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강, 367강) 운명과 예정, 불가능한 온전함 211005
녹취:이하림
366강-YouTube강의(운명과 예정 에베소서 1:4)20211005-이 근호 목사
제366강, 제목은 ‘운명과 예정’. 운명은 보통 내 운명 생각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내 운명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운명을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우리 운명은 운명이랍시고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까?’라는 것은, 주의 일에 그런 것은 없어요. 내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 거부하느냐 하면 인간의 장래는 인간의 장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시작부터 결정되어 있었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죽잖아요. 죽을 때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죠. 그것은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이고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죽을 때 ‘죽음을 대비하자’는 잘못된 것이고 시작을 봐야 돼요. 죽을 때 돼서 허겁지겁 예수 믿고 뭐 착한 일 많이 하고 이러면 안 되고요. 다시 뿌리를 봐야 돼요. 이 죽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겁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죽을 때 천국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게 아니고 제대로 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죽을 때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가 아니라 ‘태어날 때 나는 어디서 태어났지?’ 를 생각해야 돼요. 다시 자신의 출발지에 가야 됩니다, 자기의 출발지.
출발지가 죽음의 정향(定向)이에요. 정향이라 하거든요, 어려운 말로. 딱 거기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 정해졌다 방향이, 정향. 방향이 정해져있는 거예요, 태어날 때. 그래서 뭐 죽을 때 되어서 암 3기입니다, 4기입니다, 그 때 허겁지겁... 허겁지겁 하는 것은 뭐 말릴 수 없지만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할 때 본인의 운명에 대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의 내 운명이란 게.
성경에서는 나의 운명에 관한 내용은 일체 없고 예수님의 운명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그걸 생각하면 교회라는 게 도대체...... 예수님 이야기할 때 이 교회가 ‘여러분, 잘 대비하시면 여러분한테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상품화시키는데 근본적으로 이것은 성경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성경은 하나님 이야기이고요. 그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라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란 ‘나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한다.’ 그게 적혀 있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우리 인간 이야기는 질문 자체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것. ‘나 어떻게 돼요?’ 하는 그런 질문을 안 하셔야 됩니다. ‘저 구원 받아요, 안 받아요?’ 그런 질문도 성립이 안 됩니다. 그 내용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에베소서 1장 4절-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되어 있죠. 창세 전이니까 창세 전에 인간은 없었습니다. 창세 전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창세라는 것은 만들어졌다는 얘기에요.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전에 만드신 분의 계획에 준해서 그냥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창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생각해 놓으신 거예요,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 그럼 그리스도 안이니까 안에 있는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물의 운명의 책임자는 안에 있는 각자 우리들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폭 둘러싼 껍질, 그리스도 안이니까 둥지처럼 하나의 보자기처럼 둘러싼 그리스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운명은 없어요. 그리스도의 운명에 종속된 겁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그 일이,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에요. 여기서 우리의 운명이죠. 나의 운명은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예수님만 ‘나’가 되고 ‘나’에서 복제된 것, 클론이죠, 복제된 것이 우리가 돼요. 주님의 운명을 복제, 복제, 복제, 파생, 파생, 파생하면 그게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이름을 거룩히 하옵시며. 그 때 그 ‘우리’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든 우리에요. 예수님이 빠져버린 우리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악마의 마음을 해가지고 모든 것을 다 잘라내고, 너 잘라내고 하나님 잘라내고 ‘나는 어떻게 되느냐?’ 나로부터 시작하니까 성경보고 하나님보고 어떤 질문을 해도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에요. 나부터 시작하는 질문 자체는 어떤 물음도 주님의 상담 대상조차도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만 나이고 예수님만 ‘나’인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 이후에 태어난 피조물들은 그 입 다물라. 창조된 것들아, 입 다물라. 너희들에게 ‘나는’이라고 말할 권한과 자격은 일체 없다.’ 에요.
‘암에 걸렸는데 나는 어떻게 됩니까? 몇 개월 삽니까?’ 그 질문조차 성립이 안 돼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몇 개월 뒤에 죽습니까?’ 가 아니라 너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거예요. 자기 죽음에 대비한다기보다도 나는 도대체 내 뿌리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봐야죠.
나는 나에서부터 나온 게 아니고 주님에게서 나왔다면 그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주님처럼 죽어나가는 거예요.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역할입니까.
만약에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찍는다. 원균 할래, 이순신 할래? 이렇게 물으면 다 이순신 할라 하지. 원균 있죠? 이순신 팔아먹은 사람, 그 사람 역할하면 그 사람은 나중에 영화 끝나고 난 뒤에 원씨 집안한테 욕 얻어먹어요. 원씨 집안 있어요, 원씨 있잖아요, 원(元). 너무 못되게 했다고 욕 얻어먹는다고요. 영화 찍고 자기는 욕 얻어먹고 원망 살 거 뭐 있습니까? 불멸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 해줘야 다른 큰 역도 맡을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인공 된 적이 없어요. 피조물보고 주인공이라 한 적 없고 영웅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어떤 설교에서 기드온 이야기할 때 믿음의 용사가 아니라 했잖아요. 기드온은 믿음의 용사 아니에요. 기드온 본인이 우상이 어떻다는 것을 대변해 보여주는 거예요.
우상적인 이스라엘을 대변해주고 그 우상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해서 그 우상 속에서 진짜 참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싸워왔고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생활한다는 것을, 기드온의 이중적 인생 과정을 통해서, 전의 기드온과 후의 기드온의 이중적으로 다른 색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이렇게 구원했다는 하나님의 자기 공로만 드러내는 것이 기드온 이야기에요. 모든 사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운명, 예정은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럼 그 다음 남은 문제는 뭐냐. ‘예수님의 운명은?’ 그 다음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려고 예정되어 있는가?’ 질문을 그렇게 해야죠.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내게 관심 있으면 안 돼요. 내게 관심 있으면 이미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 하거든요.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이 곧 ‘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와 동일한 질문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 “아, 그래? 와, 신난다! 그럼 우리도 그 코스네요.” “그렇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보고 이야기한 것 같지만 먼저는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자신보고 한 이야기에요. 자신의 운명이 곧 너의 운명이고 내 팔자가 곧 너의 팔자이고 네 예정이 너의 예정이다. 왜? 같이 안에 들어있거든요. 그게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이 예정된 거예요.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모든 작업의 주도권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가 그렇게 해 줄게.’ 라는 이야기에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367강-YouTube강의(불가능한 온전함 요한일서 5:6)20211005-이 근호 목사
제367강, 제목은 ‘불가능한 온전함’. 인간이 온전함을 추구합니다. ‘나는 온전해지고 싶어요.’ 이러거든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 본인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어요.
그러니까 ‘완전, 온전’이라는 이 작업은 누구 작업이냐 하면 예수님 자기 몫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우리한테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나한테 줬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의 모든 사람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우리한테 줬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도 그렇고 여러 군데에 율법을 누구한테 줬느냐는 그 문제, 논쟁 때문에 근원적으로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견해차가 커진 거예요. 그럼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우리 대신 먼저 다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자, 우리에게는 거룩한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독대해서 받았던 말씀이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이걸 지키면 복이고 못 지키면 저주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지를 줬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지혜와 열심, 겸손과 모든 것을 총가동해서 이 말씀을 지키자. 왜냐하면 말씀은 무거운 게 아니고 지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지키자. 우리 인간을 테스트한 것처럼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에 마디가 있어요. 지키라, 지키라 해놓고 막상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율법을 지켜서 택함 받은 게 아니고 율법 지키는 것과 별개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콕 집어서 너희에게 복을 준다, 이렇게 돼요.
마치 송유관 기름 도둑이 온 송유관을 가위로 째는 게 아니고 구멍을 뚫어서 그 구멍을 통해서만 기름을 빼내는 것처럼 주님께서 어떤 특정 사람에게 특정 일을 벌여서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백성이다, 너는 내 사람이다, 라고 딱 집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율법을 해석할 때 수평적으로 우리가 율법을 봐서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인 요소가 근원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 분명해지죠. 수직적인 것이 와서 뚫을 때 ‘아, 율법 완성은 이렇게 완성되고 이렇게 온전해지는구나.’ 온전과 완성에 대해서는 누가 찾아와야 된다는 사실을 구약 때부터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행전 성도들이 인사할 때, 제가 설교 때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요새 백신 맞았습니까? 인사하는 것처럼 초대교회 인사가 “성령 받았어요?” 라고 묻는 것은 이방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율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해도 성령 세례를 받으니까 졸지에 천국 가는데 조금도 하자 없는, 천국 가는데 미비점이 일체 없는 온전한 의인이 된 거예요.
유대인들이 난리난 거예요. 누가 그 따위로 가르쳤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한테 터키 같은 데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그냥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죽었죠. 사도 바울도 죽은 줄 알았는데 깨보니까 살아난 경우도 있었어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왜 싫어했는지 알겠죠. 사도 바울의 말을 진짜 하나님의 지혜로 인정을 해줘버리면 자기 기득권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게 다 무너지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뭐 유대인뿐만 아니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했던 자기의 의,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죠.
분명히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율법을 왜 못 지키는지 원인이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자기 의를 지키는 용도로 율법을 활용한 겁니다. ‘하나님, 저 착하죠? 하나님, 저 괜찮죠? 자, 내가 괜찮고 착하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제가 성경 말씀을 계속 대조해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을 가동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 다시 말해서 “저주 받은 자가 천국 간다.” 할 때는 율법의 적용은 나 착하다, 의롭다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율법 앞에서 저주 받을 자 맞습니다.” 라고 하기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밝혀내는 그 작업이 온전함입니다. 그게 온전함이에요. 참 신기하죠?
로마서 3장 19절에 나온 그 말씀,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그 말이 지금 율법이 네 안에서 제대로 완전한 상태로 가동 중이다, 라는 것을 네가 기뻐하라는 말이죠. 나는 저주 받은 자 맞습니다, 하는데 그것은 아무나 누리는 온전함이 아니고 그 고백 자체가 온전함이에요. 나는 뭐 엉망입니다, 그 자체가 온전함이라고요, 그 자체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자체를 신바람 이박사처럼 기뻐해야 돼요, 이게. 아니, 온전하지 않은데 왜 살아있습니까? 은혜잖아. 온전하지 않은 사람인데 저는 오늘도 왜 밥 세끼 먹습니까? 그게 은혜거든. 선물이다. 감사해. 모든 일에 감사해.
그래서 제가 분명히 얘기합니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거예요. 나한테 대조해보는 거예요. 방사능 탐지기 있죠? 만약에 예를 들어서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방사능 탐지기를 하나, 뭐 하늘에서 뚝 떨어져 천사가 보내서 구입했다 합시다. 그러면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 모아놓고 뭐라고 묻겠습니까? “이게 어디 쓰는 물건인고?” 이렇게 물을 거죠.
그러면 집현전 학자들이 그걸 알겠습니까? 해시계 만든 그 사람이 알겠어요? 맥가이버가 알겠어요? 방사능 탐지기는 어디 쓰는 물건입니까? 그 탐지기 자체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방사능 유무를 확인할 때만 필요한 거예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서나 필요한 거예요. 안 그러면 일본 후쿠시마나 그런 데서 필요한 거예요. 혹시 또 노량진 시장에서 일본산 물고기 잴 때 쓰는지 모르겠지만.
율법은 죄가 없다 하는 곳에는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내가 이 말씀 지켜야지, 하는 사람한테 소용없어요. 말씀 지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 가능성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나 율법은 가능성 없다는 것을 지지직, 지지직 탐지해내는 거예요. 그것 봐. 가능성 없잖아. 너 더 살 권한 없잖아. 이제 1년 더 살아서 자식 키우고 가정은 행복하게 하고 재산 좀 남겨주고. 그럴 권한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율법이에요.
지지직 지지직. 대조하고 탐지하라고 준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율법을 온전하게 지킨 사람이 있어야 뭐 내가 지켰다, 못 지켰다 대조가 가능하지. 그럼 온전하게 지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킨 사람이 있잖아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지키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죽음이 다 이룬 거예요. 우리는 안 죽으려고 발악을 하지만 주께서는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럼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율법의 온전함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내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율법 온전함이 우리 안에 퍼지고 확산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율법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너는 죄인이야.” 라는 그 사실이 아, 다시 한번 삐비빅, 삐비빅. 여기 죄가 있네. 그게 바로 요한일서 5장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5장에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5장 6절에 보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율법을 주셔놓고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신 분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자, 물과 피로 임했다는 것은 주께서 피 흘리셨다, 이 말이거든요. 피 흘리셨다.
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은 진리만 이야기하는데 진리란 너 율법 몇 개 지켰어? 이것을 묻는 게 아니고 온전한 예수님의 피 안에 율법의 온전함이 다 들어있다. 그게 바로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짜 예수님만이 메시아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 해서 성경 덮고 내버리라는 게 아니고 율법은 대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서 아, 이래서 난 죄인 맞구나, 해놓고 이제 메세지 보내면 허허허 또는 히히히 또는 그것도 모자라면 ㅎㅎㅎ. 안 그러면 눈썹이 막 올라가는 ^^, 기쁨의 눈썹. 내가 죄인 맞구나. 히히히, 허허허. 여자 같으면 호호호. 남자 같으면 하하하. 남는 것은 성도에게는 하하하. 그것만 남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