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9:7-10 / 뿌리

정인순 2021. 4. 1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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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근호
2021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아모스 9:7-10

(9: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9: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9: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평소에 인간들이 무척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 세상을 멸망의 대상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근원이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것이 바닥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숱한 나라와 민족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다양함도 처음에는 하나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일관성을 가지고 하십니다. 처음의 취지가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만큼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못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배후에서 사주하고 있는 악마가 간교하고 영악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뱀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즉 뱀은 기어다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뱀은 바닥을 기어다니기에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늘 받고 삽니다. 그런데 이 악마가 영악하고 간교하다는 점을 감안해봅시다. 마치 저주를 안받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그대로 인간의 본성으로 덮쳐졌습니다. 인간들의 삶도 이 뱀을 닮았습니다.

매순간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모든 몸짓과 행동은 이러한 공포를 애써 감추고 불안감을 덮어보려고 애써는 삶이 됩니다. 단순한 허세 정도가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인척’합니다.

이 말은 곧 멀쩡하고 당당하고 여유 있는 자아상을 따로 설정해놓고서 그 모델되는 자아상과 자신이 일치된다고 상상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대성공하고 선하다는 평을 받아도 이 땅에서 올라오는 공포와 불안감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가면서, “이 정도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그지?”라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즉 자신의 바닥과 뿌리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럴 사하게 보이기만 하면 공포와 불안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단정짓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조치는 각 민족의 뿌리를 노출시키는 겁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그 뿌리 말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그 뿌리 말입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자기 존재를 거꾸로 뒤집어서 뿌리가 보이도록 조치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이유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면서 북쪽으로는 아람나라를 배치하고 서남쪽 해안가에는 블레셋 나라가 기거하도록 배치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뿌리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경우에 있어 지금 아모스 당시의 상태는 마치 ‘구스인’ 같다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13: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은 피부가 까맣습니다.

그리고 이 까만 피부는 타고난 것이기에 바뀔 수 없습니다. 구스인의 피부 색깔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죄도 이와 같다는 겁니다. 표범의 반점처럼 저절로 살아질 성질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손대시는 조치는 이스라엘에게 체질을 행사하는 겁니다. 즉 세상 만국으로 이스라엘을 체질하게 하시겠답니다.

그래서 알곡의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을 골라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과 거짓된 이스라엘 사이에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내려주신 약속입니다. 아담의 아내 이름이 ‘생명’입니다. 이는 남편 이름이 ‘죽음(흙)’인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약속의 주인공은 ‘여자의 후손’입니다.(창 3:15) 자신이 존재 바닥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감당못하는 인간들에게 있어 생명의 뿌리로 갈아치울 재주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빛낼 그런 인물은 이 세상의 혈육번식의 원리로서는 출생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7: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로부터 태어날 아들이 있고 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자들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즉 뿌리로부터 저주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올라오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전 만국을 체로서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는 성도들이 이 세상 삶을 통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경험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체험이 그대로 성도에게 전달됩니다. 이 세상은 자신의 저주스러운 뿌리를 감추기에 급급하지만 성도는 새로운 자신의 뿌리를 자랑합니다.

그 뿌리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이 뿌리는 그동안 만족이나 이스라엘에게 알려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복음 이후에 알려진 겁니다. 로마서 16:25-26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에 준비된 성도의 뿌리가 마지막 때인 지금에 와서 나타난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런 비밀이 찾아왔을 때, 성도는 어떤 체험을 갖게 됩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순간 속에서 집중되어 정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는 순간이고 시점이기에 더 이상 본인이 나서서 염려하거나 걱정할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본인이 조성할 필요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가질려고 자수하거나 반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초의 비밀에 체포되는 겁니다. ‘아름다운 구속(拘束)’입니다. ‘사랑의 구속(拘束)’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자신을 위장하거나 조작하지 말고 우리의 뿌리되시는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