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변칙 220109
예수님의 변칙 220109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마르다 마리아, 이 사람들과 예수님이 만난 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앞에 있는 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여겼어요. 믿었던 겁니다. 믿었는데 마르다 마리아가 둘이 자매간이거든요. 자매간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염색체를 같이 물려받게 됩니다. 상동염색체 같이 물려받게 돼요. 그러면 핵상이 2n이 되는 거예요. 근데 둘이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러나 염색체는 물려받았지만 성향은 둘 다 또 동일하게 자기 자신만 챙기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길래 평소에 예수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리고 섬겼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그들은 이게 나쁜 짓이 된다든지 죄가 된다는 생각은 감히 상상도 못했죠. 주님께서 나를 알아줬으니까 주님께서 내가 주님을 알아줬으니까 주님께서 의당 반드시 나를 알아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하는 어떤 행동은 반드시 대가 없으면 우리가 그냥 섭섭해요. 뭐 해놓으면 반드시 어떤 보상이 주어져야 그 다음은 행동할 수 있는 보람을 느끼는데 이렇게 그 생각 아직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고 둘이 분주하게 바빴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오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좋아해 주리라고 여기면서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평소에 언니가 마르다인데 마르다가 뭘 좋아하느냐 하면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인간의 어떤 행복 즐거움으로 생각해가지고 내가 음식 만들 때 즐거운 것처럼 예수님도 나와 동일하게 음식 맛있는 걸 기쁘게 할 거라고 열심히 요리를 했습니다.
했는데 이 싸가지 없는 마리아 동생은 원래 동생들이 싸가지 없어요. 어떤 언니보다도 동생들이 원래 싸가지 없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언니라는 차단막이 있어가지고 자기 아쉬운 것을 언니가 다 카바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냥 공주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했죠. 모든 힘든 것은 언니가 알아서 다 하니까. 마리아는 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예수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뭘 좋아하느냐? 그냥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씀 자체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좋은데 문제는 언니가 보기에는 싸가지 없는 짓이에요. 음식을 만들 때 이게 힘들거든요. 그러면 언니가 동생 보고 뭐라고 하냐 하면 좀 도와달라고 이야기했겠지요. 말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언니가 이렇게 힘든 거 니 눈에 안 보이냐 그러니까 와서 음식을 좀 도와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르다의 심보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어요. 왜 언니를 안 도와줬는가? 1번 평소에 어제 싸웠다. 2번 언니 이참에 언니야 욕 한번 봐라. 이런 거. 3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니가 같이 끼어드는 거 나는 원치 않는다. 예수님은 내가 독점해야 돼. 이런 거. 4번 내가 해줘봐야 걸그친다. 언니가 음식 잘하잖아. 사번까지만 할게요. 한 이백칠십오 번까지 할 수 있는데 그냥 4번까지만 하겠어요.
마리아가 예수님 언니 안 도와주는 것은 정답은 딱 하나예요. 철딱서니 없어 그래요. 철딱서니 없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마르다가 예수님 말씀 듣는 것을 안 좋아할까요?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말씀 들을 때 공짜로 우예 듣느냐 말이에요. 공짜로. 교인들 들으면 또 부담 된다. 이거. 말씀 들을 때 어떻게 공짜로 듣느냐 이거죠. 성의를 표하고 들어야지. 공짜로 어떻게 듣느냐? 그만큼 동생 니 마리아 니는 세상 물정 모르고 세상 사회 인간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하는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분명히 마리아는 취직 안 했을 거예요. 취직 안 했기 때문에 세상 어떻게 살지도 몰라. 지 하고 싶은 대로 아마 성질도 그냥 했을 거예요.
마르다가 말씀 듣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저 인간 왜 왔냐? 뭐 이런 식으로 한 게 아니에요. 너무 좋아해요. 너무 좋아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말씀을 듣냐 이거예요. 빈손으로. 뭐라도 챙겨 드리고 성의 표시하고 들어야 이게 인간과 인간 사회에서 마땅한 예의 아닙니까? 에티켓이고 도리거든요. 그래서 마리아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참으로 정당하다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 사실을 이야기할 때 여기서 마르다가 너무나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럽고 예절 바르다는 것, 그 예절을 바르고 어른스럽다. 그 정당함. 그게 예수님 앞에서는 이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마르라는 몰랐던 겁니다.
지금 마리아가 착했다고 하는 생각을 절대로 갖지 마세요. 마르다가 그 정도로 문제 있으면 마리아는 더 문제 있어요. 이 마리아한테 칭찬하면 안 돼요. 마리아는 칭찬 받을 생각도 없고 그냥 누가 먹을 생각도 없고 그냥 철딱서니 없어서 지 하고 싶은 대로만 그냥 할 뿐이에요. 아무 생각 없어요. 말씀 이거 맛있는 거 대접 안 하고 그냥 공짜로 좀 들으면 어때 이런 거예요. 머리가 바보 같아. 뭐 생각이 없어요. 주님 말씀 할 때 그냥 말씀 듣는 거예요.
따라서 둘 사이에서 이미 승자 패자는 결정 났습니다. 누가 이겼느냐? 마르다가 사회적으로 보나 인간적으로 볼 때 마르다는 정당합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언니는 정당하고 동생은 정당하지 못해요. 이러한 그림 하나는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다는 그림을 주님께서 뭐로 뒤엎어보는가? 이걸 뒤엎어버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일에 변칙이 변칙. 변칙 알죠? 호나우도 변칙 잘하잖아요. 축구 드리블을 할 때 상대방은 변칙 하는 거예요. 변칙은 변칙을 인간들이 볼 때 그걸 반칙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반칙이 아니에요. 변칙이에요. 니가 아는 수준을 뛰어넘으면 인간은 반칙으로 보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뜻을 기피하는 변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변칙을 사용해버린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르다에게도 전하고 마리아에게도 전달되지만 지금 그들은 전달하는 것은 지식으로 확보될 뿐이고 그 지식은 어떤 변칙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변칙은 예수님이 직접 개입해야 변칙이 가능해요. 내가 지식 알아서 이걸 지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이다 아니다 이다 이다 아니다. 아니다. 백날 해봐야 그건 불교밖에 안 되고요. 내가 아무리 머리 굴리고 해도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거는 인간의 지혜에 준하고 변칙은 주님께서 직접 개입해야 됩니다.
어떻게 변칙하느냐? 마르다가 언니가 정당하고 동생은 정당치 않습니다. 이건 손님 대접하는 모습이 아니에요. 이런 행동을 예수님이니까 봐주지 다른 사람 왔을 때 이렇게 하게 되면 진짜 욕 되게 얻어먹어요. 만약에 이 스승이 뭐 그냥 보통 랍비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 뭐하노 지금? 니 평소 행동이 이거였었어. 언니가 지금 얼마나 땀 뻘뻘 흘리면서 대접하려고 하잖아. 지금 일단 점심 먹고 세미나 나중에 하자. 지금 점심부터 먼저 먹어야지. 니는 지금 점심 하는데 언니 도와줄 때지. 니 평소에 느그 아버지한테 그래 배웠나? 가정교육 개판이다. 평소에 그래 배웠어? 니는 말씀 들을 자격 자체가 안 돼. 인간아. 이 말 듣는 거예요. 인간아. 인간부터 돼라. 인간부터 되고 난 뒤에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도 안 되고 지 할 도리도 안 하고 이렇게 앉아가지고 언니는 죽으라고 고생하고 니는 덜렁 이러고.
이거는 오늘날 유튜브도 마찬가지예요. 유튜브 들을 때 유튜브를 들을 때 좋아요 한번 했다고 해서 입 싹 닫고. 구독자 이거 하나 있다고. 갑자기 그 이야기 왜 나오나. 모든 유튜브들이 다 그래요. 어떤 유튜버는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수업료 내세요. 자발적 수업료 내세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정당한 거, 옳다는 것은 필히 바뀌어지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예수님 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너희들 기준에 맞춰서 예수님은 우리 기준에 아마 동의하는 그 기준에 합당해서 훌륭하신 분이고 메시아일 거라 생각은 하지 말라. 하지 말라. 내가 널 뒤바꿔 놓을 테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도 말 안 들으니까 평소에 말을 얼마나 독하게 안 들었겠어요. 그러니까 흉 봤어요. 언니가. “예수님 예수님 저 동생 보고 나한테 와서 좀 도와달라고 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가만 두어라. 니가 언니 니는 니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보기에는 동생이 지금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옳은 일을 하는 거야.”
이 이야기 듣고 동생이 음매 기 살아 했겠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도 싸가지 없다는 거 본인이 아니까 이거 이상하게 칭찬 받을 짓이 아닌데 이게 변칙이에요. 구원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주님께 한 것도 없이 그냥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 가니까 미안해야 할 시츄에이션이지. 주님께서 왜 이러십니까? 주님 왜 저 천국 보내요? 이렇게 되는 것이 주님의 직접 개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정당함을 포기하지 못 해요. 그래서 이 마르다 마리아의 이 구조는 누가 정당한가를 묻고 그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음을 내가 바꾸려고 이 땅에 온 거예요.
바리새인처럼 성경 말씀을 연구한 것보다도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 주님께서는 예측 불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랑질 하고 이것 가지고 남을 이겼다고 자부심을 느낄 때 그걸 뒤바꿔버린 겁니다. 이레 씩 금식하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을 지옥 보내고 죄인이라고 했던 세리를 구원 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그 십자가 자체가 인간의 모든 정당성을 논하는 것을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정당성 자체의 기준 자체를 엎어서 일방적으로 내가 지정한 사람만 구원시키러 왔다는 그 사실을 새로운 카펫을 깔아야 되죠. 이 둘 나중에 물론 구원 받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예수님의 사랑으로서 두 사람 다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 카펫을 새롭게 깔게 하는 겁니다.
끝으로 나중에 마리아는 자기가 시집가려고 모았던 모든 재산을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재산보다 죽으심이 더 소중함을 깨닫고 아낌없이 그걸 다 내놓았던 사람이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마르다가 아니고 마리아가 그걸 내놓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얘가 더 착한 일을 했을 때 누가 움찔했느냐 하면은 언니가 움찔한 게 아니고 동생이 이게 지식이 아니고 현재 내 위치 자체가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변칙적으로 적용되는 사랑에, 바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역할에 내가 말려들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도 주님이 늘 개입하셔서 우리의 잘난 척하는 것을 주께서는 바꾸어서 못난 모습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이요 고마운지를 나오게 해주시는 주의 은혜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