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2:1-5 / 약한 자와 부활

정인순 2022. 2. 9.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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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와 부활

 

이근호
2022년 2월 9일             

 

본문 말씀: 미가 2:1-5

(2:1)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2: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

(2:4)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2: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탐욕이 있습니다. 그리고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점에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었습니다. 거기서 인간의 탐욕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게 조치당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욕망 혹은 욕심이 있다는 말은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지 못하고 무작정 욕심이 기동되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이 자기 조절이 되지 못하기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땅에서 인간 욕심의 결과를 어떤 것인가를 뼈져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쪽 나라 모두다 이방민족에 의해서 치욕스럽게 끌려가게 됩니다.

예레미야 27:11-12에 보면,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7:12)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과 백성은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살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멍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인의 신체 속하는 목조차도 제 마음대로 돌릴 수 없는 수모를 당하면서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미가 선지는 이스라엘 내부로 일어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탐욕이 멈춰지지 않아서 남의 것을 빼앗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는 약속의 땅에 살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약속에 땅에 살려면 거기에 맞는 인간형이 따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인간형은 이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에 처음 들어오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설정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 살던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어떤 인간의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점을 유지해야 해야만이 하나님의 원하는 인간형으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하고 함께 살기’가 그들의 탐심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인간의 탐심은 ‘홀로 살기의 무한한 질주’입니다.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힘을 축적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멈춰야지 한다고 멈춰지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내부성을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바로 여기에서 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탐욕은 탐욕대로 그대로 노출하면서도 이 탐욕에 의해서 피해보는 자는 함께 생산해내십니다. 즉 출애굽할 때의 본래의 취지는 필히 가해자가 있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적이 이스라엘되게 하시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구원이 우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내에서 구성하시려고 하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면서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을 지닐 인간형을 미리 마련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합치되는 인간형은 인간의 탐심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그 심정입니다.

이것이 애초에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내부에 간직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해놓으신 겁니다. 출애굽기 22:21-24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을 때,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이나 보호를 받지 못한 고아와 과부나 나그네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견인이 되셔서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기에 약속의 땅에 부합되는 상황은 바로 출애굽의 취지를 계속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실행하시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식은 ‘땅 제비 뽑기’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는 너희가 제비뽑아 얻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라고 명하셨나니”(민 34:13)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땅 제비 뽑기’가 ‘사람 제비 뽑기’로 완성이 됩니다.

제비 뽑기가 신약 시대에서 적용되는 바로 곧 ‘부활의 세계’의 등장 때문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인간의 모든 예상과 상상과 기대를 차단한 채 생겨난 세계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지베 뽑을 땅’은 하나님 홀로 정복하신 땅이라는 취지를 살리면서 이 땅을 분배받은 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도움 받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는 ‘탐심이 끊어진 자들의 세계’로서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입니다. 이런 땅의 취지가 신약에서는 부활의 세계상으로 나타납니다. 부활과 제비뽑기와 관계는 사도행전 1:22과 26절에 나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이 부활의 세계가 신약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성령이 사람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성령받은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받은 자들에게는 성령이 오는 것으로 그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모르는 가운데 먼저 성령이 주어졌다고 하니 기존의 유대인들의 사상과는 틀린 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홀로 얻은 것을 무상으로 제비 뽑아 주신다는 점에서 성령의 오심은 곧 출애굽 취지에 부합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이미 하나님에게는 예정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무너져 내린 하나님의 천막이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제대로 완료되기 때문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 15:16-17/눅 2:32) 즉 애초부터 다윗의 장막, 곧 이스라엘은 이 제비뽑기 원칙이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이제 오늘날 성도들은 먼저 성령부터받고, 왜 우리의 육은 그 탐심으로 인해 천국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를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처럼 탐심으로 자력으로 무장하는 식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자리잡은 온갖 탐심과 죄악이 배설물로서 죽을 때까지 방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강-미가 2장 1-5절(약한자와 부활)220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2장 1-5절까지입니다.

미가 2:1-5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둘로 나뉘지요.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나라, 이 두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한 선지자가 미가 선지자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약속의 땅에 살 만큼의 인간이 되지를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요, 이 점이 바로 약속의 땅의 특수성이라는 것도 아울러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땅이라 하는 것은, 땅은 움직이지 않고 그 위에 사는 사람이 경작하면서 살면 사람 뜻대로 경작 당하고 씨를 뿌리면 씨뿌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그러한 대상이 땅이라고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요.

땅이 있으면 개간해서 개간한 당사자가 결국은 그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은 자기 소유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땅이 울뚝불뚝 살아서, 잉어처럼 또는 활어처럼 살아서 대항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땅이고 약속의 땅은 땅에 인격성이 부여되어가지고 그 약속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약속에 위반되어 있으면 그 땅 자체에서 그 사람을 밀어내는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겁니다.

참 이상한 땅이지요. 그게 왜 이상한 땅처럼 느껴지느냐 하면, 그 땅에 사람들이 살게 되면 같은 사람들만 보이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약속의 땅은 이게 사람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이에요. 하나님의 모습을 또는 하나님의 본질을 동일하게 지니지 아니하면 그 약속의 땅에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나랑 같이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형(形)의 사람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궁금한 게 하나님과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됩니까, 라고 궁금해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인간들은 못 산다, 라는 식으로 1-5절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인간형이냐 하면,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는 자,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넣어놓을 때는 약속의 땅의 그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람들을 일단 그 안에 들어가서 살도록 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땅은 흔히 생각하는 보통 인간들 그런 인간형의 사람들이라면 그게 튕겨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거기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만고만하게 살려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인류를 대표해서 살아보니까 하나님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의 그 욕심, 이것은 한도가 없어요. 가졌으면 가진 것으로 고마워하지 않고 계속 남의 을 탐을 내고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그러한 욕망이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욕심내지 말라고 땅을 적절하게 인구수대로 분배를 해줬잖아요. 그게 상속분인데 그렇게 분배를 해줬으면 각자 자기가 받은 그 분배분에 대해서 자족하고 못난 우리에게 이런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각자 그렇게 살면 되는데 남의 떡이 더 보인다고 슬그머니 남의 땅을 보면서 그걸 자기 것으로 차지하면서 이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약속의 땅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약속의 땅 입장에서 살 수 없는 자를 늘 품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약속의 땅의 그 본질과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튕겨져 나가도록 해야 돼요. 나가라, 그 말이지요. 살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을 약속의 땅에 심어놓은 취지가 뭔지, 괜히 들어오게 해놓고 괜히 또 다 나가라는 식으로……, 여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중에 바벨론이나 앗수르 군대가 와서 그들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가는 그날, 3절 끝에 보면 그게 재앙의 날이에요. “재앙의 때임이니라”

4절에 보면 재앙을 당하면서 그들은 엉엉 울고 슬픈 노래를 지으면서 포로 잡혀가는 겁니다. 3절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이 족속이라 하는 것은 앗수르 내지는 바벨론 이 이방민족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그들이 잡혀갈 때에 목에 뭐가 있느냐 멍에같은 것 소를 다룰 때 쓰는 그 멍에같은 것들을 그들의 목에 장착해서 그들이 그 땅에서 추방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비참하지요. 그 끌려가는 모습이. 처참하게 끌려가는 겁니다.

예레미야 27장 11절에 그 광경이 나와 있는데요.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목에 멍에를 멘다. 이게 포로 잡혀갈 때 아주 수치스럽게 꼼짝 못 하게 잡혀가게 하는 거예요.

심지어 앗수르에게 포로들이 잡혀가는 모습이 나오는 나옵니다. 이사야 20장에 보면요, 애굽사람들이 어떻게 잡혀가는가? 그 광경이 아주 생생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엉덩이까지 다 드러냅니다. 그렇게 “드러내어” 끌려가는데 이걸 가지고 “애굽의 수치”라고 하는 거예요.

애굽의 수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멸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끌고 가는 것을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애굽에서 예언을 해요. 예언을 할 때 이스라엘 선지자 이사야 본인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그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의 자태, 모습을 통해서 장차 너희가 이렇게 된다는 식으로 헐벗은 모습으로 애굽나라에서 3년 동안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그 자태, 선지자의 그 모습, 형상은요, 곧 인간의 미래의 모습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애굽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자체의 선지자가 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그 땅에서 도로 나가야 될 운명을 지닌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내쫓을 거 왜 들어오게 하셨습니까, 그러한 당연한 의문과 더불어서 시큰둥한 반발의 태도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 이스라엘이 도로 쫓겨나갈 수밖에 없다면 왜 들어오게 하셨는가? 이게 오늘 중요한 내용의 핵심이 여기에 있어요.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 가난한 자를 탐을 내서 빼앗았다고 미가 2장 1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했지요. 남의 산업을 빼앗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는 빼앗긴 자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빼앗긴 자가 약속의 땅에 부합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왔다가 아무 얻은 것도 없이 어떤 허무하게 그냥 막 나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핵심적인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게 뭐냐? 인간에게 무한한 욕심, 그 욕심의 피해자를 남길 때 그 피해자의 모습이 약속의 땅에 딱 들어맞는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걸 함축적으로 공식을 만든다면 이렇습니다. 자, 공식 들어갑니다. 어떤 공식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를 닮은 사람 만들기에 나서는 거예요. 그 말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욕심에 의해서, 탐욕에 의해서 학대받는 그런 자를 생산함으로써 그 생산된 학대받는 자가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 본인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모습을 이스라엘이 학대받는 자를 통해서 맞춰 들어가는 겁니다. 맞춰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작용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 모습, 자기를 꼭 빼닮은 하나님 자기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 찾기 위해서 내 모습을,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이 땅에 자기 백성들을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단순히 우리가, 성도가 “목사님,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지옥 안 가고 천당 갑니까, 안갑니까?” 지금 그런 질문할 입장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지고 하나님, 어떤 모습을 나에게서 찾고자 하십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나 속에서 예수님 자신을 모습을 어떤 식으로 일치시키는 작업을 해오셨습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질문이 너무 길었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당 갑니까, 이 질문하면 간단하지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어, 떻, 게, 하, 면, 구, 원, 받, 습, 니, 까. 이것은 뭐 10자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시여, 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일치시킵니까?” 이것은 좀 문장이 길잖아요.

우리 성도의 존재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해내는 재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자기가 자기 모습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이 땅에 성도를 가지고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존재이유에요. 구원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쟁취하려고 하지 마세요. 너무나 이기주의입니다. 그건 배후에서 마귀가 시킨 짓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습이라 하는 것은 딱 나왔지요. 이 땅에서, 욕심과 욕심들이 쟁투를 벌이는 이 전쟁터에서 누가 약한 자로서, 가난한 자로서 피해 입은 자의 모습, 고래 싸움에서 누가 새우처럼 터지고 피해 보는가, 그 자리가, 그 모습이 이 땅에 오실 예수님 자신에게 주어질 자기 모습이에요.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한도 끝도 없는 욕심쟁이들을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냥 그들을 통해서 살게 하시고 그들을 추방하면서 그들이 떠나면서 남겨진 것이 뭐 있을 거예요. 그것은 너무나 억울해서, 너무나 억울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처음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은 원형, 출애굽할 때 그 취지의 원형을 간직하도록 이스라엘 내부에 심어놓은 거예요.

출애굽기 22장 21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여기 학대라는 말 나오지요. 학대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여기 해롭게 한다. 아까는 ‘학대’라는 말 나오고 또 ‘해롭게 한다’는 말씀 나오지요. 23절에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같은 처지에서 출애굽 했다는 거예요. 모두가 고아였고, 모두가 과부였고, 모두가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애굽나라에서. 물론 혈육적인 가족이 있지만 그것은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에서 그들이 의지하고 기댈 사람은 아무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기대고 약속만을 쳐다볼 사람들, 그런 취지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원형, 그 간직된 취지를 유지해 줘야만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살 수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나올 때 혼자 나왔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나왔지요. 그 함께 있음을 형성하는 그 관계, 그 관계에서 그들은 나그네요 고아요 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기댈만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전혀 없는 거예요. 그 모습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이 땅에서 의지하고 기댈만한 어떤 사람이나 이웃은 예수님한테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출애굽할 때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요, 출애굽할 때의 그 취지, 그 원형을 고아, 과부, 나그네가 간직하고 있는데 따라서 자기가 고아도 아니고 과부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라서 힘이 좀 있다고 슬그머니 그 불쌍한 고아과 과부나 나그네의 것을 탐을 낸다면 그것은 누굴 건드리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원형을 건드리는 게 되어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버팀돌이 되어 주는 거예요. 그 원형, 출애굽 원형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출애굽기 22장 18절에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찌니라”는 말씀이 함께 나와요. 자, 여기서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는 것은 무당을 죽여버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교회 나오면서 무당 없이 교회 나올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우리는 하나님 믿습니다” 이럴 거예요. 그 하나님이 무당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나한테 복 주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무당을 찾는 것, 뭐 선녀 보살, 부채 보살 찾는 이유가 뭐예요?

약자가 아니고 강자가 되고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이상은 남에게 당하지 않고 남을 내가 이용해서 내 욕심 좀 챙겨보자, 나도 내 희망을 내 힘으로 달성하고 싶다, 그런 순간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무당시 하는 거예요. 뭔가 ‘하나님 힘 많다면서요? 좀 벗겨 먹읍시다’ 그런 거요.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지요?’ 그런 거요.

왜 그런가? 자력갱생하고 싶어서요. 자력갱생.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이제는 더 이상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남에게 마구 당하지 않고 약자 편이 아니라 강자 편에 서서 독자적으로, 스스로 흐뭇한, 내가 보기에도 자랑할만한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인간 약속의 땅에서 땡입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원형을 가려버린 거예요. 빼버린 겁니다. 그게 사라진 사람입니다. 출애굽의 원형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 문제에 강자들이, 돈 많은 자들이 욕심에 더욱 탐이 나서 약한 자들을 학대하고 핍박하는 경우를 유발시켜 놓고 그 이스라엘을 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만듭니다. 쫓겨나는 그 모습이 출애굽 당시의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올무, 굴레 지워서 이방 민족한테 끌려가게 만들어요.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함께 살게 하겠다는 이 계획은 그러면 무산되는 것인가? 하나님 스스로 계획해놓고 그것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그냥 방치하실 것인가? 여기서 선지자 미가, 아모스뿐만 아니고 하박국 등 여러 선지자를 종합해서 보게 되면 여기에 깊이 하나님이 새겨놓은 비밀이 나옵니다.

그 비밀, 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의 자생적인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튕겨져 나온 거지요.그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간 것은 사실은 막다른 골목에 간 거예요.

막다른 골목에 가 본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차를 타고 막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아직 공사 중인 도로가 되어서 한 20킬로쯤 가니까 “공사 끝 지점”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달려오던 그 기분에 의해서 그냥 막 엑셀레이터 밟고 달려버리면 길은 막혀 있고 차는 달리고자 하는 탐욕을 가지고 계속 달리니까 바퀴가 어떻게 돼요? 바퀴가 헛돌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니까 돌아서자’ 이런 인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계속 욕심이 내부에서 차오르니까요. 어느 정도 되었다 해도 또 계속 차오르니까요. 여러분도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 해 봤잖아요. 이런 소리 참 미안합니다만. 전교 1등으로 만족하던가요? 전국 1등 해야지요, 전국 1등. 이게 바퀴가 멈추지를 않아요, 바퀴가!

그래서 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가게 한다는 것은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약속의 땅은, 인간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 내부적으로 어떤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나는가를 제대로 막다른 길에서 알려주는 그 장소, 이스라엘로 대표해서 보여주는 그 장소가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때릴 때에 인간은 욕심은 있고 그 땅 막다른 길에서 하나님이 “나는 그런 인간형을 만든 적이 없다”고 내쫓아 버리면 그러면 욕심이 알아서 율법대로 멈춰주면 고맙겠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치료할 수 없거든요. 인간의 욕심이 스스로 자기가 ‘욕심아, 멈춰라’ 한다고 해서 욕심이 멈춰집니까? 욕심이 멈춰지지 않는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욕심이 있는 인간, 이 세상에 범죄 한 인간의 기본이에요. 욕심 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예요.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선을 원하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나’가 있는데 그 나가 선을 원하는 나를 이겼다는 겁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18-24)

욕심이 나를 이긴 거예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파탄 났다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은 나는 완전히 다 찢어지고 터져버렸다, 파탄 나버렸다는 그 뜻이에요. ‘나, 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어떤 형편도 되지를 못한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하박국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취지가 명확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여기에 하체 이야기가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말씀은 할례라는 말을 이 땅에서 누구한테만 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었어요. 지난 수련회 여호수아 할 때 했잖아요. 그러면 이방 민족은 할례 하지 않은 겁니다. 유일하게 할례 한 자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할례를 해놓고 욕심을 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네가 할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을 낸다면 너는 할례 행한 인간형이냐, 아니면 할례 행한 적이 없는 이방 민족의 인간형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만약에 할례를 행해놓고 계속해서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할례 없는 자가 욕심내는 것은, 그것은 망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인간형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씀하는 것은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할례에 부합되는, 할례에 맞는 그런 마음조차도 할례 행한 마음의 사람들만 이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 하박국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할례 행했다는 것이 뭐냐? 할례 행했다는 말은 고추가 없다는 뜻이에요 고추가 잘린 거예요. 이제부터 좀 난해하니까 여러분이 정신 좀 바짝 차려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인간형을 두 개로 해놓았습니다. 인간형을 두 개로 해놓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걸 두 언약이라고 하는데요.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인간형에 두 종류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할례 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인간형, 이게 신약에 와서는 성령 받은 인간형, 그리고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형, 이걸 육체에 속한 인간형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원한 약속의 땅에 살 수 있고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약속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약속이 그렇게 인간형을 둘로 구분 지은 겁니다.

29절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다고 방금 제가 언급했잖아요. 누가 핍박하느냐 하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을 하는 거예요. 핍박을 하니까 그다음 30절에 이 더러운 여자, 육체로 난 여자의 자식들을 내어쫒으라, 해요. 그 사람들은 하늘나라 유업을 더불어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유업, 하늘나라 천국에 같이 가지 못하게 하나님의 조치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겁니다.

다시 미가에 들어가 봅시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모든 인간은 욕심이 있어서 욕심을 멈출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욕심이 있는 인간은 약속의 땅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욕심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내게 해놓고 욕심을 냈다는 그것이 무엇과 어울리지 않느냐, 네가 할례 행했다는 그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그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에 나의 욕심이나 내 마음의 소망이나 기대감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고 되어버리면, ‘내가 약속의 땅에서 살아야지’ 하는 그것조차도 어디에 해당 되느냐? 할례없 는 자들이 갖는 희망사항이고 욕심에 해당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땅이 있으면 인간은 내가 그 땅에 살아야지, 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것을 뭘 로 보냐? 욕심으로 보는 거예요. 욕심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내게서 나오는 욕심에 준해서 내가 거기에 맞춰서 인간형을 구성하는 것이 그게 욕심에 맞는 형(形)이에요. 그러나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어떤 다른 분이 내가 원하는 이 육의 연속성을 강제로 끊어버린 거예요. 할례를 통해서 끊어버린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출애굽할 때 같이 동행했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로 끌고 가는지 여러분 뭐 혼란스럽지요. 뭐냐 하면 ‘길은 네 신체에 있다’는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이 네 신체에 있다는 겁니다.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내 욕심을 끊어 버려야 되는데 인간은 욕심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약속의 땅에서 내보내야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가난한 자에게서 만날 빼앗기만 하고 학대당했던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습니까? 못살지요. 가난하다는 이유, 가난하다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자기 인간형이 아니에요. 다만 학대받는다는 점에서 하나님 자기 인간형은 맞지만 학대받는다는 조건, 피해자라는 조건이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이제 미가 본문을 봅시다. 미가 2장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되어 있지요. 여기에 제비뽑는 것, 제비 몰고 나간다, 그 제비 말고요, 제비뽑는 게 나와요. 제비뽑는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 땅을 차지할 권한과 자격이 구비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가라. 다 나가라” 다 나가고 난 뒤에 주님께서 그 땅을 홀로 차지해 놓고 “자, 내가 홀로 차지했다.” 그렇다면 이 땅을 차지함은 땅을 홀로 차지한 주님 자신의 이름, 자기의 명예로서 일방적으로 제비뽑아서 땅을 나눠서 제공하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이 받아들여야 했던 주님의 뜻입니다.

민수기 34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는 너희가 제비 뽑아 얻을 땅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비뽑아 얻을 땅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이 들어갈 자격 없는데 제비를 뽑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자격으로 너희는 들어가는 거예요.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끌고 가지 않겠습니다. 너무 골치 아프니까 결론 부분부터 간단히 하겠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행전 1장에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유다가 빠지고 난 뒤에 마지막 제자를 뽑을 때에 조건이 뭐냐 하면, 22절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여기 ‘부활’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두 사람을 세워서 그 중 한 사람을 뽑는데 조건이 있어요. 두 사람 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비를 뽑는데 누가 뽑히는가? 26절에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부활이에요. 이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쪽에서 일방적인 조치가 취해진 환경이 부활이에요. 내가 부활 만드는데 기여도가 전혀 없게 된 상황이 부활이에요. ‘나 저 땅 차지해야지. 나 천국 가야지. 구원받아야지.’ 그런 기여도가 전혀 없이 그냥 제비뽑듯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천국에 넣어준다 그 말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살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거예요.

다른 설명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21절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렇게 이야기하시고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고 했다고요.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이 말은 제비뽑아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15, 16, 17절에 죽 나와요.

이방인들이요, 예수 믿는다, 하니까 예루살렘 유대인들, 고참들이 기분 되게 나빠한 거예요. 야고보부터 해서 “율법도 안 지키고 무슨 성령이 오느냐? 순서가, 율법 오고 난 뒤에 죄 회개 하고 그래서 성령이 와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했습니다. “율법이 없는데 율법이 오는 절차 없이 어떻게 성령이 올 수 있느냐?”

그렇게 처음에는 상당히 반발했을 때 사도바울이 설명했지요. “성령이 오는데 우리가, 같은 우리 인간이 ‘오시면 안 돼요. 도로 가세요’ 이럴 수는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럴 때 야고보가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 14-16절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다는 말은, 다윗의 장막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땅 그 땅은 주님께서 제비뽑아서 일방적으로 제공된 땅이라는 그 취지가 계속해서 간직되고 유지될 때 그 간직되고 유지된 그 몸에 그런 취지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라 그 말이지요.

그게 뭐냐? 바로 이방인에게 성령이 직접 온 거예요. 사도행전 15장 8절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성령이 직접 오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이방인 입장에서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율법 지켜서, 그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을 깨달아서 ‘주여, 도와주소서.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니까 성령이 오는 게 아니고 이방인들은 성령부터 먼저 오고 오히려 의아해 하는 거예요.

‘왜요? 왜 내가 천국가 야 됩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분과 영원히 천국에서 복락을 누려야 될 이유가 납득이 안 됩니다, 주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본인이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의 탐심을 내는 그 항목 속에 들어 있지를 않아요. 성령이 오니까 야~, 이게 바로 성령세례, 다시 말해서 나의 과거의 육으로 살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어떻게 육의 요소가 내 신체를 통해서 나타나는가,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계속 그 육적 요소가 터져 나오게 하는 거예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약한 자들입니다. 자기 게 없어요. 신약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들, 그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의 그 모습을 미가는 앞당겨서 미가서에서 인간의 사적인 무한한 욕심에 의해서 피해를 보고 억압을 당하는 그 가난한 자 그러면서도 대항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거할 수 없는 무력한 자, 그 모습, 그 약한 모습, 그 연약한 모습이 신약에 나오는 부활의 성령 받은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왜?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려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자립갱생해서 인생 더 끌고 나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왜? 마음의 할례 받았으니까. ‘나 고추 없~다.’ 스스로 자립할 수 없어요. 이 고추 없~다, 는 것이 어디 나오는가 하면,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나와요. 야곱이 당했던 것은 고추 부분이 작살난 거예요.

그래서 이름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바뀐 겁니다. 전에는 환도뼈라는 것이 생식기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적인 생식능력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물론 그 뒤에 애 하나 더 낳기는 하지만. 이 모습, 내 육의 모습을 자식에게 퍼트리는 것이 아니고 이 육의 모습을 치신, 이게 탐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치신 그 이스라엘의 힘이 이제부터는 나의 힘이 되는 거예요.

그 힘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넉넉하게, 만족스럽게, 충분하게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나그네가 되는 겁니다. 왜? 오직 우리는 주님만 쳐다보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이게 바로 출애굽 취지에요. 출애굽의 정신이 항상 간직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적인 탐심을 죄로 규정시켜 놓고, 그것과 무관하게 구원을 시켜놓고, 부활의 성령을 줘놓고 “자, 이제 슬슬 욕심 한 번 내봐라. 그때마다 내가 조져줄테니까” 평생토록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계속해서 욕심이 계속 나오게 하는 거예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꿇리기 싫어하는 것, 자존심은 다 챙기는 것, 그때마다 뒤통수 맞고, 때마다 뒤통수 맞고, 맞고 또 맞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자빠지면서 감사하고, 얻어터지면서 감사하고, 바로 나는 곤고한 사람, 나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착한 짓 하지 못하는 사람, ‘주여, 나는 이렇게 망가진 인간.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찬양하리라.’

이런 나를 위해서 주께서 이미……,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미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그 주님만 찬양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 것으로만 만족하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주의 모습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 내부로 되어 있는 죄 자체요 탐욕인 것을 이제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고백하고 꺼내놓는 그자가 진정 주의 모습이고 가난한 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아니면 영생이 없었다는 사실을 곱씹어 가면서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