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4-17 / 무너짐
무너짐
이근호
2021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요엘 3:14-17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3: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3: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3:17)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세상은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같지만 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인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어디로 유인되는가하면, 심판의 날로 유인됩니다. 바글바글, 인간들끼리 우호증진하고 협력하고 격려하고 단결하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유도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인간들이든 간에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시켜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기준은 바로 시온이 시온이 되는 기준입니다. 즉 시온이 부각되는 것과 병행해서 세상은 심판받습니다. 과연 세상이 심판받아 멸망되어야 할 대상인 점을 알려주는 징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고 말입니다.(3:15)
또한 징조는 ‘여호와의 날’에 시온과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부르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특히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질서를 보여주는 천체가 통째로 내려앉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대자연의 안정적 질서 안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보장받는다는 투로 살아온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점이 알려줍니다.
즉 해와 달과 별의 멀쩡함은 곧 인간이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유지될 가치가 여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연이 제자리를 잡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봐야 하듯이 본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해와 달과 별이 제 소임을 마치고 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해와 달과 별이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지 않을 때, 당연히 영원토록 그 상태가 지속된다고 믿고 인간들은 자기네들 삶을 이어간 겁니다.
쉽게 말해서, 종말이 오지 않을 날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이 되면, 가치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해와 달과 별이 해야할 일은 마감이 되고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친히 하실 일만 있습니다. 역시 인간의 할 일도 없습니다. 다 주님의 하실 일에 귀속됩니다. 이러한 교체의 징조는 마태복음 27:45에 나옵니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대낮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은 예수님께서 달린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은 참담하고 처참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탱할 모든 힘이 허물어집니다. 이게 바로 종말이 마침내 왔다는 순간입니다.
즉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있어서 그동안 유지해 왔던 겁니다. 인간들의 존재에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실 일에 유일한 가치가 있어 그동안 자연질서는 지켜졌던 겁니다. 이제 이 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가치로 대체되면서 이 세상의 나머지 모든 가치는 다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벽 안에 갇힌 것처럼 인간들이 상상하는 현실이란 ‘벽 안의 현실’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박혀 있는 이 벽을 인간들은 바라보면서 인간들은 자기 가치를 투영하고 그 투영된 의미를 자기쪽으로 되돌려왔습니다. 대자연 너머 어디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전혀 십자가 사건과 무관한 비현실적 상상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현실관에서 보면, 인간들이 상상하는 현실관은 그저 꿈에 불과합니다. 종말이 되면 다 무너질 그런 현실말입니다. 꿈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꿈은 늘 무시해도 되는 대상입니다.
종말이 되면 단번에 무시당할 이 현실세계가 곧 꿈이 됩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주님의 일의 결과물이기에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만 보게 됩니다. 이럴 때 선지자는 자신이 주장이나 자신의 가치나 자신의 의는 자기 안에 둘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의 속은 하나님에 의해서 도려내어집니다.
종말에 나타날 성도는 모두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자기가 지킬 자기 가치와 의’는 안에 둘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6:65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자기 일은 일체 없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단 한 명의 성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여호와의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기준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음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의논한 바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보내는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도라고 할 수 없고 시온성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질 때에, 성도는 자신의 내부는 몽땅 다 도려내어집니다. 이는 본인이 지킬 만한 자기 의나, 자기 자존감이나 가치나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중세 기사들이 창을 들고 살벌한 결투를 벌려놓고 상대방의 목을 창 끝에 달고서는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듯이,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끝에 성도가 스스로 지키려는 자기 의로움이나 가치나 의미가 예수님 손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간의 의논 사실은 소위 이 현실이라는 세상 안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시온으로 들어온 자들은 오직 여호와만 부르고 찾는 이유는, 이미 그들의 생성에 오직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온에 서서 멸망한 지옥을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처럼 ‘자기 안’은 없고 ‘예수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이 세상이 사라질 꿈에 불과함을 압니다. 해와 달과 별 뿐만 아니라 오늘부로 자신이 무너지고 사라져도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에게는 늘 마지막이고 늘 과거요 늘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진짜 현실에서 하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국가와 이 국가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확실하게 무너져 내릴 꿈의 세계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강-요엘 3장 14-17절(무너짐)2112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3장 14-17절입니다.
요엘 3:14-17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여기에 두 구역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이 찾도록 한 그곳, 그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람 숫자가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를 건사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살아가는 데 좋게 작용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곳, 그곳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인한 곳인데요, 그곳이 뭐냐 하면, 바로 판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판결이라 하는 것은, 좋은 판결이 있을 수가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이 많은 사람이 들끓고 있는 그 자리, 하나님의 판결의 자리, 그 자리 말고 다른 장소가 또 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16절에 나오는데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그러니까 시온과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시온입니다, 시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온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머지는 무가치하다고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척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장소가 뭐냐 하면, ‘판결 골짜기’에요. 심판을 하는 골짜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러한 취지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크고, 넓고, 많은 것, 이게 이 세상에서는 진리로 통합니다. 같은 인간들의 지혜를 끌어모으고 서로 협조하고 축적을 해서 가장 진리다운 것을 많은 사람의 의견을 참고로 할 때 진리에 접근해 간다, approach 해간다. 사람들은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유인했다는 사실을 몰라요. 여호와의 날에, 마지막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날의 특징이 여기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면,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별이 빛을 잃어버린 것을 많은 사람들,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토록 원했던 적이 있던가요? 없지요. 해가 좀 캄캄해졌으면 좋겠다, 달이 아예 없으면 좋겠다, 별들이 빛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원했습니까? 원한 적이 없어요.
도리어 해가 멀쩡하고, 달이 멀쩡하고, 별이 멀쩡할 때 그것을 이 세상의 안정성으로 이해했고 그 안정성 속에서 자기 자신도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겁니다. 해가 멀쩡하듯이, 달이 멀쩡하듯이, 별이 멀쩡하듯이 나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와 달과 별이, 그 멀쩡해야 될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진다면 사람들은 뭘 놓치고 있느냐? ‘해와 달과 별이 왜 무너져야 돼?’ 그 무너지는 이유에 대해서 사전에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진다면, 무너질 이유가 없는 것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내가 멀쩡해야 된다고 여기는 이것도 인간들의 일방적인 고집이고 욕심일 수가 있다는 것이 확 밀려오지요.
해도 무너지고 달도 무너지고 별도 무너지는데 인간은 자기가 뭐라고 안 멀쩡하다고 할 수 있겠어요? 눈에 보이는 어떤 자연이라는 무대 세트가 다 무너지는데요. 징조가 수상하지요. 음침하지요. 뭔가 불안하지요. 해답을 알아야 되는데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질 해답을 사전에 인간들이 예측하거나 예상한 적이 없어요.
‘해와 달과 별은 늘 한결같아. 늘 그래.’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해와 달과 별이 멀쩡한 그 세계 속에서 아늑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크게 하자 없고 문제없다고 자부하고 살았던 거예요.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대한민국의 청와대나 여기 대구 지묘동이나 뭐 그렇고 그렇지.’ 어떤 특별한 차이점을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거주하는 내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이 안정권 안에 있다면 자기 자신도 안정권 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해도 별문제가 없다.’ 너도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안일하게.
그런데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무너뜨리니까 그동안 인간들이 편안하게 ‘우리가 정당하고 우리가 늘 하자 없고 괜찮은 존재다.’ 그것 증명하려고 해와 달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하는 겁니다. 심판할 때, 판결할 때 기준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기준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 기준은 뭐냐? 해와 달과 별은 이제는 더 이상 멀쩡하게 있어서는 안 되는 기준과 동일한 기준입니다. 이제는 무너질 때가 되었다. 해와 달과 별이 그 자리에 있을 가치는 없다. 해와 달을 계속 유지할 가치는 더 이상 없다. 이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준이 등장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27장 45절에 나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모습이에요.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땅이 어두워졌다고 되어 있고 다른데 보면 그냥 해가 빛을 잃었다고 되어 있어요. 해가 빛을 잃으니까 땅에 어두움이 깔린 겁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27장에서는 52절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성도의 몸이 부활이 되어 버렸어요. 예수 믿던 자들이 부활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부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 된 거예요. 다시 살아난 겁니다.
이것은 그때, 해와 달이 무너질 때 그때 주목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차림이고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허물어진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허물어진 예수님의 모습과 병행해서 해와 달도 별도 같이 허물어지는 겁니다. 병행했다는 이 말은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이 인간들 자기 멀쩡하고 자기 잘났다, 그것 증명하려고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실 때를 기다린다고 해와 달과 별은 멀쩡했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역을 다 이뤘을 때는 더 이상 해와 달과 별이 있을 이유가 없이 어두워지게 된 겁니다. 그러면 누구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지금도, 오늘도 해와 달과 별이 멀쩡한데요?” 이렇게 할거예요. 형광등 깜빡깜빡, 할 때 형광등 끝난 거예요. 한 번이라도 어두워지고 한 번이라도 별빛이 무너지는 징조가 일어난다면 죽은 자들이, 죽은 성도가 살아난다면 이것은 세상은 맛이 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뭐 많은 사람이 아니고 거의 모든 사람이지요, 거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적인, 예수님 개인적인 죽음으로 본 겁니다. 해와 달과 별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기다렸다는 생각을 못 하고 그냥 개인적으로 이순신 장군 죽는 것처럼 개인적인 죽음으로 본 겁니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게 된 거지요.
그런데 여기 요엘을 보게 되면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어버리고 거두는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 날이 가까움이라’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요엘서에서 하나님께서 전면적으로 심판하는 날입니다. 자,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키고 싶은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해서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노래에 이런 것이 있지요. 사람들이 어떤 희망을 고대하면서 부른 노랩니다. 소나무라는 노래.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바비킴이 자기 노래 <소나무>에 넣어서 불렀지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독일민요지요. 사람들은 늘 청청하고 푸른 나무처럼 본인이 그렇게 되기를, 그렇게 일치감을 느끼고 싶은 거예요. 늘 청청하게 푸르게 한결같이.
그런데 이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뭐냐? 여호와의 날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거나 협의, 상의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마지막 때는 사람은 할 일이 전혀 없고요, 오직 여호와께서만 할 일이 남아 있는 그때, 그게 바로 종말이고 그게 여호와의 날입니다.
신앙이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그 속 시원함, 완전히 사이다 터지는 거지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뭔가 하는데, 교회에서 뭔가 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일을 너희들이 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종말에는 사람이 하는 일을 제키고, 인정치 않고 주님만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주님만 일해야 되는가? 판결하기 때문에 그래요. 판결. 시험 칠 때 선생님이 뭐라고 합니까? 시험 종료 5분 남았을 때 뭐라고 이야기하지요? “자, 슬슬 정리하지? 답 혹시 내려썼는가, 한번 확인도 하고. 이제 곧 거둔다. 검토나 해라.” 다시 말해서 이제 선생님 할 일만 있다. 시험지 거두는 선생님이 채점하는 일만 남았다.
“너희들은 이제 연필 놔! 볼펜 놔!” 지나가면서 농담삼아 이렇게 하지요. “네가 뭘 본다고. 아이고 네 머리로? 아이고 치워라. 그냥 시험지 가져와. 마지막에 컨닝할 생각하지 말고.” 보통 컨닝은 마지막 순간에 많이 하거든요. “가져와. 그냥 가져와.” 왜 마지막 순간에 컨닝을 많이 하느냐? 선생님이 자기 일만 하다 보니까 애들이 자기 일이 있는 줄 알고 막 베끼고 그래요. 자기가 맞는 답 써놓고도 남의 것 보고 베끼다가 나중에 두어 문제 더 틀리는 그런 사달도 나고 그렇지요.
이 종말 때 십자가 달리면서 해마저 자기 역할 끝났어요. 달도 끝나고 별도 끝나고 이제 무너질 날, 베드로 후서에 의하면 불에 탈 그것만 남아 있습니다. 불에 탈 그 일도 해가 할 일이 아니고, 달이 할 일이 아니고, 별이 할 일이 아니고 주님이 직접, 물론 중국산 라이터는 아니겠지만 주님이 직접 불 질러 버리는 거예요. 주의 일만 남아 있고 인간의 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판결의 기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 멸망으로 가는 길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적 기준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해가 어두워지는 것과 관련해서 확실한 증거를 주셨으니 그게 뭐냐? 허물어져 가는 예수님의 보잘것없고 초라하고 비참한 예수님의 신체였습니다. 그것이 판결의 기준, 마지막 영생과 지옥,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기준인 것을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왜? 예수님은 너무 허름하니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종말의 왔음의 기준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자기 하는 일에 자기 하는 성과를 자기 가치로 여겨서 자기 내부에 꽉꽉 담아 놓는 거예요. 심판 날에 자기 한 것 다 끄집어내서 이렇게, 이렇게 했습니다, 끄집어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누가 이야기했는가? 선지자가 이야기했다고요. 선지자는 본인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님이 보여주는 것을 그 누구에도 포섭되지 않고 날것을 그대로 전해버리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에도 휘둘리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그대로 전해 버려요.
이런 선지자의 자세는 신약성경의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 언질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한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음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복음이 맞는 것은 알겠는데 왜 우리를 쓰레기 취급하느냐, 이거예요. 복음이 복음적인 것을 알겠는데 왜 우리 일을 쓰레기 취급하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 그런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정말 성경에 그런 근거가 없을까요? 요한복음 6장 65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내 아버지께서 내게, 예수님께 보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올 자가 없다.
지금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가려고 해요. 그게 자기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와 버리면 인간의 모든 할 일은 무가치한 겁니다. 뭘 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가치 없는 거예요. 오직 가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보내는 일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예수님께 왔습니까? 예수님께 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아버지께서 날 예수님께 보냈다. 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자기 배알이 없어요. 자기 주장이 없다고요. 선지자도 마찬가지인데요.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예수님께 보낼 때는 그냥 보내지 않고 그 안에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마지막 지키고 싶은 자기 의를 다 도려내 가지고 예수께 보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할 일이,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인간 아담의 후손이 갖고 있는 그 자기의의 그 죄성을 주님이 가져갔기 때문에 예수님께 갈 때는 자기 의가 뻥 뚫린 채 가게 돼요. 마치 뭐와 같으냐? 옛날 중세 기사들이 창 가지고 말 타고 살벌한 전투를 합니다. 그 마지막에 이겨놓고는, 그런 잔인한 것은 사실 없습니다만, 몽골군사나 검투사나 그렇게 했겠지요, 상대방의 머리를 창끝에 달고 의기양양하게 산자의 승리감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께 가게 되면 주님의 창끝에, 십자가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동안 나한테 고이 모셔놨던 나의 의로움, 나의 자존심, 자존감 ‘이것이 언제 십자가 끝으로 이동했지?’ 주께서 도려낸 것, 나는 가질 필요가 없는 것,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나의 의, 그걸 도려내서 주님의 십자가 끝에 달아 가지고 “이것 네 것 맞지? 내가 네 것 다 도려냈어.” 주님이 승리한 거예요. 주님의 의가 나의 의를 이긴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러면 우리는 지킬 것이 없이 텅텅 비어 있지요.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께서 보낼 때 그냥 보낸 것이 아닙니다. 도려내고 보낸 거예요. 뭐 빈 깡통이지요. 껍데기만 있지요. ‘내 자존심 어디 있지?’ 어디 있기는 십자가에 달렸지요. 주님이 할 일이 그거니까요.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 그 구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의논되어 있어요. 그 의논대로 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올 수 없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말이 뭐냐? ‘없다’ 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알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성도는 없는 거예요. 없습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이 현실 속에는. 인간의 현실은 해와 달과 별과 동반한 현실이에요. ‘그 해와 달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상상하는 현실 속에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어요.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함께 있는 나,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는 거예요. 오늘날 모든 과학자들부터 해서.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선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게 무너지거든요. 언제? 여호와의 날에. 왜 무너지는가? 해와 달과 하늘에 걸쳐 있는 가치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는 현실은 아닌 거예요. 현실이 아니면 그냥 꿈이지요, 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새롭게 천주교 신부가 되는데 28세짜리도 있고 34세, 35세짜리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서른다섯 살 먹은 새로운 신부는 고등학교에서 화학 선생님 하다가 마음에 뜻한 바가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 바치겠다 해서 천주교 신학교 졸업하고 서른 다섯에 신부가 된 겁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요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이요, 이 본문 말씀에 의하면 15절에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지요. 왜 거두냐 하면, 해와 달과 별의 가치는 이제 시효가 끝났어요. 끝나고 무엇의 가치, 시온, 예루살렘입니다, 그 무시당했던 시온, 감춰진 시온, 숨어 있던 시온의 가치가 이쪽 해와 달 무너지면서 병행해서 이것이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이 있어야 마땅해. 저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있어야 마땅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지금 무슨 가치를 무시하고 있느냐 하면, 시온과 예루살렘의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온과 예루살렘의 가치, 이것은 ‘해와 달은 마땅히 무너져야 돼’ 와 바꿔 치기 하면서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있는 인간은 하나님 여호와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고 이것은 뭐냐? 그냥 꿈이에요 꿈, 그냥 꿈이라고 꿈. 현실이 아니니까요. 시편 73편 20절에 보게 되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꿈은 무가치하다.
여기 ‘무시함 같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무시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무가치했다는 거예요. 인간이 상상하는 현실은 원래부터 무가치한 거예요. 인간은 해와 달과 별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지켜주겠지, 따라서 나도 지켜주겠지, 해와 달과 별과 나를 같은 하나의 현실 안에 집어넣어서 다 같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사실은 가치 없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때에 그것을 몰랐지요.
“그러면 뭐가 가치 있는데? 가치있는 게 뭐라는데?” 가치 있는 것은 시온이고 예루살렘이에요. 시온은 뭐냐 하면, 시온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제공된 사람과 예수님과 결합된 그 커뮤니티, 그 공동체, 그 새로운 집단 그게 바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거예요. 그게 시온이거든요.
지금 선지자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요,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그 자체가 지옥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감추어진 이 시온이 천국인 것을 양쪽 다 바라보는 곳에 있어요. 선지자가. 이 말은, 선지자는 ‘자기 안’이 없어요. 왜? 아까 이야기했듯이 선지자의 ‘자기 안’은 주님이 다 도려냈기 때문에, 그래서 없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 안과 내 밖을 생각해서 내 안에 있는 것은 내 것이고 내 밖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내가 있음을 내가 유지하려고 하고 그것을 가치 있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안도, 자기 안도 자기 밖도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은 지옥과 그리고 천국, 세상 현실이라는 것이 나중에 지옥이 되고 시온만 천국이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시온만 천국이 되는데 그 사이에 홈이 있고 그것이 하나의 경계선으로 있어요. 마치 경주의 포석정, 귀족들이 술잔을 띄우면 돌아나가는 그 물길이 있잖아요. 홈이 파인 그 길, 그처럼 그 좁은 벽, 나중에 그 벽이 새로운 여호와의 날에 언약이 완성되어서 거기서 나오거든요.
선지자 ‘자기 안’은 따로 없어요. 없고 그 안에서 새로운 ‘안’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이라고 사도바울 편지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경계선에 있어 버리면 선지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무너질 현실인지도 모르고 현실이라고 우기는 지옥인 이 세상도 알고, 그리고 시온에서 부르짖는, 곧 여호와의 천국의 공동체도 알고, 천국의 새로운 집합체 새로운 이스라엘도 알고, 양쪽을 다 아는 거예요. 선지자가.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벽으로 가려져 있어요. 벽으로 가려져서 이 벽이 뭘 로 만들어졌느냐 하면, 그 벽이 거울로 만들어져서 벽 보면서 항상 자기 모습만 투영해요. 자기가 상상한 것만 투영해서 되돌려 받아요. 현실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뭘 봐도 자기 의미를 되찾는 식으로 그걸 보는 겁니다.
거기서, 그 현실 안에서, 천국과 지옥도 그 현실 안에서 만들어내요. 인간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내는 천국과 지옥은 자기 자신이 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구원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다 구라 거짓말이지요. 자기 의가 도려져야 되는데 내가 챙기고 싶은 나가 따로 있는 한 거기서 말하는 천국 지옥은 그냥 벽 안에 갇혀 있는 꿈같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 세례요한이 하는 말 여러분이 안 찾아봐도 아시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천국을 논하고 지옥을 논하는 그 사람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임박한 진노를 너희가 피할성 싶으냐? 너희는 갇혀 있어. 어디에? 너희들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꿈에 갇혀 있다고.”
신부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서른다섯에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되었을 때에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지는 것을 고려합니까? 고려하고 신부 된 거예요? 그 신부가 정말 성령 받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낸 자라면 그 신부 안에 자기 구원, 자기 의라는 것이 도려져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빈 깡통 같아야 돼요. 내 이익이 없어야 된다고요. 내 노림수가 없어야 돼요.
그렇다면 이 성당이라는 제도와 조직은 그다음에 신부가 되어서 강론할 때마다, 천주교는 설교라고 하지 않고 강론이라 하니까, 강론할 때마다 뭘 이야기하느냐? “여러분, 이 성당과 모든 제도와 천주교는 무가치하다는 판정을 받아서 무너져야 마땅합니다.”라는 강론을 할 겁니다. 하겠어요? 잘리는데요? 잘리면 월 용돈 50만 원 못 받습니다.
원불교는요, 그 교단에서 4십만 원 받고요. 천주교 신부는 50만 원 용돈용으로 받습니다. 왜? 숙식 제공 다 되니까, 보일러 되고 샤워시설 다 되어 있으니까. 절은 뭐냐? 프랜차이즈에요. 위에 상납금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먹는 겁니다. 다 먹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뭐냐? 개인사업체지요. 목사가 다 먹는 거예요.
그러니 종교라는 게 뭐냐? 교회, 성당, 절, 원불교 법당 이게 다 뭐냐 하면, 자기가 여기 있는 것을 현실로 보는 겁니다. 가치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해와 달이 별이 무너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왜? 그 무너질 이유를 모르니까요.
예수님이 허름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지금 이 멀쩡한 나도 지금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 마땅한 거예요. 내일 더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모든 것은 다 과거였고, 늘 과거였고, 늘 지나간 것이고, 늘 선지자는 늘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인데 마지막에 뭘 걱정하고 뭘 염려합니까? ‘아이고 내 교회……’ 자기 교회가 어디 있어요? ‘아이고, 내 법당, 내 돈줄……’ 이걸 왜 생각합니까? 매일이 마지막인데요.
그래서 성도는요, 천국이 무엇이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현실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돼요. 현실이 과연 현실일까, 물어야 됩니다. 현실은 꿈입니다. 무너져야 될 것이기 때문에 꿈이에요. 꿈의 특징은 결국은 무너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 안에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살았는데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깡통 되게 해서 “예수님께 가!”라고 하는 자들만 천국 간다는 그게 바로 시온이고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머릿속에 뭐가 남겠어요? “예수 그리스도만 알게 된 것만 해도 저는 감지덕지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 아닙니까? 그게 시온이거든요. 그게 시온이에요. 왜? 여호와만 부르니까. 이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지자는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께서 보여주는 것은 내가 안 보고 싶은데 이 세상이 지옥이고, 무너져야 되고, 내일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주의 십자가 끝에, 창끝에 달린 그것 ‘여기 있어야 될 나의 자존심과 의가 어찌 어디로 가버렸지?’ 하고 저쪽에 이미 빼앗긴 채 주님이 일방적으로 도려내서 갖고 있다는 그 사실도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되면 이 말은 뭐냐? 내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고 내가 허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키는 게 내 할 일이 아니라 이제는 내 할 일은 없고 오직 주님이 하실 일만 우리 안에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물결처럼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주님이 하실 일이.
제가 아까 교회가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 교회보다 더 현실 같은, 진짜 평생을 살면서 독하게 온몸으로 체험할 이 현실 같은 꿈, 그것은 뭐냐? 국가입니다. 국가는 종교단체입니다. 국가는 종교단체에요. 인간의 힘과 꿈과 희망과 모든 소망은 국가에 다 집결되어 있어요.
국가가 종교단체니까 국가가 하늘나라 시온의 나라를 대적하는 이단입니다. 그 증거는 뭐냐? 예수님이 죽으실 때 국가의 힘으로 죽었어요. 우리가 그토록 있어야 된다고 하는 그 국가, 그 국가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흔적을 지운다고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예수의 피가 이 교회 바닥이나 어느 바닥이나 바닥에 흘려지지 않도록 그것을 삭제하고 지우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에 시온 빼놓고 나머지는 지옥이다, 불 심판받는다는 그것을 지우는데 배후에서 악마가 국가를 통해서 그것을 하게 한 거예요. 그렇게 하게 했고 우리는 그걸 국가의 유일한 현실로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국가가 이단이고요, 국가가 예수님을 공격하니까. 국가는 인간의 활동성이 모였기 때문에 인간의 할 일들이 집합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뭐라 했습니까? 종말에는 우리가 할 것을 해 봤자 안해봤자, 하든 안 하든 무가치한 거예요.
두 번째가, 국가는 주식회사입니다. 왜? 국가가 공장이 되고 국가가 무역회사에요. 국가 안에서 취직이 되고 국가가 무역회사가 되어서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해서 다른 나라의 물품을 수입도 하고 수출도 하는 거예요. 외국의 신상, 가구 막 들어오고 우리나라 자동차는 외국으로 판매되고, 그래서 밥 먹고 사는 겁니다. 지하자원 캐고 석탄 캐서 이렇게 사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국가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이 보호 못 하는 것 국가가 보호해주지요. 이혼하고 양육비 안주면 국가가 양육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국가가 가정이 하지 못한 것을 큰 가정이 되어서 지켜줘요. 보호해줍니다. 외국에서 침범했을 때 국가가 없으면 개인이 농사지은 것 다 날아갑니다. 우크라이나 한번 보세요. 지금 아슬아슬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첫째는 국가가 이단이고, 두 번째는 국가가 공장이고 무역회사고, 세 번째가 국가가 가정이고, 네 번째가 국가가 선생님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다 가르쳐줘요. 의무교육부터 해서 경쟁적으로. 다섯 번째, 국가가 개인의 주체입니다. 우리 대신 승리감을 안겨줍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 대표팀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이름으로, 우리는 외국에 나갈 때 국가의 이름으로 나가서 우리가 당하는 소매치기부터 해서 국가의 이름으로 지켜주지요. 그리고 선진국 국민 같으면 승리감을 후진국에 안겨줍니다.
그런데 이 국가가 누가 현실이 아니라고 합니까? 이 국가가 바로 꿈이에요. 왜? 무가치하니까, 무너져야 되니까. 예수님 광야에서 마지막에 악마가 제시한 것은 국가권력이었습니다. “네가 권력이 현실이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비아냥 대면서 악마는 예수님을 끝까지 유혹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이 해와 달과 별과 함께 만들어진 이 국가가 아니라 오직 시온산이에요. 시온산!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해서 노출되는, 떠오르는 시온산. 해와 달과 별이 무너지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이 예루살렘뿐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라, 한 그 명령과 지시와 말씀, 그 외 어떤 가치도 없다.
예수님이 그 말씀대로 다 이룬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게 바로 시온성이고 그게 예루살렘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예루살렘의 존재성, 지금 현실 속, 이 꿈같은 현실 속에서는 이 예루살렘의 가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뭐 마치 교회인 것처럼, ‘as if’ 용법이지요. ‘마치……인 것처럼’ 교회도 아닌데 교회인 것처럼 그것을 붙들고 거기에 자기 자존심을 걸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다음 주일에 교회 간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누구 맘대로?
그 교회가 무너져야 된다는 사실. 누구와 더불어서? 이 허접한 나와 더불어서 같이 무너져야 된다는 것. 그럴 때 우리의 자리가 뭐냐? 우리의 자리는 바로 천국도 알고 지옥도 아는 그 경계선, 요엘처럼, 예수님처럼, 세례요한처럼 그 선지자의 자리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이게 시온이에요.
현실도 아닌데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꿈같은 여기에 매료되어있는 수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예수께 보내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가슴이 뻥 뚫려서 “나의 의가 뭐예요? 자존심이 뭐예요? 그것 나 모르겠는데요? 그런 것은 모르겠는데요?”
양쪽을 다 보면서 주께서 주시는 새로운 예수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선지자의 자리,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가라고 했던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만, 우리 안에 십자가의 공로만, 혜택만, 은혜만 우리 안에 차 있을 때 그것이 마지막 때 주께서 하고자 하는 주의 일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공들였던 것이 무산될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자존심 상하고, 쓰리고, 내가 왜 사나, 싶은 생각이 들 것인데 그 모든 것은 예수님 마주해서 예수님 일이 아니라 남들과의 나의 일을 모색하고 나의 일을 따로 챙기다 보니까 그런 꿈을 현실로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고 꿈에 불과하고 무가치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의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