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완성 220116
안식일 완성 220116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안식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은 인간들이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서 안식일을 나름대로 지킨다고 지키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에 제 사계명에 보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나름대로 거룩히 지킨다고 여러 가지 시킨 대로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그 출제 경향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라고 안식일이라고 십계명에 안식일 나오지만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 인간은 안식일을 못 지키느냐를 생각해야 돼요. 왜 십계명은 십계명에 나오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왜 인간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거 이야기하라고 십계명이 쭉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십계명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대상이 될 구원 대상이 애초부터 아니었구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한 안식일은 어떻게 지키고 그 당시 사람들이 안식일 지키는 것을 어떻게 지키는가 그 두 개를 서로 다 대비해보면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정답은 선생님이 정답은 무엇이냐라고 하는 선생님은 좀 이렇게 기술이 없는 선생님이에요. 제가 그 선생님이라면 해본 적도 있습니다마는 이게 왜 정답이 아닌가를 설명해볼 사람 손들고 나오라는 거예요. 이게 왜 정답이 아닌가? 왜냐하면 정답이 아닌가를 알게 되면 정답은 저절로 알게 돼요. 그래서 오답 노트가 필요한 거예요. 정답이 아닌 것을 계속 정답을 못 냄으로써 어느 새 정답을 정답만 남는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보고 그걸 공부해보시면 이거 학원 아닙니다.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답은 뭐냐? 안식일이 어떻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킵니까가 아니라 안식일이 누구십니까? 여러분. 시간이 인물이 되는 시간을 보면서 거기서 인물을 뽑아낼 수 있는 자가 안식일을 지키는 자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서 이건 능가하는 거죠. 인간들은 시간이나 공간은요 인간이 먼저 있고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시간도 측정하고 공간도 구획 정하고 이게 인간들이 아는 전부거든요. 근데 시간이 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형체가 이렇게 생기면 이렇게 형체가 생기더니만 어디 윤곽이 잡히더니만 턱 하나 짜짜잔 하고 어떤 인물이 되었다. 시간이 누구십니까? 시간이 누구입니까라는 그 질문 자체를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그런데 안식일의 정답은 뭐냐? 안식일은 예수님이 지킨다가 아니라 안식일은 곧 예수님이에요. 시간이 사람 되는 겁니다. 이거 아인슈타인이 이거 발견 못 했어요. 아인슈타인도 이걸 몰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은요 시간은 그 사람이 위치해 있는 관측의 자리에 따라서 상대적이고 절대적이 아니다. 그거까지는 이야기했어요. 절대적인 빛의 속도에 의해서 시간도 공간도 같이 변한다. 속도가 달라지면 시간도 달라지고 공간도 달라진다. 이거는 아인슈타인도 이야기했는데 시간 자체가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공간은? 공간 또 어떤 분이죠.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시멘트 바닥에 서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의 배 위에 물컹물컹한 배 위에 올라가 있을 수도 있는 문제란 말이죠. 어떤 시간과 공간이 사람이 사람이라면 그동안 이 사람이 시간을 안식일을 완성한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 뭐냐?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나는 그 안식일이 완성된 사람과 충돌 관계에 있고 대척 관계에 있고 반발하는 관계에 있고 둘 중에 하나는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득해야 될 그런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안식일이 사람 된 그분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안식일을 지킨 주일을 지킨 나를 믿을 것이냐 양당 간에 결정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은 수능 시험 치기 위해서 수능을 이래 막 치고 시험지도 치고 이렇게 해가지고 요거 삼번 체크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능 시험지가 이렇게 뭐 트랜스포머처럼 움직이더니만 니 내 얼굴에 낙서했지 이래 나와 보세요. 이거 얼마나 놀랄 만한 일입니까? 나는 종이에다가 섰는데 그 종이가 내 얼굴이었어. 이래 나오면 도대체 뭐가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아니고 이게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느냐? 그래서 안식일을 그동안 사람들이 지킬 수 없었던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안식일은 이미 예수님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 안식일을 지켰던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안식이라는 공간을 이미 따로 마련해 놨어요. 그 안식하는 공간은 어떠냐 하면 보기에 심히 좋은 환경입니다. 처음에 안식일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해서 심히 좋았더라 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한 것에 대해서 흐뭇하게 여기시고 그 한 날을 안식일로 정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안식이라는 것은 그 다음부터는 좋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없어요. 끝났어요. 더 이상 시간은 시간이라 하는 것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나 시간이 나오거든요. 공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대학교 들어가거든 그것도 물리학 전공하거든 교수한테 배우세요. 공간이라는 건 빛의 속도가 나올 때만 공간이 생기지 빛의 속도가 그냥 기체라는 걸 의식을 할 때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완료가 돼 버리면 지금 며칠이지, 몇 년이지, 난 몇 살이지 그걸 따질 필요가 없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천국 가면 “형아 오늘 천국에 몇 시고?” 묻지 마세요. 시계는 벌써 압수 다 상했어요. 천국 가가지고 천국 가서 오늘 프로 뭐 있노, 스마트폰 하지 마세요. 이미 대선 끝나고 없어요. 천국에 가면 휴대폰도 없어요. 시간도 필요 없고 공간도 필요 없어요.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됐기 때문에 완성 단계 완성 단계에 들어갑니다.
사람 죽을 때 심정지가 어떻게 됩니까? 바짝바짝하게 가다가 죽게 되면 뭡니까? 조용하게 가잖아요. 모든 것이 고요하게 끝이에요. 더 설칠 필요도 없고 숙제할 필요도 없고 그냥 즐겨. 그 상태를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해도 못 알아듣잖아요. 못 알아들으니까 못 알아들을 때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이제 시비를 거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안식일이 뭐냐 하는 것은 반드시 안식일에 대해서 엉터리로 지키는 자들이 필요해요. 그들이 와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반발을 해줘야 돼요. 사실은 이런 반발은 바리새인이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이 반발하지만 실은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 평소에 반발하고 싶은 것을 바리새인이 대신 우리 대신 질문 있습니다 하고 질문해 주는 마찬가지예요. 뭐라 하느냐 하면 성경 말씀을 지켜야지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성경 말씀을 왜 안 지킵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지킵니까? 안 지켜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킨 상태입니까? 정답은 3번이에요. 잘 모르거든 무조건 3번 찍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미 정죄함이 없는 의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모든 말씀을 다 지킨 상태에서 지킨 상태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가 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무중력 상태에서 한번 걸어보죠. 무중력 상태에서 한번 걸어보세요. 달리기 해보세요. 무중력 상태에서. 요이땅! 해가지고 무중력 상태에서 100m 달리기 해보세요. 딱 했는데 사람들은 안 달려. 왜? 안 달리고 허우적거려요. 전부 다 둘 다 둘 다 마주하는데. 왜? 거기는 중력이 없으니까 달린다는 게 의미 자체가 없어요. 모든 공간이 동일한 무중력의 상태를 적용받기 때문에. 니가 얼마나 빨리 달렸어? 늦게 달렸어? 필요 없어요. 천국 가면 니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어? 나는 적게 했어. 이게 천국에는 그 차이가 없습니다. 평소에도 일을 안 하는데 천국 가서 일을 잘하겠다. 안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뭐냐 하면 “니 왜 안식일 왜 안 지켜?” 이렇게 하니까 주님께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병든 자가 있었어요.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18년 병든 자가 여인이 나오고 또 한 사람은 발이 퉁퉁 부어서 걷지도 못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발이 퉁퉁 부어서 걷지도 못 한 사람, 이 사람의 기대치는 뭐냐? 어서 병이 나아서 막 달리고 싶고 남들처럼 걷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발이 퉁퉁 부어서 잘 못 걷는 사람들의 목표는 뭐냐면 어디에 서있느냐 하면 지금 아프다. 나는 걷는다. 그 두 개가 전부예요. 나는 아프다. 지금 걷는다. 난 걷고 싶다. 그러나 그거는 어디까지나 미래다. 나는 아프다. 걷는다. 둘 사이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무원 시험 합격된 거 하고 공무원 시험 치는 거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거는 천지차이입니다. 공무원 시험은 에드 윌 하면서 에드 윌에 돈 퍼넣어가지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 이건 합격 아니에요. 그냥 시도해보는 거고. 합격했으면 에드 윌 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험 준비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뒤돌아볼 필요 없지요. 이게 무중력 상태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똑바로 봐. 똑똑이 봐. 안식일이 어떤 상태인지 똑똑히 봐. 내가 왜 안식일인지 똑똑히 봐. 하고 그 다리 퉁퉁 부은 사람에게 “니가 걸어라. 너가 이제 나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안식일이 완성된 분의 명령이 그 아픈 사람에게 도달되니까 그 아픈 사람에게 뭐가 뒤집어 씌었냐 하면은 안식일의 완성이 뒤집어 쓰인 거예요. 그 사람은 지가 병 낫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안식일의 완성이 주의 지시가 명령이 뒤집어 쓴 것뿐이에요. 이게 그 사람은 이 걸어가게 되면 안식일의 완성을 뒤집어쓰고 걸어가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리고 십팔 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져서 한 번도 펴본 적이 없는 그것도 십팔 일 동안이 아니고 18 개월이 아니고 십팔 년 동안요. 십팔 년 동안. 그러니까 나이가 열 살이라면 스물여덟 살 때까지 허리가 안 펴진 거예요. 그 여인. 또는 서른 살 때 안 펴졌다면 사십 여덟 살까지 안 펴진 여인. 한 번도 펴본 적이 없어요. 왜? 귀신 들렸으니까. 펴지질 안았어요. 인간은 귀신을 못 이기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안식일 날 그 여인은 안식일을 몰라요. 안식일을 지킨 적도 없고 지킬 줄도 모르고 안식일을 지켜봤자 소용없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안식일을 완성해 그 여인에게 도달되니까 그 여인이 뭐냐? 18년 동안 아프다가 펴졌어요. 근데 십팔 년 동안 아팠으니까 아픈 게 정상이에요. 펴진 게 이상해. 이게 왜 내가 펴지지? 이게 이상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존재가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해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지옥 가는 게 당연한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예수님께서 모든 걸 다 이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우리는 허리 펴지듯이 우리는 뭘 해도 지금 천국 가기 전부터 이미 천국 생활을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하는 것은 전부 다 뭐냐?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어떤 스케줄 목적 기대 목표 실적 업적 성과 구애받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경쟁 없이 경쟁 사회에 살 수 있어요. 어떻게? 무중력 상태로, 무중력 상태로.
물론 이 18년 된 여인이 안 죽은 게 아니에요. 죽어요. 죽어도 그냥 죽은 게 아니고 그냥 쉬는 거예요. 이제는 아이고 나머지는 좀 쉬자. 그러니까 성도가 됐다는 말은 하나님의 안식일 예수님의 안식일을 완성 속에서 벌써부터 일찍부터 우리는 천국 생활을 시작한 것,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한테 물어보고 일하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자신의 완성하신 것을 뒤집어 씌워주니 감사합니다. 이 뒤집어 쓴 것이 우리의 행함보다 월등하게 우수하고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