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1 / 발산 / 210604
녹취:한윤범
20210604a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부터 역대상 하겠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아담, 셋, 에노스”, 2절에 “게난, 마할랄렐, 야렛”, 3절에 “에녹, 므두셀라”, 4절에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 많이 생략돼있지요. 역대상을 보면서 성경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전에 이스라엘 역사가 먼저 있습니다. 역대상을 이스라엘 역사를 반성하는 거예요. 어떻게 반성하느냐? 이렇게 반성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가 몰랐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나타날 때는 없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를 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거든요. 사람들이,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을 거니까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미리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 의도를 비껴나가야 되겠지요. 하나님은 계시고 천지를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믿자, 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이 실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본인이 만들어낸 하나님이 된 거예요, 그게. 인간이 하나님을 아예 안 믿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찾아올 수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기 때문에 이게 화근이 된,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아아 우리 인간들에겐 애초부터 하나님이 없었구나, 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찾아오게 돼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지어낸 만들어낸 거고 실제로 없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하면 하나님 믿는다고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 도와주길 바라다가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전에 조그만 어렵고 힘들다 할 때 누굴 찾았습니까? 하나님 찾았잖아요. 그들이 하나님 찾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들어준다고 그렇게 더러운 버릇이 든 거예요. 그들이 요구한다고 하나님이 찾아온 게 아니었는데 그들은 아쉬울 때 하나님 찾으면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동안 그냥 이스라엘만 있으면 그들은 버티고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있으면” 이란 말을 달리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으면, 쉬운 말로 뭐냐 하면 땅만 있으면 산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잖아요. 들어오고 난 뒤에 땅이 있단 말이죠. 땅이 있으니까 땅만 있으면 그들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오래 산다고 해서 본인들이 땅주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잖아요. 그렇지요. 손과 발, 머리. 그러면 우리가 이 육신을 오랫동안 이 육신이 우리 것입니까? 여전히 우리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육신에 오래 있고 땅에 오랫동안 있기 때문에 특히 육신 같은 경우에 내 육신은 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 육신은 안 아파야 되고 육신은 오래 살아야 되고 육신은 행복해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생각들이 육신을 갖고 있으면 꾸역꾸역 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역대상 1장 1절에 보면 아담 있지요. 그 다음에 셋 있고, 에노스 있지요. 역대상 1장 1절이 아담, 두 번째 아담, 세 번째 아담. 2절에 게난. 마할랄렐으로 돼있는데 그렇게 돼있지 않고 2절 아담, 그 다음에 아담, 그 다음에 아담. 3절에 에녹, 므두셀라라고 돼있는데 이것이 므두셀라가 아니라 아담, 이렇게 돼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담 다음에 셋이라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 다음에 에노스 등장하지요. 사람은 바뀌는데 뭐는 안 바뀝니까? 맨 그 땅은 여전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단 이렇게 정리하면 오늘 쉽게 들어가는 겁니다. 하늘은 없다. 오직 땅 밖에 없어요. 하늘에다 하나님 사진 찍을 일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늘 아무리 쳐다봐도 하나님의 일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아무리 천년 가까이 살아도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본인들이 그 땅을 천년만년 수만 년 그 땅을 점유해서 자기가 몽땅 소유해서 사는 위인이 한 명도 없어요. 살다가 죽고, 살다가 주고, 살다가 죽는 겁니다. 땅에서 나는 나라는 자체는 소멸되고 끊어지는 거예요.
그 끊어짐, 이 땅과 땅은 영원히 계속 가는데 아담도 죽고 셋도 죽고 에노스도 죽잖아요. 땅은 지속적으로 오래 긴데 인간은 짧지요. 인간은 짧고 죽는단 말이죠. 인간은 짧게 만들어버려요. 천년 동안 살고 천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천년이 우리 보기엔 길지만, 짧은 인생을 살면서 죽게 만드는 것,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이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이 땅에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살다 죽어라.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는 알아야지. 그 죽는 이유가 하나님의 일이에요.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오늘 죽더라도, “아아 내가 죽을 만해서 죽는구나, 죽을 이유가 있어 죽는구나.” 그 죽을 이유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믿는다는 것도 구라고 거짓말이거든요. 그동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를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겁니다.
자기는 소멸되어야 될 대상인데 그렇지 않고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자기가 계속 살아 있을 거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날아가 버리고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아닌데.
인간이 죽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네가 긍정적으로 간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서 차례, 차례로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대상 1장 1절에서 아담 끊어지고, 셋 끊어지고, 에노스 끊어지고, 게난 끊어지고, 마할랄렐 끊어지고, 야렛 끊어지고, 에녹 끊어지고, 므두셀라 계속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나중에 온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없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정상적인 것은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 없으니까 하나님 믿을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인간세계가 얼마나 더럽고 수상한지 하나님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평소에 행동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자꾸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이 가증된 걸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하나님 없는 이유가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터 잡고 본격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안에 나는 죽고, 나는 죽었는데 왜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낍니까? 그건 네가 사는 게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계속 사는 거예요.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 믿는다고 그게 하나님 일이 아니고 나를 없애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자꾸 네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너한테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 있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돼요. 나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한 적이 없어요. 내가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만약에 있다면, 내가 있어서 구원받고 천당 간다면 그건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나를 천당 보내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거든요. 왜? 내 있음이 우선이니까.
역대상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역대상은 지난 이스라엘에 대해서 반성하는 책이라 했지요. 반성한다고 했지요. 뭘 반성하는 거예요? 지금 역대상에서 이야기하는 게 뭘 반성하는 겁니까? 우리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믿지 않은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압니다, 하고 우기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를 없애버리는 게 하나님의 일이듯이, 나를 죽여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듯이.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족보들이 굉장히 급해요. 빨리 나가요. 생략된 게 많아요. 그냥 쭉 달려버려요. 역대상 1장 1절부터 8절까지 그냥 쭉 달려버려요. 이것은 역대상의 목적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관광하는 용도로 렌트해서 차타고 가다가 예를 들어서 제주도 가서 렌트 많이 하잖아요. 렌트해서 여행하는데 자기 어린 아들은 제주도 여러 번 와봤다고 호텔에서 그냥 쉴래, 하고 있고 나이 많은 부부끼리 차타고 여행하는 순간에 아버지 내가 다쳤어요, 3층에서 떨어졌어요, 라는 소릴 들으면 그 아버지, 엄마가 차를 몰고 여유롭게 관광 다하고 난 뒤에 그때 슬슬 호텔에 들어갑니까, 안 그러면 정신없이 호텔에 들어가는 거예요? 정신없이 신속하게 들어가지요. 왜? 목적이 있잖아요.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싶잖아요. 그때는 관광이고 뭐고 없지요.
역대상이 그런 거예요. 왜 다윗이어야 하느냐, 왜 다윗이 왕이어야 하느냐? 이 목적을 향하여 나머지 있는 족보들은 그냥 들여다볼 것도 없어. 그냥 빨리 통과, 통과해서 쫙쫙 가는 거예요. 다윗이 왕이 된다는 것은 이것 자체도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다윗이 왕이 된다는 이것 자체도 그 안에 이스라엘의 범죄가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이란 말은 다른 모든 민족에는 왕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의 차이, 차별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왕이 없어요. 다른 민족은 왕이 지도력, 리더십을 발휘해서 그 나라를 버텨야 되거든요. 다른 나라한테 안 먹히기 위해서 버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믿고 자시고 할 왕이 없어요. 이스라엘 왕은 뭐냐 하면 이게 왕이에요. 율법이 왕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의 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왜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그 점을 설명할 순서가 되었어요. 이스라엘에 다윗이 왕이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구심점을 인격체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이스라엘은 뭐가 왕이라 했습니까? 율법이 왕이죠. 율법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했거든요. 율법은 그냥 문자지요. 그런데 나중에 다윗 때에 왕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거든요. 왕은 인격체지요.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인격화되느냐? 이 점을 역대상, 역대하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율법이 인격화되느냐, 하는 그 문제.
구심점을 p라고 합시다. point인데 줄여서 p라고 합시다. p에서 에너지가 마구 튀어나오는 것, 이걸 수학에서 divergence라 해요. 발산. 발산 알지요. 튀어나오는 것. 특히 방향이 이렇게 되는 것을 양의 발산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대되는 음의 발산은 뭐냐 하면 화살표가 바깥으로 튀어나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수렴하는 것, 이게 음의 발산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욕조에서 물 빠질 때 나중에 마지막 물이 빠지면서 물이 욕조에서 다 빠지잖아요. 그러면 욕조의 물이 빠졌다는 말은 처음에 시작점과 마지막 점, 최후점이 p에서 시작해서 p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에너지가, 구심점이. 왜냐하면 여호와가 왕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 뜻의 표현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구심점이 어딥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의 구심점은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에너지를 회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메시아, 선지자 인용하면서 결국 구심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신이 구심점이 된 거예요. 요새 같으면 교회가 교회 자신이 구심점 노릇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은 그게 엉터리 구심점이라는 거예요. p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심점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구심점으로 이스라엘로 인간으로 막혀버렸지요. 율법이 우선이 아니고 율법으로 내가 살겠다는 내가 구심점으로 하니까 율법은 그냥 나한테 이용물 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율법을 말씀을 이용한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망한 겁니다. 적어볼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신다.” 이 말과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분에 산다.” 이게 같은 말입니까? 같은 말일까요, 아닐까요? 이게 같은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한 건 맞아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심점 됨을 나타나 연결돼있는 이스라엘일 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걸 알아듣느냐 하면 인간들이 이스라엘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님 덕분에 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객이 바뀐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한 겁니까, 내가 소중한 겁니까, 라고 물을 때 참 얼른 답변 못해요.
에스더 4장 16절인가에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유대인이 하만에게 당했던 그 환경이 급변하게 되는 변곡점이라 하는데, 갑자기 사태가 변하게 되는 일종에 구심점의 위치에서 죽음이 등장한다고요. 그러니까 에스더에게서는 뭐냐 하면 내가 구심점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내가 죽는 게 하나님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잘못 생각한 이유가, 우선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아양을 떨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생각을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자신을 위해서 말씀이고 모든 신학이고 전부 다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그게 이단이거든요. 온갖 신학 같은 것 다 동원하고 십자가, 언약 다 동원하고 구속사 다 동원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구심점은 뜯겨져나간 뒷자리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뜯어냅니다. 뜯어내는 그 자리가 구심점이에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마치 분수처럼 분출되는 거예요. 그걸 물리학이나 거기서 divergence발산하는 것, 뛰쳐나오는 겁니다.
그게 뛰쳐나오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큼직한 엉덩이로 그 구멍을 꽉 막고 있었던 거예요. 막고서 뭐하냐? 기도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여 살려달라는. 자기가 그 구멍을 막고 있으면서. 모든 의도가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거예요. 성경을 천 독, 만 독 해도 소용없어요. 모든 의도가.
그래서 역대상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에 나오는 족보들은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도마에다가 고기 토막 내잖아요. 토막 내서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과 셋과 에노스, 게난 어떤 연결점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연결점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뭘 하고 예배드리고 성경공부 이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을 주께서 뜯어내면 어떻게 돼요? 주께서 살아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다 더럽다고 뜯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바닥에 판때기 나오지요. 그 뒷자리 나오지요. 그 판때기, 오늘 강의제목으로 할까. 판때기는 뭐냐 하면 영속성 또는 연속성,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거는 판때기가 같은 판때기에요.
이 판때기를 뭐라고 보느냐 하면 율법이 되는 거예요. 모내기 할 때 벼 모종을 물댄 논에다 꼽잖아요. 벼 모종 자체는 물기 없어도 물댄 논에다 심잖아요. 마치 머리카락 이식하듯이 머리 표면은 있잖아요. 표면에다가 뒤에 머리카락 앞머리에 심지요. 하나님이 모내기하신 거예요, 이렇게. 구심점에다 모내기하신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살아 있으면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그 의식은 뭐냐 하면 나의 존재로 이게 종결돼요. 종점이에요. 버스종점처럼 모든 의미는 나에게 종결된다고. 인간이 살아 있으면. 아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땅이 있다 했지요.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지요. 그러면 땅이 판때기고 모판이라면 이스라엘은 진정한 땅의 주인으로 오시는 분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땅의 주인으로 왔을 때 땅과 땅의 주인이 만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사는 인간들은 임시적이죠. 점유적이 아니고 임시적이에요. 그냥 짧은 한 순간 천년이고 오백이고 구백이고 간에 짧은 한 순간 빨리 니 역할하고 죽어라 이 말이죠. 사라지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심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제발 좀 이 땅에 잠간 살다가 치워라 이 말이에요. 사라지라 이 말이죠. 너 때문에 하나님의 모판이 안 보이잖아요. 보이질 않는다고요. 지한테 미쳐서. 자기 인생에 미쳐서 다 가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말씀에 관심 없어요. 말씀이 돈 되느냐, 이러고 있는데요.
그 돈은 누굴 위한 돈입니까?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더 살게 만들기 위한 돈이잖아요. 자기를 죽이는 돈입니까? 돈 벌어서 술 먹고 한강에 빠져죽으려고 돈 번 겁니까? 그런 것 아니지요. 나를 죽이는데 필요한 게 돈이에요, 나를 살리는데 필요하다는 게 돈입니까? 둘 중에 어느 겁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 돈을 모으잖아요. 빨리 모아서 죽으란다. 돈 모으지 말고 번개탄이나 모으지요. 안 그러면 농약이나 모으면 되지요. 내 취미가 농약수집이야. 왜? 오늘 반찬은 각가지 농약뷔페다. 이렇게 사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모든 의미가 자기로 종결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바로 인간이 망해야 될 하나님 없는 전형적인 인간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없다는 식으로 등장하는데, 그건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없다는 식으로 등장하는데 자꾸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왜 찾는 데요? 하나님 좋으라고 찾는 게 아니에요. 자기 좋으라고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의식 때문에 애당초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고 하나님 있고, 하나님 나라에 그런 건 없어요. 내가 없든지 하나님 없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역대기에 주제는, 왕이 제사직의 기강을 잡는 내용이에요. 이게 역대기의 주제입니다. 율법이 인격화된 왕이 뭘 잡는다? 제사장들을 잡는 거예요. 이거는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에요. 출애굽 할 때는 이런 게 없었어요. 왕이 따로 없어요. 모세는 레위지파지요. 모세, 아론. 레위지파가 모든 지파를 대속했습니다. 대표지파에요.
기강을 잡는다는 말은 뭐냐? 본연의 네 일을 하란 말이죠. 레위지파의 본연의 일이 뭐냐? 레위지파의 본연의 일은 늘 죽음에 참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사거든요. 제사 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아,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무엇의 죽음이 우릴 살립니까, 어떤 독특한 죽음이, 어떤 특별한 죽음이 우리를 살립니까?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이게 제사 직입니다. 너희들은 살고 싶어서 하나님 찾잖아.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진해서 죽는다. 그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이게 율법이 발산되는 구심점, 포인트 p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역대상, 다윗 오기 전에 이스라엘은 어떤 점에서 문제가 많았던가? 그들은 하나님의 죽음 대신에 어린양의 죽음으로 바꿔서 생각한 거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여, 하나님 시키는 대로 어린양을 율법대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드리고 절기 때마다 소 드리고 염소 드리겠습니다. 됐지요? 이러면 하나님, 우리를 계속 살려주시겠지요? 약속대로. 꼭꼭 약속하셨잖아요. 우리끼리 약속했잖아요. 율법대로 제사 드리면 우리를 살려주겠지요, 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율법을 대할 때 자기 딴에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순수함은 처음부터 범죄 한 인간으로선 순수함이 없어요. 어떤 율법을 대하든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든지 간에 항상 전제하는 건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되겠다. 이래서 교회가 이단 아니에요? 교회 다녀도 이단이고 안 다녀도 이단이에요.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이단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단이 욕이 아닙니다. 자기의 본모습을 이야기한 거예요. 이단 아닌 게 이상하지요. 이단 아닌 게 좀 수상해. 이단스러운 것이 정상이에요. 왜? 태어날 때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다윗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시는 거예요. 역대상은 다윗 중심이니까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대상 주제가 뭐라고요. 다윗 왕이 무엇의 기강을 잡는다? 제사직의 기강을 잡는다. 레위인 위에 왕이 있는 겁니다. 레위지파 위에 유다지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 지나고 바로 유다족보가 나오는 거예요. 2장부터. 모든 짜임새가 그렇게 돼있어요.
지금 다급한 목적이 따로 있어요. 제주도 관광이 목적이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것들은 후딱 지나가. 그런 건 볼 것도 없어. 계속해서 진짜 목적을 향하여 신속하게 달려갑니다. 왜 유다지파에 나오는 왕이 없어야 되는데 왜 이스라엘에 인격체 왕이 다윗이란 이름으로 등장해야 되는가? 도대체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과 다윗 오기 전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인간들 세계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걸 너희들이 알아라,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에 살면서 땅은 이미 자기가 살 권한 있다고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본 거예요. 하늘을 쳐다보면 안 돼요. 땅을 봐야 돼요. 과연 그 땅이 곱게 내 소유가 되는 것으로 허락이 되는지 하나님이 허락하실지,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은 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복을 받습니다. 안 망했으면 큰 일 날 뻔했어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점에 이건 이스라엘의 특권이에요. 다른 민족은 이런 게 없습니다.
망한다는 말은 이제는 그동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다 소실하고 다 날아가 버렸다. 일종에 살아 있으면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지요.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나의 죽음을 일찍 감치 경험했다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사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러한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그 체험은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아침저녁으로 매일같이 이스라엘 한 중앙 구심점에서 해야 했던 거예요.
제사 자체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겁니다. 죽음과 맞닥뜨리는 그 체험은 제사장들의 독특한 특권이에요. 매일같이 죽음과 만나는 것이 보통 축복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다른 지파들은 십일조 갖다 바쳤으니까 복 주시겠지, 희희낙락이고 사람 사는 살았으니까 즐거움을 누리자, 이런 식으로 계속 뻗치고 나간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나중에 안 한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의 욕망이 일단 돈 들어오면 더 챙기고 싶지, 이 정도면 됐습니다, 하고 자기 욕망을 정지시키는 브레이크가 인간에겐 없습니다. 내가 이 정도 가질 만해서 가졌다고 생각하지, 나는 거지돼야 마땅해, 건강한 것도 나한테 오버야, 나는 지금도 욥처럼 빌빌거리고 죽어야 돼, 이런 마음으로 이런 걸 그리워하면서 매일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레위지파는 제사장들은 바로 그런 마음을 유지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안 해버리니까 그들은 땅이 없거든요. 의도적으로 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땅을 주질 않았습니다. 경작할 땅도 없지, 자기가 힘써 노동력을 발휘할 그런 땅이 없지요.
땅이 없다는 말은,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앞에 이걸 붙여요. 땅이 없다는 말은 늘 죽어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땅이 내려왔지요. 이제 땅이 없이는 인간은 못 살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땅에다 일을 벌입니다. 땅에 일을 벌이는 것을 이렇게 합시다. 사건입니다.
족보란 뭐냐? 족보란 사건의 연결 또는 사건의 배열, 사건의 이어짐.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은 굳이 그 일이 일어날 이유를 그 사건 이전에는 찾을 길이 없는 게 사건이에요. 노아, 노아 이전에 노아라는 인간에게 인간들이 요청했던가요? 참 노아 같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들이 기대했던가요? 예측했던가요? 인간사회는 예측의 사회거든요. 과학사회가 예측입니다. 방정식 세워서.
그런데 노아가 등장할 때 노아가 무슨 일을 할지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지요. 예수님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뭘 할 것인지 제자들이 알았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그게 사건인 거예요. 오늘날 그 사건에 해당되는 사람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바로 성도에요, 성도. 성도는 본인 인생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본인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감 잡을 수 없어요.
어제까지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내일 어떻게 된다는 걸 예측하는 것은 성도답지 못해요. 성도는 어제까지 이렇게 살았지만 어제까지 산 모든 것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사건이지 내가 그렇게 요청한 게 아니란 말이죠. 어제까지 살고 오늘은 그냥 사라져도 우리는 왜 죽이십니까, 할 수 있는 권한 없어요. 살아온 것도 사건인데 거기다가 왜 토를 달아요. 살아온 것도 끝났는데. 정리 한 번 들어갑시다.
자, 사건이다. 반대말이 존재거든요. 존재는 계속 연속성이에요.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돼, 라고 고집부리는 게 존재입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이게 존재에요. 사건은 성도고 존재는 불신자에요. 불신자의 사고방식이거든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나를 살려줄 때 좋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해줄 때 좋은 예수라는 겁니다. “나를 밟아도 괜찮아요.” 이런 것은 존재에 사는 사람들에겐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건에 해당되는 것은 성도라 했습니다. 존재에 해당되는 것은 지옥 갈 불신자입니다. 차이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건에서는 그냥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서는 그냥 존재가 나오지요. 참 쉽지요. 존재에서는 어제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았다. 존재에선 존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사건은, 이건 본인이 놀래요.
“주여, 오늘 내가 왜 살아 있습니까? 오늘 죽어도 괜찮은데 왜 살아 있지요?” 자기의 현재 살아 있는 걸 의아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겐 뭐가 나옵니까? 사건이 나오지요. 십자가 사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일이 나오고, 불신자한테는 인간의 일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집은 내 집입니다. 이 땅은 내 땅입니다. 이것 버리고 나는 때려죽어도 지금 못 죽습니다. 이 돈 다 쓰고 죽어야 되겠습니다.”
사건이 나온다는 것은, 내가 있던 율법 판 자체가 인간이란 이름으로 율법 판 위에 올라설 수 없어요. 왜 ? 율법이 내뿜는 그 저주성과 그 무시무시한 심판성에서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 이 율법 판에 말씀 판에.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어떻게 하라고요? 찍어버려라. 어느 게 오른팔이고. 오른팔이 남아있는 게 착한 일 많이 해서 남아있는 게 아니에요. 덜렁덜렁 이미 죽은 팔이에요.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다들 보니까 애꾸는 아니잖아요. 여러분들 눈 박혀있는 게 여러분들이 이상스러워야 돼요. 주여 말씀에 비교해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네요. 내가 눈이 빼야 되는데, 눈이 빠져야 되거든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 맞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했다는 건 뭘 봤다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 좋아하는 손예진이라든지 하여튼 뭔가 예쁜 여자 봤고 간음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나쁜 짓한 게 아니고 원래 죽어야 될 인간이 죽을 짓을 육신을 통해서 지금 현재성으로 발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매일 죽어야 마땅하지요, 매일. 매일 죽어야 마땅한데 멀쩡하게 있으니까 육신은 내 소유가 아니지요. 주님 소유가 되는 겁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면 내 것 없지요. 내 것 없다면 나의 존재성에 대해서 내가 집착하거나 거기에 아등바등 더 살려고 애를 쓸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바로 다윗을 통해서 지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에요. 다시 보면서 장차오실 예수님이 생각해놓은 진짜 이스라엘을 다윗을 통해서 미리 이스라엘 역사와 족보를 다시 그걸 회상하면서 그게 무엇이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 스스로 죽게 만든 환경이 어떻게 해서 조성되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참 되도 않은 인간이 아직도 성도란 이름으로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주님이 죽어야 될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나는 죽어야 될 마땅함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분출하고 발산하는 사건의 구심점 역할을 성도를 통해서 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릴 안 죽이고 아직 이 시간까지는 첫째 시간까지는 살려둔 겁니다. 10분 쉬고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20210604b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내용에서 구심점 p, 모든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능력과 영생의 능력이 나오는 그 구심점 p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파내면 음각이 되는 음각 자체가 실체가 돼요. 경주에 가면 분황사 조각이 있지요. 구멍을 파내서 멀리서 보면 그 파낸 빈 공간이 분황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긁어내는 거예요. 내가 있던 자리를 긁어내는 거예요. 한때 너라는 괴물이 살았던 그 지점을 주님께서 깎아내는 버리는 겁니다. 그럼 텅텅 비겠지요. 빈 곳에서 뭐가 나오느냐? 부활의 능력이 나와요. 영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것이 그게 p점인데 p이 파낸 실체니까 p점은 하나님 자체가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 자체가 하나님의 죽은 자리에요. 하나님이 죽은 자리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와요. 하나님이 죽은 자리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있습니까? 이 땅에 없는 분으로 활동하죠. 이게 어려워요. 하나님은 없는 분으로 활동해요. 있는 존재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인간 존재 자체가 있으니까 존재하는 인간이 붙드는 것은 전부 다 가짜 하나님이에요. 붙드는 나를 살려준다고 미리 예측하고 예상하는 하나님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믿고 내가 멀쩡하게 그대로 있으니까. 나의 존재가 하나님 믿고 난 뒤에 여전히 존재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말 자체가 나는 그동안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없는 분의 p점에서 양의 발산, divergence발산된다 했지요. 다시 p점으로 수렴되는 것을 음의 발산이라 하고. 또 이런 게 있어요. 0의 발산이 있어요. 0의 발산은 재밌는 게 구심점이 있어도 화살표, 벡터라는 수학의 화살표가 못 보고 덮치고 그냥 지나가요. 이게 0의 발산이에요. 발산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학에서 벡터라는 방향을 가진 힘을 표시하는 이유가, 물리학에서 열이 어떻게 증가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 물리학 이전에 수학이 등장한 거지요.
결국 이런 이야기는 뭐냐 하면 개체가 아니고 필드에요. 장이라 하지요. 어떤 영역을 구성하는 겁니다. 나 구원받았다, 너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케 하는, 아까 뭐라 했습니까? 판때기라 했지요. 오늘 제목을 판때기라 할까. 그 판때기란 모판, 그 필드,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공동의 것, 공동의 것이 이스라엘은 뭐였냐 하면 열두 지파 중 대표지파가 레위지파가 그렇게 해야 되고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걸 했으면 인격적인 왕이 필요하겠어요, 필요 없겠어요? 필요 없지요. 왜? 죽음이 제대로 가동되고 작동되거든요. 이스라엘이란 그 기계장치에 제대로 엔진이 가동되는 것은 죽음이 죽음답게 제대로 가동이 될 때 구심점은 거기서 죽은 자를 살려주는 복음의 힘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닮아서 저쪽 하나님 있으니까 저쪽 하나님 믿으니까 잘 사는 모양이라 해서 자기 분수를 넘쳐서 그만 우리도 잘 살아보자 해서 그런 바알 신을 믿잖아요. 힘을 주는 하나님, 나의 존재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하나님, 나를 건강하고 부자 되게 하고 내 조직을 키우는 그런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뭐 자기부인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덕분에 잘 됐다는 자랑거리만 계속 만들어내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없는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그러면 없는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 기적이라면 그 기적은 한때로 끝나면 안 돼요. 이스라엘 내내 그 기적이 계속해서 유지가 돼줘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지속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8장이나 9장에 보면 뭐냐 하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가서 집 짓고 배부를 때 갑자기 뭘 다 날려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날려버린 거예요. 그들이 구심점을 날려 보낸 거예요. 구심점을 뚜껑으로 덮어버린 겁니다. 이젠 자기가 구심점 되는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는 내가 구심점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p점에서 나오는 것은 운동이죠.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말릴 수 없는 운동입니다.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해볼게요. 지도에 보면 산들이 있을 때 산들 높이를 나타내는 이걸 등고선이라 합니다. 등고선은 지도라는 그냥 존재하고 있는 지도에 그림으로 표현되지요. 여러분 이 등고선에 올라가면 어지럽고 막 숨차고 그럽니까? 그냥 평면적 지도지요. 등고선, 이거는 500미터, 1000미터 등고선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성경을 생각할 때 말씀을 생각할 때 이렇게 평면화 시킬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실제는 누가 실제냐 하면 성경을 보고 있는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등고선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이거는 지도책이고 참고도서에요. 성경은 참고도서지요.
지도가 살아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습니까? 세상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살아 있어요? 어느 누가 지도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자기가 살아 있지요. 그런데 성도는 이게 반대가 된다 이 말이에요. 뭐냐 하면 등고선을 가지고 물리학에서 스칼라양이라 해요. 절대 값으로 표현해요. 수학에선. 여기서 바람이 분다. 등고선에서 바람 불면 뭡니까? 이걸 벡터양이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실제로 필드, 힘이 작용하는 필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이 지도가 성경책이라면 우리는 이 지도를 보는 게 아니에요. 지도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서 오늘은 성경 보기가 성경에 의해서 지배당한 겁니다. 오늘의 일은 내가 정한 게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냥 문자라고 여겼던 이 성경책이 오늘 나한테 성령의 힘으로 지시를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말씀을 인간의 말로 듣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나오는 그 말씀대로 사도 바울이 성도한테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무슨 말로 돼있습니까? 사람의 말로 받지 않는다는 말은, 흔히 말하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무엇을 훼방하고 무엇을 고발하는 기능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을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인간의 말은. “코로나 조심하세요. 이것 누구 말이에요?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국가의 말이죠.
코로나 조심하세요, 듣는 순간 뭐가 묵사발 됩니까?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씀이 지적하는 나의 본질을 깔아뭉개게 되는 겁니다. 아아, 마스크 쓰고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처럼 인간은 중립이 아니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인간의 말이 중요하냐는 그 틈새에 끼어있는 사이존재, 그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에요. 그 두 톱니바퀴 안에서 인간은 깔아뭉개는 식으로 인간의 운명은 그렇게 살아가게 돼있습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그럴 리 없고 성도라면 하나님 말씀이 우선이냐,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자체도 말씀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필요해서 살아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필요해서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느냐? 내 구원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 성경 보고 있느냐를 구분해야 돼요. 어떤 성경도 나를 구원하는 성경은 없어요. 그런 성경 없어요. 나를 죽이는 성경 밖에 없어요. 나를 살리는 성경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그런 게 없어요.
여러분 장기에 보면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 알을 차, 포로 앞으로 밀고 당기고 옆으로 한 칸 뛰고 하잖아요. 그럴 때 만약에 주님이 장기 두는 분이고 내가 만약에 장기 알에 속한다면 어떤 장기 알을 여기서 저리로 옮긴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이 일을 해서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오느냐가 아니라 어제도 그렇듯이 1년 뒤도 지금도 그렇게 주께서 나를 다루고 계시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나를 더 이상 다룰 어떠한 권한은 나한테 아예 박탈되었음을 감사하는 겁니다. 그걸 굉장히 고마워해요. 아휴 내 인생에 내가 관여하지 않게 되어서 이제는 손 놓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나를 천당 보내줘? 내가 믿던지 사랑을 하던지 소망을 갖던지 뭘 해야지. 해야지 내가 그래도 꺼덕거려야 천당에 턱걸이라도 하지. 이러면서 벌벌 떨어요, 지금. 무서워서. 세상도 얻고 천국도 얻고 두 마리 토끼 다 얻고 싶은 거예요.
역대상에 나오는 족보 하나는 사건들에 연결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 하나하나마다 전부 다 사건들이 하나님이 장기 두시는 분이 되어서 장기 알로 사용하신 거예요. 이들이 우리의 족보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분명히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경말씀은 내가 뭘 하면 구원받느냐는 개체가 아니라 하나에 공통된 판때기, 필드, 영역, 장, 영역 또는 영토를 구성하는 거예요. 그리고 영토에는 무슨 점이 있다 했습니까? p점이 있지요. 이 p점은 모든 에너지가 나오고 분출되고 모든 에너지가 거기에 쏠리는 그 출구내지는 입구 발산점이 있지요. 그 발산점이 뭐라 했습니까? 죽음의 자리. 시범조로 누가 먼저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먼저 죽은 죽음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만 능력이 나오고 성도는 매일같이 여기에 빨려 들어가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장이거든요. 영역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어떻게 윤리도덕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지요. 왜냐하면 착하다는 자체가 이게 모순된 게 나의 개체가 착함이 돼버리면 내가 따로 살아 있는 내가 구심점이 돼버려요. 그러나 구심점은 조건이 뭐냐? 죽어있어야 돼요.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뭡니까? 각자, 각자 본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내 믿음 알아달라는 거예요. 내 신앙, 내 소망, 내 헌신한 것, 봉사한 것 알아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은 수렴돼야 돼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의 미래의 의미가 종결, 아까 내 하는 의미가 어디서 종결됐습니까? 인간들은 존재자들은 어디에 종결된다 했어요? 나에게 종결되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은 예수 믿는 누굴 믿어요?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라고요. 그래서 만날 하는 소리가 나 복음 안다, 예수 믿는 걸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 주님 증거하라고 하니까 자기 믿음 증거하고 있어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요. 지난 수요예배 때 기도제목이 그거였습니다. 남한테 사랑받을 생각하지 말고 남한테 존경받을 생각하지 말고 남의 처지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래서 이 사건의 나열, 사건의 배열, 사건의 나열이 적당하네요. 족보는 뭐라고요? 사건의 나열. 그 사건을 제가 종이를 준비해왔어요. 족보 인사들이 있는 종이라고 칩시다. 제가 점을 찍어보겠습니다. 점을 찍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존재적으로 봐서 존재가 되게 되면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현재를 생각하고 현재에 입각해서 미래를 생각하거든요. 내가 존재가 되고 살아 있으면 시간은 항상 일직선으로 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시간, 점찍은 것을 이렇게 봅니다. 딱풀 준비해왔습니다.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진행된다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흔히 말하는 구속사라는, 구속사가 이렇게 돼요. 그런데 성경은 구속사를 거부합니다. 이게 아니에요. 점찍고요. 이걸 꼬아서 붙인다고. 이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고 반대로 뒤집어서 붙여요.
뒤에서 붙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앞면과 뒷면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p점은 파내고 파내면 음각이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거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나타나는 거예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읽어봐요.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니란 말이에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따로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진들 있지요. 제일 먼저 아벨 나오지요. 아벨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아벨을 보지요. 보는데 그들은 아벨의 가치를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가인도 못 봤어요.
그러면 아벨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나타난 것과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게 ‘아니요’가 돼버리는 거예요. ‘아니요’가 나타난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식으로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믿음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여기 한 번 더 해야 되는데, 지금 화살표로 돼있지요. 화살표를 이런 식으로 뫼비우스 띠라 하는데(1858년 독일의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이 거의 동시에 독립적으로 이 띠의 성질을 발견했다.) 꼬아서 해버리면 전부 다 화살표가 이렇게 되거든요. 안 꼬면 화살표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 위, 위, 위 언제까지나 같은 면이에요. 그런데 꼬아버리면 위와 아래와 위와 아래가 뒷면의 위, 아래가 나중에 아랫면으로 돼있어요.
이게 뭔가? 선과 악이 전부 다 ‘악=선’이 되는 거예요. 선과 악, 위와 아래, 아래, 위, 위위, 아래아래 이게 전부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사적으로 개별적으로 내가 착하다, 악하다가 의미가 없다고요. 판때기가 율법 되는데 율법 안에서 악하다는 그것도, 죄인이라 하는 그것도 의미 없어요. 왜?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죄인이라 해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는 이것도 역시 있을 수 없고요.
필드라니까. 그 필드는 이러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선악이라는 하나님은 땅엔 없고 하늘에 있고 땅엔 인간들만 있고 하는 이 모든 개념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지워버리는 겁니다. 지워버리고 사건만 나열하는 거예요. 그 사건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땅을 파먹고 인간들 파먹는 식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세상의 종말의 의미를 담고 나타났다 이 말이에요. 사건 하나하나가.
여기에 역대상 1장 3절에 보면 에녹 있지요. 에녹이란 뜻은 새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 에녹, 이미 시작했는데 새로 시작한대. 에녹은 그동안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기정사실화된 땅의 세계에서는 그는 죽음도 없어요. 에녹을 보는데 지금 에녹까지 계속 사람들이 아담 이후에 죽었더라가 연속되지요. 그럼 이 땅은 무슨 땅입니까? 죽었더라가 성립되는 땅이잖아요.
이 죽었더라가 있는 땅의 의미를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땅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에녹 때문에. 고로 따라서 에녹의 사건의 연속에 이어진 사람은 하나님과 이 땅에 살면서도 동행에 더 비중을 두면서 살아야 될 그러한 성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 등장하는 게 역대상 1장 4절에 보면 에녹 계열에 라멕 다음에 누가 등장하지요? 노아 등장하지요. 사건의 사건들을 배열을 하는 거예요.
그럼 노아가 훌륭합니까? 아니지요. 노아를 끊어버리는 노아가 죽되 노아가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모판에 그 판때기에 에녹 심고 그 다음에 라멕 심고 노아 심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연속적이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일은 멈추질 않고 다윗까지 왔다 이 말입니다. 역대상하는 그 목적이 다윗이 왕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율법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문자인데 문자가 사람이 되느냐는 그 최정점에 이르러야 될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게 역대상하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셈과 함과 야벳이 있지요. 여기 6절에 보면,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디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다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더라” 그 다음에 8절에,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요” 이렇게 돼있지요. 이건 아나운서 수준 아니면 못 읽을 내용입니다.
자, 이들의 족보는 이들의 이름들은 바로 곧 땅의 이름이 돼요. 사건이 터질 땅의 이름, 그들의 출생 자체가 사건이 되는. 쉽게 말해서 장기 알들의 등장이에요. 하나님이 다루시는 장기 알들의 등장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떤 차원에서 장기 알이 되었습니까? 무슨 기능을 받아서 무슨 역할 때문에 장기 알 되었어요? 이 물음이 여러분에게 의미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뭘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해서 내일은 모르겠지만 오늘까지는 왜 살게 하셨는가?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산다는 것이 이게 과분한 일이란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것이, 이것 뭐 안 살려줘도 되는데 왜 자꾸 살려줘요, 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기 때문에 더 살라는 게 아니고 뭘 하라는 일을 해야 돼요. 주의 일이 나와야 되지 살려주셨으니까 더 내가 살겠다는 의지가 나오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 의지를 중시시켜야 되지요.
목사님, 주의 일을 어떻게 합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내가 안 살려 하면 주의 일이죠. 내가 살고자 해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게 되면 그게 전부 다 마귀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릴 때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호칭이 달라졌지요.
“이 사탄아.” 그렇게 생각한 사고방식이 사탄이야. 네게 말리는 의도가 뭐냐? 도대체 뭘 노리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말리느냐? 우리가 이 땅에 사는데 왜 살려고 할 때는 뭘 기대하고 살려고 합니까? 뭘 원해서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해요? 뭘 기대하고? 말씀을 안 듣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말씀을 안 들으려고 그렇게 모든 모진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면 죽여 버리겠다. 그러한 마음이 무엇이 손해 본다고, 무엇이 다친다고 생각해서 그런 생각이 드느냐 말이죠. 그거는 나를 잃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그동안 평생 살았던 고생했던 애썼던 내가 하나님한테 파냄을 당하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보다 인생 실패처럼 느껴지거든요. 그 인간 없었다. 그것이 자기 자존감을 그렇게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땅의 사건, 장기 알들을 배치를 해봅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땅의 일이니까 하나님이 없어요. 하늘 사진 찍어봐야 없어요. 땅의 일에 우수수 다 땅의 일에 하나님의 일이 등장합니다. 할 때 땅으로 그리지 말고 바다로 그리면 쉽습니다. 흑해 하나 그리시고 이쪽에 카스피 해, 둘 다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들이죠. 그리시고 여기에 페르시아 만 그러니까 태평양 그리시고, 여기에 지중해. 바다만 그렸을 뿐인데 땅은 다 만들어졌어요.
이게 현재 터키거든요. 여기 야완, 여기 섬에 깃딤, 흑해와 카스피 해 이 사이에 두발, 메섹, 마곡,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지명입니다. 고멜, 도갈마. 에스겔 보면 나오는 거예요. 미스, 여기 현재 이란에 있는 것은 마대, 현재 시리아에 있는 아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것은 앗수르. 여기 아라비아 이쪽에 하윌라, 드단. 아프리카 이집트에 구스.
그리고 리비아 여기에 지중해 쪽에 붓, 이쪽에 가나안, 그리고 이쪽은 다 안 적겠습니다. 가나안에 있던 열 족속, 아모리 족속이 제일 밑에 있고, 헷 족속 있는데 열 족속(14~16절,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 족속, 알가 족속, 신 족속, 아르왓 족속, 스말 족속, 하맛 족속).
여기에 지명들 나오잖아요. 터키는 오늘날 지명이고. 이 지명들이 누구 이름입니까? 사람이죠. 그럼 땅은 없고 뭐만 있다? 땅은 하나님의 사건, 장기 알 두는 의미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서 땅이 있는 거예요. 땅은 뭐냐? 공통 영역이에요.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땅의 속성에 의해서 누구든지 조금 살다가 전부 다 죽어야 되지요.
방금 제가 적었던 이것이 역대상 1장 1절부터 그 뒤에 구스, 구스는 이집트 여기까지 대충 그 동네 다 한 거예요. 가나안 땅에 블레셋도 있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역대상의 족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땅이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에겐 장기 알이 중요한 거예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어요. 무조건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의미한 인간 없고 인간이 보기에 무의미한 인간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을 지어낸 존재가 인간이다. 지어내는 그 방식이에요. 구스가 이집트도 되고 아라비아도 돼요. 이 동네에 흩어져 사니까. 1장 5절 봅시다. “야벳의 아들은”, 야벳은 아리안 족속의 원조입니다. 조상입니다. 아리안 족이란 것은 유럽과 현재 인도 종족의 원조지요. 유럽이나 인도 사람의 특징은 전부 다 코가 커요. 좀 서구 형이죠.
고멜은 갑바도기아, 터키 저쪽에 우크라이나. 마곡은 카프카츠 지방이고 마대, 메대는 현재 이란을 두고 메대라 해요. 메대 또는 마대. 야완은 에게 지역인데 현재 헬라인들이에요. 해안지역에 사는 현재 그리스 민족이 야완이죠. 두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 지역이죠. 그 다음에 메섹은 흑해 상단 지역에 있고요. 다시스라고 있는데 이건 해적 떼에요. 다시스, 7절에 나오는 해적 떼에요. 아스그나스라고 있는데 거기에 나올 거예요. 6절에 보면 아스그나스인데 이거는 앗수르 이 동네에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 땅에 장기 알이니까 투하라 합시다. 딱 투하됐을 때 그 투하된 장기 알들이 어떤 본성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범죄 한 악마에 속한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 상호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 민족들이. 그게 사건이에요. 똑같은 인간이 똑같이 발작해서 똑같은 놈을 죽여라 이 말이에요.
잘난 사람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죄를 최선을 다하여 나만 살고 너는 제발 좀 죽어줘. 나는 오래 살고 너는 일찍 죽어다오, 라는 그런데 활용되고 그런 속성으로 마음껏 장기 알로 발휘되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을 유포시킨 겁니다.
10절에 봅시다. 구스가 또 뭘 낳았다 했습니까? 니므롯을 낳았어요. 니므롯은 당대의 영걸이다. 이거는 창세기 10장에 보면 나오죠. 니므롯 고향이 바로 바벨탑이에요. 거기서 갈라지는데, 역대상 1장 19절에,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아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이란 나누어졌다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통해서 바벨탑의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나라가 다 갈라진 거예요, 흩어진 겁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당부라 할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도, 정리해봅시다. 이건 그냥 말도 할 게 아니라 써야 되겠네요. 나에게서 나온 어떤 행동, 나뿐만 아니고 남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나는 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이러한 본성이 나오도록 주님께서 사건화 시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철저하게 죄를 어떻게 됩니까? 철저하게 죄가 발산, 계속 죄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 나오는 죄 중에 가장 나쁜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안다는 죄에요. 하나님은 믿는 죄에요. 행동보세요. 하나님 안다 해놓고 속으로는 뭡니까? 지 살려하고. 자기 사는 것과 하나님 믿는 것과 이게 매치가 안 되게 돼있거든요. 왜? 진짜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지 사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근데 자기는 안 죽으려 하고 자기는 살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서도 하나님 살려달라고 믿으니까 이게 엉터리 하나님이 아니고 뭐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한테 죽은 게 아니에요. 세리, 창녀한테 죽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천하 최고로 하나님 잘 믿는 사람한테 죽었잖아요. 그들을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믿는 곳에 항상 악마 있다고 보면 돼요.
자, 1장 1절 다시 봅시다. 아담 그 다음에 누가 나오지요? 셋 나오지요. 아담의 맏이가 우리가 알기론 셋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가인이죠. 가인인데 여기 아담 다음에 아벨도 안 나와요. 아담 다음에 셋이 나온다고요. 뭔가 여기에 단절이 일어났지요. 끊어짐이죠. 끊어지니까 이거는 인간들이 아는 자손으로 이어짐이 아니고 자손은 사이사이에 끊어짐을 통해서 인간을 존재로 보지 말고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돼요.
이 말은 역대상에서 이스라엘은 다 토막 나있다는 것.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게 하는 것은 다윗을 향한 그 판때기가 연속적이지 그 위에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믿었던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전부 다 하나의 레고 조각처럼 전부 다 패널처럼 모자이크처럼 다 깨져야 돼요. 산산이 다 화장실에 타일 있잖아요. 타일처럼 조각조각 다 깨어진 거예요. 어쭙잖게 갖다 붙인다고 그래서 하나의 그림 만든다고 한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인간의 개별자는 개별자 자체로 다 깨어져있어요. 부부가 부부일 수 없고 자식과 부모와 한 가족일 수 없는 이유가 교회가 교인들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개별자기 때문에 다 끊어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를 죽은 자로 보고 상대도 그렇게 볼 때 비로소 대화가 통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야기가 안 통합니다. 이야기해봐야 지 자랑밖에 안 되는데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요.
그 다음에 2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이렇게 돼있지요. 이것도 창세기에서는 원래 이스마엘이 먼저 나와야 되는데 여기선 이삭으로 바꿨지요. 다시 말해서 옛날의 존재의 연속에서는 이스마엘이 먼저 우선이고 시간의식으로선 이삭은 나중이지만 지금은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그건 존재의 연속이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먼저 장자로 만들었다는 사건으로 그때 그 존재를 보자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28절에서 33절까지는 그들이 살던 동네를 쭉 깔아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봅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나를 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이 부정적인 요소를 땅에다가 쫙 깔아버리는 거예요. 땅을 시커멓게 만들어버리죠. 시커멓게 만들어져야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 시커먼 것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p지점에서 나오는 구원의 생명의 부활의 그런 에너지가 사건으로 다윗이 율법이 왕이 돼야 된다는 그 절차를 정당화하는 겁니다.
왜 율법이 인간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가?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개판 됐죠. 인간은 물고 뜯고 물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냥 지켜라가 아니라 결국은 이걸 다 지켰다는 인물로서 등장시키는 그 목적으로 인하여 왜 인간은 안 되는가를 미리 쫙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될 수 없는가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왕이 등장해요. 그 보여주는 시점에서 최종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입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복음은 다윗으로 자손으로 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적어볼게요.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반응. 기분 좋고 감사합니까, 아니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런 냉소적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이 긴 말을 줄여버리면 뭐냐 하면 인간은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이거든요.
자,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이 기분 좋고 감사합니까, 아니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게 나는 나를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분 좋고 감사함으로 다가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고 주님이고 아무 관심이 없다니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래 성경에 그런 교리가 있대.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내 일 한다.” 너 해라. 나는 내 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존재가 더 중요한 거예요. 주님의 사건보다도 자기를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있어야 돼. 지금 나는 존재한다. 내일도 존재해야 돼. 모레도 존재해야 돼. 왜? 나니까. 그것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성도는 이상해. 왜 내가 살아있지? 주여 이것 반칙 아니에요? 죄인 같으면 죽여야지요. 왜 저를 살려두지요? 이것 반칙 아니에요? 아아 뭘 일을 하시려는 모양이다. 나를 살려두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죽으심이 나오는 그 에너지, 그 하나님의 죽으심에 관심사를 거기다가 쏠리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더 살게 하시는 거예요.
43절에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을 치리하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이 이러하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왕국의 문제에 있어서는 에돔이 이스라엘보다 그러니까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보다 왕국을 먼저 건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민족적이기 때문에. 이방 민족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위해서 그것을 지키고 보호해줄 나라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영웅적인 니므롯도 나왔지요. 영걸, 영웅적인 사람을 옹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처음에 어떻게 돼요? 왕이 있다, 없다? 왕이 없어야 돼요. 죽어야 될 존재가 무슨 왕이 필요합니까. 살려면 왕이 필요한데 살아 있는 것도 웬 횡재인가, 이상하다 왜 살아있지, 이러고 있는데 무슨 왕이 필요합니까. 주님은 나를 살려주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나에게 일을 시키는 분이지 살려주는 분이 아닙니다. 일도 없으면서 살아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니에요? 할 일도 없는데 왜 살아 있어요?
그 할 일이 뭐냐 하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죽으셨다는 그것을 전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식으로 자기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 없는 곳이 뭡니까? 지옥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이 세상은 뭐다? 지옥이라는 것을 발설하기 위해서 발설 또는 발산, 오늘 제목 참 곤란하다. 발산으로 할까, 판때기로 할까.
발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살아 있기 위해서 아까 어떻게 합니까? 파내면 남는 응답이 곧 포인트, 하나님의 p점, 구심점이라 했지요. 그걸 위해서 오늘도 나의 살고 싶은 생각, 내가 내 위주로 사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성령께서 그걸 긁어내고 파내는 겁니다. 나로 하여금 있어도 없는 존재, 그 존재의 뚜껑을 여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살아 있는 것만 생각했지 주님 살아서 일하는 것은 생각 못했습니다. 도리어 내 사는 것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 짓의 반복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여 날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뜯어내셔서 내가 한 모든 것이 죄고 주께서 한 모든 것이 그 죄를 의롭게 하신 일인 것을 그래서 구원하고 있음을 세상에 나가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