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교체(출애굽기 4:25) / 210705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1 - 의의 교체
21,07,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잉태치 못하므로 !!
오늘은 교재 12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창세기 25장 21절 말씀이 나오는데,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가 잉태를 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잉태' 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간단한데, 즉 새로 태어나는 장소라는 말이죠.
(창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그렇게 잉태치 못하게 함으로서 한 쪽에서, 즉 육에서 내려오는 아담의 죄를 끊어버리는데, 그런 육의 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시비를 거신다는 겁니다. 육의 자리를 끊어버린다는 말이죠. 인간의 육신은 잉태할 능력이 있어서 자꾸만 육이 육을 잉태하니까, 인간의 죄가 대물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육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그만 끊어버림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죄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육,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는 장소를 만들어진다는 말이죠. 즉 육을 끊어버림으로서 새롭게 잉태하는 장소로 만드시는 일을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 내가 옳다 !!
그러면 육의 자리, 즉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죄의 자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옳다" 라는 것인데, 이게 바로 죄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내가 옳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옳다" 라는 것을 빼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네가 옳은 것이 아니라, '너' 라고 부르는 내가 옳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 라고 불러주실 때, 그렇게 '너' 라는 불러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옳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옳은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너'와 '나' 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즉 이스라엘 속에 계속해서 동행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너' 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너' 라고 불러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런데 하나님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 라고 나오게 되면, 그러면 이것은 계속해서 죄를 끌고 가게 된다는 겁니다.
* 치매에 걸린 노인네 !!
예를 들어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동네의 쓰레기라는 쓰레기는 다 집으로 가지고 오는데, 그러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집에 가서 주워온 그 쓰레기를 다시 버리는 일을 한다는 말이죠.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치매에 걸린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어머님, 왜 자꾸만 쓰레기를 집으로 가지고 오십니까?" 라고 물으면, 시어머니는 "쓰레기를 가지고 오는 내가 옳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며느리는 다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하는데, 즉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어머니가 보기에 옳지 않다는 말이죠.
이것을 "치매에 걸린 노인네가 쓰레기를 집으로 가지고 온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노인네가 따로 있고 쓰레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쓰레기와 그 치매에 걸린 노인네를 하나로 합쳐버리는데, 그러면 쓰레기가 쓰레기를 계속해서 가지고 오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 행위에 대해서 "내가 옳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그렇게 옳다고 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데, 왜 죄가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옳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말이죠.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는 나타나야 하는데, 즉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은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는 의가 아닌데, 즉 옳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인간은 아담의 죄를 품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옳음과 자기 자신을 엮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다. 따지지도 마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내 돈을 가지고 내가 쓰는데, 네가 왜?"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아무튼 자기가 옳다는 말이죠.
물론 인간은 따지고 보면 자기가 옳은데, 그것은 새로운 의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라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서 새로운 의, 이것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하는데, 이 복음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의가 없으니,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에게서 나온 의, 자기에게 의미를 주는 의, 만약에 새로운 의가 없다면 무조건 그게 맞다는 겁니다.
* 교회란 무엇인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 교회란 무엇인고 하니까, 육에서 나온 기존의 의를 죄로 보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의를 하나님의 의로 보아서, 이 둘을 교체하자고 해서 교회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해서 복음을 받아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목사가 이렇게 "여러분의 의는 진짜 의가 아니고, 그것은 완전히 엉터리이고, 주님의 의가 참된 의입니다" 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자기 의를 죄라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여기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사가 모두 다 담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목사의 설교는 "여러분의 역사는 죄 덩어리입니다. 그러니 버리세요"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엄청 더러운데,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라고 하면 말이죠. 말을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모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치매에 걸린 노인네들과 같은 쓰레기들이 모여있다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깨끗한 스티로폼 !!
치매에 걸린 노인네가 쓰레기들을 가지고 오는데는, 그게 그냥 아무 것이나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치매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자기 기준이 있는데, 즉 '깨끗한 스티로폼' 이라는 말이죠(ㅋㅋ).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제가 온 몸으로 체험을 해봤는데, 더러운 것은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깨끗한 택배 포장지, 깨끗한 비닐 등등,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람들이 이미 버려놓은 것인데, 깨끗해봐야 그게 얼마나 깨끗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깨끗하게 목욕한 자기 자신을 더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역시 쓰레기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자꾸만 역사를 강조하는데, 즉 "내가 이 정도였어" 라고 하면서 자기의 과거를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까, 잉태치 못하게 함으로서 새롭게 잉태케 하는 장소를 위주로 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 새롭게 잉태가 되어야 !!
그렇다면 이제 여기 교재 122페이지에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싶은데,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하셨다" 라고 하는 의미를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죄 때문인데, 인간의 육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죄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거절을 하신다는 말이죠. 물론 구원받을 백성에게만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아이를 낳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로 잉태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해서 거절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새롭게, 즉 하나님의 의로 새로이 잉태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공식이 나오는데, 인간의 잉태는 죄에서의 잉태인데, 그 잉태는 하나님이 거부를 하시고, 인간은 죄밖에 없으니 아무리 낳고 낳아도 계속해서 죄만 나오는데, 즉 계속해서 죽음만 나온다는 겁니다. "네가 죽어도 살리라" 라고 하는 그 삶, 즉 영생이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죽음만 나온다는 것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 죄와 죄의 만남 !!
오늘 새벽에 서울 중량구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고 하니,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길에 누워있었는데, 그런데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하는 음주차량이 술을 마시고 누워있는 사람을 깔고 지나가서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술과 술의 만남인데,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죄와 죄의 만남으로 보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옳음과 자기 옮음의 만남인데, 이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가족이고 직장이고, 결국 마지막에는 그게 국가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국가가 영생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뉴스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지 간에 말이죠.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국가는 영벌, 즉 영원한 형벌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영생과 영벌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옳다" 라는 것에서 "주님이 옳다" 라는 것이 유지되는 세계로 옮겨간다는 것이죠. 그 작업을 하나님이 하시는데, 잉태치 못하게 함으로서 말이죠. 얼마나 친절한지 모르는데, 그러니 자식이 있더라도 자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옳다" 라고 할 때는 여기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나의 일상적 규칙이 옳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은 평소에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하던 대로 살았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나의 원칙' 이라는 것인데, 즉 "나의 원칙은 옳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겁니다.
* 나의 이상적인 모델 !!
그러면 "나의 원칙은 옳다" 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모델이 있는데, 자기가 볼 때는 저 사람처럼 사는 것이 굉장히 옳게 보이는데, 그래서 "나는 저 사람처럼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델이 문제인데, 왜냐하면 그 모델 속에는 예수님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사도바울도 없고 스데반 집사님도 없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디에서 그런 모델을 찾습니까?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든지, 즉 같은 죄인을 모델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에게는 일상적인 규칙이 있는데, 그러면 그 규칙이 옳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그 사람을 점점 더 닮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옳다" 라고, 그렇게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떤 사람을 모델로 측정해서 이미 만들어놓았다는 것이죠.
* 이전의 '나', 새로운 '나' !!
그렇다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쉬운데, 여기에 이전의 '나', 그리고 주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나'가 있다는 겁니다. 이 이전의 '나' 라는 것은 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평소에 하던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은 내가 점검해볼 때 언제나 옳았다. 왜냐하면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먼저 이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따라서 하면 옳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전의 '나' 라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나'의 기준과 모델은 누가 되는고 하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천국이 누구의 나라인고 하니,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들어갈 나라가 바로 그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델도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저는 쓰레기이고 죄인입니다 ??
물론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은 겁부터 먼저 내는데, "목사님, 저는 못합니다. 저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면 정말로 곤란합니다. 저는 아이도 3명이나 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ㅋㅋ). 그러면서 "예수님만 훌륭하시고, 저는 쓰레기이고 죄인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핑계인데, 그럴 때는 쓰레기와 죄인을 배웠답시고 들먹거린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나오는고 하니, 이전의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로운 '나'가 좋은 줄도 모르는데,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집착을 합니까? 이전의 '나', 이것을 어려운 말로 '행태'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여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왜냐하면 "나는 옳다" 라고 하는 재미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틀리게 되면, 그야말로 살아가는 보람이 그만 사라진다는 말이죠. 그런 생각 때문에 이전의 '나'에게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 표백과 살균 !!
특이 이 이전의 '나'에는 무엇이 투입되는고 하니, 그게 바로 유한락스라는 말이죠. 이전의 '나'를 관리하는 방법이 바로 유한락스를 붓는 것인데, 이 락스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표백기능과 살균기능이란 겁니다. 즉 "이전의 나가 이 정도로 정갈하고 깨끗하다"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락스를 들이붓는다는 것이죠. 흠도 티도 없이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유한락스를 말하다가 보니 제가 있었던 대구의 어느 교회가 생각하는데, 그 교회의 권사님이 말이죠. 매일같이 큐티를 하면서 자기를 표백하고 살균을 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혹시나 자기에게 누가 흠을 잡을까 싶어서, 자기에게서 성경과 맞지 않는 행동이 나올까 싶어서, 아예 작정하고 자기 방어에 나선다는 겁니다.
자기를 표백하고 살균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데, 계속해서 그렇게 하다가는 쓰러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새로운 '나'에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데, "나는 옳다" 라는 것이 이런 후유증을 계속 남긴다는 겁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많은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잉태지 못한 자를 통해서 구원하신다" 라는 하나님의 일관 뜻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 따로 마련된 자리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내가 옳다. 옛날 것만 줍는 내가 옳다" 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 "내가 준비한 것은 따로 마련이 되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과거사는 주님이 받지 않는데, 따라서 '잘된다' 라는 것이 "내가 잘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주님이 잘된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게 기본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잘되는 것은 잘된다고 여기고, 그리고 주님이 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신경을 쓸 것은 없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기가 잘 되는 것과 주님이 잘 되는 것이 같이 갈 수가 없는데, "내가 잘 된다" 라는 것을 주님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성경은 "주님이 잘되는 것만 잘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몰아세우는데, 이것을 어려운 말로 '지향성'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제를 버리고 오늘도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고 하니, 특정한 방향으로 자기 과거를 잘라내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만큼 잘났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야. 가자, 어서 가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는 여기서 정말 옳게 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어제의 그것을 버리게 하시고, 오늘 치를 또 다시 새롭게 당겨주신다는 말이죠.
* 쟁반에 담겨서 !!
그러면 '잘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잘되는 쪽으로 당기시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잠시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겠는데 말이죠. 여기에 쟁반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자꾸만 잊어버리는고 하니, 자기가 쟁반에 담겼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울산강의에서 그것을 '종지기' 라고 했는데, 작은 접시라는 말이죠. 바로 이 쟁반이 움직이는데, 그런데 우리는 쟁반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 정도면 하자가 없어. 남에게 욕을 얻어먹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역시 나는 나에게 기쁨을 줘" 라고 하면서, 그만 자기가 자기에게 기쁨조가 된다는 말이죠.
'나' 라는 존재가 그만 기쁨이 되니, 자기 앞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구약성경에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받쳐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 이들은 본래 갈 바를 모른다는 말이죠.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데, 하지만 이렇게 갈 바를 몰라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의 자리가 미리 와서 쟁반처럼 받쳐주어야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주님의 나라에 골인이 된다는 말이죠.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그러니 자기가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동을 한다는 겁니까? 쟁반이 이동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 쟁반을 '주님의 자리' 라고 하자는 겁니다. 혹은 '주의 이름'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이 쟁반이 곧 주님의 이름이고 주님의 자리라는 말이죠.
* 예수 안, 성령 안, 새언약 안 !!
이렇게 컵이 쟁반 위에 있을 때, 이것을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 안' 이라고 했는데, 이와 똑같은 말로서, 성령 안, 새언약 안, 십자가 안, 복음 안,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책 안'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특히 이 '새언약 안' 이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썼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폐한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좀 설명해보자는 것이죠. 새언약 안이라는 것은 율법을 폐하는 것인데 말이죠.
(히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처음부터 강의한 것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하면, 기존의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게 죄가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바보같이 가만히 있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죠. 항상 무엇을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자기가 선택했고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옳다는 것이죠.
* 가마솥 안 !!
집안에 일이 많아서 사람을 좀 부르자고 해도 듣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의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속하는고 하니, 성경에 보면 '아담의 후손' 이라고 하는데, 이게 좀 어렵다는 말이죠. 그래서 쉽게 바꾸면, '가마솥 안'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 가마솥 안에 오글거리면서 들어있는데, 모두가 다 똑같다는 말이죠.
우리가 모두 가마솥 안에 들어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목사님, 저의 인생은 왜 이토록 힘이 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가끔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왜 가정생활이 이렇게 힘들고, 그리고 직장생활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느냐는 겁니다.
* 밀려와서 !!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면 되는데, "너는 가마솥 안에 들어있어"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네가 힘든 것이 아니고, 힘든 것이 너에게 밀려와서 그렇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네가 나쁜 짓을 해서 힘들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옆 동네에서 나쁜 짓을 해도, 그 여파가 자기 동네에 퍼진다는 겁니다.
이게 세상인데, 자기 혼자 바르게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옆 동네서 난리가 나면 우리는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특히 주식투자를 해보면 피부로 느끼는데, 칠레의 불안한 정치상황이 자기가 산 주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죠. 남미에 있는 길다란 나라인데,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도 있고 말이죠(ㅋㅋ).
주식투자를 하면 직장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데, 회사책상에 앉아서 항상 거기에 신경을 쓴다는 겁니다. 자기는 작은 코앞에 있는 것만 하지만, 거기에 작용하는 변수가 수 만가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일일이 다 살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나비효과라고 하는데, 먼 곳의 조그마한 것이 자기에게는 큰 파장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사업을 새로 시작했는데 그만 금융위기가 터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유망한 사업이라고 여겨서 좀 무리하게 대출을 받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런데 IMF 사태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잘못해서 터진 것이 아닌데,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 아, 코로나 !!
지금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이게 중국의 우환에서 발생했다는 겁니다. 처음에 우리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여겼는데, "중국에서 전염병이 하나 또 터졌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충분히 관리가 될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를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지금 코로나 때문에 경영위기에 봉착한 교회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 헌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교인들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헌금도 하지는 것이 좀 찜찜했는데, 그런데 두 달, 석 달 동안 나가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과 복을 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특히 헌금과 관련해서는 말이죠.
* 주님은 '나'에게는 관심이 없어 !!
아무튼 가마솥인데, 그러니 제발 "내 잘못으로 인생이 꼬였다" 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은 '나' 라고 하는 자와, 그 '나'의 그 어떤 행동에도 관심이 없는데, 다만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나'를 '너' 라고 부르는 주님의 일, 여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이 주님의 일에 꽂혀있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꽂히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되면 주님이 없기 때문에, 즉 쟁반이 없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컵에 꽂혀서, 여기에 한 평생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소비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곱게 죽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강의를 하다가보니 노래가 하나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이승기가 부른 노래에 보면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너라고 부를래 ♬"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주님께서 '너' 라고 불러주는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나를 '옳다' 라고 증명해줄 표준모델을 철거하자"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그러한 표준모델을 두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치고 있는 쟁반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위에 놓여있는 컵만을, 즉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다시, '잉태치 못한' !!
그러면 주님의 시작은 무엇인고 하니, '잉태치 못한 것' 인데, 이것은 없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그 없는 것을 가지고 주님은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대중가요를 가지고 오페라로 만드는 것이 뮤지컬인데, 여기에 무대가 있고 배우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음악을 담당하는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대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뮤지컬에는 코러스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합창단이 있어서 대사에 맞추어서 노래를 불러준다는 겁니다. 배우가 대사를 하고 나면 무대 뒤에서 합창단이 쏟아지면서 나오는데, 저는 이것을 '관계망' 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이죠.
* 관계망 !!
무슨 말인고 하니, 잉태치 못한, 즉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없는 것에 관계망이 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예수님이 준비되어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왜 관계망인고 하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 필요한 관계망들이 다같이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에 관계된 여러 가지 망들, 즉 관계망들이 있는데, 천사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고 모세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 관계망들이 한꺼번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있는 예수님의 그 관계망 속에 하나의 일부로 편입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약 때부터 예수님과 더불어 아담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고 모세도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주의 이름과 관련된 인물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인물들이 준비되어 있다가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데, 이것을 언약적 '관계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그물망, 혹은 거미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또한 그 거미줄에 걸려든 자들이 바로 천국의 백성들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 덕분에 천국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바로 관계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도 이 '관계망' 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렵게 들리지 싶은데, 그런데도 제가 왜 굳이 이런 말을 사용했는고 하니,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이것은 하늘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나라라는 겁니다. 이 세상나라에 국가라는 것을 두고, 여기에 이미 관계망이라는 것이 다 형성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릴 때, 몸에 닿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띄어서 하는고 하니, 이게 제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관계망이 없는데, 인간은 자기가 생각할 때는 자기가 전부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쪽에서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찾아든 관계망에 대해서 인간은 선뜻 반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택배기사가 와서 주문한 물건을 줄 때, 그러면 "거기에 두세요" 라고 하면 두고 가면 되는데, 그런데 "아가씨는 참 예쁘네요" 라고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 집에서 누가 주인공입니까?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런데 자기 쪽에서 결정하지 않은 관계망을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그러면 112에 신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가씨가 화가 나서 "당신 같은 사람은 죽어야해" 라고 했는데, 그만 그 택배기사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전복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만 택배기사 없어서 자기가 주문했던 다른 물건이 그만 나흘이나 뒤에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흘동안 자기는 손해를 봤습니까? 이익을 봤습니까? 손해를 봤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관계라는 것는 "나에게 이익인가? 나에게 손해인가?" 라는 것을 계산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지금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무조건 옳은 일이다" 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택배기사의 경우에 선을 그을 때 간격을 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뭔가 보이지 않는 관계망이 있지만, 자기 손에 닿게 되어서 가지고 오면 자기 것이 되고, 그렇지 않고 밀면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예를 들어서, 그것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합시다. 거기에 가는 것이 신이 나는 겁니까? 힘이 드는 겁니까? 외지에 간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있던 그 관계망의 지점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베트남 전쟁터에 가면, 모기도 많고 습도도 높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전쟁터에 가지 않으면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국가에서 가라고 하면, 가야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국가라는 관계망 속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무리 옳다고 여겨도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옮음을 어느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국가에서 가라고 하면 가는 것이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시베리아에서 집까지 걸어서 !!
2차대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독일군 장교가 포로가 되었다는 겁니다. 스탈린이 그 포로를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광활한 시베리아는 개발을 해야하겠고, 그래서 시베리아 탄광에 집어서 일을 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 시베리아에서 독일의 자기 집까지 걸어왔다는 겁니다. 12년 만에 말이죠.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란의 국경을 통해서 탈출을 하게 되는데, 물론 거기서부터는 삼촌이 마중을 나와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갔지만 말이죠. 수용소 측에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거시서 탈출을 하다가는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얼어죽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얼어죽지 않고 탈출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고생을 누가 시켰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 인생이 옳고, 그래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진다고 하면, 그런데 누가 자기를 수용소에 집어넣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독일정부에서 자기를 장교로 만들어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그리고 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은 소련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 인간은 이미 관계망 속에 !!
그러니 이 세상은 인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가마솥이기 때문에, 보다 큰 힘을 가진, 그것이 권세인데, 그런 관계망이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국가라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홍콩 사람들이 국민소득이 굉장히 높은데, 물론 지금은 좀 떨어졌지만 말이죠. 영국의 자금이 그곳으로 모이고 해서, 금융업이 엄청 발전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취직을 해서 사람들이 다들 잘살았다는 말이죠. 국민들은 나라가 영국에서 중국으로 바뀐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국가가 바뀌어도 자기들에게는 돈이 있고, 그 돈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중국으로 넘어간 뒤로 상황이 만만하지 않는데,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너무 잘살면 재산을 빼앗기에 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관계망을 국가가 그만 박살을 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국가라는 가마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옳다" 라고 하면 국가가 가만히 두지를 않는데,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 "나는 군대에 가기 싫어요" 라고 하면 감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국가에서는 좋은 말로 구슬리는데, 하지만 막상 군에 가서 사고가 나면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네 팔자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팔자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태어난 곳이 국가인데, 성경을 그 국가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국가가 권세의 관계망 속에 이미 놓여있다는 말이죠. 따라서 여기 안에서 "내가 옳다" 라는 것이 보장되는 수 있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 국가와 그 권세 !!
다시 말해서, "나는 옳고 싶은데, 그런데 그런 나의 옮음을 증명해줄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영생과 영벌은 누가 정해주는고 하니, 그것을 자기가 속해있는 국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비롯해서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그렇지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모두들 도망을 쳤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자기가 알아서 도망을 친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겁이 나서 도망을 친 겁니까?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세인데,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니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나의 하나님입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라고 말은 하는데, 그런데 국가가 "어이, 저리가!"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러니 "내가 너라고 불러주는 그 나라만이 옳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해서 그 옮음을 지탱하거나 지키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것이죠. 즉 "내 결정은 옳다. 내 판단은 옳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즉 "내가 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내가 찾으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쓰레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옳다" 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죄인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 주님의 관계망 !!
그러면 주님이 준비하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주님의 관계망인데, 우리는 무엇만 실감이 나는고 하니, 국가라는 관계망, 국가라는 법, 그리고 모든 사법체제, 이것만 우리는 실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육신이 있으니 말이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이 10만원, 단체로 모이면 300만원, 처음에 이런 것이 나올 때 교회가 얼마나 공포를 절감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목사들이 벌벌 떨었는데, 심지어 신호등을 고치려고 경찰차가 교회 근처에 와있어도, 자기는 나가지 못하고 사모님을 보내서 경찰들이 왜 왔는지 알아보도록 했다는 말이죠(ㅋㅋ).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느꼈든 공포감인데, 12제자들이 그 시대을 통과하면서 온 몸으로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국가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주님이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살려준다는 말이죠. 그것을 그들은 말 따로, 지식 따로, 그리고 몸이 느끼는 실감 따로, 그렇게 따로 따로 느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옳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죄 없는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없는 내가 왜 이렇게 몸이 아파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규칙 때문이란 겁니다. 그러니 그 규칙을 버려야 하는데, 그런데 그 규칙을 자기가 옳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 주님의 시간 !!
이제 교재 123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 중간에 보면 '주님의 시간'이 나온다는 겁니다.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이것이 '지향성' 인데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가 "내가 옳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주신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네가 옳은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해도 옳은 자리는 따로 있는데, 그런데 너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이 세상 권세만을 실감하고 있으니, 내가 친히 주님만이 옳다고 하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겠다" 라고 하시면서, 지향성으로 땅기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를 보고 하늘로 한 계단 씩 올라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안심을 해도 되는데, 주님이 오셔서 빈손으로 올라가지는 않으신다는 겁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 !!
어제 어떤 분이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는데, "요한복음1장에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간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나다나엘이 정말로 표백을 하고 살균을 제대로 한 깨끗한 사람입니까? 그것이 아니지 싶은데, 목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응용해보면, 주님의 관계망에는 죄가 없는데, 즉 의인들만 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죄가 있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뮤지컬 코러스에 속한 그 관계망 속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향성이니까 주님이 먼저 데리고 가시는데, 그래서 주님이 "나다나엘아, 너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라고 규정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즉 정해주셨다는 말이죠.
여기서 접시를 다시 등장시켜야 하겠는데, 간사함이 있다면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주님, 저는 간사함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접시가 간사하지 않아야 하는데, 즉 주님이 간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자신이 간사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나다나엘에게 언급하신다는 말이죠. 즉 주님 자신의 속성을 나다나엘에게 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나다나엘은 주님의 속성을 받게 되는데, 그게 바로 관계망이라는 말이죠. 자기 관계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계망 속에서 간사함이 없는 것으로 엮어져있는 것인데, 그런 주님의 관계망 속에 나다나엘을 포함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가 곧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51절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하는데, 즉 메시야라는 겁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이스라엘 속에 있는 천국의 씨앗 !!
인자가 곧 이스라엘인데,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누구인고 하니까, 야곱이라는 말이죠. 그 국가 단체를 이스라엘로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인자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속에 있는 천국의 씨앗, 혹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작업인데, 우리 속에서 주님이 규정하신 것을 발굴하고 채굴해나간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비트코인이라는 말이죠. 아담에 속한 죄인 속에서,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님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을 키워서 천국의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주님이 친히 관계망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사함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좋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네가 하는 모든 일을 내가 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을 내가 다 흡수할 게" 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로 하시겠다는 겁니다.
* 피로 구원받고, 피로 저주받고 !!
이것을 컵과 쟁반으로 이야기하면, 컵이 하는 모든 일을, 여기 컵 밑에 구멍을 뚫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십자가로 받아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의 피가 모든 언약을 다 이룬다는 겁니다. 모든 죄가 섞여야 피가 되는데, 피가 없는 곳에는 사함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피가 있으려고 하면 죄가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거기에서 죄를 쏙 뽑아내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뽑아낸 그 죄에다가 주님의 약속된 피에 섞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피로 구원을 받고, 반면에 믿지 않으면 피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벌은 예수님의 피로 결정이 되는데,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그게 십자가와 부활로만 이어진다는 겁니다. 아담이 옳은 것이 아니라, 즉 "네가 옳은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피를 중간 매개로 해서 바꿔치기를 한다는 겁니다.
* 영화 '언드시저 2' !!
계속해서 교재 123페이지를 보면, 여기에 '언드시저 2' 라는 영화 이야기가 나오는데, 스티븐 시걸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라는 것이죠. 최신영화는 아닌데 말이죠.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범죄자가 열차 전체를 다 탈취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승객들은 인질이 되어있고, 핵폭탄을 가지고 돈 거래를 하려는 범죄집단에 열차가 강탈을 당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돈을 입금시키지 않으면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핵폭탄을 미국의 주요도시에 발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범인들이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협박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정의의 사도인 스티븐 시걸이 등장하게 되는데, 마침 그가 어린 조카와 함께 그 열차에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범인들을 하나씩 다 조져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을 성경적으로 해보면, 인간이 지구라는 열차에서 악마의 인질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주님이 지구에 올라타서 악마를 일일이 다 처단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 열차 안에는 스티븐 시걸의 아주 어린 조카가 타고 있었는데, 여자아이인데 그 아이도 아주 용감하다는 말이죠.
자기 삼촌을 믿고 그 흉악범들 앞에서도 "너희들, 까불지마" 라고 하는데, 마치 주님을 믿고 설치는 사도바울처럼 여겨진다는 겁니다(ㅋㅋ). 이 세상 권력을 향해서 사도바울은 얼마나 담대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은 상당히 복음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내가 옳다" 라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인데, 즉 주님이 잡아당기는 과정 속에서는 우리는 음악과 영화와 정치 등등,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만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만 발굴하면 되는고 하니, 주님이 이 세상을 처단하시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시는 요소만 찾아내게 되면, 그게 바로 찬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하는 일이 좋다고 하지도 말고 나쁘다고 하지도 말고, 우리는 그 속에서 복음을 끄집어내면 된다는 겁니다. 주부가 살림을 살아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 시간상의 모든 존재를 다 심판을 해버리신 주님 !!
아무튼 그렇게 주님이 열차에 올라타서 이 시간상의 모든 존재를 다 심판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것, 즉 영생이라는 것은, 지금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주님 쪽에서 작업이 들어올 때 새롭게 생기는 단어가 바로 '산다' 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단어가 있기 이전의 모든 것은 살아도 그게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 된다는 말이죠.
스티븐 시걸이 범인들을 심판을 함으로 해서 어린 조카가 살아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나는 살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와서 살려주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오늘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옳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이 옳았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컵이 옳은 게 아니라 쟁반이 옳았다는 것인데, 즉 주님의 자리가, 십자가가 옳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이것을 하나 믿고 목숨을 바쳤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탁기를 돌려서 빨래를 하면서도, 여러분 자신이 스티븐 시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심판자, 혹은 구원자가 될 수 있는고 하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내가 옳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옳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파견근무를 한다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순교를 한다고 하면서 아프간을 갈 필요도 없는데, 일상생활에서 주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제 오후예배를 드리면서 설교시간에 "천국은 즐기는 곳이 아니라 고마워하는 곳이다" 라고 했는데, 고마워하는 자들을 찾으면 된다는 겁니다. "오늘도 이렇게 복음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고마워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25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출애굽기 4장 24절, 25절, 26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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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학서적을 아무리 보고 논문이나 주석을 봐도 그 이유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써놓은 것을 보지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편인 모세를 왜 죽이려고 합니까? 자기 동업자를 왜 죽이려는 겁니까? 죽이려면 처음부터 죽이지, 애굽으로 가라고 해놓고 가는 도중에 왜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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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입니다" 라고 했는데, 이 또한 무슨 미신적인 행위입니까? 갑자기 쓰러지면 심방 박동기를 사용하든지 해야 하는데, 왜 이러한 이상한 짓을 합니까? 제3자인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던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희한하게 효과를 보는데, 양피를 던지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았다는 말이죠. 십보라는 피를 하나님에게 던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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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애굽으로 쳐들어가는 할례언약 !!
여기의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죽이려면 처음부터 죽이지, 애굽으로 가라고 해놓고 가는 도중에 왜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 죽여도 되는데, 그런데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나오게 해놓고, 다시 애굽으로 보내는 길에서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할례언약을 애굽에 보내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모세가 아니라 할례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을 애굽으로 보낸다는 말이죠. 그래서 모세의 개인적인 복수심은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데, 모세는 "에이 씨, 내가 옳았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라고, 그렇게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모세를 애굽에서 쫓기게 만들어놓고, 40년 이후에 다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는 것은, 그렇게 애굽전체를 박살내는 것은 모세의 복수심이 아니고, 거기 애굽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가 없다는 말이죠. 즉 죄만 있는 곳에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 육이 끊어진 자만 천국에 !!
그러니 예수님을 자기 일상과 엮어서 "주님,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라고 하면 곤란한데, 주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언약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모세를 통해서 할례언약을 애굽에 보내서, 할례가 없는 쪽을 할례가 있는 쪽에서, 할례라는 것은 육에서 끊어진 것인데, 그러니 육이 끊어진 자만 천국에 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라는 겁니다.
이 접시가, 즉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왜 필요한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이 세상은 "내가 잘났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내 돈을 내가 쓰는데, 당신이 왜?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옳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옳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게 옳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피 흘림만이 옳은데, 그런데 우리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인데, 하지만 주님의 모델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개인적인 관계망에 정신이 팔려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옳습니다" 라고 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이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맞는 것인데, 그런데 교인들이 왜 싫어합니까? 물론 요즘은 그런 목사도 드물지만 말이죠. 제 정신이라면 그런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불의한 청지가 되어야 !!
어떤 사람이 '클로바' 라는 상표로 장갑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래서 대동교회에 다니면서 헌금을 많이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교회의 장로까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공장에 불이 나서, 채권자들 때문에 지금은 베트남에 도망을 가서 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외부적으로 대동교회에서 보게 되면, 처음에 장갑사업에 잘 될 때는 하나님의 축복인데, 그런데 공장에 불이 나서 그만 홀라당 다 날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불의한 청지기가 되는 것이란 말이죠. 어떻게 불의한 청지기가 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대동교회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죄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과연 헌금을 하겠느냐는 말이죠. 자기의 옳음에 대해서, 그것을 자기도 알지만 남들도 제발 좀 알아달라고,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산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복수심인데, "나만 잘났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성공해도 복수심이고, 물론 실패하면 복수심이 더 강렬해진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이 "나만 잘났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나보다 못났어" 라는, 그런 더러운 심보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죠. 자기만 잘 되어야 하는데, 같이 잘 되면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 예쁘고 예쁘고 예뻐야 !!
오랜만에 동창생들이 모이면, 물론 모임에서는 온갖 소리를 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남는 것은 하나인데, "누구의 아내가 예뻤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죠(ㅋㅋ). 한 번 예쁜 아내는 영원히 예쁜 아내라는 겁니다. 남자들은 처음부터 한결같은데,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예쁘고 예쁘고 예뻐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남자의 지조인데, 그런 남자의 지조를 무시하지 말라는 겁니다(ㅋㅋ).
우리는 이 세상의 관계망 속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또한 벗어날 마음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돈을 잘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하면, 그러면 그게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것이고, 그것을 남들이 알아주겠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죠.
* 할례언약 !!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애굽 사람들아, 너희들이 할례언약을 받았어?" 라는 것인데 말이죠. 출애굽을 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자들에게는 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이,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차돌을 취해서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상 경험이 있는 상식적인 아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합니까? 얼른 집으로 달려가서 심장 박동기를 가지고 오든지 해서 모세를 살려내야만 한다는 겁니다.
모세가 지금 쓰러졌는데, 그러면 십보라는 모세를 어떻게 살려내야 하는 겁니까? 십보라의 경우에도 '산다' 라는 것과 '죽는다' 라는 것을 결정짓는 경험이 자기에게 있는데, 사람이 쓰러지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물론 그 당시에는 심장 박동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험상 심장을 누르든지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보라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인생경험을 모세에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지금 모세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누워있는데, 자기 아들의 고추 끝을 잘라서 모세에게 던진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 아들과 부모 사이에 비언약적인 관계망, 즉 하나님과의 관계망에서 있어서 뭔가 소홀함이 없었는지, 그것을 아들을 관찰해서 살폈다는 말이죠.
그래서 보니 아들이 아직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보라가 그것을 알아채고는 "하나님, 할례를 행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잘라낸 아들의 고추 끝을 증거물로 삼아서, 그것을 모세의 생식기에 던졌다는 말이죠. 그러자 모세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주님의 관계망' !!
그렇다면 인간의 '산다', '죽는다' 라는 것을 결정하는 경계선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옳은가? 아니면 주님이 옳은가?"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이 주신 관계망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의 옳은 행실이 자기를 살리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주님이 주신 관계망이 자기를 살리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주님의 관계망, 즉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를 살리는데, 이것을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전혀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말이죠.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미친 소리가 나오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생경험에서 나온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살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미쳐도 이것은 보통 미친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이 돈이 있어야 살지,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험상 산다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 돈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
그러면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이것은 상식적인 것인데, 구석기를 지나고 신석기를 지나면서 물물교환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돈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안동에서 생산되는 쌀과 묵호 항에서 잡히는 고등어를 서로 교환하면서, 쌀은 그냥 두고 먹어도 되지만 고등어는 그러면 상하니까 소금을 치게 되었는데, 그게 안동의 간고등어라는 말이죠. 태백산맥의 그 길을 제가 여러 번 다녀보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물물교환인데, 이게 바로 '균질화', 혹은 '균등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자본주의는 이 한 마디로서 요약이 되는데, 자본주의는 무엇인고 하니, "돈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무조건 부자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리 배우고 똑똑해도 무조건 가난한 것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죠. 모든 것을 돈이 결정한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돈을 똑같이 십원을 가지고 있으면 균질하고 균등하다는 말이죠. 즉 질이 같고 계급이 차이가 나지 않고 같다는 겁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들끼리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강남에서 살라고 해도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돈이 균등하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승리라는 겁니다.
18세기 이후에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자본이 국가를 잠식한 것을 자본주의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왕보다 더 센 것이 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를 잘 살게 해달라고 뽑는다는 말이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잘 살게 해주면 그게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겁니다. '훌륭' 이라는 개념이 돈 앞에서 균등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물물교환,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경험인데, 우리는 이렇게들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돈이 옳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돈이 생기면 무조건 옳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관계망 속에서, 그런 가마솥 속에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 이제는 우리 차례 !!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금이나 은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주 예수님의 하신 일뿐이다" 라고 하는데, 성령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의 차례라는 겁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고 사는 것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