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8:7-10 / 복제 세상

정인순 2021. 3. 1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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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 세상

 

이근호
2021년 3월 17일

 

본문 말씀: 아모스 8:7-10

(8: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8: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생각하실 때는 반드시 출애굽 사건의 재현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다. 출애굽 사건으로 인하여 애굽은 애굽대로 재앙을 받아야 하고 이스라엘에게는 그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가는 혜택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전에 애굽나라가 당해야 했던 재앙을 이제는 이스라엘이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의 영광’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취지와 이스라엘 취지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취지는 ‘언약의 완성체로서 나타나는 장자’였습니다. 지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은 언약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관여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영광’을 위한 출애굽적 상황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린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첫 번째 유월절 때, 이 상황을 위하여 몇 가지 요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라는 나라와 그리고 애곡, 그리고 밤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독자, 곧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등장입니다.

출애굽이 일어나게 되는 충족된 상황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의 나타남을 목표로 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언약 취지를 계속 이스라엘을 통해서 되풀이하기 위해 ‘유월절’이라는 율법이 주어집니다.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라는 율법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월절을 통해서 언약 정신을 구현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첫 번 출애굽의 정신인, ‘인간 배제’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인간 죽음을 분명히 하는 기념적인 날이었습니다. 유월절 그날 밤에 인간들은 거리에 나돌아 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출 12:22) 이는 그 누구도 자동적으로 안 죽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장자는 그 유월절 밤을 지나고 살아남았지만 애굽의 장자는 살아남지 못한 것은, 언약이 내뿜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 때문입니다. 즉 ‘살 자’와 ‘죽을 자’를 정하는데 있어 인간은 일체 관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장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 행사에 의해 결과적으로 부여받는 혜택입니다.

이 혜택을 입은 자들만의 집단적 단일체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이 취지에서 이탈하면 언제든지 애굽이 당했던 그 재앙을 마땅히 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언약을 위하여 유지되는 세상이지 결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느끼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현실을 읽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시간의 끝과 공간의 끝을 전부 다 돌아보게 합니다. 즉 하늘에 의해서 점령당한 땅의 마지막 광경을 드론 튜어(여행)하듯이 보여줍니다. 오로지 독자가 발생하는 이 언약의 목표를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야곱의 영광, 곧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영광 작업에 있어 굳이 애굽이 처참하게 망가져야 하는 이유는, 최종 독자(아들)로부터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상반되는 두 개의 그림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일방적으로 영생을 혜택을 받아야 자의 등장과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영원히 저주받아야 될 자들의 등장입니다.

따라서 언약 실행에 있어 이 상반된 두 가지 결과는 빠지지 않고 현장에 동반해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의 반복을 통해서 이 저주받을 인간 세계의 실제 모습이 다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언약 구현으로 등장할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모든 것들이 가짜라는 겁니다.

가짜가 가짜를 베끼고, 그 베낀 것도 또 베끼는 식으로 인간 세계는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그 가짜에 가치까지 엮어보려고 합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으면서 계속 가치가 있다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가짜가 진짜 흉내내고 모방하고 날조하고 위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유명한 마라토너가 희귀병에 걸려서 잘 걷지도 못합니다. 병명도 모릅니다. 그는 병원마다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병명과 치료법을 알기 위해서 갖은 애를 씁니다. 그는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봐서 ‘죽어 마땅한 존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 병입니다.

즉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라 언제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자신의 본질에 합당한 겁니다. 가짜이기에 가짜의 운명을 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의 세계에서는 가짜됨을 가리기 위해 실체를 찾아다닙니다. 병을 설명할 수 있는 실체를 찾고, 그 실체로서 모르면 그 실체와 실체 찾기에 또 나섭니다.

왜 인간이 가짜인 이유는, 우리의 행함으로 온 우주가 움직여주기 않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이 우리 소원대로 변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모두 진짜 아들이신 예수님의 지시에 따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담합해봤자 언약은 우리 손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언약을 위장합니다. 자신을 가짜로 여기지 않고 진짜로 간주하면서 그 속을 파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어 부활을 노립니다. 즉 시체가 진짜 부활되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과거 역사 속에 있는 획기적인 하나님의 일을 기념물이나 기념관 속에 안치하므로서 자기네들 역사 속에 언약을 묶어놓으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언약완성을 만들지 않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곧 언약 안에서 시간은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작용은 가시적이지 않고 사건입니다. 이는 ‘죽음 사건, 자체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입체적인 세상 모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곧 유월절 사건의 실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사체 안치소임을 보게 하옵소서. 그 가운데 예수님의 몸만 살아있는 존재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9강-암 8장 7-10절(복제 세상)2103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8장 7-10절까지입니다.

아모스 8:7-10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은, 처음 이스라엘이 생길 때의 상황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간주해서 애굽화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진짜 하나님의 장자를 끄집어내는 그러한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선언하시면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처음에 출애굽 할 때 몇 가지 전제가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성취해야 될 목표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야곱이니까 이름이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 나라 만드는 것, 이스라엘 나라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나라 만드는 작업이 수월하게, 순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편에서는 아주 애통해 하는, 애통하고 절통하는 그런 절망적인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통하고 통곡하는 그 때가 바로 깜깜해요. 낮이 아니고 밤이어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등장해야 되지요. 애굽 사람들이 그때 울어야 돼지요. 그 우는 시점이 깜깜한 밤이어야 하지요. 그들이 울기 때문에 마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치장한다든지 화장을 한다든지 자기의 얼굴을 꾸미는 것은 장례식장에서는 허용이 안 되잖아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한다. 머리가 홀라당 까졌으니까 꾸밀 것도 없지요. 빗질할 것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살펴볼 경황이 없게 그 정도로 넋이 나간 그러한 사태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 10절에 있는 대로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이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그 다음에 애통, 장례식, 독자를 잃는 것, 또는 독자를 얻는 것, 이게 같은 말입니다, 애굽에서는 독자를 잃었고 이스라엘에서는 독자가 죽었다가 얻어진 거지요. 장자가 죽을 뻔 했다가 얻어졌잖아요. 독자를 얻은 기쁨, 저쪽에는 잃은 슬픔.

 

극히 대비가 되는 두 가지 상황이 유월절이라는 그 사건에 의해서 동시에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한쪽은 너무너무 정신이, 넋이 나갈 정도로 울어버리고, 너무나 빼앗김의 아픔에 젖어서 울어버리고, 넋이 나갈 정도로, 혼이 나갈 정도로, 그리고 한쪽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그러한 경우가 발생 되는 것, 이게 바로 언약에 의해서 서로 상반되는 결과 두 개가 등장하게 되어있어요.

 

언약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기도 힘들 거예요. 대낮에 작대기를 하나 꽂아 놨는데 그림자가 두 개 생겼다. 이게 뭐 이상하지요. 태양이 두 개가 아닌 이상은 그림자는 하나만 생겨야 되잖아요. 우리 예수님의 그림자가 두 개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축복의 나라, 또 하나는 무서운 저주의 나라.

 

예수님의 한 몸을 통해서 두 개의 그림자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모순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주님에게는 생겨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언약을 다룰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되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 상황을 다시 보게 되면 첫 번째 유월절 날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라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출애굽 했던 그 날을 유월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건이 주어지고 그 사건을 역사 속에 되풀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만드신 겁니다. 절기 자체가 율법이에요.

 

율법 이전에 언약이 있고 언약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역사 속에 들어오는 방식이 바로 율법이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아까 들은 것처럼 이 언약에는 반드시 두 개의 상반된, 극히 대조가 되는 두 개의 결과를 낳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언약의 목적이 있을 텐데 그 목적은 출애굽기 4장 22, 23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여러분이 보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 아들 독자, 장자, 맏이입니다, ‘장자 만들기’라고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그런데 그 장자 만들기를 하시면서 그 바로에게 찾아가는데 바로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왜냐하면 시나리오를 누가 짰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짜 놨어요.

 

내가 모세를 보내서 바로 왕에게 이야기하기를 “내 아들 내 장자를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이렇게 하게 되면 일방적으로 바로의 의견을 경청하는 그러한 텀, 그러한 간격을 주시는 것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4장 22, 23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내 아들을 놓아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한다.” 이거 뭐예요? 내가 이야기해봐야 네가 듣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있어서 일체 인간은 배제된다. 저주받은 인간도 배제되고 복 받을 자기 백성도 배제가 돼요. 어떤 인간도 언약달성에 있어서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12장 22절에 보면, 출애굽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당부한 것이 있어요.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코로나도 이런 코로나가 없습니다.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 날 밤 골목에 인간이라는 것은 눈에 띄지 않게 하라. 이것은 인간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인간이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 구원은 그냥 주께서 홀로 하셔서 그저 주시는대로 얻어 챙기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인간이 나대다가는 저주의 천사 만나 가지고 즉사합니다.

 

유월절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은 생기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생기려고 하는 순간이었지 이스라엘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유월절 다음에 이스라엘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는 애굽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언약을 달성하는 그 상황극에서 애굽사람들이 하는 역할은 뭐냐 하면, ‘내가 놓아주라 할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역할, 그 역할만 하면 되는 거예요.

 

옛날 5, 60년대 한국영화에서 그 역할을 누가 했느냐? 허 장강이 했어요. 허 준호 아버지 허장강. 그 사람은 하여튼 악한 역할만 골라 했어요. 딱 거기까지 악한 역 하고 영화 마지막 되면 죽든지 망하든지 처참하게 되든지 그것은 이미 확정된 겁니다.

 

그런데 그 악한 역할을 오늘 아모스에서는 누가 하느냐? 애굽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북이스라엘이 그 애굽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 애굽사람이 한 것을 왜 지금의 북이스라엘이 애굽 역할, 나쁜 역할 당하기만 하는 역할, 저주받는 역할을 하느냐? 그 이유가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율법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던 겁니다.

 

율법의 원칙을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율법의 원칙은 언약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에,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언약성취에 있어서 율법은 항상 결과적인 내용이 율법안에 담기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인간은 율법을 다뤄서 언약성취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율법을 보고서 늘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 율법대로는 살지 못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율법의 행함이 아니다. 이걸 되새길 필요가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받으니까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바로 율법에 대한 성과급, 축복이 자기 행함으로, 인간의 개입으로 얻어낼 수 있다고 곡해를 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인간과 율법 그 둘 사이가 아니라 율법 그 배후에 오직 하나님만이 해내신다는 언약과의 연계성을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한 거예요. 왜 거부했는가? 자기 자신이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내가 의도하고 연출하고 내가 기대했던 그것을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바라는 결과물을 내가 가지고 싶은 수단으로 율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테니까 나의 조그만 소원이라도 하나님이 들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율법을 앞장세워서 자기의 야심을 이루려고 율법을 사용한 겁니다. 그 야심 가운데 제일 잘못된 야심 야망이 뭐냐 하면, 내가 천국 가려는 야망, 바로 이것이 내가 복 받아야 된다는 것. 이 말은 뭐냐? 내가 나의 동일성을 계속 지속시키고 싶다는 그러한 야심, 그것은 바로 처음 유월절 날 애굽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황급히 놓아준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출애굽기 12장 33절에 나옵니다. 그날 밤, 유월절 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예측하거나 예상 못하게 맏이가 집집마다 다 죽었어요. 누가 다녀갔다는 생각, 천사가 다녀갔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채 집집마다 맏이가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그러니까 맏이는 이미 죽은 것이고, 자기 부모부터 시작해서 둘째, 셋째, 싹 다 여호와의 신이 죽일 참이구나, 라고 이해해서 맏이가 죽고 난 뒤에 “빨리, 후다닥 그분들 내보내라.” 그들을 내보내라고 재촉하고 속히 나가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 애굽사람들은 뭘 알았느냐 하면, 왜 자신들의 장자가 죽어야 되는지를, 뭘 잘못 건드려서 죽어야 되는지를 그들은 알았던 겁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할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공평하게 다 죽어야 되는데 어떤 언약, 약속이 하나 개입되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죽어야 되는데 약속 자체를 살려내기 위해서 같이 동반해서 살려내는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거예요.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 볼까요? 이스라엘이 장자만 살았잖아요. 그러나 장자만 살아난 것이 아니고 장자 덕분에 온 가족이 다 산 거예요.

 

그것은 무엇과 대조적이냐 하면, 애굽사람들이 ‘장자만 죽은 것이 아니고 이러다가 우리 나머지 다 죽겠다.’ 한 그 의식과 딱 대조, 대비가 되는 겁니다. 하나 죽었어도 나머지는 살았잖아, 라는 의식이 애굽 사람한테는 없어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맏이는 죽었다가 살았지만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살게 된 거야.’라는 의식이 있으면 안 돼요.

 

장자가 산 것은 그냥 장자 덕분에 다 산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통해서 ‘내 아들, 내 장자’ 출애굽기 4장에서 주께서 그렇게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 장자라는 것이 그냥 단순히 한 집안의 어떤 아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맏이가 아니라 그 집안의 운명을 저주스러운 집안이냐 아니면 영원히 복 받는 집안이냐를 가름하는 그런 주도권을 갖고 있는 아들이 우리 집안의 장자로서 새롭게 전환되어서 투입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투입되었는데 그 언약투입이 말로만 언약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장자라는, 맏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집안에 그 약속이 박혀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장자 중심의 이스라엘이라면 이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이스라엘에 있어서 출애굽의 사건이라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되고 영원히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옛날 유월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스라엘 출애굽사건이 되풀이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로 유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반복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유월절이라는 율법을 만듦으로써 그때 출애굽 상황이 아직도 죽지 않고 여전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주변 국가에 알릴 책임과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십자가 복음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는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을 이 사회에 하나의 사인으로, 징조로서 주께서 꽂아놓은 거예요. 성도를 ‘십자가 사건은 영원하다. 십자가 사건은 마감될 리가 없다. 영원토록 계속 간다.’라는 것의 증거용으로서 성도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나는 구원받았다,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면 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구원이 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원이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일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애굽화 되어서 멸망을 하게 되면서 주님께서는 여기서 애굽당시의 상황을 되풀이하는데 특히 오늘 본문 아모스 8장 8절에 보면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애굽 강같이 촐랑대다가, 그런 뜻이고 9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이렇게 해서 결국 마지막은 뭐냐? 곤고한 날이 된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들이 이점을 쉽게 생각하려면 시간의 끝과 공간의 끝을 미리 드론을 띄워서 보는 겁니다. 드론을 띄워서 드론에 장착된 카메라로 저 긴긴 시간의 끝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고 변화하는 이 공간, 지구라는 공간, 우주라는 공간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를 미리 언약이라는 드론 안에 있는 카메라를 통해서 미리 다 보게 만든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이 땅을 접수했을 때의 상황을 미리 투어, 여행해보는 겁니다. 드론 타고 끝까지 가보기, 끝장은 어떻게 끝장이 나는가? 이미 정답은 나와 있어요. 인간은 일체 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나타나는 곤고한 날, 출애굽 때 처음 유월절 상황 속에서 독자(獨子)가 나타났어요. 독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등장했잖아요.

 

마지막 모습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서는 것. 그게 드론이 보여주는 최후의 광경입니다. 그 독자에서, 막대기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겠지요. 그 독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주를 사랑하게 된 사람은 영원히 천국 복음을 받는 두 개의 상반된 그림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의 효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언약이 등장했을 때 왜 굳이 독자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데 있어서 애굽은 패대기 침을 당해야 되고 왜 이 세상은 작살나야 될 이유가 뭐냐? 곱게 조용하게 내 아들 데리고 가면 될 텐데 왜 세상을 그렇게 박살 내는 식으로 하느냐?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상 자체가 이게 가짜라는 사실을 출애굽 이후에 만들어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줘봤을 때 그 율법을 이스라엘사람들이 다룰 때 그 심보가 이스라엘사람들을 통해서 등장했고, 등장한 그 심보로 봐서 언약적으로 그들은 멸망했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이스라엘이 심판받았다는 말은, 반드시 복이라 하는 것은 심판과 더불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어렵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좀 더 쉽게 이야기하게 되면, 애굽사람들이 유월절 날 아주 혼쭐이 난 이유가 아까도 말씀했습니다만,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독자를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싸그리 그들의 나라는 완전히 멸망한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던 거예요. 하나님은 출애굽사건을 반복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배제하고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이끌어가는데 인간들은 율법을 자기가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의 의사, 뜻을 자꾸 개입하는 거예요.

 

그렇게 개입하면서 근원적인, 인간 본인도 몰랐던 근원적인, 반대하는, 저항하는, 언약에 배치가 되는 요소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노출되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가짜이면서도 진짜라고 자꾸 흉내를 내는 경향이 인간 내부에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원판이 없어요. 원판은 나중에 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판, 독자, 진짜 마지막 독자는 나중에 오거든요. 나중에 오기 전까지 앞에는 줄줄이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왜 가짜는 원본, 원판이 없어요. 그러면 인간세계는 뭐냐? 전부 다 베끼고 또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거예요. 계속 복제와 복제의 연속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DNA, 유전자 아닙니까? 계속 복제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 가상이 가상을 낳고 가짜가 가짜를 낳는 거예요. 그 가짜가 범람하는 세계에 진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가짜면서도 건방지게 가짜가 마치 진짜인 양, 원판인 양, 원본인 양 우기는 겁니다. 모든 것이 위조고, 허위고, 모방이고, 날조고 그런 거예요. 이 세상 어떤 것도.

 

예를 들면 쉬울 겁니다. 마라톤 선수 이봉주가 작년 1월부터 허리가 안 펴진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하루 시작하면서 아침에 늘 빠짐없이 산책을 했어요. 그 아침 산책이 뭐냐? 10킬로 미터 마라톤, 그게 산책이었어요. 매일같이 10킬로미터를 뛰는 거예요. 그렇게 씩씩하게 활동적이던 사람이 작년 1월부터 허리가 펴지지 않아서 아내가 부축하지 않으면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여기저기 다 가봤어요. 병원에서, 이건 선천적 병인데 병명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든 병원을 다 돌아다녀 봐도 도대체 병명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도 계속 병원마다 다니면서 병명 찾으려고 애를 쓰지요. 이게 뭐냐 하면, 가짜거든요. 가짜는 원판의 실체가 안 나타났어요.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일단 가짜밖에 없어요.

 

가짜밖에 없는데 실체를 찾아서 그 실체에 이름을 붙이고 병명이라는 것도 이름 붙이기에요. 이름을 붙이고, 병명에 이름을 붙이면 거기서 치료제 이름 또 붙이고, 그런 식으로 등장하게 되면 누가 병이 낫는다? 내가, 이 봉주 내가 병이 낫는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봉주 선수는 자기 자신이 실체라고 여기는 거예요. 이 봉주 선수 본인이 가짜인 증거가 뭐냐? 제가 이봉주 선수한테 이야기한다면 “당신의 병은 죽어보면 알아요. 지옥 가보면 압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합당해요. 뭔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짜와 가짜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짜만 자꾸 듣다 보니까 나는 병이 나아야 될 대상이라고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병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 봉주 선수가 병든 것은 이 봉주 선수 본인의 죽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 그냥 죽으면 돼요.

 

본인이 가짜면서도 살아야 된다는 가치를 억지로 붙이니까 이게 붙을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가짜가 가짜의사한테 찾아가서 내 병명이 무엇이냐고 자꾸 물어요. 그 가짜의사는 또 그 분야의 전문가 되는 가짜의사한테 뭐 홉킨스대학이 어떻고, 하면서 세계적인 유명한 대학의 논문을 뒤적여 가면서 가짜 치료법, 획기적인 치료법을 또 찾고 있어요.

 

진짜는요? 진짜는 어떤 게 진짜냐? 궁금해요? 5백 원 안 받습니다. 진짜, 진짜는 대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그분이 진짜예요. 하늘이 깜깜해지고,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떨어지고, 별이 떨어지고, 유황불이 떨어지고, 지구가 멸망하고, 천국을 만들고, 지옥을 만들고, 그런 권한자가 독자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유일한 아들이에요. 나머지는 다 가짜에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고 난 뒤에 그 율법에 본인들이 개입해서 율법 지키겠다고 나설 때부터 본인이 가짜였음이 들통난 거예요. 가짜니까 네가 바로 애굽이야, 하고 그들 이스라엘을 다 멸망시키는 겁니다. 누구 하나 건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독자인 것을 건지기 위해서.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의 영광’이라 하는 겁니다. 야곱의 영광, 하나님의 언약집단적단일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단일체를 야곱이라고 하고, 야곱은 언약이 뭉쳐진 거예요. 언약이 뭉쳐진 것. 언약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단독 작품이에요. 인간이 개입하면 안 돼요. 인간이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왜 개입하면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개입하면서 자기가 가짜인 것을 모르고, 진짜인 줄 알고 그 진짜의 값어치를 언약, 율법 지켜서 빼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 지켰으니 복 주세요.” 이런 식으로,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 천국 보내달라고, 이런 식으로. 가짜가 무슨 천국을 가요? 가짜가 죽어야지! 아……, 죽을 인간이 죽어야지 왜 죽을 인간이 천국을 갑니까? 안 받아줍니다. 죽을 인간은! 죽고 저주받을 인간은 지옥이 적당하지 천국은 적당하지 않아요.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스가랴 5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에바, 되나 말, 부피를 재는 말이지요. 6, 7절에 ”……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절 초반부에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스가랴, 이전보다 더 발달 된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드론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의 악이 세팅화되어 있어요. 어떻게 세팅화되어 있느냐 하면, 무거운 납에 눌려서 꼼짝달싹 못하는 식으로 세팅화 되어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세팅 아시지요. 햄버거, 콜라, 감자튀김, 케첩 주는 것. 더블 세팅 해서 7천 5백원 하는 그것.

 

그것을 천사가 와서 안에 있는 여자 말고 바깥에 있는 천사, 여자 둘이 달랑 들어서 심판의 장소 바로 바벨론으로 옮깁니다. 11절에 시날 땅으로 되어있는데 시날 땅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가마솥,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가마솥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가마솥에 들어앉아 있는 자들은 그냥 갇혀서 가짜면서도 진짜 찾는데 그들은 안달하고 있어요. 성경, 불경, 온갖 경전, 좋은 책들은 다 동원하고 착한 짓은 다 하면서도 가마솥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열 사람이 없어요. 왜? 손잡이가 없어서 그래요. 밀어도 너무 무거워서 열리지도 않아요. 그 지경이에요. 이게 가짜의 운명입니다. 세상에서는 악마가 이 가짜를 진짜로 변질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BC 14세기부터 11세기까지 있던 애굽의 왕들의 이름을 바로라 해요. 람세스도 그중 한 사람이지요. 그 애굽의 왕 바로가 죽으면 사람들은 미라를 만들었어요.

 

여러분이 망고 먹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껍질을 까고 망고를 써는 방법이 있어요. 또 하나는 껍질을 그대로 두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파내는 방법이 있어요. 미라가 두 번째 방법이에요. 이 세상을 진짜로 여기고 안에 있는 속을 빼먹을 것은 빼먹는 식으로 미라가 만들어지거든요. 미라는 껍질을 그대로 놔두고 내장이나 두개골을 파내면서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가짜가 아니고 다만 진짜가 오게 되면 껍질은 진짜니까 여기다가 진짜 부활의 날이 오게 되면 우리 임금님은 다시 여기에 채워진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왜? 우리의 왕 바로 에게 살아생전에 아부했듯이 죽고 난 뒤에도 영원히 사세요, 하면서 대대로 왕들에게 그런 아부를 하는 거예요. 그 미라에 나중에 영혼이 찾아와서 몸에 주어지게 되면 다시 복귀가 되어서 부활 된다는 거예요.

 

아, 이것은 참, 북한의 김정은이를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뚱뚱해서 미라가 굉장히 클 거예요. 이게 가짜거든요. 가짜가 진짜 흉내는 다 내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복제, 복사, 복제를 계속하는 거예요. 가짜가 가짜를 낳고, 가짜가 가짜를 낳고, 진짜는 없어요. 전부 다 가짜들만 있어요.

 

의미가 없는 게 아니고 의미가 너무 많아. 그래서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너무 많아요. 가짜 돌려막기. 가짜 돌려막기, 이 취미 하다가 저 취미 하다가. 나는 진짜인데, ‘내가 여기 있는 실체가 있잖아. 거울 보면 보이잖아. 손으로 만지면 이게 꿈이 아니고 있잖아.’ 이 실체가 가짜라니까요! 가짜!

 

이것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시체에요. 이 세상은 사체의 저장고, 쓰레기장이에요. 시체들의 무덤, 시체들의 수용소에요. 이 세상이, 인간의 역사는 진짜를 계속 남긴다는 이 거짓된 티를 내기 위해서 과거를 이렇게 일부러 과거를 복귀해놓아요. 대표적인 미국의 정책이 바로 Indian reservation, 인디언보호구역, 인디언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디언보호구역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 말은, “우리는 지금 옛날 인디언 있던 그 시절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세요. 옛날 그 시절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인디언 없는 시절입니다.”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인디언 기념관을 만드는 거예요. 지금이 진짜라고. 역사의 기능이 바로 그 기능이에요.

 

그러나 이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이, 가짜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냥 언약을 이용할 뿐이지요. 그러나 언약은 오히려 역사에 묻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를 점령해 버려요. 박살 내 버렸습니다. 드론 띄워서 마지막까지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 근거가 바로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했거든요.

 

여기 언약 나오지요. 언약이 진짜예요. 언약 아니면 다 가짜에요. 그리고 29절에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역사 없이 역사 속에 계속 작동을 하게 만드는 방법이 언약이라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입체구조에 여러분이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입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늘 반복되는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복하는 거예요. 죽으심이 부활한 거예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 죽으심 자체가 역사 안에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살과 피를 성령을 통해서 먹게 된 우리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 역사 속에 있는 겁니다.

 

제가 강남 유-튜브 강의에서 이걸 가지고 ‘성도는 예수님의 모세혈관’이라 했어요. 이 말은, 성도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린 것이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울 만날 때, 너는 왜 내 사람 건드리냐고, 왜 내 사람을 핍박했느냐고 하지요.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 건드린 것이 내 모세혈관을 건드린 거예요. 모세 신경을. 그런데 그게 눈에 안 보이잖아요. 왜? 사건이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언약이 유지되는 겁니다. 인간이, 가짜가 거기에 개입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바로 눈에 보이는 이 몸을 통해서 가짜, 이 몸을 가진 이 나, 가짜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 그 어린양의 피 흘리심만이 유효함을 우리의 남은 인생을 통해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증거 하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언약의 완성태가 살과 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드론 띄워서 볼 것 다 봤어요. 이 세상은 모두 다 짜가,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가짜, 주님의 의미와 가치가 붙을 수가 없어요. 가짜밖에 없어요. 가짜가 진짜라고 하니 더욱더 가짜에요. 그 가짜 속에서 우리는 이 가짜를 가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바로 그 사명을 우리 남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맡기신 겁니다.

 

이것인 바로 이스라엘 독자와 연계된 단일집합체, 야곱의 영광으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예언하신 그 예언대로, 모든 스케줄대로 진행한다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이 얼마나 가짜고 저주받을 세상인 것을 아울러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늘에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전체를 조망하면서 감사하고 시원하게, 가볍게,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