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 1:6-8 / 연결의 중요성
연결의 중요성
이근호
2021년 5월 19일
본문 말씀: 오바댜 1:6-8
(1:6)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1:7) 너와 약조한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이기며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 함정을 베푸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철저하게 수탈당하고 철저하게 유린당한 에돔 나라, 그들은 사람들만 상대하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도움된다고 여기는 자들, 때로는 자기 나라가 융성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여기고 협약을 맺었던 그런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결국에는 에돔을 배신하고 에돔을 이용하고 에돔을 철저하게 파괴는 주범들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에돔에게 지각이 없다고 판정내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각(知覺)은 어떤 지각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지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각은 야곱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관련지어 나타납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과 동생으로 출발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서열에 의하면 서열이 바뀝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에서의 지각에 문제점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에서는 장자의 자리가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연락이 되는 자리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거짓말해서라도 하나님과 통하는 관계이고 싶어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태도에 의해서 수시로 변경되고 수정되고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타인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심성을 고정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자진해서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질 나쁜 자라는 평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거짓말하는 것은 자신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엄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통하는 관계성의 자리, 곧 장자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하나님께서 에돔 나라를 칭하면서 개인에게 칭하는 이름, 곧 ‘에서’를 거론합니다. 이는 에서의 후손은 에돔 나라 전체가 에서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에서의 본성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고만고만한 인간들을 상대로 하는 본성을 말합니다. 사람과 만나고 사람들과 상호 협력하고 도와주는 바로 그것이 인간들의 삶의 전부라고 아는 그것이 에서의 지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지각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에서의 지각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알아봐야 합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저주를 받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
39-40)
이런 저주에 대해서 에서는 대단히 불만을 갖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에서는 왜 자신이 세상의 풍족함을 맛보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두려움 가운데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좋지 않는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알까요?
여기에 에서의 ‘선(先)-지각’이 있었던 겁니다. ‘선(先)-이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타인과 상대하기 이전에 먼저 마음에 두고 있는 본성같은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안 망하는 것이 당연하며 지금 내 모습, 이대로가 안 망한 모습이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져봐야 합니다.
왜 인간은 자신이 안 망해야 마땅한 존재라고 우기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지상에 내려진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 훼방질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세상의 복을 누려야 마땅한 자라고 여깁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인생 끝을 보면, 기존의 인간들과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다 깨어져 피흘림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저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모습이 우리의 본성에 합한 모습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기에 발생된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런 최후의 모습을 마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치워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종말의 모습인 것을 받아드리는 자라면, 원래 자신에 합당한 조치임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모든 만나는 경우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충실의 결과가 간음이었고 살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고서는 이러한 죄인의 삶이 자신의 운명인 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 다윗은 출생 때부터 자신이 죄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생물학이며 생물학대로, 문학이면 문학대로, 물리학이면 물리학대로, 각각 생물의 생명과 언어와 시공간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해서 고유의 학문영역과 범주를 확보했습니다. 각 파트나 각 조직체나 각 집단에서 자신들이 단체는 결코 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지각과 선-이해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바로 이런 선-지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신 32:28-29)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종말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마태복음 15:27에서, 어떤 이방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개’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너무 자신의 본질에 합당한 명칭으로 받아들여서 감격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가치보다 주님과의 연결이 최우선적으로 소중함을 인정한 겁니다. 이것이 야곱적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망하는 것이 당연함을 알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저주로 벗어난 문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즉 예수님이 유일한 문임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과 연락이 되는 자가 곧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운명에게 중심 자리를 내어주고 외부로 물러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오바댜 1장 6-8절(연결의 중요성)2105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6-8절입니다.
오바댜 1:6-8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너와 약조한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이기며 네 식물을 먹는자들이 네 아래 함정을 베푸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에돔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6절에 보면 ‘에서’라고 이야기하지요. 에서는 개인이름입니다. 야곱의 형 이름이지요. 그런데 이미 한 나라가 됨에도 불구하고 에서라고 부르는 것은 에서라는 인간의 본질이 그 후손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에서에게 준 그 저주가 에돔이라는 나라가 비록 덩치가 커졌다고 해도 그 에돔전체 나라의 본성이 에서 개인의 본성이나 동일하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냥 에돔나라를 에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개인에게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에서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수탈되는, 다 빼앗겨 버리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을 만나면서 그 나라가 완전히 폭삭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언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에 있어서 그들이 그렇게 하나의 나라로서 단단하게 구축하고 싶지만 와르르 와해되는 이유가 7절에 보면 “너와 약조한 자들” 또 7절에 “너와 화목하던 자들” 그들이 너를 속이고 함정을 팠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에돔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람하고 상대하는 그것 그것을 가지고 7절 끝에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경상도 말로 시건이 없다 그런 뜻이지요. 어떻게 사람하고만 상대하느냐, 라고 지금 선지자를 통해서 에돔의 변하지 않는 본질 그것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고 좋게 지내면 되지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게 더 뭐가 있느냐. 이게 바로 에돔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고 에돔이 시건이 없고 지각이 없는 이유다, 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만 딱 해버리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다 에돔 되지요. 사람하고만 상대하니까. 그러니까 에돔이 결국 저주받아서 멸망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의 운명은 에돔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렇게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하고 상대하면서, 고만고만한 인간이지요, 인간하고 상대하면서 에돔이 자기 딴엔 사는 보람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감춘 보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에돔은 무역로, 무역하는 사람들의 길에 있기 때문에 거기서 세금도 뜯고 장사도 하면서 이익을 남겼겠지요. 그래서 그 보물을, 귀한 것들을 저장을 해놓았던 모양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걸 ‘페트라(Petra)’라고 하는데 지금도 페트라라는 유명한 유적지가 있지요. 요르단 거기에 큰 나라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는데 그런데 그 보물들이 탈탈 털려서 남김없이 다 빼앗겨 버립니다. 남아 있는 것도 사기당해서 다 빼앗기고 철저하게 다 빼앗겨 버리지요.
자,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이 오늘 우리에게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 에돔처럼 마지막이 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인간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하고 상대한다는 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든 지각과 생각과 마음은 남들이 보는 그 시선 거기에 따라서 내 행동을 변경시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겠는가? 타인이 있고 남이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가만있어 봐.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맞춰주는 인생을 살아서 당신 앞에서 내가 괜찮은 인간인 것을 증명해줄 게.’ 이게 인간들의 모든 행동이고 마음가짐입니다. 심지어 강아지도 그럴걸요. 주인이 있을 때 와 없을 때의 행동이 다르잖아요.
누가 내 앞에 있다는 말은 그 있다는 그것이 내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가 돼요. 아무도 없을 때하고 누가 있을 때하고 행동이 다릅니다. 평소에 길 가면서 주스 빨아먹다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앞에서 주스 빨아먹게 되면 경호원들이 가만두지 않지요. 부스럭부스럭하면서 주스 같은 것이나 속에서 뭐 꺼낼라치면 “너 권총 꺼내지” 하면서 달려들어서 체포하지요.
네가 누구 앞에 있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가려서 하라는 말이지요. 가려서 행동한다는 것은 내 앞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에돔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상대해야 되는가는 전혀 그것은 감이 없어요.
전혀 생각이 없고 같은 인간들끼리 저 사람 사귀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 유리하겠다, 내가 보물 모아놓았는데 그 보물 창고가 더 차고 넘치겠다, 하는 어떤 예측이 되게 되면 그 사람 비위에 맞추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럽지요.
그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가 결국은 오바댜의 예언에 의하면 그것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다 빼앗기고, 저주받고 망해버리는 그런 결과로 주어진다 그 말이지요. 제가 그렇게 하면, 그러면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대한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같이 상대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상대하는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 점을 이스라엘은 알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걸 신약성경을 가지고 와서 보게 되면 우리가 성령 받은 성도가 되었으면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할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상대해야 되거든요. 십자가 곧 예수님이 못 박히는 모습이 우리의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종말을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나의 미래상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귀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나의 죄로 하나님 앞에 망해도 싸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의 부류가 생깁니다. 한 종류가 뭐냐 하면, ‘나는 안 망해야 될 것이다. 나는 이대로 나다. 나는 안 망하는 이 모습 이대로 계속 갈 것이다.’라고 여기는 나의 그 모습, 나의 자아상의 모습. 그런 모습을 여러분들이 한꺼번에 많이 보고 싶을 때는요 초등학교 교문 앞에 가보세요.
학교 파하면 애들 우르르 쏟아지지요. 그러면 아무 애나 붙들고 “너 지금 망했나, 안 망했나?” 물어보세요. “아저씨, 제가 왜 망해요? 저 안 망해요.” 그게 바로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인간의 지각이라 하는 것은 상대를 의식해서 내 생각을 조정하는 것이 지각이라면 선지각, 지각보다 앞선 것, pre, 앞선 지각, 선지각, 또는 선 이해, 그것은 뭐가 되느냐?
나는 안 망해야 하는 것이 나다. 말도 안 되지만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다 갖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내가 안 망해야 된다는 선 지각, 선 이해, 이것은 도대체 나한테 어울리느냐 안 어울리느냐를 생각도 안 해보는 거예요. 나는 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걸로 여기기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인간들을 터무니없이 가르쳤습니까?
그런데 또 하나의 인간성은 뭐냐 하면, 내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합니다. 왜?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니까, 죄인이 갈 곳은 망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이 무슨 요소냐? 야곱의 마음이에요. 안 망해야 된다는 것은 에서의 마음이지만 내가 망해야 마땅합니다, 하는 것은 야곱의 마음입니다.
그게 야곱의 마음이라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야곱은 거짓말 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연락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자처해서 자기를 망치는 거예요. ‘나는 거짓말 하는 것이 취미야.’ 그런 것 아니잖아요. 어떤 인간도 남들 앞에서 나는 거짓말 모르고 거짓말 거의 안 하는 사람이라고 티를 내야 남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준다는 것이 선지각, 선이해, 타고난 것, 인간의 이상한 마음이에요. 이상한 인간의 지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정말 중요한 것 앞에서 내가 양심에 말도 안 되지만 내가 아버지를 속여야 되겠다, 형을 속여야 되겠다. 왜? 더 다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더 다급한 일이 뭐냐? 하나님과의 연락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 그것을 나는 못 놓겠다. 하나님이 주신 것 그것 얻어내기 위해서 자기가 거짓말한다는 그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거든요. 인간이 거짓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랑스럽지 못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내가 망가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거짓말했고 에서는 거짓말할 생각이 전혀 없지요. 아버지께서 내게 복을 준다면 그것은 내가 복 받을만하기 때문에 복을 준다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에 아버지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복 주는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27-29절까지는 야곱에게 아버지 이삭이 복주는 내용이 나와 있고, 39절에서 40절까지는 아버지가 에서한테 저주를 내리는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그 내용이 나와 있는데 제가 지금 그 내용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고 뭘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아버지가 자기가 평소에 늘 좋아하고 두둔했던 맏이 에서에게 저주를 줄 때 여기서 에서가 그게 저주인 줄을 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제 뜻은 이겁니다. 39절에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그러니까 기름진 땅과 이슬이 있어 줘야 농사가 되는데 거기서 붕 떴다는 것 즉 네가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너는 떠돌이 생활을 하게 돼. 거기에 비해서 동생 야곱은 하늘의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기름진 것을 동생은 챙길 수 있는 거예요. 그에 반해 형은 오늘도 내일도 떠돌이 생활하고 그래서 불안하니까 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불안불안 늘 공포에 쫒기면서 사는 인생이다,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생각해 보세요.
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저주를 왜 저주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직도 이해가 안되시지요, 제 말의 취지가? “네가 떠돌이 생활하고 너에게는 기름진 것 하나도 없어.” 하게 되면 예, 하면 되잖아요. 그걸 왜 기분 나쁜 저주로 생각하느냐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선지각(先知覺)이에요.
나는 좋은 것만 받아야 돼, 라는 그 지각, 선이해, 그게 문제, 그게 사달 난 거예요. 그게 화근이에요 인생에서 그게 엉터리에요, 엉터리. 모든 인간들의 엉터리가 바로 거기서 오는 겁니다. “너 앞으로 이렇게 살다가 지옥 가.”라고 한다면 “예, 지옥 가는 것이 제 일이라면 지옥가겠습니다.”라고 반기면 되잖아요. “반갑다, 지옥아!” 반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불만을 터뜨리고 못마땅해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순수하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 안에 뭐가 있어요. 무슨 괴물이 들어 있어요.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나에게서 멀리 가라, 할 때 그게 나쁜 것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떠돌이 생활하고 기름진 것 풍성한 것 없다는 것이 네 생각에 이것은 좋지 않은 거야, 이것은 나쁜 거야, 이것은 액운이야, 이것은 저주스러운 거야, 라는 그 생각을 누가 집어넣어 줬느냐 하는 거예요.
누가 그걸 누가 집어넣어 줬느냐? 마귀입니다. 그게 마귀에요. 우리는 그 생각을 못 해봤잖아요. 아내가 음식을 하는데 예를 들어 김치찌개를 했는데 남편이 그걸 먹잖아요. 물론 기도를 하고 먹지요. 먹는데 짜. “여보, 국이 짜서 못 먹겠다.”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에돔 곧 에서에 속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기가 그런 이야기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나는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내 입에 딱 맞는 음식을 마땅히 먹을 권한이 있다. 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권한이 지각이 없고 자기 본질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15장 26, 27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어떤 여자가 주님 앞에 나와 가지고 내 딸이 귀신들렸으니 도와달라 하니까 예수님께서 대뜸 그 여자에게 “너 개잖아 개.” 제가 지금 욕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합니다. “너 개잖아 개. 너는 어떤 혜택도 필요 없어. 감히 인간들이 받아야 될 혜택에 네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너 개야. 개는 개답게 살아. 저리 가.”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
오랜만에 소리를 쳤네요. 제가 거의 소리를 안 쳤는데. 여기 놀라운 인간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야곱같은 고백이 나와요. “옳소이다. 제가 개입니다.” 와, 제가 개입니다. 야곱식으로 이야기해서 “내가 개라고 하든, 너는 떠돌이 생활을 하든, 칼을 믿고 의지하든, 너는 기름진 것과 곡식과 그런 것 너에게 해당 사항 없어. 너는 그런 것 얻을 자격도 없어.”라고 했을 때 야곱에 속한 사람은 “그런 것 없어도, 그런 것 안 줘도 주님과 연락만 된다면, 관련성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나이다. 주님이여, 저보고 개라고 했지요? 계속 개라고 불러주세요. 이 개, 박 개, 최 개……. 주님이 부르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지옥 가더라도 주님께서 연관되어 있다면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특이한 사람 봤습니까? 예수님도 놀랐어요. 다 아시지만 세상에 이만한 나와의 관련성, 믿음이지요, 세상에 이만한 믿음은 아브라함 가운데, 유대인 가운데 이만한 믿음은 못 봤다. 이런 믿음 못 봤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방인인 백부장도 마찬가지지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똥개도 이런 똥개가 없지요. 요새 개는 말도 안 들어요. 개보다 더 개 같아. 지금 모든 사람이 에돔이에요. 자기는 안 망해야 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뭘 근거로,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는지. 제가 했지요. 초등학교 애들부터 태생이 그런 태생이라고요.
오바댜의 이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방해요소와 엮어서 해석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방해 요소가 뭐냐? 에돔요소에요. 하나님의 해석을 인간이 순수하게 받는다 하지만 자기의 선지각 또는 선이해, 그게 악마로부터 틀어진 거예요.
제대로 된 지각은 뭐냐 하면, 나의 종말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나의 마음과 종말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그 당시에 에돔도 없었고 이스라엘도 없어서 에돔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에돔의 차이점은 자기의 멸망과 그리고 에돔을 멸망을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에돔의 멸망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정말 야곱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신약의 성령 받고 난 뒤에 오바댜를 다시 볼 때 에돔이 유난 떨어서, 나빠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에돔처럼 시건도 없으면서 시건 있다고 우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실현에 있어서 훼방질로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상대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처참한 최후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인 것을 우리는 그걸 수긍을 해야 돼요. 그걸 수긍을 해야 된다고요. 우리가 이 땅에 아담의 후손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거든요. 죄인으로 태어났으면 그 죄인 노릇 하는 것에 충실해야 됩니다.
그 죄 값은 멸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수긍을 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따지고 자꾸 저를 왜 지옥 보냅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하고 불만 터트리지 말고 그냥 예, 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그 받아들인 사람의 예가 나옵니다.
그게 사무엘하 11장 2절에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보세요. 얼마나 다윗은 자기 일에 충실했습니까? 또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다윗은 자기 일에 충실한 거예요. 다시 한번 제가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었어요. 다윗은 거니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저녁 산책에 있어서 태만하지 않았어요. 산책 시간인데 좀 거닐어볼까, 하고 왕궁 지붕을 거닐었어요. 그 거니는 일에 아주 충실했습니다.
이 점에 후회할 필요 없어요. 그냥 충실했어요. 충실했는데 다윗의 다리만 충실한 것이 아니고 다윗의 눈도 충실했습니다. 보는데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그 목욕하는 자태가 아름답다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아주 충실했습니다. “아이고, 아름답지만 나는 아름답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그렇지를 않았어요.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운 거예요. 아름다우니까 그 여인을 갖고 싶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있는지 여러분 이해되시겠어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운명 앞에 우리가 타인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운명을 우리가 소유하지 마시고 운명에게 내 본질을 맡기시고 우리는 외부로 빠져나오세요. 나의 중심을 나의 운명에게 넣고 나는 외부로 물러나가세요. 내 운명은 내 담당이 아닙니다.
내가 맡은 역할은요.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왕궁 지붕에 거니는 것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다윗은 거닐었을 뿐이고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데 뒤태가 진짜 못생겼어. 아, 열 트럭 줘도 내가 마다해. 그런 여인들도 다윗이 많이 봤을 거예요. 저런 여인은 줘도 내가 가까이 안 한다, 라는 그 점에 얼마나 평소에 충실했겠습니까?
그런데 새롭게 그날 저녁에 본 여인은 아름다웠어요. 그러면 자기 일에 또 충실해야지요. 자기운명에 아름다움이 오는데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되는 겁니다. 그 충실의 결과가 뭡니까? 자기의 멸망이지요. 그러면 멸망에 충실해야지요. 이게 바로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그 여인을 갖고 싶어서 그 여인의 남편을 모의해서 살해했잖아요. 다윗은 그 일에 아주 충실했어요.
자기운명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운명이 자기의 주인이고 다윗은 그 운명의 바깥으로 물러가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기능이요 이게 바로 역할입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가 그 운명을 조정해서 변경시켜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망하도록 되어 있고 모든 인간은 죄 짓도록 되어 있습니다.
“운명아, 비켜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내가 간다.” 네가 뭔데? 에서는 자기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어떤 역할? 내게 저주가 오는 이 역할을 싫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주가 주어진 거예요. 야곱은 거짓말해서라도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중앙을 차지하지 않고 나는 껍질에 불과하다. 어떤 운명의 껍데기 껍질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만두에 있어서 얇은 밀가루 껍질이 되고 싶은 겁니다.
안의 속이 꽉 찬, 만두에서 꽉 찬 그것 말고 꽉 찬 것을 꽉 찼다고 이야기하는 껍질 부분, 오렌지 껍질 부분이 바로 자아 부분인 것을 야곱은 원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더 이상 주인공 노릇 못하고 나는 바깥에 감싸고 있는 껍질로 나가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에서는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결정은 누가 해요?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예요. 선택을 내가 하는 것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결정한 대로 간다는 겁니다. 이게 세상 사람 아닙니까? 이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각자 자기가 주인공 되는 인간들만 만나는 거예요. 멸망 받아도 할 말이 없지요.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손대지 마세요. 나의 운명에 손대지 말라고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생물학은 유기체의 생명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이에요. 문학은 언어를 다룹니다. 그리고 물리학은 시공간을 다뤄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각자 자기고유의 경계와 범주를 형성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세계에서.
그걸 보통 지평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도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카테고리, 범주를 구성한 겁니다. 이렇게 범주를 구성하게 되면 그 범주 안에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조직과 범주 범위 이 지평 안에서 종말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게 문제에요.
이 세상 전체를 보는 주님의 범주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어요. 십자가가 있어요. 그것은 이 세상의 전체가 종말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게 하나님의 징후, 징조거든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한다든지 뭘 하게 되면 가정이든 직장이든 회사든 교회든 그 자체적으로 어떤 종말을 거기에다 꽂아 놓습니까?
어떤 가정에 네 식구가 있다면 아버지가 퇴근해서 “우리 잠시 손잡고 기도하자. 우리 가정은 오늘로서 망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요? “너 내일 뭐 할 건데? 몇 달 뒤에 시험이잖아. 공부 좀 해라.” 안 망한다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선지각, 선이해를 가지고 우리 가정은 만대에 계속 이어질 거라고 여겨요.
회사도 마찬가지고 파리바케트도 마찬가지고 뚜레주르도 마찬가지고 선술집도 마찬가지고 노래방도 마찬가지고. 어느 술집에서, 어느 가게에서 어느 편의점에서, 요 아래층에도 편의점 하나 있습니다만, 편의점 새로 시작하면서 “주여, 망하게 하옵소서.” 이거 갖다 붙여놓은 편의점 봤습니까? 어느 교회가 개척교회 하면서, 설립 예배 하면서 “설립 예배 이걸로 우리 교회 끝났습니다.” 이런 개척교회설립 예배하는 것 봤습니까?
설립예배한다고 일가친척 다 모이지요. 가게 개업했잖아요. 물론 돼지머리는 준비 안 했다마는 떡은 준비하고 봉투 두둑하니 넣어서 ‘교인들 없을 건데 우리라도 자리 채워줘야지.’ 하고들 오잖아요. 그것은 다음 주일 또 교회 하겠다는 심보거든요. 그게 에돔의 심보 아닙니까? 자기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망한 이유가 신명기에 보면 나옵니다. 신명기 32장 27, 28절에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중에 지식이 없도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다 이스라엘의 종말을 집어넣었는데 지각이 없고 모략이 없는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자기 이스라엘의 멸망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몰랐어요.
그런데 그것을 안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은 알았어요. 이스라엘 왕 다윗은 진짜 이스라엘 왕 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들을 망해도 마땅한 죄인의 집합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를 죽임으로서 알게 된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그러니까 다윗은 회고적으로 소급해서 돌아보게 되면, 망해야 마땅한 자기운명에 아주 충실했고, 그 충실한 그 끝에 너는 죄인이라고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한번 지적했고, 다윗은 비로소 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라는, 하나님 왕과 자기 자신 죄인을 연락했다는 이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야곱적 요소에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소몰이한 거예요. 망하는 짓을 계속하게 만들어서 소몰이해서 몰고 가는 거예요. 그 소몰이를 해서 몰고 가면 나오는 게 뭐냐? 에서 곧 에돔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지만 에돔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뭐냐? 이스라엘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문이 있어요 문.
소몰이하는데 소도 모르고 양도 모르는 그 문 있잖아요. 그 문을 양도 모르고 소도 모르는데 목자만이 알고 있는, 목자만이 만들어낸 문이 있습니다. 왜? 목자는 없는 문을 만들어서 가지고 목자로 오셨기 때문에 목자가 오시고 가시는 그 통로만이 문이 돼요. 목자 외에는 문을 아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어디로 빠지는지.
그래서 성도는 어떤 사람이냐? 1년인가 한 번씩 하는 건강검진 있지요. 시력측정 하잖아요. 간호사가 눈 한쪽 가리게 하고 하는 그 시력검사표에 한쪽이 뚫린 동그라미표시가 있다고요. “손가락으로 그 뚫린 방향을 손짓으로 표시하세요.” 하면 이쪽, 또 이쪽, 이렇게 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가둬놓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껍질이니까. 주님이 묻습니다. 소몰이해서 “자 이제 보이나? 문이?” “예” “어느 쪽에 십자가가 보이나?” “저쪽에 십자가가 보이네요.” 저 십자가 달린 주님이 깨어져서 피 흘리는 그 장소가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거든요. 그걸 성도만이 알아요. 이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개척교회 오늘 설립 예배하고 내일 문 닫아도 괜찮아요. 개척교회 하면서 전부 다들 손가락을 십자가 쪽을 가리키면 다음 주일 안 모여도 그거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정이에요. 요한복음 10장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도적이지요.
도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문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 쪽으로 관심사가 없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게 만드는 방법은 뭐냐? 종말을 감추는 겁니다. 종말을, 우리의 최후가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을 감춰버려요. 감춰버리면 망하는 것이 없지요. 종말도 없지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환상만 남아요.
잘 될 거야, 앞으로 뭐든지 자알~될 거야.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면적을 넓히는 겁니다. 나의 자아를 탱탱하게 만드는 거예요. 더욱더 공고하게 강하게 보물들을 집어넣어서 탱탱하게 만드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돔이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보물 다 빼앗기고 사람만 상대하다가 사람한테 다 망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 이야기하는데 걸핏하면 아버지가 사업 잘하다가 사기당했다, 어떤 사람은 또 잘 나가다 사기를 당했다. 도대체 사기를 당했다는 말이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사기 당했다는 말은 본인이 순수하다는 전지각, 전이해가 전제가 되어야 되는데 사람이 돈 빌려줬다, 보증섰다, 이게 순수한 겁니까? 아니면 이자 많이 받는다는 노림수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은 투자한 거예요. 사기당한 게 아니고. 그쪽에서 어떤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했든지 간에 거기에 현혹되었다는 말은 나는 망해야 마땅해, 가 아니라 나는 복 받아도 마땅해, 라는 그러한 정말 잘못된,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 거짓된 선지각, 선이해가 인간을 에돔으로 만들어서 인간을 진짜 지옥으로 가게 만들어버려요.
이렇게 따지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천국 가려고 왔다가 천국이라는 이름의 지옥으로 이끌림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을 빼버리고 긍정적 마인드, 적극적 사고방식, 자알~ 될 거야, 뭐든지 잘 될 거야, 기도하면 잘 될거야, 헌금하면 잘 될거야, 봉사하면 잘 될거야, 목사 말 들으면 잘 될 거야, 선교하면 잘 될 거야.
마귀가 그 사람의 망한다는 이야기를 왜 마귀가 안 해주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십자가 쪽으로 못 가게 만들어서, 천국 쪽으로 못 가게 만들어서 주님도 이 땅에 와서 망했는데 건방 떨면서 지는 안 망하겠다고요? 죄 없는 주님도 죽게 만든 이 세상에서 지는 죄도 있으면서 안 망하겠다? 무슨 심보가 그런 더러운 심보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한테 ‘너는 개’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제파악 못했습니다. 날 때부터 이상한 악마의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환상과 망상과 허구와 이상한 희망 같은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질해왔습니다. 이제는 그 어두운 안개를 걷히고 십자가만 바라보게 해주옵소서. 그것이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