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강, 358강) 열림, 슬픔 210706
녹취:이하림
358강-YouTube강의(열림 시편 136:10)20210706-이 근호 목사
제358강, 제목은 ‘열림’. ‘열림’이라는 말은 열리기 전까지는 닫혀 있죠. 예를 들면 절벽 같은 곳에 문이 있습니까? 절벽 같은 데에 문이 없죠. 문은 따로 있지, 이런 벽에 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할 때 사람들은 대충 그 내용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그냥 구원한대.” “어떻게?” “그냥 구원하시겠지.” 그러고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어서 천당 간다’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데 구체적인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 문이 없어요. 길이 없어요. 벽이에요. 벽인데 그냥 돌진하는 겁니다. 그냥 진격하는 거예요, 벽인데. 누가 황당하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갈등을 일으키겠어요? 모세는 구원이 있다고 이야기했고 막상 그들이 세상 살았던 경험에 비춰볼 때는 완전히 벽이에요, 절벽이에요. 길이 없어요. 뭐 길이 있어야 가죠, 길이 아예 없는데요.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사 길을 내었다’라고 하죠. 그러나 구약에서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서 걸어와서 뒤돌아 보니까 그것이 그들의 최초, 처음의 길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길이라는 것은 그들 눈앞에 깜깜한 겁니다. 깜깜해요.
그래도 구약은 평면적이라서 걸어가면 길이라도 생기잖아요. 신약의 구원은 그것보다 더 심합니다. 왜냐하면 어둡기 때문에. 이 세상을 어둠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둡기 때문에 어두운 가운데서 길을 찾는다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몰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구약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구약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었나. 오늘 강의 제목 그대로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는 그 현장에 와서야 열어줘요, 현장에 와서야.
고린도전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죠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막다른 길로 의도적으로 집어넣고 여기는 길이 없다고 그들은 분명히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와보니까 막다른 그 현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거기서 또 하나의 길이 배시시 열리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피할 길’이라고 해요, 피할 길.
그것은 인간이 미리 예상한 게 아니에요. 인간의 예상은 길이 없는 게 맞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깜깜이’라는 말이 있죠, 깜깜이. 괜찮은 프로젝트를 제시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될 건데 갈수록 희망거리가 안 생기는 거예요. 없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예측하고 예상하고, 그것을 인간의 믿음이라 하는데 그 ‘믿습니다’를 하늘나라에서는 거부합니다. 인정하지를 않아요.
시편 136편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에 굳이 애굽의 장자를 치는 그런 분란이라 할 수 있는, 말썽의 여지가 있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유발시킬 필요가 없고 조용하게 애굽 사람들 눈치 못 채게 “여기 나와, 나와, 나와.” 그저 속삭여가면서 “가자”하고 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가게 될 때에 히브리인들이 애굽 사람들이 따라올 것을 걱정 안할 수 있겠죠. 마음이 평온한 가운데 그 애굽에서 나갈 수가 있잖아요. 평온한 가운데, 마음의 불편함이 없는 가운데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그 전에 아홉 가지의 재앙을 때렸다는 말은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특히 바로왕으로 하여금 분노와 격분을 최극치로 지금 상승시켜 놓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아요. 구원받더라도 곱게 조용하게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를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원은 구원대로 챙기고 싶은 겁니다, 그 당시 애굽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그 이야기를 좀 더 알기 위해서 시편 136편에 연이어 나와요, 16절에 보면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놓고 17절에 보면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다음 18절,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게 광야에서 일어났던 일이거든요. 19절에,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20절에는 “바산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에 가는데 그렇게 꼭 분탕, 분란을 일으켜야 되겠어요? 그냥 조용하게 가시지, 자꾸 시비거리가 유발되도록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본인의 믿음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인들의 본인의 믿음으로. 믿음 앞에 ‘본인의’ 믿음이죠. 본인의 믿음으로 본인의 소망으로 본인의 사랑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준비된 그 나라에 합세할 수가 없음을 확실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조용하게 빠져나와도 되는데 일부러 자극을 유발하는 거예요.
말썽꾸러기 청소년 아이가 부모님 주무실 때 머리맡에다가 ‘이 불효한 아들을 용서하소서’ 편지 하나 써놓고 까치발 해서 신발도 곱게 챙겨가지고 이렇게 들고 캐리어 끌지도 않고 보따리 싸서 문도 조심히 열고, 개 만나면 “쉿!”, 고양이 만나면 “쉿!”, 그럼 고양이가 멀뚱해서 저 주인이 왜 저러나, 하겠죠, 그렇게 해서 철문도 곱게 열고 이렇게 나가야 되잖아요. 가출하면서 걸리면 안 되니까 까치발해서. 왜냐하면 그 쪽이 힘이 세니까 내가 가출할 때 나를 강제로 붙잡아버리면 탈출이 불가능한 거예요.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이 그렇게 혼자 곱게 나가면 될 걸, “불이야!”라고 고함지르고 말이죠, 온 집에 불 다 켜놓고 지 나가는 걸 광고해가지고 나 가출한다는 것을 어른들 마음 다 상하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요란스럽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도 잠 안 깼다 하면 꽹과리 치고 막 냄비 가지고 두드려 가면서 지 나가는 걸 꼭 광고해야 되겠어요? 나 나가는데 붙들어라, 이런 식입니까? 그러면 나가는데 불가능이 더 심화되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에요. 나로부터의 구원이에요. 내가 구원에 가능한,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구원은, 내가 어떤 의도를 가졌건 그 의도가 오히려 주님의 구원의 발목을 잡습니다.
‘나 잘된다’ 라는 식의 구원은 없습니다. 나 이제 내 뜻대로 하게 되었어,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 그 과정 속에서 내가 구원될만한 자격자가 아님을 절실하게 느낄 때, 그 때 구원은 그 어둠 속에서 주님 쪽에서 배시시 열어준, 열림이에요, 열어준 그 문이 미리 이 못난 나를 위해서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 불가능 한 것을. 죄인 주제에 감히 어딜 넘봐? 천국을 넘봐? 말도 안 되지. 그런데 이 십자가 쪽에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긍휼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그게 바로 결과적으로 주어진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359강-YouTube강의(슬픔 마태복음 26:42)20210706-이 근호 목사
제359강, 제목은 ‘슬픔’. 인간들에게는 근원적으로 슬픔이 있어요. 슬픔이 있기 때문에 모든 활동이 좀 억지스러워요, 자연스럽지를 못하고. 그러니까 행동 하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늘 불안 속에 있어요. 불안정하고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슬픔, 그 슬픔과 예수님께서 품고 있는 슬픔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했다는 대목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만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오고 그 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언하실 때도 주님께서 그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굉장히 슬퍼하시는 그 대목도 나와요.
특히 겟세마네 기도할 때, 마태복음 26장에 보게 되면 인간적인 슬픔과 예수님의 슬픔의 차이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의 슬픔은 세상에서 주는 슬픔이 아니고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으로서 죄인으로서 가져야 될 슬픔을 체험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슬픔의 원인도 모르고 어디서 오는가도 몰라요. 그냥 막연하게 그때그때 순간순간 자기 뜻대로 안되면 막 슬퍼하죠.
그러나 주님은 인간하고 비교 안 될 정도로 근원적이에요.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슬픔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슬픔 안에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 안에 다 담겨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그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슬퍼하는지 너희들은 모르잖아. 이 야박한 세상아, 너는 내 사정도 모르고 내가 인생 살면서 이렇게 힘든 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식으로 불만과 불평을 하죠.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다 아시고 그 슬픔을 이미 예수님도 같이 먼저 체험을 했어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슬픔에 참여가 되게 되면 주님의 기쁨에 이미 참여한 자라고 확정될 수가 있어요.
이 말은 만약에 개인적인, 사적인 슬픔에만 겁을 내서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결국 무엇과 관련이 없느냐 하면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기쁨에 우리가 같이 놓여있지 않다는 뜻이 되어버려요. 주님이 주시는 그 기쁨은요, 주님의 겟세마네 슬픔, 십자가 슬픔을 통과해서 얻어낸 기쁨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반칙을 해서 주님의 슬픔도 모르고 주님의 고민도 모르고 그냥 열매 따먹듯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하니까 이게 내가 원했던 기쁨이야, 하고 넌지시 그 기쁨을 내 것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기쁨을 가져오는 이것은 소유가 되고 우리가 소유라는 생각을 갖고 행동에 나서는 것을 ‘행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행함.
인간의 행함은 나중에 결과적으로 나에게 괜찮은 것을 내 소유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모든 인간은 행하게 되어 있어요. 그 행함은 행동만 행함이 아니고 미리 생각하는 것도, 사고하는 것도 인간의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인간의 숨이 붙어있는 한 한시도 안 행할 때가 없어요. 안 행할 때가 없다는 말은 한시도 뭐든지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그러한 의도가 철회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뭘 해도 저거 좋은 건 내 것, 주섬주섬 내 것으로 모으는 겁니다. 그런 인간이 성경을 봤다, 교회 나갔다. 또 뭘 하겠어요? 가만 있지를 않죠. 행하겠죠. 기도를 통해서 좋은 걸 내 것으로 만들든지 헌금을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하여튼 내 것을 수북하게 모아 놓으면 그게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채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해소해보려고 성급하게 성경에 나오는 괜찮은 것들을 억지로, 항상 억지에요, 억지로 내 것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두 아들을, 그러니까 세 명이죠,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겠죠, 세 명을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갔습니다. 데리고 간 이유는 외부에서 남들이 보면 같이 기도하자, 이 말입니다. 그런데 같이 기도하러 데리고 갔는데 기도했습니까? 같이 데려간 세 명의 제자들의 모습은 딱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미리 당겨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기도하게 하려고 데려간다’ 라고만 생각했지, 주님의 사적인 고민과 슬픔에 참여하라고 데려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겟세마네 기도는 네 명이 갔지만 결국 누구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하시죠. 그렇잖아요? 예수님만 했죠? 그들은 자고 있으니까.
이 말은 모든 제자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예요. 기도는 오로지 예수님만 할 수가 있다, 그겁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그것을 세 명의 제자와 더불어서 비교시키는 겁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기도할 줄 안다고 여길 게 아니겠습니까? ‘주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그걸 묻지는 않을 거예요. 아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같이 옆에서 기도하자.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 기도 흉내 내겠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이 잘 되게 해주시고 예수님 일 잘 되게...... 하죠. 예수님 일 잘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치더라도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수님이 겪는 그 슬픔과 고민이 누락된 거예요. 그게 빠져버린 거예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딱 한 자로 이야기합니다. 이 ‘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이 잔을 내가 마시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은 이 잔이 굉장히 가혹한 거예요.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혹독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통과하지 아니하면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제자들에게는 무엇이 빠져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신 쓴 잔이 빠져 있습니다. 쓴 잔이 없는 채 두 시간, 세 시간 금식 기도해봐야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셨던 그 잔, 그 잔을 마실 수 있도록 기도를 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도해봤자, 뒤에 예수 이름으로 주문 갖다 붙여봐야 그건 다 헛방이에요.
그러면 우리 제자들은,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먼저 구원의 기쁨을 줘요. 쉽게 말해서 구원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구원을 주시고 그 다음에 인생을 살면서 무엇 때문에 고민하느냐 하면, 자기 생계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니고 자기 교회 교인 수 없다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셨던 그 쓴 잔, 인간이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죄, 이 죄가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그 고민과 슬픔을 겪게 만드는 그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 기도.
그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 이제 주기도문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겠죠.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불가능하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가 되도록 주의 기도 응답대로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거예요.
아, 주님이 나의 이런 행동 때문에 슬퍼하셨구나. 주님이 나의 이런 행동 때문에 고민하셨구나.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가져간 예수님의 고민을 체험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그러면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슬픔 가운데서 또다시 주님께 감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