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27:13-19 / 중심점 찾기

정인순 2021. 7. 4. 20:59

음성 동영상 Youtube

 

중심점 찾기 

이근호
2021년 7월 4일              

 

본문 말씀: 욥기 27:13-19

(27:13)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27:14)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27:15)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27:16) 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예비할지라도

(27:17)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27:18)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의 초막 같을 것이며

(27:19)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욥의 악인에 대한 저주감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악이 받는 저주라는 것이 한결 같이 갖고 있는 재물을 못다 써버리고 죽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인간들은 재물을 모을 때에 자기 자신의 즐김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신나게 즐기는 상황이 되면 복이요 그렇지 못하고 못 즐기면 저주라는 겁니다.

하지만 욥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은 즐기는 곳이 아니라 고마워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외에 고마운 자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에 의심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강력한 방어체계를 가동합니다. 즉 “누구든지 나의 의로움을 의심하는 자는 악인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못합니다. 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율성의 효과를 보고 싶어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면서 세상에 대처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계시 받을 만한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 8: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즉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얼 빠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신 내용이 자신이 평생 살았던 그 기억성으로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은 버티기에 들어가지만 다니엘은 못버틴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욥은, 본인이 겁나고 두려워하는 상황이라면 모든 인간들도 공통적으로 겁내고 두려워할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고 손해나지 않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 전환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그것이 곧 저주로부터 모면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욥은 지금 인간이 겪는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점은 자신의 자율성이 무너져내리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는 당연히 자아가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아담의 몸이 조각조각나서 지상에 사락눈처럼 내리듯이 내리자마자 녹습니다. 약 100년 짧게 살다가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결말은 기정사실입니다. 본인이 잘 살았던 못 살았던 상관없이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될 일입니다. 자신의 자율성의 가치를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율성을 바탕으로 살면, 아무리 이 세상의 성실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평생 소용없는 세월을 보낸 겁니다.

욥처럼 자신의 자율성의 가치를 끝까지 못 버리겠다고 고집하는 이 고집은 실은 아담의 자손에 속한 모든 자손이 겪는 일입나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복음적으로 자유롭다고 외쳐서 생돈이 나가면 맨 먼저 검토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 있어 벌을 받는 것인가?”를 고려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복음도 이런 욥의 속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다 쓰지 못하고 죽는 바가 인간 입장에서 참으로 저주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예가 누가복음 12:19-20에 나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 농부를 주님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계속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처럼 엄청난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 계시를 자신의 자율성으로 버텨내지 못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자율성으로 처리할 수 없는 바가 곧 하나님의 계시오 예언인 겁니다.

따라서 중심성 찾기는 현재 자신의 의로움을 못 버리는 욥의 마음 자세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8: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욥과 같이 자신의 행함의 성과에 따라 복과 저주로 구분되는 그런 백성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양식이 되어 복을 받는 그런 백성으로 친히 만들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율성 발휘는 기껏해서 욥이 두려워하는 저주성으로부터 압박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안다고 하지만 재산을 사고와 사건으로 다 날아갔다면 이 얼마나 두려워한 상황이겠습니까! 욥이 말이 빈틈없이 맞는 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순간에도 차질없이 작동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개인의 자율성을 이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해’가 사라지게 해버리기 위해 삶의 사정이 악화시켜도 이것을 ‘저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복과 저주를 결정하게 하는 ‘중심점’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사가 4:9에 보면,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락 장군이 자신의 자율성을 지켜내면서 전쟁도 승리하고 싶어서 여인인 드보라 사사에게 찾아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락 장군이라는 남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언에서 ‘여인의 손’이 중요합니다. 여인은 전쟁과 무관한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그 당시에 다 인정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율적으로 하셨다’는 알리는 방식으로 ‘연약한 여인의 나약한 손으로 전쟁을 끝내버렸다’는 식으로 나타내십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자율적 예상과 판단을 거부하시기 위함입니다. 곧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예상하거나 예측할 필요없이 일방적으로 주님은 십자가라는 중심부로 자기 백성을 이끄십니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님의 자율성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손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늘 평소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송민선

90강-욥기 27장 13~19절(중심점 찾기)2107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7장 5~12절입니다. 구약성경 786페이지입니다.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의 초막 같을 것이며,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욥이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해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악인들이 받게 될 엄연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악인이 이렇게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을 끝장내야 그것이 욥 보기에는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이 악인에 대한 저주를 이렇게 퍼부을 때 일단 우리가 욥이 퍼부은 그 상황, 저주받은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렇게 할 때 욥은 생각하기를 얼마나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원망할 것이며 얼마나 후회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신이 이런 형편에 있고 다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가신 길이 이렇게 좁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것이 저주스러운 길인지 아니면 구원받는 길인지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리 가진 재산이 없고 아무리 모든 가진 것들이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은 복 받은 길이에요.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이방인 욥이 생각하는 그 한계가 이 정도밖에 되지를 않음이 드러납니다. 욥은 자기 딴에 악인들이 받을 저주가 이 정도 되어줘야 참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해서 자기 딴에 극단적인 아픔과 고통과 이런 슬픔의 요소들을 다 집어넣어서 그것을 저주로 묶어서 이렇게 내뱉지만, 욥은 아직도 구약 사람이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욥은 모르지요. 그 전 사람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것은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협박성 또는 공포를 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 저주받았다는 상황 속에 거침없이 구애받지 말고 이 속에도 들어갈 수가 있어야 해요. 사도바울은 이것보다 더 심한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저주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동쪽 섬 마다가스카르에 얼마나 가뭄이 들었던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진흙에다 물을 좀 타서 그것을 먹어요. TV에서 카메라로 찍은 것을 보니 꼭 미숫가루 같아요. 진흙에 물을 타고 열매를 좀 넣어서. 하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진흙에 물 말아 먹는 거예요. 만약 그중에 성령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 있다면 그것을 꼭 저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죠.

그렇다면 욥의 생각이 그만큼 한계가 있는데 왜 우리가 굳이 욥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구원받은 자는 바로 이 코스를 피할 수가 없어요. 욥이 가지고 있는 이 사고방식을 탈선하지 말고 그 코스대로 그대로 와서 그다음 욥이 받았던 하나님의 등장을 통해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한계를 하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이걸 뚫고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욥의 코스를 밟아 가면서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욥은 이런 생각을 갖는 이유가 한마디로 말해서 압박해 오는 생존에 대한 저주의 힘, 욥은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고 있습니다. 욥이 그렇게 저주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평생에 자기가 일궈온 자기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마 나를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죄 용서와 복이 오게 되면 우리가 평생에 했던 이 모든 일이 사실은 아무 소용도 없는 짓거리만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욥처럼 인간이 자율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나타나는 인간상은 뭐냐, 뭐든지 자율적이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내가 했다는 자부심을 갖는 거예요. 자율적일 때.

‘하나님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겠습니까?’라고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길 때 뭔가 결과를 예상하거든요. 예상할 때 내 뜻대로 잘 되면 이것은 복이고 내 뜻대로 안 되면 이건 저주고 이런 식으로 가볍게 판단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악인은 어떤 식이냐 하면 자손이 번성하여도 위태위태하고 음식을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남은 자는 전염병에 걸리고요, 그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어도 남편을 위해서 울지 않을 것이고, 미련이 없다는 말이죠.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한다는 말은 의복을 진흙더미, 흙더미같이 쌓아놓아도 본인이 입지 못할 것이고 집을 아무리 잘 지어도 무덤가에 짓는 허름한 초막같을 것이며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진다는 말은 이 세상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어디 겁주나 하고 이렇게 우습게 보겠지만 막상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자율성과 내가 뭐 잘못하게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 본성은 결국 욥의 이러한 생각으로 모든 인간은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쿨하게 ‘나는 이런 거 초월했다.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어떤 고생 가운데서도 주와 함께 있으면 나는 찬양하리라’라고 하는데 말로는 그렇게 큰소리치지만, 욥이 말한 상황 중에 하나라도 걸리면 난리도 아니죠. 난리.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나이다’라고 번개탄 막 쌓아놓고 죽는 시늉하고 폼내고 그러죠. 자기가 고생해서 얻은 집이 부도나서 넘어가 보세요. 예수 믿는 기쁨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짜증, 왕짜증이고 정말 살기 싫지요.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즐기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고마워하는 곳이에요. ‘복음 알고 나서 별 하는 것들이 다 시시합니다’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복음 알고 뭐 즐길 생각 했어요? 신나게? 오토바이 타고 빠라빠라빠라밤~하려고 생각했습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은 천국에 왔다는 것은 작은 거 하나도 고마워할 줄 아는 것이지 그동안 못 즐긴 모든 즐거운 거리를 이제는 마음 놓고 즐기자는 그게 천국 생활 아닙니다. 고맙지 않은 것이 점점 더 고맙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 욥의 사고방식을 주님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시에도 욥같은 사고방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제가 예를 들면 만약에 집에 냉동 피자 싸게 사는 기회가 와서 한 열판 샀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는 말씀처럼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냉동 피자 누가 먹겠느냐는 거죠.

쓸데없이 많이 사서 맛도 못 보고 다 쓰레기 될 판이에요. 이게 오늘 본문 이야기거든요. 저주받은 자들은 백날 쌓아놔도 남 좋은 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욥은 지금 그렇게 될까 싶어 욥 본인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욥의 사고방식은 이스라엘과 비교해볼 때, 하나님과 함께 한다라는 것이 이런 사고방식이 어떻게 뜯어 고쳐지고 어떻게 완전하게 다른 인간으로 변하는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신명기 8장 3~4절 보면 말씀은 이렇습니다. 양식은 양식이 양식이 아니고 말씀이 양식이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네가 너를 생존하게 하고 네가 너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겁니다. 너를 너답게 지켜주는 분은 따로 있기 때문에, 네가 너를 지킬 때는 돈이 필요하고, 양식이 필요하고, 의복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지만, 주님이 너를 지킬 때는 그런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말씀으로만 살았다는 인간들만 하나님께서 키워나가시는 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걸 욥은 알 수가 없죠.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 쪽으로 우리가 넘어왔다면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생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어떤 식으로 해서 그 인간을 자아내고 인간은 그것을 생산해 내는가. 그것은 바로 해체입니다. 지난 울산 강의에서 보통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 아담의 후손, 후손이 이렇게 줄줄이 역사로 이어진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인류가 나타났다는 것은 마치 아담의 몸 하나가 조각조각 해체되어서 위에서 색종이 붓듯이 뿌려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눈(싸라기눈)을 한번 보세요. 눈 내리자마자 녹고 내리자마자 녹아버리잖아요. 이 땅에 내가 있다고 하는 데 없어지고 있다고 하는 데 없어져요. 우리 할아버지도 없어지고 우리 아버님도 돌아가셔서 없어졌어요. 사랑눈 같아요.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판이기에 태어났다 하면 돌아가시고 태어났다 하면 돌아가시고 얼마 살지도 못해요. 100살까지 사셨던가. 얼마 살지도 못해요. 아주 짧은 백 살 인생 살면서 돌아가시는 겁니다. 우리 보기는 길다고 하지만 백 살 먹은 사람에게는 욕이에요. ‘백 살이 길어? 길다고? 나는 지금 더 살고 싶은데. 200살 살고 싶은데 네가 그렇게 욕하면 안 되지’라는 식으로 나와요.

아담을 해체하듯이 아담의 그 새끼들, 자식들도, 욥도 이 땅에서 해체되어야 하고 그 해체된 욥이 이스라엘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면서 욥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해체 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해체 시킨다는 말은 욥도 선지자지만 이스라엘 선지자의 특징 가운데서 실제로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해체 작업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 8장 27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뿔을 가진 네 짐승이 등장하는 계시를 받고 난 뒤에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하나님에게 받은 이 이상을 계시라고 하는데 희한한 거, 본인이 끄집어내거나 본인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계시를 받고 난 뒤에 다니엘은 인간인 지라 그걸 감당을 못해요. 계시가 우세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쌓아놓은 지식과 학덕과 이 모든 것보다 더 우세합니다. 바구니는 작은데 거기에 감당 안 되는 물건을 담아버리면 바구니가 깨지고 무너지죠. 선지자가 계시받을 때는 본인이 갖고 있던 몸과 신체조차 그 마음조차 계시를 감당을 못해서 무너져버려요. 버틸 수가 없습니다. 혼절하죠. 이걸 저는 혼수상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게 되면 이게 혼수상태가 됩니다.

특히 남자들은요, 우리나라 대한민국 남자들은 20대에 그런 혼절 상태, 혼수상태를 선지자는 아니지만 다 경험합니다. 언제 경험하느냐 하면 그들이 논산 훈련소 입영통지서를 받을 때 그때까지는 아직 자아가 혼수상태 아니에요. 멀쩡해요. ‘아휴, 나도 꼴에 남자라고 나라에서 나를 찾네. 내가 필요하대. 가줘야지’라고 까불까불하면서 가죠. 훈련소 앞에서 머리 깎을 때도 ‘간만에 까까머리 한번 해보지 뭐’라고 하면서 거기까지는 좋지요.

그런데 그 입구부터 해서 서슬이 시퍼런 기운으로 눈이 안 보이게 긴 모자 차양을 푹 내려쓰고, 공수특전단도 아닌 것이 차양 쭉 내려서 눈 안 보이게 하고 고함만 질러요. 입만 크게 보이고 눈은 안 보이게 하고 와서 손가락 손짓하면서 “드루와~드루와~”라고 하거든요. 처음에는 자기 깎은 머리가 우습다가 그다음부터는 표정이 굳어집니다. 혼절 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아를, 나라는 이 자아를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자아는 나라에 반납해야지 내가 관리하면 내가 치이겠다는 그런 계산이 딱 드는 거예요. 처음에는 머리 깎은 모습이 우습다가 나중에 표정이 굳어지면서 그다음부터는 ‘엄마가~보고플 때~’라고 하면서 다시 옛날 어린아이로 소자로 돌아가서 엄마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엄마, 집에 가고 싶어’라고 하는 거죠.

새로운 계시의 세계, 내가 지금껏 알면서 살아온 그 세계가 아무 짝도 쓸모가 없어요. 인생은 살아봤자, 어떤 분은 지금 90세 넘어가시는 분이 있어요, 제 근처에. 이렇게 98세까지 살아도 그 긴 세월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몇십 년, 70년, 80년을 살아도 지금 소용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걸 캐치해(깨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그 군대 생활 뭣이라고 그냥 갔다 오면 되지’라고 우습게 생각하는 자체가 아직도 자아가 남아있고 자아가 있으면 자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 중심이라는 그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 어떻게 하느냐. 그 중심점을 이동시킵니다. 네가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 살아난 거죠, 중생 된 거.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중심이 네가 아니기 때문에 너를 중심으로 여기고 살면 그건 내 사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 백성 아니라는 겁니다.

중심이동이 된 사람만 천국 백성이고 중심이동이 되어버리면 네가 스스로 살려고 하면서 겁박과 협박처럼 느껴지는 거, 다시 말해서 ‘나는 가난하면 망했다, 돈 없으면 망한 거야, 아프면 인생 끝난 거야’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건 내가 내 중심일 때 닥쳐왔던 저주스러운 모습인데 이제 중심이 바뀌고 난 뒤에는 내가 돈 많이 있고 내가 남에게 인기 있고 내가 바르게 산다고 자부심을 가지면 나는 하나님 앞에 상 받는다는 그 자체가 저주예요. 그게 저주.

간증 집회를 하되 그 끝이 혼수상태로 끝나야 하지 ‘간증 집회하고 나서 반전 일어나서 전에 잃었던 거 다 찾았습니다. 30배 얻었습니다’라는 이거는 간증 집회 아니에요. 그거는 지옥 가는 간증 집회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주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겁니다. 아까 주일학교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내가 예상하지도 않았고 내가 보태지도 않았는데 어떤 다른 힘이 따로 존재해서 그 힘이 나를 내가 생각하지 않은 다른 쪽으로 자꾸 끌고 가는 느낌을 받아요. 성도는.

그 힘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도 기여한 바 없는 힘이에요. 이건 내 쪽에서 보태지 않는 힘이에요. 내가 개떡같이 살든지 내가 잘살든지 전혀 그런 것은 개 무시하는 힘이에요. 내가 한평생, 90 평생까지 어떻게 살았던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 힘이에요. 그것과 별개의 힘. 그 별개의 힘이 놓지를 않고 계속 어떤 한쪽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어느 쪽으로 몰아가는가. 바로 중심점. 세상의 중심점으로 몰아가요. 구원의 힘이 나오고, 죄 사함의 힘이 나오는, 언약이 나오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려고, 거기에서 네가 눈으로 거기를 보라고 바로 이쪽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서 네가 천국 백성 되었고 너와 의논하지 않고 내가 일방적으로 질질 끌고 가는 중이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즐기는 것이 아니고 고마운 분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기대하지 않은 고마움이 매일같이 주어져요. 인간은 뭔가 행동 잘못하게 되면 내가 가진 돈 다 날릴까 봐 자기가 스스로 움츠려지고 공포에 질려버려요. 어떤 잘못을 했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거 또 벌써 CCTV 확인 다 해서 나를 박살 낼 거야. 아휴, 내가 후회스러운데. 그 짓 안 하는 건데’라고 자기가 꾸려놓은 자기 현실 안에서 벌벌 떱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너 지금 뭐하고 있노? 너 지금 혼자 뻘짓하고 있구나” 아무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내 인생 잘 살아도 소용없고 못살아도 소용없는 거예요. 전혀 예상밖에 힘, 그 힘이 느껴지는데, 그 힘은 특징이 있어요. 그 힘은 바로 중앙지점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 힘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받은 계시를 남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듯이 이건 내가 관여하지 않고 주어지기 때문에 이건 설명하기가 적절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범죄 현장에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때 국립과학 수사 연구원에서 수사관들이 와서 루미놀(luminol)용액이 있는데 피가 있을 때 그냥 쫙 뿌리면 피가 있던 곳에서 광채가 빛을 띠면서 다 나온다고 해요. DNA까지도 거기에서 발췌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성령 같아요. ‘성령은 착한 분이다. 성령 충만하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걸 쫙 뿌려버리면 그게 죄예요. 성령은 우리의 착함과 연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죄와 연관하지도 않아요. 성령은 중심에서 나오는 힘이에요. 그 힘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있어요. 우리는 자꾸 나와 엮이려고 하는데 그 자체가 바로 욥과 같은 거예요.

그 엮이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내가 사놓은 냉동 피자 다 먹고 재림하시옵소서. 내가 모아놓은 돈 신나게 다 쓰고 재림하시옵소서. 너무나 자기 공로와 자기 세계, 자기 자율성의 가치를 높이고 내 욕망을 맘껏 달성한 후에 천국 가더라도 가겠다는 자기 세계에 관련되어있어요. 요르단 부근에 유적지가 있거든요. 그 유적지에 어떤 기이한 음향 시설이 있느냐 하면 그 넓은 유적지에서 어떤 한 자리에 서야만 내가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그 넓은 신전 구석까지 다 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너무 신기한 것이 그 지점이 몇 센티미터냐 하면 지름 30cm 정도밖에 안 돼요. 거기에만 서면 다 울리는데 조금이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면 전혀 들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그것을 보러 거기까지 가는데 그처럼 세상에는 중심점이 있어요. 그 중심점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여줍니다.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힘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사기 4장에 보면 여자 사사 드보라가 나옵니다. 이게 원래 이 전쟁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고 바락이라는 남자가 할 일인데 바락이 상대방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완전히 쫄아서 선지자에게 의지한다고 드보라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8절에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라고 바락이 자율성을 발휘합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는 승리대로 하고 나도 한몫했다는 계산을 하는 겁니다.

9절에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라고 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적의 대장)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라고 예언을 했어요. 그리고 사사기 5장 25~31절에 보면 정말 야엘이라는 여인이 그냥 집에 있었는데 전쟁의 모든 경로와 상황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적군 시스라가 어떤 여인의 집으로 쑥 들어왔어요.

옛날에 중동 지방에는 나그네가 들어왔을 때는 대접하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시스라가 25절에 보면 물을 달라고 하니까 여인이 극진히 대접하면서 우유를 줘요. 우유를 주니까 시스라가 안심을 해서 잠을 푹 잤거든요. 자니까 그 여인이 26~27절에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고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뚫되 곧 살쩍을 꿰뚫었도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라고 나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어머니가 28절에 보면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 고 그의 병거 바퀴가 어찌하여 더디 구는 고 하매”라고 왜 내 아들이 전쟁에 나갔는데 소식이 없느냐고 하는 거죠. 결국 이것은 야엘이라는 여인이 바로 적군에게서 결정적 승리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사사기 4장 8~9절에 나오듯이 처음에 드보라가 한 예언 그대로 진행된 겁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어디냐. 여인이 승리한 거죠. 여인이 승리한 건데 드보라가 계시가 열려서 이야기하기를 “하늘에서 시스라를 이겼다”라고 되어있어요. 하늘에 있는 중심점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보잘것없는 연약한 가정주부에게 그 모든 군이 그렇게 열심히 해도 못 이기고 사로잡지 못한 시스라를 그 여인이 집에 가만히 있는데 예상밖에 적이 집에 들어와서 우유 한 컵 주고 방망이로 죽여버린 거예요. 게임오버. 전쟁 끝났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여인도 예상 못 했고 드보라도 예상 못 하고 하나님만 아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실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 중앙지점, 그 중앙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다고요? 몰라요. 성령께서 데려가 줘야 해요. 성령께서 데려가 주면서 얼마나 내 자율성이 얼마나 내가 재산 없는 저주를 겁내고 있는지를 그런 내가 결코 구원받을 입장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오직 십자가 피로만 구원하시는 그 지점으로 주께서는 지금도 이끌어 내시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이 중심에서 나왔음을 왜 몰랐습니까. 기껏 욥처럼 자기 것 잃으면 저주이고 얻으면 복이라고 여긴 한심스러운 저희들 이제는 십자가를 알았사오니 이제 더이상 우리 자율성을 위해서 살지 말고 주님의 자율성을 높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