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1:13-16 / 숨겨진 생명
숨겨진 생명
이근호
2022년 2월 2일
본문 말씀: 미가 1:13-16
(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14) 이러므로 너는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1:15)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원래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초월적 안목이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민족의 전쟁은 동질적인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전쟁이 됩니다. 즉 이방민족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초월적 근원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로 넘기고 맡기면 승리합니다.
이는 곧 동질성에 대한 이질성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땅 개념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땅에 대해서 일반 사람은 자신이 거주할 공간으로 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부터 벌써 시작된 겁니다.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 3:23)
즉 토지는 대상이 되고 그 토지를 장악하는 주인공은 인간 자신이라고 자부합니다. 땅을 효율성의 뽑아낼 요량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인간이 범죄한 상태에서의 안목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의 땅은 주인공이 따로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입니다.
인간들은 그저 그 두 나무의 가치를 지키는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이 가치성에 인간이 훼손하자 하나님께서는 여지없닌 그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켜버리십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이란 인간에게 그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자연의 요소가 됩니다. 즉 ‘인간+자연’이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자연입니다.
인간들은 인간들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4:10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땅이 다 지켜본 겁니다. 인간이 잘못되는 모든 자연도 같이 썩게 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이렇게 볼 때에, 이스라엘이 자리잡고 있는 약속의 땅은 그냥 보통 땅이 아니라 의인화가 가능한 땅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초월적 근원성이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되어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초월성이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 19:4에 나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누가봐도 그들은 걸어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독수리 날개에 얹혀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초월성’, 즉 하늘의 요소가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적 상황에 가면 이렇게 됩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초월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그 성도에게 들어가서 ‘죽었다가 살아나게’ 된 그 작업을 그대로 적용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도는 ‘죽음의 자리’에 있게 되는데 이 ‘죽음의 자리’가 오늘 구약에서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담겨 있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유다 사람들은 앗수르제국에 멸망당하면서 그 영광성이 훼손됩니다. ‘대머리독수리’되는 겁니다. 독수리란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안목을 장착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좌 곁에 있는 천사의 기능이 독수리 기능입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러나 인간의 외형을 대표하는 부분이 머리인데 그 머리부분이 훼손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습니다. 이는 수치요 수모입니다. 이는 새삼스럽게 반성과 후회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가 무가치한 자리였음’을 알리시는 겁니다. 이방나라와 이질적이어야 마땅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부강을 부러워하고 탐을 낸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세상 나라가 아무리 많은 것이 있다고 자랑해도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의 작용이란 구약에서 ‘있음을 없음으로’, ‘살아 있는 데서 죽은 데’로 관여하는데 작용합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없음에서 있음’, ‘죽은 데서 살아 있는데’로 전환되는데 작용합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세상적으로 수치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성도에게 관여하시는 주님이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주님의 존재가 들어가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자기가 자신을 살려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수덕사의 여승처럼 자기의 머리를 자진해서 깍으므로서 자체적으로 수치를 극복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운명에 대해서 개기는 짓입니다. 대들고 반항하는 짓입니다.
이방민족들은 누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기에 스스로 지키고자 합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20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애치슨 라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해외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인 애치슨이라는 선언한 바에 의하면, 러시아의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에서 안에서만 미국이 방어해주고 그 밖에 있는 곳은 미국이 방어해주지 않는다는 외교 정책을 발료했습니다.
이로서 한반도와 대만과 베트남 같은 곳은 미국의 도움을 못받는 곳이라는 오해를 유발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에 들어온 자는 필히 지키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그림)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회에서는 상상을 굳히기 위한 기호들의 세계가 됩니다.
마치 곳곳에 말뚝같은 것이 있고 그 말뚝같은 붙잡고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증인들이 아닙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삶에 요령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계시대로 밀어붙이기에 쓸데없이 염려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계시의 진행을 통해 생명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그것으로 새 세상의 한 요소로서 합류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미가 1장 13-16절(숨겨진 생명)220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1장 13-16절까지입니다.
미가 1:13-16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찌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찌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찌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미가가 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느냐, 그런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어떤 인간들이 요구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그냥 밀어붙이는 식으로 계시대로 진행이 되는 겁니다. 작은 어선이 큰 파도를 감당할 수 없듯이 그냥 덮쳐지는 것처럼 미가의 이 예언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 그냥 덮쳐지는 거예요.
어떻게 대비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이 현실이 인간들이 열심히 해서 만들어진 현실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숨겨진 말씀,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된 거고요, 따라서 그 현실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느냐? 말씀 하신대로 돌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다 풀의 꽃 같아서 없어지지만 말씀은 영원히 그냥 완성되리라, 성취되리라, 실현되리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우리가 지금 미가의 입을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보게 되면 성경은 아무런 해답을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자체를 성경에서 거부하고 있어요.
네가 요령 부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씀이 덮치는 그 파도 같은 말씀에, 그 성취성에 하나의 물결로서 그냥 휘말려 들어가면 되는 문제입니다. 그 파도가 나를 엄습해서 코로나 걸리든 우리 집안을 박살 내든 그것은 내가 신경 쓸 문제가 되지를 않지요. 말씀이 그러하다는데 누가 거기에 토를 답니까? 하나님이 하신다는데 누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겁니까? 별이 이의를 겁니까? 태양이 이의를 걸어요? 달이 거기서 주님에게 반항합니까?
꼭 반항하는 것은 악마와 접촉한 인간들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말씀대로 되는 것에 대해서 소위 대드는 겁니다. “라기스 거민아” 13절에 나와 있는데 라기스 거민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라기스는 유다나라거든요. 남쪽이라는 말이지요. 북쪽의 우상숭배의 분위기와 그 문화를 처음으로 수입해서 유다 전체에 감염시키고 유다 전체에 퍼뜨린 그 지역이 라기스입니다.
그런데 그 라기스라는 이 도시는 나중에 앗수르라는 나라에 의해서 다 멸망 당하고 그 많던 말과 병거는 전부 다 사라집니다. 그다음에 14절에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여기서 가드모레셋은 미가의 고향입니다. 이 고향은 미가가 품고 있는 예언에서 작별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미가의 고향은 더 이상 가드모레셋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속이 미가의 새로운 고향이 되는 겁니다.
‘나는 가드모레셋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는 말씀 속에서 태어났다.’ 이게 신약에 와서 이야기하면 “나는 경북 논공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와요.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는 순간 그 사람은 고향이 ‘예수 안’이 고향이 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새사람 되는 거지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그다음에 14절에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이것은 역시 유다 지역에 있는 지명인데요,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들이 있다 할지라도, 지역마다 퍼져 있는 우상숭배의 그러한 그들의 경향에 대해서 왕이라도 어떻게 손댈 수 없어요.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왕이라고 해서 아무리 정치적으로 신앙 생활하라고 독촉을 해도 백성들 마음속에 우상이 들어와 버리면 왕이라도 손도 못 대는 그런 형편에 있게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15절에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이 마레사는 어디냐 하면, 이곳은 역대하 14장 9-13절에 보면요,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지금의 에티오피아 군대 백만이 올라옵니다. 군대 백만에 병거 3백 대, 요새 같으면 탱크지요, 탱크 3백 대 군사력을 총동원해서 쳐들어왔을 때 그때 아사라는 남쪽의 유다왕이 대항해서 그들에게 승리합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승리할 때 어떻게 승리했느냐 하면,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고 그냥 하나님께 넘기고 말았어요. 역대하 14장 11절에 보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 아사왕은요, 이 전쟁을 인간 대 인간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동원 시켰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레사의 전쟁이 일어날 그러한 대승, 크게 이긴 바 되었던 이러한 신앙적인 그 도시에 남쪽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번에는 누가 오느냐 하면,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승리케 되었다고 여겼던 마레사 거민을 앗수르 제국이 다 포로 잡아 데려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귀족들, 고위관리들이 어디까지 도망하느냐? 아둘람이라는 곳까지 도망해요. 아둘람이라는 지역은 상당히 요새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이 아둘람 굴에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거기서 약 4백 명과 함께 지냈는데 그들을 아둘람 공동체라고 후대사람들은 붙였습니다. 아둘람이라는 굴이 많은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게릴라 전쟁을 하는 것처럼 따로 소외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집합체.
그러니까 이 아둘람이라는 지역은 적을 피해서 숨을 곳이 있다 해서 여기에 이스라엘 귀족들이 아둘람까지 피신해 온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점점 더 가까이 오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앗수르제국이 우상숭배했다는 그러한 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둘씩 지역들을 잠식하는 거예요. 잠식하는데 그 잠식당한 지명들이 옛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지명들이에요.
그것이 하나 둘씩 적군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또 16절에 보면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찌어다” 아버지가 자식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머리를 홀라당 깎아버려라” 그런데 그 깎은 머리 모습이 뭐냐 하면, “독수리같게 할찌어다”
대머리독수리처럼 머리가 그렇게 되는데 이 대머리독수리가 특징이 뭐냐 하면, 소위 잘난체 하는 자들을 적들이 와서, 침략자가 와서 일부러 너는 이렇게 잘난체 하지만 그 잘난체에 대한 극단적인 수모와 수치의 표시를 머리에다 해버리는 겁니다. 머리, 인간의 외형의 대표적인 위치가 머리거든요. 머리에다 뭘 하느냐? ‘너는 결함이 있다. 네 인생에 문제 있어.’라는 표시를 침략자 앗수르 군대가 유다나라의 소위 고위직을 향하여, 또는 관료들을 향하여, 귀족들을 향하여 그런 티를 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포로 잡혀가는 모습, 수치스럽고 모든 것이 파멸되었다는 그 증거를 적군들이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 데려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지명들의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걸 ‘지명의 의인화’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땅이라 하는 것은 그냥 살면 되는 땅이지요. 아파트 같으면 그냥 살면 되지요. 단독주택, 이것처럼 그냥 사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땅은 자연에 속하고 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연에 사는 주체가 되겠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창세기 3장 이후에 추방되면서 내가 이 땅에서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땅 따로 있고 거기서 사는 내가 따로 구분되어 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자체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라는 것을 따로 뽑아낼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아담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와 생명 나무가 중앙지점을 차지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타락하고 난 뒤에는 자연은 나의 이용의 대상이 돼요. 나는 여기 있고 땅에 그냥 살면 된다. 나 따로 자연 따로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따로 자연 따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합체시켜서, 합해서 그걸 자연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네가 잘못되면 자연 전체가 다 망가진다, 라는 식으로 관련되게 만들었어요. 관련된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겁니다.
현대는 자연과학이라 하지요.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하나의 대상체로 보지만, 내가 자연을 보고 자연은 나한테 보임을 당하는 입장이 되지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 자연을 만들 때는 구분짓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만들어진 여섯째 날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창조 속에 하나의 요소가 인간이에요. 전체 창조 속의 하나의 요소라니까요. 요소로 들어간다니까요.
인간이 잘못되면 자연도 같이 잘못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함께 탄식하고 인간이 썩어 죽지만 자연도 같이 썩어내려 앉는다는 거예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0-23)
그래서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이 형상대로 오신 인간이 등장한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아들이 온다면 자연도 회복되는 거예요. 자연도 다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성을 빛내기 위해서 거기에 합당한 걸맞는 다른 자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우리가 뭘 연구하고 탐구한다는 이 자체가, 그 자체가 이미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이에요 이게.
오늘 본문 보면서 라기스, 가드모레셋, 악십, 그리고 마레사, 아둘람, 이런 지명들은 그냥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그 특징과 그들의 오류, 잘못, 우상숭배, 그런 것을 머금은 땅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이걸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성경에 나오는 대로 하면 더 쉽지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입니다. 쳐 죽였을 때에 가인이 입을 싹 닦아 버려요. 9절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니까 가인이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시치미를 떼는 거예요.
시치미를 떼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시치미를 떼지만 너를 죽였다는 증인이 있다.” 가인 같으면 “증인이 어디 있는데? 우리 둘밖에 없었는데?” 하니까 “하나님이 땅이잖아, 땅!” 땅이 네가 동생 죽일 때 흘린 그 피를 머금고 그 핏소리가 하늘까지 도달했다고 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자연을 개간하는 이런 것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은 이 자연이라는 운명에 자연 속의 하나의 요소로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이 대자연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의 요소에요. 그것을 이방 민족은 몰라요. 이방 민족은 자기 땅에서 그냥 사는데 급급합니다. ‘개인 주택 있는데 한 2억 5천 넣어서 수리해볼까?’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요. ‘아파트가 좀 좁은데 넓은 데로 가볼까?’ 이게 자연스러워요.
‘아파트 한번 바꿔볼까?’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바꿔라. 아파트 좁아서 문제가 아니라 네 인간성이 바꿔지지 않는데 아파트 백날 넓혀봐야 저주받기는 마찬가지야. 네가 어떤 넓은 데 가서도 저주 안 받는가 보라. 저주받다가 나중에 지옥 가지.” 이게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뭘 할까요, 라고 하지 마세요. 여기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앗수르 나라하고 이스라엘하고 전쟁하게 될 때 앗수르쪽에서, 이방민족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너나 나나 전부 다 같은 성질의 민족끼리 붙었다.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이렇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동질성으로 보는 게 아니고 이질성으로 봐요.
앗수르는 병거와 칼과 창으로 전쟁합니다. 아까 본 그 마레사의 전쟁, 그 전쟁에서 저쪽에서는 백만 대군의 숫자 가지고, 쪽수 가지고 밀어붙이잖아요. 그리고 병거 가지고. 그런데 이쪽 아사왕은 뭐냐? 군대 숫자가 28만이니까 저쪽에 비하면 얼마 안 돼요. 그렇지만 그냥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이 일으킨 일도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렇게 하니까 백만이든 천만이 와도 다 죽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성경을 내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가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말씀대로 되지 내가 이용해 먹으려고 말씀을 지키는 이것은 이 자체가 착각입니다. 잘못이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10장 20절에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는 말한다, 하면 누가 말하느냐 하면, 누가 봐도 내가 말한 거지요. 상대방이 말할 때 네가 말하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가 이야기할 때는 내가 말한다, 라고 하지 마시고 마태복음 10장 20절의 말씀처럼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성령이 이야기하신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약간 길지만 문장이.
문장이 길어서 귀찮거든 간단히 하세요.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렇게 반토막으로 줄여서 해도 돼요. “내 말이 내 말이 아니야.” 마태복음 10장 31절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지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성령의 것이니 내 것이 아닌데 두려워할 필요 없지요.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귀하게 여기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세상 사람들은요, 어떤 장소에 x, y, 하나의 좌표, 어떤 지점이 딱 있으면 그것은 본인 혼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내가 혼자 있었던 적이 없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아파트에 사는데 딸이 왔다. 그러면 딸이 ‘여기 두 사람 사네’ 그런데 두 사람 사는 게 아니지요. 주님까지 넣어야지요. 세분이 사는 거지요. 왜냐 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딸 앞에 주님을 시인하게 되니까요.
‘네 눈에 둘로 보이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즉 누구든지 빼기(-)를 해서 ‘여기 내가 있어’ 이렇게 해버리면 나도 하늘나라에서 너 없어, 라고 빼버린다는 겁니다. 이 말은요, 바르게 살라는 뜻이 아니고 우리 하나하나 한 몸이 주님의 계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 1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믿음이란 것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 실상은 보이는데 실상이 누구냐? 바로 믿는 사람 자체가 실상이에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주인공은 따로 있고 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죽 나와 있습니다.
같은 말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신앙인 하나가 혼자 홀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로서 주님이 함께 계신 겁니다. 바로 그 이질성, 그 이질성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아무리 우상숭배를 하고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 이질성을 계속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나라한테 망하게 해버려요. 이방한테 망하게 하는 이유가, 그리되면 이스라엘 자체가 망하는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하고 동질성. 질이 같아요. 그러나 망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체에 대해서 함께 있는 이스라엘 자체를 둘로 분리시켜 가지고 망하는 이스라엘 따로 있고 그 망함으로써 그 현장에 드러나는 진짜 숨겨진 이스라엘이 따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 숨겨진 이스라엘은 뭐냐?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 자 우리가 일상으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사람들은 이야기하지요. 이렇게 묻는 겁니다. 너 차 있어, 너 집 있어, 너 건강해, 자식 있어, 너 교회 있어, 이런 식으로, 부동산 많아, 자꾸 ‘있다’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원하고 싶은 것을 자꾸 묻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성도라면 이렇게 물으면 돼요. ‘너 생명 있어?’ 한 방에 훅 갑니다. ‘너 생명 있어?’ 이스라엘의 특징은, 바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한다는 말은, 있어야 될 ‘생명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나라 강대국, 이방 나라가 갖고 있는 그것을 얻고 싶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거예요. 멸망할 이방 민족이 갖고 있던 그것이 탐이 나서 그걸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갖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고 가져, 가져, 가지라 해놓고 완전히 같은 동질의 앗수르, 그렇게 부러워하던,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던 그 나라로 하여금 친히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을 침범하게 해서 야금야금, 하나님께서 생명의 증거로서 주셨던 모든 놀라운 기적들이 담겨 있던 그 지역들, 그 지명들을 다 야금야금 다 먹어서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포로 잡혀 가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이스라엘은 독수리 같아요. 영광스러워요.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독수리는 세상을 위에서 봐요. 독수리를 언급한 그 특징이 뭐냐? 초월적이에요. 초월적이라고요. 왜? 모든 것을 조망하니까.
조감도 있잖아요. 오감도(烏瞰圖), <날개>를 쓴 이상의 <오감도>라는 시도 있지요. 독수리 날개의 안목으로 위에서 보게 되면 아래쪽 넓은 평야가 다 보이잖아요. 주님께서 애굽에 오는 것은 분명히 누가 봐도 이것은 홍해 건너서 광야로 들어오는데 누가 봐도 1차원적인 평면을 통해서 걸어온 거예요. 그런데 걸어왔다고 보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의 안목인데 거기다 초월적인 요소를 담아버립니다. “너는 독수리 날개로 그냥 공짜로 탑승해서 날아왔어.” 이게 하나님 안목이에요.
구약선지자 오바댜를 봐도 독수리라는 것이 나옵니다. 1장 4절에 보면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것은 에돔에 대한 저주인데요. 독수리라는 것이 바로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 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요소 속에 독수리 같은 요소, 초월적 요소의 그 안목을 이스라엘 속에 이미 주신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독수리 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 보좌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고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에스겔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천사의 얼굴이 있는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천사의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천사의 기능 가운데서는 세상을 한꺼번에 보는 안목, 한꺼번에 보는 그 안목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예요.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가치를 마다하고, 그것을 생각 안 하고 그냥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쫓아가니까 주님께서는 파멸과 포로 잡힘, 멸망,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초월적 작용을 그대로 계속 지속시키는 거예요.
파멸시킴으로서 원래 이스라엘이 했던 근원적인 것, 근본적인 것을 드러나게 하신 거예요. 다시 포로 잡혀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지명, 이스라엘이 사라진 그 지명에는 더 이상 그 땅은 하나님한테 까불면 맞는다는 그것을 그냥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에서 회개라는 것은,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게 바로 회개가 아닙니다. 뭐냐? 원래 자리, 원래 가치 없는 자리로 되돌아가는 이것이 바로 회개에요.
구약으로 설명하니까 이게 어려운데 신약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죽고 난 뒤에 다시 사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이 수치스럽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안에서 활동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사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안에는 우당탕탕, 우리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죽어야 될 우리를 그분의 일대기처럼 죽은 우리를, 그분은 죽었다가 사셨으니까 죽었다가 사신분이 들어왔다는 말은, 죽은 우리를 그분처럼 살게 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 들어온 겁니다. 이게 ‘생명 있음’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죽어야지요. 수치스러워야지요. 이 논리를 이상스럽게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언젠가 제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이야기했지요. 수덕사의 여승의 특징은 뭐냐? 이방 민족에 의해서, 남에 의해서 자기의 잘난 것, 자랑거리, 수치스럽게 망해질 때 이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했던 그 죽음의 코스거든요. 그 죽음의 코스에 들어와야 부활의 코스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수덕사의 여승, 불교의 그 여승은 자기가 자기 머리를 깎아버려요. 독수리대머리를 자기가 한다는 말이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고급용어로 개긴다, 라고 하지요. 이게 개기는 거예요. 운명에 대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이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넘기고, 있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을 없애버립니다. 이게 구약에 작용하는 생명의 형식이에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뭐냐? 죽은 데서 살게 하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서의 생명형식이에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우리보고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원래 네 자리 찾아가라. 어떤 자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리,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아, 이게 구약을 통해서 신약에 이렇게 전개가 되는데요. 그러면 인간들이 본인이 수치스러워도 마땅하고 죽어도 마땅하고. 왜? 원래 가치 없는 거니까. 이게 인간한테 잘 되지 않아요.
미국의 대통령 고문이 있었어요. 외교 고문인데 그 사람이 애치슨(1893-1971)이란 사람이에요. 애치슨이라는 사람이 선언한 내용을 두고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이라 하는데요. 이제부터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한 거예요. 일본 북쪽의 열도를 알류산 열도라 하는데 그 열도로부터 일본 오키나와로 해서 필리핀, 이 선까지만 미국이 방어하고 그 나머지는 제외한다고 미국이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그 방어선을 애치슨 라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2차대전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 미국에 힘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제외되느냐 하면, 한반도, 한국하고 타이완 그리고 인도 인도차이나, 베트남, 이런 곳은 미국이 지켜주는 그 방어선 밖으로 나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김일성이 여기서 ‘야, 찬스다. 미국이 안 지켜준대’ 그래서 확 쳐들어 왔잖아요.그게 6.25 전쟁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도 그렇고,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애치슨 라인을 정해버렸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내가 지켜준다, 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밖에는 안 지켜줘요. 방어선,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한테는 책임지고 지켜줍니다. 교만한 자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잘났다고 우기는 자를 없게 만들어서, 기어이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그 일을 해주셔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본인 자체가 없는 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사신 분으로서 그냥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쑥 들어와 버리니까 창세기 3장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다고 우기다가 창세기 2장이 되어버리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 따로 있다. 누구?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그 세계, 그 상황으로 다시 되돌리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 작업을 하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큰일 났다.’
큰일난 게 아니에요. 지금 제대로 말씀이 말씀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믿음이라 해요. 그게 하박국에 나오는데요. 하박국선지자 보게 되면 유명한 말씀이 나와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이냐 하면, 하박국에 보니까 유다 나라가 폭삭 망해요. 망하는데 그 망하는 일까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제대로 잘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것, 그게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박국 3장 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뭐 있는 게 있어야지요. “다 없으며 없을찌라도 나는 믿는다. 없게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 없는 게 원래 우리 자리니까. 이게 신약성경의 성도의 자세에요.
신약성경의 성도의 자세가 뭐냐 하면,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는 별로 집이 없어” 지금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별로 웃지도 않네요. “우리 집에 고용된 운전기사가 다섯명인데 다섯명 다 잘 살지를 못해” 이런 것. 그러니까 뭐든지 표현할 때 ‘없음’으로 하는 거예요. 없음으로. “우리 집에 금 없다~!” 이런 것 있잖아요. 금 있어요? 우리 집에 금덩어리 없다, 금괴 없다. 이게 막 자랑스러워지는 거예요. 없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에요. 믿음이에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애치슨 방어선이 없고 자기가 자기를 방어해요.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기 때문에 항상 뭔가 자꾸 상상하거든요. 상상할 때 이미지, 그림으로 상상합니다. 애들 말 배울 때 그림으로 먼저 배우잖아요. 인간의 두뇌는 그림부터 그리게 되어 있어요. 그림을 이미지라 하는데요, 그림부터 상상해놓고 내가 그렸던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회에 나갑니다. 상상하는 이것은 이미지의 세계지만 사회는 무슨 세계냐? 기호의 세계에요, 기호의 세계. 이미지가 구체화 된 것이 기호예요.
경남 남해에 가면 죽방이라는 것이 있어요. 죽방어업은 뭐냐하면 대나무로 만든 부채꼴 모양의 말둑을 바다에 박아서 멸치를 잡는 것이 있어요. 남들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힘들어서 젊은 사람들조차 잘 안 해요. 너무 힘들어요. 이처럼 모든 세계는 전부 다 이 세상에서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뭘 하나라도 말둑을 붙드는 거예요. 그게 기호에요. 약속, 맹세, 각서, 조약 체결, 전부 다 그런 것을 자꾸 붙드는 겁니다. 손으로 지장 찍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을 자꾸 붙드는 겁니다.
그게 자기 방어선이에요. 왜? 애치슨 라인이 없기 때문에 누가 지켜주지를 않아요. 본인이 본인을 지켜야 돼요. 어릴 때 TV에 나왔던 유명한 미국 드라마 <타잔>이 있습니다. 타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자꾸 옮겨가요. 오오오~! 가면서 제인 부르잖아요. 자기 짝을 부르면서 옮겨가듯이 현대 인간성은 자꾸 기호의 세계에서 자기의 꿈과 현실이 일치되는 것을 자꾸 붙들어요.
치킨집 하다가, 노래방 하다가, 뭐 온갖 것, 커피점 하다가, 호떡집 하다가, 사진방 하다가 치우고 또 나중에는 농사일 하다가, 또 트로트 가수 하다가, 하여튼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으로 계속 옮겨가는 겁니다. 끊임없이. 왜? 애치슨 라인이 없으니까, 누가 대신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나를 지켜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거 해봐야 해보면 잡았다, 하면 나중에 또 꿈이 돼요. 환상이 되고 이미지가 된다고요. 이것도 결국 자기 욕망을 만족 못 하니까 또 딴 것을 붙들어요. 옮겨가서 또 딴 것 붙들고 현대 인간은 서로 타잔같이 왔다 갔다 하다가 저희끼리 부딪히고 난리에요. 완전히 옮겨 다니면서 자기 것 지키는 것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스라엘은 애들처럼 맞으면서 안기는 민족이기를 하나님이 원합니다. 하나님이 때렸잖아요. 때릴 때 더욱더 안기는 거예요. 때릴 때! 때리기 때문에 안기는 겁니다. 시편 127편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수치스럽지요. 대머리독수리니까 수치스럽지요.
의도적으로, 네가 잘 나가다가 이렇게 영광이고 뭐고 네가 망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럴 때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그래, 나 이것도 없습니다. 저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거기, 있는 것을 없게 하시고 살았다 하는 것을 죽게 하시는 거기, 구약적으로는 거기, 신약적으로 말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것을 부활케 하시는 거기에 그게 바로 생명이에요. 그게 바로 생명이에요.
믿음 좋다고 잘 나간다, 하다가 코로나 걸려서 교회도 못나 오고 할 때 그게 바로 생명이에요. 네 원래 자리는 네가 뭘 가지는 자리가 아니라 누가 지켜주는 자리에요. 애치슨 라인이에요. 방어선이에요. 누가 지켜줘요. 내 안에 주께서 들어왔으면 주께서 알아서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실수라든지 마음의 상처니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실패 이런 것은 없습니다.
초월적인 것이 근원적이에요. 초월적인 그 주님이 하신 일, 이제는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근원적인 것을 담고 살아가는, 초월이 이 땅에 오는 근원이 되거든요. ‘원래’가 돼요. 원래. 우리 자체가 주님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세상의 한계, 한계효용(限界效用, marginal utility)이라는 것이 있듯이 이 세상은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그게 식상하기 마련입니다.
한계, 이 세상의 끝을 바로 성도를 통해서 증거하게 하시는 겁니다. ‘나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너희들 보기에 수치스럽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즐거워’ 그래서 세상의 어떤 약속이나 이런 것은 믿지 마세요. 그건 다 우리의 환상이고 그냥 일시적으로 붙드는 기호에 불과한 겁니다. 진짜 세계는 주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증거로서 다룬다는 이 자체, 바로 그게 우리 자신이 말씀의, 계시의 증거로서 이 땅에 새로운 이스라엘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은 각자 자기 것 가질 때 안심을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것이 다 부질없는 환상이고 헛된 욕망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공 되는 그 세계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창조의 세계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