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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2강, 343강) . 불러내심과 불러주심, 성신과 성령 210302

정인순 2021. 3. 3. 14:46

342강 음성 동영상

34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42강-YouTube강의(불러내심과 불러주심 로마서 8:29)20210302-이 근호 목사


제342강, 제목은 ‘불러주심과 불러내심’. 똑같은 이야기인데 결과적으로서는 똑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불러주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입장, 성도 입장에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강조되겠죠.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어서 내가 구원받았다. 그런데 ‘불러내심’이라고 하면 어디에 강조점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콕 찍어서 자기 사람 만들었다’에 강세점, 엑센트가 있는 단어입니다.

불러주심과 불러내심이 결과적으로는 동일한데 왜 이것을 구태여 구분해야 되느냐. ‘불러주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는 게 되고 그 불러주심에 대해서 ‘예’라고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아담아 어디 있느냐’, ‘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인간이 말하는 것이 구원되는 데 있어서 자칫 필수적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어요.

주께서 불러줘도 우리가 반응을 안 나타내고 주께 합당한 고백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불러줬는데도 불구하고 탈락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거예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런 말씀 나오죠.

자, 여기에 대해서 동일한 말씀인데요,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여기서 강조점이 문 밖에서 주님이 두드리고 문을 열어주는 주체가 누구인가. 내 쪽에서 문을 열어줘야 되고 주께서는 강제로 문을 열 수 없고.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것은 주님 쪽에서 하고 나머지 문을 열어드리는 것은 내 쪽에서 해서 둘이 결합이 될 때 비로소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구원의 상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셈이 되죠. '하나님이 구원해줘도 내 쪽에서 reject, 거부해버리면 구원이 안 된다' 라는 본문처럼 들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활동에 있어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우선이에요. 말하는 것은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어눌한 사람들, 청각이 가버리면 말하는 것도 안돼요. 듣는 것으로 인하여 말하는 것이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 활동상.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청각이 시각보다 더 우선된다는 사람도 있어요. 보는 것이 확실하냐? 아니다, 듣는 것이 더 확실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들리는 것과 말하는 것, 그 전부를 주님이 하시는 것보다도 ‘기껏 말해주지 않으면 안 들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못 느낄 정도로 인간은 자체적으로 구원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이런 쪽으로 이 성경말씀을 이해해줘야 돼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인간이 얼마나 못났으면 굳이 말을 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말씀을 하셨으면 인간이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말씀에 대한 반응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태도 표명, 표방이 된다고요, 말하지 않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어떤 일도 결과를 안 남기고 그냥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어요. 따라서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은 문을 두드릴 때 문 안 열어줄 경우를 생각해서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없어요. 문을 두드리면 필히 문 소리 듣고 문 따고 열어주고 하는 것이 연쇄고리처럼 계속 야기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문 두드림이에요. ‘문 두드렸는데 내가 문 두드려봐야 인간이 호응을 안 해주면 호응을 안 해주니까 너는 구원 못 받는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나 이런데서 대학생들이나 초신자들에게 설교할 때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 본문 가지고 자, 하나님 쪽에서는 할 것 다 해줬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결단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여러분 소관이시옵나이다. 여러분한테는 지정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썩혀서 뭐할 겁니까? 썩히면 안 되죠. 활용하세요. 주께서 주시는 여러분의 자유의지, 이런 데 써먹으라고 호응을 해달라는 겁니다.

호응해주면 분위기 좋아지죠. 이 쪽에서 먼저 목사가 던집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장군멍군식이죠. 밀당이죠, 밀고 당기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느껴지십니까? 느껴집니다. 뜨겁습니까? 뜨겁습니다. 이성적으로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습니다. 할렐루야. 뭐 이렇게 끝나고. 분위기 후끈 달아오르죠, 분위기가. 사실은 그 분위기를 보고 싶은 거예요. 목회자나 소위 전도자가 그 분위기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 분위기 싸늘하면 자기 성과가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인간에서부터 인간이죠. 자기들끼리의 일방적 구원이에요. 주님은 생각도 안하는데 자기들끼리 성경말씀 활용해서 ‘성경말씀대로 했으니까 구원 주시겠지’라고 억지 부리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일종의 신앙가지고 노는 놀이죠, 흥미 위주고.

그런데 성경은 로마서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불러주심보다 불러내심이 우선되는 겁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했다는 거예요. 불러내시고자하는 확정된 뜻이 있었기에 그 다음에 나온 절차, 불러주심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마음에 이미 결정 난 게 있어요. 그 시작이 곧 끝입니다. 저 존재는 내가 구원하기로 이미 정해버렸으면 그 정함을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절차에 대해서 악마가 아무리 설쳐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불러내심이죠, 부르신 그들을 또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달라지게 하는 데에 있어서 세상 어떤 권세나 어떤 위협도 여기 있는 그 절차를 훼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이미 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로마서 8장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생각이 들어온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님 왔을 때 내가 응답해야지. 네,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전의 것을 성령이 와야 ‘아, 내가 하기 전부터 누군가 이미 결정지었구나’ 하는 사실이 성령이 와야 그것을 알 수가 있어요. 성령의 생각이 와야.

그래서 성령의 생각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확정 난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주님이 미리 아신 것을 미리 정하신 것을 불러주시고 영화롭게 하셔서 이 모든 작업이 주께서 저를 향하여 주께서 정해놓은 그 스케줄이 적용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 적용에 대해서 제 육신의 생각으로 슬퍼하거나 교만하거나 또는 안일하거나 짜증내거나 거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가 나오죠.

주의 뜻을 먼저 언급하고 확정된 뜻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그 거룩한 주의 일에 나의 악마적 생각과 내 모든 마음의 약함으로 인하여 영광이 훼손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끝은 시편처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듣는다 반응한다 말한다, 이것보다도 먼저 주께서 불러내심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343강-YouTube강의(성신과 성령 창세기 1:2)20210302-이 근호 목사


제343강, 제목은 ‘성신과 성령’. 구약에는 성령이 안 나옵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신이 나오고 하나님의 영이 나옵니다.” 그 말도 맞죠. 구약에는 하나님의 영이 나오고 여호와의 영 또는 하나님의 신이 나오는 건 맞는데 그 말도 맞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요. “(구약에는) 성령이 안 나옵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해도 괜찮은데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한다는 그것을 보고서 ‘아직 성령은 안 오셨다’ 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돼요. 아직 성령께서 오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천지창조하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해서 창세기 1장에 천지창조 된 그것으로 모든 하나님의 일이 마감되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감된 게 아니에요.

그럼 마감은 언제냐? 그것은 종말의 영이 와야 됩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끝장내는 영, 끝장났음을 알려주는, 통보하는 영. 그럼 끝장이라는 것은 뭐가 있어야 끝장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는 그 천지창조가 끝장나는 겁니다. 그리고 천지창조 그 안에 인간들도 들어있고 모든 피조물이 다 들어있죠.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한다는 말은 무슨 단계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없던 피조물들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단계를 뜻합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들은, 악마도 피조물이니까 악마도 포함해서 악마, 인간, 천사들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신의 조치에 의해서 관리대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신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그 기능을 내포하고 있는 피조물들만 이 땅에 창조되었다’고 설명해도 상관없습니다. 맞는 이야기가 돼요. 왜냐하면 피조물 이전에 신이 운행했으니까.

그럼 피조물 세계의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나님의 영이 자기가 만드신, 창조하신 세상을 끝장내는 그 스케줄, 그 과정을 나중에 마지막 영, 종말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서 성신이 관리한 그 모든 것이 성령이 와서 최종 정리정돈, 마감이 되고 완료가 되는 겁니다, 피조세계가.

따라서 피조세계는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처음 성신이 있을 때는 몰라요. 왜냐하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마감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씩은 드러나지만 최종적인 것은 안 드러났단 말이죠. 최종적인 것은 어디서 드러났는가. 바로 성령이 올 때 최종적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뜸들이지 않고 미리 말씀드리면 피조세계는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이에요. 왜? 심판이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단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죠.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주려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는지 아니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 장이 되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줬는지를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어떤 현장을 조사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세례요한도 물론 성령이 임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 그리고 예수님도 성령이 임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성령의 일을 했다는 거예요.

아까 성신의 기능은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관리하는 거죠. 성령은 모든 것을 마감 짓는 거예요. 종말에 심판하는 겁니다. 분류시키는 거예요.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분류시키는 겁니다.

최초로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구냐. 성령 받은 세례요한이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앞서지만 그러나 세례요한은 최초의 인물로 누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최초로 성령 받은 분이다. 성령을 받은 분이에요, 성신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을 마감하고 분류하고 결정짓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 성령이 하실 분으로서 세워놓은 분이라면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을 경우에는 전에 이 창조세계에서 성신이 하던 그 일, 모든 것을 관리하는 그것을 성령의 자리에서 성령의 완성된 위상에서 위치에서 세상 모든 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한량없이 성령이 나오시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성령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세례.

최초의 성령세례 받은 분이 예수님이고 성령이 하시는 그 심판의 기능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감했을 경우에는 이 마감했다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2장 3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을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부어주신다는 것은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지만 자기 사람에게 성령을 계속해서 부어주신다는 이 말은 비로소 피조물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최종적으로 드러난 거예요.

성령 받은 피조물, 성도죠, 성도가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게 하셨다는 말, 사도행전 2장 36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을 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 1절, 천지창조는 만들어졌어야 되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천국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셨다. 그것은 모든 것의 모든 관리가 다 끝난 상태, 더 이상 남겨진 게 아무 것도 없이 최종 확정된 그 무엇, 성령을 받은 사람만 그 사실을 알아요.

그러면 성도란 성령세례 받은 사람으로 최종 마감된 것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들이에요, 이 땅에서. 모든 게 마감되었다. 그러면 성도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저 사람을 천국 보낼 것이냐, 지옥 보낼 것이냐 어디로 분류해서 보낼 것인가를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런 관점에서 상대방을 만나는 겁니다. 가족을 대하는 거예요. 애들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내나 어떤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이 최종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

예수님도 바로 그런 관점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셨거든요. 내 백성,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아는 이것이 피조물로서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이에요. 지옥 가는 사람은 지옥 가서 알아요. 이 땅에서는 모르고 지옥 가서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것을 그때는 화들짝 놀라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죽은 자나 산 자나 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알죠.

그러나 성도는 그걸 미리 알았어요. 미리 안다면 이미 최종을 알았기 때문에 평소에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태도가 확연하게 성도 아닌 사람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피조물로써는 해야 될 것이 확정 났기 때문에 뭔가 확실하게 알게 됐다는 데에서 오는 그 안도감과 완성도, 만족감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겁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이미 확정 나버렸는데 허겁지겁, 주저주저, 당황스럽다, 어쩔 줄 모른다, 주여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러한 것들이 이제는 시답잖은 일들이 되어 버려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성도는, 성령 받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일만 생각하면 오케이입니다.