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상

역대상 5:1 / 장자의 허구성 / 220204

정인순 2022. 2. 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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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20204a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역대상 5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여기 먼저 태어난 자가 장자다. 에서와 야곱이 있는데 쌍둥이인데 먼저 태어난 사람은 에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라 하고 야곱을 차자, 그 다음 사람으로 생각해요. 이삭은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에게 장자로 주어질 때 모든 복을 에서에게 몽땅 다 맡깁니다. 야곱은 에서를 장자로 인정하는 조건 하에서만 야곱이 에서의 복에 참여하는 그런 방식으로 아버지 이삭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서가 장자라고 생각한 이 장자가, 장자가 아니고 누가 장자냐 하면 야곱이 장자가 되지요. 야곱이 장자가 되게 되면 그림으로 그려서 이삭이 이렇게 서 있잖아요. 이게 바꿔버리면 이삭이 거꾸로 처박히지요. 이삭이 완전히 밀어줬던 그 장자가, 장자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정체, 또는 정체성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이건 가짜였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서를 먼저 태어나게 하고 태어나게 했으니까 마땅히 장자라고 여겼던 그 안일한 나의 판단, 나의 평가, 해석은 하나님 쪽에서 바꿔버리니까 이쪽의 것이 같이 연결됐으니까 완전히 뒤바꿔지는 거예요. 이걸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로 인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었다. 내 생각에 내가 천국 가야지 하는 천국은 백 퍼센트 전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 뒤바꾸는 이 원칙 때문에.

그래서 반대로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해, 라고 한다면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혹시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천국 보내주지 않을까, 이런 통박, 이런 계산 그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건 더 못 됐어.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간단해요. 나로 인한 천국이, 천국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천국은 나를 제치고 달리 등장하시는 그분의 나라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조건 하에 우리는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은 나 살기 위한 나라가 아님을 지적받는 그 조건 하에, 그러면 그 천국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의 세계다? 주님의 세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에서 입장에서는 야곱이 남이거든요. 자기 자신이 아니잖아요. 동생이잖아요. 자기 몸뚱이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에서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야곱의 세계를 자기 세계보다 더 좋아하면 되겠지요.

이게 아까 제가 말한 이거잖아요. 나로 인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면 나 중심 말고 다른 분의 중심이 된 그게 천국이라면 나는 기꺼이 나 중심의 천국을 날마다 포기하면 되지요. 참 쉽지요. 내 중심의 행복, 내 중심의 가치, 내 중심의 의 이런 걸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되진 않아요. 여기서 긴긴 역사가 필요해요. 그 역사가 무슨 역사냐?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은 원래 이름이 야곱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란 것은 야곱이 펼쳐진 역사, 야곱의 역사에요. 야곱의 역사에서 뭐가 나오느냐?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여기 물줄기가 몇 개 나오느냐 하면 물줄기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두 개의 물줄기가 나오지요.

오늘 역대상 5장 1절 할 때 그 물줄기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 물줄기가 등장하지요. 그래서 르우벤이 등장하면서 르우벤은 르우벤의 자리와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이 자리바꿈이, 르우벤이 장자라는 자리가 바뀌면서 르우벤이 바꿔져야 되는 거예요. 르우벤은 열두 아들 가운데 몇 번째 태어난 아들이에요? 첫 번째지요. 그럼 아까 제가 말한 원칙에 의하면 첫 번째는 항상 이건 뭐다? 하나님께서 틀어버리는 그 원리에 의해서 첫 번째는 첫 번째가 아니었던 겁니다. 첫 번째가 아님을 알려주는 첫 번째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게 르우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나로 의한, 나로 인해서 생각되어지는 천국은 가짜다, 라는 것을 아는 순간에 우리는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아낌없이 버릴 수가 있어요. 나로 인한 것은 천국과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아까 어떤 분에게 참 똑똑하다고 이야길 했는데요. 똑똑한 이유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빨리 목적을 달성하느냐가 아닙니다. 인생은 올림픽이 아니에요. 게임도 아니고 주식투자도 아니에요. 얼마나 많이 쌓고 모으고 긁어모으나가 아닙니다. 네가 지금 인생 방향이 어느 쪽이냐가 중요해요. 그 방향이 제대로 됐다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게 달란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여러분 다 아시죠. 열, 다섯, 한 달란트. 교회 좀 다니면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그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는 직원의 특징이 방향이 자기 쪽이 아니고 주인 쪽에 있다는 거고요. 거기서 주인한테 잘려서 울며 어두운데 쫓겨난 직원은 방향이 주인 쪽이 아니고 방향이 자기 쪽이에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걸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목적과 의미를 가지지 말아야 된다.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사는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만들면 안 되게 돼있어요.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힘들다 하는 경우 있지요. 힘든 경우 왜 힘든지 제가 알아 맞춰볼까요? 그게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적이 있으면 반드시 힘들게 돼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로또를 우연히 구입하게 됐는데 그게 1등에 당첨됐다. 1등 상금 타기 위해서 은행에 갈 때 여러분 굉장히 힘들어요. 왜 힘드냐 하면 가다 엎어지고 자빠지면 어떻게 될까? 신나면서도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아요. 뭐 당첨 안 돼서 모르겠습니다만 상상하면 돈이 수십 억 들어온다는 것은 새로운 스트레스가 침입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들어오는 겁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계신데......

항상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이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내 사는 이유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다보니까 점점 여러분들은 괴로운 인생에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목적과 의미는 내가 나 잘 되기 위해서 하는 목적과 의미기 때문에.

세상의 돌아가는 중심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고집스럽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기를 고집하니까 이 고집 때문에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본인 탓이죠. 본인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자식 둘 있는데 자식 둘 잘 되길 바란다. 그때부터 부모는 힘들어져요.

그래서 오늘 핵심은 뭐냐 하면 장자 재구성입니다. 장자가 된다는 것, 르우벤 이야기거든요. 르우벤이 자기가 장자라고 여기잖아요. 남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그것을 자기에게서 뽑아내요. 그게 불가능하죠. 누가 뭐라도 먼저 태어났는데요. 창세기 49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것 보기 전에 창세기 29장 보겠습니다. 르우벤이 처음 태어날 때 이야기거든요. 창세기 29장 32절에,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 구절 레아가 남편과 동침해서 임신해서 제일 먼저 낳은 아이가 르우벤이었어요. 그래서 르우벤의 바탕은 없음입니다. 이런 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요.

르우벤의 이름의 뜻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레아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 들어주셨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의 어려움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지금 레아는 들어줬다고 기도응답을 착각하고 있어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기도응답을 받을 수 없는 대상이에요. 인간의 기도응답은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 안 하거든요. 하나님이 상대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나의 괴로움을 들어주셨다는 것은 누가 중간에 빼앗아가야 하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님이 이 르우벤의 괴로움을 자기 것으로 옮겨가요. 옮겨가서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그러니까 주님 자신이 르우벤이 되는 거예요. 기도의 응답이 르우벤이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이 땅에 없어야 될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야곱의 아내 라헬과 레아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여러분들이 내 이야기를 모른 척하시는 데, 모른 척하는지 진짜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들어보시면 아아 그 원리구나, 라는 걸 아시게 될 것입니다. 자,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 앞에 쫓겨났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상대할 인간은 없습니다. 상대하려면 쫓아내질 않습니다. 쫓아냈으니 상대할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없는데 여기 뭐가 주어지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요. 언약이 주어지면 언약의 특징은 없는 자리에 사람이 새로 생겨요. 신기하지요.

언약의 특징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게 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자손 아니지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이삭이지요.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이디어에 없는 존재에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 내 아들이 생길 것이다. 그건 아브라함 자기 생각이고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언약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것이 징후가 남겨져야 되기 때문에. 언약이 오기 전에는 없어야 되고, 언약이 오고 난 뒤에는 없던 데서 새로 생겨야 돼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에서 아들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바로 이삭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아들은 종에서 태어난 아들이거든요. 하갈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하갈로 해서 낳게 해놓고 자식이 있음을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보여줘 놓고 그 일이 먼저 발생되게 해놓고, “자식 있지, 있지?” “있습니다.” 있으니까 그거는 아니에요. 있으니까.

인간이 있는 식으로 있는 것은 자식이 아니에요. 그걸 여러분 자식한테 적용시켜보세요. 내가 여기 태어났잖아요. 태어났으면 죽어서 어디 가고 싶어요? 지옥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 천국은 나로 인한 천국이기 때문에 있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별로 놀라운 논리도 아니지요, 뭐.

하나님께선 인간과 상댈 안 해요. 기도응답이고 뭐고 인간이 있어야지 마음에 드는 인간이 없는데 무슨 기도에 응답하고, 상대할 가치도 없는데 상대합니까. 상대할 가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요 언약 안에서 새로운 인간 류, 인간 종류를 만들어요. 새로운 인간 종류를 만드는데 이 인간 종류가 만들어질 때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하면 장차올 미지의 세계, 이스라엘 역사가 끝난 멸망한 그 지점에 미지의 인물을 토대로 해서 그 토대 안에 있는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언약, 천국 백성이라고 만드시는 거예요.

자식을 성경에 있는 이야기해보겠어요. 성경에 없는 이야길 하면 너무 복잡해지니까. 룻기 4장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나오미의 아들이 아니고요 나오미의 손자를 낳은 거예요. 나오미의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 오벳이에요. 룻이란 사람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모가 할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 또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거기서 아들이 생겨서 그 다음에 손자가 생겼다. 이게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우리의 상식과 제가 아까 처음에 했던 이삭에 제일 먼저 나온 에서를 장자로 했던 것이 지극히 너무나도 인간세계에서는 마땅하고 상식이죠.

주님께서는 그걸 뒤엎어버립니다. 야곱과 에서에서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야곱이 장자가 되고 에서가 장자에서 탈락이 돼요. 그냥 탈락이 아니고, 탈락이란 말 어려운데요. 미리 이야기할게요. 인간에게는 타락이란 게 없고 탈락밖에 없어요. 탈락을 통해서 타락을 설명하게 돼있어요, 성경은. 성경에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너 아니고, 너 말고 다른 분 이런 식이에요. 너는 탈락이야, 라고 하면서 다른 분을 소개해요.

나의 탈락됨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자기의 타락도 동시에 수용하면서 이것이 내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내가 뭘 아는 게 아니고 내가 뭘 지식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놓여있는지 알면 되는 거예요. 그게 나 위주의 나로 인한 나라가 아니고 주님 위주의 나라를 따로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 없는 하나님은 그냥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지어낸 거예요. 이슬람의 알라신처럼, 힌두교의 잡신처럼, 불교의 미륵보살처럼 전부 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신이에요.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도 이야기했잖아요. 신은 죽었다고요. 니체가 말을 잘못했어요. 신이 죽은 게 아니고 신은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니체는 그것까진 몰랐지요. 애초부터 신이란 건 없었어요. 왜? 인간은 신에 대해선 모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 있고 인간은 하나님 밖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증명해주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음을 하나님 쪽에서 언약으로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이 다가오게 되면 그냥 에서 같은 경우에, “그래 네가 장자다. 내가 너한테 빌어먹고 살래.” 이러면 자기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에서의 본질이요 동생한테 빌어먹고 사는 본질이 아니라 에서의 본질은 장자의 명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본질이에요. “내가 중요하지 장자가 뭐 중요해.” 이게 에서의 본질이에요.

예수님을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면 그래 나는 이제 나를 부인하고 예수 믿을게, 이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예수 없이 살지, 뭐. 무소의 뿔로 가라 했는데 내 인생 내가 개척하면 되지 뭐. 꼭 예수 의지하고 예수에 빌붙어 살 필요 뭐가 있겠어.” 이거는 인간으로 숨길 수 없어요. 사람이 처음에는 교회 가겠습니다, 믿어줍니다, 라고 아부도 하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결국 교회 오십 년 다니고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다 해놓고 결국 내 인생 내 힘으로 살았지 누구 힘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해요. “예수가 뭔데 내가 중요하지 예수가 뭐 중요해.”

지금은 아직 죽을 때가 안 돼서 속으로 숨겨놓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늘 나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사화산이 아니고 활화산이에요. 속에 부글부글 끓습니다. 처음엔 누르고 있으니까 자기의 본심을 안 드러내는 데 뭔가 일이 탁 터지면 속에서 눌렸던 것이 폭발해버리지요. 붉은 마그마가 막 쏟아지고 주위에는 화성암이 생성되고 폭발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걸로 폭발해버려요. 내가 천국 가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조건이 점점 더 많아지느냐. 나는 더는 못 참겠다고 이런 식으로 폭발해버리지요. 기독교 아니면 다른 종교 없겠느냐, 이런 식으로. 다른 신은 신이 아니냐. 산으로 정상에 올라가면 되지. 가는 길은 다양하다. 이상한 소리 해가면서 그렇게 하게 돼있어요. 주로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 많이 해요.

그래서 인간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고 내가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신이다. 이런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19장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버리라 하잖아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해놓고 그 다음 순서가 뭐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 에서와 야곱 경우 알지요. 없는 자가 있다고 여기는 거울 보면 내가 있잖아요. 있으니까 그거는 가위 표에요. 아니에요. 눈에 보이니까 아닌 거예요. 나 말고 없는 자를 위한 천국이란 사실을 여기 눈에 보이는 나 스스로 그것이 떨어져나가야 되지요. 내가 나에게서 떨어져나가면서 없는 분을 위해서 내가 있게 되었다는 이 관계가 언약 관계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천국 가기 위해서 언약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라고 있는 것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없는 분이 오셔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 마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건 너무나 상식이에요. 성경에서는 언약적으로 이걸 뒤집어버립니다. 후손이 누굴 끌어당기느냐 하면 나중에 나타난 후손이 앞에 나타났던 선조를 끌어당겨서 구원하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그분이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것을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약에 예수님의 영이 미리 그들에게 찾아가서 만들었고 찾아갔다 이렇게 표현해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 1장 같은 경우에는 도대체 시간을 완전히 반대로 적용시키니까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상당히 난감하지요. 성경 자체가. 내가 어떻게 이익을 얻을까 해서 성경 보는데 성경은 맨날 너 아니래, 너의 성경해석이 보탬이 안 된데요.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감추어놓은 미리미리 안에 화산처럼 들끓는 나의 버림받아 마땅한 죄성을 노출시키라고 성경을 준 거예요. 그게 노출이 돼야 언약이 나타나거든요. 언약을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이게 숨겨진 내가 따로 빼돌린 나의 죄성이 마치 언약이 자석이라면 나는 이 안에 들어있는 쇠붙이가 되어 언약이 오게 되면 딸려 들어가요. 딸려 들어가면서 내장 해부 찢어지면서 속에 들어있는 내 마음이 언약에 죄란 모습으로 들어붙게 돼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르우벤은 먼저 태어났지요. 장자지요. 그 르우벤이 장자에서 탈락합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일관된 원칙이에요. 장자 만들어놓고 먼저 된 자 만들어놓고 나중 만들어요. 이거는 구약도 신약도 모든 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우리의 후손이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 후손은 여러 명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 명입니다.

그래서 이 숫자만 기억하면 돼요. 1━12━1. 이(앞에) 1은 보이지 않는 1일에요. 없는 1일인 데 야곱은 한 명이잖아요. 여기서 열두 명 나왔지요. 열두 명이 뭐냐 하면 야곱의 육적 요소에요. 야곱이 자기 아내들과 혼인해서 애를 낳았잖아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로 시작해서 족족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하고 하나님께 부정당할 육적인 아이들이 생산됩니다.

그렇게 부정당할 때 부정당한 요소가 언약이 찾아와서 전부 다 부정당하면서 부정당한 언약에 의해서 없던 데서 생기고 없는 데서 살아나는 그 근거는 장차오실 이스라엘로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그것이 밝혀집니다. 창세기 29장, 30장 보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것 마무리 지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9장, 30장 보면 열두 아들 낳고 이름 하나씩 짓는 게 나와요. 근데 여러분 물어보겠어요. 그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이름입니까? 이런 질문도 되고요 이 이름이 야곱의 이름입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입니까, 라는 질문도 동일한 질문이에요. 여기에 르우벤 그 다음에 시므온, 그 가음에 셋째 아들이 레위, 넷째 아들이 유다인데 창세기 29장에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야곱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이름입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인데요. 왜 잘못된 질문이냐 하면 둘 다 돼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이름이. 시작은 야곱의 이름이에요. 시작은 야곱의 이름인데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바뀔 때 야곱의 이름으로서의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것은 전부 다 제거돼야 됩니다. 사람의 육의 이름은 제거되고 제거되게 하는 작용에 의해서 거기서 주의 이름이 하나로 통합이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르우벤이 르우벤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라니까요. 주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르우벤.

창세기 29장 33절에,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했다는 뜻이에요. 아까 첫 번째와 비슷한 응답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응답해요. 왜냐?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구원의 노선은 이미 확정됐습니다.

거제도 가면 무슨 다리가 있습니까? 거가대교가 있지요. 그러면 그 다리 말고 딴 길로 갈 수 없지요. 이미 다리가 확정되었다니까요. 무엇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내 이름은 그 앞에서 어떻게 돼요? 삭제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 삭제를 내가 내 뜻으로 내 힘으로 삭제가 안 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내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되겠다는 목적, 복 받겠다는 목적,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목적,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목적, 그 목적들을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나의 목적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 걸 보라. 그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우리한테 되풀이하는 반복시키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왜 필요합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했는데 나중에 그 백성 속에 누가 왔어요? 메시아가 왔을 때 그 메시아를 누가 죽입니까? 메시아 죽인 자들이 누구에요? 합세해서 이구동성으로 누굽니까? 유대인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자들이 죽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니잖아요.

인간은 본인은 인간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아니에요. 그냥 무기물이에요. 인간 속에 산소가 제일 많고 그 다음에 수소, 규소도 많고. 인간은 원소 덩어리에요. 그냥 흙이에요, 흙.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할 때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흙에서 만들었지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흙에서 만들었습니다. 들어봤어요? 진짜 들어봤지요, 이 이야기.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본전입니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면 본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마음의 상처라든지 되지도 않는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마음의 상처라니요? 무슨 교만이 이런 교만이 다 있어요. 외롭습니다. 흙이 뭘 외로워요. 달이 벌벌 떱니까, 외로워서? 짜증나서 못 살겠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짜증냅니까? 수성이 짜증나서 못 살겠다고 그런 소리합니까? 뭔가 괴물이 들어가서 그래요. 그냥 흙이면 산소, 질소 가만있잖아요. 그냥 무기물은 원소 아닙니까. 가만있잖아요. 왜 우린 가만 못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나름대로의 목적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려고 누가 시켰습니까? 배후의 악마가 시켰지요. 누가 시키겠어요. 너는 네 이름을 챙겨라. 르우벤이 실패한 이유가 자기 이름 챙겨서 그런 거예요, 이게. 이게 우리가 간직해야 될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버릴 이름이에요. 버릴 카드라고. 패가 버릴 패라고.

내 자존심, 내 가치, 자존감 전부 다 이거는 조기 폐기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는 폐기 안 합니다. 왜? 못 하니까. 누가 악마를 이겨요? 악마를 아무도 이기질 못해요. 악마 못 이깁니다. 괴로울 땐 교회 나오고 편하면 안 나오고. 이게 인간인데 뭐. 자기만 챙기면 그만인데 이 버릇을 이 본질을 누가 이깁니까. 그래서 이거 하나 정리해야 돼요.

인간의 정체성이란? 정체성은 나는 나다 이 말이죠. 인간의 정체성이란 남이 나를 알아주는 방식이에요. 내가 이렇다고 우기지 마세요. 나는 이렇게 잘 났다 우기지 마세요. 그건 사회에서 인정 안 해줍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주는 그게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에요.

티비 거의 안 보는데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솔로 게임이란 게 있어요. 서울 출신 말고 시골 출신 남자, 서른둘부터 해서 마흔넷까지 나오던데 이렇게 촌에 있는 노총각들, 예천이라든지 수원, 하여튼 노총각들 다섯 명과 이십 대 스물아홉부터 서른다섯, 일곱 정도 되는 노처녀 다섯 명을 3박4일간 한 건물에 지내게 해서 나중에 짝 맞추는 게임이에요.

짝 맞추는 게임에서 처음에 자기 직업부터 소개합니다. 나는 치과의사입니다. 나는 안경점합니다. 나는 공무원입니다. 괜찮은 직업들 갖고 있어요. 여자들 직업도 괜찮아요. 전부 다 소개하는 거예요. 자, 나의 직업을 소개하는 것은 나의 정체에요. 내가 아는 나다움이에요. 그런데 정체성은 뭐라 했습니까? 예천인가 어디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안경점을 하는데 그 건물이 아버지가 준 4층 건물인데 자기는 건물주라는 거예요. 나이는 서른일곱 쯤 됐는가, 그래요. 한 팀 말고 아무도 안 됐어요. <나는 SOLO(나는 솔로)>

자기 자신이 이렇다고 내세울 데 문제는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여자들 솔로들이 백날 해도 나는 당신을 받아주기 싫으면 끝나는 거예요. 결혼이란 조건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떻게 되든 내가 받아주면 무조건 내 배우자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혼인을 해서 죽을 때까지 나는 사람 너무 좋아서 받아주었다가 계속 가요.

그러니까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가, 그 사람 소속이 돼버려요. 특히 부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거든요. 그러면 이 원리를 그대로 이야기해봅시다. 나의 정체성은 뭐냐? 남이 나를 받아주는 한, 성경에선 언약에선 남을 누구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을 여기다 집어넣읍시다. 그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는 방식은, 이것은 우리 쪽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백날해도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지요.

그러나 조건을 방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내가 지옥 가고 싶어 몸부림 쳐도 지옥 갈 수 없는 거예요. 왜? 그 방식이 나를 꽁꽁 묶었으니까. 그걸 흔히 하는 사랑의 밧줄이라.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있잖아요. 사랑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버렸어요.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어떻게 진짜 개망나니 같이 살더라도 이 조건이 나를 옥죄는 거예요. 잘한다, 아이쿠, 이렇게 옥죄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대하는 태도에요. 그게 언약입니다. 언약의 완성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 이게 신나야 될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버릴 리스트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부모가 포함돼 있지요. 부모가 나한테 남겨준 것은 일방적인 부모의 고집과 자존심으로 뭉쳐진 육적인 것이지 하나님 아버지가 천국에 받아주겠다고 했던 하나님 쪽에서 내민 조건은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부터 멀리서 과거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십자가로부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부터 거꾸로 끌어당긴 거거든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이렇게 했어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보기를 원했어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보고 뭐했다? 기뻐했느니라.

도대체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 듣고 학을 떼는 겁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 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왜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요. 우리는 아버지 있고 손자 있고 이게 인간의 방식이거든요. 그리고 장차오실 메시아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역사적 상식적 인식이었습니다. 그게 파토 나는 그걸 완전히 거꾸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마치 이삭이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에서를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어.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맏이다, 장자다. 복 받아라 인간아. 내 너한테 몰빵 해줄게. 이것이 너무나 상식인 것처럼 주께서 그걸 뒤집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역대상 5장 1절에서 이스라엘의 장자는 르우벤 맞다. 성경에 보면 계속 그 이후에도 르우벤은 장자라는 이야기가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고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먼저 태어난 건 맞는데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 아들 요셉의 자손으로 돌아가서. 요셉에게 돌아갔다는 거예요.

도대체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돌아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게 찾아보게 되면 창세기 48장 16절, 17절에 나옵니다.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눈먼 야곱이 더듬거리면서 요셉의 아들, 두 손자를 의도적으로 아이의 위치는 그냥 두고 먼저 난 자, 나중 난 자 두고 먼저 난 자를 나중에 돌리고 나중 난 자를 먼저 돌려서 어긋맞게 축복하면서 아버지가 한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바꾸시는 분이란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나로 인한 천국을 진짜 나의 바탕이 되는 예수님과 맞바꾸게 하시는 이것이 오늘날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나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이걸 매일같이 바꾸는 거예요. 뷔페에서 먹는데 맛있단 말이죠. “맛있는 걸 내가 무슨 복을 받아서 맛있는가. 아차,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초밥 하나 먹기 전에 후딱 바꾸는 거예요. 그게 식사기도 아닙니까. 식사기도 그렇게 하지 않아요? 여러분 다 그렇게 해 왔지요?

“이거는 내 공로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주께서 주신 만나입니다.” 이러고 안 잡수었어요? 요샌 하지도 않으니까, 뭐. 심지어 제사음식 오징어 간장에 조린 것 먹으면서도 큰집에 제사 하든 말든 먹기는 맛있게 먹자, 할 때 큰집 제사음식도 주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묻지 말고, 이거는 조상에게 바친 건지 묻지 말고 감사하게 먹으란 말이죠.

왜? 어차피 주님을 드러내가 위해서 존재하는 우리니까요. 내가 아니라는 방식으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린 없어야 되거든요. 있는데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있는 우리가 없음의 자리에 가서 다시 주님에 의해서 그 다음에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내가 아무리 아이디어를 상상을 하고 생각을 해도 그거는 내가 상상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구원받고 천당 가는 걸 생각하지 내가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진 어떤 게 천국 간다는 생각은 내가 자리 잡고 있는 한 내 쪽에서 아이디어를 못 끄집어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아무지게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누가 우선인가? 나의 가치와 나의 목적과 나의 의미 챙기는 것, 우리는 한시도 숨을 안 쉬면 안 쉬었지 그 모습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게 르우벤이에요. 그러니까 르우벤이 여기 나온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딱 우리 모습이에요. 그게 유다였습니다.

아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의 자손입니까? 무슨 백성? 유대 백성 아닙니까. 유다 백성이거든요. 이게 장자가 처음에는 르우벤이었잖아요. 그 다음에 요셉이죠. 요셉인데 중간에 또 바뀝니다. 시편 78편 68절 이번에 수련회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어요.

67절부터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주께서 르우벤 지파 잘라내고 요셉 지파로 장자 해놓고 요셉 지파 잘라내고 그 자리에 유다 지파 해놓고 그 유다 지파가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죽이게 만들어버렸어요.

결국은 열두 지파가 야곱의 열두 지파입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까? 이 질문이 의미 있는 질문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슨 지파입니까? 야곱의 육의 소산이에요. 야곱의 육이 잘 보여주는 것이 두 아내입니다. 레아와 그리고 라헬. 둘이 자매간인데 엄청 싸워요. 둘 다 남자한테 꽂혔어요. 남자는 하난데 상대할 여자는 둘이에요. 맨날 결승전이에요. 결승전 이긴 자가 자기 남편과 동침이 돼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식 그냥 주지 않습니다. 육이 육대로 다 노출시켜놓고 자식을 줘요. 그런데 그 자식 나올 때마다 이름 붙이잖아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름 누가 붙입니까? 동침했던 엄마가 붙여요. 엄마가 왜 붙입니까? 나는 너한테 이겼다는 거예요. 앗싸. 그래서 모든 이름을 응축해보면 두 자에요. 앗싸. “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가 복이야.”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이 땅에 살아남았어요, 앗싸.”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29장, 30장이죠. 열두 아들 주셨잖아요. 그 다음에 야곱이 다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32장에서 누가 죽는가? 야곱이 죽어 버려요. 야곱은 이삭의 장자지요. 이는 뭐냐? 장자의 결핍, 장자는 그 자체가 빈 공간, 블랙홀이 되는 겁니다. 장자가 구멍이 뚫렸어요. 장자 없~다가 돼요. 장자가 없어요.

이것도 모르고 열두 아들은 아버지 장자라 해서 창세기 34장에 보면 세겜에서 그때 레위와 시므온이 야곱의 육적인 것, 육의 특징이 뭐냐? 남한테 지고는 못 사는 거예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너한테는 안 진다는 육의 본성, 나는 나를 지키는 자기 때문에. 나는 나를 지킨다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와요. 나는 가인은, “하나님, 나는 나를 지키는 자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거에요.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이고 예수고 뭐라 해도 마지막 남는 것은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향토예비군 정신이죠. 내 고장은 내가 지키는. 그게 전부입니다. 딴 거 없어요. 이런 우리를 어떻게 천국에 넣어주는가?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해야지요. 10분 쉬고.


20220204b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첫 번째 태어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르우벤에게 일어나는 인생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결함, 그것이 장차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르우벤에 일어나는 결정적인 일에 대해서 여기 역대상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돼 있어요.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했다. 침상을 더럽게 했다는 게 뭐냐? 침상에 올라가서 장난치고 스프링 다 깨고 그 일을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르우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49장 3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그러니까 빼박이라, 야곱의 빼박이다. 야곱의 그대로 복제물이 첫 번째 아들이에요. 만약에 애가 둘 없고 세 번째 없고 첫 번째 애밖에 없다면 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첫째 아들이 그것이 끝나지요.

그러면 둘째 아들 태어나면 아버지의 모습은 첫째, 둘째로 분산돼요. 모자이크가. 셋째 태어나면 첫째, 둘째, 셋째로 분산돼요.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가? 첫째, 둘째, 셋째 합치면 돼요. 그러면 되거든요. 왜냐하면 DNA가 아빠,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를 계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이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가 숨을 거둬도 안심이 되는 거예요. 왜? 나는 자식으로 복제됐기 때문에 그래요. DNA 50% 지분이 있잖아요. 애한테.

안 죽고 부활했어요. 부활은 아니지만 나는 영원히 연속되는 거예요. 자식이 있는 한. 그리고 자식이 나한테 제사 드려주게 되면 나는 자식 속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지요.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자식이 없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옛날 어른들 같으면 큰일 날 일이에요. 세상에 자식이...... 그걸로 대가 끊어져버려요. 그걸 성경에선 뭐냐? 저주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특히 둘째, 셋째는 소용없어요. 첫 번째에 사랑과 정성을 몰빵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유월절에 할 때 누굴 죽였느냐? 둘째 아들, 셋째 아들 필요 없어요. 첫째 아들을 다 없애버렸잖아요. 죽음의 천사가 와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대행자입니다. 모든 복은 첫째 아들에게 다 제공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세계가 어떻게 자손을 번식하는지 그걸 그대로 사용해요. 그 육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고 더러운 육, 저리 가거라가 아니라 그대로 사용해서 아니라고만 이야기하지요. 육을 왜 그대로 사용하느냐? 인간은 몸부림 만부림 쳐도 그 육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육을 통해서 증명해주고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육적인 요소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요.

운동회 때 남의 자식 넘어지면 잘했다, 합니다. 왜? 남의 자식 1등으로 가고 자기 자식 2등 하고 있는데 앞에 남의 자식이 넘어졌으니까 타고 넘어가든지 해서 1등해서 공책 타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자식은 뭐냐? 나의 아바타에요. 자식이 밖에 나가면 내가 밖에 나간 것 같아. 자식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걱정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가 아직 마저 수금이 안 됐잖아요. 내 것 다 해소가 안 됐단 말이죠. 자식들이 밖에 나가서 열 시 이전에 다 들어와야 내 것 다 해소가 되는데 지금 딸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새벽까지 하고 큰아들은 교회 가서 밤새 철야했다고 가버리고. 그 아이들 집에 다 올 때까지 걱정근심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자식에 땅에 묻지 않는다 하잖아요. 어디에 묻습니까? 자기 마음속에 묻는다 해요. “너는 나 죽을 때까지 죽으면 안 돼.” 왜?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의미의 상실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의 상실이에요. 나의 희망이 없어버려요. 내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존재가 증명이 안 되니까. 네 죽음이 내 죽음이라니까. 자식 죽음이 내 죽음이거든요. 심지어 결혼한 젊은 사람들 이것을 어디서 경험하는가? 여기서 경험해요. 개, 고양이. 개가 죽을 때 비석 세워주잖아요.

인간이 자기 육의 확장이라 하는 것은 멈추질 못합니다. 반드시 연속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 인간은 육 됨을 들춤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지금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밖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 안에 들어올 수 없어요.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에 추방됐기 때문에 다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들어올 수 없는 인간을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르우벤은 자기가 아버지의 장자라는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자부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르우벤이 창세기 35장 22절에 보면 나오는 데요. 그 대목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집안 꼬라지 자알 나가지요.

레위기 18장에 보면 정말 청소년들은 보지 말아야 될 19금 이야기가 나와요. 레위기 18장 6절인데 제가 아무리 봐도 여러분들은 청소년기를 지나갔기 때문에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이래서 여기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잠간 하고 넘어가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다 끄집어내요. 10절에,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고모까지 신경 쓰는 거예요.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모까지.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런 이야기를 계속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너무나 낯 뜨거워서 슥 지나가는 거예요. 이야기 들으면 세계에 있는 남정네들은 다 때려죽여야 돼요. 그래야 이 말씀이 지켜져요.

테스토스테론 남성호르몬이 미친 듯이 발동해서 숙모고 이모도 분간 못하고 이건 뭐 진짜 발정난 개처럼 짐승도 이런 짓을 안 한다는 할 정도로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보는 이 의미가 뭐냐? 하체의 의미가 뭐냐? 자, 이거는 여러분들 다 어른이니까 이런 말 하는 겁니다.

하체를 범치 말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 속에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인간은 무기물이에요. 흙이에요. 인간이 흙인데 숨을 쉬는 흙, 마치 살아 있는 모양새를 한 이유가 인간이란 흙 속에 뭐가 흐르기 때문에?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 피가 흐른다는 건 신약성경에 십자가 피로 인하여 이 피는 어떤 노선이냐 하면 이때는 목숨을 부지하는 피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피는 곧 생명이니라, 라는 말이 나오고요.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에게 피부가 있잖아요. 예수님 피부 안에 주님께선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이거는 내 피요 내 살집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에 내부에 어떤 요소가 메시아와 관련성이 있느냐, 이걸 가지고 주님께선 언약적으로 관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흙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속에 피를 흐르게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인이나 선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무슨 언약에 의해서? 노아언약에 의해서. 십자가에선 그렇지 않아요. 노아언약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모든 인간은 햇빛과 공기를 줘서 북한의 김정은이라도 주께서 지금도 숨 쉬게 하고 다 지켜내겠다는 말은 그 속에 피가 피대로 흐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 피가 흐르면서 피가 무엇과 관련돼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일과 메시아의 일과 관련돼 있지요.

예수님과 메시아 일은 어디와 관련돼 있는가? 창세기 2장에서 3장 넘어오면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계속해서 들이대면서 책임추궁하면서 오시거든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하리라? 죽으리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2장, 3장과 관련되어 볼 때에 이게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게 아니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어요. 이게 레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옛날에 창세기 2장, 3장 시간이 지났다고 잊어버렸다가 아니라 그 있었던 창세기 2장, 3장 사건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그대로 집어넣어요. 담아버려요. 이스라엘은 계식의 운반체니까 담아버리면 여성이 먼저 죄를 범했다는 흔적으로서 월경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미 있게 봐요.

월경은 뭐냐? 몸에 있는 어디로 나옵니까?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바깥으로 나오면 이건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땅에는 피를 흘리지 말라. 몸 안에 들어있을 때 니는 목숨 부지하는 줄 알아라. 그러나 그 피가 밖에 나오면 그건 죽은 거예요. 그래서 살인은 뭐냐? 몸 안에 있는 상대방의 피를 몸 밖으로 내는 게 살인이 돼요.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라는 이 말은 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아 됨을 증거해야 될 그 재료가 너희들끼리 하나님께 묻지 않고 지 마음대로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은 아예 죽이지 말라가 아니에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돌로 쳐서 죽여 버려라. 돌에 맞으면 피가 흐르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 메시아와 관련되어서 죽이라 할 때는 필히 죽어야 돼. 안 죽이면 안 돼요.

아말렉 장수와 모든 족속을 다 죽이라 하면 진멸해야 돼요, 죽여야 돼요. 이방민족을.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전부 다 하나님 지 마음대로다 이러거든요. 그게 지 마음대로에요.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다만 정확하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주로 세우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고 작전이지만.

이 하체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전에 있던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에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게 아니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 하나님의 책임을 남자보다 여자를 우선적으로 책벌을 벌칙을 받게 돼 있는 조건 하에 뭐로 태어났습니까? 여자로 태어난 거예요.

여자, 남자의 구분은 이 땅에 임시적이에요. 이 땅에 있을 때만 가능한. 죽게 되면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하늘나라의 천사와 같아서 시집장가 가지도 않아요. 여자, 남자라 하는 것은 그 무기물, 육이라는 게 있을 때 그 안에 피가 흐르고 있을 때 그래서 그걸 흔히 사람이라고 이야기될 때 그 사람의 의미가 뭐냐? 그건 남자, 여자로 구분되면서 연관성 속에서 비로소 밝혀지거든요. 사람은 단독으로 밝혀지지 않아요.

왜 여자는 남자한테 당하기만 하느냐? 그거는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께서 항상 선악과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자, 여자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항상 구박을 받고 남자한테 치이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고 무시당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시당하는 그 여자가 누굴 살리느냐 하면 남자를 살려요. 그게 룻 또는 다말, 기생 라합 또는 마리아,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이것이 이스라엘의 속도가 아니라 강력함이 아니라 방향을 땅에서 하늘로 바꾸게 하는 겁니다.

자,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계신데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밖에 있지요. 밖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오느냐 이 말이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서 남성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여성에 의해서 방향이 천국 가는 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자의 자손이 아니고 여자의 자손이죠. 그걸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그래서 남자의 이름은 그냥 흙이지만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라, 하와라.

하나님께선 고집스럽게도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사실을 절대로 하나님 머리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뒤끝 있다. 잊지를 않습니다. 그 사건을.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개인적으로 윤리도덕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인품, 인간성이 좋다, 성격 좋다 아무 소용없어요. 그거는 그 아버지의 DNA 받아서 그런 거고. 아무 소용없어요.

하나님이 찾고자하는 조건은 하나님이 주신 조건이에요. 우리가 만들어낸 조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되느냐? 본인이 조건을 만들어요. 만들면 뭐합니까? 자기 아버지의 첩이죠. 야곱의 첩과 육이 참질 못해서 통간을 해버렸는데. 나는 먼저 됐다, 나는 장남이다, 뭐 요새 드라마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대통령후보다.

대선후보면 뭐합니까? 젊은 대학생 성폭행해서, 유명한 사건 <공작도시>란 사건, 대선후보가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일어난 일이 있어요. 그처럼 내가 아무리 지도자가 뭘 해도 대통령 되도 말이죠.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천사 같이 살고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께선 그것을 받아주는 정체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건 자기가 자기 꾸미기에요.

그러나 우리가 르우벤이란 말은 오십 년 동안 신앙생활 바르게 해도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뭐 젊을 때 사색하면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하면서 진짜 진리 찾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어떤 항구에 다방에서 화장 떡칠한 마담과 쌍화차 계란 띄워놓고 하면 그게 <낭만을 대하여> 아닙니까. 이것도 몰라도 되는 이야긴데. 영일만 친구라고 백날해도 낭만을 대하여 하면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조심하고 자기관리 철저해도 본인의 정체성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전도했습니다, 선교했습니다, 헌금을 집을 바쳤습니다. 왜 쓸데없이 그 짓했느냐 말이죠.

그래서 열두 지파는 아까도 했지만 야곱의 육의 펼침이에요. 육을 부챗살처럼 쫙 펼친 거예요. 야곱에게 빌하, 야곱과 동침함으로써 이거는 르우벤에게 통간할 수 있는 간음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거예요. 결국은. 결국은 이 열두 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실패한 나의 모습과 불가피하게 마주침,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남을 만날 때 실패한 내 모습을 상대에게 찾아내기.

결국 이걸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까 이야기한 여인의 하체, 그것은 하나님이 다루실 월경문제라든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하실 그 의미인데 창세기 3장과 관련된 그건데 인간의 육은 그런 걸 완전히 개 무시해버리고 자기의 욕정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같은 일가친척 이것은 서민들에겐 지켜지지만 왕족한테는 어떻게 됩니까? 안 지켜지지요. 왕족에겐 권력이란 게 있어서 권력을 대대로 독점하기 위해서 왕족끼리만 결혼하게 돼 있잖아요. 이것이 왕족에게만 문제입니까? 오늘날 우리들 문제거든요.

교회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해도 만약에 아들이 와서, “사귀는 아가씨 집안이 어떻게 되나?” “집안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습니다. 검정고시 쳐서 대학에.” “가만있어봐. 내가 해결해줄게.” 엄마가 가서, “아가씨 미안하지만 내 남편과 나는 아가씨를 우리 집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그동안 돈 쓴 것 봉투에 담아서 쓱 내밀면서, “아가씨가 현명하니까 아가씨 장래를 위해서” 아주 아가씨를 위하는 것처럼 해서, “조용히 헤어져줬으면 고맙겠습니다. 아가씨의 이성 같으면 내 말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다.” 해놓고 마지막 하는 말이, “내가 아가씨 찾아왔다는 말을 아들한테는 하지 마라.”

이거는 편견에 상담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너무나 치사스러운 어떤 특정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다면 가능성이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형편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런 상황이 안 돼서 그렇지요.

다시 창세기 48장 봅시다. 그래서 르우벤이 요셉 지파로 옮겨갈 때에 야곱이 눈이 먼 가운데서도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줘버려요. 그러면 다른 지파는 복이 할당이 자기밖에 없지만 이 요셉 지파는 야곱의 복이 두 아들에게 줬기 때문에 곱빼기로 두 배로 주어져요. 장자한테는 유산을 곱빼기로 주는 거예요. 곱빼기를 줌으로써 장자가 되고 이 장자란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게 아니고 모든 하늘의 복이 장자를 통해서 다른 형제들에게 내려오는 중추적인 위치에 장자가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늘 역대상에 봅시다. 이런 말 나와요. 역대상 5장 1절에 보면 르우벤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하면서 르우벤 이름 나오지요. 그 다음에 1절 중간에 요셉 나오지요. 그 다음에 2절에 보면 유다 나오지요. 열두 지파가 가운데서 세 지파 이름이 같이 한 문장에 다 들어있어요. 이거는 장자의 위치가 차츰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장자의 변신이죠.

원래 르우벤 지파에 있어야 될 장자가 요셉 지파로 갔기 때문에 장자의 자리에 요셉 지파가 들어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국무총리 되잖아요.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게 아니고 국무총리가 요셉을 미리 찾아온 거예요. 미리 찾아온 게 뭐냐? 꿈이란 것.

꿈은 우리를 덮치는 겁니다. 밤중에 우리를 덮치는 게 꿈이에요. 덮치기 때문에 꿈을 당한 사람은 꿈을 변경시킬 자격이 없어요. 바꾸질 못합니다. 일방적인 침입이기 때문에 바꾸질 못해요. 그래서 꿈을 꾼 요셉 입장에서 본인이 잘했다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꿈이 와서 덮쳤으니까요. 이 말을 달리 하면 요셉의 일평생은 뭐였다? 한 자로 이야기하면 ‘꿈’이었다.

이게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꿈같은 세계가 요셉처럼 덮쳐버리면 우리는 어느 세계로 가느냐? 꿈의 세계로 끌려가는 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신비롭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이 뭐냐 하면 이거는 내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뜻이 아니었다.

내 뜻은 내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내 뜻이에요. 전혀 신비롭지 않습니다. 왜? 내가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나의 목적과 나의 이유가 사라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 구원받겠다는 일념에 내 기도와 전도와 헌금이 뭔가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교회 나왔거든요. 교회 출석한 것조차. 이거는 전혀 신비로움 아니에요. 이거는 꿈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생생한 현실이죠. 생생한 현실이 꿈에 의해서 작살나는 그 과정이 뭐냐? 요셉의 일대기거든요.

요셉의 일대기에 요셉이 장자가 돼버리면 뭡니까? 나머지 열두 지파를 꿈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요셉 같은 상황을 겪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뭐로? 영적인 이스라엘로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꿈이 나를 통치하는 거예요. 꿈이 통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가 되었으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겠지만 우리가 논리로 딱딱 들어맞는 것은 전부 다 제쳐라. 그건 네가 믿을 게 안 돼.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제쳐버려라. 그건 니 착각이야. 기도 안 했는데 뭐가 됐어. 고거 받아들여. 내 행한 것 없는데 되어진 모든 것은 이건 꿈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꿈 위주의 세계입니다. 내 위주의 세계가 아니고. 그래서 뭔가 증거하고 고백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나 아니라는 이야기부터 먼저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대표적인 사람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꿈을 꾼 게 아니고 너무나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죠. 내가 율법을 배우면 이게 나한테 보탬이 될 것이다. 내가 하나를 얻게 되면 내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는 거예요.

오래 전부터 휴거와 관련되어서 7년 대 환난 그런 것 있지요. 이란과 이스라엘이 붙으면 드디어 마지막 3차 대전 벌어지게 되면 이스라엘에 제3성전이 세워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미국이 도와주고 세계역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있지요. 그런 것에 빠진 사람들, 다니엘 해석하기, 묵시적으로 해석하기, 비밀조직 같은 것, 유대인이 어떻게 활동해서 세상을 장악하느냐. 그게 굉장히 퍼진 거예요.

퍼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백신 이야기도 하고 백신 속에는 인간을 추적하는 게 들어있다는 둥 트럼프 대통령 다시 재선해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 왜 관심 있느냐 하면 내가 저것을 알면 내게 사는데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이 공포심 때문에 그래요. 마귀 작용이죠. 바들바들 떨면서 계시록을 저렇게 풀고 다니엘을 저렇게 풀고 성경을 저렇게 푸는 사람, 그게 대표적으로 신천지 아닙니까. 풀어줘야 내가 겨우 구원될 수 있을 거야. 이 환난 때에 666 이것 안 맞고 백신 1차, 2차, 3차, 4차, 5차 안 맞고 그러면 나는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나의 목적이고 나의 유가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지식으로 해도 나만을 다 가려주질 못해요. 내가 만든 내가 생각하는 성경지식으로 아무리 그럴싸한 해석을 다 해도 여분의 내가 지켜야 될 또 삐져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가짜가 된 거예요. 그리고 가짜인 동시에 그게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세계가 가짜입니다.

요셉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뜻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보디발 집에 가야지, 이런 것 없었어요. 이쯤 되어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유혹해야 되는데, 그런 것 없었습니다. 이쯤 되어 바로 왕이 꿈을 꾸어야 되는데,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억울하고, 세상에서 제일 참기 힘든 게 뭐냐 하면 일 저지르지 않았는데 모든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할 때 내가 잘못한 걸로 모든 게 몰아세워질 때 진짜 그것 못 참으면 자살합니다.

내 목숨 바쳐서 나의 정당성을 알려줄게, 해서 쓸데없이 산에 가서 목매달고. 이러면 너희들이 날 믿어주겠나. 믿어줘서 뭐하는데? 주님께서 뭐라고 해요? “너 지금 뭐하노? 가룟 유다야? 왜 쓸데없이 그 짓해?” 내가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방식으론 안 받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는 야곱의 육의 열매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요셉처럼 꿈이 덮쳐져야 돼요.

꿈이 덮쳐지면 나는 빈자리가 여기서 생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틈이 생긴다 하는데. 내가 나를 마저 설명을 못해요. 그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내 행동, 내 생각, 내 태도에 대해서 내가마저 그걸 해명을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실제 내가 더 커요. 그 빈자리에 대해서 내가 내 이름으로 내 것이란 이유 때문에 나를 관리하려 하지 마세요. 남겨놓으세요. 주께서 하시도록.

르우벤은 빌하와 통간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 되는 거예요. 이건 상상도 못하는 거죠. 다른 말로 르우벤은 장자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역대상 5장에 요셉 나오거든요. 요셉이 왜 나오느냐? 마지막 유다가 나올 때 르우벤이 장자가 아니고 요셉이 장자에요. 유다 입장에서. 유다 입장에서 르우벤이 장자였던 사람이죠. “장자 꼴좋다. 장자 됐다고 까불다가 기껏 아버지 첩과 통간하느냐, 인간아. 너 같은 인간은 장자 될 자격 없어. 요셉이 돼야 돼.” 이렇게 되겠지요.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이 그렇게 해서 곱빼기로 땅을 분배받아서 땅이 두 배로 제일 많아요.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있기 때문에 양쪽 다, 이번 수련회 때 혹처럼 튀어나왔다 했지요. 바산의 그 지역까지 약속의 땅, 제비뽑기도 하지 않은 땅까지 다 차지해서 있었단 말이에요. 그 넓은 땅 어떻게 됐어요? 제일 먼저 우상 숭배해서 다 망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78편에서는 내가 애초부터 요셉 지파는 선택하지 아니했다.

선택하지 아니했으면 처음부터 유다를 선택하면 되는데 왜 선택해놓고 선택하지 않았다 하느냐? 구원이라 하는 것은 타락이 아니고 탈락이에요. 탈락하는 겁니다. 탈락하게 되면 뭐가 생기지요? 빈자리가 생기지요. 그러니까 요셉의 아들들아 전부 다 물러가. 중앙에 빈자리 남겨두고 다 물려가. 그 빈자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지파가 그 빈자리를 잠시 이어갑니다. 그게 무슨 지파냐?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는 장자라고 할 수 없어요. 왜? 대대로 이어질 땅이 없어요. 땅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땅이 있다고 땅이 되는 게 아니고 대대로 이어져야 돼요. 메시아 올 때까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했거든요. 이 땅에 하나님 메시아가 합류하면서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땅, 그 땅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땅이 없기 때문에 아예 제쳐놓는 거죠. 일종의 내시? 땅의 측면에서 내시 같은 거예요. 땅의 기능만 하고 죽으면 그만이지 계속해서 우리 지파는 오래가야 돼,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레위 지파가 없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있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는 땅을, 다른 쪽은 땅이 있잖아요. 땅이 있다가 되잖아요.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돼요. 땅이 있다가 아니라 땅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언약궤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잖아요. 오늘날 우리들 성도로 뭐냐? 왕 같은 제사장, 오늘날 성도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우리 집에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집이 없다, 이런 것. 우리 집에 차가 일곱 대 있는데 운전사들이 너무 가난해서 집이 없어, 이런 것. 그러니까 운전사 일곱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없다’로 번역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목사님, 저는 다이아가 별로 없어요.” 이렇게. “목사님 안녕하세요. 우리 집에 벤츠 차가 없어요.” 이렇게. ‘없다’로 이야기해요.

그러면 목사가 이야기하죠. “요새 집마다 다 있는 벤츠 차가 없어요. 벤츠 차도 없이 우에 사노?” “저한테는 영생이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가 되도록. 항상 성도는 뭘 자랑하냐? ‘없다’를 이야기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땅이 없으니까. ‘없다’에요. “우리 집은 아파트 네 채가 없어요. 세 채는 있는데 네 채는 없어요.” 항상 세 채 있더라도 네 채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세 채 있다고 하면 자랑 되니까. 이건 하나의 요령입니다. 세 채 있다 하지 말고 네 채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 애들 둘인데 둘 다 두 채도 안 돼. 한 채 밖에 없어. 양쪽 다 아파트 한 채 밖에 없다. 그러니까 ‘없다’로 이야기해야 돼요. “아파트 두 채도 없는 자식이 우에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영생이 있거든요.” 이처럼 장자의 자리는 지진이 일어나서 틈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장자는 될 수 있는 자격은 아무도 없었다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시간이 필요한데요. 지난주일 낮에 한 걸 잠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상태가 있고 과정이 있다 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루어진 것을 과정을 통해서 솔솔 풀어내는 거예요. 과정을 통해서 하나둘 씩 풀어내는 겁니다. 장자는 맏아들은 누구냐?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예수님을 맏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은 그분으로 맏아들 되게 하심이라. 맏아들은 확정되었어요. 맏아들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흘러가는 역사가 다 필요했던 거예요. 오늘날 우리 인생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 장자 아니야. 나,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않아.” 그 흐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흐름을 보여줄 때 어떻게 보이느냐? 육을 마음껏 폭발하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40일 철야기도 해봤다. 이게 마귀 짓이었다.” 이런 것.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부흥사가 요구하기에 우리 집을 팔아 교육관 짓는데 갖다 바쳤다. 이게 마귀 짓인지 그땐 몰랐다.” 이런 것.

“나는 십일조 하면 30배 줄줄 알고 십일조 했는데 그 다음 달 십만 원 했는데 삼백만 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나의 욕심이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은 이미 안 할 거예요. 왜?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안 하는데 이런 건 있어요. “나는 나 하나 헌신하기 위해서 내 자식을 아프가니스탄 선교사로 보냈다. 그런데 그게 헛짓이었다.” 이런 것.

“그래서 나는 교회 갖다 바친다고 30배 안 주는 걸 알고 나는 교회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헛짓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렇게 살아도 헛짓이었고 저렇게 살아도 헛짓이었고 그 헛짓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꿈이 아니고 현실이에요, 이게. 요셉이 꿈을 쫓아간 게 아니고 요셉은 현실을 쫓아갔고 그 요셉의 현실을 누가 이겼느냐? 하나님의 꿈이 이긴 거예요. 하나님이 이긴 거예요. 그래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요셉이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니까 축복받은 므낫세과 에브라임 지파가 착각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다른 지파는 한 지분 받았는데 우리는 두 지분 받았다. 이게 자기가 착각인 줄 몰랐던 겁니다. 그 두 지분 받은 땅 홀라당 우상숭배로 다 날려버리고요 북쪽에 있던 제사장과 신앙인들이 어디로 피신했느냐 하면 남쪽으로 피신했어요.

왜? 남쪽 유다 지파는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북쪽은 신앙을 버렸지만 남쪽은 하나님이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남쪽이 B.C.586년에 다윗의 등불이 커져버렸어요. 남쪽에 피신하면 되는 줄 알고 제사장들과 신앙인들이 남쪽에 집결했는데 역시 우상숭배에 감당하질 못해 결국 바벨론 제국에 포로 잡혀가게 해서 전 세계에 공중분해 뿔뿔이 다 흩어졌어요.

흩어졌을 때 내가 다시 이스라엘 만들겠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70년 만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유다에다 성전 지으면 그 성전은 영원한 성전 될 줄 알았지요. 그때 성전 지을 때 그들이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이뤄진다. 에스라 느헤미야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는다 했습니다. 이거 또 착각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이 착각할 수 있는 마지막 착각까지 다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뭐냐? 사두개인은 성전이 있으면 성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찾아오실 것이라. 그것 착각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누가 헐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님의 몸이 부활의 몸이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활의 세계는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 죽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요.

죽으면 들어가는 세계가 부활의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리라, 이것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했고, 그리고 안중근이 그걸 인용해서 죽으면 살리라. 천주교 신자 안중근이 그 이야기했잖아요. 죽으면 사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들어가야 살아요.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에 들어갈 위인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들어갈 위인이 없어요.

베드로가 십자가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을 제안했지요. 제가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니 목숨 안 된다. 그것도 펼쳐진 야곱의 육입니다. 야곱의 열두 지파는 이방 모든 민족,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거예요. 대변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서 이스라엘의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통간했다면 모든 인간이 그럴 가능성을 다 내포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을 가진 인간은 언제든지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아직 그럴 사람이 안 나타나서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요셉 지파가 우상 숭배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누구든지. 유다가 메시아를 죽이는 것,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메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죽여 버릴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갖고 있어요. 가룟 유다 자살했다? 우리도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하루에 오십 명 자살합니다. 신문에 안 나서 그렇지 오십 명씩 자살해요.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단지 우리는 여러분이 성도라면 이것만 바꾸면 돼요. 오십 명 자살하고 범죄 할 수밖에 없고 간음할 수밖에 없고 형제에게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게 다 뭐라고요? 그게 바로 뭐다? 두 자로.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면 돼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는 어느 속에 있다? 꿈이 뭐를 이긴다? 현실을 이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현실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현실이야. 나는 그럴 수밖에 없어. 왜? 그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 현실을 누가 이긴다? 꿈이 이기는 거예요.

예수님은 항상 우리가 마저 덮을 수 없는 우리가 율법을 다 못 지키고 남아있는 그것까지 몽땅 알아서 다 사랑으로 다 덮어버렸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너를 묶어버린다. 너는 이 현실 속에서 따로 신비를 말하지 마세요. 그냥 신비도 현실 속에 하나에요.

진짜 꿈같은 그 사실이 우릴 이끄시면 뭐가 보이느냐? 나의 죽음이 아니고 나의 죽었다가 부활이 아니고 나의 죽음 뒤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요. 십자가의 의미가 부각이 돼요. 내 대신 죽었구나. 내가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고요. 죽은 자가 죽는 거예요. 그게 뭐가 의미 있어요. 원래부터 죽은 자에요. 원래부터 무기물인데.

죽지 않아야 될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부활한 그 세계에 우리가 감히 들어가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의 지금의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죠. 너는 죄인이라고. 너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현실에서 못 벗어나. 하지만 그것이 뭐냐? 그게 죄야. 그런데 그걸 죄라고 아는 것, 이 아는 게 어디서 왔겠어요?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내가 장자가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인생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그분이 알려줬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 아님을 아는 겁니다. 내가 장자 아님을 아는 거예요. 내 덕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장자의 덕분으로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현실 속에서 꿈의 자리를 늘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내고 찾아보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주님의 것이 아닌 게 없습니다. 이 귤 두 개까지 전부 다 때를 맞춰 주신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썩어가는 육신까지.

그래서 마지막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살아 있다. 결국 나는 죽는다. 이 경계선 잊어버리시고요 십자가, 그리고 부활 이 경계선으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아무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이야기에요. 죽든 살든 아무 문젯거리도 안 돼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게 되었다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복인 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었다 살았다가 얼마나 시급한 문제고 제일 중요한 문제처럼 여겼습니다. 여기에 인생 모든 걸 걸었습니다. 이게는 거기다 걸지 말고 십자가 이후에 부활 있고 부활은 십자가 통해서 가는 이 복음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