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28-32 / 한 장의 그림
한 장의 그림
이근호
2021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요엘 2:28-32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나라는 것이 과연 인간일까요? 아닙니다. 참된 인간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육체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 세계는 천사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어 저항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의 번식에 악마가 개입하는 데 있어 대처할 방도가 없이 된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이 침입된 악마적 요소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겁니다. 창세기 6:3에서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인간 세계에서 철수하신 겁니다. 이제 인간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전면적인 파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꾸며놓으신 연극 무대로 표현하는 것이 간편할 겁니다. 연극 무대의 세팅은 대(大)자연에 해당될 겁니다. 그리고 무대는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자연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무대 자체가 무너져내린다는 말이요 이는 이 무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적절한 인격적 주인공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제마다 자신은 고귀한 인격자라고 행세하고 있습니다. 실은 그들은 악마의 뜻을 대행하는 인격자 노릇을 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들 육체, 곧 심판의 대상자들은, 혹은 하나님의 신과 같이 할 수 없는 자들은, 대자연이 영원히 그냥 지속된다고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지붕 밑에서 인간류(인류)들의 번영과 불멸을 꿈꾸고 있습니다. 설마 이 대자연이 무너져내리겠다는 상상도 못합니다. 이 안정적인 대자연의 질서 밑에서 인간류들은 종교도 만들고 나라도 만들고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윤리와 도덕을 형성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옛날 애굽 나라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민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실어나르는 가마꾼 같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고 그 언약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십니다.
이 이스라엘이 나라로 본격화하기 전에 애굽나라에 난데없이 자연 재앙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10번씩이나 말입니다. 멀쩡한 강물이 핏물이 되었습니다. 물은 물이고 피는 피다는 것이 그동안 인간들이 경험한 바입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민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철석같이 변하지 않는다고 자부한 자연 질서와 혼란이 생긴 겁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9:24에 보면,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차가운 우박이 불과 더불어 같이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애굽 사람들만 사는 동네에 떨어지게 된 겁니다. 그들이 그토록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그 자연에 구멍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께서 설정한 대자연의 무대 장치는 연출자이시고 각본을 자신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겁니다. 즉 인간은 대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 있는 겁니다. 비록 그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그들의 귀와 눈을 가지고 자연을 관찰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기에 거짓된 결론에 도달될 뿐입니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대자연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류가 아니라서 이 대자연의 진정한 주인공이 따로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대자연을 통해서 징조를 알려주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대자연의 붕괴 속에 같이 함몰될 대상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하 22:8-11에 보면, 이 대자연의 무대가 진정한 주인공 앞에서 어떤 현상을 보이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즉 이 세상은 기어이 연극의 주인공이 온 천하에 등장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신(영)에 의해서 주인공 되시는 분과 함께 한 그분의 백성도 무너지는 대자연의 타이밍에 맞추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육체가 되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항상 ‘나의 됨’이나 ‘나의 것’에 대해서 예민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도 모르는채 자신들은 죽어서 좋은 세상에 들어갈 것이라고 소망합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주의 이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실 인간형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무너져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울러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에, 뒷 자연배경은 어두워졌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눅 23:44) 즉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우주의 주인이신 십자가 달린 그분에게만 주목하라고 뒷 배경은 어두움으로 처리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시간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장의 그림, 곧 캔바스가 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도 어두움이요 미래의 역사도 어두움이고 모든 인간들도 어두움이지만 오직 십자가의 현장만큼은 유난히도 빛을 발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예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진정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자는 먼저 성령의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즉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반복적으로 받아야 합니다.(요 16:8)
그렇게 되면 성도는 전에 자신의 것으로 차지하게 된 그 자아의 중심부에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더는 자신을 자신의 주인공일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같도 굳이 내가 나라는 것을 고집할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그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말씀이 나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구원의 징후입니다.
즉 사명이 나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주의 이름만이 활동함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3강-요엘 2장 28-32절(한장의 그림)211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28-32절입니다.
요엘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 본문에 하늘과 땅에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어떤 징후, 어떤 징조가 나타난다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을 합쳐버리면 이것은 대자연이 되겠지요. 대자연을 하나의 연극무대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팅된 연극무대.
그러면 그 연극무대는 연극무대기 때문에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 등장인물들은 갇혀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고 바깥세상을 아무리 구상을 해도 그들은 하늘과 땅이라는 그 제한된 공간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일이 다 벌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연극무대의 세팅되어 있던 천장이 내려앉는다고 봅시다. 그걸 가지고 하늘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에 무대가 꺼진다면 이건 땅이 주저앉는 거지요. 그러면 그 세팅된 무대에 의존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 인간들은 꼼짝없이 그 무대의 운명과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연극무대라 하는 것은요, 그 연극을 연출하는 연출가의 의도와 뜻만 충분히 보여주게 되면 연극무대로서의 그 역할은 다 한 거예요. 거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이나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개인적 사정은 연출가 입장에서는 고려해주지 않습니다.
영화 촬영하는데 영화배우가 우리 집안에 일 있다고 촬영 그만두고 가게 되면 그것은 감독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지요. 배우가 그 역할에 충실해야 되고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 촬영할 때 그게 자기의 인생이에요. 다른 인생 없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해 줘야 돼요.
그처럼 우리 피조물 운명이라는 것, 팔자라는 것은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두었어요. 그러면 그 연극이 끝나는 날 같으면 이제는 세팅된 연극무대부터 철거대상입니다. 무너지지요. 무너질 때 거기 배우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명을 지를 겁니다. 악!~ 하고 비명 지를 거예요.
자, 연극무대가, 내가 알았던 대자연이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세팅된 연극무대인데, 하나님이 그 연출자고 감독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것이 무너져 내릴 때 악! 하고 무대장치, 대자연과 함께 함몰되어서 무너지는 사람의 비명 소리도 있겠지요. 그게 우리네 상식입니다.
연극무대 무너지면 다 같이 외마디 비명 지르고 다 거기에 파묻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거기 어떤 놀라운 예상 못 할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비명 소리 말고 다른 이야기. 그게 32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등장해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내가 의지했던 그러한 이 대자연, 내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대자연이거든요. 대자연이 무너지면 우리는 망한다. 이것은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코로나 범람하니까 마스크 쓰고 있는 이유가 뭐 대자연의 변화에 인간이 같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인간들이 죽을 판이니까 마스크 쓰고서라도 살아야 되겠지요. 항상 대자연의 눈치를 봐야되는 거예요.
그런데 몽땅 무너진다면 다른 희망은 없어요. 절망적입니다. 이게 우리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좋으나 싫으나 간에 평생을 대자연 품 안에서 우리는 살았기 때문에 이것 대자연 사라지게 되면 같이 망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 가운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등장한다면 이것은 인간들이 예상을 못 한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다음에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 있지요. 32절에. 그러면 이 구원이라는 것은, 제가 방금 해드린 말씀에 의하면 구원이라는 것, 인간은 대자연이 전부고 그 안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자에 한해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망하면 망하는 거지 여호와의 이름 불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대자연이 무너지는데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벌써 알았어. 내가 부르는 여호와께서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만들었다가, 부수기 위해서 만들었다가 부수시는 것이 그분의 예정된 작업이라 내가 사전에 그걸 알았지’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무엇을 부르느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 인식은 대자연을 초월해요. 대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이 모든 것이 결코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요.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 28장 2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무대장치를 보는데 성령을 받아서 깨닫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자연이 다가 아니야, 이렇게 하는데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대자연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사는 게 그게 인생의 all, 모든 인생이라는 그 안에서만 형성되고 그 밖에는 다른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 줄 알았던 거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에게 귀가 있고 눈이 있지만 귀가 있고 눈이 있는 그것도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대자연이 무너질 때 그들의 귀와 눈도 아무 쓸모 짝이 없다는 것이 완전히 티가 나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제가 처음부터 강조한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연극무대로써 세팅되어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니야. 대자연은 옛날부터 있는 그대로 이것은 무너질 리가 없어.” 이렇게 그대로 간다고 이야기하겠지요.
오늘 본문 요엘서 2장 30, 31절에 보면 “내가 이적을……” 이적이란 어떤 징후를 말하지요. 내가 징후를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와 불과 연기 기둥, 그다음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피 색깔이 되면서 변하는 거예요. 뭐 일식이 일어났어요? 핏빛같이 변한다. 갑자기 무대 색깔이, 무대를 유지했던 색깔이 달라져요. 해가 어두워졌다는 말은 대자연을 비추는 조명시설이 맛이 갔어요. 형광등이 너무 오래되었는가요? 맛이 갔어요. 대자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인간들은 그것만 의지했거든요. 인간들의 의식은 뭐냐 하면, 사람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대자연의 질서다. 이것 믿고 그들은 변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 가운데서 종교도 끄집어내고 철학도 끄집어내고 오늘날 과학도 그러한 안정된 질서라는 전제하에 과학을 실시하는 겁니다. 안정된 자연 가운데서. 안정된 보금자리, 갑자기 보금자리 아파트가 생각나네요.
보금자리 아파트처럼 나의 보금자리,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식에게도 물려줄 나의 보금자리, 그것만 있으면 인생 오케이, 인생 대대로 별 탈 없이 잘 살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햇빛이 어두워지고 달빛이 핏빛이 된다는 것은 그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해가 어두워지게 되면 그 이유를 내가 알아야 되고 달이 핏빛이 되면 그 이유를 알아야 되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곧 나에 대해서, 그동안 내가 다듬어온 내 안정된 나의 인생에 문제가 일어났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싫은 거예요. 무슨 말이냐? 인간은 뭐가 싫으냐 하면, 나다움에 변경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해요. 나다움. 인간이 자연에 갇혀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을 모티브로 해서, 자연을 안정으로 해서 그 안에 형성된 이 자아상, 내 자아상에 내가 갇혀 있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내 자아상에 갇혀 있다는 말은 내가 가진 것 안에 내가 갇혀 있다,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나 둘씩 빼앗기면 분노가 일어나고 화가 나지요.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대충 듣고 안 보려고 하는 이유가 성경 말씀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거든요.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부정적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돼요.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행복을 안 주는 책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거절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타조가 뒤에서 짐승이 따라오니까 그 자리에서 도망치면 되는데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뭘 하느냐 하면, 모래밭에 자기 머리 부분만 팍, 하고 거기에 처박아 버립니다. 머리 부분을 처박아서 눈과 귀가 모래 속에 있으니까 모래 안에는 짐승이 없잖아요. 그냥 고요만이 흐를 뿐이지요. 몸뚱이는, 엉덩이는 바깥으로 다 내놓고요.
그래놓고 눈만 감으면 짐승이 그냥 못 볼 줄 아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를 못 보지요. 그런데 짐승이 나를 못 보고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겁니다. 이게 참 어리석지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무너지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본인이 이게 듣기 싫어서 아니야 ‘아니야. 나 그런 소리 안 들을거야.’ 하고 자기 손으로 귀를 막으면 성경 말씀이 ‘아이고, 무서워라.’ 하고 하나님께 일 안 벌입니까? 이 무대가 안 무너집니까?
무대는, 자연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요, 무대는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요. 그걸 절망적으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그 무대 안에 갇혀 있다는 그런 티를 확 내버린 거예요. 성경에 보면 무너지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이 있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너져야 할 것들은 무너져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분명히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 했거든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온다 할 때 바리새인들이 믿지를 못했어요. 아니 믿고 싶지를 않았어요. 왜냐하면 구름 타고 오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 되느냐? 마지막 그들이 아는 구약성경, 그들의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 무대가 무너질 때, 마지막 심판주가 나타날 때 이 세상에 구름 타고 오게 되어 있어요. 다니엘서에서도 그렇고.
그러면 그들이 정말, 그들이 진짜, 여호와의 말씀을 진짜 기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걸 반긴다면 그들은 무너짐을 고대해야지요. 기다려야지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이 세상 무너지는 그 날을 기다려줘야 주의 이름 부른다는 그 의미가 현실로 실현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화 내용에 주인공이 영화 내내 1시간 반 동안 시달리게 되면 관객들은 짜증나요. 짜증나지만 기다립니다. 뭘 기다리느냐? 그 주인공한테 못되게 했던 깡패들 있잖아요. 그 깡패들, 주먹 쓰는 그 사람 누굽니까, 마 동석이 나와서 한방으로 때려눕히면서 그 깡패세계가 무너지는 것, 그 무너지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잖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내가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진짜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이 세상이 어서 무너져야 되지요. 그래야 그 가치가 드러날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예수 믿는 즐거움 아니겠어요? 보람이기도 하고.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낙이 그 낙이잖아요.
넓은 길로 가는 많은 인간들 다 죽어라, 다 무너져 버려라. 왜? 주의 이름을 부를 그날이 와야 되니까, 그 타이밍 맞추는 날이 와야 되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그동안 잘 지내왔던 이 대자연이라는 무대장치가 왜 무너지는가?
그것은 창세가 6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의 요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철수를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철수를 해버리면 남는 것은 ‘하나님이 없음’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의 신이 철수를 해버리면 그 남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이 되어버리면 그들은 이 대자연의 있을 자격자가 못됩니다. 그러면 그 대자연은 그들을 눌러서 뭉개버리지요. 대자연과 더불어서 무너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120년 후에 그들에게 노아홍수가 일어나서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다 멸망하는 거예요. 원인은 딱 한가지에요.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러한 무대를 하나님이 원했건만 이 악한 천사들이 인간의 딸과 같이 섞여버리니까 이것은 경건한 인간들만 살아야 될 이 땅에 하늘의 악한 천사가 개입했다는 이것이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간주하시고 대자연과 함께, 그걸 전부다 자연과 함께 그걸 뭉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실은 뭐냐?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이 대자연은 무너진다.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으면 무너진다. 그러한 원칙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대해서 전쟁을 벌인 거지요.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와서 피와 불과 연기 이것은 뭐냐? 피라 하는 것은 출애굽기 7장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대자연은 하나님이 건드리기만 하면 거기서 하늘의 뜻을 보여주는 징후로서 대자연이 그냥 놓여 있어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 대자연은 무대에요. 연극무대입니다. 연극무대에 하나님의 대본이 딱 들어가게 되면 그 연극무대가 거기에 맞춰서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어 있어요. 이 대자연 자체가 무대거든요. 무대인데 하나님께서 이 대자연을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을 마음이 없다는 식으로 보여주게 되면 물이 뭐로 변하는가? 피로 변하는 겁니다.
그러면 물은 영원한 물이고 피는 영원한 피라고 생각했는데 물이 피로 변하는 그러한 혼란은, 카오스는 인간들로 하여금 과연 이 대자연은 믿을만한지 의심하게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하지요. 당황스러운 이유가, 천사와 사람의 딸과 혼인을 해서 거기 등장한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창세기 6장 3절 다시 보게 되면 거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된다는 것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는 거예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된 인간형을 육체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 된 인간이 아니고 거짓된 인간이에요. 거짓된 인격자로 행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대자연을 거짓된 인간을 위해서 유지할 마음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거짓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공격을 벌이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그 심판을 하실 때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된 인간들이거든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악마를 대행하는 인격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짓으로 보는 겁니다. 육체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었어요. 이스라엘나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자를 실어 나르는 하나의 가마꾼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언약궤가 있거든요. 그 언약궤 있는 장소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어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인격적인 분이 여호와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니까요. 짐승은 이름이 없잖아요. 이름은 인격적인 어떤 존재자에게 붙는 게 이름이에요.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자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데 그 존재자 이름이 여호와라, 여호와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전쟁을 벌일 때 애굽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인다는 말은 이 대자연속에서 징후를 남기는 겁니다. 인간은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육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심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이스라엘과 너희들의 차이점을 보라고 애굽나라의 자연에 징후를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지팡이를 가지고 물에 집어넣으니 물이 피가 된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은 어떠냐? 불은 출애굽기 9장 24절에 보게 되면 아주아주 희한한일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애굽 왕하고 대결을 하는 거예요. 23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다섯 번째 재앙부터는요, 이스라엘이 사는 곳,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과 애굽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차등해서 재앙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심판을 할 때 이 대자연을 통해서 심판을 내리는 것은 아까 이 대자연이 무대장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무대장치에 연출자의 각본대로 뜻이 전달되게 되면 무대가 그 징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그 말이지요. 왜? 인간들은 갇혀 있으니까요. 이 대자연에.
그래서 24절에 “우박의 내림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옵니다. 우박이라는 그 차가운 요소와 불이 함께 내려온다는 것이 그동안 인간들이 대대로 경험했던 자연법칙에 의하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대자연법칙이 깨어지고 있는 겁니다. 무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실어 나르는, 참된 인간을, 참된 인격자를 실어 나르는 가마꾼들이 이제는 형성되기 때문에. 히브리인들 속에서 언약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이 대자연을 누릴만한 유일한 인격자 되시는 여호와 이름께서 그들과 함께 있음을 티내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애굽 나라의 대자연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연기는 뭐냐? 사무엘하 22장 9-11절에 보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린 것, 이스라엘 곧 히브리인과 애굽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린 그것을 총괄적으로 설명한 것이 사무엘하 22장 9-11절에 나옵니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연기지요.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이게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곧 무대연출자께서 직접 무대 속으로 하늘위로부터 내려오실 때에 이 무대는 이제는 무대를 설치한 모든 취지가 다 종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지요. 무너뜨리면서 내려오시는데 자연을 무너뜨리는 무기로써 코에서 연기가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오고 그 불이 세상의 모든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