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0:9-15 / 나의 일 없음
나의 일 없음
이근호
2021년 9월 5일
본문 말씀: 욥기 30:9-15
(30:9)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30:10)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30:11) 이는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30:12)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30:13)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30:14)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 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30:15)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 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 같이 지나갔구나
욥은 자기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날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물론 폭력적으로 욥은 건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욥이 극도로 민감해 있는 바는 이제는 육신을 넘어서 정신세계까지 신경쓰고 있습니다. 즉 ‘내 몸이 아프다 아니 아프다’가 아니라 누가 나의 의로움을 건드니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은 오늘날 모든 인간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욥의 마음을 건드리니까 욥도 평소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의로움과 가치를 지켜오고 관리해왔는지를 절실하게 노출되는 겁니다. 인간은 이처럼 대인관계에서 있어 ‘당신이 나의 가치와 의미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하에 나도 당신껏 최대한도로 잘해줄게’라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그 한도가 깨어져버리고 욥은 자신의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단 욥은 주변 인물들이 과거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인식했느냐를 전제로 해서 자금의 그들의 자기 평가를 대비해봅니다. 그랬더니만 과거와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욥 자신을 형편없이 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남이 더욱더 욥을 분노케 합니다. 자신을 너무나 높게 보고 존경했기에 함부로 대하는 지금의 처지가 더욱 더 참담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런 극한 대비에 욥은 참지 못하고 그들과 다툽니다. 이렇게 타인들과 싸우면서 얻고자 하는 바는, 과거처럼 자신을 존경해 달라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가치를 어떤 식으로 회복되어야지만 참으로 ‘나다운 나’가 된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시도가 다툼으로 나온다는 것은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세상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용하므로서 욥을 통해 인간성의 근원이 밝혀집니다. 최종적인 하늘의 은사를 받으면 이런 다툼이 사라집니다.
야고보서 4:1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은사를 받은 자는 세상과 다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온 은사는 온전하기 때문이요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더 이상 성도에게는 없고 진정 성도들이 싸워야 될 싸움은 공중 권세잡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이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게 한 그 온전한 원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만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계속 사는 이유는, 마치 병사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딤후 2:3) 이처럼 구약의 욥과 신약의 성도의 태도가 다른 것은, 예수님께서 일찍 욥에게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적 성격이 욥이 들이닥쳐버리니 한참 잘 나가던 욥은 급격히 망가져 버립니다. 참으로 개인적으로 억울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그 징벌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 아니잖습니까? 따라서 욥은 기존의 자신의 정신세계가 허물어져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을 사는 우리들에게 장차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성격이 이미 와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들과 자신의 가치를 위하여 싸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성도가 자기를 지킬 필요가 없는 이유는, 성도의 개인은 ‘주님을 위한 다수’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0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실만한 공간이나 환경 마련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삭제되어 버리고 그 하나(1)의 이름은 주님으로 넘겨버리게 됩니다.
마치 한국에 있는 사람이 은행에도 돈을 저금하고, 그것을 미국에 있는 은행에서 인출할 때, 자기 이름을 대면 가능한 원리와 같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저축했기에 자기 이름으로 돈을 뽑아낼 수가 있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 인간의 그 어떤 이름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우리 인간의 이름은 소용없습니다. 넣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제거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천국 안에서 더 이상 나의 문제는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마귀가 이점을 시기해서 공격하는 겁니다. 즉 악마는 자꾸 우리 자신보다 “너의 가치는 네가 지키는 거야. 너는 너다움을 유지하라”고 부축입니다.
하지만 나의 이름은 소실되고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천국에서 두 세 사람의 위상이란 오로지 주님의 이름만이 실재적이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성도에게 주어지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성도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공하신 일입니다. 여기에 성도가 자꾸 욥처럼 자기 가치성을 주장하니 주님은 항상 매사 나의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겁니다.
‘나의 뜻대로 안 되게 된 그것’ 자체를 성도는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로부터 해방된 신분인 것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지 않으나 막상 자기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심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각해도 자아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전혀 인간은 악마에게 속고 사는 겁니다.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살겠다고 설쳐대는 한 삶 자체가 마약같게 됩니다. 스스로 문제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다 지려고 하는 것은 자기 의로움에 농락당하는 꼴이 됩니다. 욥은 치열하게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다 무용지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원인을 제시하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실은 예수님 자신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해결자도 예수님 뿐입니다. 주님의 일은 성도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도 ‘주님 안에 있는 성도는 여전히 주님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쪽에서 제시한 해결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가치를 놔버리고 살게 하옵소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99강-욥기 30장 9~15절(나의 일없음)2109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0장 9~15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욥이 아프고 난 뒤에, 그리고 저주받았다는 티가 난 뒤에 주위 사람들이 욥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대조하고 얼마 전 자기가 아프기 전까지의 상황을 대비해 보니까 그들이 욥에게 나타날 때 욥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에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나도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저 모습이 나의 이상적인 모델처럼 살았던 인생이고 그렇게 우러러보던 욥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인의 부러움을 샀던 그런 인생을 하루아침에 만민의 조롱거리로 삼았다는 것은 급직하, 급히 아래로 떨어지게 하시는 이러한 현상을 욥에게 일으켰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욥에게 일찍 주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달려갈 길로 가시는, 처참하게 망해가는 그 인생, 누가 봐도 망해가는 주님의 인생이 욥에게 덮친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 입장에서 무엇이 덮치느냐 하면 주님의 영광스러운 화려한 귀환이 덮치게 될 겁니다. 영광스럽게 되는 거죠. 우리처럼 이렇게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해보다 더 빛나는 몸으로 우리에게 닥칠 겁니다. 이게 빈말이 아니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더불어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굉장히 좋아했죠. ‘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구나. 여기가 하늘나라구나. 하늘나라가 저렇게 좋은 데구나’
그동안 이 세상에서 당했던 그 모든 고생, 마스크 쓰고 다니던 그 모든 고생, 그것은 다 꿈같이 한순간에 ‘그런 일이 있었었었어? 그게 뭐였지?’라고 다 지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창가에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의 일 부로 우리가 살아온 거예요. 욥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먼저 영광스럽게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가 일순간에 처참하게 망가지잖아요. 망했죠.
우리는 반대가 되어서 이 세상 사는 것 자체가 지옥같은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도 그렇고 더워서도 그러겠지만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는 참 심각합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전혀 심각함을 모르죠. 그런데 태어나고 난 후에는 그때부터 아이들이 심각해요. 왜냐 하면 이제 본인이 한평생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부모로서 이제 좀 크면 슬슬 밀어내죠. ‘이제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 그 심각한 일을 내가 관여하기 싫다. 나도 많이 심각했다’라는 식으로 밀어내는 거죠.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온 것은 돌파입니다. 돌파해야 해요. 뚫고 지나가야 해요. 욥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은 주께서 어떤 식으로 뚫고 지나가는가를 무엇을 경유 해서 이게 뚫리느냐를 욥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나중에 알려주죠. 지금은 욥이 자꾸 과거에 잘 나갔던 것을 생각해서 그냥 외부를 향해서 남 탓하고 있고 남 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욥의 절망감을 오늘 본문에 욥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아주 절망감이 잘 표현된 것이 11절입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이렇게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11절에 “이는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라고 나와요.
줄을 늘어지게 하셨다는 것은 그동안 욥이 나름대로 남들이 이런 비난하게 되면 여지없이 욥의 성채(castle)의 주인으로서 자기에게 욕하는 자에게 화살로 쏴버릴 무기가 있었어요.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나에게 험담을 하다니. 맛 좀 봐라’라는 식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되지도 않는 인간들이 와서 나를 함부로 대할 때 욥이 ‘이것들이 까불어?’라고 하며 무기를 챙기는데 활이 늘어져 있어서 장전해서 화살을 날리려고 쏘니까 ‘톡’하고 나가지를 않아요. 소위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말발이 안 먹혀요.
권위, 카리스마, 그런 것들이 다 힘이 없는 겁니다. 다 인정을 받지 못해요. 왕년에 스타, 왕년에 인기가수라고 해도 돈 한 푼 못 벌고 빌빌거리면 전부 다 밀어냅니다. 나는 너와 모르는 사이다. 다 밀어내는 거예요. 욥의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지금 계속 욥의 중반부에 넘어가게 되면 욥의 고통은 몸 아픈 것도 고통이지만 그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이 뭐냐 하면 남들이 내가 아는 나를 그만큼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에요.
내가 정립되어있는 나의 가치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전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자기는 거기에 대해 심한 낙담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이러한 욥의 체험들은 그만큼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귀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 기껏 하는 행세가 뭐냐 하면 싸우는 거예요. 무기가 있든 없든 간에 막 싸우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거기 뒤에 또 보면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욥은 자기가 있는 곳을 하나의 성채, 성이라고 생각하고 성이라는 것은 그 성주인을 위해 존재하는데 그것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파괴된다고 자기가 성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한다는 그 자체가 그동안 욥은 투쟁하면서 살아왔다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 본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욥과 똑같이 끊임없이 뭔가 알 수 없는 적들을 미리 예상해서 투쟁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다투고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뭐라고 거기에 대해서 비난하는지를 그것은 야고보서 3장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그러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는 이 현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16절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시기와 다툼이라는 것은 싸운다는 거죠.
그런데 17절에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는 특징이 뭐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자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굳이 남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더이상 내가 나를 지킬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줘도 주님이 나를 지키지 내가 나를 안 지키거든요. 주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나의 출입을 지키시는 분이에요. 그 최종적 지키심, 그 지키심이 있기 때문에 그게 하늘의 소식으로써 그 정보가 우리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굳이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 나의 정당성 그리고 나의 의미를 지킬 이유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 있는 욥은 지금 자기 지킨다고 바빠요. 대단히 바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 자신을 지킬 싸움은 그만해라. 많이 했다”라고 하죠. 그러면 뭐냐. 우리의 싸움은 나를 지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나를 안 지켜도 되는 그 원리원칙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거죠. 나를 위해서 나 자신을 안 지켜도 되는 그 원리를 제공하신 그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움을 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에요. 너와 나가 아니에요. 공중권세 잡은 악마가 주님과 했던 주님의 다 이루심에 대한 악마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는 지켜야 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는 병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런 영적 전쟁은 계속되고 엘리야처럼 미리 앞당겨서 죽여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맨날 요나처럼 죽여달라고 하지 말고 다 살아있을 때 우리 편하려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안 편해도 된다는 그 대원리원칙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 말씀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는 병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이 말씀을 다른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내 문제는 없고 모든 것이 주의 문제이다”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자기 문제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냐 하면 내 문제가 없는데 아침에 눈만 뜨면 내 문제가 시작되니까 내 문제는 주의 문제로 바꿔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절대로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포자기하게 만들어요. 내 문제 해결에 대해서 내가 손 쓸 수 없음을 자포자기하게 만들어서 문제가 문제 되게 하는 모든 것은 내가 관여할 사항이 아닙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 대해서 주님이 나보고 손을 떼라는 거예요. 어떤 철학자가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어요.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기게스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자기 저서(국가) 안에 있는데 기게스의 반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좀 기괴한 반지여서 그 반지를 끼면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냥 상상한 거죠.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될지가 궁금했던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평소에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의식해서 행동을 조절하고 조정하게 되어있는데 만약에 내 몸 전체가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 반지는 없으니까 당신의 행동에 책임지라는 그런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플라톤이라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인간은 그 반지 굳이 안 껴도 자기 본성을 자기가 거스를 수 없이 책임질 수 없는 행동만 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문제에 책임지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무지한 짓을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내 잘못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끝까지 자기 문제가 있다고 우기는 게 되는 거예요.
자기 문제가 있어 버리면 야고보서 3장에 의하면 그건 다툼의 여지가 되어버려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라는 그게 바로 다툼인 거예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그게 바로 다투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 싸워도 되는데 엉뚱한 것을 가지고 자꾸 싸우는 것은 그것은 아직도 너희들이 하늘에 은사를 받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지금 그 현상을 우리는 욥을 통해서 미리 맛보고 있는 겁니다. 욥이 자기 활을 생각하고 자기를 어떤 완벽한 튼튼한 성으로 여긴다는 것은 욥이 우리의 본성을 대신 지금 말 다 해주고 있는 거예요.
한없이 끝까지 다 까발려 주는 겁니다. ‘아, 욥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이건 내 것이고 이것은 내 성이다. 평생을 가꿔온 내 집이다. 오기만 하면 화살로 다 쏴 죽일 거야’라고. 욥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안 그런 척하면서 평소 행동은 다 이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는 거예요. 주님이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내 문제로 여기는 거예요.
마태복음 18장에서는 바로 그게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불신자요 이방인이라고 간주해 버립니다.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하는데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게 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 해석이 어려운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꿔서 이야기하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원인도 주님이고 결과도 주님으로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원인은 내가 정하고 결과는 주님께서 복음으로 주신다고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보고 난 뒤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맞다. 기도할 때 혼자 하면 응답이 안 되니까 부르자’라고 생각하면서 선착순 두세 사람을 불렀어요. 불러 놓고 이제 주님을 불러야잖아요. ‘사바사바 분신사바’ 하면서 일본 귀신 부르듯이 불러 놓고 뭘 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쭈여~쭈여~”라고 부르면 주님이 뽀로롱~~~‘부르셨나요?’라고 이렇게 오는 겁니까? 세 사람은 부족한 거 같다고요? 그러면 기도원에 오백 명 정도 불러 놓고 제창 한번 할까요? “주여~”라고 크게 삼창하고 “랄랄랄라”하면 주께서 거기 계시는 겁니까? 마태복음의 이 대목을 보고 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함께 있는 것이고 주님이 어떻게 함께 있는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면 있다고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기도하면 기도발이 안 되고 합심해서 기도하면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덧붙여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주님의 약속이니까 약속대로 실시하면 주님이 쪼로록 “내 약속을 지켰느냐. 그러면 나도 참여할게”라고 하면서 온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뜻은 뭔 뜻이냐. ‘에라,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요. 하여튼 이해 안 가면 다 넘어가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제가 전에 백두산 밑에 호텔에서 강의할 때 진짜 두세 사람과 강의했거든요. 거기서 할 때 이 대목을 했어요. 해외 강의 보면 나옵니다. 이게 공간의 이중성이에요. 그거 설명할 때 제가 예를 들은 것이 뭐냐 하면 서양 음식에서 접시에 음식 놓고 그 위에 뚜껑을 덮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제가 은행 전산망으로 비유를 들었어요. 한 사람은 미국 가 있고 한 사람은 한국에 있는데 한국에 저축해 놓고 자기는 미국 와서 한국에 저축한 자기 돈을 빼려고 할 때 미국 전산망에서 돈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돈이 찾아져요. 왜냐 하면 은행 전산망이 그걸 가능하게 해요. 너는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그거는 기존의 공간이고 기존의 현실 망이고 그 위에 주님은 다수의 하나를 제거해 버려요. 지금 욥이 모르는 것이 그거예요.
욥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욥 자체를 신약시대 성도가 되면 어떤 인간이 고통을 받든 안 받든 그 인간을 제거해 버립니다. 제거해 버리면 하나(1)가 제거되면 다수로 변해요. 그러면 1은 누가 되느냐. 우리 주님이 넘겨받아요. 주의 이름이 하나의 이름이고 다른 이름은 본인의 이름을 갖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게 교회인 거예요. 내 이름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그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교회에 그 용서함과 영생은 내 이름으로 저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욥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한 건 고마운데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나요. 저 멀리 독일에 있는 딸과 한국에 있는 우리가 화면이 큰 태블릿PC로 영상통화를 하는데 이게 이불 위에 있었는지 대화하다가 굴러떨어져요. 그래서 제가 신기한 것을 봤어요. 태블릿PC가 굴러가니까 딸 얼굴도 굴러 내려가요. 왜? 네모난 화면에 갇혀 있으니까 같이 굴러 내려가요.
자칫하면 딸이 굴러가는 줄 알고 소리칠 수 있는데 다칠 필요 없어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게 이상하게 신기했어요. 왜 굴러갔는데 안 다치지. 우리 자신이 그냥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태블릿PC예요. 이 땅에서 아프든 굴러가든 잘 되든 주께서 전혀 관여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요. 왜? 이 동네가 내 동네가 아니고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문제거든요.
주님께서 생각한 주님의 문제를 스스로 이루어 놓고 그 이루신 것을 확인차 우리로 하여금 태블릿PC 안에 집어넣었단 말이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이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이 중요하죠. 주의 것. 주 안에 들어있다,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 성령 안에 들어있다, 이게 중요하다고요. 지금 욥은 그게 안 돼요. 본인이 성주인이에요. 누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히 네가, 나를 존경하던 너희들이 이제는 나를 개무시하고 나를 함부로 대하다니, 참을 수 없다. 한번 싸울까. 다툴까. 쉽게 말해서 드라마식으로 이야기하면 “너희들 가운데 나에게 돈 안 받은 놈 누구야? 나에게 돈 안 받아먹은 놈 없잖아. 이제 내가 경찰에 왔다 갔다 하니까 입 싹 닦고 그 사람 모른다고 그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알리바이 내세우면서 나를 내치다니. 좋다. 나도 관악산 올라가서 죽어버리겠다”라고 하는 거죠.
관악산 그 동네가 유명인사 가운데 목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 자존심,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태블릿PC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금반지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쓰레기 안에 금반지 들어있는데 쓰레기가 오해하기를 우리가 노력해서 금반지를 생산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말이 안 되죠. 쓰레기가 아무리 진화해도 금반지 안 나와요. 그냥 섞인 거예요. 그냥 같이 섞인 거죠.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답답한 것은 지금 욥이 잘못해서 고난 준 것이 아니에요. 욥은 그 정도 가치도 안 돼요. 잘못했다고 벌주는 가치도 안 된다고요. 그냥 태블릿PC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욥에게 복 주니까 자기가 착해서 복 받은 줄 알고 있어요.
교회 봉사해서 딸래미 좋은데 취직하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한마디로 성령 받으면 내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예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해요. 내 문제라는 거. 내 고민거리는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거예요. 주님이 오시는 그 모습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땅에서 걷고 있는 새같은 거예요. 매우 낯설어요. 새는 공중을 날게 되어 있잖아요. 공중에 있어야 하는 주님이 걷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걸 새라고 보지 않고 같은 인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주님은 후루룩 날아가 버렸어요. 오늘날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성도는 마치 땅에 걷고 있는 새같은 존재라서 이미 존재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있는데 잠시 이 땅에 부모 만나서 태어나 가지고 잠시 타박타박 걷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번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그리고 거기 국민을 보면서 그들을 보고 “뭐 이슬람 믿는다고 보자기 뒤집어쓰고 그게 무슨 천당 가는 건 줄 알고”라고 욕할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생존 위기가 닥치면 종교같은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탈레반 자금 출처의 60%가 양귀비 마약에서 나와요. 아프카니스탄의 GDP 7~12%가 마약 파는 것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손 떼고 이제 누가 와도 마약쟁이들과 정치하는 것이랑 똑같은 거예요. 그들의 종교가 뭐냐. 종교 자체가 마약이에요. 저는 지금 입이 근질근질해요. 기독교가 마약같다는 말을 막 하고 싶어요. 이미 해버렸는데.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하는 것이 마약 아닙니까? 이게 양귀비 마약 아닙니까?
자기 문제를 버리질 못해요. ‘신이여, 도와주소서’라고 하면 신은 “네가 뭔데?”라고 하겠죠. ‘많이 착했잖아요’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네가 태어난 자체를 네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태어난 자체가 주님의 뜻에 의해서 태어난 거예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원천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실수라고요. 원천을 알려줘도 듣지를 않아.
‘아휴,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뭐’라고 하면 그건 너 자신이 너에게 마약이에요. 망상과 착각을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라고 하면서 ‘잘~~ 될 거야’라고 맨날 자기가 자기에게 마약을 털어 넣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장차 주님이 오시면 더이상 이 땅에서 땅의 것 가지고 내 문제로 여기면서 싸울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모든 일은 다 헛되고 아무 가치 없는 쓸데없는 짓들이에요. 지켰다고 잘 됐다고 까부는 그것도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부담이 되어요. 그냥 주 안에서 주님이 주신대로 어느새 우리 창가에 이 지옥같은 세상을 돌파하는 풍경들이 보일 겁니다. 어떤 독립영화에 보니까 30대 초반 아가씨가 서울에서 취직했다가 지겨워서 때려치우고 무작정 거제도로 내려왔어요.
‘뭐 잘 되겠지. 내가 이 회사 없으면 죽나. 또 취직하면 되지’라고 사표 던지고 내려왔어요. 내려왔는데 할머니랑 아버지가 살던 그 촌집에 닭장에서 닭이 튀어나왔어요. 깜짝 놀라서 닭을 닭장에 다시 집어넣었어요. 닭을 닭장에 집어넣었는데 자기 신세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닭은 닭장에 잘 집어넣었는데 본인이 들어갈 자기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냥 멍청하게 산에 올라가서 거제도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다가 한 계절, 여름날이 다 지나갔어요. 제목이 ‘여름날’이에요. 영화 그렇게 끝났어요. 독립영화. 도대체 인간이 뭐예요? 멍청하게 그냥 ‘뭐 잘되겠지. 남들처럼 비슷하게 살면 뭐 되겠지’
욥이 다행스러운 일이 바로 그겁니다.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하나님,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게 하는 기회를 부여받은 거. 나중에 그렇게 달려들고 은혜받은 것은 바로 애초에 내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 이게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어진 것이 주를 위하여, 주께 감사하라고 준 일을 우리는 나에게 감사하라고 주신 일로 착각했습니다. 욥이 원망하는 것처럼 늘 내면에서 싸우고 세상 원망하고 남 탓하는 저희들, 다시 십자가 안에서 무엇이 용서받았는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