 이방 나라 바벨론 군대 군사들이 떼쓰리로 몰려옵니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우리’는 이스라엘을 말하지요.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 망하니까 더 이상 왕이 필요 없지요.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 왕인데, “에워쌌으니” 에워싼 것이 1년 반 동안 에워쌌습니다. 기원전 587년부터 해서 1년 반 동안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망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지금 미가를 통해서 예언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거부하고 이러면 안 됩니다. 둘 다, 이스라엘 망하는 것도 예언되고, 그리고 베들레헴 유다 족속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 태어나시는 것도 예언이고, 예언 중에서 우리 맘대로 이것은 뽑고, 이것은 버리고 이것은 취득하고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언의 스케줄대로 진행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여기 5장 1절에서 4절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하게 여겨야 됩니다. 절차가 그러니까요. 절차가. 앞에 절차가 없으면 뒤의 절차가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분이 태어날 때까지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수모를 당하지요.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이스라엘 속에서 아기 예수님 오실 때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는 거지요. 그 이스라엘은 망하는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망하는 이스라엘 말고 망하는 이스라엘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인가?

그것은 3절에 보면, “그 형제 남은자”라고 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는, 그러나 구원자가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 지명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그냥 지명이다, 어떤 특정 장소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 지명이 단순한 지명이 아니고 메시아가 출생하는 장소다, 메시아가 나오는 장소다, 라는 사실을 알려면 그 지명부터 알고 그다음에 그 지명에서 메시아가 나오겠지, 이런 순서로 해서는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지명이라 하는 것은 일단 인간들이 그 동네 사정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보고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 지명에 대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명에서 메시아가 온다, 해도 백날 기다려봐야 안 옵니다. 베들레헴 가서 지켜봐도 메시아가 오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등장하고 난 뒤에 거꾸로 어디서 태어났는가? 그게 베들레헴, 이렇게 될 때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지명이라는 것, 땅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땅의 사정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을, 본문 5장 1절에 보면 멸망시켜 버립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이 멸망할 이유가 어느 정도는 알고 어느 정도는 모르고, 그 정도가 아니고 아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멸망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태초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의 일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그러한 근거하에 그들은 망하는 거예요.

오늘날 인간들이 지옥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은 머리가, 아이큐가 낮아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이 원래 그래요. 인간이 원래 그래야 망하는 절차가 합당하고 정당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이큐가 낮은 것에 대해서 살짝 기분 좋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게 약간 흥분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망해야 마땅함이 어떤 절차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 절차의 후속 순서로 메시아가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꺼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에 대해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몸을 던져야 됩니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베들레헴에서 메시아 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선악체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라 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확보하고, 확보된 지식 내에서 자기의 삶을, 자기 목숨을 영위하려고 시도하기 위해서 만든 세계관이에요. 세상관.

그게 선악체계에에요. 선악체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쁜 이미지와 좋은 이미지를 둘 다를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선은 좋은 이미지 악은 나쁜 이미지. 이 세상 모든 것을 선악체계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선악체계입장을 보면,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그다음에 보면 “작을찌라도”라는 말이 나와요. 작다는 말은 선악체계에서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고 나쁜 이미지에 속합니다.

제가 관절이 안 좋아서 병원 정형외과에 다녔어요. 물리치료 하려고 누워있는데 물리치료사가 쪽지를 하나 붙여 놨어요. 그 쪽지의 내용이 뭐냐 하면, 저를 부를 때 아가씨, 총각, 이렇게 부르지 말고 ‘선생님’으로 불러 달라는 거예요. 아, 선생님……, 물리치료사들이 지금 세상을 몰라도 너무 철이 없어요.

‘선생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들 체제 안에서 후임자가 초보가 선임자에게 기술 배울 때 자기들끼리 선배님, 또는 선생님, 이라고 하는 거예요. 독일에서 온 제 손녀가 저보고 하는 말이 “할아버지는 랍비 같아.” 하는 거예요. 랍비가 선생님이에요,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 선악체계에서 선생님은 좋은 거예요, 좋은 것. 그래서 물리치료사들이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달라 하는 거예요. 간호사들도 선생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고. 이게 파급이 되어서 물리치료사까지 선생님으로 불러 달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나이들이 다 스물한 살에서 스물세 살 정도쯤?

이 세상의 선악체계에서 나온 모든 의미와 개념들이 기존의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이 관계망을 통해서 좋은 이미지는 위쪽으로, 그러니까 계급이 높은 곳에 고상한 계급에 속해 버리고 그보다 못한 것은 천하고 나쁜 이미지는 낮은 계급에다 두는 겁니다. 큰 것, 좋은 것.

베들레헴은 작은 것에 속해요. 보잘것없는 것. 모든 직업이라든지 관계를 표현할 때 그런 단어들을 보세요. 판사, 검사, ‘사’자 돌림, 좋은 이미지에요. 교사도 마찬가지. 그런데 식모, 나쁜 이미지, 천박한 이미지, 천한 이미지, 유복자, 유부남, 내연남, 내연녀, 전부 다 나쁜 이미지에요.

그 나쁜 이미지의 연결망이 세계관이고 선악체계에서 우리는 그 개념을 뒤집어썼어요. 뒤집어써 가지고 우리는 그것을 탈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높은, 고상하고 높아보 이고 존경받는 그 이미지와 지금 위치 사이에 갭이 있으니까 그 갭을 어쨌든간에 메워보려고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직장 내에서 선배 후배 사이에 ‘선생님, 한 수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라는 그것은 아쉬운 사람이 불러야 되는 거예요. 아쉬운 사람이! 그런데 물리치료 받는 내가 뭐가 아쉬워요?

봉화 골짜기 춘향면 그 촌에 가면 거리에 다방이 좍 있거든요. 옛날 다방이 좍 있는데 거기 가면 모조리 다 사장님이에요. 촌에서 사장할 게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농장주는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데 모조리 사장님이에요. 여자는 사모님.

이게 선악체계에요. 하찮게 보면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는 거예요. 끝까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던 사람이 누구냐? 가룟유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뒤늦게 제자들에게 합류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갔다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나는 못 믿겠다, 하지요.

25절에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합니다. “분명히 죽었던 그 당사자 맞나? 분명하게 죽었던 십자가에 그 죽은 예수님 본인 맞아? 그래서 창에 찔려죽고 못에 박혀 죽었던 그분 맞아? 그런데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 말도 안 되는, 무슨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렇게 다른 제자들이 “선생님을 봤다.” 하니까 “나는 못 믿겠다.”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 하고 난 뒤에 다시 주님 들어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하실 때 도마가 평소에 예수님 부르던 랍비라는 칭호가 날아갑니다.

뭐라고 하느냐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에게 한 수 가르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악체계의 고상한 위치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다른 분입니다, 다른 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나오는 고백이냐?

선악체계에 의해서 우리는 고상하고 선한 것들을 가득 채우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훌륭하다, 대단하다, 착하다, 참 정의롭다, 이런 고상한 개념들로 꽉 차 있기를 바라는 데 그렇게 율법으로 흠이 없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주여 누구십니까?” 할 그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랬어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또는 나사렛 예수다. 예수님의 손에 난 구멍, 못 자국난 구멍, 이 구멍은 왜 난 거예요? 인간이 주님을 직접 핍박하는 거예요. 핍박해서 생긴 구멍입니다.

사울은,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제는 예수님에게 난 그 구멍을 자기 내부의 구멍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선악체계가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거예요. 선악체계에 구멍이 뚫린 겁니다. 사람이 선악체계에 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뭔가 제일 중심부에 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이 선악체계에 의한 이 세상에서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 되려고 아주 결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 결사적인 노력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이 복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태도를 보여주게 돼요. 그들이 바로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들은 이 지명을 이렇게 봤어요. 그들이 사는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본 겁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유대민족이 살고 있는 이 땅이 구약대로 하면 약속의 땅이라는 그 점에 대해서 유대나라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 고상한 사람 밑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그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부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부산 영도에 가면 흰여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강다니엘. 그룹 “Wanna One” 멤버입니다. 바닷가 마을에 벽화 예쁘게 해놓고요, 전부 다 카페가 깔려 있어요.

부산의 연산 3동인가 거기 가면 정국이 외할머니 집이 나와요. 정국이가 누구냐 하면, 방탄소년단, BTS 멤버입니다. 어떤 마을이 새롭게 부각이 되는 것은 거기에 아주 유명세를 떠는 대단한 인물이 등장할 때 동일한 지명이 확연하게 이미지가 확 바뀌는 거예요.

뭐 강다니엘이나 정국이는 나도 누군지 몰라요. 왜? 같은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 약속의 땅을 견지하고 아직도 약속의 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지명이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으면 이것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면 이 예루살렘 자기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메시아를 보내서 우리 택한 민족 이스라엘만 구원한다, 그러한 이념으로 그들은 나라 하나를 딴딴하게 결집이 되어 있는 상태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2장에 보게 되면, 그 예루살렘과 경쟁이 되는 새로운 지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가 등장해서 별을 따라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루살렘에 와서 별이 사라졌어요. 예루살렘에서 별이 끊어졌습니다. 불연속이지요,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헤롯왕보고 “여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데?” 그러니까 헤롯왕이 “어떻게 알았소?” “우리는 별 보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별이 떴을 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별이 “follow me! follow me!” 나를 따라오라는 식으로 앞서서 별이 동방박사를 데리고 오는 거예요.

어떤 지점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 지점까지 이끄시기 때문에 우리는 뭐 딴 데 신경 쓰거나 집중할 필요도 없고 그냥 별 따라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동방박사가 그런 이야기를 헤롯에게 할 때요,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지역에 왔다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 했지요.

그래서 그 헤롯이 제사장과 서기관들 모아놓고 물었어요. “메시아가 행여나 출생한다면 어디에서 출생하겠는가?”라고 하니까 마태복음 2장 6절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요 미가서 5장 2절에 나오는 이 본문을 그대로 마태복음에 실으면서 이런 식으로 예언이 완성되었다는 거예요.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별이 예루살렘에서 없어졌어요. 너는 몰라도 돼, 몰라도 돼, 이렇게 된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메시아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또 몰라야 되는 쪽을, 의도적으로 메시아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없고, 관심 있더라도 악한 마음으로 관심 있는 쪽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각시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악체계가 기세가 등등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가운데서 비록 언약체계에 의해서 유명하지 않은 마을, 미천한 마을,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누군가가 정국이가 오든지 강다니엘이 오든지 누군가가 출생하는 거예요.

이것은 기존의 성스럽고 거룩한 도성 시온, 이 예루살렘, 이데올로기, 이념, 예루살렘 이념에 의해서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 완전히 거기에 빵꾸, 구멍을 내버리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예루살렘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중요하다는 그 생각에 구멍을 내버려요. 그걸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 파괴시키는 방법이 뭐냐? 그 예루살렘에는 별이 인도하지 않는 도성, 별이 나타나지 않는 도성이 되고 말지요. 거기에 선악체계를 유지하면서, 기존의 인간세계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가 합류되기를 간곡히 바라는 이러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도성으로, 저주받은 도성, 저주받은 영역으로 베들레헴 아기 예수를 통해서 작업에 나서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요, 하나님도 쉬지 않고 일해요. 하나님 노시는 분이 아니에요. 베들레헴, 그냥 베들레헴이 아니라 작은 마을, 변변치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마을 중심으로, 선악체계에서 미천하다고 규정 받은 그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지금의 기독교, 종교를 한번 보세요. 어떻습니까? 베들레헴 위주가 아니에요. 예루살렘 위주입니다. 이번에 러시아 부활절날 푸틴 대통령이 미사에 참석을 했어요. 러시아는 러시아정교회라는 기독교분파를 믿는 종교고 그들은 예배를 미사라고 해요. 그 미사할 때 대주교가 푸틴 대통령에게 축복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대통령님, 강건하셔서 하시는 일 마무리 지으시기 바랍니다.”

권력과 결탁된 거예요. 예루살렘은 권력의 집결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알고 있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걸 피해서 거기에 메시아가 오게 하십니다. 동방박사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정치 상황인지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별 따라 왔지요. 그냥 별 따라오다가 별이 끊어졌으니까 물어봤었고 그래서 베들레헴쪽으로 내려갑니다.

약 한 8킬로 정도 떨어졌어요. 제가 가 봤어요. 그럴 줄 알았지, 하는 눈빛들인데 제가 가 봤습니다. 차 타고 얼마 안 가서, 한 십분 갔다 싶은데 장벽이 나타나면서 거기서 베들레헴을 봤어요. 동방박사가 그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방향 틀어서 가는데 그때 끊어졌던 별이 다시 등장했어요.

그리고 그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접근하고 난 뒤에 꿈에, 마태복음 2장 12절입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다 죽었어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그들은 발을 들인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있는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에요. 그 이유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그때를 정확하게 잡는 게 아니고 넉넉하게 잡아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여버렸어요.

다 죽이니 여기는 대살육의 현장이 되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예언된 대로 진행된다는 거예요. 너무나 말씀은 냉정하게 예언된 대로 진행되는데 그 진행되는 장소가 뭐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원인인 되어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집단이 뭐냐? 통곡하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17, 18절에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라헬은 야곱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라헬입니다. 레아가 있지만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어요. 라헬을 사랑했어요. 야곱의 본처기 때문에 그 남편이 야곱이지요. 야곱의 이름이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선악체계가 아니고 생명체계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없어요. 구원될 자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작은 도시, 그리고 그 기존의 권세와 권력, 선악체계를 갖고 있는 권세로부터 위험에 처해서 피신을, 태어난 장소에서 후다닥, 피신을 했지요.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 예수님의 가정에 와서 “빨리 아기 안고 빠져라. 애굽으로 피신하라.”

그 피신하라는 소리를 듣고 피신하고 난 뒤에 아기 예수, 유대인의 왕이니까, 차기 왕이니까, 현재 권력자 헤롯 다음의 차기 대통령인 줄 알고, 왕인 줄 알고 오해해서 ‘내가 왕인데 또 누가 있어? 사전에 찾아내서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 왕은 고귀한 것이고 예루살렘은 신성하기 때문에, 거룩하기 때문에 그 이념을 포기 못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인간이 다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선악체계에서 예루살렘은 고귀하고 성스럽다. 왜? 시편에, 구약에 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하면서 예루살렘을 높이고 있으니까. 그에 반해서 베들레헴은 미가에 처음 나와요. 미가에 나오고 그 전에 한번 나오는 게 있습니다. 룻기에 나와요. 룻기 4장 11절 다윗의 고향으로 그쯤 나오고 거의 나오지를 않아요. 유명한 동네도 아니에요. 정국이나 강다니엘 그런 인물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뭐가 나오느냐? 기존의 권력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이 선악체계에 있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저주받을 세력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서 파멸이 되고 집단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도시로써 베들레헴이 선택된 거예요.

예수님은 빠졌지요. 예수님 가정은 빠졌습니다. 빠지고 난 뒤에, 기존의 러시아미사일이 빠지고 난 뒤에 기존의 분노하는 그러한 악마의 세력이 베들레헴을 폭격을 하니까 거기에 통곡한 자식들, 아무 이유 없이 두 살 밑의 애들이 다 죽었으니까 얼마나 자식이 없어서 통곡하겠어요.

그 통곡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했다는 조건 하에 새로운 이스라엘로 이 땅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다녀가지 아니하면 이 땅에 이스라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

사람들이 미가 보면서, 오늘 본문 보면서 ‘아, 이스라엘 까불다가, 우상 섬기다가 망하는구나.’ 두 번째, ‘어? 2절에 보니까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오네. 아, 그러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 되네.’ 사람들이 예언을 그렇게 해석을 해요. 자기가 베들레헴에 앉아서 죽치고 있으면 메시아 만날 줄 알고.

베들레헴에 앉아서 쌍안경 들고 보고 있거나 예수님 다녀간 것 CCTV 조사한다고 예수님 만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이 망가져야 돼요. 베들레헴의 파괴에 같이 동참하듯이 자기가 죽음의 살육의 현장에 참여 된 자만이 진정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된 자로 간주되어서 그 사람이 바로 베들레헴의 의미를 비로소 아는 사람입니다.

‘아, 베들레헴은 기다린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결국 이 하나님의 베들레헴 백성들, 통곡하는 라헬, 다시 말해서 통곡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그러한 명칭을, 새로운 의미를 갖는 자들은 자기 안에 죽음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저주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망함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공백, 빈자리, 뻥! 하고 빈자리가 들어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서 생겨버린 그 예수님의 몸에 난 죽게 된 못 자국이라는 그 구멍, 창 자국이라는 그 구멍이, 손가락 넣어도 훤하게 들어갈 수 있는 그 구멍이, 이제는 그 구멍과 동일한 구멍이 생겨버린 사람, 바로 이 사람이 베들레헴의 출생지를, 주님과 동일한 주민등록을 같이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애굽에가 있다가 나중에 헤롯이 죽고 난 뒤에는 나사렛 동네로 갑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나사렛 동네의 의미가 뭐냐? 이사야 9장 1절과 6절, 1절부터 보게 되면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멸시받는 자의 인물로 예수님께서 출발해서, 곧 베들레헴에서 주님께서 진즉에 죽을 뻔했다가 이젠 헤롯 죽고 난 뒤에 나사렛으로 왔는데 이곳이 흑암에 속한 동네고 멸시를 받던 동네에서 어디로 향하느냐? 소위 고상하고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소문난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베들레헴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그 피의 살육의 현장, 그 피, 핍박받은 그 피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공격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의 여정이고 거기에 참여된 자가 성도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의 선악체계에 있어서 고상하고, 인기 얻고, 유명하고, 부러움을 사고, 환영받고, 존경받는 그 세계에 길들여져 있어요.

이것은 망해야 될 유대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자기의’ 선생님, 이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그 개념들, 고상하고 천박한 개념으로 계급화되어 있는, 층으로 나뉘어 있는 기존의 이 세상에서 의가 있을 때 존경받거든요.

인간들이 쉬지 않고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존의 날아다니는 고상한 개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어느 동네, 예컨대 광주 계림동에서 누가 태어났다. 광주가 그것 때문에 빛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거기서 태어났거든요. 본적은 지금 박근혜 계시는 논공리지만 출생지는 거기에요. “그러면 뭐? 너 뭐야?” 이렇게 되지요.

우리의 출생지는 예수님의 구멍 난 그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랍비가 아니거든요. “이제는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내 중심부에 구멍이 뚫리면 되는 거지요.

사울처럼 “너는 나를 피박하는 자라”라는 소리를 들어서 아, 내가 남들 앞에 인정받으려 하는 이 자체가 주께서 뚫어놓은 그 십자가 구멍을 내가 세상사람들한테 존경받으려고 그걸 매일같이 그걸 도로 메워버려요. 도로 메운다고요 자꾸 그걸 메워버려요. 남한테 안 지려고 그러니까 자꾸 가치 있는 것들 끌어모으기 위해서 두리번거립니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근심 걱정이 많은 이유가 두리번거려서 그래요. 두리번거린다.강의 간 같으면 한번 따라 해보세요, 하겠는데요, 두리번거리는데 두리번거릴거 없어요. 매일 삶을 통해서 왜 내가 마땅히 죄인인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어째서 죄인인가 죄인인 이유를 찾는 데 집중하신다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날아가요. 걱정 근심 없애는 방법 참 쉽지요, 잉! 참 쉬워요. 지금 나 혼자 웃는 것 같아요.

마태복음 11장 7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십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8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청와대에 있어요, 지금. 옷이 한 두벌이 아니라는데요.

이 세상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거룩한 곳이라고 소문난 그곳에 있어요. 그런데 동방박사가 그곳에 갔다가 거기서 죽을뻔 했어요. 위험한 곳입니다. 모든 자기 의는, 최고의 의는 거기 다 모아진 거예요.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거기 다 집결되어 있습니다. 거기 가면 랍비들 많아요. 선생님, 선생님, 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어요.

거기 가서 어떤 특정 인물을 보고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 하면 맞아 죽습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곳이에요. 위험하지 않으려면 진즉에 주님한테 구멍이 나버려야 돼요. 주님이 인간에게 당했던 그 구멍, 거기에 우리의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주님도 구멍 났네요. 저도 구멍 났어요. 제 자존심도 구멍 나고, 제 잘남도 구멍 나고, 우리 자리가 바로 죽어야 마땅한 자리고, 저주의 자리고, 망해야 될 자리고 공백의 자리입니다.”

제가 사람들 보면서 인간들은 주님 보시기에, 성경대로입니다, 이미 죽은 좀비에요. 그래서 여자는 여자 좀비고, 남자는 남자 좀비고, 둘이 결혼식 하면 좀비 둘이 결혼했고, 아기 있으면 아기 좀비들이에요. 그냥 이야기하면 이게 욕하는 것 같고 과도하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지금 죽는 순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살아올 때 과거에 고민하며 살아온 것, 죽는 순간에 없습니다. 지금 죽는 순간이라고 본다면. 세상 어느 누가요, 내 생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누가 함부로 그렇게 주장합니까? 아무도 주장하면 안 돼요. 10분 뒤 20분 뒤에 죽을 수도 있어요.

죽는 순간에 모든 게 사라진다면 진즉에 우리는 좀비 맞습니다. 이것을 바로 도마는 알았고 사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은 뭐냐? 주님이, 새 술은 새 부대에, 주님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철저하게 죄인 되어서, 철저하게 죄인 되면서 비로소 우리 주님과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집중할 수가 있는 거예요. 고마워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인생 근심 걱정, 그거 다 좀비한테나 줘버리세요. 항상 우리는 감사하면서 못할 게 없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엄청나게 위험한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쳤습니다. 으샤으샤, 하면서 모든 것이 들썩거리는 이 현 세계가 사실은 예수님을 죽인 세계인 것을 우리는 자주자주 잊어버립니다. 남한테 인정받고 내 의를 남으로부터 선택받기 위한 의를 모으는 이 일을 이제는 멈추게 해주시고 왜 죄인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