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29 / 천국 요소 / 210412
녹취:한윤범
20210412a 부산강의 : [시편]37(22편)-천국 요소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22편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이렇게 돼있는데 여기에 여호와를 찾는 자부터 먼저 규정돼야지요. 찾는 자가 23절에 보면 야곱의 모든 자손으로 돼있어요. 여호와를 찾는 자가 이방민족이 되지 못하고 야곱의 모든 자손,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해당되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이들을 친히 만드셨다 이 말이죠.
만드셨다는 말을 이렇게 보면 쉽지요. 뭐냐 하면 이걸(야곱의 모든 자손)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있느냐? ‘없음’이죠. 이스라엘이 만들기 전에는 없지요. 그러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있지요. ‘있음’이죠. 있음에서 없는 자리에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야곱의 모든 자손을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기에 점선으로 표시하면 돼요. 이스라엘은 뭐라 했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지요. 여호와를 찾는 자는 여호와가 계심으로서 만들어진 거죠. 이스라엘을 점선으로 하는 이유가 기존에 모든 종족들이 있겠죠. 종족 또는 혈족 또는 혈육 또는 민족, 이게 다 어디서 내려왔느냐 하면 아담에서 내려온 거예요. 아담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때문에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여기서 관계들이 다 끊어져요.
그래서 이 부분의 결론 내리면 이렇게 돼요. 이 세상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없다 정도가 아니고요. 있을 수 없다가 맞아요. 이게 뭐냐? 아까 시편 22편 23절에,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러니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여기서 슬슬 어렵기 시작합니다.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 누가 없다? 여호와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있으면 인간 쪽에서 자기가 예상해서 여호와를 찾으면 되는데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는 여호와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등장해서 없는 데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기존의 종족이나 혈족이나 모든 것은 여기서 차단되지요. 그런데 기존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를 인간으로 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그들이 보기에 뭐로 보입니까? 인간으로 보인단 말이죠. 인간 대 인간에서는 서로 너나 나나 똑같다는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래서 인간들 속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단 말이죠. 그러면 이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으니까 그 하나님과 여호와가 같은 하나님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많은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을 믿는 것은 마땅한 도리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 하는 것은, 인간이 신을 믿으면 인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을 경유해서 자기에게로 옵니다. 이걸 자기를 위하여 신을 믿는 것, 이것을 세상나라에서는 다 인정이 돼요. “너, 하나님 아는구나.”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이걸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이런 게 어려운데, 나 그 다음에 뭡니까? 나 외에 모든 신이에요. 다수의 신, 나 외에 모든 신을 믿지 말라. 더욱 더 어려운 이야기가, 그러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너희들은 다른 신 믿고 우리는 여호와 섬기겠다. 이러면 되겠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아시는 게 아니고 믿지 말아야 될 모든 신이 있는 그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을 집어넣어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 속에서 비로소 존재성을 드러낸다. 모든 신들 속에 들어오지 않는 여호와는 여호와가 아닙니다. 모든 신들 속에서 뭘 하느냐? 모든 신들 속에서 차별화를 요구하신다. 이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이렇게 바꾸면 안 된다는 사례를 들겠습니다.
“너는 신을 믿으라. 그 신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신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믿어라 또는 하나님을 섬겨라.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계명입니까, 계명 아닙니까? 계명 아니죠. 여기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인정해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데 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속에 여호와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신과 신 차이를 네가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지라 이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 궁극적인 절대적 일인자거든요. 일인자를 어려운 말로 일자라 하는데 최고의 존재, 그것도 유일무이한 2가 될 수 없고 오직 최종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것을 이방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최고의 하나님. 참 여기까지 따라오시니 감사합니다.
이방사람이 하나님 섬길 때 앞에 붙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한번 적어볼까요? 전지전능한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전지전능이니까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전지니까 모든 아니고 모든 게 가능한 하나님. 무소부재, 어디에나 계시나 없는 데 없이 다 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채워주고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그 하나님.
이 하나님을 불교에서는 세 번째 부처, 미륵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불교에 보면 이런 게 붙어있어요. 절에 가는 사람이나 교회 가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모든 걸 신적인 거예요. 인간은 나보다 월등한 존재를 믿는 것은 타고난 거예요. 본능적으로 타고난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절인지 뭔지 안 그러면 제일 값싼 휴대폰 간판이 붙든지, 파리바게트 붙든지 간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겁니다.
나약한 인간이 이런 것, 절대적이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점점 더 나아가는 것, 접근이라 하지요. 많이 나아가고 갈수록 더 선해지고 갈수록 더 거룩해지고 하는 이런 시도,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여기 3층이에요, 4층이에요? 이 3층에 가정집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집에 네 식구라 합시다. 네 식구가 잠을 자고 식사하면서 뭘 추구하고 기대하겠습니까? 이 가정이 신의 행복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인간들이 섬기는 하나님, 그게 가정이 되었든 회사가 되었든.
여기 만약에 회사라 합시다. 회사라 한다면 회사 대표된 사람이 직원들에게 지금보다 더 크고 능력 많고 확장되고 성장하는 그런 회사가 되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란 말을 빼더라도 그렇게 노력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겠지요. 그게 가정이라면 행복하고. 만약에 그게 교회라면 어떻게 돼요? 교회는 많이 들어봤잖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어린아이부터 주일학교부터 대통령까지 남북통일 해주시고 이런 것을 해결해주셔서 더욱 더 이 교회가 크게 해달라는 그런 것 하는 것, 그게 바로 이방신이에요. 모든 인간의 이방신입니다. 뭐가 빠진 거예요? 이게 이방신과 여호와와의 차이점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자기의 뭐를 지고? 자기 십자가거든요. 십자가가 장례관이거든요. 십자가는 관이라니까. 내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죽은 나에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죽었다가 사신 것은 누구 소관이에요? 여호와, 주님의 소관입니다, 라는 이것,
이것은 바로 인간이 살아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모든 시도가 계속 순간순간 자꾸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할 때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자기 가정, 자기 사업체, 자기 남은 인생, 자기 국가, 자기가 갖고 있는 교단, 교회가 다 포함되겠지요. 자기의 육신의 건강도 포함되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것을 부정하라. 살맛 안 나지요.
십자가란 말은, 네가 살맛을 내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주제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사는 재미로 살겠다면 너는 네 분수를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기가 무엇이 삽입되었느냐 하면 많은 다수 가운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첫 번째 도착했습니다.
많은 다수 가운데서 다수란 말 알지요. 그렇고 그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여기에 개입했어요. 그렇고 그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빨간 걸로 쓰겠어요. 전부 다 빨간 사람들이에요. 빨간 분 등장했습니다. 이분의 체험, 이분의 세상 살기, 세상 겪기. 이분이 갔던 길이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분과 하나님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그럼 까만 이 사람들의 신은 뭐냐? 허구지요. 허상이고 미륵보살이에요. 그래서 이 신은 까맣잖아요. 이 신의 특징은 뭐냐? 색깔을 까맣게 칠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빨갛잖아요. 아버지는 어떤 색깔이냐? 붉은 색깔. 이 세상에 투영된 색깔이 다른 것처럼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이 빨갛고 검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빨간 하나님, 예수님과 통하는 아버지 하나님, 이걸 빨간 걸로 쓸게요.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으로 연결된 하나님은 계시고, 이건 뭐라고 했습니까? 허구지요. 이건 허상이란 말이죠. 애초에 없었어요. 없는데 신이 있는 이유가, 인간이 자기에게 투사를 한 거예요. 하늘에다 자기의 마음을 내 소원을 거기다 담아서 신에, 또는 미륵보살에 투영을 한 겁니다.
시편 22편 29절 봅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그 다음에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까만 거죠.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그 다음에 어떻게 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앞에 절할 것이다.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결국 너희들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렇게 되면 분류가 됩니다. 뭐로 분류되느냐 하면 지옥과 천국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자,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이고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 다수가 있단 말이죠. 그럼 여기 천국 가는 사람 따로 있고 지옥 가는 사람 따로 있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지 이게 제일 궁금한 거예요.
사실은 그게 궁금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이상하게 궁금해요. 정답은 천국의 요소가 나오면 천국 가고 지옥의 요소가 나오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의 요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겪었던 그 체험, 언약적 체험, 예수님이 이 세상을 대하면서 경험했던 언약적 체험이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으로서 천국 요소가 되고 예수님의 체험이 안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체험이란 것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약을 다 이뤘을 때 그것을 크게 쓰겠습니다.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사건이란 이 말이 어렵거든요. 어렵지만 반대말로 설명하면 쉬워요. 사건 <-> 존재, 반대말이 존재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있음이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있음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없음이 되겠어요. 그러나 주님의 사건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죄인 되는 거예요.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되기 때문에 의인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있는 것을 산다고 이야기하고 없는 것을 죽는 것으로 이야기해요.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오셔서 알려준 것은 천국에서 네가 죄인이냐, 아니면 의인이냐?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생해도 겁 없이 떳떳하고 주눅 들지 않고 살았던 이유가 본인이 예수 안에서 의인 됐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굉장히 자기 하나님한테 벌을 많이 받지요.
벌을 받을 때마다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하는데 그 책망하는 근거가 뭐냐? 너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받아서 당해도 싸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가 된다, 의가 된다는 그 판단기준이 뭘까요?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스크 쓰고 입을 막고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거예요.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저주에서 내가 태어났다. 새삼스럽게 죄를 지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출생지 자체가 저주에요. 출생지 자체가 내가 쭉 죄를 안 지었는데 결정적으로 밥 먹고 살려니까 죄를 지었다.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출발 자체가 죄라는 긴 가래떡 있지요. 가래떡처럼 죄가 뽑혀 나온 거예요. 가래떡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시편 51편 5절인가 나오지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모친의 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 힘으로 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는 거예요. 여기서 응용문제, 심화질문은 뭐냐 하면 예수 믿음으로써 내가 죄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내 힘으로 죄에서 못 벗어난다면 예수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인간을 철저하게 일관되게 자기 부정을 쭉 가게 하는 겁니다.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 넘어서는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선 없습니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 안이라 하는 것은 아담 안을 지금은 과학시대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담 안은 여기서 일찌감치 죽었던 아담의 복제판이란 뜻이거든요. 그럼 아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DNA 들어있어요.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인간의 유전자 안에는 아빠 50%, 엄마 50% 해서 이게 아들로 갑니다. 아빠엄마와 아들딸 자식들 사이에는 50%씩 나눠가지고요. 형제들 사이에도 50%고요. 손자로 가면 팔분의 일, 12.5%로 내려가요.
그렇지만 혈육적으로 아무리 내려가도 DNA는 계속 복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에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인간은 DNA를 지니고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한 게 아니고 DNA가 인간을 복제한다. 이걸 발견한 겁니다. 1953년에. 만약에 어떤 여인이 임신을 했는데 DNA 조사를 해보니까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하면 의사가 태아의 DNA를 조작해버리면 아주 멀쩡하게 태어나는 그것을 2030년 쯤 되면 그게 보편화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없거든요. DNA의 발현체에요. 쉽게 말해서 발현체란 뭔 뜻이냐 하면 전구가 있다면 필라멘트 있지요. 이게 DNA라면 눈에 보이는 전구 알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선볼 때 그 집안의 DNA를 조사해야 돼요. 건강, 그리고 아이큐 얼마인지 성격은 어떻게 되는지 그걸 DNA 지도로 조사할 수 있어요. 괜히 머리 나쁜 애한테 공부하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과외비용만 많이 나갈 뿐이에요.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코로나 견디고 어떤 사람은 유행되자마자 걸리는 사람들, 그건 DNA가 약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국가에서 어떻게 하느냐? 평균을 내죠. 평균이란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개개인이 있지 평균이란 게 없어요. 인간은 개개인이 있을 뿐이에요. 개개인의 집단화될 뿐이지 인간은 개인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부부가 있잖아요. 부부란 것은 없어요. 개인과 개인이 만난 거예요. 일종에 동업형식으로. 넌 돈 벌어. 난 아이 키울게. 이렇게 만난 게 부부에요. 없다고요, 없어요.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에 목사 있다면 사람들은 오백 명 되는 교회 목사 좋겠다고 하지만 그 목사는 골칫거리에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오백 명 중에서 내 편을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알짜배기에요. 아쉬울 때 돈 푸는 사람들이에요. 오백 명 소용없어요. 자기 팬클럽이 중요하다니까. 방탄소년단처럼.
자기한테 미친 사람이 중요하지 교회라는 것은 아무짝도 필요 없어요. 귀찮기만 해. 교회에서 누가 귀찮습니까? 아프고 돈 없는 인간들, 돈 안 되는 청년들 다 귀찮아요. 공작이 안 된다니까. 내 편 되는 내 사람으로 유인이 안 되니까요. 그러니까 큰 교회 간다고 목사가 좋은 게 아닙니다. 골칫거리에요. 그저 몇 명 안 되도 한 결 같이 소박하게, 얼마나 소박해.
중요하니까 다시 할게요. 인간은 개인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간의 정신을 타인이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굴복하는 건 뭐냐? 서로 이용하기에요. 서로 힘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집단을 뭐냐 하면 바로 이방민족이라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도 이미 성경이 다 포함하고 있어요. 다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방민족의 신은 거기에 최고 우두머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왕이에요. 빈털터리 왕은 소용없습니다. 왕은 권력을 갖고 있는데 이 권력은 무엇을 보장하는 권력이냐 하면 생존을 보장하는 권력이에요.
아까 공부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와 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사느냐, 죽느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그럼 이들에게 이방민족에게 신은 뭐냐? 나를 계속 살려주는 신일 때 믿을 용의가 돼있어요. 교회 한 십 년, 이십 년 다녔는데 아무 수입이 안 늘어난다? 그럼 신을 바꿔야지요. 신을 바꾸든지 교회를 바꾸든지 해야지요. 왜? 교회 나올 때부터 신을 믿을 때부터 이미 목적은 확정되었어요. 내가 개인에 대해서 못 벗어나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해요. 나를 계속 살려주는 신이면 믿겠다는 거예요. 그냥 밥이나 먹여주는 신이면 교회 안 나와도 되지요. 이왕 먹는 것, 그 다음에 이 사회에서 대우받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권력을 모을 수 있는 신이라면 자기에겐 살아 있는 하나님이에요. 진짜 살아 있는, 찐찐찐이라 하지요. 진짜 살아 있는 하나님. 왜? 나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니까.
그래서 이방민족에, 창세기 4장에 나와요. 가인의 후예들. 이방민족에서는 너희들이 생존에 필요한 것 누가 많이 갖고 있느냐? 왕이 많이 갖고 있으니까 나에게 굴복하라. 그걸 사회의 서열화. 사회가 쫙 순서 돼있어요. 학교에서 일이삼 등 하지요. 사회에 나가도 삼성그룹부터 대기업부터 해서 중소기업, 하청기업까지 서열화 돼있어요.
당신은 누구냐, 라고 할 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무엇이다, 나는 ▭다, 할 때 네모 안에 무엇이 들어가겠어요? 나는 믿음이 좋아요. 이딴 것 아무짝 소용없어요. 교회 안 다니는 남편이 교회 다니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너는 뭐냐?” “나는 신앙이 좋아요.” 이러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짜증내요. “나는 요리 잘해.” "Good." “살림 잘해.” "Good." “애 서울대학 보냈어.” “잘했어. 계속 교회 다녀.” “이게 다 주님의 은덕이야.” “그건 듣기 싫고, 주님의 은덕이고 뭐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힘, 권력을 나한테 보여 봐. 당신 교회 다니는 것 방해 안 할게.”
이걸 다이아그램을 그리면 이렇게 돼요. 남편이 동그라미라면 남편은 항상 아내를 자기 것으로 이용하지요. 왜? 자기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걸 세상에선 배필자라 해요. 일방적이죠. 자기한테 필요한 사람.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치매 걸렸다, 아프다. 이건 어떻게 해서든 떼어내야 돼. 가위로 떼어내야 돼요. 돈만 나가. 연금 다 나가. 큰일 났어, 이제.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동그라미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이게 아내라면 남편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 가는데 헌금하고 내 인생 즐기는데 당신은 돈 벌어다오. 그런데 퇴직을 했어. 이제 돈이 안 나와. 어떻게 대충해야 돼요. 모든 인간은 이런데서 못 떠난다 말이죠.
그러면 이 그림을 이렇게 봅시다. 아내, 남편 말고 나를 집어넣으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겠어요? 바로 예수님이 등장하고, 하나님 등장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교인들 등장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에게 뭘 해주느냐에 따라서 나도 뭔가 드릴 용의가 돼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말하는 자기 긍정이라 하는 겁니다.
아까 자기 긍정은 무엇의 반대말이라 했습니까? 자기 부정이죠. 주님은 자기를 부정하는데 끝까지 인간은 자기를 긍정하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더 못돼먹은 짓을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뭐 하느냐 하면 자기 긍정하기 위해서 뭘 집어넣느냐? 여기다가 자기 부인하는 자기를 집어넣습니다.
어때요? 얄밉지 않습니까. 자기 긍정을 궁극적으로 노리면서, 그러니까 자기 잘 되기란 본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걸 따내기 위해서 극단적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가가 하는 짓이에요. 극단적인 자기학대에요. 교회 헌금하고 전도한다고 돌아다니고. 이게 극단적인 자기학대에요. 성경공부 참석하고, 성경 다 읽고 쓰고, 새벽기도 나오고, 40일 금식하고.
왜 이런 짓합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의 티를 내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다 동원하는 거예요. 늘 얼굴이 어두워요. 믿음이 없으면 안 믿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음을 가져야 구원된다니까 겨자씨만한 믿음 없으면 안 된다 하니까 억지 춘향 식으로 믿음을 계속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아주 목사님 뭘 할까요? 만날 뭘 할까요, 뭘 하면 구원받을까, 이런 식이라.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하겠어요. 이스라엘, 언약 나라는 없습니다. 이런 나라는 없어요.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야 되지 지상에 있는 어떤 영웅이 착한 사람이 메시아로 변한 적은 없어요. 공부를 많이 해서 메시아 된 게 아닙니다. 그런 건 큰 바위 얼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죠.
어떤 마을이 젊은 사람이 있는데 큰 바위 얼굴에 와서 우리 마을을 부흥시켜 달라 하니까 세월 지나도 안 나오는 거예요. 큰 바위 얼굴 닮은 사람. 나중에 보니까 그걸 고대하는 희망을 갖는 본인이 얼굴 모습이 늙어서 백발이 되니까 마을 뒤편의 큰 바위 얼굴 닮았다고, 당신 바로 메시아다, 라는 그런 유명한 호손이 쓴 단편소설이 있어요.
종교를 농락하는 거죠. 종교라는 것은 메시아가 있는 게 아니고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고 그런 것 없다. 그걸 문학가들이 조롱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조롱과 모욕당함, 그리고 협박이 없는데 이 체험이 성령에 실렸어요. 우리 아담 속에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일이 발생됩니다. 이건 사건이죠.
아담에 속했다는 말은 아까 강의 수십 분 동안 했는데 이걸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개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간은 고집이 있어요. 모든 것이 내가 도움이 돼야 돼요. 내게 유익이 돼야 돼요. 내가 도움이 되는 걸 선이라 하고 나한테 손해되는 것을 악이라 하는 겁니다. 선악이거든요. 인간은 이 고집에서 못 벗어나요.
예수님이 당했던 조롱과 모욕과 협박, 위협이 성령에 실려서 우리에게 와버렸습니다. 성령세례라 하지요. 잘 들어보세요.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이 인간이 뭘 했습니까, 뭘 노력했습니까, 시도했습니까? 안 했지요. 인간이 시도하는 것은 내가 절대적 내가 되는 것 외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지금보다 더 뛰어난 나, 멋있는 나, 내가 나를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는 나, 내가 나를 보고 뿅 갈만한 그러한 나가 내 생애에 유일한 낙이고 희망이고 보람이다. 그런 속 안에 갇혀있어요.
내가 나를 부정한다거나 내가 나를 멸시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라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 보세요. 지밖에 몰라요. 세뱃돈 주는데 형과 차이나 보세요. 난리 납니다. 특히 집안에 동서들 사이에 아버지 유산문제 때문에 난리나지요. 집 한 채씩 다 줬으면 만족해야 될 텐데, 큰 애는 남아. 둘째, 셋째는 집에 가고 형은 남았는데, “저기 있는 땅, 부동산은 네 것 해라. 쉿 아무 소리 말고.” 만약에 알려지게 되면 난리 나는 거예요.
인간은 타인이 갖고 있던 그걸 하나의 모델로 삼아서 어쨌든 그걸 따라붙어야 속이 뻥하고 뚫리는 존재에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아까 인간은 신을 믿지요. 신이란 나의 투영으로서 내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조건을 부여한 신, 절대적인 신, 전능하신 어떻고 하는 신, 이미 있는 여기에 주님의 모욕과 조롱이 찾아와서 들이닥치는 거예요. 들이닥칠 때 이것은 본인이 시도하거나 예상하거나 목표로 잡았거나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기도내용에 포함 되지 않는 내용이에요.
시편 22편 23절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말이 모순되지요. 두려워하는데 뭐라고요? 두려워해놓고 이걸 찬송이라 하지요.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예상 밖에 있는 내 머리에서 도저히 기대하지 않는 사건들이 왔을 때 절로 감사와 찬양과 고마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야곱의 모든 자손이 있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거에요. 야곱의 모든 자손이라 할 때 여기에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야곱의 모든 자손을 점점으로 합시다. 이제 빨간 걸로 누가 등장하느냐? 점 하나. 이 점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요셉입니다. 자, 요셉의 일대기가 나와요.
요셉이 아버지와 잘 살다가 애굽으로 갈 때에 점잖게 갔습니까, 아주 대우받으면 갔어요, 어떻게 됐어요? 요셉이 애굽 가고 싶어서 수학여행 가고 싶어서 갔어요? 누가 내보냈습니까? 여기 있는 점점, 검은 점에 있는 형제들이 요셉을 내보냈어요. 그러면 형제들을 생존의 세계라면 요셉은 여기서 밀려서 조롱받아서 밀려나기 때문에 이건 뭐냐 하면 주님의 세계, 다시 말해서 예측 불가한 세계, 예상 못한 세계, 이걸 성경에서는 꿈의 세계.
시편 104편에선 꿈의 세계를 바로 말씀의 세계라고 돼있어요. 그 대목을 보고 가겠습니다. 시편 105편 18절에서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지요. 제가 성경공부하면서 성경책 찾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귀찮거든요. 꼭 필요한 것만 하기 때문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존재하지 않았어요)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게 리브가에서 이른 말씀이거든요. 예언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은 무엇과 관련 없다 하느냐? 에서의 행위, 야곱의 행위와 관련 없이 그냥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야 했었고 야곱은 거짓말해서라도 장자를 빼앗아야 하는 이거는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밑에 인간들을 깔아놓고 위에서 말씀 안에 어떤 인물이 있고 그 인물중심으로 말씀이 다 집중해서 그 인물이 날아다니면서 그 말씀을 다 이룬 거예요. 이루고 그걸 투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하듯이 자기 택한 백성은 정조준해서 성령으로 투하해버리면 성령 받은 택한 백성은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 뒤집어쓰는 거예요. 물벼락 뒤집어쓰듯이 이게 웬 일이야?
또 물벼락 썼다 해서 물벼락 쓰지도 않았으면서도 조작하려하지 말고요. 물벼락을 진짜 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별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아는 거예요. 나는 개뿔도 아니다. 천당 가고자 하는 나도, 무슨 착한 일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려는 나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야곱이 거짓말했잖아요. 그것도 착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요셉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요셉이 점이에요. 점이고 요셉이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꿈 안에 들어 있습니다. 꿈은 시편 105편 18, 19절 말씀처럼 말씀이 응해서 요셉으로 간 거예요. 그럼 여기에 까만 걸로 요셉의 형들의 역할이 뭡니까? 이게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요셉의 형제들 역할이 뭐예요, 뭐하면 돼요? 이것 중요한 건데, 정말.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핍박만 하면 돼요.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주님을 매일같이 핍박만 하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왜? 개인은 절대로 개인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다 노림수가 있어요. 목적이 있다고요. 내 자식 잘 되고 우리 가정 행복하고 다 노림수가 있어요. 그걸 그대로 쭉 가라 이 말이죠.
그렇게 가게 되면 둘 중에 하나죠. 지옥으로 빠질 사람이 있고, 가면서 이게 내 본모습이구나. 교회 가서 인간 갱신프로그램 해서 새로운 인간 만들고 그게 다 마귀의 시험이잖아요. 그게 나라고 누가 장난질친 거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합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에요.
믿음을 시작하는 게 아니고 다 행함이 축적된 것, 행함을 축적해놓고 나중에 동그라미 치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관련돼있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믿음, 주님께서 체험 있잖아요. 제자들에게 밉상 받는 또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그 예수님의 체험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요. 소망이고 사랑이고.
10분 쉽시다.
20210412b 부산강의 : [시편]37(22편)-천국 요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이름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없는 존재, 그러니까 요셉의 형제들로부터 배제되었을 때 무엇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어버렸으니까. 있는 자에게 이름이 있는 이유가 이름과 하나씩 일대일 맺어줘야 되거든요. 아담이 하나님께서 이름 지을 때 그냥 짓는 게 아니고 앞에 지나가면 이름 짓잖아요. 하나의 존재가 있어야 일대일 대응이 돼요. 죽은 존재, 없는 존재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이름이 삭제가 돼버립니다. 이름을 없애버려요.
없는 이름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주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름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름 짓는 자한테는 어느 누구도 창조된 것은 이름을 지음 받게 되지만 창조하신 분에게는 누가 이름 짓습니까? 만약에 창조하신 분의 이름을 지어버리면 본인이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돼요. 지가 하나님 만든 존재가 돼요.
그래서 이름 없음을 출애굽기 3장 16절에 보면 나오는데 모세가 당신의 이름은 누구냐고 물어요. 이름이 있을 때는 이방신은 이름이 있어요. 상대를 해야 되니까. 이름을 부를 때에 조르르 쫓아와야 되거든요. 이방신은 시다바리입니다. 이방신이 인간의 하인이 되는 하인 노릇하는 이유가 받아먹은 게 있어요. 뒷방 시고모처럼. 나름 제물을 바쳤잖아요. 지가 받아먹었으면 내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거래가 관계가 유지되지 않습니까.
보통 안 믿는 사람들 제사 지낼 때 보세요. 그냥 조상신 부릅니까? 아니지요. 뭔가 유인책이 있지요. 좌청룡 우백호해서 대추 놓고 감 놓고 해서 거창하게 하잖아요. 이렇게 했는데 가만있기만 해봐라. 뭔가 받는 쪽은 주는 자에게 복을 낸다는 게 인간들의 기본 거래상식입니다. 이것 어기면 안 놀아줘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누구한테 받느냐 하면 일체 인간에게서 받질 않습니다. 구약 제사에서 받지 않는다는 말은 피 묻은 제물만 받는다는 뜻이에요. 속죄제 뭘 드려도 피가 중요해요. 피가 왜 중요하냐 하면 피를 성막에 뿌리고 제단에 뿌리는 이유는 이것은 우리가 드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말씀 안에 계신 분이 스스로 작용을 해서 하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에 우리가 시중들뿐이지 우리가 낸 것을 우리의 노동을 주께 드린 게 아니란 뜻에서 피를 묻힌다고요.
십계명에 안식일 있지요. 안식일의 특징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있지 않은 날이에요. 6일까지 인간이 노동하잖아요. 그날은 노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노동해서 이스라엘이 관리되고 운영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어져가는 게 아니다. 안식일의 되풀이, 안식일의 반복으로서 안식일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노동과 안식일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노동과 대비시켜 묻는 겁니다.
6일 동안 네 노동이 너를 살리겠느냐, 안식일에 주님 하신 노동이 너를 살리는지 묻는 거예요. 그럼 안식일 지킨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주님의 일하심으로 우리가 지난 6일 동안 밥 먹고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만약에 그날에 일해 버리면 뭐가 죽습니까?
내가 일한 것으로 인하여 내 가족이 먹고 산다는 것이 갑자기 부각이 되고 주님의 거저주신 햇빛과 공기와 잘 때도 움직이는 자율신경계, 내가 의지하지 않더라도 내장부분, 이런 것은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돼있어요. 잠잘 때도 위장이나 이런 기능은 쉬지 않습니다. 네가 숨 쉬라, 허파야 숨 쉬라. 이러다가 잠 언제 잡니까. 잠 못 자지요.
인간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지만 그냥 돌아갈 때 그게 잠이고 밤이에요. 그래서 밤과 잠으로 어제 날과 오늘의 날을 하나님께선 구분 짓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게 한 날이라. 날의 개념은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동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재단한 거예요. 너는 나 없이 못 산다는 것을 잘라낸 겁니다.
참새도 잠을 자고 코끼리도 잠 자. 죽은 상태가 돼. 아침 되면 내가 살려줄지 말지 내가 결정할 거야.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네가 아는 것과 네가 가진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완전 끝이 아니지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냥 손을 놔버리란 말이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자꾸 세다보면 잠이 안 와요. 백만 세 번, 배터리입니까? 세지 말고 그러다가 잠이 들어버리면 내가 숫자를 헤아렸기 때문에 잠 잔 게 아니고 그냥 본래 내 모습은 죽은 게 본래 내 모습이에요.
그래서 흙 이름이 아담이거든요. 흙에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돌아가니까 죽어도 절대로 손해 본 장사한 적이 없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니 이것 수지맞는 장사지 않소. <타타타> 김국환 노래에 나오잖아요. 뭐가 손해 봤어요. 없던 게 생겼는데 뭐가 손해 봤습니까. 없던 게 생겼고 생긴 게 없는 것. 뭘 따져서 손해라 합니까? 당연한 거지요.
성경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창세기 3장부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만약에 너한테 영생이 주어지고 생명이 주어지거든 그건 덤으로 여겨라. 마땅한 걸로 여기지 말고 내가 악바리처럼 기도해서 얻었다 하지 말고 그냥 생긴 거예요. 주의 뜻으로 천국 가는 것은 그냥 생긴 거예요. 지옥 가는 건 당연한 거고 지옥은 필수고 천국은 주님의 선택이고. 횡재한 거죠.
삼성그룹 이건희 보세요. 죽을 때 원불교 귀의해서 죽었잖아요. 돈 많은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은 살아 있을 때 있지요. 내 본질을 바꿔주지는 못해요. 돈이나 권력이나 내 본질은 못 바꿉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기가 서울시장 됐다고 해서 본질이 바뀐 게 아니에요. 여비서 건드린 본질을 어떻게 바꿔요.
그런데 마귀가 들어와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 나의 의미, 나의 가치는 아마 고상할 걸, 이러다가 자살했잖아요. 이것 버리면 자살할 이유 없다고요. 허상에 매인 거예요. 나는 괜찮은 존재다. 이런 허상,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 이게 전부 다 흙만 있으면 되는데 흙에다 플러스 허구가 귀신 씌우듯이 씌운 거예요. 이걸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든 겁니다. 꼭 가룟 유다 같아요.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물으면 이름 있음이 이름 없음으로 가는 거예요. 이름 있다는 것은 여기 존재한다. 존재란 말 어려워서 미안합니다만 이 말 외에 적당한 말 없어요. 인간이 여기 있다, 존재란 뜻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로 바꿉니까? 이름을 없애버리면 아까 했지요. 이름이란 뭔가 있어야 돼요. 이름 없음 하면 존재 없음이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있을 때 교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었습니다. 나의 구원, 나의 천국행, 나는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어. 이것이 이름 없음, 존재 없음이 돼버리면 뭐가 날아가요? 나의 구원욕구가 거부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론이 이단이에요. 모든 구원론은 다 이단입니다. 박옥수부터 해서 모든 구원론이 신천지부터 해서 전부 다 하는 것은 구원을 미끼로 집단화시킨 거예요. 돈 빼내고 재산 다 바치고 이런 것. 왜냐하면 내 자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마땅한데 세상에서 뭔가 들은풍월이 있어서 자기 존재 가치를 붕 업그레이드 시켜놔 버려요.
이름 없지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 새로운 이름이 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이름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구원욕구,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무엇이 유별나게 소중하고 고귀하냐?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과 이름 없음 사이에 뭐냐 하면 일부는 주인이 되고 나는 시킨 대로 움직이죠.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나는 종이니 그걸로 족합니다. 또는 이방여자 같으면 종이라 하지 않고 자기를 뭐라 합니까? 나는 개. 주님은 나의 주인이고 나는 개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에 있을 때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천국의 요소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새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새 언약 완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걸 다른 말로 다 이루었다가 나옵니다. 성도에게만 나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와요. 너 나이가 서른 살이 다 됐는데 앞으로 뭐 할 건데? 다 이루었다.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해. 뭘 다 이뤘어? 몰라. 주께서 하신 일을 다 이뤘어. 언제까지? 오늘까지만 그래요. 내일 되면 또 내일 주가 살려주니까.
항상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란 것이 주님의 일하심의 모판이라 보면 돼요. 모내기할 때 모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네모라는 하루하루가 시간단위로 이건 저녁이고 이건 낮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의식이 될 때 이건 의식 없는 무의식 상태, 이렇게 해서 그걸 계속해서 이어져나가는 거예요.
너의 모든 염려는 그날에 족하니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은 끊어졌다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존재를 미리 천국까지 연결시킨 이방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란 말이죠. 이렇게 딱딱 끊어줄 때 끊어준 관계,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끊어준 이 관계가 하나님의 그 나라와 그 의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어져버리면 주변의 환경을 내가 알아서 조성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의란 뭐냐 하면 주님이 가신 나라란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이 지옥 같은 세상에 중첩돼있는 거예요. 천국이 와서 지옥 가는 우리를 끊어주는 겁니다. 왜? 그딴 것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앞으로 대선 누가 될 것인가, 이재명이 될 것인가, 윤석열이 된 것인가?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물론 심심해서 할 일 없어서 남아돌거든 생각하세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번에 서울시장 누가 되겠느냐? 오세훈이 되겠느냐, 아니면 상대방 여자가 되겠느냐? 그런 것들의 뭐냐 하면 갑자기 이게 이어졌어. 주여 이틀만 봐주세요. 만약에 4월 14일에 딸 결혼식이 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하시기를 주께서 재림하신다, 구름 타시고. 갈등 일으키네. 14일 전에 재림하시면 딸 시집을 못 가잖아요. 살짝 짜증이 나는 거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딸 시집 보고 15일 재림하시기 바랍니다. 스케줄을 누가 짰는지.
여기서 이름이 있지요. 주의 이름, 아까 진도 나가봅시다. 이름이란 있을 경우만 있다 했어요. 그러면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지상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름이 어딜 와야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와야 돼요. 이 세상에 오게 되면 아담에 있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게 좀 어려워요.
인간들이 자기 이름이 있잖아요. 왜? 자기 조상이 있으니까. 이름이 있을 때는 시간과 공간이 구축돼있습니다. 인간은 나 어디 살아, 나는 여기 여기에 산다. 나이는 얼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를 구성합니다. 자기를 표현하기도 하고 구성해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 땅에 시간과 공간을 갖겠지요.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같이 있으면 이걸 중첩이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뭘 절대화시킵니까? 나의 절대화는 나의 시간과 내 공간을 절대시하는 겁니다. 절대시한다는 것은 주된 관심사에요. 어린애가 다섯 살 먹은 애가 서울시장 투표에 관심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관심 없지요. 엄마가 오늘 저녁에 뭘 내놓을지 거기에 관심 있지 관심 없어요.
애들의 주된 관심사는 뭐냐 하면 자기 몸에 지금 필요한 것, 자기 욕망에 필요한 그 범위 내에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저녁에 잡채 해줄게. 몇 시에 해줄 건데, 이러지요. 한 달 뒤에. 한 달 뒤를 애들은 몰라요. 내일모레 해줄게. 모레도 그 애는 몰라요. 곧 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의 시간과 공간은 베드로후서에 보면 주님의 시간은 뭡니까? 하루가 천 년 같지요. 공간은 사도 바울에 보면 예수 안, 같은 말로 십자가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이렇게 돼있어요. 같은 말로 말씀 안, 말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고요. 이 공간 눈에 보입니까? 이게 안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에 입각해서 세례요한에 의하면 하늘나라는 가까이 왔다. 인간들은 가까이 왔다 하지 말고 딱 집어서 열 시간 남았다든지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다시 복습해봅시다. 아담 안의 인간은 자기의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있다면 이건 존재하는 게 돼요. 이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내 시간과 공간, 환경을 통해서 내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할 때는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존재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의 가능성을 하는 거예요. 내가 실현 가능성을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자기 품에 딱 안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 하니까 인간들은 묻는 거예요. “스케줄 어떻게 됩니까?‘ 그걸 왜 묻느냐 말이죠. 사도행전 1장에서 내가 다시 온다 하니까 ”그때가 언제니이까?“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느냐 하면 인간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했던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의 시간이 그냥 덮쳐버립니다.
주님의 시간이 덮쳐버리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있어요.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소원이 뭐냐 하면 빨간 걸로 적을게요. “후딱 내 시간, 내 공간 떠나고 싶어요.” 빌립보서 1장에. 내 소원이 하나 있는 데 그 소원이 뭐냐? 빨리 육을 벗고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도 바울에게 이 체험을 해줬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내가 삼층 천에 올라갔는데.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되는 이걸 언어라 해요. 내 말로서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이 있더라. 낯선 시간과 공간은 우리 쪽에선 어떻게 이해되느냐? 이게 죽었을 때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육신이 떨어질 때. 죽었을 때 시간은 흘러요, 안 흘러요? 흐르지 않지요. 주님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그것을 시간이라 하지 않고 그걸 순간 또는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이십 년 기도했더니만 응답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성령이 임한 그 순간을 통해서 다시 돌아보니까 그때는 주께서 기도하게 하셨고 헌금하게 하셨고 성경 보게 하셨다는 것이 순간을 통해서 내 시간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이럴 때 나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고 누구의 기억이냐 하면 주님의 기억, 이런 점에서 성도는 이미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뤘는데 그 이룬 게 너무 지루해. 지루하고 너무 골치 아파요. 그냥 몸 건강하게 좀 가면 좋은데 아파요. 그러니까 다 이뤘다는 기간이 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당했던 시련과 고난을 공동체험하기 위해서는 남은 인생이 그냥 쉽게 가는 법이 없습니다. 예상 밖의 무슨 난리를 칠 줄 몰라요. 교통사고 일어나서 거의 초죽음 될 수도 있고 부도 맞아서 사기 당해서 있는 재산 다 날려서 생전 해보지 않은 거렁뱅이 체험도 해보고 온갖 것 다 해보게 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너무나 냉정하고 냉혹하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게 골라서 감사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는 아무것도 심각하거나 진지한 구석은 아예 없어요.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진지하고 대단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오뉴월에 개 보세요. 오뉴월의 개가 오일팔을 기억하겠습니까?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고민하겠습니까? 기름 값 오른 것 때문에? 그냥 잡아 잡수세요. 음력 오뉴월 됐으니까 빨리 나를 잡숫든지 하세요. 자기를 요리를 해먹든 그전에 자기는 낮잠 자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개가 인간보다 나아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잡풀도 주께서 오늘도 친히 기르시나니, 라고 돼 있잖아요. 공중에 새를 보라. 누가 저렇게 창고 있느냐, 없느냐 묻지요.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극단적이에요. 아담이란 범주 그 바깥에서 나오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율법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율법을 주셨거든요.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을 만드신 분이죠. 이걸 세 자로 ‘출제자’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율법을 왜 못 지키느냐 하면 출제자만 알지 우리는 모르거든요. 그 출제자가 낸 정답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의논한 정답은 뭐냐? 십자가뿐이에요. 그 십자가의 특징이 뭐냐? 어리석은 거예요. 인간들 눈에는. 어리석어야 정답이에요. 왜? 인간의 지혜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얼추 그 내용대로 해낼 것 같은 어떤 가능성과 실현가능성을 내비칠 때 인간은 의미를 두거든요.
제가 워치만 니와 잔느 귀용을 그렇게 부정하는 거기 있어요. 워치만 니, 잔느 귀용이란 16세기 사람인가 하는 여자, 그분들이 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이 팔리는 이유가 이게 대단한 분인 동시에 나도 얼추 따라붙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문제에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워치만 니, 잔느 귀용을 믿고 있어요. 그게 모범인줄 알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왜 모범이 안 됩니까? 막 산 강도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왜 모범이 안 돼요? 신세 조져놨거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거든, 그게. 세리와 창기와 강도는 왜 우리의 모범이 못 됩니까? 그건 안 해도 될 것 같거든요.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막달라 마리아 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반대로 거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산이 있으면 두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은 이쪽으로,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동일한 힘이에요. 동일한 힘이지만 방향 다르면, 수학에서 방향 다르면 같은 값을 주지 않아요. 이걸 벡터라 하는데 같은 양이면 스칼라 양이라 하고 방향을 붙이면(A 위에 화살표) 이건 다른 값이에요. 방향이 다르면 가는 운명이 달라져요.
아까 했던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쪽이 천국이라면 천국 가는 특징이 뭐냐? 천국의 요소가 발현되는 나오는 사람은 천국 가고 지옥의 요소가 나오는 사람은 이것은 아무리 교회 나오고 목사 되고 열군데 개척교회 하고 많은 기적을 베풀고 기적을 받아도 이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그 천국의 요소가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 에요.
그러니까 뭘 자랑하겠습니까? 네가 했나? 아니. 내가 행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은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보통 성경에 보면 십자가 자랑하지요. 십자가 입에 달아놓고 하는 것은 길거리 전도하는 사람 다해요. 그것 말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걸 알게 된 것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아는 것.
그런데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이 이게 가능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집에 10억 있으면 다들 그 정도는 갖고 있잖아요. 집에 10억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이 나의 유혹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사람이 10억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만약에 15억 갖고 있다면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은 고민에 빠져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내가 못 따라갈 것 같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골학교, 샘들과 학생들 숫자 적어서 친군지 선생인지 분간 안 되는 그런 학교에서 산수시험을 내는데 요새는 수학이라 하지요. 95점, 90점, 제일 못한 아이가 85점, 백 점도 여러 명 나왔을 때에 애들은 신났어. 우리 마을 애들이 이렇게 공부 잘할 줄이야. 그런데 서울서 전학 하나 왔어요. 개별 학교시험 말고 우리나라 전체로 하는 모의고사 쳤는데 백 점 맞던 아이가 10점, 5점, 7점, 서울서 온 아이는 95점.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자기 분수를 알았지요. 아 내 시공간 말고 다른 시공간 가면 나는 달리 판결되는구나.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끼리 배틀 시킨다고요. 헌금 배틀, 기도 배틀, 금식 배틀, 헌신 배틀 특히 봉사 배틀 시킨다고요. 하여튼 사랑받기 위해서 죽을 등 살 등 주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분하에 봉사한다고요. 그런데 여기에 다른 범주, 다른 시공간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쪽은 말씀 지킨다고 굉장히 분주했는데 딱 오니까 누가 지남철에 달라붙었느냐 하면 세리, 창기, 강도 이런 자들이 달라붙은 거예요. 이런 자들이 죄인, 이 자들보다 천국 더 가는 겁니다.
만날 이 사람들은 저들과 같지 않음을 자랑스러워했어요. 세리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하면 교회에서 껌뻑 죽잖아요. 십일조씩이나 하는데 이쪽에선 뭐냐 하면 땡 탈락이에요. 누구 때문에? 세리 때문에 땡 탈락이에요. 아까 언덕 그림 다시 보세요. 언덕에서 한쪽과 한쪽으로 갔을 때 천국 요소와 지옥 요소 갈라지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비유할 때 아침에 열 시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오후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있지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일 늦게 온 노동을 적게 한 사람에게 몫을 주니까 아침에 온 사람이 삐진 거예요. 배틀 없습니다. 이런 것 경쟁하기 없어요. 이게 아무 의미 없다고요. 달란트 비유가 어떠니 핑계대면서 자꾸 빼먹으려고 하는데 그런 게 교회가 아니에요. 그거는 보이스피싱이지 그건 돈 빼먹는 거지 이런 것 없어요.
어떻게 못났는데 천국을 가느냐? 이 이상한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찬미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요. 있을 수 없는. 목사가 교인에게 그딴 식으로 신앙생활할거면 우리 교회 나오지 마소. 진짜 신앙인은 뭐라 합니까? 내가 나오고 싶은데 니가 왜. 그저 하나 꼬시려고 뭐 대접해주고 빵 주고 우리 교회 좋습니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이거는 뭐냐? 다른 교회와 배틀하고 싶어서. 누가 부흥 속도가 빠른지 붙어볼까, 누가 하나님이 계신지 경쟁해볼까?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아까 시편 29절에 보게 되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새로운 영토 또는 장소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모두 누구한테 무릎 꿇는다? 주님에게 무릎을 꿇는 거예요. 이게 새로운 영토에요. 주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천국으로 가면 이걸 긍휼로 보고 이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에요. 주께선 둘 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거든요. 그러면 율법에 준해서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명기 28장에 네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거든요.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은 이걸로 입 다물어야 돼요. 끝났어요. 평가. 제는요? 이렇게 손가락질하면 안 돼요. 이걸로 자기 받을 평가는 다 받은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은 뭐냐? 이건 덤이죠. 덤 주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주님 마음대로에요. 이걸 마태복음 20장에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그 말씀 참 좋아하는데요. 20장 15절, 그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읽고 난 뒤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주지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걸 뭐라 보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이걸 선이라 하는 거예요. 선은 뭐냐 하면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악으로 결정된 거예요. 이게 좀 어려우니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악이에요. 죄인이에요. 왜 죄인이냐 하면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게 죄에요. 창세기 2장에서. 여기에 천국 간 사람이 긍휼 받을 때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뭐라 했습니까? 내가 선한 일을 했다 했지요. 그러면 선은 뭐냐 하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선이 돼요. 선악체제에서 벗어난 게 선이 된다고요. 이건 예수님의 세계에선 그래요.
인간세계에서는 선과 악을 본인이 결정해요. 그래서 악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천국 못 가는 겁니다. 율법으로 십계명 어기면 악이고 십계명 지키면 선이 된다는 주장하는데 문제는 십계명 지킨 위인이 없어요, 이 세상에. 율법을 지킨 위인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지킨 사람이 없어요. 다 못 지킨 정도가 아니고 단 하나라도 못 지켜요.
인간이 율법을 못 지키는 이유는 본인이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문제 출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답을 모르면서 나름대로 지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내가 문제 내면 내가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만들지도 않은 문제에 내가 지킨다는 것은 없어요. 그냥 백 점 해달라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만날 최선이래, 인간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좀 눈 질끈 감고 그냥 넘어가달라는 거예요. 내가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인간으로 이 정도했으면 봐줄만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게 어디 장난칩니까?
성도는 백 점이에요. 이름도 안 써도 무조건 백 점인데 여기 피가 있기 때문에. 피는 다 이루었다, 에서 나온 그 결과물이 피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받습니다. 왜 받느냐 하면 피 보고 받는다고요. 로마서 8장 10, 11절에 보면, 죽은 자를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다른 것 안 봐요.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살리지요. 그리고 그 영이 없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어떤 교파, 어떤 신학 이야기해도 그에 말려들지 말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
그 다음 문제에요. 집안 식구 넷이 다 교회 참하게 다녔는데 출석 잘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명만 성령 받았어요. 나머지는 종교생활, 취미생활하고 있어요. 이럴 때 성령 받은 사람이 나머지 세 식구 성령 받지 않더라도 천국 넣어달라면 한 명 성령 받은 것, 구라입니다. 가짜가 돼요.
로마서 9장 3절에 그런 말 있지요.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민족 유대인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만큼 헌신적 희생적인 말이 아니고 주님의 기준은 너무나도 단호하다는 거예요. 내가 압력 넣거나 주님 앞에 저 사람 좀 넣어주세요,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완전히 주님에게 일임된 일이지 내가 관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누굴 구원하고 안 하고는 아무리 천하의 사도 바울이라도 그걸 기도한다고 응답할 권리와 의무는 없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기도와 무엇과 관련돼있습니까? 응답과 관련돼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아닙니다. 오늘 시편 22편과 응답이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내 기도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시편 22편이 누구의 기도냐 하면 주님의 기도에요. 주님의 기도만 응답돼요. 그러면 우리는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시편 22편 내용을 발현되기 위해서 성도가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성도의 원칙이 뭡니까? 성도는 개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지요. 그러면 성도가 기도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답답하니까 하지요. 4월 13일에 딸 결혼식인데 12일에 재림하면 안 되지요. 14일 재림하세요, 15일에 하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지요. 이 답답함을 주님께서 불러일으키시고 그걸 묵살하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해버려요. 시편 22편을 우리 인생에 집어넣는다고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해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삶이란 어떻게 살아간다고요? 예수님을 핍박한다 했지요.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건 모든 인간 동일해요. 아담의 육신을 내가 어떻게 끄집어내요. 내가 어떻게 나를 비판합니까? 이 말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나를 반성할 수 없는 게 반성 주체가 난데 나를 항상 좋게 보지 나쁘게 볼 인간이 누가 있어요.
“주여 지옥 보내주옵소서.” 이걸 왜 기도합니까. “주여 내 자식 천국 가게 하옵소서.” 이래야 기도의 의미가 생기지요. “그저 우리 딸 지옥 가게 하옵소서. 내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안 하고 사춘기 있고 지옥 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응답이 뭔지 알아요? “가만 놔둬. 놔둬도 지옥 가게 돼있어. 지옥은 기본이야. 천국은 긍휼이고. 가만 놔둬도 지옥 가니까 기도할 필요 없어.”
사람이 기도한다는 것은 형편이 나아지길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나다움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생겼다는 겁니다. 목표가 뭡니까? 나의 나다움이거든요. 고집스러운 거예요, 이거. 나의 나다움, 한 10억 정도 되고 아픈 데도 없고 하는 일마다 손대면 다 일 되는 그게 나다움이에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남보다 더 예쁘고 더 잘 생기고. 나이 칠십인데 아픈 데가 없어. 이 정도 돼야 나다움이에요. 내가 아프기 위해서 살지 않잖아요. 안 아프기 위해 살지요. 그게 나다움이라고. 이 세상 욕망에서 다 온 거예요. 그게 나한테 가득 차있어요.
그런데 여기 뭐가 생겼다? 장애가 생긴 거죠. 누가 이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거예요. 이유가 뭐냐? 시편 22편을 내 속에 집어넣기 위해 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 안에 있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노력인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서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 응답되고 그 뒤에 마지막에 갖다 붙이는 것 있지요. 뭡니까? 보통 장로 기도할 때 빨리 끝나기를 할 때 마지막 모든 것을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할 때 속으로 박수 막 치고 속이 시원하다. 고만 해라, 고만. 이제 끝났나, 이런 식이잖아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붙는 이유가 앞의 것의 모든 나의 기도를 묵살해도 나는 좋소. 이 말이거든. 시건 없고 철딱서니 없는 이 기도, 이것 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대로 하세요. 이걸 십자가의 공통체험이에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했어요, 마지막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우리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최적화된 순간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내일 염려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덤으로 준 인생이고 다 이루었음을 내가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홀로 다 이루셔서 피로서 죄 씻음 해준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걸 반추하는 시간으로 허용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가 뭘 경유해야 돼요? 개판을 경유해야 돼요. 이게 그냥 나와 버리면 상투적인 조작이 된다고요. 배웠던 지식에서 나와서 신앙인인 척하는 기계적이 되지만 하나님께선 그런 기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되려면 매사가 우리에게 난처하고 곤란한 난감한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끝나고 나면 어떻게 돼요? 고맙고 감사가 되지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찾아봅시다. 이사야 2장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아까 영토문제, 공간문제 했지요. 주의 이름이 하나의 성전이 되고 시온 산에 자기 택한 백성 모인다 이 말이죠. 이게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이 돼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 사건을 일으키는 사건 돼요.
무슨 사건? 우리의 존재를 묵살하고 뭐로 바꾼다? 현재 너의 있음은 네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봐라. 존재에서 뭐로 바뀝니까? 늘 사건, 주님의 은혜의 사건, 말씀대로 이뤄지는 사건의 현장, 그것이 주의 이름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 된다. 이걸 모르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 지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것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그런 생각해요. 3차 대전 핵전쟁 터지고 이란과 이스라엘 붙어서 아마겟돈 전쟁하고 난 뒤에는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안 죽었어. 그러니까 자기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손으로 쥐는 것, 그럴 때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보고 믿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살아야 이게 신앙인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게 무슨 신앙이에요. 그건 과학이고 지식이죠. 남은 몰라요. 나 있는 곳에 주님이 어떻게 다루시는 것을. 남한테 언어로 이야기해도 납득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날마다 뭐하는가? 너 죄인이었잖아, 라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 누굴 위해 죽었습니까? 죄인이 있을 때 십자가가 의미 있잖아요. 따라서 십자가의 의미를 갖추기 위해서는 우리는 뭘 해도 죄인 되는 즐거움과 감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시편 주심을 감사합니다. 실행자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인 것도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 것을 받지 않고 주께서 시편대로 이뤄진 그 피가 다 이루었다 하니 우리에게 묻어져서 하나님께 날마다 드려지는 제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