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엘

요엘 1:8-12 / 맞춤 공격

정인순 2021. 10. 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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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 공격 

 

이근호
2021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요엘 1:8-12

(1: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1: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10)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 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산다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살고자하므로서 그동안 감추어놓은 죄성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인간들의 뭔가 즐거워하는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욥기 1:21의 말씀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는 원칙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즉 주셔놓고 도로 빼앗아가시므로서 그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숨겨진 본성이 드러납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 실망입니다.

실망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이제는 나의 것이 되었다’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 그 자체’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회수하시면서 인간들이 하나님과 다른 식으로 세상과 현실을 해석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각자 자신이 갖게된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자신의 Home집을 만듭니다. 자신의 최후의 안식처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어떤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모두 다 황망해 있습니다. 어떤 새색시는 혼인하지마자 남편이 죽어서 깊이 울고 있고 제사장은 사람들이 제사지내려 오지 않고 생계에 위협받습니다.

밭농사하는 사람이 과수 농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것은 한결같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이 노리고 이스라엘을 집중 공격하셨기 때문입니다. 메뚜기가 쳐들어와서 다 농작물을 갉아먹었고 앗수르라는 이방민족들이 쳐들어와서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희락이 말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직업들이 다양해도 모두 같은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동안 모은 것으로 살아가기에 나는 나도 너는 너다’ 정신입니다. 즉 바로 이런 사고방식으로 동질성을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심판을 내리는 다같이 동질적으로 슬퍼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동질성은 각자 가진 것으로 삶을 영위하는 그런 동질성이 아닙니다. 다른 원칙이 있습니다. 이 다른 원칙을 실시하려면 필히 기존의 동질성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격은 인간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그 최후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겁니다. 즉 나를 지탱하는 최후의 것을 노리면서 하나님께서 공격하십니다.

자신이 살 이유와 의미가 나오는 유일한 버팀목을 박살냅니다. 이는 곧 부적같은 것을 자리잡은 그 공간입니다. 신(神)의 존재는 인간의 개인의 가치를 고수하는 한 부적이 됩니다. 나를 지켜주리라고 믿어보는 부적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여지없이 작살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동질성을 두고 말하는 겁니까?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 재판을 통해서 그 면모가 나옵니다. 그것은 이의를 제기하는 쪽에서 자기 결정에 따르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제일 마지막 등장하는 처분에 그냥 맡기는 겁니다. 이미 인간 세계는 각자 자신의 것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지키고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같이 기거하는 두 여인이 둘 다 아이가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아이가 어미의 몸이 깔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아기를 죽는 여자가 옆에 있는 남의 여자의 아기를 자기 아이로 삼아버렸습니다. 여기에 항의하여 진짜 아기의 어미가 솔로몬에게 재판을 청구한 대목입니다. 즉 피해입은 여인은 하나님을 정의롭고 공평한 하나님으로 알아서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어 줄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정을 핑계로 피자를 공평하게 나누겠다고 자신이 칼을 들어 분배하고 제신이 그 분배된 것 중에 제일 먼저 선택하는 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지 칼 든 자가 이미 일방적이고 독자적 상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피해 입은 여인은 제일 뒷 순서로 돌려버리는 판결을 내립니다. 살아 있는 아기를 둘로 나뉘어 반반 나뉘게 했습니다. 이런 판결은 결코 재판을 청구한 억울한 어미의 기대한 바가 아닙니다. 도리어 아기를 죽인 가해자가 원하는 판결입니다.

이로서 재판을 청구한 자의 내심 요구한 그 정의로운 하나님은 그 청구한 자가 품고 있던 부적같은 하나님상이 됩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을 박살내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자도 자신의 특이성을 주장할 것들을 소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겁니다. 살아 있는 아기에 대해서 ‘내 아기’라는 의식을 가진 그 의식을 포기하고 자기 아기를 죽은 자의 아기로 넘기는데 기꺼이 동의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가진 동질성입니다.

기존에 자기 중심이 살아있는 식의 동질성에서,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이런 상황이 예수님의 의해서 달성됩니다.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갚을 것이 없는 고로’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즉 도로 나의 것으로 돌아와서 그것들이 모아져 따로 ‘나의 삶’이 영원하는 여지를 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죽음 다음에 부활이기에, 인간들이 왜 필히 죽어야만 하고 저주받아야만 하는 그 원칙이 그대로 유지된 채 부활의 세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야지만 인간들로 하여금 임의로 ‘죄사함’을 노리고 죄를 고백하는 것을 금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주목해야 합니다.

죄사함마저 노리고 들어간다면, 이는 피자를 분배한 자가 제일 1순위로 자기가 잘라놓은 피자를 가지겠다는 애초의 노림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부적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일하심이 기쁨이 되지를 못하고 주님의 일하심을 멋지게 이용해 먹은 자신의 결정을 기뻐하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세상의 동질성에 대해서 이질성으로 오신 이유를 아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요엘 1장 8-12절(맞춤 공격)2110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1장 8-12절입니다.

요엘 1:8-12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 그리고 그들의 형편이 다 다릅니다. 8절에 나오는 것은 막 약혼한 신부인데 약혼하자마자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버렸어요. 상실감에 어쩔 줄 모르고 깊은 울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애곡하는 경우,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제사장,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려주는 조건 하에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생활비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보면, 민수기 18장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한 모든 예물을 너로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인하여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영한 응식으로 주노라.”

일종의 생활비로 주는 것인데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의 제사장에게로 가져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면 제사할 때 남는 제사밥 있잖아요. 고기 그런 것은 제사장과 레위 지파가 그걸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로 생활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십일조도 제사장에게 드리고요. 레위인도 백성들의 십일조를 받고요.

그런데 그 제사장이 살 희망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제사할 때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땅의 생산물을 가지고 오는데 모든 땅이, 밭이고 논이고 전부 다 황폐하게 되니까 제사하러 오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업이 안되는 거지요. 가게에 손님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요엘 보면서 메뚜기가 덮쳤고 그다음에 앗수르라는 이방 민족이 덮쳐서 이스라엘을 겨냥해서 재앙이 들이닥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재앙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그렇게 난처한 입장에 있고 그다음에 11절에 보면 농부들이 나옵니다. “너희는 부끄러워해라” 농사 지어야 되는데, 그것이 자기의 생계수단인데 아무것도 없어요.

포도원에 가봐야 포도가 없고, 밀과 보리도 생산되지 않아요.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모든 과수나무는 그들이 생산해서 먹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그 당시에 수출 주력상품입니다. 그렇게 수출해서 돈을 모아야 외국에서 필요한 일상품을 수입해서 쓸 수가 있는데 온 나라가 이렇게 황폐해졌으니까 어떤 직종에 있든지 간에 그들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남편이 죽어서 애곡하는, 신혼을 맞이했던 그 신부의 심정, 처지와 동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취지가 뭐냐? 미국의 속담에 이런 것이 있어요. “신발 맞거든 신어라.” 딱 네 거다, 그런 뜻이에요. 신발이 맞으면 신어라. 그 말이 뭐냐 하면, 맞춤 공격을 한다는 말이에요.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노리고 공격한 거예요. 너를 위해서 공격한다. 너를 향하여 공격하는 거예요. 앗수르도 그렇고 메뚜기 편대도 그렇고.

하나님의 의도가 강렬합니다. 신발이 발에 딱 맞춤인 것처럼 하나님의 이 재앙은 이스라엘에 딱 맞도록 하나님께서 재앙을 주시는 거예요. 여기서 선지자의 기능, 선지자의 역할이 특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선지자가 그렇게 필요치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이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사람들이 왜 그 시대에 인기가 없고 환영받지 못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말씀 말고 다른 것에 바탕을 두고 일상을 살아가기에 그렇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 12절 마지막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인간의 희락, 인간의 기쁨이 바짝 말랐다 그 말이지요.

기뻐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온 천지가 기쁨이 없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유가, 너희들이 평소에 무슨 기쁨으로 살았는지를 내가 너희들 들통나게 하겠다는 겁니다.

혼인한 신부나, 밭의 소산이 없는 농부나, 제사가 끊어져 버린 제사장이나 이 모든 사람들의 평소 일상이 ‘아, 이런 일이 있으면 나 기쁘겠는데. 나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 보람으로 살았어.’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디에 바탕을 뒀느냐?

바로 먹을 것 입을 것이 나에게 이렇게 보장되어 있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여기에 그걸 기쁨의 원천으로 생각한 거예요. 뭔가 갖고 있는 것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이것이 있다는 것을 세상사는 기쁨으로 여겼던 겁니다. 그것도 내 것 가지는 것.

선지자의 기능을 다시 말씀드리면, 바로 그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선지자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이나 음식, 땅의 소산물로 내가 세상 사는 기쁨을 가지겠다, 라는 것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원칙에 대해서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욥기 1장 21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오해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라.” 이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라. 굉장히 신앙적으로 보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고 “주신 분에 관심 갖고 살아라.” 그런 뜻이에요. 주신 것 받아 챙기는 식으로 “아이고, 고맙습니다.” 해서 자기가 받아 챙긴 것에 관심이 있지 누가 주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받아 챙겼으면 되었지, 일단 챙기면 그게 다지 뭐 누가 줬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 말이에요. 받을 것 받아내고 주신 분은 도외시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사람들은 그것만 들어요.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합니다.” 하는데 그다음 어디까지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주신 것을 회수할 때, 빼앗아갈 때, 주실 때의 그만한 정당성이 빼앗아갈 때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갑자기 애곡하고 슬퍼하고 그래요.

주님만 바라보시면 줄 때와 가져갈 때, ‘이것도 주의 일이지만 저것도 주의 일이다. 주님이 일하시는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기뻐합니다.’ 왜 이런 기쁨이 되지 못하느냐, 왜 이런 기쁨이! 그걸 문제 삼는 겁니다. 이게 그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한테 다 해당 되는 이야기에요. 이 시대에.

식당에 보면 이런 경우들이 많이 나옵니다. 물냉면 시켰는데 의외로 빨리 나왔어요. ‘이 식당 참 빨리 나오는구나’ 막 먹으려고 하는데, 겨자 막 치려고 하는데 “아이쿠, 손님! 잘못됐습니다. 손님 것 아니네요.” 하고 도로 가져가지요.

그러려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주시지 말지 왜 줬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뭘 주시는 이유는요,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뭘 받을 때 수령자, 수령자의 그 ‘나’라는 의식이 굉장히 강렬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줬다 빼앗음으로 말미암아 수령자, ‘내가 받았다’ 에서 ‘주님이 주셨다’로 사고방식을 전환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동안 키워줬다가 이제는 도로 뺏는 겁니다.

노리면서 표적 수사하듯이, 노리면서 뺏는 거예요. 뺏기 위한 요건을 다 갖추고 편대를 보냅니다. 메뚜기 편대를 보내서 다 빼앗아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런 생각이 안 들고 그냥 본문만 읽고 그 시대 그 상황에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이 이야기 나올 거예요. “이게 뭐야! 여태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뭐야 이게? 하나님, 지금 이게 뭡니까? 이 시츄에이션(situation)이 뭡니까? 왜 이러십니까? why me, 하필이면 왜 저에게, 도대체 내 인생이 이게 뭐야!”

인간이 태어난 지 약 6개월 된 애한테는 장난감 줬다 빼앗아도 엄마가 있다는 그 자체로서 굉장히 희락이 되고 기쁨이 돼요. 그런데 돌만 지나면 엄마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엄마가 나에게 뭘 줬는데 줬던 그 엄마가 도로 나에게서 가져간다면 애가 그 엄마 손가락 깨물 수도 있어요. ‘엄마가 이게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의식이 그렇게 생긴 겁니다.

그전에는 나의 존재의미를 나에게 안 뒀어요. 엄마한테 뒀어요. 엄마가 있기에 내가 있는 겁니다. 엄마 따로 나 따로가 아니에요. 분리된 것이 아니고 같이 있다고요, 같이. 전에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이스라엘의 의미는 동행이라고요. 같이 있다고요, 같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이게 율법의 정신입니다. 율법의 본정신이거든요.

그런데 한 돌만 지나면 그다음부터는 자의식이 강렬해가지고 엄마가 그렇게 해줘도 내 것 가져간다고 그렇게 화를 내요. 그러면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엄마 입장에서는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하겠지요. “이거 누구 돈 주고 산 건데?”

애가 좀 크면, 애가 한 다섯 살만 돼도 ‘엄마가 주는 돈으로 샀지만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소유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등기 나에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할걸요. 이것이 태생적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본성적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까발리려고 해요. 완전히 다 들춰내려고 해요.

모든 것을 가져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요.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실망을 유도하시고요, 그 실망을 공격합니다. 너는 실망할 자격 없다고. “네가 어디 시건방지게 실망을 해?” 너의 것이 따로 있다는 그 자체가 이 하나님의 율법 정신, 그 근원 자체를 네가 지금 오히려 못을 박는, 그것을 찢어버리는 그 짓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긍휼을 짓밟아버리는 그런 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놓고 하나님의 적이 되는 그런 태도가 뭔가 실망하는 거예요. 내 처지에 대해서 내가 실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운다는 것, 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고 실망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그 자의식을 가지고 뭘 하고자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뭘 만드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안식처, 영어로 shelter, 최후의 안식처, 쉬운 영어로 home, 자기 집을 만드는 거예요. 아지트를 만드는 겁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뭐냐? 그냥 이 말씀 지키라, 해서 그것으로 백성이 될 수 없어요. 줬다 뺏어야 백성이 되는 근거가 마련되는 겁니다. 줬다 뺏어야. 요엘은 마지막 계열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최후잖아요, 최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그 본거지를 작살 내는 겁니다. 그 본거지, 홈, 최후의 도피처.

자기의 자존심이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버팀목, 최후의 보루 그것 작살 냅니다. 그것을 박살 내요. 더 이상 내가 지탱할 수 있는 어떤 피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아요. 내가 나다움을 지탱할 수 있는 그 마지막 공간마저 주님께서는 표적 수사, 노리고 공격합니다. 미사일 공격하듯이 노리고 그쪽을 불 살라 버려요. 더 이상 내가 나다움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공포영화에 보면 그런 것이 좀 나오는데요. 미국에서 만든 공포영화에 보면 소위 교인 집에 귀신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또는 예수님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여기고 막 십자가를 긋고요, 성경책으로 도배를 하고, 퇴마사 신부나 목사를 불러서 거룩한 성수 뿌리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잖아요.

그 공포영화에서 십자가를 가지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는데 사탄이 오히려 저주가 더 세서 십자가가 중간에 부러진다든지, 묵주를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 끈이 풀려서 묵주가 와르르 쏟아진다든지, 성수 뿌리면서 라틴어로 중얼중얼하는데 그 성수 뿌린 것이 도리어 사탄이 뱉어내는 침으로 마구 튀어오고요. 그게 공포영화거든요.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부적, 그 부적이 뭐냐? 바로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부적이었던 겁니다.

소유하다 소유하다, 나중에 뭘 소유하느냐? 주님까지 소유하고, 예수님까지 소유하고 삼위일체까지 소유하는 거예요. 삼위일체까지. 마귀가 피식 웃습니다. “그것 부적이야.”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면서 ‘귀신 물러가라. 악귀야, 물러가라.’ 하는데 마리아상이 저절로 앞으로 고꾸라져서 손모가지 다 부서지는 거예요.

그것은 영화니까 이미지로, 귀신이 활동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지만 실제로 마귀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최후의 부적이 되는 그 주 예수라는 것, 하나님 그것마저 악마가 이기도록 우리 주님께서 조치를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작살나게 만들어요. 내가 갖고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작살나게 만들어 버려요.

이 원리 모르면 이 성경 하나도 모르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니까 그 생산물 가지고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만족합니다.’ 이렇게 봤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성경을 해석하든지 세상을 해석할 때 내가 생존하는 것에 기준 해서, 내가 뭔가 내 것이 있다는 것을 기준 해서 성경과 세상을 잘못 해석한 거예요.

지금 해석을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게 되면 새신부 나오지요. 제사장 나오지요. 농부 나오지요. 그다음에 과수원 하는 사람 나오지요. 밭 농사하는 사람 나오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각자 각자 자기의 살아온 것이 다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각자도생이다.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것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왜 나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 나는 너하고 달라. 나는 나한테는 특별한 존재야.’

이것을 주님께서 메뚜기 편대로 공격을 하니까 각자도생,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다 다르다, 가 아니라 전부 다 동질성이 되어버린 거예요. 동질성. 다 같은 처지가 된 겁니다. 뭐냐 하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동질이라 하느냐 하면, 각자 자기 가진 것으로 산다, 라는 점에서 동질성이에요. 같아요.

사람은 너하고 나하고 다르다는 생각 자체가 같아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모두 다 자기 소유한 것, 내가 가진 것으로 산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에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동질성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금 개성이 있든, 나는 제사장이고 또 뭐고 간에 그 차이를 아예 없애버립니다. 왜? 일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일괄적으로.

사람이 독자성, 독립성을 갖고 있어 버리면 나는 나로 산다, 자기 가치와 의미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룰 때는 너 나를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상황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데 그걸 받아 챙기는 인간들은 거기서 자기 개성을 논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너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잘 먹고 잘산다. 그렇게 차이를 내니까 이걸 주님께서는 없앨 필요가 있는 거예요. 없앨 때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동질성, 완전히 이스라엘을 새로 바꾸시기 위해서 일괄적으로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잘못된 해석, 자기 개성 위주의 동질성, 그것은 무산시키고, 없애버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로 바꾸려면 거기에 어떤 원칙이 개입되는가? 거기에는 바로 공정한 것이 주어져요. 공정함 또는 정의라 하는데 공정한 것이 주어져요. 자, 어떤 것이 공정하냐? 예를 들겠습니다.

피자 한 판이 있는데 세 사람이 피자를 나누자, 그렇게 됐어요 이게 네 명 같으면 나누기가 쉬워요. 가로로 한번 자르고 세로로 또 잘라서 나누면 되고요, 두 명 같으면 중간을 나누면 되고요. 그런데 세 명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정치적 투쟁이 되고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럴 때 경제학자들이 고민을 한 겁니다. 자, 하나의 피자가 있을 때 가장 공평한 분배, 이게 경제정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공평한 분배를 할 수 있는가? 연구하다 연구하다 내놓은 지혜가 이겁니다. 제일 마지막에 가져갈 사람에게 분배의 칼을 쥐어주는 거예요. 순번이 제일 마지막에 오는 사람에게 칼을 쥐어 주는 거예요.

만약에 순번 1번에게 칼을 쥐어주게 되면요, 자기가 자기 맘대로 커다랗게 잘라놓고 다른 사람의 것은 작게 해놓고 ‘나는 1번이다. 나는 1번으로 계 탄다.’ 해서 자기가 잘라놓고 자기가 제일 큰 것 가져가잖아요. 만약에 그 칼을 가진 자가, 나누는 자가 제일 마지막에 선택한다면 어떤 노림수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요.

왜? 세 사람이 나눈다면 첫 사람이 제일 큰 것 가져갈 것이라는 말이지요. 두 번째로 큰 것 가져가고 마지막에 칼로 나눈 사람은 마지막 나머지기를 가져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져가는 사람은 뭘 걱정하느냐? 될 수 있는 대로 먼저 가져간 사람의 것, 그리고 두 번째 것과 차이가 제일 근소하게 나도록 치밀하게 자를 것이 아니냐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공정한 분배가 되는 거예요.

이 공정한 분배가 사실은 성경에 나옵니다. 마지막 순번 자가 분배를 해야 된다는 이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3장 25절입니다. 거기에 솔로몬재판의 첫 번째 사례가 나오는데요. 거기에 같이 생활하는 두 여자가 있었는데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아서 여자 둘과 아기 둘이 한방에서 같이 잠을 자는데 한 여자가 잠버릇이 좀 안 좋았던 모양이지요.

이리 한 번 저리 두 번 세 번 굴러버리니까 자기 애가 그 덩치에 눌려서 질식사해버렸어요. 그래서 보니 애가 죽었다 그 말이지요. CCTV도 없고 아무도 본 사람도 없으니까, 그 방에 애가 둘밖에 없었고 비슷한 시기에 낳은 애라서 구분도 잘 안 되니까 애를 몰래 바꿔치기 한 겁니다.

저쪽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쌔근쌔근 잠자고 있고요. 애 바꿔치기 해놓고 아침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했다 그 말이지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자기 애는 저쪽에 있는데 다른 여자의 죽은 애가 자기 옆에 있거든요. “내 애 내놔라” 하니까 “살아 있는 이 애가 내 애다.” 하고 막 다투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자기 애를 왜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알지요. 그래서 억울해서 솔로몬 왕에게 재판을 청구한 실제 재판상황입니다. 예가 아니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를 주는데요. 솔로몬이 어떻게 재판을 하느냐 하면, 피해자 입장에서 억울해서 호소하는 그 여자를, 그 순번을 제일 뒤에 나둬버리는 거예요.

아까 피자 나누는 그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보통 억울하면 억울한 자의 하소연부터 먼저 들어줘서 그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하는 그것을 흔히 정의롭다 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솔로몬의 지혜가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에요.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원리원칙이 그겁니다. 솔로몬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지혜대로 통치하게 해달라 했으니까 그 지혜가 이 솔로몬의 재판에 반영이 된 겁니다.

솔로몬이 판정을 내리는데 누구한테 유리하게 판정을 내리느냐 하면, 피해 입은 여자에게 유리한 판정이 아니고 피해를 입힌 여자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려버리는 거예요. 열왕기상 3장 25절에 보면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이 판정이에요. 이게 판정입니다. 하나 남은 애 또 죽일 참이에요. 이게 판정이라고요.

쉽게 말해서 축구 하는데 홈팀의 응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거예요. 원정팀에게 우선권을 줘버리는 거예요. 하소연하는 여자는 따로 있는데 그 판결이 어디에 적합하느냐 하면,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제발 그런 판정은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 판정을 하나님이 내려버립니다. 억울한 자가 뭔가 하나님에게 기대할 때 ‘하나님은 정의로운 편이니까, 하나님은 그때 그 상황을 다 지켜보시니까 나의 억울함을 아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무산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피해받은 자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자에게 종속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애 반 잘라서 각자에게 나눠주라.” 하니까 누가 좋아하느냐 하면, 열왕기상 3장 26절에 그 판결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요. 진짜 애를 죽인 그 못된, 바꿔치기 아줌마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내 것도 되지 말고 쟤 것도 되지 말고, 하면서 아주 신이 났어. 신이 났어요. 왜냐? 판사가 이미 결정을 했기 때문에 자기는 신난 거예요. 그 판결에 살아 있는 애의 진짜 엄마는 타인의 판결에, 그것도 나쁜 타인의 판결에 억울한 본인이 종속되어야 돼요. 거기에 따라가야 돼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지금 이 재판은 바로 있음, 아이가 있었다는 그 있음으로 인한 재판이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뭐로 돌리느냐? 있음을 없음으로 되돌려 버려요. 그러니까 이 진짜 엄마가 가슴이 아파서 “그렇다면 나의 이 재판 청구를 취소하겠습니다.”

재판 청구를 취소하면 누가 이기느냐 하면, 그 못된 여자가 재판에서 이기잖아요. 그 못된 여자가 재판에서 이긴 그 재판에 군소리 말고 진짜 피해 입은 그 엄마는 그걸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노리고 공격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렇게 친절해도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지요. 내가 무너진 곳에 정답이 있었던 거예요. 사람이 안 무너지게 되면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진짜 진리, 진리, 백날 외치고 복음 외쳐도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위한 내 것,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한 부적같은 그 범위에서, 그 한계에서 못 벗어나요.

주님 사랑합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결국 이 말은 사적 구원, 나는 개성 있으니까, 나는 특별하니까 이 특별한 나를 어쨌든 간에 천당 보내 주세요, 라는 자기의 특출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동질성이 없고 자기의 특수성만 주장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의 각자 각자가 이미 문제성 있는, 자기만 개성 있고 자기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자기밖에 모르는 그 죄악된 동질성을 하나님은 이질성으로 박살 내 버리지요.

그 동질성에서 상상도 못한 지혜를 가지고 전부 다 박살 내 버리는 겁니다. 아기 잃은 엄마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러면 제가 그 아기를 포기할 테니 살려만 주세요. 저 여자에게 그냥 돌려주세요.” 이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그쪽 여자의 뜻이에요. 재판이 있던 그 전에 사건이 있던 그 날밤에 그 나쁜 여자가 바꿔치기할 때의 그 마음에, 아이 잃은 엄마가 그 마음에 동조하게 되어버렸어요.

나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살아계신 정의로운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하셨으면 좋겠다, 하는 자기의 그 기대 있잖아요. 그 기대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박살 낸다니까요. 아무리 좋은 기대, 아무리 좋은 희망이라도 그것은 출발점이 너의 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고 하나님이고 우리 부적이라니까요. 내가 있는 한 이게 부적이 돼요, 부적이. 이것 가지고 마귀 이기고 천당 가려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해답이 있어야 되는데요. 해답은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나옵니다. 이것은 좀 길지만 저와 여러분이 이것은 빠트릴 수 없어요. 이것은 중요한 것이니까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부활은 죽어야 돼요. 나의 부활이 되려면 내가 죽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죽고 난 뒤에 주어지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내 본거지, 내 아지트가 죽음으로 끝나야 될 그 이유의 동질성, 그 이유가 하나같이 누구나 동질하다는 그 원칙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주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부활처럼 부활에 참여시키거든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여시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부활의 기쁨, 부활의 희락, 부활의 그 기쁨으로 살려면 부활 되기 전에 자기가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는 그 기쁨이 부활의 기쁨과 동질성을 갖추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돼요. 누가 나한테 안 갚아도 돼요.

그래서 행여나 갚을까 싶어서 어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하고 갚아주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들의 특징은 뭐냐? 갚을 것이 없다. 누구한테? 나한테 갚을 것이 없다. 무슨 말이냐? 내가 뭘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근거지를 내 쪽에서 마련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소유와 내 본거지를 마련해 버리면 이게 나의 개성이 되고, 이것은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것이 되면 그것이 뭐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은 나의 부적같은 하나님이 돼요. 내 가진 것을 지켜주는 셰퍼드 같은 하나님, 개떡 같은 예수밖에 안 돼요.

주님께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 이제부터 쉽게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부활 이전에 있는 것은 일체 나는 어떤 것도 인정 못 하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이유가, 처음에 있던 이스라엘의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그걸 신앙으로 보지 않겠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죄사함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죄사함에 주목하는데 그게 잘못이에요. 만약에 죄사함에 주목해 버리면 앞에 뭐가 붙느냐? 나는 죄사함 받았다. 또 자기의 독특한 독자성을 또 주목하게 돼요. 죄사함에 주목하지 말고 죄에 주목해야 돼요. 죄에 주목하게 되면 그다음 죄사함은 나하고 별개에요.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별개로 주께서 은혜 주게 되면 그제야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그 죄사함은 몽땅 누구의 공로가 되느냐 하면, 우리 주님의 공로가 돼요. 그러면 나는 죄사함에 종속되는 거예요. 죄지으면서 사해주세요, 되어버리면 이것은 피자 자르는 자가 순번이 1순위가 돼요.

그냥 맡기고 마지막 순번을 받으세요. 마지막 순번! 내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내 권리를 주장한다는 말은 미리 예측해서 ‘이렇게 죄라고 고백하면 이렇게 죄 사해줄 거야.’ 이렇게 계산을 해버리면 이것은 여전히 죄사함을 나의 최후의 보루처럼 내 창고, 내 아지트, 내 홈에다 이것을 귀한 보물로 간직하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 보물 간직한 나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 되고, 훌륭한 사람 되고, 신앙인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했던 짓거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제 이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걸 진짜 받아들이신다면, 인정한다면 우리가 내놓을 것은요, 우리가 보여줄 것은, 주님이여, 죄 내놓고 그냥 처분에 맡겨야 돼요.

왜? 주께서 죄사함 안 해주면 그것은 주의 뜻이니까 그것 자체로도 주님의 일관성과 주님 하시는 일의 동질성이 유지되잖아요. 설교 마지막에 와서 더 어렵게 되어버렸는데요. 시간 가더라도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남하고도 거래하지만 내가 나하고도 거래해요. 나는 이렇게 하게 되면 이런 괜찮은 결과가 주어진다. 자꾸 나하고 의논하고 나하고 거래한다고요. 그러니까 나를 못 놓는 거예요. 햄버거를 누가 돈 주고 주문했는데 햄버거 배달했다고 연락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어요. 그런데 동네 개가 와서 햄버거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게 주문한 사람 책임인가 햄버거 가게 책임인가? 이게 가게 책임이지요. 왜냐하면 햄버거 주인은 사람 만나는 게 짜증나요. 그냥 돈 받았으니까 햄버거 던져주고 자기는 그냥 가버린 겁니다. 사람은 자기 챙길 것만 챙기면 그만이에요. 왜? 사람은 개성을 중요시하고 내 가진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죄 용서하고 꺼져버리세요.’ 그거에요. ‘날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피 흘리시고 그만 저리 가세요.’ 이렇게 돼요.

왜? 주님은 그게 전문가니까. 주특기가 죄용서, 그게 주특기잖아요. ‘피 주시고 그냥 볼일 보세요. 내가 감사하다고 이야기해줄게요.’ 이게 뭐냐 하면, 피자 가를 때 자기가 결정해놓고 자기가 1순위 잡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자기만이 전부에요.

그러나 주님의 백성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만 중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1순위에요. 그 1순위를 여러분 마음속에 늘 발생시키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이 1순위고 나는 주님에게서 얻어먹은 것뿐입니다.’ 그것을 떨거지라 합니다. 고상한 말로. 천국은 떨거지들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러나 처분에만 맡긴 그 떨거지들의 집합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보고 복음 안다 했지만 이 못돼먹은 우리 자신의 자아성 때문에 모두 다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인 흉내 내면서 긴장 속에서 살았습니다. 주님이여, 십자가와 부활의 원칙이, 바로 주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알았사오니 날마다 내 잘난 것 기쁨으로 살지 말고 주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