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4:1-12 / 가난한 자리
가난한 자리
이근호
2021년 5월 9일
본문 말씀: 욥기 24:1-12
(24:1)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24:2)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24: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24:4)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 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24:5)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24:6)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24: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24:8) 산 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24: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24: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 단을 메며
(24:11)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24:12) 인구 많은 성 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은 분류하고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 그리고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임의로 구분짓습니다. 과연 욥은 그럴 자격이 있던가요? 욥은 자신의 이러한 분류가 자신을 공격하는 그 친구들도 동감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가난한 자요 병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모두들 동의하는 선인과 악인, 그리고 부자의 횡포와 가난한 자들의 일방적인 학대당함을 산뜻한 분류는 소위 가지고 건강한 자들의 안도감의 발로일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그 심보는, 자신이 저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았음에 오는 여유 부림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부인 못할 명쾌한 정리와 분류를 제시해도 그것은 어디까지 문제 제시이지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평생토록 질문만 하면서 지냅니다. 답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다가도 그 기점에 오게 되면 그동안 보이지 않는 새로운 질문이 발생됩니다. 이것이 이방민족의 한계입니다.
숱한 질문과 질문은 항상 자신에게는 하자가 없다는 의식이 함께 작용합니다. ‘인간은 답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답을 갖게 되면 그것으로 독자적 영역으로 삼고자 테두리를 쳐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안에 자신을 폐쇄적으로 감금시키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묻기 전에 먼저 움직이시는 경우를 알아야 합니다.
욥이 당한 처지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신 증거가 됩니다. 인간이 욥처럼 고통을 받는다고 마땅히 정답을 아는 게 아닙니다. 고통이 모든 해답을 제공하는 최종 지점이 아닙니다. 그 밑 자리, 바닥의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면 됩니다. 그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히브인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왜 자신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가해지는 고통과 압제 속에서 히브리인들은 무작정 견디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은 어느새 노예 생활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자신들의 마땅한 삶의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오해는 모세가 애굽 왕에게 찾아오면서 밝혀집니다. 힘겨운 일상에 더 심한 학대가 부가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도저히 참을 수없어 애굽왕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듭니다. 여전히 그들은 고통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20-21) 히브리인들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보수적으로 나옵니다.
단지 고통이 덜 주어지면 그것은 자신의 자리로 간주하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로 인간들을 이런 식으로 길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자리가 세상을 밝혀주는 최종의 자리가 아니라 그 깊은 원천이 있었습니다. 왜 고통이 와야만 하고 왜 인간들이 고통에 대들 수 있느냐를 말해주는 더 원천적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의 노예’라는 겁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단순히 세상 권세의 노예 정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죽음의 노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인간의 마땅히 가난해야 하고 마땅히 죽어야 될 대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자리가 본래의 자리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가 없습니다. 죄 지은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마땅히 가질’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자로 분류해서 세상 지도를 그리고자 할 것이 아니라 출애굽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 자체가 정답을 지니신 하나님에 의해서 테스트 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세상의 삶을 통해서 세상 힘에 과연 어떤 자들이 놀아나고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즉 세상 욕심에 준해 마구 마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 탓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자는 마땅히 가난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부자가 부자로 사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등쳐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자로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잠언 29:13에 보면,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경제적 사정을 가지고 불평등을 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16:4에 보면, “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적절한 할당을 통해서 이런 세상을 형성하신 하나님의 숨겨진 원칙에 눈이 떠야 하는 겁니다. 잠언 13:7에 보면,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른 면을 보신다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저의 것이다“고 했습니다. (마 5:3)
하나님께서 하시는 내리시는 심판은 일방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테스트는 ‘결코 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니라’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섬김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을 믿으면 안됩니다. 복음에서 관심이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다른 것에 관심두기 마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상식은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82강-욥기 24장 1~12절(가난한 자리)2105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4장 1~12절입니다. 구약성경 783페이지입니다.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 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 고,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 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지금 방금 나열된 욥의 세상에 대한 자신의 세상관 또는 현실관은 언제든지 같은 인간으로서 동의가 됩니다. 동의가 되는 이유가 가난한 자는 불쌍한 사람들이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뜯어 먹었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는 이러한 생각은 곧 가난한 자를 동정한 것 같지만 자기 가난한 자가 이 정도로 가난하지 않게 되었다는 자신의 안도감을 표시한 겁니다.
큰일 날 뻔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유있는 자가 불쌍한 자를 보며 내가 그런 처지가 안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심정으로 삼가 조의를 표한다는 너그러움의 발로일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걸 내색하면 안 되지요. 모진 인간이라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못된 인간이라고 욕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이 가진 자가 명예롭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소위 신사도에 입각해서 동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욥기 24장 25절에 보게 되면 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그러니까 이 말은 “내 생각이 너희들 생각과 너희들 보기에 틀린 말 안 했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욥은 지금 계속 누구에게 물어보느냐 하면 같은 인간급들 하고 자꾸 물어보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이 이렇게 생겼는데 너도 착하다고 우기고 나도 착하다고 우긴다면 가난한 자를 가난한 자로 불쌍히 볼 줄 아는 안목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대해서 너희 친구들아 나에게 뭐 할 말 있나? 없지? 그렇다면 너희들이 거기 동의한다면 나 지금 가난하잖아. 가난한 사람을 자빠진 데다가 더 밟으면 되겠어? 뭔가 동정이라도 해야지’라는 그런 조로 지금 욥은 친구들에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아프단 말이죠. 장애자이고 아프다는 말입니다. ‘아픈 사람을 그렇게 밟아야만 하겠어.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어?’라고 하는 것처럼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을 지근지근 씹듯이 밟아야 너희들의 편안함과 여유만만함이 빛이 나는 거야? 그렇게 못돼 먹었어?’라는 식으로 욕설 아닌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욥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준다든지 부자를 어떻게 처벌한다든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당한 처지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 보니까 비로소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불균형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필히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지금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성경에 지금 욥의 말이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욥의 친구라면 친구들은 욥에게 뭐라고 반박이 되겠습니까? 반박 안 됩니다. 반박될 수가 없어요.
그 반박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은 땅에 살면서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뭐만 자꾸 내지르냐 하면 자꾸 질문만 해요. 질문만. 어린아이가 세 살 네 살 때 말 떼자마자 질문 시작하는 겁니다. “엄마, 저게 뭔데? 저건 뭔데?”라고 시작해서 나중에 95살 되어서 요양병원에 누워서 숨 겨우 쉬면서 옆에 산소통 보고 “저거 뭔데...”
이렇게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버려요. “돈은 얼마나 나오는데?” “아버님,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아니, 걱정된다. 아프면 돈은 얼마나 나오는데. 보조금은 얼마 받는데” 이런 식으로 인간은 해답이 없어요. 계속 질문만 전개하는 겁니다. 해답은 자꾸 지연시키고 해답이라고 가졌는데 보니까 그것이 해답이 아니고 거기서 질문이 또 나와요.
학교 선생님들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가 자기는 실력도 없는데 아이들이 자꾸 질문하니까 그러죠. 그게 선생님들이 괴로워요. 왜냐 하면 아이들의 질문 기준이 뭐냐 하면 강남에 있는 학원 강사 기준이거든요. 그 강사들은 선행 학습해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삼각함수 가르치고 미분 적분 가르치는데 학교에서는 평균 맞춘다고 진도 빨리 못 나가니까 선행학습 그렇게 못하죠. 그러면 아이들은 “쌤은 실력이 없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 생각하는 겁니까?”라고 의심을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권위가 안 먹히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중심을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냥 지도를 그린다고 보면 됩니다. 지도를 그려서 거기에 악인은 이러하고 선인은 이러하다고 자기 마음대로 분류를 하는데 그 분류하는 의도가 항상 자기는 착하다고 전제하고 분류를 하는 겁니다. 선인은 이렇다고 악인은 이렇다고 명확하게 분류하죠.
세상에 맛이라는 것도요, 명확한 맛이라는 것이 없어요. 트러플이라는 송로버섯 맛 오일로 강냉이 팝콘을 튀기면 맛이 이건 한국 백화점에서도 안 파는 맛이에요. 이상한 맛이에요. 극장 영화관에서 먹는 그 버터 맛이 아니고 다른 맛을 섞었어요. 섞었는데 기분상 어떤 기분이 드느냐 하면 건강할 것같아요. 이걸 먹으면 절로 건강해질 것같아요.
버섯이 재료니까 맛도 희한하고 건강할 것같아서 자꾸 댕겨요. 새우깡처럼 손이 자꾸 가요. 하나 먹으면 또 하나 댕기고 자꾸 손이 가요. 그처럼 분류되지 않는 이 땅은 선인과 악인이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을 욥도 알아요. 그런데 욥은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왜 분류되지 않는가를 몰라요. 왜 가난한 자는 당하기만 하고 부유한 자는 성하기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 이유를 지금의 정치하는 사람과 인문학 하는 사람도 몰라요. 왜 가난한 사람이 등장하는지를 모른단 말이죠. 정주영 총수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똑같은 사람 열 명 모아놓고 전부 공평하게 삼천만 원씩 다 주고 한 달 후에 보면 다 거덜 낸 사람들이 있고 한 달 뒤에 1억을 만든 사람이 있다고요. 하루 세끼 된장찌개 먹고 살았던 그 정주영은 그렇다는 지도만 그려요.
부자 될 사람은 부자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된다. 도와줘도 소용없다는 말이거든요. 도와줘도 소용없는데 왜 도와줘도 소용없는지 해답은 모르고 돌아가셨습니다. 오래전에 해답도 모르고 돌아가셨어요. 욥도 욥 친구들도 지금 해답을 몰라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문제를 던졌으니까 우리는 해답을 알아야 하겠죠.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리가 인간을 만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리가 인간을 만드는 것을. 사람은 사람 있기 전에 사람이 마음이 끌리는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자리를 부여받아요. 어떤 결혼 7년 된 여자가 결혼 7년 차인데 늘 남편에게 화가 나는 거예요. 남편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남편이 해결을 못 해서 어느 보살을 찾아갔어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살에게 찾아갔습니다. 서장훈입니다.
이 보살에게 찾아와서 고민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고민이냐고 물으니까 “아내가 7년째 프러포즈 안 해준다고 화가 났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벌써 결혼했잖아요. 아이까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된 마당에 프러포즈가 왜 그렇게 필요합니까. 이미 결혼했으면 되었지 왜 프러포즈가 필요하죠. 그 아내는 명분이 있었던 겁니다. 내 자리. 내 자리는 결혼해서 만든 내 자리로써는 충분치 않은 거예요.
그러면 그 자리에 뭐가 담겨야 하느냐면 무릎 꿇고 “여인이여, 나와 결혼해 주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장미와 더불어 그 반짝반짝하는 다이아, 웬다이아, 그 다이아를 장미꽃에 꽂아서 주면서 “이제는 당신에게만 이 청춘을 바치겠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이러한 이벤트가 필요한 거예요. 소용없다고 해도 그 여자는 귀에 들리지도 않아요. 소용없는지는 내가 결정하고 나는 그것을 듣고 싶다는 거예요. 몇 년째? 7년째. 남편도 고집 세지. 지금 7년째 안 해주고 있어요.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리가 해답이 되겠지요. 그 자리를 이 세상에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에서 없던 자리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자리는 이렇습니다. 모든 택한 백성은 가난해야 한다는 거. 차등 없이 가난해야 한다는 거. 심지어 부자라도 본인이 가난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거예요.
돈이 많은데도 가난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자라도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됐으면 하죠. 돈도 있으면서 마음은 가난하고 그랬으면 하죠. 잠언 13장 7절에 보면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우리 교인들에게는 하등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이것도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 되네요. 사람들은 조금만 있어도 있는체하고 싶어 하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지혜는 뭐냐 하면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가난이 본래 너의 자리라는 겁니다. 가난.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유명한 노래 ‘타타타’ 가사가 나오죠. 우리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리라. 그저 웃음 한 번 웃을 뿐이지. 타타타하하하. 양인자가 작사하고 김국한이 부른 노래죠.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 없이 옷 한 벌이라도 건졌으면 수지맞는 장사잖소.
지금 욥의 문제점은 자기가 고통받고 있다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물론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욥이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의 고통이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고통이. 인간이 아프다고 해서 고통스럽다고 해서 비로소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직까지 뭐가 모자라느냐.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죄의 종이라는 거, 그걸 몰랐던 겁니다.
바로 출애굽에서는 그걸 알려주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받는 너희 히브리인들은 지금 애굽의 노예다. 그러면 애굽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다룰 때는 덜 고통스러워요. 약간은 노예니까 고통스러운 삶이겠지만 덜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뭐냐 하면 모세가 아론이 와서 생뚱맞게 그 히브리인 중에 애굽에서 나갈 사람 아무도 없는데 그냥 애굽에서 살고 싶을 뿐이죠.
미국에 온 멕시칸 사람들은 주로 허드렛일만 하거든요. 이민자들은 유럽에서나 미국에서 주로 그런 일을 하잖아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네팔, 미얀마에서 온 사람들 힘든 일 하잖아요. 돈 모아서 수백만 원 자기 본국에 보내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힘들지? 너희 나라로 가거라”라고 하면 가겠습니까? 안 갑니다. 지금 히브리인들에게는 너희 나라도 없어요.
죽이든 밥이든 그냥 고통스럽더라도 살아야겠습니다. 그냥 살아야겠어요. 살아야 하는데 모세나 아론이 와서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 섬겨야 하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 만들어서 섬기겠다고 하니까 내보내라고 이야기할 때 애굽 왕 바로가 약이 올라서 고통에 더 고통을 주었어요. 그럴 때 비로소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종이 아니라 자기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고통의 종이 아니라 고통보다 더한 인간 근원적인 죄가 본래의 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이 권세 앞에서는 나는 이 권세에 도전해서 나는 나가기 싫다. 그러면서 도리어 누구를 공격하느냐면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고요, 어느 정도로 공격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공격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죽여버리시옵소서.
그나마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하는 우리를 그렇게 더 괴롭게 만드는 그런 눈에 가시같은 존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 응답하셔서 그냥 없애버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악마가 죽음을 무기로 해서 우리에게 겁박하고 협박한다고 했어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서”에 그다음에 필히 나오는 서술, 당연한 문장이 뭐냐 하면 악마의 종이 되었다는 거예요. 죽기를 무서워서. 그러면 악마를 이겼다면 악마로부터 십자가 피로 해방되었다면 용서받았다면 악마에게 더이상 당할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이건 뭘 뜻하느냐. 죽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이야기로 대신할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악마를 이긴다. 악마는 무섭지 않다’라는 이 말이 더 무서워요. ‘악마야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이 ‘죽음아 물러가라’라고 들리는 거예요. 나만 들리나요? 이 세상은 죽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질문만 던지는 거예요. 곡성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뭣이 중한디?!”라는 전라도 말인데 무엇이 중요하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답변이 없네.
뭣이 중한데? 인간이 자기 본래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중합니다. 그래야 내가 고통받아도 마땅하고 가난해도 마땅함을 알아야 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안 죽는다는 것은 이거는 뻔뻔한 짓이에요. 죄인인 체로 이만큼 살아온 것도 다행인 줄 알아라. 뻔뻔한 짓인데 세상은 지도를 그려놓고 선인과 악인을 구분해요. 뭐라고 구분하느냐 하면 욥과 같아요.
악인은 빨리 죽어야 하고 선인은 오래 살아야 하고. 그렇게 선악적인 지혜를 발휘한다고 주께서 인정해 줍니까? 1983년 9월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사건을 다 잊었겠지만, 그 사건에 해당되는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해요. 뭐냐 하면 대한 항공 007편이 러시아 미사일에 격추되어서 269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이에요. 우리가 보기엔 그냥 269라는 숫자잖아요.
숫자의 횡포가 이런 겁니다. 그냥 숫자 269예요.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따져보면 자기 집안사람에게는 천하보다 귀한 거예요. 거기에 누가 탔느냐면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아서 막 취직되어서 한국으로 그 비행기를 타고 오던 사람이 죽었어요. 박사학위 받는다고 10년 이상 고생해서 돈을 수억 들여서 박사학위 받아놓고 그 비행기 타고 아다리 잘못되어서 미사일 맞고 그냥 공중에서 죽었어요.
러시아에 어떤 배상을 요청해도 소용이 없고 보상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박사학위도 공중에서 그냥 산화되고. 마유미 사건도 마찬가지죠. 마유미라는 이쁘장한 여자가 폭파물 설치해서 미얀마 상공에서 터트렸죠. 한국은 미얀마와도 관련이 많아요. 아웅산 테러사건도 미얀마고요. 그럴 때 사람들은 그걸 안타까워해요. 그다음부터 이유를 찾습니다.
저렇게 박사학위도 받고 훌륭한 사람이 왜 죽을까. 질문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박사학위 받을 동안 살아있는 것은 누구 은혜였죠? 질문을 바꿔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엉뚱한 자리에 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눈에 안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시험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테스트받았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주인공이 아님을 확인하는 테스트가 시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바로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면 안 되는데 같은 인간들끼리 계속 만나고 부지런 떨면서 내 자리, 네가 출애굽 되었는지 구분을 하며, 네가 진짜 구원된 사람 맞는지를 늘 확인시켜 나가요.
그래서 너희들이 시험받을 때 하나님에게 시험받았다고 하지 말고 네 욕심이 시험받았다고 이야기하란 말이죠. 이게 야고보서 1장 13~15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게 바로 우리 자리예요. 이게 우리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욥의 이러한 태도, 어떤 의미에서는 교만한 태도, 자만한 태도에서 우리도 역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성경 욥기를 왜 줬느냐. 너랑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 여기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해답도 모르면서 질문만 던지는 사람 여기 있다고.
그리고 여기 가난한 사람들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리 사회복지가 잘 되어도 모든 실험, 정치적 실험, 법적인 실험을 백날 해도 나중에 가면 갈수록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결국 빈부차는 더 벌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해결할 거야. 그 해답은 이미 잠언서 29장 13절에 나와 있어요.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잠언 17장 5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니까 이 땅에서 서러움 받는 자를 가난한 자를 앞장세워서 확인 절차에 나서시는 거예요.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전부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잠언서 14장 31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저들을 지으신 분을 멸시하는 것이나”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일부러 출애굽 할 때 다 가난하게 만드신 이유는 어떤 자가 나중에 농사 좀 잘 되고 노력 좀 했다고 해서 부자 되더라도 이건 너의 성실과 너의 착함과 무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자 되게 하셨기 때문에 부자 된 거니까 그걸 가지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한 방에 훅 가요. 그러면 가난한 자가 왜 있습니까. 그건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모조리 다 너희가 가난한 자 부유한 자를 손댈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죽음, 인간의 욕심, 인간의 죄, 이 죄가 인간의 기본 자리라는 것을 해답을 모르는 욥을 통해서 우리의 심정을 지금 대변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인간의 심보가 얼마나 죄악 되고 욕심이 많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중국에서 특가 관광상품을 내세웠어요. 놀러 간다고 하니까 이 상품이 특가로 나왔다는 거예요. 우리 한국 돈으로 3천 원. 여비 주고 점심 주는 일박 관광상품이에요. 사람들이 엄청나게 갔지요. 갔는데 어디로 갔느냐 하면 공동묘지로 관광 보냈습니다. 관광을 왜 공동묘지로 가느냐 하면 공동묘지 조성한 회사에서 한 자리 사라고 3천 원 주고 점심 주고 여비 준다고 하니까 간 거예요.
공동묘지로 가는 거예요. 그 뉴스를 접하고 우리 일생의 모습과 어찌 그렇게 빼닮았는지요. 기껏 살아보려고 뭐 암 등록했다, 아프다, 보험료 나온다 안 나온다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는 곳이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고 아직도 자기 자리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없어도 되고 지금 죽어도 무방한 죄인이라는 사실. 그러면 이 죄인을 이렇게 해답을 알게 하시는 그 해답, 그 해답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철없다고 남에게 몰아붙일 것이 아니고 우리는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난한 자를 조롱하지 않고 동정하지만 그만큼 여유만만함을 과시하는 행동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