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강, 360) 고난과 사치, 정당한 반발 210720
녹취:이하림
360강-YouTube강의(고난과 사치 요한계시록 17:6)20210720-이 근호 목사
제360강, 제목은 ‘고난과 사치’.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기적을 동반한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나눕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기적이라 하고 인간이 해내는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자이다, 라고 확정 짓고 싶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또는 해내지 못한 것=기적,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후반부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보여주는 기적이 평소에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에요.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나타났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이 기획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예상한 게 아니고 놀라운 기적이죠. 기적인데 그 기적의 내용이 4절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요.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치스럽다 또는 사치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치가 기적입니까? 저런 인간이 사치스럽다는 것은 뻔히 다 아는 이야기죠. 너무 호사스럽게 과분하게 자기를 치장한다, 그것은 사치다. 분에 넘친다. 저것은 나쁜 짓이다. 이 정도는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이것을 기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세상에서 값비싼 옷감으로 옷을 해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지는 이것을 기적에다가 집어넣어요, 기적에다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기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신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두 다 기적의 일부를 원 없이 만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기적에 속해요. 그래야 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그들이 ‘큰 바벨론’ 또는 ‘음녀’라는 이미 그런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실상에 대해, 주님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모두 음녀에 속한다는 사실을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사치를 한다, 금 목걸이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 묶음 해서 명칭을 정할 때 그 명칭이 큰 성 바벨론이 되는 겁니다. 음녀가 돼요. 그러니까 세상이 좋아서 세상 것에서 희망과 낙을 누리겠다는 그것은 누가 봐도 기적이 아니죠. 인간이 돈만 많으면 누구나 하는 일인데 그것을 규정하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너희들은 음녀야. 그래서 너희들은 주님에 대해서 대척 관계이고 예수님의 맞은편, 반대편에서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 부류의 사람이고 지금 너는 그 속성을 발휘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 있잖아요. 그게 바로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요한계시록 16장 1절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그 다음에 나온 단어,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니까 저 사람들의 저런 짓은 심판받아 지옥 가는 짓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게 될 때 그게 바로 기적 아닙니까? 그게 기적이거든요.
만약 여러분들 집 안에 갑자기 금괴가 많이 들어오고 호사스러운 옷들이나 많은 현찰이 막 쏟아지게 되면 사람들은 ‘이것은 기적이다’ 이렇게 하죠. 좋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고 굉장히 감사할 겁니다.
역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충성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보는 눈이 있어 가지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갚아준다고 약속했지? 약속대로 너한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해줄게.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셔.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 좋은 쪽으로 기적을 해석하는데......
그런데 일곱 천사가 와서 행한 음녀에 대한 기적은 바로 심판이라는 거예요. 세상 것에 대해 여전히 미련이 있고 애착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이 기적에 의하면 음녀가 하는 짓거리를 본인도 지금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것을 곧이 곧대로 알게 된다는 것, 아니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어요?
내가 월급 좀 오르고 수입이 많다는 것,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것이고 그 사적인 것 말고 사적인 것을 완전히 둘러싼 총괄적인 것, 총체적으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눈이 열리고 주님이 보는 관점을 가지고 내가 나 챙기는 것 말고 나를 포함해서 세상을 한꺼번에 아는 것, 그게 어떻게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기적이죠.
그러니까 성령 받아서 곧이 곧대로 요한계시록, 이 말씀대로 되어간다, 현재 진행형이다. 말씀을 우리가 지키든 안 지키든 관계없이 말씀이 알아서 현실을 만들어내고 현실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안다면 아, 세상은 요한계시록 17장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구나. 아니 꼭 이렇게 되어야 돼요.
사치한 사람들이 환영받고 사치한 사람들이 대우받고 또 대우받는 사람들이 또 사치하겠죠. 그렇게 하고 세상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 편에 서고. 세상에 이것이 요한계시록 17장의 완성인 것을 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겁니까. 오히려 이대로 안 되면 이상하죠. 안 되면 이상한 거예요.
그러면 오늘 제목이 <고난과 사치>인데 사치가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고난을 받아요. 고난 받는 것이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이 좋다고 주님 버리고 사치하는 것도 실제로 벌어져야 될 일이라면 바로 그 곁에 실제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서 그들과 싸우는 일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주님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해,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성도는 없어요. 이 세상의 음녀와 가증된 적그리스도, 가증된 큰 성 바벨론과 어떤 식으로든 지금 싸우고 있는 중이에요, 가는 방향이 다르니까.
그래, 너 그런 것 있으니까 자랑스럽고 좋겠지? 네가 부자 되니까 부끄럽지 않지? 내가 보기에는 그게 더 부끄러운데? 라고 톡 쏘아서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이것 또한 기적이거든요.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또 달라졌을까.
세상 온 천하를 얻고도 그리스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온 천하보다 더 센 분과 연결되어 있고 계약관계가 성립되어 있고 그분과 더불어 있다는 것. 세상은 돈과 더불어 있지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있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361강-YouTube강의(정당한 반발 사도행전 26:23)20210720-이 근호 목사
제361강, 제목은 ‘정당한 반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성경에 나온 신앙인들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굉장히 착할 것이고 대들지도 않을 것이고 반항하거나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대인배이고. 누가 봐도 참 선하고 착한 얼굴을 가지고 늘 양보하면서 예수님이 가진 희생정신으로 살 것이다. 따라서 반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오해들을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들어가보게 되면 사도행전의 초반부터 그냥 성도가 아니라 뭘 받았어요, 하늘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내용은 성령 받은 사람들의 의식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의식을 첨예하게 대립적인 구조로 보여줘요.
성령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성령 받지 않으면서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들이 성경에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방금 세상 권력이라 했죠.
사람이 세상 권력을 갖고 있을 때에 아무리 점잖게 되려 해도 점잖게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의 권력은 인간을 거기에 맞춘 새로운 인간형으로 개조하기 때문에 권력, 뭐 그까짓 권력 버리지, 가 잘 안돼요. 권력 안에 이미 들어와 버리면 사람 자체가 권력에만 신경 쓰는 사람으로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 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비록 지금은 권력이 없지만 언젠가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권력의 맛이나 좀 보자, 소위 출세 좀 해보자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고 들러붙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사람 사는 게 뭐 그렇지 별 게 있느냐, 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옵니다, 성령 받은 사람. 그러면 이 성령 받은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안 맞닥뜨리고 그냥 따로이 일하는 게 아니라 늘 이렇게 자주 만나고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충돌이 일어나야 그쪽에서 성령 없는 사람이 속한 세계와 성령 받은 사람이 속한 세계가, 죽어야 알지, 가 아니고 죽기 전에 이미 확연하게 또렷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을 보실 때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보지 마시고 그들이 속한 세계가 사도를 사도답게 했고, 불신자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가 불신자답게 했구나, 인간은 본인의 의사나 본인의 결심 가지고 자기의 자리를 떨쳐버릴 수 있는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사도 일행들은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 못 해요. 그 속에 성령께서 하시는 대로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일부러 뭐 사도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어쩔 수가 없어요.
마치 바로 왕이 모세를 괴롭히려고 괴롭힌 것이 아니고 모세를 만났다 하면 마음의 강퍅의 도가 업그레이드 되서 자꾸 강퍅해지는 것처럼. 본인은 좀 당기는 척하다가 보내줄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그것도 지 마음먹은 대로 안 돼요. 열 가지 재앙을 다 받아야 돼요, 바로 왕과 애굽은.
일곱 개 받고 개과천선해서 세 개는 나중에 안 받고 뭐 그런 거 없어요. 열 가지 재앙을 다 채워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참 신기한 일이죠. 그리고 모세가 한두 개 하고 난 뒤에 ‘너희들 봐라. 우리 실력 있잖아. 우리 나갈란다.’하고 나간 게 아니고 열 가지 다 채워서 나가야 돼요.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주님의 일이지, 사적인 나의 포부나 희망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해서 희망 갖지 마세요. 그것은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은 실질적으로 되어야 돼요. 주님의 뜻과 주님의 의도가 우리를 덮쳐야지, 내 뜻과 내 기대와 내 희망과 내 의지가 나를 덮쳐봐야 그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보세요.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사울이라는 남자와 연계되어 있죠. 스데반이 죽을 때 옷을 지켰던 사람이 사울이었잖아요. 그 사울이 나중에 누구 되었습니까? 사도 되었습니다. 어떤 만남도 주님이 분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만남들로 다 주께서 알아서 일하시는 거예요.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일행이 잡히게 됩니다. 26장 23절에 보면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당시에 전도한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했어요. 정치적이다 이 말이죠, 사실은 그들이 정치적이지만. 그들은 비록 디아스포라(diaspora)여서 이스라엘 본토에 살지 못하고 각 나라에 이민 가서 흩어졌지만 흩어진 그들끼리라도 게토(ghetto)라 해서 유대인 단체를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줘야 하나님의 약속이 신빙성이 있어 보이니까. 내가 마지막 때에 너희들을 사방에서 다 모으리라고 되어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모으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타이밍 맞춰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딱 착륙할 때 그들은 다시 이스라엘의 완전체로 복귀가 되는 겁니다. 복귀가 돼요.
이것을 회복신학이라고 해요. 회복신학 많이 들었죠? 통일교부터 해서 한국교회 대부분이 회복을 이야기해요. 한 때 범죄해서 맴매 많이 당했지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약속을 약속대로 하실 것이다. 회복하실 것이다. 하박국에 나오는 것처럼 삼일 만에 부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내 기대에 부응해서 찾아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아주 훌륭한 믿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같은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집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 구원자가 이미 왔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은 그거에요. 너희들 몰랐지? 그 소리 못 들었지? 이미 구원자 왔어, 왔단 말이야. 왔는데 인간들이 무지몽매해서 구원자를 죽여서 돌려 보낸 거예요. 무슨 그런 큰 실수를 했느냐. 구원자를 못 알아봤다는 겁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하러 오신 분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겠어요? 회개는커녕 그러면 너나 죽어라, 해서 예수님 죽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성도들을 또 죽이고. 이제 오늘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죽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체포해서 재판에 넘깁니다.
넘길 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성령 받은 사도가 그 세상 권력과 부딪칠 때 고분고분 죽었느냐 아니면 정당한 반발을 했느냐? 정당한 반발을 했어요. 그게 바로 23절이었습니다. 아까 읽어봤지만 다시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인간이 열심히 율법 지키면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가 아니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열심을 내도 주님께서 안 살려주면 안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 이야기를 하나 마나에요. 왜냐하면 주께서 안 찾아오면 구원 못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백날 들어도 주께서 안 찾아온다면 이건 소용없잖아, 사람을 절망케 해도 너무 심하게 절망케 해버리죠.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했던 복음 전파의 취지입니다.
절망 좀 해라, 이 말이죠. 그동안 헛된 망상에 사로잡혔으니까 절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요. 뭐 선한 체하면서 준비도 많이 했어. 준비도 많이 했는데 그것을 말짱 소용없게 만드는 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절에서 그들이 제대로 말을 했죠.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정답이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보고 미쳤다 하니까 너희들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360강에서 ‘정당한 반발’이라 하는 것은 바로 복음은 주님처럼 그냥 참고 지내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건드려졌을 때에 정당한 반발이 나오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조용하게 믿다가 편하게 인생 살다 천당 갈란다, 하는 이런 꼼수 부리지 마시고요. 성령께서 그것을 용납 안 해요.
건드리면 정당한 복음만 나와야 돼요. 주께서 하시는 구원은 주의 일이지 우리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정당하게 이야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