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1-4 / 주님의 자유
주님의 자유
이근호
2021년 6월 20일
본문 말씀: 욥기 27:1-4
(27:1)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27:2)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27:3)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27:4)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욥의 이러한 고백은, 모든 인간들에게 스스로 꺼집어낼 수 없는 자신의 본성을 대신해서 그대로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재산을 빼앗고 건강을 빼앗는 것은 용납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의 의로움을 빼앗는 것에 대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그 본성 말입니다. ‘나의 의’는 곧 ‘나의 가치’를 말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뿌리박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에 뿌리받고 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욥이 아담의 자손이니 욥의 근원적 생각이 오늘날 우리 자신도 미처 몰랐던 근원적 생각입니다. 이처럼 나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것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과연 하나님과 우호적으로 교제가 유지될까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빼앗길 것이 있음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것을 하나님에게 내놓을 마음도 없음을 인정합시다. 이런 현상은 나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나만을 위한 세계구성을 우리 자신들이 포기할 마음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도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 쌓아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합니다.
목숨이 붙여주는 한 결코 자신은 불의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그동안 인간들이 이 대자연 속에서 살면서 터득한 겁니다. 즉 인간들의 자유, 그것은 올바르게 자율성을 발휘하게 되면 그 혜택을 하나님으로부터 복으로 제공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해서 얻고 또 얻고 또 얻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올바른 자유가 그동안 대자연 안에서 인간에게 삶을 보장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존의 유리함과 불리함을 터득한 인간들은 이 원리에 준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 고난을 통해서 이런 원칙의 일관성이 깨어져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도리어 욥의 의로움을 뺏아가십니다. +,+,+가 아니라 -,-,-입니다. 욥은 자신의 자율성과 자유가 무참하게 훼손당하고 있음에 욥은 당황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 제가 의롭게 되겠다는 것이, 불의하지 않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된 일입니까?”라고 따지는 투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욥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모든 인간들에게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바른 의도를 가지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체적으로 무너져내리는 경우를 당할 때, 우리 역시 매우 당황스럽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교야 할지 막연하기 마련입니다.
욥은 현 시점에서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자신의 자율성과 가치를 고집하는 순간부터, 타인이나 하나님과 병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치 시골 가로수 길 같습니다. 곧바로 뻗어진 가로수길을 멀리보면, 저 끝지점에 가서 왼편, 오른편 사이의 거리가 소멸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현장에 가면 역시 길 양편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와 자유를 유지하는 한, 타인들과 지내는 것이 의견이 일치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서 유지되는 관계라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아직 헤어질 때가 되지 않아서 같이 사는 겁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가 대결 상태에 있는 그 실상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여호수아 1:7에 보면,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좌로나 우로나는 율법을 기준점으로 할 때 나타나는 인간의 자율성 발휘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율법은 하나님의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가 어떻게 거리가 벌어져 있는 가를, 결코 일치될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해 제공된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충분히 발휘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정조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4: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생 아벨이 형 가인에게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을 살려줄 이유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상 밖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가인을 적극적으로 안 다치고 안 죽도록 보호해주시는 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입니까? 죄없는 자를 살해한 자를 도리어 치밀하게 지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인간들의 자유 원칙 발휘가 전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인이 착해서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가인을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것 자체가 동생 아벨이 죽은 의의를 살려주신다는 겁니다.
즉 살인자는 인간의 자율적 처벌에 넘기지 않고 맡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점이 법이기에 이 법을 위반해서 가인을 공격하는 자는 하나님을 지키신다는 그 하나님 법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벌을 7배나 더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이해도를 넘어섭니다.
그리고 넘어서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성 발휘에서 인간 자체가 의롭다는 사실을 알리는 용도로 늘 활용되고 왔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을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고 이끄시는 겁니다. 즉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제대로는 율법 완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붙여주시는 전쟁’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사사기 4:7에 보면,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이라고 이스라엘이 여겼던 겁니다.
열왕기하 13:3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엇이 율법의 본 정신을 빗나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사례인 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아벨의 죽음에 합류하시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런 하나님의 자유 앞에서 의롭다 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 정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자유가 하나님을 도리어 미워하게 만드는 계기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88강-욥기 27장 1~4절(주님의 자유)2106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7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86페이지입니다.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앞에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빼앗아갔다는 겁니다. 욥이 자기 의를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고 강제로 빼앗아간 거예요. 이 말은 내 잘남과 의로움과 나의 거룩함을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것을 양도할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다는 거예요. 지금도. 욥의 이러한 이야기는 고집 세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욥이 인간의 바탕, 근원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욥이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자기 본심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돈 빼앗기는 것도 나는 오케이, 내가 건강 잃는 것도 오케이, 나는 그런 것도 빼앗길 용의가 있다. 하지만 끝까지 내가 빼앗길 마음이 없는 것은 바로 나는 내 자체로 의롭고 나는 나답다는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내놓을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 이건 욥으로 하여금 내가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런데도 잘 아시면서 “욥아, 너의 그 잘난 의를 내가 빼앗아서 네가 의 없는, 잘난 게 없는, 살아갈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는, 살 필요도 없는 존재로 내가 만들어 내겠다”라고 하시며 빼앗아 버릴 때 여기서 두 종류의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이 구약에서 욥을 통해서 두 종류의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그 차이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점잖게 하늘에 계시면 되고 이 땅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이 대자연의 횡포에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자유로써 대결하는, 자기 자율적 노력으로 대결해 가는 구조로 인간은 이 땅에서 생존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연과 인간의 대결구조. 이것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냐. 그냥 하늘에서 지켜보고 ‘네가 착하냐 안 착하냐’라는 그것만 지켜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욥에 와서는 뭐냐 하면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 자유와의 대결구조인 충돌이 일어나 버린 거예요. 욥 27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의를 빼앗을 때 똑같은 경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해요.
왜냐 하면 이게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말씀이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이 일어나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은 죽은 말씀이 돼요. 그냥 책에 있는 말씀이 된다고요. 제가 광고판을 하나 보았는데 전봇대에 불법으로 막 붙여놨어요. 식당광고인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황태정식 1인당 만 원’이라고 전봇대마다 다 붙여 놓은 거예요. ‘황태정식 1인당 만 원’
그런데 그게 지금 5년째 붙어있어요. 이걸 얼마나 단단히 붙였는지 본인이 뗄 생각도 안 해요. 5년째 ‘황태정식 1인당 만 원’이라는 말은 실제로 가게 되면 만원 아니고 2만 원이나 3만 원 될 가능성이 많아요. 5년 전 이야기니까요. 그러면 ‘황태정식 1인당 만 원’이라는 글자는 죽은 글자예요. 현실이 아니고 죽은 글자. 옛날에 만 원이라고 식당이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황태정식 1인당 만 원’이라는 그것만 죽은 글자입니까?
성경은요?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죽은 글자 아니에요? ‘옛날에 그랬었써써써지’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셨었써써지. 그런 식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오늘날뿐만 아니고 구약성경 역사 속에 나옵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이 홍해를 건너왔었써써지’라고 하면서 망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조상이 요단강을 건너고 그때 모세가 활약이 많았지.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세상에 도로 포로 잡혀 있는데요. 나의 자유가 다른 나라의 자유에 완전히 종속되고 다 빼앗긴 겁니다. 이스라엘같은 경우에는 바벨론 제국에 잡혀가서. 잡혀가서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옛날에 옛날에 참 좋았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모세같은 위인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세같은 위인이 없어서 우리가 쫄딱 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이니까 “당신이 모세십니까? 당신은 모세가 재현하신 겁니까?”라고 묻죠. 그들이 이야기하기를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내렸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직접 떡을 주시니 모세같은 선지자라는 거죠.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내 살과 피밖에 없다”라고 하시니까 다 가버렸죠.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나한테 있어서 하나님에게 뭔가 빼앗길 것이 있다는 생각을 인간들은 못 해요.
주시고, 플러스예요, 빼기는 아니고, 우리에게는 무조건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무조건. 자꾸 주셔야 한다는 거예요. 어떤 영화의 대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년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나누는 대화가 뭐냐 하면 이런 종교 있으면 참 좋겠다고 하는데 어떤 종교냐 하면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이렇게 세 번 말을 하면 자동으로 부부가 되는 그런 종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걸 듣고 제가 생각한 것은 저 사람은 종교를 플러스로 생각해서 나에게 이익이 되고 이익이 되고 이익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결혼한 사람이 ‘나 당신과 헤어지고 싶다’라고 딱 한 번만 해도 쫙 갈라지는 것이 인간사거든요. 뭔가 얻으려고 하면 다지고 애를 쓰지만 갈라설 때는 깔끔하게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그 종교. 세 번씩이나 플러스해도 플러스 종교는 마이너스 종교에게 이기지를 못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종교를 빼앗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종교를 하든 뭘 하든 항상 플러스 플러스 더하기 더하기만 추구한 우리에게 그렇게 축적된 모아놓은 그것을 주님께서는 빼고 빼고 빼시는 하나님이에요. 지금 욥이 그걸 그대로 보여주면서 본인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런 고집이 있어요.
하나님은 의를 빼앗았지만, 그다음 4절에 보면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빼앗으면 또 의를 만들면 되고, 빼앗으면 또 의를 만들면 되고, 이게 내 속성이고 본성인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빼앗으면 나는 스스로 또 의를 만들겠다는 거죠. 5절에 보면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참, 보통 독선적인 것이 아니죠. 따라서 이 구약은 우리에게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이 욥같은 인간이 어떻게 새사람 되겠는가. 너희들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보라는 겁니다. 욥같은 고집이 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손들고 나와도 인정 안 해요. 이미 손들고 나와도 우리 속에는 욥같은 고집이 있어요.
괜히 그걸 감추려고 그걸 겸손한 체하고 모든 걸 바친 척하지만, 욥도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도 아담의 자손인데 뭐 똑같은 거죠. 욥에게 이런 게 있으면 곧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말을 하면 이미 여러분들 눈치 다 챘습니다. 그건 이스라엘로 가보면 정답 다 나오죠. 맞습니다.
욥은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에 가야 정답이 나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어떤 정답이 준비되어 있는가. 여호수아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되어있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는 말이 있는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아까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인간에 있어서 자연과 말고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와 주님의 자유에 대해서 대결구조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발휘하는 모든 자유는 결코 인간이 율법에 정조준될 수 없는 자유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율법을 출제한 사람이 율법의 정답을 알지요. 율법을 출제하지 않고 이질적인 것이 왔을 때는 인간은 항상 시력이 약해서 중간에 있는데 여기 있나 저기 있나 하면서 자꾸 좌로나 우로나 쑤셔보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이미 비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적인 마음에 정조준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유도하는 것이 율법을 주신 이유이고 율법이 온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순수하다고 해도 율법 딱주고 그 율법을 하나님이 손대서 율법을 활성화하면 내가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그것들이 전부 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와 우리 자유가 결코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이 늘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항상 들통나고 마는 겁니다. 가로수를 보면 그걸 알 수 있는데 그림 속에 시골길 가로수에 보면 소실점이 있어요.
소실점이라고 하는 것은 느티나무가 쭉 가다가 결국 끝에는 곧바른 똑바로 이어지는 그 끝에는 둘이 마치 만나는 것처럼 눈에 보입니다. 원근법에 의해서 만나는 것처럼, 결국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그런데 현장 답사를 해보세요. 만나는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과 소실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욥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착하고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착하기 때문에. 착함과 착함은 서로 통한다. 그런데 한번 만나보세요. 안 만나지요. 그건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예요. 부부가 같이 산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한번더 써먹으면 이렇습니다. 부부가 뭔가 같이 될 때는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여기고 같이 살아야 해요.
같이 마음 맞춰서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마음 맞추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게 뭔가 잘 될 때는 자꾸 의심해 봐야 해요. ‘이건 뭔가 이게 아니야. 이건 아니지. 마음 맞을 리가 없는데. 내가 내 자유 포기 못 하고 네가 네 자유 포기 못 하는데 그게 어떻게 아귀가 맞지’ 맞을 리가 없죠. 그런데도 부부가 같이 살 거든요. 그건 아직 헤어질 때가 안 돼서 그래요.
이처럼 인간 대 인간의 자유도 이렇게 맞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행하심과 나의 행함이 하나가 된다는 누가 그런 구라를 합니까. 누가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던가요. 그건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은 뭐냐. 하나님의 법은 뭐냐. 인간이 납득이 안되는 쪽으로 자꾸 거리감을 두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쑤시고 들어올 때 원칙이 뭐냐 하면 거리감을 두고, 납득이 안되고, 이해가 안 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성경 말씀 하나 말씀드릴 테니까 여러분이 이해가 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형이 동생을 죽였어요. 그러면 우리 법에 의하면 형은 반드시 맞아 죽어야 해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니까 창세기 4장 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은 동생을 함부로 죽여놓고 그 죽인 살인자는 함부로 죽지 못하도록 친히 하나님께서 보디가드 되어서 표를 주셔가지고 손도 못 대게하고. 사람을 죽인 가인을 너도 죽어보라고 죽여버리면 벌이 1배가 아니고 100퍼센트 아니고 700퍼센트인 7배나 갚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도 이해 못 할뿐더러 정작 누가 이해를 못 하느냐 하면 가인 본인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이해 못 하느냐 하면 마치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살인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고 하면 “괴로워? 아이구, 내 새끼 괴로워? 내가 못 건드리도록 막아줄게”라고 갑자기 하나님이 우호적으로 나올 때 누가 당황스러우냐 하면 “너를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고 벌을 7배나 내리리라”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 가인은 ‘그러실 것까지는 없는데.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한데요’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냥 사람들에게 안 맞아 죽기만 하면 뭐 그렇게까지 하시면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가인은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죠. 그리고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악을 줘서 동생을 죽이게 해놓고 죽은 동생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것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아무런 보상이 없는 거예요. 아벨은 그냥 죽었어요. 끝났어요. 뭐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끝났어요.
가로수가 만나지 싶다, 만나지 싶다, 이렇게 생각해도 만날 수 없는 어떤 거리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자유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해석할 수 없는 어떤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방법이 뭐냐. 인간의 자유가 뽑혀야겠죠. 내가 자유 있다고 여기는, 내가 일을 해서 그걸로 내 현실을 만들겠다는 그러한 자유의 바탕 자체가 깡그리 개무시 당하는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 일은 바로 주님 쪽에서 나의 자유를 덮쳐버리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게 되면 왜 가인을 죽인 사람은 벌을 7배나 받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분명히 안 하고 있습니다. 안 하고 있는데 한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골에 살다가 서울 상경한 스무 살짜리 아가씨가 있어요. 별로 공부도 못하고 배운 기술도 없어서 놀고 있는데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인물은 반반했던 모양이에요. 남자친구를 만나서 놀고 있으니까 남자친구가 취직시켜 준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 식당에 취직을 시켜줬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식당 주인인 남자친구 아버지가 여자 친구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둘이 따로 만난다는 소문도 들리고 그걸 목격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자기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말았어요. 실제 일어난 일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그 스무 살 먹은 아가씨의 꿈과 희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의 자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참하게 타인의 자유에 의해서 짓밟히고 말았죠. 꿈이고 사랑이고 다 날아갔으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율법의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이 뭘 생산하느냐 하면 결코 어떤 인간의 자유도 이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그런 성격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이걸 취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거, 좌로나 우로나 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이고 인간의 자유고요 중간에 가는 것은 주님의 율법의 가치, 주님의 가치를 지닌 율법이 고집스럽게 양보 없이 굳건히 가는 겁니다. 그렇게 갔을 때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은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간의 자유 속에 자신의 자유를 거기에 실어버리고 담는 거예요.
가인을 해하면 벌을 7배나 받는다는 말은 이걸 달리 해석하면 이해가 아주 쉽게 됩니다. 나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건드리면 벌을 인간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7배나 더 혹독한 벌을 주신다는 겁니다. 가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 나를 건드리는 것으로 나는 가인에게 관여할 것이다. 개입할 것이라는 뜻이에요. 들어보니 쉽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때 ‘저거 동생 죽인 인간이잖아. 내가 손 좀 봐줄까’라고 할 때 그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발동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 착한 일을 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바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인간들은 자기 소견대로 자기 옳은 대로 행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가치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동생을 죽이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형 가인과 동생 아벨의 사건을 재구성하게 되면 하나님은 뭐냐 하면 내가 아벨처럼 맥없이 죽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이는 자에 대해서 다른 인간이 의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그때그때 마다 조치를 행하시는 거예요. 오직 모든 목적은 ‘하나님, 저는 정의롭습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그야말로 오늘 본문도 욥의 의를 제대로 빼앗아 갈 수 있도록 욥은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유예요. 나는 맥없이 죽을 테니까 나는 시시하게 죽을 테니까 그래놓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너희들 손에 맞아 죽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 바로 불이시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사사기 4장 7절에 보면 시간 관계상 이야기를 다는 안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전쟁시킬 때 어떻게 전쟁을 시키느냐 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가만히 있는데 저쪽에서 와서 받혀서 알아서 죽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쪽에서 이스라엘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공격하는 취지에서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유도해서 누가 겁을 내느냐 하면 누가 쫄아 버리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쫄게 만들어요. ‘우리는 끝났다. 우리는 이제 망했다’라고. 그런데 와서 저희들이 알아서 박치기하고 그들이 완전히 박살 날 때 다시 한번 ‘야, 우리 속에는 율법이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는 구나.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하여 절대로 양보하는 법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는 이스라엘이 아직까지 안 망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13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구절 때문에 성경이 좀 어려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라고 여기 붙였다는 말을 하거든요. 붙였다는 말이 어려우면 넘겼다고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붙이셨다, 넘기셨다.
이번에 반대가 되어서 건방진 자기 아들 이스라엘을 누구에게 붙이느냐 하면 지금 시리아인 아람 나라에 하사엘과 대를 이은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넘겨버려요. 넘겨버리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여겼던 그들이 오히려 그 하나님에 의해서 작살나고 망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그 생각이 박살 나게 되어있어요.
박살 나면서 “너는 왜 이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대로 가지 못하고 왜 자꾸 너 자체만 잘 지탱하려고 그 생각만 하느냐”라고 꾸짖고 있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빼앗았다고 했거든요. 27장에 보면 하나님은 내 의를 빼앗았고 아직 자기가 숨이 붙어있는데 내 의를 빼앗고 내 영혼을 괴롭게 했다는 겁니다. 다른 친구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되죠.
무슨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런데 이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욥 자기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을 더욱더 부추겨주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도록 해버렸어요. 이게 빼앗는 거죠. 빼앗아 버리면 그다음에 주어진 것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이 하나님을 미워했다가 돼요.
함께 있어서 좋았다가 아니라 ‘너는 이 하나님과 내가 함께 있는 것이 밉지? 그지?’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 없음이 아니고 그게 바로 주님이 미워지는 거예요. 왜냐? 나의 근원적인 가치를 자꾸 파고들어 가니까 그게 미운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게 되면 인간은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건 내가 봐도 내가 미친 게 되어요.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내가 왜 이래. 왜 나는 나의 가치와 나의 의를 지키고 왜 아직도 내가 남아있는 거야. 이거 남아있으면 안 되는데. 이 가치가 남아있으면 주님을 미워하게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무 살 아가씨가 서울에 와서 남자친구 사귀고 이제는 남자도 얻고 자기 취업도 되었다고 좋다고 했는데 되지도 않는 자기 남자친구 아버지가 집적대고 껄떡대니까 그걸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을 때 그걸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좋게 일어나지 않는지를 보면 그것은 성경대로 하게 되면 우리를 적에게 붙이신 거예요. 아벨처럼 죽어도 네가 죽는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너의 자유가 아무짝도 쓸모가 없다는 거. 욥은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이 덮치게 되면 욥은 아주 신이 났어요.
어떤 점이 신이 났느냐 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점을 왜 이제야 아느냐는 겁니다. 내 가치, 내 의미, 내 의로움,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왜 아느냐. 내가 미치고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제는 그것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구애 않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삶으로 욥은 끝납니다. 욥이 끝나는 그 지점이 바로 이스라엘과 합류하는 지점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합류해야 할 그 지점. 우리가 지금 그곳으로 고집스럽게 딸려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대충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대충 알았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목표가 어디인지 무엇을 노리시고 일하시는지 이제는 우리가 모른다 하지 마시고 주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드러나는 그런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