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3:1-4 / 심판의 의미
심판의 의미
이근호
2021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요나 3:1-4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또 요나에게 지시하십니다. 첫 번째 지시와 이 두 번째 지시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지시에서는 요나는 도망쳤고 두 번째 지시에서는 요나는 강제로 하나님의 명에 따라야 했습니다. 첫 번째 지시와 두 번째 지시의 내용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망한다’입니다. ‘40일 지나면 필히 망한다’입니다.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시 사항이 달라진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는 하나님 낯을 피하지 않고 이 ‘필히 망한다’를 전해야 합니다. 요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자신이 전하나 아니전하나 결말이 전혀 달아질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필히 망한다’에 해당되지 않는 자이고 자신은 전할 것은 다 전하고 관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지시한 바로 대로 만드시 성취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생각의 한계가 오늘날 인간들의 생각의 한계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즉 ‘필히 망한다’라는 사실 안에 ‘안 망하는 자’들은 당연히 열외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요나가 몰랐던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나 이야기는 인간들이 아는 것에 멈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습니다”라는 그 자신감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동업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는 것을 넘어서서 일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의 상대자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 6:13)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을 의논 상대자로 배격하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과 의논하고 상위하고 실행에 옮기십니다. 따라서 ‘심판’이라는 개념은 인간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식으로 전개하십니다. 죄가 있어 그 죄를 심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심판이 아닙니다. 없는 ‘의인을 생산하는 일’까지 심판과 더불어 일어나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알려주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이 걱정이 되어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내려지지 않기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동안 소돔과 고모라가 건재했던 감안해서 거기에도 필히 ‘의인’이 약간이나마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는 그 전에 심판하시지 않았던 것은 의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없는 의인’을 새로 만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원칙이 이러합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심판받지 않는다. 단 없었던 의인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만들어져서 나온 그 의인을 말한다’입니다. 노아 때의 물 심판이 그러하고 마태복음 2장의 나오는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그 어느 시대나 똑같이 그 시대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무시를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그들의 세상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대상으로 확정났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일괄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언약을 남기십니다.
이 언약 속에는 하나님 자신만이 이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대상으로 참여된다는 점이 인간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요소입니다. 죄를 향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없으신 하나님 자신을 심판의 대상으로 하여 심판해 버릴 수가 있는 겁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조차도 이 사실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바로 이 믿지 못할 요소, 즉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의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을 믿었기에 믿음의 조상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은 ‘전혀 내놓을 수 없는 의로운 것이 없는 불신자임’을 자인하는 바로 그 사실을 믿었던 겁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시대로 니느웨 성에 가서 ‘40일 지나면 필히 망함’이라는 심판의 소식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심판의 범위가 넘어서는 내용이 있음을 요나의 태도를 통해서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소리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로 전달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이 나옵니다. 그 원리는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버리시고 이 세상을 다 심판하시는 것이 합당하고 마땅함을 아는 자들에게만, 제대로 된 심판 개념이 살아 있고, 이 말씀 살아있는 자만이 구원되는 자인 겁니다.
그냥 악하다고 다 패고 지옥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인에게만이 심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시는 식으로 심판이 되려면 진정한 의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만이 구원되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목소리를 누군가 알아주고 자기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고향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아 있는 ‘최후의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존감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이 감행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본능을 감추지를 못하고 문을 닫고 그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참된 평안이란 앞당겨 온 자신의 죽음 안에서만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9강-요나 3장 1-4절(심판의 의미)21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3장 1-4절입니다.
요나 3:1-4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무너진다는 그 소식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야기해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들은 무너진 사람들이에요. 무너진 것을 그냥 무너졌다, 라고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전에 처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요나 1장 2절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내용, 1장 2절의 내용에 3장 4절에서 추가된 것은 더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40일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이야기를 첫 번째 지시 때 하나님께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편하게 피할 수 있었던 거예요. 카운트를 하루, 이틀, 사흘……, 40일이 지나면 반드시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필히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요나가 첫 번째 지시를 받을 때 망하는 그 도성에 자기가 있어도 무너지고 없어도 무너질 판인데 굳이 자기가 무너진다고 이야기할 하등의 효용이 효과가 니느웨 사람들한테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무너지니까요. 외친다고 안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외쳐도 무너지고 40일 지나면 안 외쳐도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시한폭탄 같은 것이 장치되어서 째깍째깍 시간 가면 이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 하겠는 거예요. 꼭 자기가 개입 안 해도 니느웨가 무너지게 되면 주의 일에 대해서는 하등 손해 보는 것이 없잖아요. 말씀대로 성취되잖아요. 자기 몫, 거기서 추가적으로 본인이 더 이야기를 보탠다든지 하등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빠져도 마찬가지 안 빠져도 마찬가지니까 이왕 빠지자, 하고 빠진 겁니다.
그런데 동일한 말씀을 본문에서 이야기를 했어요. 동일한 말씀을 이야기를 했으니 요나는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뭐라고 했느냐? “40일 지나면 무너진다.” 이게 첫 번째 하나님의 지시하고 똑같은 지시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안 피하고 도망을 안 칩니다.
요나가 생각합니다. 주의 말씀이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첫 번째 지시나 두 번째 지시나 달라질 것이 없다면 달라질 것이 없는 일에 자기가 굳이 개입을 해야 되니까, 도대체 달라질 것이 없는데 자기가 숟가락 하나 얹듯이 얹어봐야 이것은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되고 아직도 왜 자기가 외쳐야 되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하고 요나, 요나는 그 당시 인간을 대표하는 선지자니까, 하나님과 요나와의 차이점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이야기하게 되면 그 이야기로 말씀 다 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지시를 내리면 그 지시 가운데서 이야기 다 안 한게 있어요. 지시를 했다고 해서, 그리고 인간들이 그 지시에 대해서 알아들었다고 해서 지시한 내용을 인간이 몽땅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여분의 것 남은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요나는 자기는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하나님의 지시는 요나 빼고 제 3자한테만 겨냥되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 과정을 보게 되면 요나를 포함 시킨 이야기임을 요나 3장, 4장에 가면 알게 돼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나를 끌어당기고 있구나. 분명히 내용 자체는 요나가 어떻게 된다는 내용은 전혀 일체 없습니다. 니느웨 성의 운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을 굳이 자신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 말씀의 생성과 결과에 대해서 요나를 끌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끌고 가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요나는 심판에 대해서 아무런 기여한 바가 없다, 그 사실입니다. “요나야, 나는 너와 동업자가 아니다.” 요나 쪽에서는 자기는 제 3자 입장에서, 관람자 입장에서 그냥 멸망하는 것을, ……38일, 39일, 40일, 땡! 멸망! 그것을 지켜보는 그런 입장이라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면 그런 입장에 해당 된다고 생각하지요.
왜냐하면 요나 자신이 멸망하고 자신이 심판받는 내용은 거기에 전혀 들어 있지 않으니까요. 자기는 빠져도 상관없는 이야기, 나 빼놓고 하는 이야기, 요나는 그렇게 이해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굳이 요나에게 전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요나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요나가 기대한 그 심판내용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요나라는 인간이 알고 있는 심판과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 자신의 심판의 현격한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고자 하는 거예요. 그 차이가 뭐냐? 요나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 이게 요나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요나가 지시받은 지시의 내용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겁니다. 그게 심판이에요.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내용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가지 않는 심판은 하나님이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심판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피 대상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진짜 준비해놓은 심판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기피되는 것이 아니에요. 참여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기껏 아는 그 성경해석, 말씀해석의 한계가 바로 거기서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이야기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율법이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다’라는 생각을 그들은 생각도 못 했어요. 감히 생각 못 했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인간하고 의논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겁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신약 히브리서 6장 13절에 보면 분명히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누가 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으로 되어 있어요. 누가 봐도, 어느 누가 읽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 빼고 가실 게요. 아브라함 보고 맹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맹세한 거예요.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누구냐? 아브라함입니다.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불신자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믿음의 조상이 돼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데 그 조상 나리께서, 조상님께서보여주는 모습은 철저하게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뭐냐? 불신앙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간다 그 말이에요. 자기가 불신앙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불신앙인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불신앙임을 앎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느니라. 같은 말이,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했느니라. 이게 같은 뜻이에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어떤 개념까지 잘못되었느냐, 곧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개념 자체,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그것을 노출 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네가 심판에 대해서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니느웨성이 40일이 지나면 심판받는다는 이 심판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이라는 것을 어떻게 전개시키느냐? 그걸 알기 위해서 창세기 18장 19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18장 20, 21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 심판이 감행되는 그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실사단을 보낸 겁니다. 심사를 하는 거예요. 이 악독이 상달 되었는데 과연 진짜 심판받을 만큼 독한 악이 하늘까지 치밀어 오르는지 내가 가서 심사해보겠다는 겁니다. 심판이 적절한지를.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아브라함이 계속 기도를 하는데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처음에 의인 50인부터 시작해서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까지, 무슨 물건 깎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좀 허락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저 심판이 모면 되는 방법이 따로 뭐가 없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카 롯의 가정이 거기에 살고 있었거든요. 아브라함은 땅 분배할 때 너 어디로 갈래, 하니 소돔과 고모라에 가겠다 해서 조카는 소돔과 고모라 선택했고 자기는 다른 곳을 결정했던 그 점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요.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일괄심판해 버리면 조카도 거기에 묻혀서 심판을 당하기 때문에 어떻게 조카 하나 살려보겠다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32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있어도 그 의인 열 명이 악인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꼭 굳이 받아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50명에서 45명, 40, 30, 20, 그러다가 열 명까지 내려갔는데 아브라함 자기도 미안했던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하고 마지막 내민 카드가 열 명이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이야기 안 했으면 그다음에 nine, eight, seven……, 이런 식으로 계속 기도했을 것인데 자신이 마지막이라고 해놓았으니까 할 수 없이 멈췄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열 명의 의인이 있으면 내가 심판을 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이 말은 의인은 결코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그러한 모순과 오류의 상황이 덮치는 일이 없도록 내가 조치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브라함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의인 몇 명이 있느냐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몰랐던 것이 아니고 지금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심판의 개념과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개념이 완전히 지금 달라요.
아브라함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심판을 하나님이 악인에게만 내리고 의인에게는 심판을 안 내린다. 아브라함은 지금 그렇게 이해를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런 입장이라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다면 진즉에, 죄인들이 죄만 자꾸 하늘에 올려보내는데 진즉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이제 와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킵니까?’
그전에 이미 의인이 있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되잖아요. 의인이 있었기에 심판이 유보되다가 이제는 의보다 악이 더 창궐해서 하늘에까지 오르니까 이제 와서 ‘아하, 악이 너무 심하다.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 손봐야 되겠다. 심판한다.’ 아브라함은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동안 의인이 있었기에 심판을 안 했다. 왜? 내가 알기에는 의인과 함께 심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했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되지 않는 그것이 내 뜻이다, 할 때 이 하나님의 뜻과 아브라함의 뜻이 같은 줄로 알았어요.
여러분도 방금 제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요. 그 이야기나 그 이야기나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이제 심판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뭐냐?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의인은 심판하지 않고 악인만 심판한다는 그 조건을 충족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는 거예요.
의인에게는 심판이 오지 않고 악인에게만 심판이 내려진다, 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 그 소돔과 고모라에 이제 와서 의인을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 작업이 남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이 한 열 명은 되는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의인은 하나님에게는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없는 데서 만들어지는 게 의인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마 있을걸요’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뭐가 있어요? 없어요. 니느웨 심판과 연관시켜 보세요. 똑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의인을 다치지 않게 한다. 문제는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는 거예요. 의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심판이 오지를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오묘한 이야기인지요.
의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심판이 안 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의인은 심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그 내용 자체가 심판 안에 담겨 있기에 그런 거예요.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못 한다 지금. 주님의 심판은 의인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그 내용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의인이 거기서 만들어져야 되고 생성되어야 돼요.
조폭도 아니고요, 그냥 무조건……, 그게 누굽니까? 마동석처럼 그냥 막 패는 게 아니에요. 그냥 패서 나쁜 놈 다 죽이는 게 아니에요. 의인을 생산하지 않는 심판을 하나님이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예수님만이 알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심판을 몰라요. 왜? 예수님 자신이 심판 가운데서 부활한 유일한 의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공통점입니다. 노아의 물 심판할 때, 죄가 있을 때 그냥 하늘에서 물 쏟아지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이전에 언약을 만들어서 노아식구를 그 언약 안에, 방주 안에 집어넣어 놓고 심판을 하는 거예요.
“거봐, 내 말 맞잖아. 의인에게는 심판 안 한다고 했지?”라는 이야기를 하나님 쪽에서 하고 싶은 거예요. 심판도 맹세에요. 심판하겠다는 그 맹세가 유효하려면 의인한테는 심판이 해당되지 않고 죄인에게만 심판이 해당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인 만드는 작업과 더불어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없는 의인을 새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이라는 것,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게 맹세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이삭이 구원받고, 야곱이 구원받고, 노아가 구원받은 겁니다. 그리고 롯이 구원받은 겁니다. 창세기 19장 12, 13절에 “그 사람들이……” 천사들입니다,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의인을 약속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만들어 내시고요. 그들만이 약속을 믿어요. 하나님이 만들어준 의인만이 약속을 믿어요. 노아만이 방주를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방주를 몰라요. 방주의 존재가치를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저에게도 묻지만 하나님께도 기도하면서 묻기를 “하나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성도인데 어떻게 살아갑니까?”라고 궁금해서라도 묻지요.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약속 때문에 핍박받아라.” 그 이야기 외에는 할 게 없습니다. 약속 때문에 개무시 당하고, 약속 때문에 집안 식구들한테도 따돌림당하고,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요.
약속 때문에요, 약속 때문에! 자기 성질 때문에, 가 아니고요. 제 말 잘 들으세요. 성질 더러워서 따돌림받는 그것 말고요. 그것은 따돌림받아도 싸고요.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에, 그런 것 말고요. 약속 때문에요. 주님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돼요. 그래야 심판의 맹세가 형성이 된다고요. 그 상황이 형성이 돼요.
하나님의 자기 심판에 요나가 아무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요나가 외치든 말든 관계없어요. 요나 말 그대로예요. 40일 지나면 니느웨 성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떠한 인간성도 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인간의 존엄성, 뭐 인간성?
흔히 사회적으로 문제 있을 때 그걸 사람들이 따지잖아요. “어떻게 짐승도 아니고 인간인데 그럴 수가 있나? 자기 자식한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 하는데 그 인간들이 최후로 내세우는,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자긍심, 자존감으로 내세우는 그것이 인간성이에요. 인간의 인간다움, 양심이라는 것, 짐승과 차이 나는 기본적인 인간다움, 성자 되라는 말이 아니고 기본적인 인간다움 있잖아요.
그걸 마지막 보루로 해서 신이시여 이러시면 됩니까, 라고 내미는데 그 인간성 무너뜨리는 그것을 가지고 심판이라 합니다. “네가 착각을 했구나. 네가 뭐 의인이라고 지금 행세깨나 하려고 하는데 너는 의가 없어. 일말의 의도 없어.” 우리한테는 의가 없어요.
선악을 아는 이것 자체가 저주받을 짓이에요.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그게 저주받을 짓이고 그게 죄가 되는데 그것마저 죄라면 다른 것은 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지요. 뭘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요나가 시키는 대로 그냥 외치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외친다고 해서 요나보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요.
나보고 외치게 해놓고 요나 본인도 모르는 것을 나중에 이야기해버려요. “이야기가 아직 다 안 끝났다. ‘무너진다.’ 그것까지. 그것까지만 일단 외쳐. 그런데 네가 그것까지 외쳤다고 해서 자기 할 도리 했다고 나자빠지지 마.” 나중에 요나가 나자빠지거든요. “제 할 도리 다 했는데……” 하면서.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하고 동업자인 줄 착각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맹세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 자기와 생각이 같은 줄로 요나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 들으면서 이제 복음 아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해요. 하나님은 자기하고 상대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과. 요나가 말하게 해놓고 요나의 말을 꺾어버리시는 거예요. 40일 만에 무너진다, 외치라고 해놓고는 안 무너지잖아요. 보세요. 그렇잖아요. 말을 들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그 자신의 말만 하나님이 듣는 겁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만이,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께 버림이 되고 그걸 근거로 해서 심판이 감행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리는요, 사람보고 들으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 자신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에요. 그 말씀 지시의 실행자는 요나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요나의 지시에 대한 시행자예요. 요나는 붕 떴지요.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요. 니느웨성이 안 무너져요. 붕 떠버린 거예요.
아, 요나는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되 나와 상대해서 나와 협력해서 일하시는 분은 아니구나. 하나님의 협력자가 따로 있구나.’하는 것을 요나가 나중에 알겠지요. 진즉에 알았어야 했어요. 전에는 요나가 도망쳤어요. 자기가 기여 할 부분이 없으니까요. 가만히 있어도 40일 후에 니느웨가 망하는데 자기가 끼어들 필요가 없으니 그냥 빠졌지요.
그런데 도망친 요나를 다시 집어넣어서 지시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지시로 이야기해버릴 때 요나는 뭔가 낌새를 알아챘어야지요. 아, 인간을 대표해서, 요나가 선지자니까, 인간을 대표해서, ‘내가 아는 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이 아니구나.’ 이걸 알아야 돼요. 이 요나의 모습, 요나가 사흘 동안 할 일을 하루 만에 다 전하고 있다는 그 대목까지 나오는데요.
요나의 한계가 인간의 한계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데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뭐로 비유했느냐 하면, 바다에 비유했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바다 같은, 그러니까 전 세계를 다 덮어버리는 말씀, 심판의 말씀, 이 심판의 말씀은 시골에서 조그맣게 이야기해도 그 말씀은 퍼지고 퍼져서 전 세계를 다 덮어버리는, 거대한 대양의 물소리같이 퍼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솜씨입니다. 조그만 구석에서 외친 심판의 말씀이 전 세계 피할 곳이 없고 모든 동굴까지 구석구석 다 파급되도록 심판을 해나가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남기신 그리고 외쳤던 주의 말씀의 위력이에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동방박사 같은 경우입니다. 동방박사가 그냥 별 따라 왔으면 별이 끝까지 직행해서 정차 없이, 바로 직행해서 중간에 휴게소도 안 들리고 바로 아기 예수 계신 곳으로 딱 데려가면 되는데 예루살렘에 와서 그만 별이 사라져 버렸어요.
동방박사가 당황했지요. “여보게, 여기서 한번 묻고 가세.” 그 별 따라 왔을 때는 그냥 아기 예수 보러 왔지만 동방박사를 그동안 인도했던 별이 예루살렘 상공에서 사라졌다는 말은 예루살렘을 심판하기 위한 말씀이 되는 거예요. 아기 예수의 탄생이 세상에 대해서, 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심판하는 징후로서 징조로서 작용한다는 겁니다.
동방박사가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새로 태어나서 그 징조로 별이 떴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 별이 follow me, followe me,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별이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이 근처 어디인데 말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가 8킬로 미터 밖에 안돼요. 얼마 안 됩니다. 조깅 좋아하는 사람들은 뛰면 갈 수 있어요.
그 베들레헴, 야, 여러분이 가 봐야 되는데, 그 베들레헴 어디인지 몰랐는데 헤롯왕이 비상소집해서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는가, 하니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해서 동방박사가 그쪽으로 향하니까 다시 사라졌던 별이 또 떴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바로 한강 건너는 지하철 원칙인데요. 지하철이 원래 땅속으로 다니는 게 지하철이지요. 맞지요. 땅 위로 가는 것은 지상철이지 지하철이 아닙니다. 1호선 지하철이 한강을 어떻게 건너갑니까? 한강 건너갈 때는 지상철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의 이야기가 곧 이 세상을 심판으로 덮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구원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그것이 구원의 소식이에요 그게! 나는 단 한 명도 구원할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 이야기, 오직 그 이야기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간의 모든 기적과 지혜는 갖다 버려라. 십자가 앞에서.
구원된 자에게 능력은 십자가뿐이에요. 어떤 인간의 지혜나 기적체험이 아닙니다. 간증이 아니에요. 뭘 체험했든 그것마저 내 구원의 능력이 안 됨을 알아야 돼요. 구원은 주님 손에 달렸지 체험한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뭘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주의 말씀을 전파하겠다.’ 요나처럼 말씀을 전파해도 그게 요나의 구원의 요건이 안된다니까요.
맹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맹세했지 우리를 상대로 맹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자꾸 요나같은 이런 오해를 하는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살았던 고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거기 출신이기 때문에 그 출신에서 뭐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나라는 것을 만들어내요.
옛날 팝송에 이런 것이 있어요. LA에 가봤단 말이지요. 거기 가보니까 날씨가 너무 좋아요. 야자수(palm tree)나무가 그리도 예쁘고 늘 햇빛이 쨍쨍해서 살기 좋은 곳이 LA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 노래 가사에 나와요. “LA의 그 해변이 좋을까 뉴욕의 해변이 좋을까 그래도 나는 뉴욕의 해변이 좋아 왜 나는 뉴욕이 나의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곧장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니야, 아니야. 뉴욕이 내 고향이 아니야.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고향은 아니야.”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여기 있는데 아무도 내 말을 안 알아주고 귀 기울여주지 않으니까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I am” 그리고 나는 외친다, “I cried” 나는 말한다, “I said” 닐 다이아몬드 노래에 그런 게 나와요. “아무도 내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가사에 보면 “개구리가 왕이 된 그 이야기를 아느냐” 이런 것도 나오는데 개구리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뭐냐?
개구리들이 마을에 모여 살고 있는데 하늘에서 왕관이 하나 떨어졌어요. 이게 왕관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그런데 그 왕관을 쓴 개구리가 졸지에 왕이 되어버렸어요. 어떤 개구리가 왕관을 쓰기는 썼는데 왕이 어떻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으니까 옆에서 왕은 일은 안 하고 무조건 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래서 그다음부터 왕관 쓴 개구리가 신이 나서 막 일을 시킨 거예요. 혹독하게 일 시키면서 자기는 제일 맛있는 파리 먹고 모든 것을 자기 편한 대로 했다는 말이지요.
백성들이 ‘아이고, 길 잘못 들었구나. 어쩌면 좋아.’ 꾹 참고 있다가 ‘그래, 왕은 뭐든지 잘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다이빙 대회를 열자.’ 해서 풍덩, 풍덩, 다이빙하는데 “왕이시여, 뭐든지 최고로 잘하는 왕이 한번 뛰어보소서.” 왕이 된 개구리가 주춤하니까 “우리 임금님! 임금님!” 하고 호응을 해준 거예요. ‘옛다 모르겠다. 왕이 모범을 보여야지.’ 하고 다이빙을 했는데 다시는 물 밖으로 못 나오고 그대로 죽었다는, 그래서 왕이 없으니까 다시 옛날처럼 그 개구리 마을은 평화롭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에요.
그 가사에 보면 내가 개구리의 왕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왕이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도대체 나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외치고 싶다. I cried, 외쳐버려요. 요즘 갑자기 그 팝송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닐 다이아몬드의 그 가사에서 인간은 나를 알아주는 곳만이 진정한 나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고향이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러한 심보가 오늘 요나 심보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시켰으니까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심판할 때 자기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뒤로 빠져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바로 그 인간성, 그 인간성마저 하나님께서는 파괴시켜 버려요. 그 요나의 인간성마저.
그래서 나중에 4장에 보면 요나가 자살하려 해요. 그냥 스스로 죽으려 합니다. 왜? 인간성이 파괴되었으니까. 마지막 남은 인간성은 바로 최측근, 하나님의 최측근이라는 선지자가 품고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성은. “그동안 하나님이 저하고 친했잖아요.” 이게 바로 마지막 파괴되어야 될 인간성이에요.
왜? 파괴되어야 할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마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몽땅 다, 하나님마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그게 진정한 심판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의인은 없어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그 심판받은 아들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없던 의인이 생겨버렸어요. 이것은 행함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은 의가 아니에요. 아무 일한 것도 없이, 값없이 의인 된 거예요. 이게 언약이에요. 이게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성경에 있으니까 요나처럼 모든 인간들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품새 모양새는 요한복음 20장 19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십자가의 의미가 뭔지도 몰라요. 그냥 ‘우리 선생님 당했다. 우리끼리라도 살자.’ 하는 거예요.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문들을 닫았더니. 우리도 동사무소에서 오지 말라고 교회 문 닫고 잠가버릴까. 문들을 닫았더니. 그러면 아무도 못 들어와야 되잖아요. 문을 닫았는데, 그런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지금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주고 그 가운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다시 말해서 “네가 원하는 고향이 아니고 주님이 계신 곳이 너의 새로운 고향으로 달라졌느니라. 너를 내 사람으로, 내 가족으로 받아들였느니라.” 그리고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리고는 “성령을 받으라” 22절에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다음에 23절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은, 의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요, 바로 제자들을 요나처럼 사용하셔서 요나가 했던 그 오해를 제자들도 똑같이 겪게 하시면서 요나가 도달하지 못한 그 레벨까지 제자들도 나중에 도달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 주께서 일을 다 벌여놓고 그냥 우리로 하여금 확인차 들어가게 하는구나. 확인차 하게 하시는구나.’ 오늘 본문에 요나가 나오는데 오순절 이후에 성령 받은 베드로나 사도바울이 만약에 이 일을 맡았다면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니느웨사람들아, 너희들은 이미 무너졌다!” 무너질 것이다, 가 아니라 이미 무너졌다. “너희는 이미 무너졌어.”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때는 “아멘, 하나님은 그리스도시고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심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받아들이면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심판받아도 싸다, 마땅하다, 가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가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은 십자가에서 같이 죽고 그 안에 누가 사느냐? 구원해주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실현태가 돼요. 그 말씀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바다같이 퍼져나가는 그 말씀이 성도 안에는 하나의 바닷물로서 출렁이고 있을 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심판 속에서 주의 구원의 말씀을 같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심판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 의가 없듯이 말이지요.
요나가 전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전하게 하십니다. 망할 것이다, 가 아닙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돼요.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아버지께 버림받고 또 버림받은 세상이라면 이 땅은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의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것처럼 모든 일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전개 시키고 처리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그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저희에게 성령을 주셔서 구원시켰기에 주저 없이 십자가를 통해서 심판과 구원을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