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1-4 / 메뚜기의 기능 / 대구우리교회 주일오후예배
메뚜기의 기능
이근호
2021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요엘 1:1-4
(1:1)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1: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인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1: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1: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약속의 땅에 메뚜기 떼가 달려듭니다. 전원 다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더는 이 약속의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사는 것에 마음 두다 보니, “과연 내가 이 세상에 살 자격이 되나?”를 생각 못하는 법입니다. 하루하루 사느까 마치 당연히 이 땅에서 숨쉬고 살 자격이 된다고 여깁니다.
즉 약속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살만해서 살아있다’가 전면에 내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사라지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약속, 혹은 언약이라는 것이 그저 사람 살려주는 식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위반자에 대한 가차없는 징벌이 늘 준비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서서 죽음이 생기는 경우는 칼을 사용할 수도 있고 총도 사용할 수 있고 현대전에는 드론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메뚜기를 동원해서 사람을 주기는 것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규모 메뚜기떼가 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나타낸 겁니다.
난데없이 메뚜기를 떼가 습격을 하는 것은 출애굽기 10장에 나오는 애굽에 대한 8번째 재앙으로 등장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취지를 가지고 메뚜기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모든 지역을 다 덮는다는 겁니다. 물론 네 번째 재앙인 파리가 들끓는 재앙부터는 히브리인들이 사는 고센 지역에서 재앙이 덮치지 않도록 구분지었습니다.(출 9:26/8:23)
출애굽기 10:14-15에 보면, 메뚜기가 내려 앉은 정경이 나옵니다.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메뚜기 기능의 두 번째 취지는, 더는 땅에서 얻을 게 없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땅의 생활에 희망 걸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 메뚜기 재앙이 지금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에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약속의 땅을 제대로 약속의 땅답게 하시려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다가 이스라엘이 되어 약속의 땅으로 향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그 땅에 마땅히 살 권한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즉 그들은 약속에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인 젖과 꿀에 대해서 마땅히 자기의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과연 약속의 땅에 기거할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신명기 28:38-39에 보면, 약속의 땅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곳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즉 약속의 땅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는 약속의 땅이 ‘사람의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이 약속답게 유지되는 곳이지 결코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취지로 만든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신명기에 말씀하시는 그 취지에 합당하게 모든 율법에 온전하게 합당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보내어 온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다 먹이치우게 하셨다는 말은, 온전한 인간이 이스라엘에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멸망은 불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전에 조금씩 멸망의 징후를 보이는 것은 메뚜기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경고용입니다. 언약이 품고 있는 죽음과 저주와 지옥성을 실재화하고 현실화하는 장소가 약속의 땅이 보여줄 기능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있는 것들은 그냥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기능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사물이나 인간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불소시기에에 합당한 재질로 되어 있습니다. 불에 탈 수 있는 재료들입니다. 멸망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겁니다. 따라서 메뚜기 재앙이 덮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일관성을 드러낸 것을 찬미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 생존보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치중해서 일하심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성과와 자신의 수고를 과시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고 싶은 것은 주님 자신의 성과와 성령님의 활동사항입니다.
요엘서는 인간들은 지면에서 싹쓸어버리고 성령으로 그 삭제된 자리를 채우셔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시겠다는데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따라서 메뚜기를 보내어 싹쓸이하는 작업이 하나님의 일에 필수코스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땅은 함부로 들어오거나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메뚜기가 주어질까요? 이미 주어져서 대단한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9:1-3에 보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이 땅에 살던 자는 누구나 죽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죽습니다.(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천국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바로 그분의 세계입니다. 천국 백성이란, 예수님만이 온전함을 아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성과는 노력에 기대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대를 피하는 식으로 날마다 우리 자신을 제거하시는 분임을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의 공로를 자신의 존재가 훼방하면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끼인 존재가 아니라 아예 지옥에서 살던 자임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사는 것이 주님이 주신 결과물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강-요엘서 1장 1-4절(메뚜기의 기능)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서 1장 1-4절입니다.
요엘서 1:1-4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찌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선지자 요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이렇게 문서로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엘의 사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로, 튜브로 사용할 뿐이에요. 볼펜 속의 잉크를 생각하면 적절합니다. 볼펜 잉크 안 나온다고 애꿎은 볼펜을 때리고 볼펜을 집어 던지고 그럴 필요 없지요.
잉크가 다 됐으면 갈아야지요.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 안 나오면 갈아야지요. 교체 시점이 온 겁니다. 과거에 좀 나왔다고 해서 봐주지 맙시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보고, 말씀 전하는 사람 쳐다보고 신앙생활 할 이유는 없습니다.
볼펜은 갈아치우라고 있는 거거든요. 볼펜은요. 맘 같아서는 자식이나 아내도 갈아치우면 참 좋겠습니다만. 오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갈아치우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갈아치우지 말고 갈아치우겠다는 너부터 갈아치우자, 그렇게 나오시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단 하나님 편에서, 우리 인간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 되라고 주신 말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 젖과 꿀이 흐른다고 그렇게 광고하고 예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희망을 부여했던 그 땅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추가적인 조치가 왔을 때 메뚜기가 덮여서 그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모든 소산물을 다 없애버립니다.
그 메뚜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이 지상에 있는 것들은 다 먹어치우는 그 일을 하는 게 메뚜기에요. 그러면 메뚜기한테 닦달 내지 마세요. 메뚜기는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메뚜기는 멋도 모르고 한꺼번에 그냥 들이닥친 거예요. 아마 메뚜기 저희들끼리도 경쟁할걸요. 하나의 먹잇감 가지고.
메뚜기가 먹어치우는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 먹어치우는 그 과정이 시간적인 지연, 어떤 여유, 메뚜기 오는 것을 통해서 약간 여유를 주께서는 허락을 하십니다. 4절에 보면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팟종이가 다를 먹는 것이 아니고요. 약간은 메뚜기한테 바톤을 넘기고요. 메뚜기가 다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고 남은 것은 늦이 먹고요. 늦이 또 다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고 황충이 남은 것을 먹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메뚜기는 뭐고, 팟종이는 뭐고, 그다음에 늦이 뭐고, 황충은 뭐냐? 이것은 히브리 말로 전부 다 똑같은 메뚜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메뚜기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게 먹고 남긴 것을 그게 또 먹는 거예요. 같은 메뚜기를 한글로 이렇게 번역한 거예요. 이것은 시간적인 약간의 지연을 허용한다는 거예요. 마지막 다 먹기 전에 조금씩 조금씩 이 지상의 것은 전부 다 소실되어 간다는 것을 사인으로 나타내주는 거예요, 이걸 경고용이라 하는데 어쨌든 이 메뚜기의 기능은 멸망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원래 이 세상의 창조는요, 메뚜기로 멸망하는 게 아니에요. 물로도 멸망하는 게 아니고 마지막에 불로 멸망해요. 그래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신다 할 때 머리 좋은 사람은 대번에 생각나는 게 뭐냐 하면, ‘아,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재료는 불로 태워지는 재료로 만들었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쏘시개가 되는 재질로 재료로 만들었어요. 그것은 뭐냐? 창조 자체가 나중에 확 불 지른다는 사실을 일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불에 탈 재질로 만든 겁니다. 만들 때부터 주님께서는 싹쓸이 없애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은 왜 만들었는가? 인간을 만든 이유는 전멸시키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전멸시키는 거예요. 오늘 설교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전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멸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왜 메뚜기로 드러나느냐 하면, 이스라엘 만들기 전에 애굽에서 히브리인으로 살 그때 히브리인들, 장차 이스라엘이 될 백성과 애굽에 있는 백성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줬거든요.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었어요. 그냥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이니까 히브리인들은 어디에 소속되는가? 애굽에 소속되지요. 하나의 나라에요, 하나의 국가고. 하나의 대한민국이고, 하나의 대만이고, 하나의 미국이고, 하나의 캐나다고 그런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봐서 구분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도 철저하게 애굽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법에 종속된 사람이에요. 그 우두머리는 바로 왕이고요. 우리 현재 삶의 현장하고 똑같아요. 그 당시, 출애굽되기 이전에.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분되지 않아요.
구분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강제로 구분시키는 작업, 여기에 뭐가 등장하느냐? 메뚜기가 등장하는 겁니다. 열 가지 재앙 중에 메뚜기가 등장해요. 여러 가지 재앙이 열 가지나 되는데요. 그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메뚜기 기능, 이 어떤 기능이냐?
출애굽기 10장 14, 15절에 보면,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방금 읽었던 것 중에서 두 가지 끄집어냅니다. 첫째, 메뚜기는 온 지경을 다 덮는다는 겁니다. 빈틈이 없도록, 이 지상에 빈틈이 없도록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인간세계에서 사람을 죽일 때 칼로 죽인다, 이거 알고 있어요. 무기가 발달하면 총으로 죽인다. 더 발달하면 요새는 드론으로 죽여요.
그런데 메뚜기로 죽인다? 이것은 인간 아이디어에 이런 것이 없어요. 칼로 죽이는 이것은 사람이 죽일 수 있습니다. 총으로 쏘는 것도 사람이 죽일 수 있어요. 드론으로 죽이는 것도 사람이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로 죽이는 이것은 사람은 못 죽여요. “메뚜기야, 메뚜기야!” 이게 되지를 않습니다. 메뚜기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 네가 전멸당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너 자신도 하나님에게 당해야 되고 죽어야 되는데 네가 무슨 남을 죽여.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 인간아. 너도 멸절대상 중 하나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중에 메뚜기를 보내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통해서 죽는 현상, 다른 말로는 저주 현상,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의 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지상을 여태 유지해 왔던 겁니다. 죽음과 저주와 지옥을 머금고 있는 공간이 이 지상이라는 것 그걸 보여주시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에는 양보 같은 것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 5절에도 보면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땅 전체를 다 덮어버려요.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제 일곱 번째 재앙이 우박이었습니다. 우박 때리고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을 싸그리 알뜰살뜰하게 메뚜기가 와서 덮쳐버려요.
그러면 차츰 열 번째 재앙에 가면서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뭘 인식시키느냐 하면, 인간의 삶의 약간의 여지가 점점 더 갉아지는 거예요. 삶의 희망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겁니다. 메뚜기가 결정타를 날리는 거지요.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이고요. 갈수록 점점 희망이 없는 거예요. 열 번째 재앙은 여러분 알다시피 나 대신 살고자 하는 맏이를 죽여버리잖아요.
맏이가 죽는다는 것은 곧 너는 자식이 없이 인생 종 쳤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 낳은 아들을 죽여버려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너는 이제 아들 없다. 아들 없이 너대로 끝나버렸다. 아들 있어? 나는 곧 죽어도 아들에게 희망 건다고? 아니. 그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본질은 너에게는 애초부터 없었어. 자식 없이 그냥 너 홀로 죽어야 돼. 그게 내가 보기에는 합당해.” 그게 마지막 재앙에서 자식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니 이 지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어떻게,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 그 땅을 치는 새로운 땅은 애굽의 이 열 가지 재앙에서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보통 전쟁할 때, 만약 우리나라하고 북한, 아니 북한은 아니고 일본하고 전쟁을 한다면 일단은 병참부대, 무기를 공급할 한국이 있고 한국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을 친다, 그렇게 있거든요. 그런데 애굽나라를 칠 때는요, 병참기지가 없어요.
애굽나라 전역을 다 치는데 그 전역을 치는 무기저장고가 어디 있는지 그게 없습니다. 땅이 없는 곳에서 땅을 치는 거예요. 이 말은 “땅이 있느냐? 그러면 땅 없는 곳으로 가라”는 뜻이에요. “땅이 그립냐? 나의 살던 고향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살던 고향은 내가 아주 없애 버릴 거야. 메뚜기를 가지고 없애버릴 거야. 잊어버려. 메뚜기가 다 갉아먹고 저주해버렸어. 네가 살던 고향은 없어. 왜? 너는 없어지면서 네 본질을 알아가야 되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없어지면서.
그러면 그 병참기지,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은 어디서부터 왔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모세로부터 또는 모세의 지팡이로부터, 모세로부터 온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모세가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모세를 통해서 무엇이 나타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 본인이 여기 있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모세 말고 모세를 껴안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분이 모세와 더불어 있는 겁니다. 요엘서의 전체 내용을 미리 말씀드리면, 땅에 있는 것들은 메뚜기로 싹쓸이해버리고 그 비어있는 부재의 자리, 없는 자리에다 요엘 2장에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육 없애고 그 빈자리에 영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바로 요엘의 주제입니다. 있는 것은 없어지고 없다고 여기는 것이 저주받은 곳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미리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을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거예요. 애가 시험 치고서 시험을 잘 쳤으면 백 점짜리 시험지 막 들고 오잖아요. “엄마! 나 어때!” 하고 들고 오잖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남을 타인을 의식하고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보여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병든 아버지 홀로 자기를 키울 때 효도하는 자식은 ‘아버지가 병들었지만 내가 아버지 인생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사법고시 합격해서 아버지 기쁘게 해드리고 효도하겠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사법고시 치고 난 뒤에 1차 합격, 그리고 2차 합격, 이제 3차 면접시험만 남았는데 그건 형식적인 거니까 사실상 합격만 남겨두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전에 돌아가셨어요.
자식은 ‘내가 누구 때문에 그 힘든 공부를 했는데……’ 아버지 무덤에 가서 소주하고 마른 안주, 오징어 사고요, 오징어 요즘 비싸거든요, 묘지에 가서 “아버지~! 이 불효자 이제 왔습니다. 아들 잘되는 것 보고 가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버지!” 그날이 추석날. 그날이 추석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것은 너 자신을 보이라, 가 아니라 너와 함께 둘러친 성령을 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은 자신의 업적과 주님의 업적을 보고 싶은 거예요.
교회라는 곳이 참 무서운 곳입니다. 지금 좀 잘되면요, 새벽기도까지 나오고 좀 못되면 그다음부터는 등록 교인 안 보여요. 보이지를 않아요. 몇 개월째 안보입니다. 왜 안 보이냐 하면, 이혼했기 때문에. 자기 자랑거리 있으면요, 출석 따박따박 하지요.
이 땅에서 살아온 인간들이 그래요. 이 열 가지 재앙에서 네 번째 파리 재앙부터는 주님께서 ‘땅이 없는데 장차 땅을 줄게’라는 백성들을 애굽나라에서 차별화시킵니다. 출애굽기 8장 22, 23절에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애굽나라에 있는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이 사는 그 고장, 그 마을과 구분해서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은 재앙이 안 떨어지고 나머지는 재앙이 떨어지게 했어요.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들. 여기 출애굽기 10장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거기서 뭘 배우는가? 반대의 삶을 봐요, 반대의 삶. 같은 인간인데, 같은 애굽사람인데 운명이 같겠지, 라고 그냥 어설프게 상식적으로 살아왔던 그 히브리인들이 ‘야, 이거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인간들의 상식적인 삶이 아니고 반대의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케 하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주신 체험이에요.
같은 식구인데, 아들 둘 그리고 아내와 남편 네 명이 있는데, 우리 식구는 같은 운명이라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해 버리면 슬슬 땅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야~, 이거 강제분류 시키는 작업에 나서지요. 강제분류작업.
그럴 때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주의해야 될 것이냐 하면, 이 성경 해석하면서 항상 이점을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인데 ‘아, 하나님은 내 편이구나.’라는 착오를 제발 하지 마세요. 제가 오늘 말씀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어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까지 다 죽여버려요.
왜냐하면 이 온전한 땅에 합당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뭐 ‘하나님은 내 편이다.’ 그런 것은 없어요. 성경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구약에서, 시편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할 때 그 ‘나’는 오직 예수님만 해당 되는 나에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다윗도 죽었어요. 하나님이 다윗을 죽이는 것은, 시편을 썼던 다윗과 다윗이 이야기했던 그 주인공이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시편을 쓰기는 다윗이 썼지만, 읊었지만 그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와요. 34-36절에,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이에요. 기도는 성도가 하지만 기도의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에요. 어느 순간도 성도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 이유가, 성도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과물!
메뚜기가 오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싹쓸이하는 거예요. 첫째, 메뚜기가 오는 것은 전 지면을 다 덮는다. 따라서 이 지상에서 피할 곳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디 이민 가도 소용없어요. 이 땅에서 어디도 피할 곳은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서 말씀드렸듯이 메뚜기가 온다는 것은 한 평의 빈틈도 없이 온 지표면을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물론 히브리인들 사는 그 지역 빼놓고는 애굽사람들 사는 땅을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이럴 때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살지는 않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땅이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있지만 원래 등기 등록된 원래의 토착민들이 있어요. 열 족속이 있다고요.
그 열 족속이 비리비리 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주 장대한 사람들이에요. 게다가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새총 들고 나무 깎아 창 만들어서 “얏, 얏, 받아라.” 이렇게 할 때 저 약속의 땅 사람들은 두두두두두, 기관총에다 수중 미사일부터 해서 핵폭탄까지 갖고 있어요. 이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봐도 게임이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원인으로 해서 약속의 땅을 쟁취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볼 때 이렇게 봤습니다. 저 땅은 우리 땅이 아니고……, 중요한 거예요. 저 땅은 우리 땅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의 땅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내가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세계라는 거예요. 주님의 세계.
따라서 하나님은 내 종교적인 솜씨를 보고 싶어하지 않아요. 너를 둘러치고 있는, 만약에 너를 포승줄로 꽁꽁 묶었다면 성령으로, 성령으로 꽁꽁 묶는 그 성령에 매인 줄을 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그 성령의 포승줄의 결과물입니다. 결과물이에요 결과물. 나는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주님의 결과물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결과물로 드러나려면 내가 노력하고 기대한 것을 주께서는 삭제시키는 겁니다. 그 삭제하는 방법이 뭐냐? 메뚜기를 보내는 거예요. “너는 온전하지 않다. 이스라엘사람들아! 너는 메뚜기에 다 빼앗겨야 된다. 삭제되어야 된다. 제거되어야 된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행실은 약속의 땅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생각한 율법의 땅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 초반을 가지고 보통 대심방에서 많이들 설교하거든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그 대목. 그런데 초반만 사용하고 신명기 28장 38, 39절은 아예 언급을 하기 무서워들 하지요. 왜냐하면 신명기 28장 38절, 39절을 언급했다가는 두 번 다시 그 집에 심방은 끝났습니다.
그게 뭐냐?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특히 촌에서는 농사를 짓잖아요. 그런데 신명기 28장 38, 39절을 가지고 심방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가 목사입니다. 사모님과 같이 갔다 합시다.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포도원, 우리 교회에 포도원 하시는 분도 계시지요.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39절까지 읽었습니다. 아멘, 하세요. 이게 선뜻 아멘, 이 될까요? 지금 이것 아멘, 안 되면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내 것을 안 받는다는 사실을 지금 계속 강력하게 내부에서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 포도 농사 안 받습니다. 내가 키운 것을 안 받아요. 십일조 해도 이스라엘은 망했어요. 십일조 했는데 망했고 제사 지냈는데 망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추가되는 율법의 요구를 다 해낼 수가 없어요. 결국은 이 약속의 땅이 젖과 꿀만 흐르는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을 흐르게 해놓고 그것이 어떻게 말라 비틀어져 가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땅 있다고 좋아들 하지 말고 네가 과연 그 땅에 살만한 자격이 되냐고 내가 말씀으로 너한테 계속 물어볼게. 추궁해 볼게.”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럴 때 정말 성도라면 이 세상의 헛된 희망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찬양할 겁니다. ‘아, 주께서 내가 기대한 모든 결과, 내가 이 세상에 기대했던 예상했던 모든 것을 피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구나.’ 내가 원했던, 간절히 바랐던 그것들, 모든 것, “특강 할까요?” 해서 그날 하려 했던 특강 취소, 이런 것. 하여튼 내가 예상한 것, 내가 기대했던 것 알뜰살뜰하게 전부 다 엎어버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시작한 거기에 내 마음이 홀라당 다 빼앗기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주의 일에 협조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분이라는 사실이 종교의 이름으로 마귀 짓, 훼방질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 땅의 우리는요, 없어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이야기를 하실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내가 고난을 받고 죽는다. 베드로야, 제자들아! 내가 고난받고 죽는다.” 죽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무슨 뜻이냐 하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없어진다는 거예요. 죽어 없어지는 거거든요. 죽는다는 것은 없어지는 거예요. 그냥 치워버리는 것, 산자의 땅에서 죽은 자로 이동을 시켜서 이제는 산자의 땅,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땅의 생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땅에서 일할 때 이게 놓칠 수 없는 필수코스라는 겁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죽는가, 알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좀 살아볼까, 하는 그런 계산은 하지 마세요.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떻게 죽느냐는 겁니다.
아까 한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모세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 그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그 일이 중요해요. 그 역할이 중요한 겁니다. 아시다시피 모세는 자기 입으로 실컷 약속의 땅, 약속의 땅, 노래를 불러놓고 정작 본인은 약속의 땅에 못 갔습니다.
약속의 땅에 못 갔는데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보니까 모세의 얼굴이 훤~하게 해같이 빛나는데 참 놀랍게 빛났어요. 모세는 여러 번 빛났습니다.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얼굴이 훤~해요.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땅에 있는 사람들은 눈부셔서 볼 수가 없어요. 할 수 없이 모세가 태광타월, 태광타월 모르시지요, 그런 것이 있어요, 타월을 가지고 얼굴을 덮어서 겨우 막지요.
모세가 40일 동안 있다가 시내산꼭대기에서 내려왔지요. 기껏 40일이에요. 기껏해야 40일, 한 달 열흘입니다. 그런데도 지상에 있는 인간들, 육의 인간들은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라면 천국에서의 날빛, 이것은 피조 세계의 태양보다 더 강렬하지요. 참고로 태양의 표면 온도는 6천도입니다. 눈부셔 못 봐요. 잘못하면 망막 나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요. 흙에 속한 형상은 죽는 그것으로 끝났고 이제는 하늘에 속한, 주님에 속한 형상이 그대로 너희에게 이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주님께서는 정말 온전한 분의 것을, 온전한 분만이 홀로 이룬 것을 우리한테 그냥 선물로 주시겠다는 이 전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철딱서니 없는 이스라엘 속에 함께 계시면서 그저 애굽의 세상 영광밖에 모르던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약속의 땅을 주겠다, 했을 때 인간들은 자기 변화될 생각은 안 하고, 자기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세속적인 애굽의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 그 땅에 또 가면 되는 줄로 알았어요.
약속의 땅은요,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땅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이라 해요. 언약이 언약대로 신명기 저주가 저주대로 뿜어져 올라오는 그 땅, 그래서 오늘 본문에 메뚜기가 오잖아요. 메뚜기 보고 닦달 낼 것이 아닙니다. “네가 기거하는 그 땅의, 원래 땅의 약속적인 모습을 네가 잊었구나. 내가 그걸 상기시켜 줄게. 말씀대로 안 살면 메뚜기 오는 것 내가 벌써 이야기했거든! 내가 신명기 28장 38절 39절에서 이야기했잖아.”
주님은 자기 약속을 절대로 잊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 약관 내용의 글자를 왜 그렇게 작게 썼는지 모르겠다.” 작게 쓴 것 아니에요. 이게 보험계약도 아니고요. 크게 썼어요, 크게! 네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종자를 심을지라도 저주받을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 발악을 하느냐 하면, “우리는 못났으니까 봐주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한다는 그 하나님의 일관성은 생각 안 하고 한번 그 땅에 살아봤으니까 좀 좋았거든요. “눈 딱 감고 봐주면 안 됩니까?” 이런 식이에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죽어라, 인간아! “좀 봐주면 안 됩니까? 우리 딸내미 시집갈 때까지만이라도 좀 봐주면 안 됩니까?” 이런 식이라
주님께서는 안 봐주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제대로 한번 해봐, 가 아니라 네 운명,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그런 관계로 이미 돌입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행함 보고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이 우리 대신 결정을 지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뭐만 쳐다보면 되느냐 하면, 온전하신 주님만 바라보면 되는데,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이런 말씀도 있잖아요, 온전하신 주님만 바라보면 되는데 주님 바라볼 생각은 안 하고 맨날 그동안 살았던 행세 있잖아요, ‘아, 기도 너무 잘 된다. 내 기도 어때요? 주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날 좀 바라봐, 맨날 날 바라보라는 거예요.
좀 잘하면 날 좀 바라봐. 자기가 생각해도 좀 나쁜 짓 했다 싶으면 음매 기죽어. 좀 잘 했다 싶으면 음매 기 살아. 눈썹에 길게 뭐 하나 붙여서는. 도대체 이게 뭘 하는 짓이냐 그 말이에요. 도대체 신앙이 거기에 어디 있어요?
이런 하나님 앞에서요, 인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오락추구입니다. 자기 즐거움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을 보면 감정기복에 자기가 후달립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감정 기복은 사치에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에 끼어있다. 아닙니다. 끼어있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우리는 지옥과 천국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옥이에요. 자기 주제도 몰라. 이미 지옥에 온 거예요. 우리 힘으로 발을 못 뺐는데 강제로 빼내신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메뚜기로 우리가 의지하는 내 성과 내 노력의 열매 그 성과를 메뚜기, 드론 띄워서 다 빼앗아 놓고 그 빈자리에 주께서 이루어놓은 성과, 주님의 일방적인 모든 선물, 하나님의 의를 거기 빼앗긴 자리에 집어넣으면 우리는 하나의 용기, 주님의 그릇이 돼요. 주님의 그릇으로 사는 겁니다. 자비의 그릇, 그다음에 저주의 그릇, 달랑 그 두 가지밖에 없어요.
그러면 지금 시대도 주께서 빼앗아가느냐? ‘지금은 메뚜기 없잖아.’ 왜 메뚜기가 없어요? 있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요. 요한계시록 9장, 무저갱을 열어요. 그러니까 악마가 갇힌 감옥인데 밑바닥 없는 감옥이 무저갱이에요. 그 무저갱 열쇠를 받은 자가 악마에요. 11절에 나옵니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악마가 무저갱의 열쇠를 여니까 갇혀 있던 귀신들이 나오는 거지요.
그 귀신들의 모습이 뭐냐? 3절에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여기 황충이라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대로 번역하면 그게 메뚜기지요.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온다. 메뚜기가 워낙 많으니까 이게 연기 같아요. 연기처럼 메뚜기가 나오는 거예요.
자, 메뚜기의 특징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첫째는, 온 지면을 다 접수했다는 거예요. 빈틈이 없어요. 이민 가도 소용없어요. 어디 가도 메뚜기가 있어요. 미국 뉴욕의 화장실에 가도 메뚜기가 있어요. 거기에 귀신이 있어요. 귀신의 특징은, 이 땅에서 네가 아무리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하게 하면서도 결국은 행복을 못 얻게 만드는 그 역할을 이 악마가 해야 돼요. 악마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주 칭찬할 만합니다.
지옥을 지옥답게 하는데 있어서 귀신만큼 잘하는 다른 재주는 없어요. 지옥을 지옥답게. 지옥이라 하니 너무 무섭지요. 그러면 말을 바꾸겠습니다. 이 땅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는데 있어서 악마만큼 잘하는 분이 없어요. 왜냐? 하늘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마지막 희망은 이 땅에서의 행복입니다. 땅의 번영이에요. 과학의 발달이고, 정치적 안정이고, 민주주의의 발달, 이게 다 마귀가 만든 거예요.
민주주의, 과학. 민주주의와 과학. 이걸 좀 자세히 하면 화학, 생물, 수학, 물리, 영어, 제 외국어, 이런 거요. 땅에 충실하라. 땅에서 성공해라. 그 외에는 다른 행복은 없다. 출세해라. 돈 벌어라. 남에게지지 마라. 이거 자욱한 연기같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다 파급되었습니다. 하나의 빈자리, 단 하나의 빈자리가 없는데 심지어 교회까지 다 들어왔어요.
교회 앞자리 뒷자리, 어느 자리 할 것이 없이 전부 다 마귀, 여기 지금 귀신 죽 앉아 있어요. 오늘 귀신 너무 많이 참석했다. 죽 앉아 있어요. ‘말씀 듣고 성공해야 될 텐데. 말씀 듣고 저주 미리 삭제해야 되는데.’ 전부 다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이 저주를 삭제해야 되는데.’ 그게 귀신같은 재주거든요. 말씀대로 살면 저주 없대요. 이게 귀신의 보이스피싱 방법입니다. 각본을 누가 짰느냐? 귀신이 짠 거예요. 이 보이스피싱 각본을.
그냥 죽어버립시다. 메뚜기 보낸 것이 죽으라고 보낸 거예요. 그냥 죽어도 괜찮은 이유가,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이 원인이거든요.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오는데 성도는 뭐냐 하면, 아예 원인이 없어요. 그래서 살고 싶다고 사는 게 아니고 죽고 싶다고 죽는 게 아니라 모든 원인은 주님이 꽉 쥐고 있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께서 필요할 때 살리시고 필요할 때 죽이시기 때문에, 온전한 분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요엘선지자같은 기능만 하면 돼요.
‘드론 띄웠단다. 싹쓸이한단다.’ 그 뒤에 하나 붙이면 돼요.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이게 바로 메뚜기같이 이미 멸망된 이후의 안목과 시선을 가지고 이미 죽었지만 주 안에서 주님이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멸망 이후의 삶을 멸망 이전에 외치는 역할, 그게 바로 모세역할입니다. 그게 선지자역할이고 오늘 성도들의 역할입니다.
왜냐하면 지시를 누구한테 받는가? 자기 원인이 없어요. 지시받는 것도 주께서 주신대로 지시받고 살라고 하는 거예요. 느긋하게 사시고 여유롭게 사시고 자기 감정기복에 휘둘리지 마시고요.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효과, 그 효과로 우리는 하루하루 찬양하면서, 감사하면서 아직까지는 숨 쉬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욕심은 괜히 부렸습니다.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되고, 남은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려야 되고, 남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해야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삭제대상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