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3 / 낯을 피함
낯을 피함
이근호
2021년 7월 7일
본문 말씀: 요나 1:3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하나님을 지역적인 신으로 간주했습니다. 신이 과장하는 지역이 따로 정해져 있기에 그 지역만 벗어나면 그 신의 영향력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신 개념입니다. 신은 특정 지역에 국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인간들이 구상한 세계관에서 나온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그 어떤 인간치고 세계관이 없는 자는 없습니다. 이 세계관이 어디서 어떻게 조성될까요?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고 세상을 살면서 선과 악의 지식에 입각한 세계관을 조성했습니다. 그 세계관이란 선과 악을 나란히 견주고 대조하고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게끔 세계관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않는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를 놓고서 구성한 겁니다.
악이란 선의 비율이 적은 것을 뜻한다고 여기고 선은 악의 비율이 적은 것을 뜻한다고 있습니다. 회계장부상 대차대조표가 가능한 것처럼 선과 악을 마주 대하면서 자신의 판단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오늘날 평소의 행보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나 이번 시험에 합격했다” 라든지 혹은 “나 이제는 병원에서 퇴원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것들도 선과 악의 대비에서 나온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합격은 선이요 상대적으로 불합격은 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면 선으로 여기고 병든 상태를 악한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겁니다.
즉 인간의 눈으로 선과 악이 되도록 세상을 재배치고 질서를 잡아놓는 겁니다. 그래놓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대자연’이라고 말합니다. 평면적인 대지를 일단 구성하고 그것과 연속적으로 이어서 하늘까지 연결합니다. 그렇게 되면 별과 달이 있는 하늘은 대자연의 일부가 되고 천장을 구성합니다.
인간들은 그 천장에서 신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마치 어항 안에다 모조품으로 만든 용궁 모형을 설치하는 발상을 발휘해놓고는 지상에 자신의 자리와 그 신의 자리가 연결되고 연속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민족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언약’이 개입됩니다. 언약은 이방민족의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저주하고 공격합니다. 이방민족의 신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선악체계와 결코 단절되지 않는 신입지다. 즉 지상은 인간들은 본인들이 뭐든지 선과 악의 체제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규정하시려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본인이 살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즉 본인이 구성한 현실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선/악의 규정이 가름되고 그것이 정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즉 자신이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규정한 자연세계관과 현실마저도 ‘옳았다’고 평받고 싶은 겁니다. 세상나라는 다 이런 식으로 언약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있지도 않는 신을 신봉하며 살아도 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언약이 주어졌기에 그것이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요나가 자신의 낯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용납하십니다. 그러한 의식 자체를 발췌하시고 그러한 요나의 태도가 얼마나 이방적인 가를 알려주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방식이 과연 이스라엘에게서 가능할까요? 출애굽기 33:20에 보면,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된 하나님께서는 직접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언약 안에서 그들의 죄와 언약의 기능과 연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4:22에 보면,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율법)을 통해서 죄인되게 하시는 작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 곧 하나님의 형상’은 죄인들을 함께 하심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시편 51:9에 나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요나의 잘못은 자신의 낯을 따로 챙겼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낯을 챙길 수 있듯이 요나 자신의 낯도 따로 멀쩡하게 챙길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게 이스라엘에게 가능하다고 요나는 여겼던 겁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어야 다시 사는 식으로 언약이 원칙있게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나의 인식 자체는 평면적이고 2차원적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적 형편을 다시 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아무리 지역을 벗어나도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을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보복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요나는 언약 안에서 폼 나게 되는 것을 기대해서는 아니됩니다.
언약은 주님의 얼굴, 곧 언약 기능으로 완성한 나라를 성취해 내기에 2차원적인 평면 세계에서 성도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언약 작용에 의해 장차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체적으로 분기점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아버지의 낯을 떠나야 하는 역할을 감당했어야 했습니다. 요나도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경우를 겪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에서 죄 용서가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얼마나 육적인 것을 다시 점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눅취:오용익
2강-요나 1장 3절(낯을 피함)2107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3절입니다.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은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선지자도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자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땅에만 작용하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역에 국한해서 작용하시는 하나님, 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 그런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 주님이 하늘로 승천했잖아요. 마태복음 28장에 오게 되면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 그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월등하게 능가합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는 어느 곳이든 주의 이름 부르는 곳에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가능해진 신약시대라면 구약은 오늘 본문처럼 특정 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품에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통용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특정 지역에서만 하나님께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그 외 지역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 신약 입장에서 볼 때는 구약 사람들이 잘못됐다, 그것도 신앙이냐, 촌스럽다, 애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냐, 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성령 받고 성도가 된 입장에서 우리도 세상 사람이었을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바로 이렇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처럼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 출발점은 모두 다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신의 선악 지식에 준해서 세상관, 현실관을 재조정을 했어요.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면, 선한 영역과 선하지 않은 악한 영역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자연 세계 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선과 악의 대조가 가능하고 비교가 가능한 그러한 현실 세상이 인간에게는 굉장히 적합했던 거예요.
왜 적합하냐 하면,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저것은 선이네, 이것은 악이네, 판별하고 그렇게 판단하고 분석할 수 있을 때 선과 악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나 자신은 여전히 옳다는 것, 정당하다는 것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라고 하지만 인간은 그걸 못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별하면 되잖아요,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려면 본인이 있어야 되고, 본인이 있으려면 본인이 계속 살아가야 되고, 본인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것은 선이고 악이고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본인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걸 유지하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를 뭐로 보느냐? 죄로 보시는 거예요. 선악을 알게 했다. 그것도 죄일뿐더러 선악을 알게 하고 난 뒤에 파생되어 있던, 그렇게 해서 현실과 세상을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용도로 확장되는 그 모든 것도 죄의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눈에 보이는 두 개가 대조가 되는 식으로 세상관을 형성하다 보면 그게 뭐냐 하면 ‘평면적사유세계’라 평면적 사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면이라 하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전쟁할 때 독일사령부에서 모형 만들어놓고 작전 지시하는 것처럼 평면이니까 2차원적이지요, 2차원적 인식세계를 딱 대비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여기는 남의 나라, 여기는 육지 여기는 바다, 모든 것이 그렇게 평면적으로 구분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면 우리는 남의 나라에 간다. 이것도 평면적 구조지요. 이 세상에 하늘이 있다는 것도 상당히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평면도 구조의 연속입니다.
1차원적인 경계선과 막을 포함해서 1차원적인 선, 2차원적인 평면 그 평면을 말아 올리는 거예요. 여자들 머리 말아 올리듯이. 안 그러면 월드컵 축구장 올라가듯이. 그렇게 말아 올리게 되면 그것이 지붕을 이루지요. 지붕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이 선악체제 이 사고방식이 천장까지 다 이르는 거예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이 점점 더 확신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두는가? 신은 이 선과 면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확장되어서 체육관처럼 만들어진 그 천장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그 옆자리에 신을 둬버리면 신이 사시는 그 세계와 지상에 있는 나와 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말이지요. 끊어진 것이 아니고. 둘러쌌으니까.
그렇게 되면 마치 신은 뭐와 같으냐 하면, 어항 속에 있는 용궁 모형 같아요. 어항 속에 용궁 모형 해놓고 산소 방울 뽀글뽀글 올라오는데 물고기들이 어항 속에서 왔다 갔다 하잖아요.그렇게 어항 속에 용궁모형도 있고 해초들도 있지요.
바닷속에 있는 용궁에서 사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빤히 볼 수가 있지요. 이것은 하나님 모셔야 되는 곳. 그게 뭐냐? 신은 지역적인 신이다.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그 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신의 효과가 조금 줄어든다. 이게 선악 지식을 아는 모든 인간,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 다 이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모 집사님과 울산의 울주 민속박물관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 보니까 음력 2월 초하루에 누가 오느냐 하면, 연등 할머니, 사투리로는 할맛네, 그렇게 하는데 연등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거예요. 음력 2월 초하루에.
그래서 그 할머니는 하늘에 있는 신인데 인격화되어서 가신(家神) 가정의 신으로서 그날만 방문해요. 시간 맞춰 오는 거예요. 올 때 거기에 연등 할머니, 연등할맛네를 모시는 방법이 장독에다 촛불을 켜놓고 물도 떠놓고 습자지에 성냥 그어버리면 습자지가 이상하게 중력을 이기면서 공중으로 올라가요.
순간적인 에너지의 기화는 주변의 열의 상승효과가 있다는 물리적 반응 같은 것은 잘 몰라도 그냥 막 올라가요 올라가. 올라가게 되는데 연등 할머니, 이게 신이거든요. 그 비는 기도내용이 동영상으로 민속박물관에 나와 있어요.
무슨 내용으로 하느냐 하면, 소가 젖이 잘 나오게 해주시고 그리고 장독대에 연장들을 둬요. 낫이라든지 여러 연장들을 둬서 1년 내내 농사짓는 동안 연장 때문에 다치지 않게 해달라. 그리고 소 값 제대로 받게 해달라. 그리고 며느리하고 딸하고 안 아프고 일꾼으로서 집안일 잘 하게 해달라.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그 복이 자기에게 오라고 욕심을 내요. 머리를 막 싸맨다고요. 음력 2월 초하루에 내려와서 연등 할머니가 15일 내지 20일을 머물다가 올라갑니다. 그곳이 울산 앞바다, 간절곶 아닙니까? 거기에 큰 태풍이 막 일어나요.
동영상에 보면 연세 80 넘은 할머니가 증언하는데 신에게 드릴 떡 하려고 하는데……, 그 할머니 증언이 이렇습니다. “짐승이 뭘 아노?” 짐승이 와서 떡하려고 했던 곡식을 쪼아먹는데 곡식 쪼아먹는 새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영험하다는 겁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농약 먹은 것 같은데 연등 할머니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특정 시간대 특정 지역에, 장독대, 울주 연등 할머니가 왔다가 가버리잖아요. 그렇게 되면 신과 인간의 계약은 완료가 된 겁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율법을 보고 구약 이스라엘을 보세요. 항상 하나님께서는 그 지역 신이에요. 지역 신으로 작용한다 그 말이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지역 신, 우리가 아는 것은 천지 어느 곳이든 아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것에 관여한다고 신약시대의 우리는 알고 있는데 왜 구약에는 지역 신인가?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자기가 짜놓은 삶의 현실관 그 자체가 지역적이에요. 2차원적이에요. 평면적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지금부터 설명해드립니다.
그렇게 내가 있는 곳에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도록 판단하는 자기 자체를 정당화시키고, 의롭다고 여기고, 그래서 자기 존재하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하나님께서 고발하기 위해서, 죄로 규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간은 평면적 사유세계는 타고났으니까요.
그래서 구약이나 또는 현대인간들이 선악을 적용 시키기에 아주 적절한 2차원적 사고방식을 딱 갖춰놓고 악은 뭐냐, 선이 모자라는 것이 악이고 선은 뭐냐, 악의 비율이 적은 것이 바로 선이다. 마치 회계장부의 대차대조표처럼 옆에 붙어 있어야 선도 드러나고 악도 드러나야 그걸 판정하는 나의 판정은 정당해지거든요.
이 2차원적 사고방식은 단순히 오늘 본문처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다시스로 빠져나가 다른 지역으로 가는 그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평소에 하는 모든 말 삶의 내용 속에 그게 다 나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2차원 의식이 어떤 것이냐 하면, 나 이번 시험 합격했어, 이런 것. 이게 대차대조가 가능해요. 시험합격과 떨어짐에 바로 옆에 딱 붙을 수가 있어요. 대조하고 비교가 되도록. 합격하면 이것은 선이고 불합격하면 악으로 간주 되는 겁니다.
또 무심코 하는 말이 “엄마, 나 이제 다 나아서 퇴원했어.” 이런 것. 건강하면 선이고 건강하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하면 악이 되는 거지요. 선과 악이 나란히 붙어줘야 내가 판단하는 선과 악은 정말 제대로 된 선과 악의 판별이며 그 판별을 할 수 있는 주체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정당함이다, 라는 생각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와서 우리는 이제 어디든지 주님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생각할 때 한번 여러분이 그 생각이 정말 신약성경의 성령 받은 생각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차원이 확정되어서 3차원의 입체적 구조로 땅과 하늘을 세워 놓았을 때에, 2차원과 3차원이 단절이 일어나지 않고 연결된 상태에서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거기에 모시고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서 막 주기도문 외울 때 그게 진짜 신약성경에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없습니다. 그것은 연등 할머니하고 똑같은 거예요. 연등 할머니 섬기는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오늘 본문 요나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나라에 속한 선지자거든요. 언약 나라의 선지자가 역시 2차원적 평면 사유세계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하나님 계신 곳 따로 있고 그 따로 있는 영역 구역을 피해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2차원 구조를 하나님께서 허락을 합니다.
허락을 함으로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선지자, 다시 말해 언약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하나님은 어떤 차이 나는 하나님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2차원 구조, 선악적인 체제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를 소멸시킬 방안이, 연등 할머니나 이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된, 연결 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는 그 방안이 없어요. 방안 없습니다.
연등 할머니 잘 모셨고 좋은 관계 유지해서 이제 음력 2월 20일에 태풍이 불면서 하늘로 도로 올라갔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는 뭐 별문제 없지요. 나의 이 땅에서의 선함이 하늘에서의 선함과 통한다고 생각할 거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요나는 뭐냐 하면, 2차원적 구조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요나가 하나님 계신 곳, 하나님 있다고 여기는 곳에서 낯을 피해서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 도망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방치하지 않았으면 애초부터 도망 못 치도록 해야 돼요. 처음부터.
그런데 도망치도록 허용을 한다는 것은 2차원적 평면 사유가 인간의 선악에 기초한 그 현실관이 실제로 하나님의 언약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단절된, 끊어진 사유체제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식으로 보여줍니까? 못 보여줍니다.
도망친다는 것, 도망치게 해놓고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그 도망치는 것을 만약에 애초부터 허용하지 않는다면……, 문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요나가 이렇게 다시스로 도망가거든요.
다시스라 하는 것은 스페인이고요, 여기 니느웨라 하는 것은 이라크입니다. 이라크의 바다하고 스페인의 바다가 달라요. 여기는 지중해고요. 여기는 인도양이잖아요. 그 사이에 이라크라는 거대하고 긴긴 육지가 있고요. 그래서 요나가 어디로 가느냐? 욥바, 텔아비브지요, 이스라엘의 상업 도시, 그 욥바에 갔을 때에 ‘마침’이라는 말이 나와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도망 못치게 할 것이면 요나가 욥바에 갔을 때 사흘 밤낮 기다려도 배가 안 오게 하든지, 다시스로 가는 배가 안 오든지 배가 왔지만 엔진이 고장 나게 하든지 이렇게 못 가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가 도착했는데 돈 주고 다시스로 가는 배,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지요, 다시스는 니느웨와 가장 먼거리에요.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스페인입니다. 거기가 다시스에요. 너무 멀어서 소문으로만 듣던 동네에요.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낯을 피한다는 말을 할 때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그런 세계관을 요나가 평소에 자기 세계관으로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나의 존재로 보는 거예요. 언약적 기능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기 존재해 계셔요.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면, 나는 하나님하고 막역한 사이고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도망쳐도 하나님께서 날 성도라고, 신자라고 인정하겠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도 의롭지만 나도 역시 의로워, 하는 식으로 간 겁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내 존재를 비교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선하고 나의 존재도 선하고.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있어서 그런 존재와 존재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언약적기능을 보여줘야 돼요. 언약적기능이라 하는 것, 하나님의 얼굴에 있어서의 언약적기능에 대해서 시편44편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하나님의 얼굴은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얼굴은 아무도 인간들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셨거든요.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시는가 하면, 시편 44편 24절에 보면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자기 백성이 고난과 압제를 당할 때 주의 얼굴을 그때 나타내시는 거예요. 하나님 존재와 자기백성 존재가 끊어졌을 때 끊어졌다는 그것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데 그 얼굴이 뭐냐? 자비와 긍휼의 얼굴이에요.
그렇지 않고 존재로서 자기가, 내가 하나님 앞에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멀쩡하다, 나는 정당하다, 선과 악을 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언약적기능 때문에 그래요.
시편 51편 99절에 보게 되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주의 얼굴이 하는 기능, 하나님의 언약이 하는 기능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에 대해서만 죄가 있는 곳에 그 죄를 없애주시고, 날라가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죄를 사라지게 하시고, 소멸시키고 우리 속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기능을 주의 얼굴 되시는 분이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언약적기능을 발휘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실패했을 때, 끊어졌을 때 거기 그사이에 관여하고 개입해서 연결시키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언약적 기능으로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게 되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했지요.
지금 요나가 평소에 자기가 어떤 세계관, 어떤 현실관을 가지고 살았느냐 하면, 하나님 낯 따로 챙길 수 있고 나의 얼굴, 나의 명예와 나의 위상과 나의 가치도 따로 챙길 수 있는, 하나님 명예도 지키고 나의 명예도 따로 챙길 수 있는, 하나님 낯도 챙기고 내 낯도 챙길 수 있는, 그 둘 다를 챙길 수 있는 연결된 세계관을 요나는 갖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위대한 것 내가 잘 아니까 내 얼굴도 좀 챙깁시다, 해서 주님의 얼굴 피하면서도 내 얼굴 따로 건재할 수 있는,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허용이 되는 세계관, 평소의 생활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그게 우리 모습이거든요. 그게 연등 할머니 섬기는 모습 아닙니까? 연등 할머니 올 때 종이 태워서 반길 때 그때 그 행동, 그 태도를 하는데 있어서 주인공은 연등 할머니가 아니에요. 그때의 언약의 상대자가 누구냐? 본인이에요.
자기가 떡 해드리고, 촛불 켜드리고, 맑은 물 떠 놓고 기도 열심히 할 때 연등 할머니 음력 2월 20일 되어서 하늘로 원위치해서 올라가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뭐냐?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자랑스러운 종교인 되잖아요. 할 것 다 했으니까.
주님의 얼굴, 면상 살려주고 동시에 누구 면상도 산다? 내 면상도 사는 거예요. 왜? 한 게 있으니까. 자랑스러운 종교인 되잖아요. 자랑스러운 종교인. 요나의 이 사고방식이 오늘날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요. 요나가 뭘 잘못했느냐 하면, 요나가 판단 미스를 한 것이 아니에요. 요나가 자기 판단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자기 판단이 뭐냐? 선악체계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 를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을 그런 식으로, 내가 선도 악도 아는, 그 둘 다를 알 수 있는 그것으로 딱 맞춘 거예요. 맞추니까 이게 평면적 사고가 되는 거예요. 2차원적 사고.
그저 동네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예요. 미국에 이민 가고, 미국 살다가 또 캐나다로 이민 가고, 또 다른 핑계 대면서 뉴질랜드로 가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전부 다 지평적, 평면적 사유에요.
아마존이라는 미국의 인터넷 쇼핑회사 회장이 세계에서 제일 부자라고 해요. 그런데 그 아마존이라는 상표의 그 cignature를 보게 되면 글자로 a,m,a,z,o,n 이걸 붙여서 amazon,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글자 밑에 화살표가 a부터 시작해서 z까지 이어져 있어요. 아마존 상표 보세요. a부터 z까지 세상 모든 것을 사고팝니다, 그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마존은 인터넷, 평면이에요 평면. 이 지구 끝까지 안 파는 것이 없고 온 세상 살 수 있는 물건은 여기에 다 있습니다. 인간들은 왜 그런 평면적 사고 밖에 못하느냐? 그게 여성들 머리 올리듯이 평면을 밀어 올려서 입체가 되었는데 입체가 되어봤자 뭐 연등 할머니처럼 하나님이 거기에 앉아 계시면 되고 그렇게 해서 연속성이 유지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땅도 그래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국가가 전부 다 2차원적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들 보면 전부 다 ‘스탄’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요. 제일 중앙에 있는 게 카자흐스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스탄, 스탄이라는 것은 땅이라는 뜻이거든요. 페르시아말로 땅.
그 밑에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것은 진짜 찐, 찐, 진짜 진실된 사람들의 나라, 땅,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그 동쪽에 있는 것은 키르기스스탄, 키르는 산악이라는 뜻이고 기스, 산악에 사는 사람들의 복수 즉 다양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산다, 스탄, 땅.
그 밑에 있는 것은 타지키스탄 ‘타지’라는 것은 황금, ‘키’는 머리, 머리에 황금을 쓴 사람들이 사는 땅, 스탄. 그 밑에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라는 민족이 사는 땅. 그 밑에 파키스탄 파키스탄이라는 것은 고결한 사람들이 사는 땅, 파키스탄. 그 옆에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 신성하다는 뜻이고 메니는 사람, 신성한 사람들의 땅, 투르크메니스탄, 다 되었지요 뭐. ‘스탄’이라는 것은 땅만 있으면 사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1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여기 신약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족보에 해당 되는 사람들, 신앙계열, 이 노선에서 천국 성도 된 사람들의 스탄, 땅은 뭐냐?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2차원 평면은 뭐냐? 이것은 죄 그 자체가 선악체제에서 나왔기 때문에 선악체제 따먹고 선악체제에 준해서 자기 잘났다 하는 그런 인간이라면 이 지상의 삶과 더불어서 이 땅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2차원적 세계의 사람은 언약적기능에 의하면 단절되어 있어요.
인간의 선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상상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해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선악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작해낸 거예요. 지어낸 거예요. 그래서 믿음으로 다 죽었지만 죽으면서도 그들은 언약적 기능 때문에, 단절되어 있는 기능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의 기능이 뭐라 했습니까? 죄를 씻어주는 거지요.
그 하나님의 얼굴, 그 얼굴이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천국이잖아요. 언약의 완성, 얼굴은 하나님의 언약적 표현이니까 그 하나님의 언약으로 기능해서 완성 시킨 나라는 지금 인간의 2차원적 입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삼층천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약속의 땅이에요. 그걸 히브리서에서는 11장 13-16절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2차원적 평면 같으면 다시 돌아갈 고향이 있지만 성도는 이 땅에서 고향 없음을 증명하는 사람이에요. 땅에서 태어났으면 이것은 육이거든요. 육으로 태어났으면 육으로 저주받아야 되지요. 천국은, 하늘나라는 육으로 해서 육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뭐 이민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 영이라는 것이 뭐냐? 모호하고, 라면 끓일 때 올라오는 수증기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은 예수님을 영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영적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육이 일으킨 사건을 영이라 하고 인간의 육이 일으킨 것을 가지고 육이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육신이 일으킨 것을 영이라 하고 우리의 육신이 일으킨 것은 육이고요. 선악체제에서 일어나는 것은 육이고 생명체제에서 일어나는 것은 영이고 그런 겁니다.
어떤 분이 전화해서 저에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데 “신령한 심령이라는 것이 뭡니까?” 자꾸 묻기에 제가 간단하게 “그냥 마음입니다, 마음.” 왜냐하면 자칫하면 신령이라 하면 우리 육안에 신령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아니고 육은 그냥 육이에요. 육이 되었든 혼이 되었든 영이 되었든 그냥 육이에요. 포기하세요 그거.
왜? 그 육은 나와 관련된 혼과 영과 육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같이 죽어 마땅한 거예요. 성경 언어를 해석하는데 육적인 한계를 보여주는데 불과한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대표자 요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원래 해야 될 기능은 언약적기능이에요. 존재가 아니고 언약적 기능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얼굴에 나타난 언약적인 효과, 죄사함의 긍휼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 안 받아도 되는데 구원 받았습니다. 그 기능을 해야 될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이. 그런데 이스라엘이 땅 있겠다, 그만 2차원적 사고방식으로 선지자부터 해서 사고방식이 엉망이 되어서 옆에 있는 세상나라 모방 다 했습니다.
감히 어떻게 발상이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어떻게 이게 가능해요? 어떻게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피해서 갔잖아요. 그건 이스라엘이 한번 당해봐야 아, 우리의 기능이라는 것이 끊어져야 마땅한, 처음부터 우리는 끊어져야 마땅한 존재, 이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작용에 비중을 두면서 그게 분출되게 되어 있어요.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봤자예요. 마치 어떤 말썽꾸러기 청소년이 서울에 있다가 부모 몰래 도망을 쳐서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강원도 깊은 산골 촌락에 갔는데 때가 되어서 배가 많이 고플 거잖아요. 배가 고프니까 식당에 가서 “아주머니, 여기 국밥 하나 주세요.” 하니까 자기 엄마가 나오면서 “오늘 너 많이 굶었지?” 하고 주방장이 되어서 식사대접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어떻게 내가 내 임의로 갔는데 거기서 엄마가 마중을 나오는 식이에요. 가출해봐야 아는 거예요. 가출을 해봐야. 그렇다고 또 여러분이 가출하지는 마시고. 탕자가 되어봐야, 가출을 해봐야 이게 평면적, 존재적 입장에서 선악적인 체제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거예요. 끊어져야 되는 거예요. 끊어져야. 처음부터 우리는 선악과 먹는 순간부터 끊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끊어졌는데 어떻게 이어졌는가? 이게 요나가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는 하나님 안에 내부의 분기점이 있어요. 하나님과 끊어져야 될 하나님의 분기점을 요나가 구약의 사람으로서 장차 올 메시아의 기능을 미리 보여주는 것 그 메시아 기능을 요나가 지금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내부가 분열되는 거예요. 분기점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이 지상에 오시는 거예요. 끊어지는 거예요. 마태복음 26장 38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죄 안에 있는 이 하나님, 메시아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그 의식과 사고방식은 이 정도로 하나님과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하는 이유가, 내 뜻은 이 잔을 마시지 않는 거예요, 이 고통을.
요나는 그걸 몰랐고 나중에야 압니다. 선지자노릇 한다는 것이 메시아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그것은 생각 못하고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의사가 수술하는데 간호사가 심심하다고 나 놀러 가도 되지요, 하고 빠져나가는 것과 똑같아요.
수술은 의사가 혼자 하고 나는 그냥 보조니까 그냥 쉬엄쉬엄 게임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올게요, 그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 수술하는,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아픔에 요나는 참여 안 하려고 도망친 겁니다. 설마 심판하는데 아플 리가 있겠나,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그 아픔은 요나가 직접 강원도 촌으로 도망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는 그 안에 장차 오실 주님, 메시아의 아픔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요나 본인이 그걸 경험해야 될 임무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짊어주신 거예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요나에 대한 보복이 아니에요. 요나는 뭘 생각 못했느냐? 폼나게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폼나는 게 아니잖아요. 성도가 이 땅에 서 폼나게 사는 것은 성립됨이 없어요. 그리고 성도에게는 어떤 보복이 없습니다. “강원도까지 도망친다고 고생했지? 국밥 한 그릇 말아먹어라.”
어디에 계시더라도 주님께서는 언약적 기능을 해야 될 성도에게는 반드시 자기 언약을 놓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든 주님의 십자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는 겁니다.
시편 51편 9절을 잃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죄로 끊어진 이 상황을 주님의 얼굴, 주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 메시아가 아니면, 메시아의 희생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요나가 고생하는 것, 요나의 자기의 판단을, 요나는 자기의 희생물로 제공되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뭘 안다는 그 판단을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십자가에 양보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토속신앙, 민속에 나오는 가짜 신처럼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단절이 이어지는 가운데서 주의 백성인 것을 세상에 나가서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