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30:1-8 / 욥의 분노

정인순 2021. 8. 29. 22:42

 

 

욥의 분노

 

이근호

2021년 8월 29일                 

 

본문 말씀: 욥기 30:1-8

(30: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 둘만하지 못한 자니라

(30:2)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30:3)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30:4)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30:5) 무리는 도적을 외침 같이 그들에게 소리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30:6) 침침한 골짜기와 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30:7)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30: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니라

욥이 타인에 대해 거침없는 분노를 내뱉고 있습니다. 이는 욥의 정신마저 고난의 여파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기를 조롱하는 그 집안까지 들먹입니다. 즉 “너의 애비는 내 농장지키는 개만도 못하다”는 식으로 직설적으로 욕합니다. 도대체 욥이 그런 식으로 타인을 공격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겁니까?

욥은 지금 자신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고 결핍되어 있는 그 자기 고난의 의미를 메우는데 있어 타인을 욕하므로서 마치 결핍이 없는 것처럼 감추려고 하는 겁니다. 즉 자기보다 못 배웠고 자기보다 더 무식한 자들이 욥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을 강조하므로서 ‘이유없는 고난’으로 남겨두려는 겁니다.

‘이유없는 고난’으로 남겨지므로서 욥이 얻고자하는 것을 무엇일까요? 욥은 여전히 자신이 온전한 신앙인이고 싶어합니다. 곧 욥은 ‘내가 이런 자’이다라는 사실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나의 나됨을 견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내가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욥기 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욥처럼 흠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마저 고통이 임하니 타인에 대한 욕설이 이어진 겁니다.

이점을 감안해 볼 때, 욥이 당한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정신마저 ‘자기 것 사수’쪽으로 성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을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재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훌륭한 인간과 신앙이 훌륭한 자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신앙이 훌륭하다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하나님의 개입’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그 인간의 바닥부터 더 들춰져서 하나님의 관여와 돌아보심이 돋보여지는 상황을 말합니다. 즉 “내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주님의 훌륭하다”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는 인간 대 인간의 논쟁이나 비교나 다툼으로 구분지을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모든 인간의 바닥은 ‘내 것 지키는 것’으로 전 생애를 다 보내는 자들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아벨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생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만 자신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서 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인은 동생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났을 때, 가인은 자신의 본색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가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 대꾸, 즉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가인과 대비되어 우리 주님은 ‘아우를 지키는 자’로서 구원해 나서십니다.

가인의 이런 발언 배후에는 악마가 있었습니다. 악마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은 그 일을 훼방하고 그 가치를 무효화하는데 주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 따로 있음에 대해서 악마는 인간들을 부추겨서 반기를 들게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반발심의 바탕에는, “나는 내 것만 지킨다”는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이게 악마의 마음입니다. 신약에서 가룟 유다가 사단의 최후를 미리 보여줍니다.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사단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왜 자살할까요? 그것은 자살하는 그 순간까지 ‘자기 것’을 안 버리겠다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비록 자살이라는 비참하고 노골적인 짓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연된 자살’, ‘유보된 자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공익광고에서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자고 한다면 이런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서 타 가정을 공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 그 어떤 인간도 ‘자기 것’에서 벗어나기가 실패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건져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만드신 심판 속에서 우리 자신도 저촉되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신 겁니다. 즉 거미가 자신이 내뱉어진 거미줄망 속에서 스스로 사로잡히는 식이 되는 겁니다.

자진해서 제물이 되시는 겁니다. 이는 자신에게 닥쳐진 불행한 운명과 한 팀을 구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아우’를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 것’을 지켜내는데 있어 제일 큰 난점으로 여기는 것은 우연적인 운명의 찾아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두고 공들였던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면 진정 나의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공포스럽고 슬픈 겁니다. 어떻게든 운명을 피하고 자신이 예측한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운명과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차라리 운명과 한 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나의 것’을 치밀하게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어내시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버리고 도리어 인간의 운명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원대로 마옵시고”입니다.(마 26:39)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겨진 운명이 두 개였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들이닥친 성도는 이중적인 운명을 다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인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욥 자신은 처참하게 망가지는 경험도 겪어야 하는 겁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처음자리로 데려갑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데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성사되고 진행됩니다.

‘나의 것, 나의 가치’를 지킬 생각보다는 아예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나에게 찾아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규정해놓으신 그 인간성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사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98강-욥기 30장 1~8절(욥의 분노)2108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0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 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지금 ‘아멘’할 문제가 아닌 것이, 지금 욥이 상당히 점잖게 표현되어 있지만, 실은 욥이 성질내고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욕설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다 끄집어내서 욕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빌어먹을 자식들이 잔소리는...”이라고 하는 거죠. 빌어먹을 자식들. 그러니까 너희 아비는 빌어먹을 사람이고 너희들은 그 자식이라는 말이죠.

나보다 젊은 자들은 그 빌어먹을 인간들의 자식이다. 그들의 아비는 내가 보기에 양 떼를 지키는 개만도 못하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을 쭉 읽어보게 되면 그 내용이 아프카니스탄 국민 같아요. 사는 게 자기 호구지책도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인간 구실 하겠다고 나서냐는 식이죠. “네 밥벌이는 제대로 하고 있어?”라는 식이죠. 3절부터 보면 너희 아비들은 얼마나 가난한지 먹을 게 없어서 흙을 씹어먹어요. 흙을 씹어먹는다고 하니까 아이티 국민 생각나네요.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서 과자를 만들 때 진흙으로 케이크를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나라 아이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이게 아프카니스탄 국민 살아가는 모습이죠. 거기에다 텔레반까지 나오네요.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 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그 동네에 동굴이 많거든요.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고토, 자기 살던 땅에서도 쫓겨난 자, 두 자로 ‘난민’. 이런 주제에 쉽게 말해서 “네가 아비에게 배운 게 뭐가 있느냐”라는 뜻이에요. 그냥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다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런데 욥기 1장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무슨 악에서 떠나 세상에 둘도 없이 믿음 좋은 사람이 욥기 30장 1~8절에 이런 거침없는 욕설이 나옵니까. 이건 앞뒤가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될 수 있잖아요.

우리도 믿음 좀 있고 정직하면 욕한 번 해 볼까요? 모닥불 피워놓고 끝까지 남 씹는 이야기 해봐요? 남 씹는 이야기는 한없이 나와요. 모닥불 다 꺼져도 계속 나와요. 남 욕하고 씹는 이야기. 그러니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욥이 신앙인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욥을 다룰 때 신앙인은 훌륭하다는 인식을 버리시고 처음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작업에 동원된 사람입니다.

인간 바닥에 뭐가 있는지를 완전히 발췌 당한 사람, 그게 신앙인이에요. 이런 인간조차도 하나님께서 찾아가시면 천하에 위대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사람이 우리 보기에 얼마나 완벽하냐가 아니라 그 사람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자기를 안 믿을 때 과연 누구를 믿을까. 그리고 인간이 왜 자기를 안 믿을까.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는데 정신이 없는데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사수하는데 정신없는데 맨 처음 바닥을 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그리고 세리와 창기. 세리 아시죠.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던 그 세리. 예수님께 자기 집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보여줬던 그 삭개오같은 세리. 그 사람은 자기 내부를 주님 앞에 다 보여줬어요. 공개했어요. 더 이상 나는 나를 지키지 않기로 맘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이러한 욕설은 인간의 소위 훌륭하다는 사람의 바닥에 가게 되면 결국은 욕설을 남발하게 되어 있는데 그 욕설은 왜 하게 되느냐 하면 원한이 있고 분노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분노하는 이유는 “네가 뭔데 내 것을 건드려?”예요. 바로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욥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분노하고 분통하고 원통하고. 세상에 대해서 무슨 욕설이라도 해서 자기 기분을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욥에게 왜 이런 욕설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육체적인 고난을 줬잖아요. 육체적 고난이 육체에 머물지 않고 이게 정신으로 퍼졌다는 겁니다. 암세포가 전신에 다 퍼지듯이. 이제 정신까지 망가질 판이에요. 나중에 엘리후가 와서 욥기 32장 1~2절에 보면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라고 엘리후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노를 발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욥은 화를 내고 있고 화내는 이유가 자기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왔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온유, 자비, 양선, 형제 우애, 이런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나와 있거든요. 열매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걸 성령의 열매라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그 지켰던 모든 열매 자기가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그 열매가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플 때죠.

사람이 몸이 아프면요, 만사가 다 귀찮아요. 누구도 귀찮으냐 하면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님도 귀찮고 삼위일체 다 귀찮아요. 목사는 물론이고 다 귀찮아요. 지금 욥이 그런 상태라는 사실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욥을 이해하려면 욥처럼 같이 아파야 해요. 그것도 자기가 실수하고 나쁜 짓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아파요. 그냥 아프니까 그 아픔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화나 나는 모습이 뭐냐 하면 타인에 대한 욕설로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 해결은 역시 이스라엘 역사로 또는 구약성경에서 원 출발해야겠죠. 처음으로 돌아간다 했으니까.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나오는데 그 가인이 인간 본래에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일 때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평소에 뭔가 악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배후에 조종을 받았어요. 악마가, 여기서는 악이죠, 악이 올라탔어요.

자기 등짝에 올라탄 겁니다. 그렇게 등짝에 올라타니까 가인이 엎드렸어요. 정신적으로 엎드리게 되었어요. 눌린 겁니다. 그리고 등짝에 올라탄 악마가 ‘이랴!이랴!’라고 시키는 겁니다. 이건 가인의 소원이 아니고 악마의 소원이에요. 악마의 소원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파토 놓는 거, 그걸 무효화시키는데 악마는 전력을 다합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했지요. 이 세상은 악마가 다스린다고 하면서 정작 악마가 하는 일이 뭔지 막상 이야기하라고 하면 못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훼방질하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룬 것을. 하나님이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밀쳐버리고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누구에게 의존하지 마라. 너도 네 가오가 있잖아. 너다움을 지켜야지 왜 자꾸 어린아이처럼 누굴 의지해’라는 이런 생각 들 때 여러분 지금 등을 만져보세요. 뭐가 올라탔어요.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닌데 언제부터 이런 인간이 되었지’라고 이렇게 자꾸 후회되거든 뭔가 올라탔어요. 악마가 올라탔어요. 그 악마가 동생을 죽이고 난 뒤에 솔직한 본인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4장 9절에 보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인, 그러니까 악마죠, 악마를 통해서 앞으로 오시는 하나님은 아우를 지키는 분으로 오시는 분이에요. 동생을 지키는 분으로 오십니다. 맏형님이 되셔서.

그래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인간이 악마에 눌러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님만이 해내시는 거예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지금 나 지키기도 바쁜데 어디 남까지 신경 씁니까”라는 말을 가인이 솔직하게 내뱉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도 이러한 가인의 본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제가 일반화시킨다면 인간은 자기 것 지키는 것이 인간 살아가는 본모습이에요.

이건 뭐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건 매일같이 노출되거든요. 지금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남을 욕해요? 아비들까지 들먹이면서. “네 아비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내 농장에 개만도 못해. 어디 감히 너같은 인간이 나를 우습게 봐?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할 쨉이 돼? 이게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감히 나에게”라고. 이렇게 대신 이야기해주니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평소에 술 안 먹고는 잘 안 하죠. 아침 이슬 안 먹고는 잘 이야기 안 하는데. 그만큼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억누르고 있죠. 평소에 모든 행동에서 억누르고 있어요. ‘저거를 죽여버릴까. 저거 인간도 아닌 게 나한테 개기는 것 좀 봐’라는 이런 거. 우리 옆집에 있는 할아버지가 나이 80세쯤 되셨는데 그분이 모든 정신이 흐려져도 정신 하나 바짝 차리는 거 있어요. 내 것은 지켜요. 내 것.

그래서 어느 날 보니까 자기가 가꾸는 텃밭을 지나가는데 뭐라고 글자를 써놨어요. 글씨 이쁘게 해서 ‘소변 금지’라고 써놨어요. 소변 금지가 그게 외침이거든요. ‘Cry’라는 외침, ‘Said’ 말하기. 글, 문자. 인간의 모든 문자나 글은 뭐냐 하면 내 것 건드리지 마. 아무리 고상하게 이야기해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백날 해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내 것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죽인다는 그게 담겨 있어요.

‘내가 내 것 지키기도 바쁜데 내가 내 아우 지키는 그런 자로 태어난 겁니까?’라는 식으로 가인이 공격했죠. 브라질에 리우데자네이루라고 인구가 천만도 넘는 브라질에서 제일 큰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에 갱단이 있는데 갱단은 그 빈민 지역을 자기들이 통제하면서 거기서 돈 빼먹기 위해서 갱단끼리 치열한 투쟁을 해요. 마약이나 무기 이런 거 팔아가면서. 치안도 거의 해당 안 될 정도로.

그런데 코로나 일어나고 난 뒤에 그들 갱단끼리 잠시 휴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휴전하고 그들이 불쌍한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왜냐 하면 잘 키워놔야 빼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텃밭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욥은 욥이 고난 당하고 난 뒤에 고난이 정신적으로 확장이 되니까 욥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텃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침범으로 여기는 거예요. 나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귀신이 있어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퇴마사를 불렀어요. 퇴마사가 귀신 쫓아내는 사람이에요. 딱 부르니까 퇴마사 하는 말이 “기본 천만 원이고, 한 평당 100만 원씩 추가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 없으면 귀신도 못 물러가는 거예요. 어떤 집에 귀신 들어서 못 살겠다고 귀신 쫓아내려고 불렀는데 일단 기본 천만 원 들어간다는 겁니다. 천만 원 없으면 귀신도 못 쫓아내요.

귀신 쫓아내는 것도 돈 있어야 쫓아내요. 그 이야기 듣고 갑자기 목사나 신부 생각나요. 돈 없으면 귀신도 못 나갈 판이에요. 돈이 귀신보다 더 센 귀신 같아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자기 아우를 지키는가. 인간의 본 모습이 이것인데 인간이 스스로 변화 못 하거든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거미줄에 거미 자신이 거미줄에 갇히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 것을 빼앗기고 빼앗긴 그것을 회수함으로써 거기서 여분의 율법 완성을, 사랑을 만들어 내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 외에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거미줄에 먹이가 잡히는 것이 아니고 거미줄을 만드는 당사자가 스스로 자기가 만든 거미줄에 옥죄이는 거예요. 스스로 그 저주를 감당하는 거예요. 이점을 가롯유다가 이해를 못 했어요

마태복음 27장 5절에 보면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고 되어있어요. 사탄이 있어 목매어 죽었다고 되었는데 현대 상황으로 바뀌면 가롯유다는 권총 자살한 겁니다. 권총 자살하는데 이 모습이 악마의 끝 모습이에요. 악마의 끝은 죽을 때도 자기를 지키면서 죽어요. 자살이니까. 그러니까 꼭 자살 해야 자살이 아니고 예수님 모르고 십자가 모르고 그냥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은 지연된 자살이에요. 유보된 자살이고.

꼭 한강 건너다가 다리 넘어 안 들여다 봐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 자살입니다. 공익광고에 행복한 가정이라고 나오죠. 그걸 탈 인간적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에서 봐버리면 그게 뭐냐 하면 가정 집단 자살을 홍보하는 거예요. 행복한 가정이 왜 자살이 되느냐 하면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욥처럼 자기 가정 빼놓고 철저하게 욕을 하든지 공격을 하든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해요.

내 운명을 내가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자살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것 지키기예요. 내 것 지키기에 포함된 것 중 하나가 내 운명 지키기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마라에서의 약속’이라는 그런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중동사람인데요, 어떤 주인집 하인이 주인이 심부름시켜서 번잡한 시장에서 물건 사고 있는데 갑자기 저승사자가 찾아왔어요.

저승사자가 찾아와서 오늘부로 네 목숨 데려가겠다는 것 때문에 왔거든요. 그걸 보고 시장바닥에서 그 종이 너무 놀라서 얼른 집에 돌아가서 주인에게 “말 한 필만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말 타고 어디 도망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말 타고 종일토록 달려가서 저승사자 없는 곳으로 제가 피신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주인이 말을 내줬어요.

그래서 말 타고 하루 동안을 달려서 사마라라고 하는 이라크 어느 도시인데 사마라에 도착해서 ‘어휴, 이제 살았다’라고 하며 있었어요. 그렇게 하인이 떠나고 주인에게 저승사자가 왔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저승사자보고 물었죠. “당신이 내 종에게 협박했다면서. 오늘 데려간다고”라고 말하니까 저승사자가 “그게 아니고 사마라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자기가 지레 놀랐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피한다고 피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운명을 피하는 방법은 운명을 안 피하면 되는 거예요. 운명을 안 피한다는 말은 내 텃밭은 없고 운명이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다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과 한 팀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팀장 되고요. 우리는 주님과 한 팀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런 지혜가 없어요. 내 것 지키려고 하니까 늘 저승사자가 오는 거예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수소 이온을 받아들이는 것을 산화라고 하고 수소 이온을 빼앗기는 것을 환원이라고 합니다. 환원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게 주님께서 본인이 보여주는 거예요. 나 하나님인데 다 빼앗겼다. 이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나중에 욥이 재를 뒤집어쓰거든요. 재를 뒤집어쓰면 그 안에 무슨 질소 요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재를 뒤집어써요.

욕을 해요? 아니요. 그 욕했던 입이 다물어집니다. 그러면 그 전에 욥기 30장에서 욕을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몸은 아프지만, 아직도 정신은 살아있는데 그 정신이 뭐냐 하면 그게 내 것 지키기 위한 용도로의 내 정신이에요. 모든 내 영혼, 정신, 사상은 그저 내 것 지키고 내 것 건들면 죽여버린다는 이런 사고방식과 모습이 인간의 바닥인 모습이고 모든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지 않고 인간이 바닥을 보여줄 때 그 바닥의 모습, 그 모습이 그야말로 신앙인의 보여줄 본 모습 아닐까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거예요. 나는 내 것 지키는 것밖에 모르고 건드리면 죽여버린다는 욕이 서슴없이 나온다는 거.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가인 이야기, 바리새인 이야기, 가롯유다 이야기, 이거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도 아담의 자손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었었다는 과거완료 형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었었었다는 것을 되돌려서 자기 자신을 찾는 그 이야기, 이것이 바로 성경 이야기입니다.

신앙 속에 이미 놓여있기 때문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말을 우리는 점잖게 안 하는 척하지만 급하면 어느새 이게 툭툭 튀어나오게 되었을 때 이런 육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신의 모든 생명을 집어넣어서 그걸 되찾는 방식으로 회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가게 하셨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늘 감추고 살았습니다. 성화한다고 거룩한 생활 한다고 여러 가지 주장들 하지만 율법 앞에 들이대게 되면 하나도 갚지 못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을 접할 때 전혀 가망 없었던 우리들, 가망 없음부터 시작해서 천국가게 되는 그 코스까지 주님이 늘 개입하고 있음을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